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산 선산 설화
비밀히 전해 내려오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장포 주위에 거주하는 김해김씨 시중공파 사람들이 그의 가족들간에 비밀리 구전시켜 내려오는 은밀한 이야기이다.가산(주1)선산설화(嘉山先山說話)라 불릴 수 있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서낭신의 별거와 관련된 내용이다.
1700년대 장포 일대에는 허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그들은 장포지역에서 제일 가는 집안 중 하나였다.그들은 도림 뒷산 양지 바른 곳에 선산을 조성하였다.그리고 1790년(건륭56년) 선산에 묻힌 조상 한 분의 묘소에 입비하고 석물을 하였다.입비의 대상이 된 사람은 허씨 문중의 문장(門長)되던 사람으로 보인다.허씨들의 묘소 석물 건립은 장포 생긴 이래 처음이라 하여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당시 장동에 살고 있던 김흥표(1756-1822) 는 허씨들의 선산 입비에 큰 자극을 받았다.그는 도구(하우리)에 살다가 장동으로 분가해온 바 있었다.그는 그의 친형들과 협의해 그들(주2)도 선산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흥표가 나서서 선산 자리를 찾아보았다.그는 풍수를 보는 사람으로 부터 장동 서낭당 자리가 명당자리임을 알게 되었다.그러나 그곳의 서낭당을 옮기기 전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그는 서낭하나씨와 서낭할매를 쫓아 버리기 위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그 곳에 부정한 물건들을 묻어 두면 서낭신들이 이를 피해 다른데로 이사 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김흥표는 그 곳에 개뼈와 대소변 등을 몰래 묻어 두었다.그런지 얼마 안된 어느날 저녁 김흥표의 꿈에 서낭하나씨와 서낭할매가 나타났다.
서낭하나씨가 이야기 하였다.
[흥표 때문에 더 이상 여기에 살 수가 없어 이사를 가야겠오.나는 장동 앞 밭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가서 살 것이니 당신은 데르메로 가 살도록 하시오.흥표와 그 후손
들에게는 언젠가 쫓겨난 복수를 해주도록 합시다]
그런 뒤 그들 부부는 하얀 소복을 입고 나뉘어 갔다.
김흥표는 서낭하나씨 할매가 이사가버린 서낭당 자리에 부친 김정(1707-1760) 의 묘소를 이장하고 자신도 죽은 뒤 그 곳에 묻혔다.이후 김흥표의 후손들은 당제를 지내는데 참가치 말도록 가훈이 정해졌다.실제로 그들의 후손들은 선산 조성 후 200여년 동안 당제 참가는 물론 안의 집안의 아이들까지 당제 구경가는 것조차 엄히 금지되었다.김흥표의 후손들은 흥표가 뭍힌 가산 선산자리는 큰 명당으로서 격세(隔世)로 후손들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믿으며 선산을 지키고 있다.
주1 가산은 현재 김해 김씨 선산이 있는 산을 말한다.김해김씨 시중공파 족보
주2 가산 김해김씨 선산 조성자 (득표,운표,흥표,흥원)
41. 명당
풍수지리학 상 임자도의 주된 모습은 전쟁에 나갔다 이기고 돌아온 장군이 뭇신하들의 환호와 무희의 북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투구와 칼을 풀어 놓고 왕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왕비가 전쟁에 이기고 온 장군을 치하할 때 [둥 둥 둥 ] 개선의 북소리는 울려퍼지고 환호하는 군중들은 환호하였다.그리고 그 장엄한 모습이 천년을 두고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군에 해당되는 한박산의 모습을 패장군형(覇將軍形)이라 한다.한박산 뒤쪽에 투구와 칼에 해당하는 투구봉과 검봉이 있다.한박산 앞 멀리 방구섬(주1)이 있는데 이것이 옥녀봉이다.북의 일종을 뜻하는 방구섬은 이름에서 보듯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이후 간척 과정에서 본섬에 합쳐졌다.옥녀봉은 마치 옥녀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을 맞이하며 방구를 치며 위로하고 있는 모습이다.또 대기리의 망산이 왕비에 해당된다.
왕비 형국인 대기리 망산에 왕비혈이라는 명당이 있다.그 곳에는 신석기인들의 가족묘지인 고인돌이 다수 산재해 있으며 정유재란이후 임자도에 들어온 김해김씨 입도조인 김현회와 그의 직계후손들이 몇천년을 사이하여 사이좋게 안치되어 있다.
패장군인 한박산 꼭대기에도 한 자리의 명당이 있었다.그 자리에는 홍씨 집안에서 묘를 썼다.홍씨들은 이곳 명당의 덕을 입어 크게 번성했다.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번성의 근원이 그 묘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장을 추진하였다.이장하던 날 인부들을 시켜 파묘를 한 순간 묘속에서 말 한 마리가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그 말은 파묘 당시 묘 속에서 막 일어서려 하고 있었는데 앞발 한쪽은 미쳐 못 일어난 상태였었다.말이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홍씨 집안은 그 자리가 명당자리임을 알고 작업을 중단하고 원래대로 만들어 두었다.그러나 말이 나가버린 그 묘는 명당으로서의 효험을 잃었다.그 후 홍씨들은 가세가 크게 기울었으며 집안도 흩어져버렸다.
임자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큰산(大屯山)은 섬의 한 쪽에 지우쳐 있고 산의 모습이 험하여 임자의 주산(主山)이 되지 못하였다.그러나 거기에도 대장군혈(大將軍穴)이라는 명당이 있다.그 곳에 경주이씨 세장산이 있다.경주이씨 선산 아래쪽에는 연화도사무용성국(蓮花道士舞踊成局)이 있다.
임자도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인 불갑산은 동,남,북 세 줄기로 뻗어 내려 있다.이 세 줄기에는 각각 큰 명당이 하나씩 있다.동쪽 줄기(주2)인 [가산]에는 김해김씨 선산이 있다.앞에서 이야기한 장포 서낭당이 있던 자리이다.북쪽 줄기에는 임씨 선산이 있고 남쪽 줄기에는 최씨 선산이 있다.
이외에도 임자주위에는 여러개의 명당이 있다.
임자도 주위 섬 하나에 명당자리가 있다.그 섬의 모습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라 한다.
해중묘에 대한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임종을 앞둔 어떤 사람이 곁에 앉아 있던 부인을 바라보더니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한다.그는 부인이 나간 후 두 아들에게 바다 어느 곳을 일러주며 나중 자신을 그 곳에 이장해 주라고 유언했다.그러나 밖으로 나간 줄 알았던 부인은 멀리 가지않고 창 밖에 귀를대고 남편의 유언을 엿들었다.그녀는 남편이 말한 명당자리에 자식들 몰래 자기의 친정아버지 묘를 써 친정이 잘 되도록 했다 한다.
주1 장동과 대기리 사이에 있는 섬.과거 섬이었으나 지금은 섬이 아니다.
주2 동쪽 줄기의 한 봉우리인 석산에는 돌로 쌓은 축조물이 있다.이를 만든 이유는 그
곳이 툭 터져있으면 동네에 과부가 많이 나오고 부녀자들이 바람이 날 뿐 아니라
동네에 화재가 많이 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기보완을 위해 축조되었고 수시
로 보수되었다. 최근 보수는 6.25 직후 있었다.이는 장동 애촌회에서 실시하였는
데 애촌회는 6.25 후 장동청년들이 결성한 마을 단위 자치단체이다.
42. 표류
임자도 주변에는 고기잡이 배는 물론 선상(船商)이라 하여 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국제 교역을 하는 외국 배들로 붐비고 있었다.가끔씩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난 선원들이 파선된 배와 함께 임자도에 표착,구조를 요구하였다.임자도진의 관리들과 임자도 주민들은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며 입을 옷과 음식을 주어 일시 보호하다가 그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거나 조정의 명이 있으면 서울로 올려보냈다.이들 불행한,역설적으로는 운이 좋았던 방문객들에 대한 기록이 비변사 등록에 남겨져 있다.
1801년 2월 재원도에 중국인들이 표류해 왔다.관에 있던 비랑(備郞)이 밥을 먹여주고 구호해 주었다.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들이 관(館)에 이르렀을 때 관에 대령하고 있던 관리가 한 사람도 없었고 의복 등(주1)을 뒤늦게야 갖추어 주었다며 책임을 물어 읍의 수령인 임자도 첨사를 파직(주2)하였다.
1810년 3월 임자도근해에서 고기를 잡던 배가 침몰하여 어부 여러명이 익사하였다.이 보고를 받은 순조임금이 신하들에게 전교하였다.[몹시 측은하도다.그들의 처자를 불러다가 위로 해주고 규정된 구휼 외에 각기 더 도와주도록 하라.그리고 생전에 바치지 못한 환곡이나 신포 또는 연호 (烟戶)나 잡역이 있거든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주3)
1810년 11월에는 임자도 이흑암리 앞바다에 중국인 29명이 표류해 왔다.그들은 모두 중국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 사람들로서 상선을 타고 항해하다가 배가 깨어지는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임자도진에서는 그들에게 입을 옷을 만들어 주었다.그들은 육로로 귀향(주4)하였다.
1813년 중국인 행상 73명이 또다시 재원도에 표류해 왔다.그들이 싣고온 대추를 배에서 건져내었으나 모두 썩어 쓸모가 없었다.임자도 진에서는 의복을 지어주며 구호한 다음 서울로 올려 보냈다.서울에서 이들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문:표류하여 먼길을 오는데 날씨마져 추우니 병이나 나지 않았는가 ?
답:도중에서의 음식 대접도 후하였고 보살핌도 극진하여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였
으며 병도 안났으니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문:어디 사람인가 ?
답:복건성 천주부 동안현,남안현,보강현과 장주부 용계현,해증원 사람입니다.
문 :너희들은 민간인인가 ? 군졸들인가 ?
문:민간인 입니다.
문:모두 몇 사람이며 일행 중 익사자는 없었는가?
답:선원 50명에 객상 23명을 합하여 모두 73명입니다.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익사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성명과 나이는 ?
답:선주(船主) 황종례는 나이가 20이요,타공(舵工) 황장은 나이가 40,정경은 47,
수수(水手) 황속은 35,황이는 38,임화상은 43,왕품은 45,주종택은 30,진조는
52,오헌은 30,진사교는 24,증목은 47,황세는 53,진취근은 23,오지는 35,연침은
38입니다](주5)
1829년 11월 2일 술시 경 중국선 4척이 재원도 앞바다에 표류하였다.임자도진 첨사는 보고를 받고 재원도 영장(在遠島 領將) 진수운(陳秀雲)과 부장 등과 함께 표류선이 정박하여 있던 재원도 연미하(聯尾下)에 나아갔다.중국 배들은 강남성 소주부의 보산현과 통주,원화현에서 온 상선들이었다.선원들은 10월 중순 경 산동성 잠산 부근을 항해하던 중 바람을 만나 이곳까지 밀려 왔다 하였다.그들은 겨울 바람이 거세 지금 당장 돌아 갈 수 없다면서 재원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가 봄이 되면 돌아가겠노라 말하였다.(주6)
1831년 중국인 35명이 임자도에 표류해 왔다.(주7)
1856년 11월 17일 축시 경 중국선 1척이 임자도 이흑암리 앞바다에 표류해(주8) 왔다.그 배는 10월 21일 상해현에서 황두를 실고 26일 바다로 나왔으나 11월 2일부터 분 바람에 6일 동안 표류하여 이흑암동 앞바다 온구미에 이른 것이었다.중국배의 모습은 뱃머리가 낮고 배끝은 높은 형태였다.세개의 돛대 중 앞 돛대가 부러져 있었다.큰 닻은 끊어진 채였고 구명정으로 보이는 작은 배 한 척이 물에 잠겨 선체 아래에 처박혀 있었다.선원들은 모두 강남성 소주부 남통주 사람들로서 모두 11명이었다.그들은 머리를 깎아내고 뒷통수에 머리 한 가닥을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이흑암 동장 정성달이 이러한 사실을 임자도진 첨사 최문철에게 보고하였다.관에서는 그들을 일단 사옥도의 탑선포로 옮겨 음식과 옷을 주어 구조한 다음 돌려보내 주었다.(주9)
1880년 7월 1일 나주목의 세미를 실은 임대선 한 척이 바람에 떠다니다가 임자도 삼두리 앞바다에서 파선하였다.삼두리 동장 최준칠이 임자도 첨사 이석준(李錫俊)에게 이 사실을 급히 연락하였다.관에서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다에 빠진 곡식을 끌어올렸다.서류에는 배에 227석의 쌀을 실었다고 되어 있었으나 건져 올린 것은 겨우 83석에 불과(주10)하였다.관에서는 곡식을 빼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배를 침몰시킨 것으로 의심하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파선의 경위와 부족한 쌀의 행방에 대해 조사하였다.관련자 모두가 처벌 받았음은 물론 임자도진의 첨사 이석준까지 관할 지역내에서 배가 파선에 이르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징계(주11) 받았다.
1886년 일본인 3명이 임자도에 표류해 왔다.그들은 자신들을 일본배가 왕래하는 항구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옷을 만들어 입혀주고 타고온 배의 선재는 소각(주12)하였으며 그들의 뜻대로 해주었다.(주13)
1886년 7월 21일 오시 경에 삼두동 앞바다 전구미(箭仇味)에 외국인 3명이 작은 배를 타고 표착하였다.그들이 표착한 곳은 앞은 큰바다이고 뒤는 절벽이어서 성난 파도가 쉬지않고 두 섬 사이를 치고 있었다.부서져 상한 작은 배를 타고 상륙한 이국인들은 모두 남자였는데 그들의 머리와 옷은 모두 회색 빛깔이었다. 그 중 2명은 키가 18-20척 정도로서 큰 대나무를 꽂아놓은 듯이 크고 1명은 머리털이 쑥과 같이 엉클어져 혼란스러워 보였다.그들의 옷모양은 길다란 천으로서 허리띠는 허리 위에 있었다.삼두동 김세진(金世珍)이 임자도 첨사 김효원(金孝源)에게 급히 연락하였다.첨사가 그들과 글씨로서 의사를 소통하려 했으나 전혀 뜻이 통하지 않았다.단지 그들이 루주국(縷周國,러시아) 사람들이었음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주14)
이처럼 임자도 사람들은 바다에서 조난되어 구원을 요청해 오는 외국인들에 대해 기꺼이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었다.표류인들은 임자도 사람들의 정성을 다한 보살핌에 복숨을 구원 받고 자기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가 있었다.
주1 예에 따라 주도록 되어 있었다.
주2 비변사 등록,순조 1년,1801년 2월 19일 조
주3 비변사 등록,순조 10년,1810년 4월 2일 조
주4 비변사 등록,순조 10년,1810년 11월 21일조
주5 비변사 등록,순조 13년,1813년 12월 22일 조
주6 각사등록,영광지방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p38-39
주7 비변사 등록,순조 31년,1831년 1월 16일 조
주8 비변사 등록,철종 8년,1857년 1월 11일 조
주9 각사등록,영광지방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p102-117
주10 각사등록,영광군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p233-234
주11 각사등록,영광지방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p245-250
주12 선재는 소각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13 비변사 등록,고종23년,1886년 9월 26일 조
주14 각사등록,영광지방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p278-279
43. 유배인
섬지방은 고려시대 이후 원악유배지(遠惡流配地,주1)로 알려져 왔다.임자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조 이후 죄를 지은 관리들이 유배되어 왔다.지금까지의 기록상 밝혀진 임자도 최초의 유배자는 사헌부 헌납 유안(柳晏)이었다.그는 다른 사헌부 사람들과 함께 궁중의 의례 문제에 대해 왕에게 직언하였다가 탈이 났던 것이다.
1846년 10월 25일.유안을 포함한 사헌부의 간부들은 헌종임금에게 연명의 차자(箚子)를 올렸다.
[중궁전(中宮殿)의 문후(問候)를 구례에 의거하여 없애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곤전(坤殿)의 문후는 막중한 의절(儀節)입니다.아들이 아버지에게 아침 문후드릴 때 어머니의 기후가 어떤지를 살피지 아니한다면 이것을 어찌 정리(情理)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하들에 있어서 임금에 대한 관계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고례를 근거로 하여 중궁전 문후를 없애려 하십니까 ? 신들의 직분이 임금에게 선을 권하고 악을 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바라건대 거듭 세번 생각하셔서 뭇신하의 청을 굽어 따르소서]
헌종임금은 이를 읽고 [예에 관한 작은 일을 큰 일로 간주하여 마치 쟁집하듯이 하였다.심지어는 허무한 말까지 만들어 나를 핍박하였다.이는 나를 두렵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크게 화를 내며 이들을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친히 조사를 벌였다.그리고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치(주2)하였다.
[대간 김필(金弼)은 감사(減死)하여 고금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헌납 유안(柳 晏)은 임자도,집의 이노규는 진도군,장령 성용묵은 여도,장령 유태동은 지도,지평 나채규는 신지도에 각각 유배토록 하라] (주4)
유안이 임자도에 들어와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다가 언제 돌아갔는지 그 후의 일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다만 그는 임자도에 유배온 이후 임자도진에서 지정해준 임자도 내 누군가의 집에서 임자도진 수군 관리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감시받으며 생활 하다가 왕의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갔을 것이다.
지방관청에서는 자기 지역에 죄인들이 유배되어 오는 것을 싫어하였다.그것은 현이나 군에서 유배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조정에서는 죄인들을 유배시킬 때 변방지역 중 가급적이면 관청의 사정이 넉넉한 지역을 골라보내었으며 이러한 이유때문에 전라도 각지역은 국내 타지역 대비 상대적으로 많은 유배인을 받아들여야 했다.
주1 멀고 험한 유배지역
주2 헌종실록 제 13권 12년 10월,11월 해당일 조
주3 1846년,헌종 12년, 11월 1일
주4 이외에도 1883년 1월 20일 한희원(韓熙源)이라는 사람이 임자도에 유배되어 왔다.
그는 공문을 위조하였다가 발각되어 도망쳤다가 잡혀 귀양에 처해진 것이다.
각사등록,영광지방관련자료,영광향토문화연구회,p 255
Ⅳ내리막길에 살던 사람들
44. 나락의 시작과 백성들의 항거
조선 왕조가 말기의 난맥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 임금이 붕어한 후 세도정치가들은 순조와 헌종이라는 어리석었던 꼭둑각시들을 차례로 왕으로 내세우고 국정을 농단하더니 급기야는 강화도에서 나뭇꾼 한 명을 데려다가 옥좌에 앉혀 놓았다.서양 세력들의 동양 침략이 구체화 되어가는 어려운 시기에 가장 능률적이고 철저히 현명하였어야 할 조선말 국가체제는 불행하게도 왕조가 백성들을 어디까지 배신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에 모자람이 없다.
집권층이 무능하면 하급관리가 발호한다는 것은 너무도 숱하게 검증된 역사의 진리이다.또 중앙의 권력이 부패하면 지방의 관리들은 그보다 훨씬 더 빠르고도 영악하게 부패하는 법이다.국가체제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선용될 때는 백성들의 삶을 그들의 노력 이상으로 윤택하게 하지만 그것이 잘못 관리되고 악용될 때는 백성들의 삶을 도탄 속으로 밀어넣는다.
정조 이후 계속되는 세도정치는 맑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구멍이 막혀버린 연못과 같이 국가체제를 병들게 했다.조선 건국이후 수백년간 유지되어 오던 국가의 통치조직에 침윤되어 있던 왕권은 마치 사막에 뿌려진 휘발유처럼 급속히 증발되어 갔다.대신 무책임한 세도 권력을 정점으로 하고 이에 영합하는 지방의 관리와 관변인물들로 짜여진 권력 구조가 백성 위에 방향성을 띠고 작동하기 시작하였다.그 권력체계의 작동방향은 국가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백성을 살찌우는 쪽으로서가 아니라 탁한 연못속에서 헤엄치는 가물치와 붕어그리고 물풀의 관계에서 보이는 먹이사슬 논리로서 작동되었다.
말기의 아노미,그것은 집권층의 부패를 핵으로 하고 삼정의 문란(田政,軍政,還穀)으로 가시화 되었으며 거푸드는 흉년에 의해 가속화 되었다.흉년은 농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1848년 임자도에는 무신대황(戊申大荒)이라 불리우는 대흉년이 들었으며 이어 4년 후인 1852년에는 임자대겸(壬子大겸)이라는 흉년이 엄습(주1)했다.세도 권력과 말단의 관리들은 흉년에 아랑곳 없이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혹히 수탈하였다.흉년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백성을 배신한 국가체제는 흉년의 고통을 더욱 강하게 했다. 백성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삶의 근거지였던 농토로부터 떠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방에 귀양와 있던 정약용은 당시 관리들의 착취와 주민유리 실태에 대해 [나주와 흥양 지역 여러 섬의 인구는 10여년 전에 비하여 볼 때 1/3에도 못미칠 정도로 줄어들고 있다.이유는 관폐와 착취가 날로 심하여 모두 도산,도망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천재보다 관재를 더 두려워 한다.섬주민들의 소원은 고을의 서리들을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지방의 동요현상이 심해지자 세도권력의 정점에서는 위기를 느끼고 대책마련에 나섰다.그들은 최고 권력자나 핵심 정치인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말단 관리들의 부정에 대해 단호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들이 제시한 최초의 대책은 암행어사를 전국 곳곳에 보내 지방하급 관리들의 비행을 적발하는 것이었다.
섬지방에도 암행어사들이 출몰한다.
철종 2년(1851)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조운경이 파견되었다.그는 지역을 둘러보고 돌아와 나주목사 김재경과 전영광군수 권혐 등 여러사람을 벌 주도록 보고(주2) 하였다. 또 몇 년 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성이호가 파견되었다.그도 지역 시찰 후 임자도 첨사 최문철,전영광군수 김회명 등 우도 관내 주요 지방 수령 등을 벌주도록 보고(주3) 하였다.
연못 밑 바닥에서 썩은 짚 몇 단 건져올린다고 물이 맑아지지 않듯이 암행어사를 보내 부패한 관리 수천명을 적발해낸다 해서 체제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었다.부패의 근본원인을 다스리지 못한 암행어사 파견이라는 이 최초의 대책은 현대 각정부의 공안기관을 동원한 사정활동과 별다를 바 없으며 결국은 결국 미봉책으로 일관되다가 왕권자체가 국민들의 신임을 상실하여 왕조의 멸망으로까지 귀결되는 개혁책이 되고 만다.
관리들의 학정에 대한 조정의 대책이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알게된 백성들은 1862년 임술년을 고비로 민란이라는 직접적 실력행사를 택하여 항거하기 시작하였다.이 해의 민란을 [임술민란](1862,철종 13년)이라 한다.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이다.
임술년 2월.
경상도 진주에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다.이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임술민란의 불씨가 되었다.그들의 봉기는 민감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경상도에서는 개령,단성 등 15개 고을에서 난이 터졌고 전라도 지방은
함평등 9개 고을에서 일이 벌어졌으며 충청도에서도 9개 고을에서 소요가 일어났다.그리고 함경도,경기도,황해도에서 많을 때는 수 만 명,보통 수 천 명의 농민들이 참가하여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하였다.
전국의 농민들은 선도자의 뒤를 따라 몽둥이를 들고 자기가 살던 고을의 관아를 습격하였다.그들은 부패한 군수를 몰아내고 평소 악질적이었던 아전을 죽인 다음 조세,군포,환곡의 내용이 기록된 관의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그리고 읍권 (邑權)을 장악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사태를 안 조정의 설득에 의해 자진 해산하곤 하였다.그리고 나면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민란의 주동자를 처단하는 한편 민원의 대상이 된 아전이나 향임등을 파면하고 수령을 문책하였다.조정은 일이 없으면 다행이고 일이 생기면 양쪽을 다 처벌하는 쌍벌죄로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임자도는 농민란의 여파로 이에 연루된 유배인들을 받아들였다.
1862년 6월 22일,먼저 경상도 개령현의 현감으로 있던 김후근이란 사람이 유배되어 왔다. 그는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3년 동안 그곳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러 모두 1만 7550여냥을 수탈,착복하였다. 돈되는 일이라면 갖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렴주구를 일삼아대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관아로 난입 하였다.그들은 관리들을 쳐죽이고 김후근을 붙잡아 때려준 다음 그의 의관을 벗겨 불에 태웠다.
그들은 소리쳤다.
[3년간 도결로 남긴 것이 어디 갔는가.김후근이는 소송이 벌어지면 뇌물을 받아 먹었다.뇌물을 주면 소송에 이기고 뇌물을 주지 않으면 소송에 지는 판결이 도데체 사리에 맞는가.관리들은 사나운 승냥이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얼마나 숱한 침탈을 자행했는가.간교한 이서배들을 몰아내자]
조정에서는 사건을 주동한 농민들을 엄벌에 처했으며 현감 김후근을 파직한 다음 곤장 30대를 때리고 임자도에 유배하였다.
몇 개월 후인 1862년 9월 4일 이 번에는 경상남도 단성현의 양반 [김령]이라는 사람이 유배되어 왔다.그의 아들 김인섭은 과거급제 후 사간원 정언 등 중앙의 관직을 역임한 후 고향 단성현에 낙향하여 살고 있었다.그는 아들 및 지역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1862년 1월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고 지적하고 현감 임병묵에게 시정을 요구하였다.그러나 환곡을 둘러 싼 부조리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단성현의 선비와 현민들은 김령 부자의 뒤를 따라 그 해 2월 4일 현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장부를 불태우고 도망치는 현감을 붙잡아 마구 때렸다.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처리하도록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박규수는 사태를 조사하고 [이 사건은 단순히 수령된자의 통치미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정의 문란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불러 일으킨 사건]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조정에서는 현감 임병묵을 파직하고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시킨 다음 주동자 김령은 임자도로 유배하였다.김령은 8월 18일 단성을 출발하여 9월 4일 임자도에 도착하였으며 1863년 8월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주1 지도군지
주2 철종실록,1851년 4월 10일 조
주3 철종실록,철종 8년,1857년 12월
45. 병자 대흉과 정축 참화
국가가 어렵게 되면 풍년이라도 들어주어야 하는데도 하늘은 이러한 백성들의 염원과 반대되는 길을 갔다.시련이 계속되었다.1869년 기사대무(己巳大無)라 불리는 흉년이 들었으나 기사대무는 대재앙의 내습을 알리는 예고편에 불과하였다.그로부터 7년이 지나 진짜로 큰 흉년이 들었다.그 해는 조선이 일본과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고 개국을 단행한 1876년이었다.개항은 대흉과 함께 왔다.
