4. 호치민을 향하며
나는 베트남 축구 스타 르엉 쑤언 쯔엉(2015년 베트남 청소년 국가대표팀 출신으로 현재 강원도 홍보대사위촉)의 이름을 반복해 외웠다. 현지에서 친근함의 표식으로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문득 4년 전 패키지여행으로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찾았을 때 같이 간 한 분이 떠오른다. 우연히 만난 그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나하고도 연관이 있는 펌프업체 사장님이셨다. 특수성을 요하는 그가 만든 내산성 펌프제품이 내 근무처에 설치되어 있다.
그런 그는 과거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였다. 베트남에 대해 그는 내가 갖는 상념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그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맹호부대 전사로 푸캇하고 뀌년에 있었다는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나라에 대해 적개심은 없나요? 뀌년을 다시 가보고 싶은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지금도 진중하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는 우리나라 6,70년대를 대변하는 상징 적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처지로 전쟁에 나가 돈을 벌고 열심히 일하여 자수성가를 해 말 그대로 지금은 반반한 사업체를 거느린 나름 출세를 한 중소기업체 사장님,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가해자로서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신세다. 돌이켜보는 과거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다. 자칫하면 내가 죽는다는 산 경험이 처절한 자기 부정으로 잔재되어 남을 수 있다. 인간애 적 고뇌가 스멀스멀 찾아드는 늘그막의 회상, 이는 그의 성숙한 인간됨을 달리 말한다싶기도 하다.
전쟁은 큰 희생이 따른다. 단지 국가로서 뿐이 아니다. 희생에 따른 남모를 정신적 상실감 내지 피해의식은 개인에게는 실로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다. 어디 후유증이라는 게 신체적으로 말하는 다리 절단이나 고엽제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희생자와 피해에 국한될 것인가. 아무튼 나는 지금의 우리를 이루도록 헌신한 그들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또한 마음 한 구석 베트남에 대해 미안함도 갖는다. 쯔엉은 그런 마음에서 갖는 대명사이다. 그밖에도 기본 말이라 할 ~ 신짜오, ~ 깜언 ,~ 실로이, ~ 깨나이 ,~ 바오 니우 띠엔, ~ 엠어이 , ~ 쬬 깨나이 등등 서둘러 외워댔지만 좀처럼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이다지 베트남어는 어려운지 모르겠다. 듣자니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聲調)에 6성이 있다고 한다. 중국말 4성도 어려운데 이를 당해낼 재간이 내게는 없다 싶다. 그런데 코맹맹이 말 가까운 베트남어가 묘하게 로마자로 적혀 있다. 알고 보니 꾸옥 응으(베트남어: quốc ngữ/ 國語)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시도로부터 기인한다는데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가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낸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이번 여행은 배낭여행이다. 근무처 선배들과의 저녁 놀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한 분이 지금 달랏이라는 곳에 계시다. 달랏에는 연구용원자로가 하나 있는데 그로 내 근무처와 자매결연을 맺고 친하게 지내왔다. 2년 전인가는 우리 근무처에 축구팀이 친선축구 원정 차 곳을 다녀오기도 했다. 사실 너무 오래된 원자로이기에 새로 지을 원자로를 원자력 선진국인 우리가 차지할 흑심이 작용 안 한 것은 아니다. 일본도 부지런히 그들을 찾은 것은 그런 연유가 있다.
아무튼 그 바람에 석수동 박사님이라는 그분은 과거 달랏 대학교에서 무료특강을 하였었고 이를 계기로 퇴직을 하시자 그쪽에서 청을 해 잘은 모르지만 한국 국제 협력 단 해외봉사단(KOICA)의 한 일환으로서 2년간 곳에 나가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수 급료는 그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KOICA에서 주는 방식일 것인데 자원봉사인 만큼 큰돈일 수는 없다. 나는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고 부럽기 그지없다. 일찍이 미국서 배운 학문을 모국에 쏟아내고 남은 열정을 자원봉사로 베트남에서 보내는 그에게는 ‘이바지하다’라는 말이 온전히 들어맞는다 싶다.
그런 그는 건조기 때인 2월쯤 한 번 놀러들 오라는 말을 했었다. 그로 서둘러 우리는 여장을 꾸렸다. 이번여행은 지난 번 중국 심양여행을 같이 한 두 분(이규암박사/도재범박사)이 사모님을 모시고 가기로 하고 나와 김이사라 하는 분하고 박 박사님이 같이 동행을 하기로 해 도합 7명이 한 팀이 된 배낭여행이다. 우리는 지난 해 12월쯤 비행기 표 예약을 미리 해두었었다. 한 푼이라도 덜 들이자는 속셈도 있지만 딱 당해서 이번 여행 포기하겠다는 헛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비책도 곁들여진 것이다.