그해 가뭄으로 인한 흉년은 영광,함평,나주,무안 등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가뭄의 서書]라고도 불릴만한 각사등록 전라감사 계록 등에 가뭄의 참상이 상세히 기록(주1)되어 있어 당시의 참상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
그 해의 가뭄은 모든 재앙이 그러듯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하고 시작되었다.
가뭄은 2월부터 시작되었다.3월 28일 비가 조금 내렸으나 나주는 한 번 쟁기질 할 물,무안 함평 등은 두 번 김맬 물을 얻을 정도에 불과하였다.4월 2일과 3일,이틀 간에 걸쳐 비가 내렸다.먼지만을 적실 정도였지만 간신히나마 모판에 물을 대어 볍씨를 뿌릴 수 있었다.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점차 가뭄이 심해지면서 논바닥이 갈라지자 백성들의 마음도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4월 25일 기다리던 비가 내렸으나 소량에 불과하였다.만들어진 모판은 가뭄을 이기지 못하여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였고 밭의 여물어가던 보리이삭도 누렇게 시들어갔다.백성들은 절실하고도 간절히 비를 바랐다.5월 15일과 16일 또다시 이틀간 비가 내렸으나 먼지만을 적실뿐이었다.[삼년가뭄에 비 안오는 날 없다]는 식이었다.관에서도 나섰다.그들은 영험하다는 곳을 찾아 기우제를 지냈다.그러나 허사였다.예년 같으면 모내기가 거의 끝나갈 시기인데도 아직 모를 내지 못하였다.모판은 거북이 등과 같이 갈라지고 밭작물은 시들어갔다.기다리는 비는 계속 소식이 없었고 해는 중천에서 더욱 뜨거운 열기만을 지상에 쏟아부었다.윤 5월 17일과 18일 잠시 소나기가 내렸다.눈이 화로에 내려 금방 녹아버리듯 땅을 잠깐 동안 적시고 마니 비를 바라는 갈증이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억지로 심어 놓은 모들도 윗논 아랫논 가릴 것 없이 말라죽어 갔다.밭의 곡식들도 가뭄에 찌들어 좋은 수확을 거둘수 없게 되었다.비가 당장 온다 하더라도 이미 때가 늦어버려 추수를 바라기 어렵게 되었다.결국 6월까지 비가 오지 아니하니 농사는 이제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그러던 비가 7월에 들어서야 찾아왔다.오지않아 속썩이던 비가 이번에는 동이로 붓듯 엄청나게 쏟아졌다.7월 10일,11일 이틀간에 걸쳐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작물이 타죽어버린 대지에 내린 폭우는 재앙을 몰고 왔다.겨우 남아 있던 곡식들은 물에 떠내려가고 바람에 넘어졌다.여기에 병충해까지 퍼져 농사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농사는 가뭄과 수해와 병충해로 작파되었다.
논곡식과 밭곡식의 수확이 아무것도 없게 되자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였다.사람들 눈에 천지의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들은 길거리의 아이를 보고 [저기 수탉이 있네]라고 했다.그것은 환시였다.먹을 것이 전혀 없어져버린 땅,그 곳은 어린아이가 닭으로 보이는 지상의 연옥이었다.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야했다.땅은 붉게 타들어 갔고 버려진 땅에는 갈대와 물억새 만이 자라났다.동네는 텅비었고 닭울음과 개짖는 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화는 혼자오지 않는다.재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정축년(1877).
[호열자]라고 불리던 콜레라가 임자도를 포함한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무섭게 창궐하였다.병자년 대흉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난 사람들은 손 써볼 겨를도 없이 전염병에 쓰러져야 했다.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하였다.호열자는 공포의 사신(死神),바로 그것이었다.
소설가 [박경리]는 그녀가 어렸을적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콜레라 창궐의 무서웠던 이야기가 그녀의 대표작 [토지] 집필의 주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고 회고한다.그녀는 [토지]라는 소설속에 이 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형상으로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면서 골목을 점령하고 마을을 점령하고 방방곡곡을 바람같이 휩쓸며 지나가는 병균.그들의 습격 대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었다.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았다.인심은 흉년의 유가 아니었다.'난리가 났다면 피난이나 가지' 하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희망을 미신에 걸어보는 것 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참으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도서지방과 인근 연해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하였다.섬지방의 콜레라 피해도 막심하였다.당시 섬 인구의 거의 절반이 콜레라와 굶주림에 사망하였던 것으로 추정(주1)된다.
가족을 잃은 어른과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떠돌아 다녔다.열 집 중 아홉 집이 빈 집이 되었고 열 곳의 전답 중 아홉 곳의 땅이 황폐해버렸다.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기었고 가꿀 이가 사라져 버린 들판에는 벼와 농작물이 모습을 감추었다.
지방 목민관들은 이러한 참상을 조정에 보고하며 대책을 촉구하였다.그들이 요구하는 특단의 대책은 주로 조세의 감면에 모아지고 있었다.
1878년 영광군수 박제교가 이 지역의 참상과 위기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병자 정축년의 큰가뭄은 읍이 설치된 이후 가장 심하였고 거기에다가 전염병이 더하였습니다.사람들은 큰 흉년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비참의 극에 빠져있습니다.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기고 들에는 벼가 없어졌습니다.열 집 중 아홉 집은 비어 있고 열 곳의 전답 중 아홉 곳이 황폐해 버렸나이다]
다음해 박제교 후임으로 부임해온 홍대중 영광군수 역시 지체없는 세금감면 등 대책마련을 계속 호소하고 있다.
[영광군은 옛날 위엄이 있을 때에는 풍악의 고향으로 불렸습니다.고기잡이와 염전으로 집집이 풍요롭고 땅은 기름졌으며 의식이 원래 풍족하여 세상의 변화가 격심하여도 편하게 농사를 지었습니다.그런데 병자 정축년이 지나간 이후 들판의 한 해 곡식은 남김없이 사라졌고 혹독한 전염병이 돌아 비축하였던 것조차 없어졌습니다.옛날의 기름진 땅은 졸지에 황무지가 되어 있어 그 쓸쓸한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슬퍼져 마음이 울적하나이다.진실로 백성들이 모여서 땅을 경작하지 않는다면 읍이 읍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병정 이태의 상처는 조세감면 정도의 지원으로 치유될 수 있는게 아니었다.병자정축의 상처는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회복되었을 정도로 넓고 깊은 것이었다.
주1
각사등록,1876년 3월 28일
각사등록,1876년 4월 3일
각사등록,1876년 4월 26일
각사등록,1876년 5월 22일
각사등록,1876년 윤 5월 12일
각사등록,1876년 윤5월 20일
각사등록,1876년 6월 8일
각사등록,1876년 6월 25일
각사등록,1876년 7월 17일
비변사등록,1878년 7월
각사등록,비변사등록,1878년 8월 27일
각사등록,1879년 3월
각사등록,1879년 3월
각사등록,1879년 4월
각사등록,비변사등록,1879년 4월 10일
각사등록,1979년 4월
각사등록,비변사등록,1879년 6월 11일
각사등록,1879년 6월
지도군총쇄록,1896년 7월 7일
주2
섬지방의 인구가 거의 반이나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임자도 장포김문 입향조 김현회 후손들의 족보를 검토함으로써 추정해 볼 수가 있다.장포김문 족보에서의 절손자 통계이다.
+-----+--------+--------+-----+--------+--------+-----+--------+--------+
|세대 | 후손수 |절손자수|세대 | 후손수 |절손자수|세대 | 후손수 |절손자수|
+-----+--------+--------+-----+--------+--------+-----+--------+--------+
| 1대 | 1 | 0 | 2대 | 3 | 0 | 3대 | 7 | 0 |
+-----+--------+--------+-----+--------+--------+-----+--------+--------+
| 4대 | 13 | 0 | 5대 | 27 | 1 | 6대 | 31 | 5 |
+-----+--------+--------+-----+--------+--------+-----+--------+--------+
| 7대 | 42 | 21 | 8대 | 33 | 5 | 9대 | 59 | 4 |
+-----+--------+--------+-----+--------+--------+-----+--------+--------+
입도조 김현회의 7대 손이 호열자 창궐을 맞았던 세대였다.표에서 보듯 7대 42명 중 50%에 달하는 21명이 절손되었다.이들 절손자의 대부분은 콜레라에 걸려 어린 자식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7대를 전후한 5,8대의 경우도 상당한 절손자가 나오는데 이들 중 상당수도 호열자에 희생되었을 것이다.장포김문의 경우를 전남 서해안 섬지방 전체에 확대 해석한다면 당시 콜레라에 의한 희생자수는 섬지방의 50%를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로 김현회의 7대손 김찬실(1824-1895)은 4형제 중 장남이었으나 그는 세 아우와 그들의 가족 모두를 콜레라로 잃고 만다.
46. 출구의 모색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하였다.그들은 암행어사 파견보다 더욱 강력한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지방의 행정체계가 부분적으로 개편된다.이의 일환으로 섬지방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1891년 나주목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한다 하여 나주군 산하 자은도,장산도,압해도를 영광군으로 이속시켰다. 의정부가 왕에게 건의하였다.
[나주의 자은,장산,압해 등 세 섬은 본래 자그마한 섬으로 본아(本衙,나주목)와는 거리가 멀어 백성들의 가난함은 처량할 정도입니다.그런데도 읍진(邑鎭)의 하속(下屬)들이 제멋대로 백성들을 약탈,불쌍하고 죄없는 백성들이 봇짐을 싸 줄을 이어 떠나가고 있습니다.이곳을 변통해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니 이 세 섬을 부근의 영광군으로 이속시키도록 하십시오.그리고 또 다시 읍속들이 백성들이 침해하고 약탈하는 일이 발각되거든 엄하게 징계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게 하며 그들을 단속하지 못한 수령은 엄중히 다스리도록 하소서](주1)
그러나 사태는 보다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요구되는 방향은 [제폭(除暴)]이었다.이미 조선의 국가 지배체제는 백성들에게 폭력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그러함에도 불구 조정의 대책은 항상 국민의 여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백성들의 저항은 더욱 조직적으로 변모되어갔다.
민본주의와 농업입국을 양대 이념으로 하여 유지되어 왔던 조선왕조는 연속되는 흉년으로 농민이 무너지고 세도정치로 민본주의가 무너졌다.절망한 농민들은 병자년 대흉으로부터 18년이 지난 1894년 스스로의 출구를 찾기 위해 고부백산에서 봉홧불을 피워올리고 인내천이요 제폭구민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민들이 농민군을 조직하여 전봉준의 영도 하에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였다.그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대오를 정비한 다음 북진을 거듭하며 서울로 향하였다.그들 앞을 막아선 관군들은 조선의 조정만큼이나 무능하였다.연전연승이었다.조정과 중앙 관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청나라에 이의 토벌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였다.유사이래 민란을 장악하기 위해 외국군을 불러들인 조정은 이것이 처음이었다.이미 조선의 집권층에게 자기나라 백성들은 적군보다 못한 대상이었던 것이다.청나라가 들어오니 일본군도 따라 들어왔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였다.그 해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고 이듬해인 1895년 3월 29일 교수되었다.전국적으로 자행된 수천명 농민군 처형을 끝으로 동학 농민전쟁은 끝이 났다.
주1 비변사 등록,고종 28년 신묘 1891년 2월 11일 조
47. 임자도진 폐쇄와 조선 8도 체제의 해체
농민전쟁의 실패로 서세동점의 시대 우리민족에게 주어졌던 최후의 기회도 사라졌다.조정에 의한 국난극복도,백성들에 의한 출구 모색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나라와 백성의 운명은 외세의 도마위에 올려지게 되었다.길고 긴 좌절과 해체의 시작이었다.나라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갔으며 임자도민도 [조선 패러다임의 해체]라는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해체의 첫 물결은 임자도진 폐지로 나타났다.1895년 임자도진이 인근 여러 수군진영과 함께 폐지(주1)된 것이다.조선을 장중에 넣은 일본은 늙은 호랑이를 잡은 포수가 그의 이빨과 발톱을 뽑는 것처럼 조선의 3도 수군통제사영과 각급 수군진영을 일제히 폐지하였다.남해에서부터 서해안까지 겹겹히 설치되어 있던 국가의 담장이 무너진 것이다.
진 폐지 이후 임자도진 최후의 첨사 김동숙(金東肅)과 수군 장졸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자기 갈 곳을 찾아 떠나갔다.그들이 진을 나오며 우측길옆에 세워져 있던 그간 이곳에 부임하였던 첨사들의 유애비(遺愛碑)인 철비와 석비들을 쓰다듬으며 아쉬워 하였다.진의 건물들이 그들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그들 건물에는 수정헌(修政軒)과 쌍백당(雙栢堂)이라는 제영문을 적은 편액이 걸려 있었고 특히 쌍백당에는 시판(詩板) 하나가 걸려 있었다.수정헌 앞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와 쌍백,뒤뜰의 청송과 취죽(주2)도 그들을 향하여 가지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국가 에너지의 충만정도는 변방 국가기관의 실태에 민감히 반영된다.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힘인 국방력의 경우 더욱 그렇다.국가가 흥륭기에 접어들면 그 군사력은 내부로부터 변방을 향해 뻗쳐오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급속한 위축현상이 목도된다.어느 나라이던 국가는 국력신장기에 국방 시설물을 열심히 세운다.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상징적 역할을 수행할 뿐 국방을 위해 직접 사용되는 것은 드물다.가지고 있는 국방력을 모두 소진하고 멸망한 나라는 거의 없다.차라리 그런 나라는 행복하다. 조선왕조는 고려말 동요하는 변방의 질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탄생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임진왜란이라는 국난시에도 변방의 일시적 혼란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나 붕괴의 조짐까지는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왜란이후 임자도진 설치등 변방의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다.이는 내부에서 솟아나는 체제의 생명력이 외부의 상처를 충분히 치유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그러나 국가의 붕괴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왜력에 의한 수군진영의 폐지가 있게 되었다.임자도진의 폐지는 체제의 해체를 상징할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체제가 생명력을 다하였음을 말한다.
수군진영 해체에 이어 조선 8도체제가 해체된다.민란 빈발에 대한 대책으로 지방 행정제도의 획기적 개편이 추진된 것이다.행정구역을 세분화함으로써 백성들과 수탈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권력의 누수현상을 줄이려 한 것이다.
도(道) 대신 부(府)제가 실시되었다.
1895년 조선초 이래 내려오던 조선 8도는 23개의 부로 세분화되었다.전라도는 전주부,나주부,남원부,제주부 등 4개로 쪼개졌다.이 때 임자도는 영광군과 함께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그러나 [23부제]는 오래가지 않았다.그 이유는 중앙에서 23개의 부를 직접 관리하기에는 너무 수가 많아 번거로웠던 데 있는 것 같다.다음 해인 고종 33년(1896) 8월 23부제가 폐지되고 전국을 8도와 23부의 중간인 13도 체제로 재편하였다.
임자도도 이 무렵 행정체계의 변화를 겪는다.
임자도는 1870년대까지만 해도 영광군 염소면에 소속되고 있었다.민호 수가 473호인 임자도는 그때까지 면으로 승격되지 못하고 장동리,이흑암동,삼두동 등(주3) 마을의 집합체로 남아 있었다.그러던 임자도가 1893년 경에 이르면 염소면 소속에서 벗어나 [임자진]이라는 독립 행정구역으로 되어 영광군에 직접 편제(주4)되었다.통제의 강화였다.
주1 지도군지 건치연혁
주2 지도군 총쇄록,1897년 4월 7일 조
주3 이것은 당시의 호적단자 등에 의해 확인된다.
1848년 김만추라는 사람이 영광군 염소면(鹽所面) 임자 이흑암리 제 11통 제 3호
에 거주하고 있었다.1866년 김치종이라는 인물은 영광군 염소면 임자 장동리 제 4
통 제 1호에 거주하고 있었다.1878년 김찬실이라는 인물이 영광군 염소면 임자 장
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주4 1893년 발행된 김찬실이라는 사람의 호적단자에 의하면 그는 영광군 임자진 장동
에 거주하고 있었다.그의 호적단자는 회산리 거주 김영소에 의하여 보관되어 있
다.
48. 지도군 설치
지방에 대한 통제강화의 일환으로 전남 서해안 도서지방에 대한 행정구역 개편문제가 또다시 검토되었다.역사적으로 도서지방 행정체계 문제는 이를 인접 육지에 소속시켜 관리해야 한다는 [육지 통합론]과 도서로만 된 별도의 행정구역을 설치해야 한다는 [도서 분리론]이 팽팽히 맞서 결론이 나지않아 왔다.통일신라 시대는 [도서분리론]을 택하여 이곳에 압해군을 설치하고 압해군 아래 도서현을 두고 주민을 통제했다.그러나 고려 이후 조선말까지는 [육지 통합론]을 받아들여 이곳 섬들을 인근의 영광 나주 함평 등지에 각각 소속시켜 관리해왔다.
조선 중기 영조 때 부교리(副校理) 황정(黃晸)이 [도서 분리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황정의 상소 내용을 보면 [육지 통합론]과 [도서 분리론]의 논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금성(錦城,나주)은 지역의 넓이,인민의 수효,논밭의 많음이 8도에서 으뜸입니다.원래 이 고을은 옛날 금성,제남,회반,복룡,여황,영산,장산,압해 등의 8개 군현을 합쳐 하나의 주(州)로 만들었습니다.육지에 있는것이 6개현이요 섬으로 된 것이 2개현입니다.섬 중에는 압해와 장산도가 큰 섬이요,그 밖에도 서해안 부근에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는 섬이 칠산에서부터 해남 우수영까지 모두 57개나 됩니다.큰 섬은 둘레가 100여리나 되고 작은 것도 사오십리는 됩니다.이들이 육지와 풍랑으로 막혀 있고 지역이 완전히 달라 비록 나주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풍기와 습속은 마치 이역(異域)처럼 다릅니다.그래서 이곳의 섬들을 모아 나주와는 별도의 고을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있어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별도의 고을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해로(海路)의 관방(關防)은 국가가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바 그 곳은 천리나 멀고 바람이 차가운 곳으로 염려스러우니 큰 진영 하나를 섬 안에 두어야 한다.그리고 나주는 웅대한 고을이니 육지만 관할한다 해도 그 번거로움을 이기기 어려운데 어떻게 섬백성들까지 손길이 미칠수 있겠는가.차라리 수륙 양쪽에 고을을 나누어 두고 각자가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다'하고 주장합니다.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초(國初)에 관을 나누고 읍을 설치함이 다 뜻이 있어서였는데 이제 갑자기 변혁을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비록 설치 초기에는 다소간의 유익함이 있을지 몰라도 폐단이 적지않게 생길 것이므로 예전 대로 두는 것이 좋다'하고 주장합니다.
대저 나주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밑에 있던 여러 섬들을 떼어 내는 것이 섭섭하여 지금껏 망서리고 있으나 나주목사가 되어 조금만 생각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별도의 고을을 설치함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주1)
그러나 영조는 이에 대해 [도서에 별도의 고을을 두더라도 어차피 통제에 문제가 있고 또 섬에 파견된 자는 힘없어 밀려난 자가 대부분이 될 것이기에 오히려 다른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면서 황정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로써 [도서 분리론]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도서분리론]이 갑오경장(1895년) 이후 행정체계 개편작업 과정에서 다시 제기되었다.일부 신하들이 [여러 섬들이 인접한 내륙의 군현에 각각 소속되어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많고 왕래의 불편과 섬주민들에 대한 인근 내륙 군현민들의 멸시,과중한 세금,관리들의 토색질 등으로 어려운 지경(주2)에 처해 있다.전라도 각 군에 소속 되어 있는 도서들을 2개 구로 나누고 각 구에 육지의 관찰사에 해당하는 순찰사를 배치하자(주3)]고 주장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시찰위원을 전라도에 파견(주4)하였다.그리고 다음해인 1896년 그들의 현지 실사 보고를 토대로 마침내 전라도 소속 도서들을 3개로 나누어 각각에 별도의 군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이 때 생겨난 군이 지도군,완도군,돌산군이다. 지도군에 소속되게된 섬들은 전주,나주,남원 관할하에 있던 섬들이었다. 지도군의 설치에 이어 그 해 8월 27일에는 지도군의 아래에 16개의 면(주5)을 두기로 하고 그 세부 구역을 정하여졌다.
주1 비변사 등록,영조7년 1731년 5월 3일조
주2 지도군 총쇄록,1896년 2월 1일 조
주3 지도군 총쇄록,1895년 2월 11일 조
주4 지도군 총쇄록,1895년 4월 6일 조
주5 16개면:현내,임자,낙월,사옥,선도,위도,고군산,압해,자라,하의,기좌,안창,암태,장
산 흑산,자은면.지도군 총쇄록 병신년 8월 27일 조
49. 지도군 초대군수 오홍묵
오홍묵(吳宖默,1833 - ?,주1)이 지도군 초대 군수로 임명되었다.그는 강원도 정선군수,자인현감,함안군수,경상도 고성도호부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고종임금은 지도군이 설치되기 고성도호부사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그를 불러 들여 말했다.
[그대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여러번 일을 맡아 수고하였고 그대의 치적은 곳곳에서 칭송되고 있다.그대가 작년 고성도호부를 다스린 이후 다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아직까지 기회가 없었다.전라도 각 섬들이 바다에 산재하여 있으나 이 섬들은 육지의 각 군에 소속되어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가까운 군에 소속시키다 보니 여러가지 폐단이 생겨났다.금번에 섬사람들의 근심을 덜어주고자 전라 좌우도의 각 군에 소속되어 있던 도서를 나누어 순찰 1인씩을 두고 육지 관찰사의 도움을 받아 섬주민을 보호토록 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그러니 이런 뜻을 헤아려 그곳에 부임토록 하라]
이러한 고종의 지시는 그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우선 새로 생겨난 지도군은 궁벽한 바닷가에 있는 군으로서 가면 고생이었고 또한 동학 농민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있는 상황에서 일선 군수를 맡는다는 것이 별로 마음내키는 일이 아니었다.그는 간곡히 사양하였다.
[저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고 몸도 쇠약하여 임금의 성은을 먼 데까지 전할 수가 없습니다.저보다 훨씬 슬기로운 자가 많을 것이오니 적임자를 찾아 임용해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러나 1896년 1월 22일 지도군수에 임명되고 말았다.그의 나이 64세였다.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여러 통로를 통하여 사의를 표명하였다.그렇지만 그의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부임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임자도진의 첨사를 지낸 바 있던 김동숙(金東肅)이 그를 찾아왔다.김동숙은 그에게 [상경하다가 잠시 지도에 들렀습니다.그 곳에서 새 원님이 오신다는 것과 어떠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지도의 관아 건물이 불비하여 비좁고 무너진 곳이 많아 부임하시면 어려움이 많으실 것입니다]고 말하였다.깝깝한 일이었으나 부임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된 그는 할 수 없이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정무를 보고있던 임금을 찾아가 부임인사를 하고 5월 8일 뱃길로 한양을 출발하여 8일만인 5월 15일 지도 윤량포에 도착(주1)하였다.
그가 군청소재지였던 전 지도진 건물을 찾아가 보니 상황은 짐작보다 훨씬 나빴다.집무해야할 동헌은 말만 여섯 칸이지 실제로는 네 칸에 불과하였고 동헌의 담장들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춘설목으로 받쳐 놓고 있었다.건물은 거의 썩었으며 진흙벽은 허물어져 있었고 조금 성한 곳은 바람구멍이 뚫려 있었다.방안에는 개구리 몇마리 가 팔딱 팔딱 뛰어다니다 그가 나타나자 [웬 놈이냐] 하는 표정으로 치켜올려 보고 있었다.
그는 화가나 주위 관속들을 책망하였다.[내가 군수로 임명받은지도 벌써 5개월이나 지났다.아무리 섬이라고 하지만 그 동안 사또가 거처할 방 한 칸 갖춰놓지 않았단 말이냐] 그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그는 지도에 부임한 직후의 느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도민들은 어리석고 과거 진이 설치되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의 규칙(鎭規)을 지키고 있었으며 관의 높고 낮음도 구분하지 못하였다.재물은 빈약하였고 어염업이 풍요롭다 하나 육지의 뽕나무를 길러 베짜는 풍요로움에 미치지 못하였다.바다를 건너다녀야 함은 평탄한 육지에 비하여 험난하기 이를데 없었다.섬 주민들은 섬 지방을 전관하는 관청이 없어 타지 사람들로부터 기만과 없신여김을 받아야 했으며 토색질을 당하여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진실로 도서 지방의 실정은 '봄날 그늘진 응달과 같았고 햇빛 아래 뒤집어 놓은 물동이의 속'(方春之陰谷 太陽之覆盆)과 같았다]
그러나 오홍묵은 이러한 여건에서도 그의 소임을 완수하려 하였다.
부임한지 8일째 되던 5월 23일 들판에 나가보았다.농부들이 때 마침 내린 비속에서 모를 심고 있었다.그는 일하고 있는 남자에게는 돈 4푼을,여자에게는 바늘쌈지 4개씩을 나누어 주며 [농사의 근본은 부지런한 것이다.일찌기 김을 매고 북돋고 밭을 갈며 밖으로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안으로는 부를 축적하여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것이니 어찌하여 일각을 소홀히 하겠는가] 하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그 후 틈틈히 군내의 서재를 들러 학동들을 훈계하고 양사재를 지어 학풍을 진작시켰다.특히 그는 고질적으로 만연되어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던 민폐를 제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스스로도 조심하였고 관속들에 대한 단속도 추상과 같았다.그는 자기가 부임한 이래 백성들의 편의에 따라 공무를 수행하여 백성들의 한탄소리가 없어졌다고 자부(주2)하였다.
그는 군정을 수행함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아니하였다.자신의 뜻보다는 백성들의 편의를 더 중하게 생각하였다.오늘에 있어서도 보기드문 민주적 지도자로서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지도 감정동 앞 포구 덕기(德基) 땅에 오래되어 못쓰게 된 둑 하나가 있었다.군이 설치된 이후 일부 백성들이 다시 수축하기를 청원해 왔다.그가 현장에 몸소 가보니 쌀이 30석은 족히 나올 만한 곳이었다.그는 재수축을 결심하고 동원할 인부와 공사감독들을 각섬으로 부터 차출하여 1897년 3월 8일 공사를 시작하였다.그는 그날 생겨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각(申刻)에 관묘(關廟,관우의 사당)에 가서 고유(告由)를 하고 덕기(德基) 둑에서 치성을 드린 후 일을 시작하였다.그 때 많은 백성들이 모여 말하기를 우리 섬은 본래 소금을 구어 살아가는데 지금 이 둑을 쌓으면 염전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물론 제방을 쌓으면 농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을 모르는 바 아니라고 한다.백성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듯 보이기는 하나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부득이 일을 멈추었다.근본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어서 두려워 할 바는 아니나 일을 중단하는 것 역시 백성을 위하는 것이니 어찌 일을 강행할 수 있겠는가.명령을 내려 백성들을 돌려 보내고 잠시 쉬는 중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홍묵은 초대군수로서 임기 중 어려웠던 여건에도 불구하고 권농과 흥학,풍속의 순화,관례화 되어있던 부조리 제거에 큰 업적을 남기고 1897년 5월 25일 여수군수에 임명되어 지도군을 떠나갔다.
오홍묵은 지도군수로 재직시 보고 느낀 일들을 날짜 순으로 기록한 글을 남겼다.그 책의 이름은 [지도군 총쇄록](智島郡 叢쇄錄)(주3)이다.그곳에는 그가 지도군수로 임명받을 무렵인 1895년 2월 11일부터 여수군수로 부임하기 위하여 지도를 떠나게 되는 1897년 5월 17일까지의 정무와 일상사가 수록되어 있다.그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기록을 남겼는지는 분명치 않다.그러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그가 면밀하고 다양한 내용의 기록을 남겨 두었음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선물이 되고 있다.
오홍묵은 강원도 정선군수를 역임한 적이 있었다.강원도 정선 땅에는 속칭 [비행기재](주4)라는 험준한 고갯길이 있다.이 고갯길의 옛이름은 별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뜻으로 성마령(星摩嶺)이라 한다.정선아리랑에 이 고개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아질아질 성마령아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같은 이 정선을 누굴따라 나 여기 왔나]
정선 아리랑의 이 가사는 오홍묵 군수의 부인이 남편따라 가면서 부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주5)
오홍묵은 [지도군 총쇄록]을 남겼고 그의 부인은 [정선아리랑]의 가사를 남겼다.오홍묵은 목민관으로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그의 부인은 산간 벽지 주민들에게 향토에 대한 유장한 정취를 발견시켰다.위아래 구분 없이 가파랐었던 조선 말,오홍묵은 비록 짧은 기간 왔다 갔지만 그는 지도군에 부임하였던 여러 군수(주6) 중 역사의 바다 위에 선명한 항적을 남기고 갔다.(주7)
주1 강화-갑곶-손돌항-인천-팔미도-덕적도-옥구-만경-고군산-칠산해를 경유하였다.
주2 지도군 총쇄록 1897년 1월 3일 조
그의 이러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자 유(惟)가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길에
사람들로부터 공정하게 처리되지 못한 공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였다.오홍묵은 충격을 받았고 각 면의 동장들을 불러들여 힐책하고 공무
의 공정한 처리를 엄히 훈계하였다.
주3 그는 지방 수령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정무사항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총쇄록을
남겼다.정선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군총쇄록이 그것이다.
주4 평창에서 정선으로 들어가는 고개.지금은 중턱에 터널이 뚫려 통행시 터널을 이용
한다.
주5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2 (유홍준)
주6 그의 후임으로 김한정(金漢鼎),박용규(朴鎔奎),김영년(金永年),이칭익(李稱翼),송
상희(宋祥熙),홍세영(洪世泳),채수강(蔡洙康)등이 부임하였다.
김한정은 진위대 참령을 지내다 1897년 5월 지도군수로 부임하였으며 기해년(189
9) 2월 광양군수로 발령이 났다.비가있다.통정대부였다. 박용규는 신축년(1901)
정월에 체직되었다.통정대부였다.김영년은 괴산군수에서 전임되었다.그해 11월 홍
주군수로 이배되었다.통정대부였다.이칭익은 계묘(1903) 윤 5월 13일 양덕군수로
이배되었다.통정대부였다.송상희는 곡성군수에서 전임되었다.을사 정월 15일 모친
상을 당하였다.통정대부였다.홍세영은 을사(1905) 2월 봉산군수에서 전임되었다.
가선대부였다.비가 있다.채수강은 광무 11년(1907) 2월 22일 정선군수에서 전임되
었다.통정대부였다.(이상 지도군지 읍재선생안 조)
주7 이상 주요내용은 지도군 총쇄록 번역본(신안군,향토문화 연구원)에서 전재
50. 섬 사람들의 민원
섬 사람들도 당시의 시대적 어려움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오히려 섬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그 폐해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섬사람들은 육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삼정의 문란외에도 섬이라는 환경 특유의 각종 폐해(주1)에 시달림을 받았다.
결정(結政,토지세)의 문제가 섬주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전답이 여러가지 이유로 황폐화되어 묵히고 있었음에도 정부에서는 아랑곳 없이 세금을 부과하여 가혹히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관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여비와 숙박비를 책임져야 했다.임자도는 원래 사복시의 둔토로서 사복시에 전세를 바치고 있었다.진이 있을 때는 진에서 이를 징수하다가 군이 설치된 이후에는 별도로 관리를 파견(派監)하여 거두어 들이도록 하였다.이 파감의 객비를 주민들이 부담하였던 것이다.
호역(戶役)이 과중하였다.섬사람들의 경우 생계가 극히 어려워 육지의 주민들 수준으로 호역을 징발할 수가 없었다.그리하여 관에서는 할 수 없이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선 역을 징발하다보니 그들의 역이 육지 사람들에 비해 거의 배나 되는 실정으로서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자체적으로는 두민(頭民)의 폐라는 것이 있었다.두민이란 각 동네의 장로지사(長老知事)를 일컫는 말이다.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부유함을 믿고 나이가 어리면서도 동네의 제반사에 간여 왈가왈부하여 동네에 많은 분규를 낳아 문제가 되고 있었다.
보부상의 폐가 있다.섬 주민들은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섬의 경제는 농촌형 자급자족 경제상황이었다.여기에 보부상들이 들어와 주민들의 낭비를 조장하였고 이에따라 섬주민들의 가계가 압박되었고 지역 상인들의 생계까지 위협받았다.
주1 이상 지도군 총쇄록에서 전재
51. 향약과 규약의 시행
조정에서는 지도군을 설치하며 군수에게 관민(官民)이 지켜야할 규약을 만들도록 하였다.이에따라 군수 오홍묵은 41개조의 규약(주1)과 17개조의 향약을 제정 시행토록 하였다.1896년 6월 초순의 일이었다.이 날 모든 섬에서는 소를 잡고 술을 빚어 규약과 향약의 반포를 경축하였다.
이 때 제정된 향약의 내용은 저내지지 않고 있으나 규약의 내용(주1)은 전해진다.
[규약 41조]
1)읍에는 반드시 향교를 만들어야 한다.그러나 향교를 설치한 후 각 섬의 백성들과
선비들이 묵패를 가지고 민폐를 끼칠 우려가 있다.그런 일이 있으면 해당자 및
임장(任掌)은 사실을 보고하고 엄히 처리하여 널리 퍼지는 것을 막도록 한다.
2)효도,열행,화목한 자와 지혜롭고 학문을 좋아하며 몸가짐이 단정한 자를 보고하
도록 한다.
3)각 섬의 호민(豪民)이 가난한 백성에게 자기의 세금을 부담시키는 폐가 있다.
이것은 나라의 법에 어긋난다.이러한 일이 발각될 시 서울에 보고하고 엄벌에
처한다.
4)임자없는 땅에 잡세를 부과하는 폐단이 있다.관에서 마땅히 바르게 처리하여 경
사(京司)에 보고한다.이것을 제멋대로 처리하는 임장은 벌을 면할 수 없다.
5)각 섬의 호민들 중 역을 빠지는 자가 있으면 백성들은 그 이름을 보고한다.
6)소의 도살은 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일이다.그러나 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사사로히 소를 잡기가 어렵지 않다.이런 자들의 이름을 보고한다.만약 숨겨주는
임장은 중벌을 받고 속전(贖錢)을 내야 한다.
7)빚을 주고 원금과 이자를 내지 않는다 하여 가난한 백성의 토지를 침탈하는 자의
이름을 보고한다.
8)각 섬의 가난한 백성들을 무력으로 억압하여 다스리는 자는 이름을 밝히어 보고
한다.
9)불효하며 공경하지 않고 화목하지 않는 자의 이름을 보고하여 일벌백계토록 한다.
10)일정한 직업없이 떠돌아 다니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자는 마땅히 징계하고
이름을 밝히어 보고한다.
11)술주정하고 잡기를 일삼는 무리들은 해당 마을에서 모두 결박하여 잡아들인다.
만약 숨겨주다가 발각되는 날이면 해당 임장과 두민(頭民)들은 벌을 받고 속전을
내야 한다.
12)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능멸하거나 윗사람을 모욕 하는 자,아랫사람을 기
만하는 자는 엄히 징벌한다
13)섬 백성들이 어리석고 무지하여 읍이 설치된 이후에도 섬밖의 무리들과 협잡하여
어지러운 사단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만약 이런 일이 발견되면 즉시 경
사에 보고하고 엄히 징벌한다.
14)섬에서 공용으로 쓰이는 돈은 매월 초 그 달에 소용될 내용을 해당 마을에서 협
의하여 책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3개월마다 관에 보고한다.
15)공전을 거두어 들일 때는 기한을 정하여 거두어 들인다.백성들은 기한 내에 공
전을 내야 한다.만약 기한을 어기면 관에서는 해당 임장을 잡아들여 독촉한다.
16)제언은 농업의 중요한 원천이다.각 섬과 각 마을은 제언수축에 힘쓰도록 한다.
제언을 수축하다가 완축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백성에게 돌아가니 모든 마을은
하나가 되어 제언을 수축한다.관에서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훈계하고 제방공사를
감독하도록 한다.
17)도민 중에 혹 사민(士民)의 구별이 없다 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연소자가 연장자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이를 범한 자의 이름을 밝혀 보
고 한다.
18)관속들이 명령을 핑계되어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폐가 있다.이러한 자의 이름을
보고한다.
19)관속들 중 사채를 공전으로 만들어 가난한 백성에게서 빼앗는 자를 보고한다.
20)관속들 중 뇌물을 주거나 연줄을 타 출세하려고 토색질하는 자가 있으면 보고
한다.
21)관속들 중 백성에게서 억지로 돈을 빌려가 갚지 않는 자가 있으면 보고한다.
22)관속들 중 일을 꾸며 위협하는 자가 있으면 보고한다.
23)관속들 중 평민을 잡아다가 위협하며 혹시라도 매질하는 자가 있다면 보고한다.
24)관속들 중 평민을 꾀어 상호간에 약속을 맺었다가 파기하고 소송을 하는 자가
있다면 보고한다.
25)서기들 중 간평할 때에 새로 개간한 땅과 묵은 땅에 불법으로 세금을 부과한 자가
있다면 보고한다.
26)임장으로서 공전을 내지 않는 자는 보고한다.
27)관속들 중 관을 빙자하여 가렴주구하는 자가 있다면 보고한다.
28)정해진 세금 이외의 것을 받는 관속들과 임장들을 보고한다.
29)호(戶)와 결(結)을 조작하는 것은 국가에서 크게 금하는 것이다.단 1파 1속의
것이라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국법을 우롱한 죄로 엄히 다스린다.
30)대소 공전의 수납은 관청의 뜰에서 정확히 거두어 들인다.
31)관에서 알지 못하는 공납전은 일푼전이라도 멋대로 내어서는 안된다.또 공전을
받으면 반드시 영수증을 써주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공전을 받은 자는 벌을
면하기 어렵고 또 해당 백성은 공전을 다시 내야 한다.
32)각 도에 두민의 폐단이 있다.원래 두민이란 관의 지시를 받아 마을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두민이라 칭하는 것은 마을의 장로이자 일에 밝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
이다.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나이가 적은 사람이 강한 세력을 믿고 스스로 두민
이라 칭하는 경우가 있으며 좋은 일에는 모든 일에 끼어들어 왈가 왈부하다가도
세금을 내는 때에 이르러서는 두민이라 핑계를 대어 빠지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의 부담을 지우니 이것이 어찌 한섬에 살면서 서로 환난상구(患難相求)한다
하겠는가.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두민에 대한 규정을 따로 만든다.이후
두민은 대도(大島)에는 10명,중도(中島)에는 5명,소도(小島)에는 1명씩으로 한다.
33)섬 주민들은 투표를 하여 일을 잘 알고 지량이 있으며 부지런한 사람을 천거한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자를 보고하면 관에서 첩지를 내려 이들로 하여금 제반 사
무를 거행하게 한다.
34)만일 이렇게 선출된 두민이 사리에 맞지 않게 일을 하여 죄를 범하면 전일에 투
표를 하여 선출되지 못한 자를 두민으로 승격시켜 일을 맡게 한다.
35)이전에 좌수나 도유사를 겸했거나 현재 재임 중인 사람은 두민의 정원에서 제외
시켜 시행하도록 한다.
36)두민 중 탈이 생겨 결원이 생기면 투표로 다시 뽑는다.이러한 재투표는 모든 사
람이 모여 실시하여 불만이 없도록 한다.
37)만약에 딴 마음을 갖거나 법을 어길 때에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혀 보고하도록
하여 엄벌을 받도록 한다.
38)비록 섬에서 이러한 것을 보고하지 않아도 몰래 조사하여 페단을 없이 하도록 할
것이니 죄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39)각섬이 농업과 상업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부상의 폐가 있다.잔치를
핑계대고 가난한 상인이나 평민을 토색질하는 자는 섬에서 쫓아 내야 한다.
40)섬밖의 각 군(郡) 소속 교졸(校卒) 무리들의 토색질이 관습이 되어 있다.만약
이후에 공문도 없이 제멋대로 토색질하는 자는 마을에서 즉시 잡아들여 보고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한다.또한 공문이 있더라도 공문에 위배되게 토색질하는 자 역시
잡아 들여 처결하도록 한다.
41)섬밖 각 군 토호 무리들의 불측한 일을 보고하여 형벌에 처하도록 하여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한다.
주1 지도군 총쇄록,1896년 6월 조 (신안군,향토문화 연구원)
52.향회
주민 자치기구로 향회(鄕會)가 설치(주1),운영되었다.향회에서는 권농권학,호적과 지적의 교정,흉년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상호 구조하는 일,사창의 곡식(주2) 보호,도로와 교량의 수축,식산흥업,공공산림과 뚝의 수축,납세,부랑잡기와 불효 불목 등을 금지시키는 일,제반 계회의 일,관에서 내린 명령을 거행하는 일이 논의되었다.(주3)
향회는 대중소의 세가지가 있었다.
소회(小會)는 이(里) 단위 회의이다.30호를 1리로 묶었으며 호수가 30호에 이르지 않으면 부근 마을을 병합하여 30호를 채웠다.소회가 열리면 각 호의 대표자가 1명씩 회의에 참석하였다.소회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문안을 갖추어 집강에게 보고하였다.집강 선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집강은 군치(郡治)에 보고하였다.군치에서는 일이 합당하면 시행케 하고 군에서도 처리할 수 없는 일이면 경사(京司)에 보고하여 재결토록 하였다.
중회(中會)는 섬 단위 회의이다.집강,존위,관원,두민,서기,도주인이 참석한다.궁토에 관계되는 일이면 둔장,호방등이 모두 참석하여 리회에서 올라온 문안을 공의를 통해 재결하여 관에 보고하였다.
대회(大會)는 군 단위 회의이다.대회를 개최하려는 때 군치에서 각 도회의 동의를 얻어 그 날짜를 정하였다.군회 참가 인원은 집강,존위,관원,두민 2인,서기,도주인,현직 좌수,별감,도유사,장의 등으로서 군치에서 확정하여 회의 전까지 통고한다.
대중소 향회가 열릴 때 참석 대상자들은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가져와야 했다.주식비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은 금지되었다.이는 민폐를 없애기 위한 배려였다.
주1 지도군 총쇄록,1896년 6월 조 (신안군,향토문화 연구원)
주2 당시 지도군에 있던 장부상의 총 환곡은 468석 7두 1승 2합이었다.
주3 지도군 총쇄록,1895년 6월 2일 조
53.향임
군에서는 지역주민들을 군정에 참여시켰다.군정에 참여한 지역민들을 향임(주1)이라 하였다.대표적 향임으로 존위(尊位)와 서기(書記),두민(頭民),집강(執綱)과 도주인(島主人) 그리고 서원(書員)이 있었다.존위(尊位)와 서기(書記)는 마을별 1인씩 임명되었고 두민(頭民)은 각 섬에 3인씩,집강(執綱)과 도주인(島主人),서원(書員)은 1인씩 임명되었다.이들의 임기는 1년이었다.
존위는 마을민의 두령으로서 마을의 대표자였다.서기는 해당 마을의 장부를 기록,보관하였다.각 마을에서는 마을 존위의 의견에 따라 마을 사람 중 적임자를 선출 서기로 임명하였다.
두민은 섬사람 중 노성(老成)한 사람이었다.집강이라 하더라도 자의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반드시 두민의 의견을 구하도록 하였다.각 마을에서는 매년 말일 두민을 선출하였다.해당 마을 주민 중 명예가 있고 노성한 사람,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일을 잘 해결할 줄 아는 사람,공무를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몸과 목숨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 1인을 선정,집강에게 보고하였다.집강은 도회를 열어 각 마을에서 추천된 사람을 투표에 붙여 3인을 뽑아 관에 보고하였다.관에서는 이들 3인에 대해 해당 섬의 두민으로 임명하고 임명장을 주었다.
집강은 면의 대표자이고 도주인(주3)은 섬내 공문을 발송하는 직책이었다.서원(書員)은 아전의 하나로 각 섬에 1인씩 군수에 의하여 임명(주4)되었다.
주1 향회의 임원.
섬 주민들 중 세금징수 등 관의 업무를 보좌하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주2 지도군 총쇄록,1896년 6월 조.번역본(신안군,향토문화 연구원)
주3 도주인에게는 해당 섬의 각호에서 봄가을로 1냥씩 거두어 수고비로 주었다.
1897년 임자도주인은 조윤기(趙允基)였다.
주4 오홍목 군수 당시의 임자도 서원은 송병연(宋秉淵)이었다.
54. 일본사람에게 붙는 일은 오랑캐나 하는 짓
일본과 중국의 선상(船商)들이 장사를 위해 섬에 들어왔다.섬주민들은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는 국제 기류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1896년 6월 22일 오후 6시경 섬타리(台耳島) 앞바다에서 임자도 파감(派監,주1) 김복연(金福淵)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주2)하였다.김복연은 수군진이 혁파되기 전 어의도의 진장(鎭將)이었다가 진 폐지 이후 임자도 파감으로 임명되어 임자도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본인과 임자도 파감의 충돌사건은 천삼용(千三用)이라는 조선 사람과 일본인들과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지도읍에 거주하던 천삼용이라는 사람이 타리파시로 고기를 사러와 섬타리에 머무르고 있었다.그 때 일본배 3척도 장사차 섬타리에 와 정박하였다.일본인들은 배에서 내려 파시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마침 이들의 옆자리에 합석하게된 천삼용이 일본인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나라 말을 잘하는데 왜 옷은 우리나라 것을 입지않느냐]하고 시비조로 물었다.그러자 일본인들은 [비록 타국의 언어는 쓴다 할지라도 남의 눈을 속이려고 다른 나라 옷으로 바꿔 입지는 않는다]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일본인과 천삼용이 이렇게 서로 말다툼을 벌이던 중 감정이 격해진 일본인들이 천삼용의 목을 때렸다.천삼용도 주먹으로 일본인의 가슴을 치며 맞섰다.수의 힘을 믿은 일본인들은 천삼용의 머리채를 잡아 끌면서 집단으로 구타하였다.
그 때 임자도 파감 김복연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들에게 얻어 맞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였다.그는 주위에 모여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일본인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하여 천삼용을 구해내었다.세불리를 느낀 일본인들은 천삼용을 놔두고 자기들의 배로 도망쳐 올라가 배에 장착된 포 두 발을 쏘아대었다.
임자도 파감 김복연은 우리나라 사람 노흥서(魯興瑞)가 일본인의 통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내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냐.일본사람에게 붙어 이러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이다]하고 타일렀다.그러자 노흥서는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 역시 자세히 보지를 못하였습니다.이러한 일에 우리나라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고 조아렸다.
사태를 수습한 후 김복연은 자신의 배에 올라타고 섬타리를 떠나 지도(智島)로 향하였다.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돌을 던지게 한 임자도 파감 김복연에 대해 원한을 품고 세 척의 배로 김복연이 탄 배를 몰래 뒤쫓아갔다.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조선양반이 이 배에 타고 있다]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김복연이 탄 배로 난입하였다.그들은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바다로 내던져버린 다음 김복연을 잡아 몽둥이로 무수히 난타,살해한 다음 도주하였다.
김복연의 시신이 실린 배는 혼자 바람과 조류에 밀려 임자도 저동 앞 바다에 닿았다.저동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초분에 안치하여 두고 군에 이 사실을 보고(주3)하였다.
주1 지도군에서 임자도에 파견한 관리
주2 이하 지도군 총쇄록,1896년 6월.
주3 지도군 총쇄록,1896년 6월 23일,7월 7일 조
55. 청나라 선상의 방문
1896년 10 월 4일 청나라 산동 등주 영읍 이도구(山東 鄧州 榮邑 俚島口)에 거주한다는 선주 유산옥(劉珊玉),유전옥(劉田玉),사공 양수홍(梁水洪)이 배 한 척을 몰고 지도군에 와 오홍묵 군수를 뵙기를 청(주1)하였다.오홍묵은 그들을 불러 들여 필담을 나누었다.그들은 자신들은 선상(船商)들로서 여러가지 물건을 싣고 와 법성포 등지를 돌아다니며 팔았다면서 다음에 올 때는 지도군에서 장사를 할 터이니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 객지의 낯설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그리고 청국에서 가져온 소주 2병,엽초(담배) 1 묶음,설탕 1봉지,큰사탕수수 20개를 진상하면서 [약소하나마 정표로 받아달라]고 하였다.오홍묵군수는 소주와 어탕(魚湯)을 마련토록 하고 술을 권하니 중국인들은 매우 고마워하였다.
그 때 군의 시부름꾼인 사령(使令) 김영수(金永守)가 중국어를 잘한다 해 통역을 맡게한 다음 지도군의 형편과 청국의 풍토에 대해 담화를 나누었다.
청국인들이 돌아간 후 오홍묵군수는 사령 김영수에게 중국어를 어떻게 배웠느냐고 그 연유를 물었다.김영수는 [저는 본디 서울 사람으로서 어렸을 적부터 남양 오경연(南陽 吳慶淵),판윤 변원규(判尹 卞元圭)를 수행해 10여 차례 청국을 왕래한 바 있었습니다.연전(年前)에 선상(船商)으로 이 곳에 왔다가 동학의 무리들이 창궐하여 배가 파손되는 바람에 재물을 탕진,곤궁하게 되어 낙월도에 머무르고 있다가 지도군이 신설되자 군의 사령으로 들어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군수는 [사람에게는 모두 한가지씩 장기가 있고 한가지씩의 용도가 있다 하더니 네가 바로 그렇구나]하며 웃었다.
군수는 주방에 명하여 잘익은 사탕수수와 병에 든 소주를 좌중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먹어보고 담배를 나누어 피워 보았다.좌중의 사람들은 큰 호기심을 가졌으나 우리나라 제품과 맛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10여일 후인 10월 14일 오홍묵 군수는 향장들과 함께 지도 대변정(待變亭) 진두(津頭)에 정박해 있던 청국인들의 배를 관람하였다.
주1 지도군 총쇄록,1896년 10월 4일 조.번역본(신안군,향토문화 연구원)
56. 갑을세 거부
행정구역 개편의 후유증이 생겨났다.
임자도민들이 1896년 갑을세(甲乙稅) 납부를 거부하였다.[갑을세]란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결세(주1)를 말한다.원래 임자도는 사복시의 둔토로서 전답 매결 당 예에 따라 50냥씩 납부(주2)하고 있었다.그러나 임자도진이 폐지(1895)되고,임자도가 영광군으로부터 지도군에 이속(1896)되었으며,갑오 농민전쟁 을미사변 등 극심한 혼란으로 납세문제가 유야무야되고 있었다.이러던 중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군에서는 미납된 결세의 납부를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임자도민들은 임자도가 지도군에 이속됨으로 인해 갑을세 추징 등 각종 불이익을 보고 있다면서 다시 영광군으로 환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현여,김문여,강희순 등 세사람이 앞장서 갑을세 탕감과 함께 영광으로의 재편입을 바라는 주민들의 뜻을 조정에 전달하기로 하였다.그리하여 1896년 11월 이현여와 김문여가 서울로 올라갔다.그들은 한 달여 간 서울에서 기거하며 일을 보다가 돈이 떨어지자 외상으로 묵었던 여곽의 주인을 동반하여 임자도에 내려와 서울 체재 비용과 식비를 도민들에게 추렴하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안 군에서는 그들을 잡아들여 두 손을 묶어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간의 경위를 조사하였다.그 결과 임자도의 두민들이었던 강희순,김형배,이돈영이가 이들의 뒤에서 일을 꾀하였다는 것을 밝혀졌다.