우리는 호치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달랏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 이틀을 묵은 후 차를 대절해 나트랑(나짱)으로 가서 남은 하룻밤을 채우며 놀다가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와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4박5일로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언어다. 어느 누구도 베트남어를 할 줄 모른다. 석박사님이 달랏에서는 안내를 해주겠지만 여타 여정에서는 전혀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차라리 혼밥에 혼술을 하는 여행이라면 실수도 자기 차지니 부담은 덜할 것인데 7명이 움직이는 배낭여행은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러기에 애초 호텔을 잡을 때 비록 별 셋이지만 관광지 근처로 잡기는 잡았다. 덜 이동하고 덜 헷갈리고 시간절약도 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여정을 꾸리는 중 일이 잘 풀리려는지 마침 호치민시에 사는 도박사님 친구 분이 호치민시 안내는 해주겠다고 하여 한 시름 덜기는 덜었다. 그래도 불안타 싶어 일행은 맛 집과 볼거리 등등 책임제로 할당을 했다. 나는 우리를 안내해줄 도박사 친구 분과 석 박사님에게 줄 고추장 된장 그리고 깻잎 등등을 챙겼다. 아무리 자원이 풍부한 베트남이라지만 고향의 된장과 고추장만 할까 싶어서다.
한 짐이 되는 무게감이지만 나는 행복했다. 여행은 말 그대로 행복을 찾는 길이다. 그간 잠재한 잠잠하던 나의 어느 마음 한 구석 가상함이 뒤따른다면 더할 것이 없는 터다. 일상의 찌든 때 같은 아쉬움과 지루함을 벗어난 자유, 일탈하여 다시 생기를 찾겠다는 희망 찬 마당에선 배려와 너그러움보다 더한 달달한 맛은 없다. 한국 진생캔디라며 주는 인삼 맛의 향기를 뭇 외지인들은 순도 높은 미소와 웃음으로 내게 되돌려 주곤 했다. 오히려 이는 그가 나를 대신 채워준 기쁨이다. 작은 미소가 전하는 동질감, 행복은 바로 마음에서부터 가까이 존재한다. 나는 그 흡족함으로 인삼사탕 같은 정서를 알알이 챙기며 외지에서 맞는 낯선 풍광과 생경한 맛을 달콤하게 때로는 오묘한 전설로 되새기며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이번에도 나는 행복 캔디를 챙겼다.
나는 하노이와 하룽베이를 뜻하지 않게 두 번 다녀오는 바람에 베트남 여행이 이번이 3번째이다. 한 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관광 차 갔었고 또 한 번은 앙코르 와트가 너무 마음에 들어 다시 찾는 길에 잠시 들렸었다. 당시 하룽베이에서는 ‘다금바리’라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비싸게 치는 생선회를 먹을 수 있었는데 나는 먹지를 못했다. 우리 돈으로 쳐 5만원이면 먹는 그 회를 콜레라가 겁이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 때 경험으로는 달러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환전 손해가 꽤 많았다.
베트남 돈이 즉석에서 이것저것 내키는 갈증대로 쓰니 좋기는 한데 문제는 나중 돌아올 때 거의 쓸 모가 없다는 데 있다. 아무튼 우리나라 시중 웬만한 곳에서는 베트남 돈 환전이 안 된다. 지난 번 여행길에 과거 외환은행이었던 곳에까지 가서 겨우 바꿨었는데 그 때 남겨둔 베트남 돈을 다시 챙겨 넣었다. 무려 2백2십 만동, 얼핏 많은 돈 같지만 베트남 돈 만동은 우리 돈으로 쳐 5백 원에 해당되니 웬만큼 바꾸면 엄청나게 큰돈으로 느껴지는 베트남 돈이다.
드디어 2월9일 나의 행복 찾기는 시작됐다. 글에 지치다 보면 가끔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곤 하는데 나로선 모처럼 비상구를 찾은 격도 된다. 그래서인지 전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설레는 기분은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새벽5시 40분 대전서 출발한 버스는 공항을 향해 달린다. 차안에서 뒤척이며 따져보는 베트남 말,1 = 못(Mot), 2 = 하이(Hai), 3 = 바(Ba), 4 = 본(Bon), 5 = 남(Nam), 6 = 사우(Sau), 7 = 바이(Bay), 8 = 땀(Tam), 9 = 찐(Chin), 10 = 므어이(Muoi)... 아직도 온전치 않다. 거기에 다시 떠오르는 이름 ‘르엉 쑤언 쯔엉’ 그 선수 이름은 겨우 외우기는 했는데 과연 그 이름이 전하는 마음을 그들이 알아주려나. 나는 베트남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들의 역사는 우리와 꼭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