사건이 커지자 임자도 주사 임철윤이 군수에게 [섬사람들이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주민들의 여론을 전달하였다.전 임자도 첨사 김동숙도 군수를 찾아가 선처해주기를 누누히 간청하였다.이러한 요청에 힘입어 이현여와 김문여는 석방될 수 있었다.군수는 이들을 풀어주면서 1897년 1월 20일 까지 갑을세를 완납토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도민들은 여전히 갑을세를 내지않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갑을세를 포함 밀린 공전이 2만여냥(주3)을 넘고 있었다.군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897년 1월 28일 향원(鄕員) 김형배,두민 이돈영 강희순 이현여 김문여 등을 체포하여 갑을세 거부의 경위를 조사하였다.
이에 대해 김형배가 [임자도 진에서 관리로 근무하였던 김경표와 박서윤이 갑을세는 탕감되어야 하고 특히 결세는 매결 당 2냥씩 삭감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두 사람의 말에 따라 대다수 주민들(주4)이 세금을 내지않고 있습니다] 고 말하였다.군에서는 이번에는 김경표와 김서윤을 잡아들여 조사를 벌였으나 납부실적은 여전히 저조하였다.
군수는 임자도의 집강과 두민,존위들을 교체하는 한편 세금징수의 책임을 지고 있는 향원 김형배를 귀양보내줄 것을 광주부에 요청(주5)하는 등 갑을세 징수를 위하여 갖은 강제수단을 동원하였다.
주1 토지세
주2 지도군 총쇄록,1896년 7월 7일 조,9월 10일 조
주3 결세는 결당 50냥이었다.당시 임자도의 토지면적은 약 260결이었다.따라서 매년
임자도의 결세는 1만 3000냥이었다.2년간의 미납결세가 2만냥을 넘었다는 것은 결
세납부 거부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참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 1결(結)이란 100부(負),1부는 10속(束),1속은 10파(把),1파는 한 홉이다.
주4 임자도의 호구 수와 토지 면적 (지도군 총쇄록,1896년 8월 27일 조)
<호구및 토지>
임자도 : 민호 405호 관호 399호, 토지 250결 9부 6속(주1)
재원도 : 민호 19호 관호 1호, 토지 5결 59부 5속
노록도 : 민호 8호(대노록도 5호, 토지 7부 9속
소노록도 3호)
관호 1호
태이도 : 민호 2호 토지 1결 33부 7속
갈도 : 토지 53부 3속
허사도 : 토지 12부 7속
부남도 : 토지 16부 6속
입모도 : 토지 16부 6속
굴도 : 토지 23부 7속
<인구>
1897년 2월 9일 지도군내 호적 정비가 마무리되었다.지도군 전체의 총 호수는 2720호였으며 인구는 6233명(남 3938명,여 2295명)이었다.지도군의 1호당 평균인구수는 약 2.292명(6233/2720=2.292)이다.이를 1896년 임자도 총호수 804호에 대입시켜보면 당시의 임자도 인구수는 1840여명 (2.292*804=1840) 정도로 추산된다.
주4 지도군 총쇄록,1897년 1월 28일,2월 4일 조
57. 군수, 임자도를 시찰하다.
오홍묵 군수는 1897년 관내 각 섬을 시찰하였다.그는 지도군총쇄록에 이 때의 일들을 기행문(주1) 형식으로 남겨두었다.1897년 4월 7일과 8일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진 임자도 방문기록을 전문 번역한다.
[군을 처음 창설한 까닭에 부임 초 경내의 형편과 풍토를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 농사를 장려하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장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그래서 직접 살펴보고 말보다 행동으로 임하고자 군 경내를 순시할 생각이다.그러나 순시를 미리 알리면 백성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미리 예고하지않고 있다가 오늘 아침 향장 김병수를 시켜 배 1척을 준비하게 하였다.
아침식사 후 배에 올라타니 김성택,김인길,향사 안병량,조병호,수배인 김병성,통인 조윤기,관노 천덕,방자 응천,사령 최만일 등이 수행했다.어제 비가 온 뒤라 날씨가 쾌청하고 순풍이 불었다.송도 앞바다를 지나니 눈앞이 넓어지고 여러개의 섬들이 좌우로 나열하여 있고 상인과 어선들이 나타났다가 스쳐사라지곤 하였다.탑선도,윤랑도,죽도는 좌측에,수도는 우측에 있다.
오각에 임자도에 이르렀다.대변정 나루에서 수로로 50리 거리이다.배에서 내려 도보로 조금 걸어가는데 장의 정인택(鄭麟澤)이 내가 온 것을 알고 마중 나왔다.길 좌측에는 임자도에 진이 있을 때의 유애비가 늘어서 있다.어떤 것은 철비이고 어떤 것은 석비였다.1리 정도 지나 진의 관아에 들어섰다.관아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편액은 <수정헌> <쌍백당>이며 제영문을 적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수군진영이 폐지된 후 관리하지를 않아 폐허가 되어있었으며 뜰에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후원에는 대나무와 청송이 우거져 있었다.
전에 장의를 지냈던 강영석(姜永錫),마을사람 정운승(鄭雲升),강영후(姜永厚),학도 강봉준(姜鳳俊),이광순(李光順) 등 대여섯명이 찾아왔다.주인이 술상을 내어왔다.
관아 뒤 주산은 동산이고 앞에는 휴암이 있다.형상이 매우 기이하다.큰 소나무 수 백 그루가 있고 관아 앞에는 민가가 백여 호 있다.서쪽에는 대둔산(저자 주:큰산),우측에는 대박산(저자 주:한박산)이 있다.좌측에 거막산(저자 주:검산)이 있고 북쪽에는 광암포,괘길포가 있다.태이도 동쪽에는 사공진이 있으며 서쪽에는 목도포(저자 주:목섬)가 있다.모두 생선과 소금이 많이 나는 곳이다.북쪽으로는 대소 낙월도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후증도와 경계이다.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또 동서의 두 지역(저자 주:동면과 서면)으로 나뉘는데 모두 16개의 마을이 있으며 민가가 거의 500여호이다.휴암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모두 산이다.그리고 바다에 섬들이 얼마가 있는지 알 수 없다.또 대박,거막 양산을 청조(靑鳥)라하고 두 개의 돛대가 솟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배의 형국이라 한다.산꼭대기에 오르니 서북쪽은 해제와 접하여 있다.
서쪽에는 휴암이 있고 그 아래 여러 촌이 있다.이곳이 광암이며 임덕민이 사는 곳이다.전에 그에 대해 들으니 학문이 비범하다 하며 마침 오늘은 외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잠시후 검교(檢校) 황운기(黃雲起),향원 김형배 등이 외촌에서 와서 내가 [이 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청이 있어 찾아왔다] 하였다.그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이 곳 백성들이 가난하여 세금(저자 주:갑을세)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서울의 관청에 어려운 사정을 알려 다른 조치가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고 실제 3만여 금을 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거두어 들이기는 무리라는 것이다.그리고 섬사람들이 출타해 있거나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있어 모두 함께 오지못해 죄송스럽다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민생에 관계된 일은 전일 절목 및 훈시를 통해 이미 알린 바 있다.다만 본군은 옛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는 까닭에 다른 곳보다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은 나 역시 유념하고 있는 바이다.향원들이 영문에 조사 받으러 가는 것은 그들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또 그 때 든 비용에는 또한 헛되이 쓰여진 것이 있을 것이니 비록 검교의 아침 저녁 식사비 1푼전이라도 이미 세금을 냈던 백성들로부터 거두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세금을 미납한 자들로부터만 거두어 야 할 것이다.혹시라도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임장 및 두민은 큰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유념거행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그리고 시무 10여 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주었다.
장의 정인택이 말하기를 [오늘 자기 집을 고치고 있어 내가 숙소를 삼기에 불편하여 오위장 이돈영(李敦永)의 집으로 숙소를 정했다]고 하였다.이돈영의 집에 갔는데 집이 매우 깨끗하고 조용하였다.주인 이돈영이 [작도] 어장에 갔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다.초저녁에 훈장 김흥수(金興壽)가 와서 말하기를 마침 밖에 외출하였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이제야 뵈러오니 죄송스럽다고 했다.
해가 저물 무렵부터 비가 올 것 같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에 그쳤다.혹시 내가 행차한 것이 마을에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나의 마음을 정 장의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어제 식사는 정 장의의 집에서 준비하였고 오늘 아침 식사는 이 돈영의 집에서 준비하였다.매우 정성스러운 마음인 것 같았다.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또 이돈영의 아들 성직(聖直)과 성장(聖章) 두 형제가 왔다.모두 매우 순하고 성실한 것 같았고 앞으로 관원이 되고싶어 했다.학도들이 시를 지어와 살펴주기 원하니 이성직등 6명의 시를 보아주고 백지를 상으로 주었다.이 곳 진촌(저자 주:진리)의 강의순(姜義淳)은 일찌기 장로로서 학문을 이룬 사람으로 칭해지며 나 역시 그런 말을 들었다.
조삼리에 갔는데 민가가 10여호였다.두민을 불러 별도로 훈시 하고 또 7리를 가니 윤봉산 아래 이흑암에 이르렀다.민가가 30여 호였다.이 곳은 정인택의 조부이자 도정을 지낸 정학원(鄭學源)과 오권빈(吳權彬)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오권빈 역시 문사이다.처음에는 이 마을에 들러 잠시 살펴보고자 하여 마을 앞에 이르렀으나 물때가 급한 까닭에 부득이 그냥 지나쳤다.
또 5리를 가다가 다순금리(多順今里)에 이르러 배를 탔다.강영진(姜永鎭)이 술상을 가져와 간단하게 주연을 베풀었다.정인택,이돈영,정운승,김흥수,강영원(姜永原)등이 따라 왔고 이 섬의 선비들인 정처권(鄭處權),김영희(金永希)등이 내가 이 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그들을 만났다.
곧 이들과 작별하고 정인택과 같이 배에 탔다.들으니 정 도정이 내가 이흑암을 그냥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왔다하여 그를 만났다.곧 물때가 되어 배를 타고 가다 해안가 절벽을 바라보니 수십인의 사람들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모두 도정 정학원과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팔십의 노인이 늙은 몸을 이끌고 나를 보려 이 곳에 이르렀으나 물때를 놓칠 수 없어 그냥 헤어지니 매우 안타까웠다.]
주1 지도군총쇄록 번역본,신안군,향토문화진흥원
58. 사막 농법
임자도에는 서해안에서 밀려와 쌓인 모래밭이 남북으로 12km(주1)가 넘게 드리워져있다.은모래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바람에 날려 섬 안으로 들어와 폭 4km,두께 10여m 이상의 커다란 사막지대를 이루고 있다.
두껍게 쌓인 모래 층은 비가 오면 물을 머금고 있다가 평소에 조금씩 흘려보낸다.임자도민들은 이 모래층의 물을 농사에 활용하였다.그들은 모래 밭에 길고도 깊은 수로를 내었다.
이것을 [치]라 한다.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이다.치는 열 대여섯 개에 달하며 그 중 세개는 초대형으로서 길이 1.8km,폭 8m가 넘는다.치에는 극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항상 물이 가득 고여있으며 이 물을 작은 수로를 통하여 끌어내 논(주2)에 물을 댄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사막 농법이다.
주1 단일 모래사장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이다
주2 현대화된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 임자도 내 최고의 상답은 치로 부터 물을 받을
수 있는 논이었다
59. 농사력
자급자족 농업 경제체제하에서 농민들은 사철 정하여진 농사일에 한시의 어긋남도 없이 매달려야 했다.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횡재도 없었으며 잔 재주도 용납되지 않았다.분가할 때 부모로부터 타고난 몇 뙤기의 논과 밭을 성실히 일구어 슬하의 처자식을 먹여살리고 남은 것이 있으면 이를 모아 전답을 사들여 늘리는 것이 주민들의 최대 소망 중 하나였다.
그들은 명절이나 농한기에 한데 어울려 각종 행사를 벌여 공동체의 의식을 다져나갔다.사람들은 바뀌어 갔으나 함께하던 문화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그들의 사계절은 단조로왔으나 건강하였다.
정월이 들면 그들은 설과 보름이라는 최대의 명절을 쇠면서 일년의 계획을 세웠다.젊은이들은 설을 전후하여 한문서당에 다니며 글을 읽힌다.주경야독이란 말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 생활을 관통하는 규율이었다.정월 대보름은 매우 의미가 깊은 명절이었다.동네마다 동제를 지내고 개인 집에서는 당골을 불러 1년 신수를 보는 한편 액을 막기위한 비손행사를 치렀으며 논밭 둑에 불을 놓는 등 전통적 문화행사 대부분이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이루어졌다.그러는 가운데 한해 농사를 위한 여러가지 일들이 준비된다.부녀자들은 간장을 담그고 머슴들은 정월 20일께 주인집에 머슴살이를 하러 온다.
2월에는 본격적 농사 준비에 들어간다.2월 초하루는 '하레달'이라 하는 명절이었다.이 날에는 콩과 보리를 볶아 먹는다.이를 [굼벵이 볶는다]라고 한다. 하레달에 동네 총회의를 열어 마을의 계갈이 회의를 한다.동네 남녀노소가 모두 동각에 모여 동네 유사로부터 작년 동네 한 해 동안의 공동살림살이 결과를 보고받고 새로운 동네 유사를 뽑는다.이 날 회의에서 동답 소작료,동네 잡비,동제 제물을 봉하는 등 일년간의 동네 예산과 동제를 모실 제주를 뽑는다.이 날 동네의 주요한 일은 모두 토의되고 결정되며 이날 결정된 모든 일 동네 유사 책에 기록하여 물림된다.동네에 차일계와 가마계,상여계가 있다.계원들은 마을 계갈이를 전후하여 계원들의 공동 재산인 차일이나 가마,상여를 수리 정비하고 비품의 대여비를 결정한다.계원들은 무료로 사용하나 계원이 아닌 사람들은 비품 사용 시 일정한 사용료(주1)를 내야 했다.연초부터 계속되어왔던 명절이 하레달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농사일이 시작된다.보리밭에 웃거름을 내고 배토를 한다.여자들은 보리밭을 맨다.하순 경 볍씨를 담근다.논갈이를 시작한다
3월에는 농사가 본격 시작된다.고추모를 붓는다.논갈이가 시작된다.중순 경에는 못자리를 설치하고 스무날께 낙종한다.
4월에는 보리가 익기 시작하는 계절이다.보리밭 고랑 속에 미영씨를 뿌린다.보리밭 속을 다니면서도 보리가 상하지 않도록 미영씨를 뿌리려 하니 매우 힘든 일이었다.미영은 일제시대 육지면이 들어와 농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일제는 면화재배를 장려하였다.각군에서는 면작조합(주2)이 결성되었다.그믐께 보리를 베어내며 바로 고추갈이를 한다.100평이 넘게 고추농사를 짓는 사람이 드물었다.철저한 자급자족 경제였던 탓이다.
5월은 일년 중 제일 바쁜 계절이다.[발등에 오줌 눌 정도로 바쁘다] 했다.여자들은 보리밭 속에 심어놓은 미영이 크라고 보리를 베고남은 짝끌을 뽑았다.이를 [화중밭 맨다]라고 하였다.하지 안에 마늘을 캔다.전닷새 후닷새(하지 전 닷새,하지 후 닷새)에 걸쳐 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를 해야 했다.5월말 6월초 모내기가 끝나면 [써우레 씻금]을 하여 써우레를 씻어 걸어놓는다.이 때 가뭄이 들면 큰 피해를 본다.각 동네에서는 가뭄이 들면 불갑산,한박산,큰산,화산 뒷산,구산 뒷산,삼막동 뒷산 등 동네별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 밤에 나무를 가지고 올라가 한 날 한 시에 불을 피웠다.큰산 중봉에 기우제를 지내는 우단(雩壇)이 설치되어 있다.
6월에는 도리깨로 보리를 타작한다.비가 많이 오는 해는 8월까지도 보리 타작이 계속된다.초순에 끌을 간다.논을 맨다.논밭 초벌 매는 것을 [선도살이]라 한다.[복대름]이라 하여 보신탕을 끓여 먹는다.
7월에도 논을 맨다.논이고 밭이고 마지막 매는 것을 [만두리]라 한다.많으면 다섯벌까지도 매었다.논 만두리를 끝내며 [상머슴 소 태우기]를 한다.겨울에 쓸 땔감을 장만한다.김장 배추를 파종한다.담배와 고추 수확을 시작한다.그믐 경부터는 힘든 농사 일이 일단 끝나고 숨을 돌릴 수 있다.어정어정하고 다닌다 하여 [어정 7월]이라 한다.
8월을 [둥둥 팔월]이라 한다.풍성한 가을을 바라보며 8월 한가위도 있기 때문이다.[8월]이라 불리던 한가위에는 강상술래 놀이가 여기저기에서 행해진다.녹두,깨,수수,수숙,미영을 수확하기 시작한다.추석에 자기집으로 추석세러 돌아 갔던 머슴들이 20일께 돌아와서 논 물개를 친다.
9월은 매우 바쁜 달이다.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벼를 벤다.참깨를 수확한다.하순께 벼 타작을 시작하며 말까지 보리를 파종한다.마늘을 놓는다.
10월은 상순까지 계속 보리를 파종하고 벼를 타작한다.10월 중순 경 시제를 지낸다.그믐께 마람을 엮어 지붕을 인다.
11월에는 김장을 한다.동짓달부터 농한기로 접어 든다.남자들은 섬,덕석을 짜고 수수빗자루를 맨다.여자들은 길쌈을 본격 시작한다.메주를 쑨다.
12월은 한해를 마무리한다.섣달 그믐 경 머슴들이 1년간의 계약을 마치고 새경을 받아 자기집으로 돌아간다.
주1 상여의 경우 사용료가 보리 3-5말 정도였다
주2 무안군 면작조합에서는 임자면 등 관내 6개면에서 1개면에 부인 10명씩 선발 [면
작시찰단]을 만들어 1922년 9월 1-3일 까지 목포 용당리 모범 농장 및 시내 각회
사 공장등을 견학시켰고 자동차 2대에 분승시켜 목포 전시가지를 둘러보게 하였
다.(동아일보 대정 11년 9월 7일 4면5단,1922)
또 조합에서는 기술지도 활동을 벌였는 바 무안군 면작조합에서는 1923년 7월 각
면에 면작모범 농리(農里) 지도원 1명씩을 선발하여 면작개량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하였다(동아일보 23.7.24,4면6단)
60. 상머슴 소 태우기
농사는 사람과 소의 힘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항상 일손과 소가 부족하였다.그래서 자식을 많이 둔다는 것은 큰 축복이 되었으며 소를 잡는 것은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 되었다.
웬만큼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가족의 힘만으로는 크게 일손이 부족하여 머슴을 데려야 했다.한 마을의 머슴 수가 보통 10여명이 넘었다.머슴의 새경으로 상머슴에게는 나락 12가마,보통머슴은 10가마,깔땀살이(상머슴의 조수)는 5가마니를 주었다.새경을 주는 시기는 믿을 수있는 사람에게는 보통 선불로 지급하였으나 객지에서 왔다던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후불로 하였다.
농사가 잘 되 풍년이 들 것으로 예상되면 소와 머슴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만두리가 끝날 무렵인 7월 그믐께 동네 머슴들이 모두 모여 동네에서 농사가 제일 잘된 집을 선정하고 집주인에게 [상머슴 소를 태우라]고 권유한다.지정된 집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가오리,민어,장어 등으로 반찬을 장만하고 상머슴 새옷 한 벌과 양산을 준비한다.동네머슴들은 그 집 논농사 만두리가 끝나는 날 오후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모두 그 집의 논에 모인다.그들은 그 집 소 등에 깨끗한 천으로 만든 깔개를 얹힌 다음 상머습에게 새옷을 입히고 양산을 들게한 다음 소에 태운다.동네 머슴 모두가 소 주위에 끈을 둘러 소가 함부로 뛰지 못하게 사방에서 꼭 붙잡고 큰소리로 흥겹게 풍년가를 부르며 동네로 들어온다.그리고 준비한 음식,주로 고기 반찬과 쌀죽 또는 밀국수를 먹으며 동네잔치를 즐긴다.이 때에는 머슴들 뿐만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흥을 돋우면서 힘든 일이 무사히 끝났음과 차질없는 풍년 수확을 기원하였다. 이 때 소도 좋은 깔을 베어다 배불리 먹이고 푹쉬게 한다.
61. 언어 특징
섬사람들의 언어에는 옛말이 많이 살아 있음은 물론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말들이 흔히 발견된다.[삐런 다비 신은 아그덜이 개야찜에 손을 넣고 싸무싸무락 걸어감서 여를 바라본다](빨간 양말을 신은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바다의 암초를 바라본다) 라는 흔하게 쓰일 수 있는 말에서 보듯 섬지방의 언어는 표준어와 큰 차이가 난다.
옛말로는 인도의 드라비다 언어의 특징이 강하게 살아있다.이것은 동남아시아의 고대언어가 해로를 통해 한반도 남부에 흘러들어와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말한다.
지금도 살아있는 대표적인 드라비다어를 보자.
드라비다어 신안군 방언 쓰이는 예 표준어
안두(andu) 한두 한두가 시다 엉덩이
꼬깐(koccan,작은 아이) 꼬까 꼬까 옷을 사다
무람푸(murampu) 물팍 물팍이 아푸다 무릎
바타(vata) 버텅 산버텅 비탈
토리까(torikka) 도리깨 도리깨질
바람(varam) 배람빡 배람빡에 기대다 벽
보께(bokke,동그라미) 뽀께(밥그릇 밥뽀께에 술을 따르다 뚜껑
뚜껑)
마크리(makri) 메꾸리 메꾸리에 쌀을 담다 바구니
메뚜(mettu,흙무지) 메뚱 메뚱을 파다 무덤
아타(ata,수하인에게 말걸 때 아따 아따 ! 이 사람
쓰는 감탄사)
켄투(kentu,껑충뛰다) 근두 근두타다 그네
콜 (kol,가지) 꾸락 손꾸락 가락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1990,강길운,새문사,pp290-329)
임자도에는 다른 지역에 보편화 되어있지 않은 희귀한 어휘가 지명에 나타난다. 대표적 특수 지명으로 [기미]라는 지명접미사가 있다.희용기미(행기미),온구미 등이 그것이다.기미는 주로 해안선 일대에 분포된 지명어로서 포구형의 모습을 나타내는 지명 접미사이다.장산곳 등의 곶에 대응되는 말로서 곶이 돌출부(凸)를 나타내는 말인데 반해 기미는 해안선이 휘어 들어간 곳(凹)을 나타낸다.(주1) 또 [타리](이두식 표기로 台耳)라는 말이 있다.타리,섬타리,뭇타리가 이에 해당하며 진다리(낙월도)라는 섬이름의 [다리]도 타리의 변화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타리라는 지명에서 타리민어(주2)라는 말이 나왔다.타리라는 말의 뜻에 대하여 [물이 굽이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주3)하기도 하나 섬이라는 뜻을 가진 옛말이 아닌가 한다.[여]라는 말은 뱃사람들의 말로서 바닷물 표면 가까이 있는 작은 암초,섬을 말한다.최근 들어 [여]라는 말이 제주도 인근의 바닷속 암초섬을 가리키는 [이어도]라는 소설이 나온 관계로 그 암초의 이름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화 하고있으나 이는 사실을 잘못된 것이다. [여] 즉 [이어]는 암초를 가리키는 섬사람들의 말이다.
주1 전라남도 방언연구,김웅배목포대교수,pp235-236
주2 타리에서 잡히는 민어로서 임자도의 특산품이었다.
주3 정영섭 임자종고 국어교사.1994.
62. 서사운동
조선말 섬마을에는 걸출한 유림인사들이 배출되었다.그들은 섬지방에 학풍을 크게 진작시키고 사상계를 주도하였다.선대 조상들이 입도 이후 수 세대 동안 기본적 생계 유지에만 매달려 왔지 별다른 학문적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자각하고 척박하였던 임자의 풍토에 문화의 향훈을 심어 나갔다.
그들은 학풍진작의 방법으로 서사(書社)를 결성하였다.이는 마을의 유림인사들이 단독 또는 동네 사람들과 공동으로 재산을 출연,책을 구입하고 스승을 초빙해 자제(子弟)와 촌수(村秀)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사설 향촌 교육기관이었다.그들은 서사를 중심으로 교유하면서 국가와 지역의 현안들에 대해 토론을 벌여나갔다.
이들의 서사운동은 그 결실을 보아 섬마을에 그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지역내에서 행세를 하기위해서는 학문적 소양이 필수 요건이 되었다.유력 집안에서는 자제들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서사가 여러 개 생겨남으로 해서 학문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사의 훈장으로 초빙되었다.그들은 재산이 없더라도 지역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말 임자도의 경우 7개의 서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학해재(學海齋)는 삼막동에 있었다.향원(鄕員)이었던 김형배(金亨培)가 설립 후생들을 가르쳤다.지재 김훈(智齋 金勳)의 기(記)가 있었다. 지학재(志學齋)는 화산에 있었다.박태민(朴太珉),윤종진(尹宗鎭)이 만들었다.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지재 김훈(智齋 金勳)의 기(記)가 있었다.영화재(永華齋)는 부동에 있었다.김계문(金啓文),이성호(李成鎬),김성진(金聲振),박종연(朴鐘璉)이 합력하여 만들었다.조석으로 강(講)이 있었다.규성재(規成齋)는 장동에 있었다.정재섭(鄭在涉),이종성(李鐘晟)이 만들었다.자제촌수(子弟村秀)를 교육시켰다. 일양재(日養齋)는 대기리에 있었다.남기원(南起元) 이 대기촌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야은재(野隱齋)는 회산에 있었다.김기헌(金箕憲),김경식(金敬殖) ,장영순(張永淳)이 재산을 출연하여 설립하였다.자제촌수(子弟村秀)를 훈도하였다.영모재(永慕齋)는 광산에 있었다.광산 임종호(任宗鎬) 문중에서 설립하여 문중의 자제와 조카들을 모아 교육시켰다.
63. 위정척사를 중심으로 뭉치다.
섬지방의 유림인사들은 외세침탈 등 국가적 위기의 해결 방안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그들은 당시 경향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노사 기정진(蘆沙 奇貞鎭),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등 위정척사 사상의 지도자들을 추앙하며 본으로 모셨다.
임자의 유림들도 그들의 사상을 연구하였고 자제들을 그들에게 보내 사사받도록 하였다.대표적으로 회산의 김두후는 멀리 바다를 건너가 송사 기우만(松沙 奇 宇萬)과 고현와(高弦窩),오후석(吳後石) 삼인에게 사사 받았다.세 스승은 그를 해상의 걸사(海上傑士)라 칭하였다.장동 가산 영사재(長洞 嘉山 永思齋)에는 김두후와 송사 기우만 사제(師弟)의 위패가 모셔진 단이 설치되어있다.이를 도림단 (道林壇)이라 한다.매년 봄 임자,지도 등 각지의 유림들은 이 도림 단향에 참석 분향하면서,100여 년 전 임자의 유림인사와 호남 의병장 사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역사에 전하고 있다.
또 위정척사 사상의 지도자들에 대한 추모의 단(壇)을 설치하는가 하면 서사에는 그들로부터 받은 글(記)을 걸어놓고 추앙하였다.또 그들로부터 고인(故人)의 찬장(撰狀)을 받는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알았다.
특히 임자도의 유림들은 화산 산록의 바위에 [위정척사]라는 명문을 새겨 강렬한 척사 의지를 천명하였다.당시 임자의 대표적 유림인사들이었던 농산 김두후(農山 金斗厚), 송산 이학재(松山 李鶴宰),광산 눌헌 임행재(訥軒),화산 화정 박종현(華亭) 등과 더불어 일제시대였던 1916년 화산 산록에 단을 설치하였다.그들은 그곳에 척왜를 주장하였던 조선의 충신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노사 기정진(蘆沙 奇貞鎭) 삼인을 분향하는 한편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그들의 신념을 바위에 암각,민족의 진로를 천명하였다.
섬지방 유림들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던 조선말 위정척사 사상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추앙을 받았는가.
이항로(1792-1868)는 병인양요 때(1866년) 주전론을 주장하였다.그는 서양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가져올 폐해로서 서양물건은 공산품인데 반해 우리 물건은 농산품이므로 저들과 교역을 하면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라 우려하였다.그러므로 서양물건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되면 서양 사람들은 조선에 오려고도 하지않을 것이라 주장하였다.그는 대원군이 추진하던 경복궁 중건의 중지를 주장함으로써 그의 배척을 받았다.직언자로서 우국과 존왕양이를 주장하였다.기정진과 함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원류로서 일컬어진다.
최익현(1833-1906)은 이항로의 제자이다.그는 흥선대원군의 퇴출과 왕의 친정을 주장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왕의 아버지를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1876년 도끼를 들고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 수교하려면 먼저 자신의 목을 치라면서 강화수호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그 해 9월 흑산도(우이도)에 유배되었다.면암은 흑산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진리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면암은 1879년 유배에서 풀려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궐기하였다가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 도중 사망하였다.
기정진(1798-1876)은 조선의 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서경덕,이율곡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다.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김평묵(1819-1891)은 1880년 만인소를 올린 영남유생들에게 [계속 척사운동을 펴면 각 도의 사민들이 이에 호응할 것이다]라며 그들의 위정척사 운동을 지원하였다.그도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소를 올렸다가 섬에 유배되었으나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김평묵의 문인으로 홍재학이라는 강원도 유생이 있었다.홍재학은 강원도 출신 유생들을 규합 척사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의금부에 구금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아 1881년 처형되고 말았다.홍재학이 형장으로 끌려 갈 때 시민들은 수레를 따라가며 통곡하였고 그를 처형한 형리는 칼을 던진 채 통곡하였으며 형장을 메운 사민들은 마치 친척이 죽은 듯 슬퍼하였다 한다.이처럼 당시 백성들은 척사 척왜운동에 대해 동조하고 있었다.
기우만(1846-1916)은 1881년 참봉으로서 김평묵 등과 함께 유생들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 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다.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하여 1896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의 봉기가 일어났다.전라도의 기우만,진주의 노응규,제천의 유인석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송사 기우만이 의병장에 추대된 호남 의병은 지방 관헌과 일본인들을 살해하며 광주(光州)까지 진격하여 장성 이하 13개 읍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기우만은 그 후에도 의병 활동을 게속하다가 1906년 체포되어 목포,서울 등지에서 복역한 후 출옥하였으나 또다시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64. 지도군지 편찬
지도군에서는 1908년 봄 군지를 편찬하였다.임자도 향원이었던 김형배는 지도군지 편찬 작업에서 장재(掌財)를 담당하였다.당시 군수였던 채수강이 서문을 썼다.모두 53편으로 되어있는 이 책에는 구한 말 지도군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지도군지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1)서 2)범례 3)지군지도 4)건치연혁 5)고적 6)관원 7)성지
8)지계도리 9)방리 10)공해 11)창고 12)결총 13)결총 14)부세
15)수산세 16)늠봉 17)호총 18)환총 19)군액 20)수군기즙물
21)산천 22)형승 23)진포 24)제언 25)관방 26)역원 27)봉수
28)사찰 29)장시 30)물산 31)속상 32)일사채록 33)단묘 34)학교
35)원우 36)서사 37)읍재선생안 38)성씨관적 39)문행 40)조행 41)충의
42)효행 43)효부 44)열행 45)출의 46)문과 47)사마안 48)무과
49)음사 50)가자 51)증직 52)발 53)유사록
Ⅴ.시련
65. 나라가 망하다
1910년 8월 조선이 망하였다.
그 동안 가꾸어졌던 섬지방의 질서는 식민질서로 대체되었다.자율적 향촌 질서가 강요된 타율의 질서로 바뀌었고 강제 공출에 따른 수탈로 경제적 역량 축적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덕망과 인품을 갖춘 향촌 지도자들 대신 임명된 식민 관리들이 섬지바의 제반사를 좌우하였다.자치와 식민의 이원적 지배질서가 마찰을 빚는 가운데 역동적 기운은 마모되어 갔다.구 체제는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였다.
일본은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였다.일본인들은 섬지방의 토지에 대해 측량사업을 실시하였다.그들은 주인이 없었던 토지들을 주민들에게 불하해주고 돈을 받았다.이를 상환료라 했다.땅을 불하받은 도민들은 사람들은 매년 농사가 끝나면 토지의 상환료를 납부하여야 했다.
1914년 3월 1일 자로 지도군이 해체되고 무안군이 신설되어 지도군 소속 대부분의 섬이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20년에는 전국적으로 괴질이 번졌다.병명도 모르는 이 병은 경상남도와 제주도에서 가장 참혹하게 확산되었으며 중국에서까지 많은 환자가 발생하였다.민심은 흉흉하였다.각지역에서 [자위단]을 구성하는 등 방역에 나섰으나 모두가 허사였으며 괴질은 확산되기만 하였다.
음울한 시대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질서는 모두 파괴되고 변혁되기 시작하였다.섬사람들 앞에 적응과 소극적 순종,또는 저항이라는 세갈래 길이 나타났다.입력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일제에 대한 초기의 작은 태도차이는 결과에서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게 되었다.변화의 씨앗은 아무도 몰래 은밀히 뿌려졌다.
66. 풍선과 기선
섬사람들은 외부와의 교통수단으로 풍선(風船)을 이용하였다.풍선은 돛을 세 개 달고 다니던 배였다.그것은 바람이 알맞게 불어주면 매우 잘나갔으나 바람이 자면 제자리에 서 있기도 하였다.
팔도선(八島船)과 나리선이라는 것이 있었다.팔도선이란 목포까지 가기 위하여 섬 여덟 개를 경유하였는데 각 섬안에서는 반대 쪽까지 걸어가고 섬과 섬사이는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선편을 말하였다.결국 배 여덟 척을 타는 셈이었다.이들은 각 섬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임자도배,광암배,위도배,압해도배 등이 그런 식이었다.나리선은 곧바로 내리 목포까지 가는 선편을 일컫는 말이었다.
1922년 임자도와 목포간 근대적 선박교통수단이 개통되었다.전라남도가 선박회사인 [해남공동운수회사]에 6000원의 보조금을 주며 27톤급 이상 발동기선 2척을 북부 및 남부 2개 항로에 취항시켜 3일에 1회씩 왕복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북항은 목포(주1)에서 압해도 망운면 선도,지도,임자도를 왕복하는 항로였고 남항은 목포에서 기좌도,자은도,비치도,하의도,장산도를 왕복하는 항해(주2)였다.
교통이 중심을 바꾸었다.발동기선 취항을 계기로 역사가 생겨난 이래 영광 법성포를 중심으로 짜여있던 임자도 인근의 지역질서가 목포 중심으로 재편(주3)되었다.
주1 당시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개항 이래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양곡과 면화의 집산
산지가 되면서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
주2 임자도 뿐만 아니라 진도군,완도군 일원의 각 섬도 임자와 동시에 발동기선이 취
항하였다.또 법성포와 위도간의 왕복발동기선도 이 때 개통되었다.
동아일보,대정 11년 5월 16일 4면 2단,1922
주3 이에 따라 목포로의 직항로 개통이 지역의 숙원사업이 되었다.
해제면 주민들은 목포에 있는 항운 업자와 교섭,목포 - 해제간 기선 항로를 열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업자들의 이권 문제로 인하여 결국 당국에 의하여 불허처분
되었다.
동아일보 소화 2년 12월 27일4면,1927년
67. 한학과 신교육
한학 대신 신교육이 도입되었다.일제는 보통학교를 설립,내선일체와 충실한 황국신민의 길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1922년 4월 20일 임자면장 정용택(鄭龍澤)과 김형배(金亨培) 등은 면유재산 일부와 일부 독지가의 의연금을 모아 [학술강습소]를 설치하였다.사설의 이 학술 강습소가 임자 최초의 신교육 기관이 된다.강사로는 조병록(曺秉錄)이 초빙되었고 생도수는 150여명(주1)이었다.강습소의 위치는 광산 부흥산 아래에 있었다.
이 사설 [학술강습소]가 모태가 되어 보통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1923년 초 [학교설립 준비 기성회]가 발기되었고 이어 [보통학교 설립 준비 기성회 창립총회]가 광산의 사설 학습강습소에서 면민 1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주2)되었다.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기성회의 임원을 선출하였고 선출된 임원들(주3)이 활동에 들어감에 따라 보통학교 설립 운동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마련에 동참하였다.1차로 1500여원을 모금하였고 2차로 1923년 1월 28일 대기리에서 소집된 학교 설립 준비기성회에서 기금모금 문제가 논의되었다.회장 정용택은 [회원각자는 기본경비 충당을 위해 생활비를 절약에 노력하자]는 요지의 연설로 큰 박수를 받았다.다음날부터 회원들로부터 출연이 답지하였는데 모두 백미로 20석(주4)에 달하였다.불이 지펴진 기금모금 운동은 면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받았다.주민들은 제사비용 절약,금주 저금운동을 실시하여 면 전체에서 3000원의 기금을 마련(주5)하였다.
보교설립기성회에서는 기금이 모이자 1923년 3월 20일 무안군에 보통학교 설립 탄원서를 제출(주6)하였다.그리고 그 해 12월 3일에는 면사무소에서 면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보교설립을 위한 면민대회]를 개최하였다.면민들은 보통학교가 설립되려면 적어도 5000원이 적립되어야 하나 현재 약 3000여원 밖에 모이지 않은 점을 감안해 더욱 생활비를 절약함으로써 부족분을 메꿔나가기로 결의하였다.이를 위해 향후 1-2년간 당시 유행하고 있던 고무신 대신 짚세기를 신기로 하고 이렇게 하여 절약될 것으로 예상되는 돈을 보교 설립 기금에 출연키로 다짐(주7)하였다.
면민들의 의지는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무안군에서는 보통학교 신설 대상지로 임자도를 내정하고 예산을 편성하여 [각 면 학교 평의원회]에 제출하였다.1924년 1월 23-24 양일간 개최된 학교평의원회에서는 임자도에 보통학교 설립을 결의(주8)하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보통학교 설립추진에 혼선이 벌어졌다.학교 설립 준비금과 근검저금 관리에 비리가 있다는 의혹이 대두되었다.주민들은 1924년 8월 면민대회를 열어 기금을 관리해 온 정용택 면장의 비행을 성토하고 비리규명을 위해 임자청년회와 노농회간부들을 문서 검사위원으로 임명하였다.선임된 검사위원들은 다음날부터 문서 검사에 착수하였으나 갖추어진 문서란 것이 겨우 4-5장 종이 조각에 불과하여 세밀한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할 수 없이 검사위원들이 면장에 대해 구두 질문으로 조사를 진행하자 정용택은 검사원들에게 검열중지를 요청하였다.
이 사건은 면장을 지지하던 세력과 비리를 조사를 추진하던 세력간에 알력을 유발시켰다.면장의 친족이었던 정근택(鄭根澤)과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산감 이군필(李君弼) 등 7-8명은 혁신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검사를 추진하는 청년회와 노농회의 각종 사업을 방해하고 나섰다.이에 대해 청년회측에서도 혁신파 박멸을 계획(주9)하며 반발하였다.
우여곡절끝에 결국 1924년 11월 26일 임자보통학교 설립 인가가 나왔다.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즉 학교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당초 학교 설립 내정지는 면의 정중앙에 있던 장동이었다.1924년 9월 무안군수가 면 유지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해본 결과 보통학교는 장동에 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이 나자 장동을 학교설립지로 결정하였고 곧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때 진리에 사는 정태성(鄭泰成)이 이의를 제기하였다.그는 [향후 임자도의 발전 가능성을 볼 때 장동이 아니라 진리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면민들이 학교 공사에 나가 부역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또 일부주민들로부터 동의를 얻어 학교위치 변경신청을 전라남도와 무안군에 제출하였다.공사가 중단되었다.이렇게 되자 학교위치가 진리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장동을 지지하는 주민들은 분개하였다.그들은 [만일 학교 위치가 진리로 변경된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며 도당국에 항의 차 출발함으로써 큰 물의(주10)가 일어났다.
무안군수는 1925년 1월 14-15일 임자도에 출장을 나와 실지를 답사하였다.그는 면민들에게 협력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면 유지와 청년회 간부모임을 갖고 의견을 청취하였다.그러나 이 모임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일부 참석자들은 임자도의 지리적 여건상 면의 정 중앙에 해당되고 기초공사가 실시되다가 수차에 걸쳐 중지되었던 장동이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장래 발전상을 보면 진리가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면내 평화를 위하여는 대기리가 좋다고 주장하는 등 의견이 엇갈렸다.이들이 서로 양보하지않고 자기의 입장을 큰 소리로 주장하는 바람에 모임은 수라장이 되었다.참석하였던 경찰관이 뜯어 말리고 주의를 주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보통학교 위치 선정문제는 군수에게 위임되었다.
보통학교 위치는 장동과 진리,그리고 대기리 그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군수는 제기된 세가지의 의견을 절충하여 중간지점을 학교 위치로 최종 결정하였다.그곳은 아무도 살고 있지않는 바닷가였다.오늘의 교동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하여 설립된 보통학교가 지금의 임자중앙초등학교이다.임자 보통학교(주11)는 1925년 신입생을 받았다.학교교사는 임시로 임자 청년회 회관을 빌어썼다.교장은 무자(武者,주12)라는 일본인이었다.(주13)
보통학교를 허가하고 설립한 일제의 목적이야 어떻든 임자도 땅에는 최초의 공교육 기관이 설립되었으며 그곳에서 신학문이 가르쳐졌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에 선뜻 응하지않는 사람들(주14)도 많았다.신학문은 양이(洋夷)와 왜의 것으로 사람을 버리게 하는 [개글]에 불과하다는 믿음때문이었다.한학과 신교육은 이후에도 상당기간 병존하였으나 결국 한학은 신학에 주도적 자리를 내주고 만다.
주1 동아일보 1922년 5월 12일 4면4단
주2 1923년 1월 22일
주3 임원진 명단
고문 : 김형배
회장 : 정용택 (당시 면장,6.25당시 좌익에 의하여 피살)
부회장: 이군필(李君弼) (부동인 6.25 당시 좌익에 의하여 피살)
총무 : 김영숙(金永淑)
간사 : 고문삼(高文三),남영방(南永邦)
평의원 약간 명
동아일보 1923년 3월 4일 4면 3단
주4 동아일보 대정 12년 2월 20일 4면,1923
주5 동아일보 1923년 2월 20일,3단 4면
주6 동아일보 1923년 4월 4일,4면 3단
주7 동아일보 1923년 12월 13일,3면 1단
주8 당일 열린 평의회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였다.참석 평의원들이 군에서 내정한 사항
(임자도와 비금도에 보통학교를 설립한다)에 불공평한 점이 있다하여 군의 원안을
그대로 통과 시키지 않고 투표로 결정한 것이다.그 결과 임자도는 최고 표를 얻어
결정(당시 무안군 21개면 중 임자와 해제가 9,10번째의 학교 설립)되었으나 의외
로 군에서 내정한 비금은 탈락하고 해제면이 차점을 얻게 되었다.
비금면 의원은 매우 분개하여 의장에게 맹렬히 항의하여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자기들 탈락 사실을 안 비금면에서는 난리가 났다.면장 이하 구장들까지 총사직하
는 등 군 당국에 격렬히 항의하였다.(동아일보 24.1.31,3면 3단)
비금은 다음해에야 학교 설립이 결정되었다.
주9 동아일보 1925년 1월 13일, 3면 5단
주10 동아일보1924년 12월 22일, 2면 1단
주11 초등 교육 기관의 이름은 시기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하였다.
1895년 설립된 소학교로부터 시작되어 1906년에는 보통학교,38년에는 다시 소학
교로,41년에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보통학교에서 소학교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
은 일제가 그들의 학교 명칭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기 위한 목적에서였으며 국민
학교로 바뀌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을 본격화한 41년에 발표된 일본왕 히로히토
의 칙령 제 148호에 따른 것이었다.이 칙령은 학교 이름개칭과 함께 국민학교에
서 황국의 필요에 적합한 (황)국(신)민을 길러 내기위해 황국신민화 교육,전시
교육을 시키도록 했다.이에따라 당시 국민학교에는 연성소 간판이 달리고 태평
양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주12 일제 말엽 임자국민학교 교장은 스기모도 마사하루였다.일본인 교사는 도꾸미야,
이시가끼,후미다,가메모도 등이 있었다.한국인 교사는 장종남(회산),박판석,탁내
철 등이 있었다.
주13 동아일보 1925년 2월 11일,2면 3단
주14 무안군 전체 1932년 초등학교 취학적령아동수는 3만 4000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취학아동은 관내 보통학교 15개 학교에 3538명에 불과하였다.
동아일보 32.9.24,4면 3단
68. 당골과 교회
신안군 관내에는 9가(家)의 세습무가 있다.임자도의 장동 [작은년]과 대기리의 [김사장심](金士章心) 2가,흑산도 성리의 [공영심]과 [한행당] 2가,도초도 만년리의 [양군심] 1가,비금도 한산리의 [유점자] 1가,장산도 마초리의 [강부자]와 [진금순] 2가,안좌도 창머리 [김안순] 1가들이다.이들은 9-10대에 걸친 세습무들(주1)이었다.
임자도에는 모두 2가의 당골이 세습되고 있었다.그들은 각각 장동과 대기리에 거주하며 임자도 내 동네를 분담 관장하였다.장동의 당골은 서면지역을 맡았으며 대기리의 당골은 동면을 전담하였다.그러나 큰 굿이 있을 때는 공동으로 굿판을 벌였다.당골들은 이사를 가거나 자기가계에서 당골일을 볼 수 없게 되면 자신들이 맡고 있는 지역을 다른 당골에게 일종의 권리금을 받고 넘겼다.이를 두고 [당골이 양반 팔아 먹는다] 하였다.
대기리의 당골은 임씨 성을 가졌다.그 집안 며느리 중의 한 명이 김사장심이었다.임방포라는 사장심의 아들이 무업을 세습하였다.큰 굿을 벌일 때는 그의 전 가족이 동원되었다.방포는 피리,퉁소를 불거나 북,장구를 쳤으며 방포의 부인은 장구를 치고 신에게 빌었다.훗날 이들은 그들의 사당을 불살라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장동의 당골은 세습되어 오던 가업이 [달원]에게 이어졌고 달원이 죽은 후 큰아들 [소동]이가 맡았으며 소동이 죽은 후 누이인 [작은년]에게 세습되었다.달원은 큰아들 소동이와 3남 [노랑수]를 데리고 장동에서 당골을 하며 부업으로 성냥장이도 하였다.그의 처도 당골일을 도왔다.행실이 무척 바르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장동에서 태어나 장동에서 살다 장동에서 죽었다.그의 아들 소동이도 아버지와 같이 장동에서 당골과 성냥장이로 평생을 보냈다.6.25전에 죽었다.
달원(당골)
+---------+------+------+----------+
소동(당골) 시째(주2) 노랑수 작은년(당골)
............... 달원 -> 소동 -> 작은년으로 세습
장동 최후의 세습무 [작은년]은 오빠로부터 가업을 이어 받았다.그녀의 남편은 [진재옥]이라는 사람이었다.그는 풍습에 관계되는 사고를 내 동네사람들에 의해 마을에서 쫗겨나고 말았다.이후 그는 다른 여자를 보아 지도장에서 주막을 경영하였다.남편이 동네에서 쫗겨난 뒤로도 작은년은 매우 착실히 당골일을 보았다.그녀는 연초가 되면 자기가 돈을 내어 동네에 금고도 치게하기도 하였고 집집마다 비손(주3)하여 평온을 빌었고 동네사람들의 중요행사를 꼭꼭 챙겨 잡귀의 침범을 막아주었다. 신분상의 하대와 천시에도 불구하고 서면지역 주민들과 대를 바꾸어 친교를 맺으며 지역과 그들 가정의 번성의 수호자임을 자임하던 장동의 당골은 1970년대 [작은년]이 죽음으로써 맥이 끊어졌다.그 후에는 외지의 뜨내기 점장이들이 들어와 일시적으로 거주하며 당골일을 보았으나 세습은 아니었다.일제 말엽 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가 들어왔다.교회의 전도사는 천대되던 [작은년]과는 달리 존경을 받는 가운데 동네사람들을 그가 모시던 신에게 인도하였다.옛 것은 천시되었고 새로운 것은 존경 받았다.
주1 최덕원,남도민속고 PP499-500.최덕원은 임자 장동리의 작은년을 빼고 8가의 세습
무를 적시하였다.
주2 소동의 동생 시째는 일을 하지않고 놀기만 좋아 하였다.그는 당골 행세를 절대 하
지 않았으며 나박바구(타리) 파시나 잔치집을 찾아 놀로다니는 것을 주업으로 하
였다.육자배기를 잘했고 북과 장구에 능했다.그역시 장동에 살다가 죽었다.그 아
래 노랑수는 당골을 하지 않았고 성냥을 하였다.
주3 아들이 귀한집에서 아들을 얻으면 오래살라고 하여 아들을 당골에게 파는 풍습이
있었다.당골을 자기의 속것 속으로 갓낳은 아이를 통과 시켜 준다.그러면 그아이
는 커서도 당골을 어매라고 불렀다.동네 집집에서는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당골을 불러 묻거리도 하고 빌기도 하였다.특히 정월달이면 당골이 정해준 날에
[비손]을 하여 가정의 평온과 잡귀의 침범을 막았다.
69. 활방구와 샤미센
1900년대 초반 [둥덩에 타령]이 부녀자 사이에 유행했다.이는 부녀자들이 물방구,활방구(주1)의 투박한 장단에 맞추어 선후창,교환창 또는 합창으로 부르는 집단가였다.명절이나 마을에 경사가 있으면 마당이나 큰 방에 모여 신명나게 부르는 유희요(遊戱謠)이자 장한을 달래는 수심가였으며 작업의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노동요이기도 했다.그러했기에 둥덩에 타령의 가사는 시집살이,임과의 사랑,이별, 한 등 부녀자들의 서정적 정회를 술회하는 것이 대부분(주2)이었다.
[둥덩에다 둥덩에다 당지 둥덩에 둥덩에다
둥덩에 다리 거 누가 냈냐
건방진 크내기 요 내가 냈네
당지 둥덩에 둥덩에다](주3)
일제시대 때 보통학교와 주재소에 일본인들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타리파시에는 일본 창기들까지 들어왔다.그리하여 샤미센(三味線) 소리에 맞추어 [조센도시나 도노아 노사가이]하는 일본 여인들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졌고 [겐자야 겐자야 겐자겐자 겐자야] 라거니 [이찌도꾸와 오이데와 하나가 샤꾸요] 또는 [쪼이나 쪼이나 도꼬이쇼] 등의 일본노래들이 흥얼거려졌다.
폐쇄된 지역이라는 독특한 환경에 따라 섬지방에는 특유의 민속노래가 부녀자는 물론 남정네들 속에서 많이 불려졌다.그들은 그러한 노래들로 외로운 낙도의 시름과 수심을 달래었다.
주1 물방구는 물을 담은 옴박지에 놋쇠그릇을 놓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 숟가락으로
장단을 친다.활방구는 방의 창문이나 옴박지의 바가지 위에 면화에서 실을 뽑을
때 쓰는 활을 얹어 놓고 그 줄을 잡아 퉁긴다.
주2 최덕원,남도 민속고,pp450-452
주3 남순자,임자 장동,92.1.21
70. 새로운 사회운동
1920년대 초 임자도에는 밀물처럼 밀려 들어 오던 외래사상에 자극 받은 사회운동이 추진되었다.그것은 [임자청년회]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임자 청년회는 늦어도 1924년 12월 이전 결성되었다.산하에 산업,지육,체육,덕육,재무,서무,총무 등 7개부(주1)를 두고 도민 계몽에 앞장섰다.그들은 주민들을 교육하고 주민들을 조직하였으며 호구 조사 등 사업을 벌이는 한편 당시 전국적 현안이었던 소작 문제에 대해 관심(주2)을 기울였다.
그들은 청년회의 활동을 임자도 내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외지의 단체들과도 연대하여 민족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1925년 무목청년연맹회(務木靑年會)의 창립멤버로 가입하였다.무목청년회란 무안군과 목포시의 각 지역 청년회의 연합조직이었다.이 모임은 목포무산(木浦無産),무안,암태,자은,비금,도초의 5개 청년단체들이 앞장서 암태 청년회관에서 발회식을 거행한 다음 목포에 사무실을 두고 창립을 준비하고 있었다.임자 청년회는 동 청년연맹에 가입키로 하고 창립대회(주3)에 대표 3명을 파견하였다.
일본 경찰은 무목청년연맹이 민족의식 고양 등 불온활동을 벌이려는데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청년연맹이 1926년 10월 11일 목포청년회관에서 제 1회 대회를 개최하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였다.그러나 목포 노동소년회 간부 10여명이 대회 방청을 위해 입장하였음을 확인한 감시 경관은 의장에게 [본대회는 외부인의 방청을 금지할 터이니 입장한 방청인은 곧 내보라]고 요구하였다.소년회 간부들이 퇴장하려하지 않았다.경찰관은 이를 이유로 대회를 중지(주4)시킨 다음 대회 출석 대의원들을 검속(주5)하였다.다음해 무목청년연맹에서는 1927년 4월 23일 목포 청년회 강당에서 제 2회 정기대회를 열고 민족운동(주6)에 관한 토의를 벌이려 하였다.그러나 이 역시 임석 경관에 의하여 토의가 금지되고 중도에 대회가 저지되고 말았다.
임자 청년회에서는 무목청년연맹에 그치지 않고 전남지역 13개 단체들과 함께 전남 청년대회를 발기(주7)한데 이어 1926년 3월 23일 나주청년회관에서 전남청년대회 창립대회(주8)를 열고 [청년문제로는 무산계급 해방운동에 충실한 역군양성을 본령으로 하고 이류(異流) 청년단체는 개혁 또는 박멸시키며 순회문고,강좌,독서회,강연회,도서비치 등을 실시하고 사회문제로는 노농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신앙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되 기성 종교는 철저히 부인하며 교육제도를 조선인 본위로 할 것을 주창하되 종래의 서당교육은 개혁하고 타협적 민중운동은 철저히 배척하며 형평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후원하며 사상단체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연구하고 소년단체를 조직하여 무산계급의식을 교양할 것]을 결의하였다.
임자 청년회에서는 외부 청년단체들에 대한 지원활동도 벌였다.완도군 소안면 노농연맹 대성회(大成會)간부 10여명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자 1925년 1월 임원회를 열어 지원방안을 논의하였다.그들은 대성회 간부들이 소작쟁의 운동과 관련하여 수감된 것은 무산자들 전체의 이익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집약하고 성금 모금에 나서기로 했다.경찰에서 모금 운동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청년회 회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총 21원 85전을 갹출하여 대성회에 전달(주9)하였다.
주1 초기 [임자 청년회]의 임원진 명단
회장: 김종섭(金鐘燮)
총무: 최규선(崔圭瑄)
서무: 박윤포(朴允布) 김정섭(金正燮)
재무: 김원태(金元台) 고현석(高炫錫)
지육: 김종범(金鐘範) 남정석(南廷晳,대기리인)
덕육: 고재천(高在天) 이종택(李鐘澤,부동인)
체육: 변재순(卞在淳,도찬리인) 이종민(李鐘敏,부동인)
산업: 한덕오(韓德五) 이년숙(李年淑)
동아일보 1925년 3월 20일,3면 1단
주2 임자 청년회에서는 1925년 2월 1일 임시의장 정두현(丁斗鉉)의 사회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자작.소작농 조사의 건,소작권 보호의건,사상단체 조직 후원의 건,호구
조사의 건들을 집중협의하고 청년회 주최로 학술강습소를 설립하여 무산아동을 가
르치기로 결의하였다.
동아일보1925년 2월 6일,부1 10단
주3 1925년 1월 10일 하오 6시 반 목포부 남교동 희망유치원에서 임자,해제,지도 등
8개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창립대회를 가졌다.
동아일보,대정 14년 1월 13일 3면4단,1925
주4 동아일보,대정 15년 10월 16일 4면 3단,1926년
주5 동아일보 대정 15년 10월 15일 5면 7단,1926년
주6 동회 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년운동 방향에 관한 건,조직 원칙에 관한 건,교양에 관한 건,선전에 관한 건
조사에 관한 건,노농운동에 관한 건,민족운동에 관한 건
동아일보 소화 2년 4월 26자 4면 5단,1927년
주7 1925년 2월 22일
목포 남원여관에서 완도청년회,암태청년회,목포무산청년회,자은청년회,비금청년
회,도초청년회,지도 청년회,임자청년회,해제 청년회,배달청년회,나주 청년회,담양
청년회,광주청년회,전남청년회연합회 등 전남에 있는 13개 청년단체 대표가 모여
전남청년대회를 발기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1925년 2월 26일,3면 1단
주8 참가단체는 32개 단체였으며 이 중 출석대표가 26인 개인 참가자가 16인이었다
주9 출연인들과 금액을 보면 회산리 최권숙(崔權淑),장봉안(張奉安)등 33인이 5원20전
을,장동리 정경남(鄭京南),이공숙(李公淑) 등 25인이 5원을,구산리 남정주(南廷
柱),김정일(金正逸) 등 16인 이 2원 85전을,삼막리 김원태(金元台),김두용(金斗
用) 등 14인이 2원 30전을,광산리 정병택(鄭炳澤),고문삼(高文三) 등 4인이 2원
을,대기리 남정석(南廷晳),김태진(金台鎭) 등 16인이 3원 80전을 갹출 동아일보
함평지국을 통해 전달하였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3면 3단
71. 이중 소작료 불납동맹
새로운 사회운동과 더불어 노농운동이 시작되었다.노농운동은 사회운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다.그러나 사회운동은 사회 각 분야의 변혁을 추구하는 계몽적 성격이었다면 노농운동은 노동자와 농민을 축으로 하는 계급운동의 성격이었다.
노농운동의 사상은 야학을 통하여 임자도에 도입되었다.당시 면장 정용택의 발기로 진리에 [노동야학회]가 설립되었다.이 노동야학회에서는 주도현(朱燾鉉)이 출강하여 무보수로 주민들을 가르쳤으며 야학회에 필요한 비용은 면내 유지들이 부담(주1)하였다. 이렇게 하여 널리 뿌려진 노동운동의 개념은 무산동우회와 노농회라는 양갈래로 조직화,구체화되었으며 청년회에 의하여 후원되었다.
무산동우회는 정두현의 주도로 1924년 12월 25일 주민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자 청년회관에서 발기(주2)되고 1925년 2월 1일에 창립총회를 개최(주3)함으로써 출범되었다.무산동우회는 1925년 3월 8일 청년회관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동회의 사업을 토의하고 무산자 운동에 대한 강연을 실시(주4)하였다.
노농회는 청년회를 모태로 하여 창립된다.노농회는 2차에 걸친 시도 끝에 창립되었다.첫번째 움직임은 1924년이었다.
그해 9월 15일 임자 청년회에서는 면민 1500여명 참석리 면민대회를 열어 소작문제를 중점 토의하였다.참석자들은 [현재 지주 계급의 가혹한 처사와 무산 대중의 고통은 인류상 불평등 문제]라 주장하면서 즉석에서 임자 노농회를 결성하였고 노농회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매년 면 특산물인 면화 판매 시기가 되면 1근(주5)에 1전씩 수금하기로하는 한편 노농회임원을 선출(주6)하였다.
노농운동은 당초 청년회에서 관장하여왔다.청년회는 여성 소년 형평 교육 등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어 노농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그 결과 임자도에서의 노농운동은 소극적 활동에 그치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상황은 소작쟁의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임자도 주변 도서지방(주7)에서까지 소작료 삭감운동 이 맹렬히 벌어지고 있었다.이에 따라 노농문제를 청년회로부터 분리시켜 보다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다.이에따라 1925년 3월 청년회 산하의 노농부가 청년회로부터 노농회로 분리 독립(주8)되게 된다.
임자노농회는 1925년 4월 30일 수백명의 회원들이 청년회관에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가졌다.최규선의 개회사로 대회가 시작되었고 청년회장 김종섭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회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임한 다음 노농회가 집중 힘써야 할 당시의 최대 현안이었던 소작문제에 대해 토의(주9)를 벌이고 소작운동을 적극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진리에 정태성(鄭泰成)이라는 대지주가 있었다.그는 소작운동을 비롯하여 새로운 운동이라면 모두 반대를 하던 사람이었다.그는 모내기 할 때까지도 소작인을 수시로 바꾸고 하여 주목을 받고 있었다.자신이 지주이면서도 당시 임자도에 땅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삼주정(森酒井),내전우의(內田佑義)와 문재철(文在喆,주10)등의 사음(舍音)까지 맡아 논보리에 3할 이상의 이중 소작료를 부과하고 있었다.소작인들의 반발에 대하여는 업무방해로 고소하겠다며 맞서고 있어 사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노농회에서는 긴급 위원회를 열었다.정태성에세 직접 각성을 촉구하자고 결의한 다음 교섭위원을 선정,교섭을 벌였다.그러나 정태성은 노농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오히려 [소작인들로부터 이중 소작료를 받아 일본정부에 보내겠다]는 식으로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노농회에서는 1925년 9월 2일 다시 회의를 열고 이튿날부터 대를 지어 면내 각 처를 순회하면서 [이중 소작료 불납동맹 결성]을 선언하는 동시에 기납된 소작료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키로 결의(주11)하였다.
주1 동아일보,대정 12년 4월 4일 4면 2단,1923
주2 동 모임에서는 정두현이 취지를 설명한 다음 동회 창립을 가결하였다.
발기위원으로 최권숙,박병언,김종택(金鍾澤),변재순,고현석,신홍균(申洪均)
등이 선정되었다.
동아일보,24.12.31
주3 창립총회는 정두현의 사회로 진행되었다.회칙을 통과및 제반 사항에 대한 결의가
있었으며 위원을 선출하였다.
임원진 명단
상무위원장 :정두현(丁斗鉉)
상무위원 :박윤희(朴允希),최권숙(崔權淑)김종범(金鍾範)
위원 :박병언(朴炳彦),정병택(鄭炳澤)
동아일보 1925년 2월 4일,3면 8단
주4 동아일보 1925년 3월 3일,3면 4단
주5 1924년 11월 목포시장에서의 면화가격은 1등 100근에 28원 72전,5등은 23원 78전
에 거래되었다.
동아일보 24.11.24,5면 6단
주6 간사 명단
김종섭(金鐘燮,삼막동인),최영숙(崔永淑),김형준(金亨俊),이공숙(李公淑,장동인)
이돈숙(李敦淑),최덕행(崔德行),장동일(張東一)
동아일보24.9.20,3면 2단
주7 1923년 9월 - 1924년 9월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났으며 1925년 가을에는
도초,자은,매화,압해,하의도,지도까지 번져 소작인들은 지주,경찰과 충돌하였다.
당시 소작료는 거의 7할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이를 소작쟁의라 하는데 당시 일
제는 이를 적색농조라고 불렀다.
주8 임자 청년회에서는 25년 3월 12일 오전 11시에 회의를 열어 청년회와 노농부를 분
리함으로써 노농문제는 노농회에서 전담하기로 하고 청년회는 청년 총동맹 및 전
남 청년대회에 가맹하기로 결의하였다.
청년회 임원
회장 : 김종섭(金鍾燮)
총무 : 최규선(崔奎瑄)
서무 : 박윤포(朴允布), 김정섭(金正燮)
재무 : 김원태(金元台), 고현석(高炫錫)
지육 : 김종범(金鍾範), 남정석(南廷晳)
덕육 : 고재천(高在天), 이종택(李鍾澤)
체육 : 이종민(李鍾敏), 변재순(卞在淳)
산업 : 한덕오(韓德五), 이년숙(李年淑)
동아일보 1925년 3월 20일,3면 1단
주9 동아일보 1925년 4월 30일,1면 3단
주10 암태도 소작쟁의의 원인을 제공한 대지주,나중 목포에 문태고등학교를 세운다
주11 동아일보 대정 14년 9월 8일,5면 5단,1925
72. 변화의 바람은 불길이 되어 번지고
보교기성회,청년회,노농회등 면 단위 조직의 활발한 움직임은 각 부락민들에게 까지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주민들은 서로 호응하며 암울한 시절 면민이 나아갈 바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각성을 기초로 마을 단위 사회운동을 추진할 작은 조직들이 결성되었다.
회산과 삼두리,부동에서는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담배 끊기 운동에 나섰다.사람들은 단연회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주1)하였다.
삼막동에는 교풍회(矯風會)가 설립되었다.교풍회는 동네의 풍속순화를 위해 노력한 기구였다.산하에 산업부를 두어 농사를 개량하였으며 도박금지위원을 두어 매일 저녁 야간 순찰을 실시토록 하여 동네사람들의 도박행위를 단속하였다.순찰활동은 상당히 강력하게 추진되었다.도박금지 위원들이 임무를 태만히 할 경우 벌금(50전)까지 내도록 하였다.또 교풍회에서는 1924년 12월 1일부터 야학을 실시하여 주민들을 계몽하였다.교수는 김원태(金元台),김두용(金斗用,주2) 2인이 무보수로 봉사(주3)하였다.
주1 동아 일보 대정 12.4.4 4면 5단,1923
주2 김두용은 삼막동인.그는 해방 후 공산주의자라 하여 미군정 당시 경찰에 의해 목
포로 압송되어가 사형에 처해졌다
주3 1924년 11월 당시 삼막동 교풍회 임원을 보면 회장은 金權培,총무는 金鐘範이었으
며 교풍회의 입회비는 20전이었다.
동아일보 1924.11.16,3면 6단
73. 울밑에 선 봉선화
일제는 전시 수탈 체제를 강화하였다.
민족운동을 꿈꾸는 자들은 일경에 의하여 불령선인으로 감시 받았고 끌려가 처벌받았다.유학자들은 물론 보통학교를 거쳐 배출된 젊은이들도 갈길을 찾지 못하는 혼돈의 시대가 왔다.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드는 젊은이들 뒤로 개인의 생존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군상과 생의 의욕을 잃고 아편에 몸을 맞기는 영혼들이 뒤섞이었다.
구산 독수리
백용두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임자도 구산출신으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야학등을 다니며 선배들로부터 조선독립과 반일사상을 학습 받았다.그는 20대에 들어 자신이 직접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독서회를 중심으로 민족 자주정신과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피검되었다.독서회 회원 전원(주1)이 목포 경찰서에 끌려가 전기고문,거꾸로 매단채 코에 고춧가루물 붓기,나체로 채찍맞기 등 갖가지 고문을 당하였다.결국 다른 사람들은 풀려 나올수 있었으나 주도자였던 백용두는 실형을 언도받고 목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년 가까운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백용두는 가족과 동지(주2)들을 데리고 일시 서울에 체류하다가 신흥공업도시 흥남으로 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후 그는 다시 목포로 내려와 목포에서 '평전회조부'라는 물류유통회사를 설립하고,생기는 수익금으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다가 또다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재수감되었다.그는 해방직전인 1945년 봄 병보석으로 풀려나 들것에 실려 고향,임자도 구산마을로 돌아왔으나 얼마되지 않아 고문 후유증 (내종:갈비가 부러져 몸속에 화농 발생)으로 사망(주2)하고 말았다.
조락
1937년 큰 흉년이 들었다.벼는 붉게 타올랐으며 사람들은 벼수확을 포기(주3)하였다.이 해 뿐만 아니라 광복을 전후한 칠,팔 년 동안 가뭄이 들어 큰 흉년이 계속 되었다.사람들은 쑥으로 죽을 끓여 삶을 이어가야 했다.
아편이 유행하였다.가치관이 붕괴되어버린 사회에서 아편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도민들은 섬 곳곳에 양귀비를 재배,아편을 제조하였다.아편 중독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건강을 버린 사람들이 속출하였다.당시 아편을 [모루히네](모르핀)라 하였다.
1941년에는 대동아 전쟁이 터졌다.일제는 국민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징용(주4)과 징병제(주5)를 실시하였다. 징병된 이들이 임자를 떠나는 날 국민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환송 행사가 실시되었다.임자 보통학교 교장 스기모도 마사하루는 중앙교 학생 600여 명을 진리 선창에 내보냈다.학생들은 손에든 일장기를 흔들고 소리높혀 [반자이]를 외치며 환송했다.국민학교의 고적대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이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징용자를 실고 출발하던 배는 출발에 앞서 뱃고동을 울리면서 선창 앞 바다를 세 차례 선회하며 환송에 답하였고 이 때 쯤이면 일본의 공군기도 나타나 징병선의 상공을 선회하여 주었다.익숙치 않은 일본 군복을 입은 징병자들은 배 위에서 임자도가 보이지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1 임우순,김갑순,임상순,전우생,정태섭,정윤석,최영언,안금동 등
주2 정윤석,전우생
주3 해방이후 임자면내 좌우익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면내 지도자로 모셨으며 해방 이후 면내 집회에 초청받은 그는 들것에 실려나가 청중앞에서 짧게 연설하는 등 역할을 다하였다.그가 사망한 후 무안군 출신 제헌의원 장염홍은 그의 집을 찾아 유족들에게 "형님이 의원이 되어야 하는데 형님을 대신하여 못난 내가 의원이 되었다"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주3 무안군 관내 미작수확은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동아일보 37.10.13자 7면 1단,11.26자 7면 2단
주4 일제는 국가총동원법(1938년)과 국민징용령(1939년)을 제정하여 국내에서 징용자
를 모집하였다.장동의 박소자,김종평등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일본에서 강제노역
에 종사하였다.
주5 육군 특별지원병 령(1938년),해군 특별지원병 령(1943년)을 각각 시행하여 한국인
에 대한 강제 징병을 실시하였다.장동의 박종용 등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74. 전위동맹과 공산주의
임자도와 관련된 최초의 공산주의 관련기록(주1)은 [1934년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는 지도(智島)의 전위동맹(前衛同盟)에서 임자도에 농민조합을 조직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공산주의 열성자 전남협의회 사건] 관련자인 임귀석이 1933년 9월 중순 경 지도 사람 김칠성(金七星)과 황성연(黃成淵)을 지도하였다.지도를 받은 두 사람은 지도에서 농민조합운동을 벌였다.그들은 [사회과학 연구회]라는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조직원을 포섭하였으며 1934년 말에는 [농민]이라는 제목의 반전 뉴스를 각각 10부씩 제작한 뒤 조직원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1934년 9월 [전위동맹]이라는 조직을 결성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그들은 조직 결성과 동시 [임자도에도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주2)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지도의 전위동맹 회원들은 이후 사회과학 강좌회 개최,지도 농민조합 건설위원회 조직,야학을 통한 청소년 교양활동,간척장 인부들에 대한 선동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8월 일본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주3)받았다.
임자도에 알려지고 있는 공산주의 유입에 대한 이야기(주4)는 보다 추상적이다.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임자에 들어와 장목재에서 엿장수를 하며 살고 있었다.당시 장목재에는 집이 2-3채 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유식하여 부동을 중심으로한 인근 동네의 청년들이 저녁이면 그 집으로 놀러 가곤 하였다.그의 실체는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그는 그를 찾아온 임자도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그 후 그는 임자를 떠나 지도로 들어가 뚝 막는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일경에 의해 피검되었다.그가 검거되고 난 뒤에야 그가 임자도로 들어와 공산주의와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의 집에 놀러 갔거나 친하게 지냈던 임자도 사람들이 목포경찰서에 불려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재판의 기록과 구전의 내용으로 볼 때 지도의 전위동맹 관계자가 임자도에 들어와 청년들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지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1 일제하 농민조합운동연구,1993,지수걸,역사비평 pp458-460
주2 지도의 전위동맹이 임자도내 조직결성을 추진하기로 한 까닭은 1926년 1월 말 지
도,도초도,안좌도,암태도,하의도,자은도,압해도,비금도 등에는 농민조합이 결성되
어 있었고 이들의 연합기구인 '무안 농민조합 연합회'까지 창립되어 있었으나 임
자도에는 그때까지 농민조합이 결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조합의 실질적 조직 활동은 각 섬의 지부조직이 주도하였으며 무안농민조합연
합회는 각 지부의 공동관심사를 협의 실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주3 1심에서 임귀석(27세)은 3년 6개월,김칠성(31세)은 2년 6월 선고
주4 이인철,전임자면장 증언
75. 매맞는 사람들
어부 우명길(禹明吉)이 1920년 7월 4일 오후 2시경 고기잡으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포구로 나가는 길은 타리 일본인 목하미일(木下彌一)의 색주가(色酒家) 앞을 지나가야 했다.그가 목하미일의 집앞을 지나고 있을 때 그의 집 고양이가 그를 보고 방정맞게 울어대었다.우명길은 고기잡으러 갈 때 고양이가 울면 재수가 없다는 생각에 옆에 버려져 있던 맥주병을 집어 고양이에게 던졌다.그러나 맥주병은 고양이에 맞지않고 색주가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안에 있던 일본인 여자 2명이 이를 보고 뛰어 나와 우명길과 싸움이 벌어졌다.
근처의 일본인 3명이 있었다.일본인들은 우명길과 색주가 여자들의 싸움을 말리는 체하면서 일본여자 편을 들어 혼자인 우명길을 집단으로 폭행하였다.우명길은 이들에게 흠씬 얻어맞아 머리가 깨어지고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어부가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을 듣고 임자도의 어부 100여명은 크게 분개하였다.그들은 싸움장소로 달려가 우명길을 집으로 데려가 치료하게 한 다음 타리에 나와있던 파출소로 몰려가 경찰에게 [경찰은 어찌하여 여러놈에게 무참히 얻어맞는 우명길을 보호하지 않느냐 ?]하고 항의하였다.임자도 임시출장소에 근무하고 있던 순사들은 그들의 편파적 행위를 비난하는 어부들의 형세가 험악하자 크게 놀랐다.
그들은 본서인 목포경찰서에 [임자도 어장 어부 100여명이 출장소로 몰려와 우리를 폭행하려 한다] 고 급보를 띄웠다.목포 경찰서장 야상(野上)은 전보를 받고 즉시 무장시킨 순사 5명을 데리고 임자도로 출발해 사건의 전말을 조사(주1)하였다.
1925년 9월 15일 폭풍우가 있었다.어선 수백척이 태이도 부근 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가 폭풍우를 만났다.목포경찰서 일본인 경부등이 대책마련을 위하여 경비선을 타고 임자도를 찾아왔다.그들은 태이 주재소에 창기를 불러다가 술자리를 차려 밤이 늦도록 놀고 있었다.
그 때 임자도 어부 추태현(秋泰鉉)이 우연히 주재소 앞을 지나갔다.흥겹게 놀고 있던 순사들이 추태현에게 시비를 벌였다.추태현이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그들은 버릇없는 놈이라 하며 추태현에게 달려들어 결박하여 꿇어 앉히고서 여러명이 그를 무수히 난타하였다.주위의 어부들이 이 소동에 놀라 몰려들었다.
위협을 느낀 순사들은 어부들에게 [목포 경찰서 순사를 모르느냐 ! 경비선을 가지고 왔으니 모두다 잡아 목포 경찰서로 보내버리겠다]고 고함치며 협박(주2)하였다.
주1 동아일보,1920.7.29,3면 5단
주2 동아일보 대정 14년 9월 16일 2면 8단,1925
76. 타리 파시
임자도 도구 뒤 섬타리쪽을 [타리] 또는 [나박바구] 라 한다.이곳에는 정유재란 이후 어항이 들어섰다.이곳 타리어장에서는 민어와 가오리,부세,농어,숭어가 많이 잡힌다.어획고는 1925년기준 연산 30만원 정도였다.
타리 어장은 전국 제일의 민어어장으로서 타리항으로부터 이삼십 해리 되는 곳에 있다.민어잡이의 전진기지인 타리항은 어선 500척 가량이 정박할 수 있다.타리항 앞에는 뭍타리와 섬타리가 있어 서해안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막아주어 비교적 좋은 항구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타리항 앞바다에는 수십km에 이르는 긴 모랫등이 있다.법성포에서부터 타리 앞바다를 지나 해남까지 이어지는 이 모랫등은 해수면 아래 생긴 모래 산맥으로 수면 1m 정도 아래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그곳에는 항상 흰 바다거품이 일고 있다.썰물 때에는 지나가던 배 밑바닥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 뱃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항상 주의하여야 했다.
타리어장에서 나는 민어를 [타리민어]라고 부른다.이는 품질면에서 동북아 최고로 평가받았다.타리민어의 특징은 건어물로 만들어 방망이로 두드리면 부러지는 다른 민어들과는 달리 고기의 육질이 솜처럼 부풀어 오른다.이 솜처럼 부풀어 오른 민어 고기는 최고의 맥주안주로 인정받았다.
타리에 민어어장이 들어서면 파시(波市)가 열렸다.타리민어는 파시를 통해 전 조선과 일본에 팔려나갔다.300여년전부터 시작된 파시는 매년 6월 상순에서 10월 하순까지 약 5개월간 열리나 최대의 성어기는 8월이었다.따라서 타리파시도 8월이 되면 최고로 흥청거렸다.
파시가 들어서는 타리는 파시가 열리기 전에는 한 채의 집도 없는 모래사장에 불과하였다.그러나 매년 6월 상순이 되면 상인들은 모래밭에 듬성듬성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마람으로 인 초막(草幕)을 지은 다음 어부와 고기사러온 어상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하였다.타리일대는 무타리 앞에서 하우리까지 잇대어 지어진 수 백 호의 초막(주1)과 항구에 정박한 어선들의 전기불로 불야성을 이루었다.전기불은 바다의 발전선에서 끌어왔다.타리항에는 고기 사러 온 배와 잡아가지고 팔러 들어온 배(주2),수 천명의 어부와 민어를 사러온 상인,관광객(주3)들로 붐비고 들끓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상대로 상인들이 찾아왔다.그들은 봄이면 장사를 나왔다가 늦가을 파시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갔다.한 철 잘 벌면 거금 [몇십원]씩을 쉽게 벌었다.임자 주민들도 파시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부업으로 파시촌에 한주를 공급하였다.한주 한 되 값은 보리 한 말 값 정도였다.보리 한 말로 한주를 내리면 보통 한주 세 되를 내릴 수 있어 파시를 상대로한 한주 제조는 당시 임자도 농가의 주요 부수입이 되었다.
파시에는 사람이 몰려들다보니 편싸움 등 별의별 사건이 발생하였다.임자도의 어부들은 타리파시의 무질서 상태를 스스로 바로잡기로 하였다.1925년 8월 3일 도구포 박종화(朴鐘和),정경남(鄭京南)등 어민 100여명은 정경남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도구포 어업자 친목회]를 결성(주4)하였다.
주1 1925년 7월 31일현재 타리파시 업종 현황(동아일보 25.8.11,4면 1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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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계 |잡화상|욕탕|세탁|이발|음식점|요리점|선구상|병원|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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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116| 14 | 1 | 4 | 5 | 61 | 18 | 6 | 2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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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100| 6 | 1 | 4 | 4 | 61 | 14 | 4 | 1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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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16 | 8 | | | 1 | | 4 | 2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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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1925년 7월 타리에는 166척의 선박이 조업 중이고 선원들은 모두 684명
(동아일보 25.8.11,4면 1단)
주3 타리 파시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산업시찰의 대상지가 되었다.1925년 9월 15일
전북 순창군 면화 시찰단일행이 전남 산업기수 신기훈,면작조합기수 조철수 두 사
람의 인솔로 임자도를 방문 모범 면화재배 마을과 타리파시를 시찰하였다.
동아일보,대정 14년 9월 25일 4면 6단,192
주4 동회 임원은 우관중(禹寬仲),최윤기(崔允基),박봉인(朴奉仁),김재호(金在浩)김창
호(金昌戶),박종상(朴鐘相),정경남(鄭京南) 등이었다.정경남은 장동에서 태어나
도구로 나간 사람이다.나중 다시 장동으로 들어와 장동 구장도 하였다.
동아일보 1925년 8월 11일
77. 타리기생들의 사랑과 죽음
타리파시에는 기생들이 있었다.그녀들은 예쁘기만 할 뿐만 아니라 문장 실력도 좋고손님 접대까지 잘하여 [타리기생]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녀들은 [청노]라는 이름으로 불린 요리집에 고용되어 있으면서 선주들과 뱃사람,그리고 관광객들을 반겼다.그녀들은 얼굴만 반반해서는 술청에 나앉을 수가 없었다.그녀들은 창과 춤은 물론 시서화에도 능해야 했다.술자리에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구다가도 술 손님이 지필묵을 대령시켜 시 한 수를 써내려 가면 즉석에서 이를 받아 한 수쯤은 지을 수준이 되어야 했다.
조선기생뿐만 아니라 일본의 게이샤들도 이 곳을 찾아왔다.일제 암울했던 시절 이곳에서만은 조선의 보통남자들도 일본 게이샤들을 데리고 놀 수 있었다.그녀들은 약간의 돈에 조선인 남자들을 받아들였고 떠나갈 때 신발을 신겨주며 [하이,하이]를 반복하였다.
요리업하는 사람들은 데리고 있던 기생 한 명에 평균 팔백원씩은 벌었으며 음식점들도 파시 한 파수 치르고 나면 오륙백원씩은 쉽게 벌어들였다.맥주 한 병에 가격이 일원씩이었다.그곳에서는 맥주를 지금처럼 컵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간장종지 같이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 홀짝들어 마시는 식으로 마셨다.
타리에는 조선기생,일본 게이샤 모두 합하여 일백여 명이 넘게 일하고 있었다.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에라 노아라,못놓겠다]는 조선기생의 양산도 가락이 장구소리에 실려왔고 [조센 도 시나 도노아 노사가이]하는 샤미센(三味線) 섞인 소리도 끊이질 않았다.시와 노래와 술과 춤이 외진 황해의 바닷가에서 어우러지던 곳,그 곳이 타리파시였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인 한 떼가 타리파시를 들러 조선 기생들을 불렀다.그들은 놀다말고,장고를 치며 창을 하던 그녀들에게 훈도시 차림이 되더니 잠자리를 요구하였다.이에 대해 기생들은 [창이나 글이라면 모르나 조선여인인 우리가 당신들에게 몸을 허할 수는 없소]하며 잠자리를 거절하였다.술에 취하였던 일본인 한명이 기생의 당돌한 거절에 격분하여 곁에 놓아두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 추켜들더니 그녀를 후려 베고 말았다.
파시 기생들이 일어났다.뱃사람들도 들고 일어났다.파시장터에 있던 조선사람 모두가 들고 일어나 바닷가에는 큰 난리가 일어났다.
나라를 잃은 그때 백성들은 물론 기생까지도 의분에 쌓여 있었다.그러나 나라없는 한 아녀자의 억울한 죽음이 가해자인 일본인들을 어떻게 만들지는 않았다.그들이 유유히 웃으며 임자도를 떠나던 날 타리파시 50 여명의 기생 모두는 모래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어대었다.
종일 울다 목이 잠긴 그녀들은 그날 저녁 함께 머리기생의 초막에 모여들었다.그녀들은 일본인들의 횡포에 항의하는 뜻으로 양잿물을 마시고 숨을 끊고 말았다.그녀들의 주검은 파시의 뱃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하우리 쪽 모래밭에 함께 매장되었다.모래무덤은 황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묘토가 조금씩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그녀들의 이름도 남겨지지 않았다.
78. 임자제도
동아일보에서는 1928년 전국에 산재해 있던 섬들을 소개하는 내용의 기행문을 게재하였다.임자도와 그 일대 도서에 대한 글은 임봉순(任鳳淳) 기자가 썼으며 그 해 8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게재되었다.전문을 그대로 게재한다.
[지도와 임자도를 찾기로 하였다.지도는 호수가 1300여호이고 인구가 일만여 명이나 되는 무안군 소속도서 중 제일 큰 섬이다.지금으로부터 삼 십 년전까지는 한 고을(저자 주:지도군)로 있다가 무안군과 합군(合郡)이 된 곳이다.
이 섬에 소속된 유인도만 해도 팔개소나 된다 하며 그 중 서편에 있는 고목도(枯木島,저자 주:지도읍 맞은 편에 있는 섬)는 구한국 시대에 호남과 영남 일대의 상납하는 쌀 수 만 석을 실은 배들이 이곳에 와서는 전부 정박을 하여놓고 짐을 고쳐 싣느라고는 한 달 가량이나 묵삭이었다 한다.인천까지 항행하는 동안에 평안히 보내 달라는 뜻으로 수제(水祭)도 굉장히 지내었다 한다.당시의 이 섬에는 문화가 풍부함은 물론이오 백여 호의 촌락이 즐비하고 상납쌀 싣고 가는 선부들을 위로 하느라고 미주가효도 풍성풍성 하려니와 수십 미인도 있었다는 바,바로 그 뒤에 군함 창룡환(蒼龍丸)과 현익선(現益船) 두 척을 나라에서 만들어 상납쌀을 운반케 한 뒤로 부터는 차차 피폐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조그마한 집 한 채가 남아 있어 뜻 있이 지나는 나그네의 옛 기억을 부질없이 자아낼 뿐이다.지금으로부터 삼 십여 년 전 지도군으로 있기 전에는 지도 수사(水使) 가 있어 수병을 거느리고 외래의 적을 경계하던 곳이다.당시 수군의 망보던 망대의 성지가 지도에만 세 곳이나 아직까지 남아 있어 항행하는 사람들의 말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이 섬의 명소라고 할만한 곳으로는 구 읍내 뒷산 두류산 마루턱에 봉황봉이 있어 조석으로 산보하는 수 백 청년의 환락장이 되어 있다.이 공원의 경개를 말하는 이 곳 사람들이 기분좋을 때 부르는 [두류산 서단수를 녜에 듣고 이제보니 /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데메뇨 ? 나는 옌가 하노라] 한 시조 한 구절이 있다.이것으로 보아 봉황봉의 경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곳에도 일반이 당하는 소작료의 문제로 지금으로부터 4년전에 큰 쟁의가 있어 아사동맹까지 있은 뒤로 재래의 7할 가량의 소작료가 3할로 결정되어 최근 수년 간에는 일반도민의 생활이 비교적 풍부한 모양이다.
일본인의 소유토지는 일할 가량 밖에 없다하며 무안군 소속도서로서 통신기관의 완비한 곳이 이 섬 뿐이라 한다.우편소가 있어 전신전화가 설비되었으며 육지와의 연락도 선편은 물론이려니와 자동차(나룻배로)로도 훌륭히 된다 한다. 문화시설로는 이십육년전에 설립한 지명학교가 변하여된 공립보통학교와 양명(陽明) 여학원이 있으며 경찰관 주재소와 금융조합,면사무소가 있고 청년회,노동조합,농민조합,토목공조합,소년단 등이 있으며 한농기를 이용하여 농민 야학도 한다고 한다.
주요한 산물로는 농산물이고 부산물로는 면화이다.연산 40만근으로 무안군내에 제일 위라 하며 소액의 해산물도 있으나 가관(可觀)할 것이 없다.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씨와 안병찬(安炳讚)씨의 유배왔던 곳도 이 곳이라 한다.
명사 널린 지도읍 앞 승선장에서 [김상수]형을 우연히 만나 맨머리 바람으로 임자도 태이 파시를 구경하기로 하고 배에 올랐다.씨는 그 근처로 통행하는 배는 어떠한 배던지도 무임선으로 왕래를 한다.배에 올라서도 선장실로 또 다시 삼등실로 다녀나와 중간 갑판 한 귀퉁이에 같이 섰다가 무안군청 이씨를 만나 인사를 한 뒤에 씨가 가지고 온 [벤도] 반찬을 내여 놓고 점심도 권하며 정종 한 잔을 겸하여 원한다.감사의 뜻을 표한 뒤에 세 사람이 돌아서서 수 배씩 나눈 뒤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교환하노라니 배는 벌써 임자 본도에 대었다.
임자도는 호수 일천 백여 호,인구 오천여로 지금으로부터 삼십년 전까지는 [임자 첨사]가 있었고 한 때에는 [수군절제사]도 있었다 한다.당시 우수영은 조선수군의 본영이되고 임자도는 종영이었다.그러므로 병마수군에 대하여는 우수영 수사의 소속이었고 지세(地稅)기타 행정에 대하여는 영암군(저자 주:영광군의 잘못)의 소속이었다 한다.이와같이 이 섬은 당시의 군항지였던 곳으로 서편 해안 대둔산의 봉화들던 봉화대는 아직까지도 성지가 엄연히 있어 해안을 항행하면서 능히 볼 수 있다.
이 섬 서편에 재원도란 섬이 있으니 이 섬은 전일 중국으로 사신갈 때에 마지막으로 조선땅을 떠나던 섬이라 원을 나라에서 지어놓고 사신을 유케 하던 곳이다.사신일행이 이 섬에 와서는 가랑잎같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다시 살아 돌아 오지 못할 것같이 생각하며 비장한 가운데서도 주효를 가추어 놓고 흥껏 놀다가 일로평안(一路平安)을 비는 의미에서 정성껏 수제를 지내고 떠나던 곳이라 한다.
재원도 서편 밖에 칠팔도(七八島,저자 주:노리기,굴섬,덜섬,밧섬,부남,허세,비치를 말한다)란 섬은 다도해 서쪽의 최종도(最終島)이고 마지막 등대가 설치되어 있는 섬이라 한다.시일관계로 가보지 못함이 유감되는 바이다.
임자 본도를 오른편에 끼고 일망무제한 서쪽바다에 감실 감실 보이는 칠팔도와 조도(鳥島)를 바라보며 치마 같이 생긴 치마섬(裳島)과 갓쓴 것 같은 입모도(笠帽島),웅구려 잡은 것같은 부남도(扶南島)와 갈대의 소산지인 갈도(葛島)며 굴도와 사슴같이 생기었다는 대록도(大鹿島) 와 소록도(小鹿島)며 이외 소 산지인 목도(牧島)와 재원도(在院島)를 왼편으로 바라보며 뭇타리(陸台耳) 섬타리(島台耳) 사이로 돌아드니 기암괴석이 좌우로 병풍친 것같이 늘어 있고 바다물 우에 한가히 떠있는 백구는 배가는 소리에 높히 떼를 지어 날라간다.이윽고 태이파시 한가운데 배를 대었다.
태이어장은 뭇태리가 활과 같이 휘어져서 우굿한 앞에 섬타리가 놓여있어 서해안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막는다.그 주위는 그다지 크지 못하나 어선 500척가량은 대일만하다.내가 당도하였을 때에도 고기 사러 온배가 기선 육척과 발동선 30여척과 목선 40여척이 대어 있었다.고기 사러 온 배는 두가지 종류가 있으니 모선과 종선이다.모선은 수심관계로 태이항에 들어오지 못하고 항구 밖에 대어 두고 종선들만 항내에 들어온다.종선들이 들어와 고기를 사가지고 모선에 갖다주면 모선에서는 얼음에 채워가지고 대판과 동경등지로 가져간다 한다.태리어장이 개시된 지는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전 부터이며 현재의 획어방법은 개량식이라하며 일본어부들의 왕래는 30여년 전부터이라 한다.어업자의 칠할은 조선 사람이오 삼할은 일본 사람인데 년년히 일본 어업자의 수는 줄어들고 조선사람의 수는 늘어간다고 한다.원인을 찾아보면 재래 조선사람들은 해산물에 대한 관념이 박약하다가 근년에 와서는 큰 이가 그 곳에 있는 것을 깨달음이오 일본 사람의 수효가 줄어짐은 세력이 조선 사람에게 밀리는 까닭이라 한다.
태리 어장은 민어어장으로서 조선에서 제일 큰 곳이오 그 다음이 굴업 어장(저자 저:인천광역시 굴업도)이라 한다.산물 중에는 민어 외에 가오리 (加五里 일명은 鮑) 부서 등을 합하여 연산액 30만원의 고기가 잡힌다고 한다.파시 기일은 6월 상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약 5개월 동안인바 산어 지점은 태리항을 떠난 이삼십 해리 내외라 하며 제일 많이 잡히는 달은 8월이라 한다.고기 시세를 시시로 알기 위하여 혜산환(惠山丸)이라는 큰 배 안에다가 무선전신을 흥양수산주식회사에서 설치해 놓고 제주와 일본 각지,인천 목포 등지와 항상연락을 취하고 있다 한다.
파시가 서기 전에는 섬태리에 농가 한 집이 있을 뿐이나 파시만 서면 기둥을 듬성듬성 세우고 거적과 이엉으로 두른 가사(假舍)가 수 백 호씩 생기며 어부 수 천명 외에도 놀러 오는 사람이 매일 오륙십 명씩 왕래한다고 한다.내가 당도하였 때에는 가사가 일백 십육 호 중에 병원이 한 곳,음식점 구십 호 ,요리점 십오 곳,잡화상 여섯 곳,이발간 세 곳,문옥(門屋)등이 있다.그 중 요리점에는 일본인 조선인 합하여 일백 삼십여 명의 창기가 있어 이곳 저곳에서[에라 노아라,못놓겠다] 장고섞인 소리와 [조센도시나 도노아 노사가이]의 삼미선(三味線) 섞긴 소리가 들린다.그네들의 영업 성적을 들어보니 요리업 하는 사람들은 창기 한 명에 평균 팔 백원씩 벌고 그 외 음식점들도 한 파수 치르고 나면 오륙백원씩은 벌은다고 한다.맥주 한 병에 일원씩이니 그 정도를 짐작할 것이다.
종선으로 섬태리 정근택(鄭根澤) 씨를 찾기로 하였다.씨는 서해왕(西海王)이란 별명을 듣는 분이다.실상 이 섬 근처에서는 무관의 왕이라고 할 만하다.임자도 맞은 편에 있는 십 수 처의 섬들이 모다 씨의 소유이며 서해안에서 나는 어물들도 씨의 손을 거치지않고는 매매되지 못한다고 한다.씨의 집도 역시 가사인데 라디오를 설치하여 놓고 각 방면 소식을 듣고 있으며 어부와 중상(仲商)이며 고기사러 온 사람들이 그 집을 포위하고 서로 먼저 보고 가기를 다툰다.바쁜 시간을 타서 잠깐 만나 어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뭇태리에서 하룻밤을 쉬기로 하였다.밤이 되니 어선들의 등불로 태리어장 부근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뭇태리 서북면으로 뻗은 명사 삼십리의 해당화도 좋으려니와 기후가 피서지로 가장 적당한 곳이다.아직까지도 세상에 널리 소개되지 못하였음이 큰 유감이다.육칠월 삼복 중에도 겹옷을 입지 않으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원산의 명사십리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서해안에서 풍랑이 일어나면 평시에도 오륙백척씩 피란배가 태리항으로 몰려든다고 하며 이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전장포는 백하(白鰕)의 소산지이다.건백하는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하고 젓백하는 충청도와 경상도 방면으로 수출시킨다고 한다.]
79. 뱃서낭과 뱃고사
배의 선장실에는 뱃서낭을 모신다.뱃서낭은 배의 안전과 풍어를 관장하는 서낭이다.뱃서낭은 배를 만들 때 선주의 꿈에 나타난 신에 따라 그 성이 결정된다.꿈 속에 여자가 나타나면 여서낭이 그 배의 뱃서낭이 되고,남자가 나타나면 남서낭이 되는 것이다.여서낭의 경우 여서낭을 모시는 작은 상자에 여자용품인 삼색이나 오색의 헝겁,그리고 삼색이나 오색 실,바늘 참빗 등을 넣어둔다.
뱃고사는 정월 대보름,추석 등의 명절 때,첫 출어시 지낸다.이 중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고사가 가장 성대하다.출어시 고사는 선주가 제주가 되는데 부정을 막기 위해 몇가지 금기를 지켜야 한다.가족 중 임신 출산한 사람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고 개고기나 상한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상가(喪家)에 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제물로 메와 술,돼지머리나 닭을 준비한다.해물로는 부세나 민에를 쓰고 나물도 준비한다.바다고기는 출어 후 처음 잡힌 고기 중 크고 좋은 것을 골라 소금에 절여 말려 두었다 사용한다.장어나 갈치,홍어,가자미는 제물로 쓰지 않는다.장어나 갈치는 뱀처럼 생겼을 뿐아니라 비늘이 없어 불길하기 때문이다.뱃고사는 밀물처럼 복이 밀려 들어오라고 만조시에 거행한다.제물을 뱃서낭 앞과 고물 이물에 진설한 후 제주는 술을 따라 놓고 재배한 다음 [서낭님 우리 배 무사하게 해주시고 고기 많이 잡게 해주십시오]하고 기원한다.고사가 끝난 다음 제주는 쌀을 바다에 뿌리면서 [유왕님(용왕님) 물 묻은 쪽박에 깨들어 붙듯 고기 많이 들어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용왕에게도 기원한다.그 후 [헌식]이라 하여 남은 제물을 음식마다 약간씩 떼어 땅에 놔둔다.이 음식을 개나 돼지가 먹으면 바다 사정이 좋고 풍어를 이룬다 한다.
배를 지었거나 구입하여 처음 출어할 때도 뱃고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웃과 친족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뜻에서 선기(船旗)를 선물하였다.기는 삼색 또는 오색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4자 4치,6자 6치 등 짝수 치수(주1)에 따른다.기에는 [풍어],[대풍어],[대어]라고 적혀 있고 기를 증여한 사람의 이름과 배이름도 적혀있다.고사를 지낼 때부터 하루 정도 기를 배에 걸어 두었다가 걷어 들여 뱃서낭 옆에 보관한다.만선일 때는 기들을 모두 내걸어 만선을 알리고 풍물을 치며 기쁨을 나눈다.(주2)
주1 다른 지역의 경우 홀수 치수로 되어 있다.
주2 이상 신안군의 문화 유적,pp251-254
80. 저수지 축조
현대식 저수지는 일제시대 수리조합이 결성되면서 축조되었다.저수지 공사 이전까지 임자도 농토는 사실상 준 천수답이었다.조금만 가물어도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저수지 완공으로 비로서 옥토가 되었다.
장동에 대보(大湺)가 설치되었다.둑 쌓기 공사는 1940년대 시작되었다.전 도민이 공사에 동원되다시피 하였다.그들은 둑공사에 나가 일을 해주고 일당을 받았다.인부들의 작업량은 공사감독이 확인하여 주었다.공사 감독들 중 이흑암리 살던 [유제식]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대었고 회산 [최영은]이는 보는 둥 마는 둥 서있기만 하였고 회산 [김창연]은 만보에 도장 찍어주는 것이 후하지 않고 인색하였다.그래서 인부들은 [다짜고짜 유제식,본둥만둥 최영은,만보깍재이 김창연]이라고 노래를 지어 그들을 놀려대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장동 대보둑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으나 광복 후 다시 공사를 재개 완공되었다.부동저수지 공사는 장동저수지보다 먼저 시작되어 광복 직전 완공되었다.
Ⅵ. 흙바람 속에서도 꽃은 피고
81. 일제, 패망하다
대동아 전쟁 말기, 미공군의 비행기가 임자도 상공까지 직접 날아다녔다.당시 일본 화물선들이 재원도 부근을 거쳐다니며 왕래하고 있었다.미군의 공군기들이 이들을 목표로 폭격을 해대었다.상당수의 화물선들이 폭격에 피해를 입었다.쌀을 싣고 가던 일본 화물선 한 척은 어느날 미공군의 폭격에 정통으로 명중,배의 허리가 동강 부러져 재원 앞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낮은 곳에 가라 앉은 관계로 물이 쓰면 부러진 선체가 해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물이 들면 도로 물에 잠기기를 반복하였다.(주1)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소식은 곧바로 임자도에도 날아들었다.일제말엽 임자도에는 중앙국민학교 교장 스기모도 마사하루를 비롯 교원 도꾸미야,이시가끼,후미다,가메모도 등 일본인이 있었고 임자 주재소에는 주재소장이 일본인이었다.또 일본군 20-30여명이 장동 영사재에 주둔하고 있었다.항복 발표 이후 임자 중앙국민학교 교장 스기모도 마사하루는 그의 부인,아이들과 함께 교장 관사에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않고 큰 소리로 비통하게 울어대었다.
항복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 임자도 거주 일본인들을 싣고 가기 위해 철선 한척이 도구포에 들어 왔다.지서주임과 일본인 선생,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모두 중앙교로 집결하였다.그들은 학생들을 시켜 이삿짐을 들게 하고 자신들은 일장기를 앞세우고 도구로 이동하였다.영사재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도 철수해 갔다.정박하고 있던 철선에서는 하우리 주민들을 시켜 배에 식수를 보급토록 하였다.식수가 보충되고 임자도 거주 일본인들이 모두 탑승을 완료하자 철선은 출항하였다.
주1 해방 이후 임자도민들은 이 배에 실린 쌀을 건져내어 면사무소에 쌓아두고 동네
별로 할당 나누어 가졌다.
[청년단과 치안대의 충돌]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은 여운형은 곧 국가 건설을 위한 기구로는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국내 치안 유지를 위한 기구로는 치안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이 양 기구의 조직사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전남지방에서는 이들의 지방조직 외에도 청년단이라는 자생적 치안기구도 생겨났다.
치안대와 청년단은 해방 후의 지역 사회질서의 수습을 자임하였다.이 중 치안대는 훗날 미군에 의하여 불법단체로 인정되어 활동을 멈추었고 청년단은 두개로 갈라져 좌익은 조선청년동맹,우익은 대한 청년단이 되었으나 이 역시 결국은 해체(주1)되었다.
무안군의 경우 건준이 해방 이후 곧바로 결성되었으나 중앙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개편(주2)됨에 따라 무안군 인민위원회(주3)로 개편되었다.
임자도에도 치안대,청년단이 차례대로 각각 결성되었다.
먼저 치안대가 결성되었다.그들은 본부를 진리에 두고 면의 치안을 담당하려 하였다.그들은 친일 부역자에 대한 조사를 추진하였다.조사 과정에서 친일 부역자들을 마구 불러들이고 구타하는 등 무리한 일로 주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이에 반발하는 일단의 청년들이 청년단을 결성하였다.그들은 조직 결성 즉시 치안대의 축출에 나섰다.
청년단 단원들이 치안대 사무소를 습격하자 치안대원들은 일단 도망쳤다.그리고 다시 지지세력을 모아 청년단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사무소 부근에서 투석 등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청년단 단원이었던 남O0가 다른 1명의 단원과 함께 치안대의 측면을 기습하였다.허를 찔린 치안대의 전열이 무너졌고 치안대원들은 도망쳤다.치안대는 이로써 해체되었다. 승리한 청년단 세력을 중심으로 건준의 후신인 임자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위원장은 [남OO]이었다.
주1 광주전남현대사1,pp25-26,pp48-49,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저,
실천문학사
주2 1945년 9월 6일
주3 당시 전국각지에 생겨난 인민위원회를 살펴보면 체계와 성격면에서 해방후의 혼란
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이들은 지방 분산적이었다.도 인민위원회와 시군 인
민위원회 사이에 통일된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이들은 횡적으로 서로 연결
되어 있지 않았음은 물론 종적으로도 상급인민위원회와 하급 인민위원회간 연대를
맺지 않고 있었다.마치 독립된 세포들처럼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었다.성격 역시
다양하였다.좌익에 의하여 지배된 인민위,일제하의 관료 대지주에 의하여 지배된
인민위,일시적 치안 유지만을 담당한 촌락 자치 조직으로서의 인민위 등이 있었
다.
광주전남현대사1,p74,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저,실천문학사
[ 인민위원회 해산]
미국의 하지가 인천항에 상륙(주1) 미군정을 수립(주2)하였다. 미 6사단 20 연대장 피그대령은 전남 도내 일원에 걸쳐 미군정 실시를선포(주3) 하였다.20연대 55중대가 목포에 도착(주4) 사령부를 차리고 무안,함평 등을 관할(주5)하였다.
주한 미사령관 하지는 [인민공화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가 아니다.마치 스스로 정부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명령(주6)하였다.이로써 중앙 인민공화국과 지방 인민위원회는 불법이 되었다.
1946년 1월 경찰 100여 명이 파견되는 등 목포경찰서가 재구성되어 무안읍에 사무소를 차렸다.이들에 의해 인근지역의 인민위원회는 해체 과정에 들어간다.목포 무안 등 육지의 인민위 세력이 먼저 급속도로 약화되어갔고 섬지방 인민위원회도 해체되었다.해체의 순서는 육지에 가까운 지도면부터 압해,매화,임자도 등의 순(주7)이었다.
주1 1945년 9월 8일
주2 1945년 9월 11일 군정수립
주3 1945년 10월 27일
주4 1945년 10월 23일
주5 광주전남현대사2,pp153-160,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저,실천문학사
주6 1945년 12월 12일
주7 광주전남현대사1,p130,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저,실천문학사
[공산주의자 숙청]
미군정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이 전개되었다.임자도에서의 대표적 사건은 소위 [8.9탄압]과 [31폭동]이었다. [8.9 탄압]은 1946년 8월 9일에 일어났다.미군정은 수십명의 청년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고 일부는 처형하였다.
[31폭동]은 [추수봉기]의 일환으로 벌어졌다.1946년 10-11월 사이에 남한의 거의 전지역에서 공산주의자에 의한 일련의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이를 추수봉기(B.Cummings,주1)라 한다.임자도에서는 1946년 10월 31일 일어났으며 [31폭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나왔다.
박OO 등 30여 명은 1946년 10월 31일 저녁 임자지서를 습격하였다.이들은 5-6명씩 조를 짜 지서와 지서 순경들의 사택을 공격하였다.남00순경이라는 당시 지서에 근무하던 순경의 사택을 기습한 조는 남순경과 싸우는 과정에서 총을 빼앗아 쏘았는데 그의 팔에 맞았다.그러나 이들은 지서 습격은 지키고 있던 보초들에게 격퇴되어 실패하였다.
박OO은 지서 습격 실패 후 체포를 피해 전 인민위원장 남OO의 집으로 피신하여 집 대청 마루밑에 은신하였다.그는 남OO에게 [지서 습격이 실패하였다.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다른 곳에서 성공했다면 모르나 실패했다면 우리를 잡으러 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부터 경찰이 체포작전을 벌였다.그들은 공포를 쏘아대었다.그리고 용의자 집을 뒤지며 기물을 때려 부수었다.최OO 등 3-4명이 체포되어 진리로 끌려갔다.수색 2일째 되는 날 [허직]이라는 사람이 일단의 경찰병력을 인솔 임자에 도착 체포작전을 지휘하였다.그들은 면민을 동원,면 전체에 대해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허직은 진리 공회당에서 체포된 범인들에 대하여 고문을 실시하였다.쇠를 불에 달구어 지지며 공범들에 대하여 자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참여자 중 상당수가 체포되어 끌려갔다.이들 중 일부는 처형되고 일부는 실형을 언도받아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교도소 생활을 하던 일부는 나중 목포 교도소 탈옥 사건시 거기에 가담 탈주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결국 31폭동사건 관여자는 대부분이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주2)
31폭동사건 후 서북청년단도 임자도 내에 들어왔다.그들은 좌익세력을 소탕한다며 지역 인사들을 동네 공회당에 끌고 가 몽둥이로 때리는가 하면 관련 인사의 집 벽에 붉은 색 물감으로 '+' 표를 칠하고 다녔고 용의자로 지목하였던 사람이 도망쳤다 하여 그의 집에 방화 전소시키고 말았다.
주1 전남 지역의 소요사태는 그 해 10월 30일 화순의 광부들이 [식량을 달라]고 외치
며 광주를 향하여 행진하다가 경찰,미군과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소요사태는 11월
을 고비로 거의 진압되었다.
광주전남현대사1,pp235-260,전남일보광주전남 현대사 기획 위원회 저,실천문학사
주2 6.25 이전에 있었던 이러한 행위는 인공 당시 임자도 내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게 한 배경 중의 하나가 되었다.즉 정부에서 지역민들을 공산주의자라 하여
총살,수장시키는 등 처형하였고 이에 원한을 품은 좌익사건 관련 피해자 가족들
은 인공시 특정 우익인사들의 처형을 요구하여 관철시키는 등 강경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85. 보도연맹원 숙청
인간의 마음속에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만 살지 않고 곧잘 밖으로 나와 그들의 의지를 현실화한다. 육이오 기간 중 작은 섬 임자도에서 있었던 사건들은 임자도 만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도 어디에선가 무수히 있어 왔고 앞으로도 또다시 누구에겐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여기에 그때의 일을 적으려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려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이다. 인류최고의 가치는 생명존중이라는 평범한 말이 주어이다.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전쟁을 일으켰다.한강을 도하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국군을 밀어부치며 남으로 향하였다.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은 주병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진격시키는 한편 산하 6사단으로 하여금 광주와 목포를 점령토록 하였다.인민군의 호남침입에 대해 국군은 급히 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 방어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는 부산으로 후퇴하였고 인민군은 7월 23일 광주에,다음날인 7월 24일 목포에 진입하였다.
전선이 가까워지자 임자지서에 파견되어 나와있던 경찰관들은 진리 선창앞 앞 바닷가에 배 한 척을 대기시켜 놓고 그 앞에 텐트를 치고는 그 곳에서 근무하였다.아무 때고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부산으로 후퇴하던 정부는 전국 경찰에 파악해 놓고 있던 보도연맹회원들을 처형토록 긴급히 지시하였다.이에따라 임자지서 경찰들은 임자도 내 보도연맹 회원 20-30여명(주1)을 모두 체포하여 끌고가 처형하였다.
당시의 목격자인 광산 임OO은 그들이 끌려가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보련사건 관계자들이 끌려 가던 날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진리에 나갔다.진리 선창가에 몇 명의 사복 경찰들이 서성이고 있어 무슨일이 있나 하였다.사복 1명이 휘슬을 꺼내어 불었다.그러자 인근 어느 집에서 20-30여명의 사람들이 손을 앞으로 포승줄에 묶이어 한줄로 엮여 끌려 나왔다.그들은 그 길로 배에 태워져 끌려 갔다.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뒤에 알고 보니 보련관계자들이란 것이었다]
경찰은 끌고간 이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려 수장하여 죽였다.물론 끌려간 이들은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
임자지서의 경찰은 전쟁초기 지역 우익인사들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전선 후퇴에 따른 피난 대책을 협의해주어야 했으나 일체 그런 일이 없었다.다만 당시 진리에 거주하던 [임자지서 후원회장] 강OO과만 대책을 상의하고 있었다.강OO의 아버지는 부재지주 [임답]의 마름으로서 소작료 거출 과정에서 소작인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강자원은 진리에 상점을 가진 재력가였다.그는 임자지서에 금품을 후원하는 등 경찰들의 환심을 얻고있었으나 뒤로는 내밀히 공산주의들과도 연계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보도연맹 회원 처분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자지서의 경찰들은 후퇴하였다.그들은 후퇴하며 송씨 성을 가진 순경 1명을 임자도에 남겨두고 치안권을 넘겨주었다.한편 당시의 임자면장은 정태화였다.그도 경찰이 후퇴하자 배를 구해 흑산도로 피난하였다.행정과 경찰이 임자도를 떠났다.
86. 뒤집힌 땅
경찰 후퇴 후 강OO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들은 임자도 접수를 시도하였다.그들은
접수작전에 탁OO을 앞세웠다.그가 해방 이후 목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자지서 경찰들의 경계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탁OO은 송순경을 진리에 있던 주점으로 초청하였다.송순경은 시국상황을 걱정하며 술잔을 받았다.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탁OO이 연거푸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않았다.술자리가 끝나자 대취한 송순경은 소총을 어깨에 두르고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섰다.경찰모를 벗어 왼손에 들고 취한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지서로 향하는 그의 앞에 몇 명의 청년들이 어른거리듯 나타났다.그때는 7월의 뜨거운 태양이 한 낮 중천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기운 때였다.
청년들은 송순경에게 떼거리로 덤벼들었다.그 중 한 명이 송순경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소총을 낚아채자 나머지 청년들이 송순경을 좌우에서 덮쳐 꼼짝못하게 틀어쥐고 지서로 끌고 갔다.그들은 송순경으로부터 유치장의 열쇠를 빼앗은 다음 그를 그 곳에 쳐박았다.
강OO이 지서장석에 좌정하였다.다른 청년들은 그를 에워싸고 주위의 의자에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찢어 내버렸다.그들은 첫 조치로 임자도내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외 다른 마을을 방문할 때는 사전허가를 받도록하였다.동네 안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동네 바깥 출입은 금지된 것이다.
임자도는 이렇게 하여 좌익에 의하여 접수되었다.그들은 7월 24일 경 강OO의 주도하에 북한의 점령지 시책(주1)에 따라 당위원회,인민위원회,내무서 등을 구성하였다.면 당위원장에 강OO,인민위원장에는 강OO,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은 탁OO,내무서장은 강OO이 각각 임명(주2)되었다.인민위원회는 면사무소에 들어섰고 내무서는 지서에 자리잡았다.이어 면 자위대와 리자위대가 결성되었다.리자위대에는 결사대(주3)라는 행동대를 두었다.
얼마후 인민군 일개 분대 정도되는 병력(주4)이 임자도에 들어와 장동 영사재에 주둔하였다.그들은 임자내의 사정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으며 주민들과의 접촉도 없이 자기들끼리 취사하며 주둔하다가 시일이 지나자 철수하였다.
주1 공산당 당위원회를 하향식(군당위원회-->면당위원회-->리.동 세포)으로 조직하였
다.즉 군 당에서 면 당을 조직케 하는 방법이었다.점령지에서의 모든 정책은 당에
서 토의되고 계획되었다.그리고 각급 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는 당의 결정사항을
집행하였다.인민위원회는 행정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인민위원회 구성을 위한
인민위원 선거가 7월 15일 - 9월 13일 간 점령지에서 실시되었다.면 인민위원회
위원수는 15-25명(평균 19),리 인민위원회 위원수는 5-7명(평균 6)이었다.각 부
락에서 5-9명의 농민동맹원들을 선출,면 농민위원회라는 단체도 조직하였다.
주2 당과 인민위원회,내무서의 중심을 구성한 세 강씨사촌 형제지간이었다.
주3 결사대는 나중 면당이 동조직에 살인지령을 내려 살인조직으로 기능하게 된다.
주4 인민군들은 따발총을 들고 위장망을 갖춘 인민군복에 나뭇가지 등을 꽂아 위장하
고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군복은 색이 바래고 황토가 묻어 있었다.
87 비극의 시작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인공 세력들은 전현직 면장,경찰관계자,반공 사회단체 관계자들을 반동(反動)으로 규정하고 처형하였다.숙청은 거의 강OO의 마음대로 결정되고 집행되었다.
최초의 피해자는 회산 거주 경찰관 김두섭이었다.그는 외지에 나가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휴가차 집에 와있던 중 6.25가 터지자 임지에 복귀치 못하고 자기집에 머무르고 있었다.인공 세력들은 김두섭과 그의 아버지,어머니,동생 김만석 등 네 사람을 잡아 큰 칼로 목을 쳐 죽였다.김두섭은 장동의 한 과부(주2)와 재혼한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주1 당시 임자도 사람 중 몇 명은 경찰에 투신,육지에 나가 근무 하고 있었다.그들의
명단을 보면 회산 김정관,조삼 박정배,대기리 최호영이 있었다.이들의 가족도 나
중에 숙청의 비극을 맞게 된다.
주2 장동 강복순의 여동생으로 친정에 돌아와 살고 있었다.그녀가 경찰관과 재혼하였
다는 점이 화근이 되어 그녀의 친정식구들은 몰살의 재앙을 맞게 된다.
88.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이
7월 하순께 38명이 조직적으로 선별되어 검거되었다.1차 숙청자들이었다.
부동에 이학재라는 사람이 있었다.그의 아들 이종민이 6.25전 면장을 지냈고 손자인 이범철이 면 대한청년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 중 해당자들이 주요 숙청대상으로 떠올랐다.그러나 그의 손자였던 이효철과 이범철이 도주해 장동의 김신수(주1) 집에 몸을 숨겼다.그들은 그 집의 안방에 숨어 있으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동네 인공 관계자들을 몰래 불러들여 생존대책을 협의하였다.인공관계자들은 그들이 출가해 있던 고모집인 김신수가에 숨어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그집을 뒤지도록 했다.
이효철 형제는 위기를 느꼈다.그들은 [형제가 함께 있다가 잡히면 모두 죽고 만다.따로 숨어있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형제 중 이효철이 밤중에 하우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큰고모 집에 숨어있다는 사실이 마침내 탄로나고 말았다.피신해 온지 보름쯤 되던 날 아침 결사대원 십여명이 김신수의 집을 포위하였다.그들은 대한청년단장 이범철이 숨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있었던듯 숨어 있던 안방으로 직행하였다.이범철은 벽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부엌으로 끌려 나와 포승줄에 묶이었다.그는 결사대원들에게 [소변이나 보자] 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조금 후 밖으로 나오면서 나오면서 하늘을 쳐다보더니 [하늘도 무심하다]하고 독백하였다.
이재월은 끌려가는 조카 이범철을 멀리 따라가다 [범철아! 세수하고 닦아라]하고 흰수건을 허리춤에 찔러 넣어주며 울면서 돌아섰다.그 때 핏빛처럼 붉은 해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듯 북새 기운을 헤치고 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범철은 그 길로 진리(주2)로 끌려갔다.따로 헤어졌던 이효철도 하우리에서 체포되어 끌려왔다.진리에는 1차 숙청대상자로 선정된 그의 다른 가족들(주3)이 미리 끌려와 있었다.그들은 그곳에 며칠간을 갇혀 있다가 배에 실려 진리 앞바다로 끌려나가 밪줄에 묶인 그대로 바다에 던저져 수장(주4)되고 말았다.
사건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숙청대상자 은닉범에 대한 처벌이 실시되었다.인공세력들은 숙청 며칠 후 장동 김신수와 그의 아들 김년관을 옆동네였던 회산마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동각)로 끌어갔다.그곳에서 범인 은닉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결사대원 수십명은 김신수 부자가 도착하자 마당에 그들을 엎드려뻗쳐 시키고 [이범철,효철을 감추어 준 반동]이라며 몽둥이로 죽도록 매질하였다.
주1 김신수의 처 이재월이 이학재의 딸이었다.이학재는 딸을 넷두었는데 큰딸이 이재
월이었고 둘째는 재금(삼두리 최씨에게 출가),세째는 순월(구산 백씨에게 출가),
네째는 까무데기(구산 남씨에게 출가)였다.
주2 현재 임자농협창고가 있는 곳이 이들이 감금되어 있던 곳이었음
주3 이종환,이종민(일제시대 면장 역임.숙청이 시작되자 재원을 경유,지도 진동리로
피신하였으나 며칠후 체포되어 끌려와 피살되고 말았다),이종익,이효철(6.25전 부
면장),이범철(임자대한청년단장),이윤홍 등이었다.
주4 전주이씨는 1차 숙청과 국군 임자도 숙청 직전에 실시된 숙청에 의해 멸문에 가까
운 화를 입는다. 1차로 숙청된 이범철에게는 그 때 이금희(그녀는 뒷날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아버지가 숨어 있던 마을 장동리 소재 임자 남국민학교 교사로 부임
한다)라는 어린 딸과 만삭의 처를 두고 있었다.그의 처는 얼마 후 유복자를 낳았
으나 인공세력들은 [부동 이씨의 손이 생겨났다]며 쫓아가 갓 낳은 아이를 뒤집어
죽여 버렸다.인공 기간 전과정을 거쳐 이학재의 직계가족 중 출가한 딸
을 제외한 임자도 거주 중이던 26명 중 이범철의 처와 딸 하나만 살아 남았을 정
도의 재앙이었다.
*이학재.박씨*
+-----------+-------+----------+-----------+--------------+------+
+--+---+ +-+-+ +-+--+ +-+--+ +--+--+ +-----+-+ +-+--+
재월.김신수 종익 처 종민.본처 女 최광장 순월 백용두 종해 처 女.남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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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처* |
| 1남2녀(모두피살) 2녀(모두피살)
+---+
+--------+-------+-+------+------+-----+
| +-++ +-+-+ +-+-+ | |
인철 효철.처 범철.처 근철.처 희철 숙자
* |* * | * * *
2남2녀 1남1녀(1남피살)
(모두피살)
* :피살자
89. 생파와 살파
임자도 인공 세력들간에는 1차 숙청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었다.반동 분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대해 일부 온건파들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않느냐고 반박했다.이 때 주민들에 의해 강경파는 [살파],온건파는 [생파]라고 불렸다.살파와 생파의 의견 충돌은 인민위원장 강OO과 부위원장 탁OO간에 심한 언쟁으로 나타났다.
탁OO는 [사람들을 이처럼 터무니없이 많이 죽이면 누구를 데리고 정치를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였다.그러나 강OO은 [사상이 바뀌지 않을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 고 온건파의 주장을 일축했다. 1차 숙청이 있은 후 또다시 2차 숙청이 있었다.10-20여 명이 2차로 숙청되었다. 그들 역시 대부분이 1차와 마찬가지로 수장되었다.
이 무렵 황해도 옹진군에 살았다는 피난민 40여명이 돛이 세개 달린 [우다시]를 타고 임자도에 이르러 진리 앞 바다에 배를 대었다.그들은 섬안의 동정을 살피는지 며칠 동안 하선하지 않고 배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결사대원들이 배에 올라타 그들을 끌어 내렸다.대원들은 손에 든 죽창을 흔들며 인민가를 소리높혀 부르면서 그들을 한 줄로 나란히 세워 대기리를 거쳐 뒷불로 끌고 갔다.대원들은 그들을 대낮에 배락바구 아래 모래를 파 생매장(주1)하였다.
주1 국군 수복 후 음력 9월 20경 사망자들의 친척들이 옹진군에서 내려와 시체를 파내
어 현재 임자중학교 뒷산에 매장하여 주었다
90. 참혹
1950년 9월 13일 인천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9월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었다. 인민군의 전선이 붕괴되어 총퇴각이 실시되었다. 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金策)은 1950년 9월 20일 무전으로 후퇴와 관련한 명령을 시달하였다.
[인민군의 후퇴는 일시적이다.유엔군과 국군에 협력한 자와 그의 가족을 전원 살해하라.살해 방법은 당에서 파견되는 지도위원과 협의하되 각급 당 책임자의 책임아래 시행하도록 하라](주1)
임자의 인공세력들도 이 무자비한 살인명령을 접수하였다.그러나 실행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강OO등 살파 세력들은 철저한 숙청을 주장하였으며 탁OO 등 생파 세력들은 이에 반대하였다.생파 세력 예닐곱 명은 도찬리 탁OO의 집에 모여 회의를 갖고 살파 세력을 축출하기로 합의하였다.그러나 회의 내용은 살파에 의해 탐지되었고 살파 세력들은 선제 공격에 나서 생파를 면당에서 축출하였다.이 사건은 임자도 대량 학살의 분수령이 되었다.
주도권을 잡은 살파는 바닷가 모래밭,바다 등 곳곳에 지역 인사들을 생매장 또는 수장하는 광란의 살인극을 연출하였다.살인 결정은 면당위원회가 리 당에 숙청대상자들을 보고토록 하였고 리당세포들이 면당위원회에 숙청대상자들을 보고하면 면당에서 처형대상자를 최종 결정하여 명단을 동세포에 통보하였다.동세포는 면 또는 리자위대장에게 통보받은 자들의 명단을 알려주고 살인을 집행토록하였다.자위대장은 산하의 작업반에게 생매장시킬 모래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그들을 구덩이 인근에 대기시킨 다음 결사대원들로 하여금 처형대상자들을 끌고 가 창으로 찔러 모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도록 시켰다.모두가 모래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면 대기하고 있던 작업반원들이 모래로 구덩이를 메꾸어 생매장 시켰던 것이다.살인 집행에는 리 결사대원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의 결사대원들도 참가시켰다.
[회산 김씨일가의 죽음]
회산 김두후와 일가 7명이 살해되었다.
먼저 김두후의 손자 김손관이 숙청되었다.그의 죄는 6.25 전 면사무소에 근무하였다는 것이었다.그는 끌려가 창고에 갇혀 있다가 음력 8월 24일 생매장,살해(주2)되었다.김손관이 죽은지 3일 후 김두후 본인과 큰며느리,다섯째 아들 김하진부부,김손관의 처와 어린 딸이 야밤에 끌려나가 살해되었다.
처형 하루 전 인공세력들은 김두후의 전 재산을 몰수하였다.
8월 27일 저녁 결사대원들이 그의 아들 김하진부부,손부인 김손관의 처를 체포하러 왔다.김하진이 숙청되는 이유는 김하진의 아들 김정관이 당시 경찰관으로서 외지에 나가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때 김정관의 처 조씨(주3)는 친정 지도 태천리로 피해 있었다.
김두후는 끌려 가는 아들,며느리,손부를 보고 방에서 뛰어나와 결사대원들을 꾸짖었다.결사대원들은 김두후까지 묶어 끌고 갔다.김두후는 끌려가면서 결사대장 최OO에게 [OO아 ! 이 놈아 ! 너의 아버지가 나와 4촌간이다] 하며 소리를 쳤다.끌려간 그들은 회산 뒷불 모래밭에 포승에 묶인 채 죽창에 찔리고 생매장되어 살해되었다.김손관의 처는 나어린 젖먹이 딸을 업고 끌려갔다가 함께 매장되어 죽고 말았다. 인공세력들은 김두후 숙청 후 그의 모든 문집들을 소각시켜 버렸다.
[나는 죄가 없오]
삼두리에도 피바람이 불었다.
김순덕이가 인근 동네사람 수십명과 함께 생매장되어 죽었다.그녀는 남편 최영섭,딸 뜬금이와 함께 소금도 내고 농사도 지으며 살고 있었다.뜬금이는 8월 초 밀물 때 집밖에서 놀다가 바닷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김순덕은 뜬금이를 잃은지 며칠 안된 8월 29일 삼두리 최씨 일문 13명과 함께 묶이어 삼두리 [불안]이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김순덕은 끌려 가던 중 끌고가는 자에게 [아재 ! 나는 죄가 없오]하고 목숨을 애원하였다.그들을 끌고가던 결사대원 1명이 칼로 그녀의 배를 찔렀다.순덕이는 쏟아져 나오는 창자를 부등켜 안으며 거듭거듭 목숨을 애원하였다.그러나 결사대장 최OO는 [이년아,창이나 집어 넣어라]하고 소리지를 뿐이었다.김순덕은 삼두리 불안에서 시가 집안 사람들을 포함 삼두리 지역 인사 수십 명과 함께 생매장 살해되었다.김순덕의 나이 30세였다.김순덕의 남편 최영섭(주4)은 이 때 산으로 도주,피신해 있었으나 결국 몰이꾼들에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살아돌아온 여인]
정씨는 광산 처녀였다.그녀는 1949년 겨울 괘길리로 시집갔다가 이듬해 6.25를 만났다.그녀는 시가 식구들과 함께 밧줄에 묶여 끌려 나가 죽창에 찔리고 모래밭에 생매장되었다.그러나 그녀는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묻혀 있다가 살인자들이 사라진 후 모래를 헤치고 기어나와 목숨을 건졌다.그녀는 뒷불을 거쳐 광산까지의 수십리 길을 죽창에 찔려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부등켜 안고 비틀거리며 친정으로 돌아 갔다.그녀는 가족들에 의해 몰래 치료를 받아 마침내 살아 났다.
[젖먹이 아들 가슴에 눈물을 묻고]
장동에도 살기가 뻗쳐왔다. 강복순 가족이 처형 대상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그림> 장동 피살자 가계표(* 피살자)
* 강복순노모
+-----+----+
* 강복순부부* * 강복순누이.
| * 김두섭(남편,경찰관)
강신홍
강복순 가족의 경우 그의 누이가 경찰관과재혼하였다는 것이었다.강복순의 노모 처 누이는 잡혀 갔으나 강복순은 결사대가 체포하러 오자 담을 뛰어 넘어 도주하였다.다음날 임자도 내 전 결사대원들이 총동원되어 산과 들을 뒤져 그를 찾기 시작하였다.대원들은 손에 죽창을 들고 바닷가 쪽으로부터 1m 정도 간격을 두고 횡대로 늘어서 섬 안쪽으로 몰이를 하였다.
강복순은 뒷불 소나무 밑 모래를 파고 그 속에 엎드려 숨어 있었다.몰이꾼 한 명이 그가 숨어 있던 곳을 밟고 지나갔다.그러자 강복순은 [들켰구나] 생각하고 구덩이에서 뛰어 나와 바닷가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결사대원들은 [저기 강복순이가 튄다]하며 그를 뒤쫓아 갔다.강복순은 바닷가까지 도망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물 가에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만 입은 채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 고깔섬 쪽으로 향하였다.
몰이꾼들은 바닷가에 서서 나오라고 소리질렀다.한참을 가던 강복순이 헤엄치다 힘이 빠져 중도에서 되돌아 나오기 시작하였다.그는 바닷가로 나와 그를 둘러싸는 대원들을 둘러 보며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소리 친 다음 벗어 놓았던 옷을 주어 입고 머리칼의 바닷물을 손으로 짜내면서 [세상 참 무심하다]고 탄식하였다.결사대원들은 그를 포승하고 장동 동각으로 끌고 갔다.
그날 장동 인민위원회에서는 며칠전 처형하였던 집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그의 집을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고 그 집 황소를 때려 잡아 먹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국 한 사발씩을 배급해주고 있었다.강복순은 동각에서 젖은 옷을 갈아 입겠다며 옆 사람에게 옷을 갖다 달라하였다.그러자 동각 옆에 살던 친척이 담 너머로 흰 명주옷 한 벌을 넘겨 주었다.옷을 갈아 입은 다음 강복순은 [술을 갖다 달라] 하였다.누군가가 한주 한 사발과 잡아 먹고 있던 소의 생간을 갖다주자 그는 술을 한숨에 쭉 들이마시고 손으로 생간을 집어 씹어 먹었다.그리고 [아들 신홍이를 데려다 주시오]하였다.
외아들 신홍이는 며칠 전 할머니,어머니,고모가 살해된 후 다른 사람의 집에 맡겨져 있었다.강복순은 업혀온 그의 젖먹이 아들을 바라보고 큰 소리로 흐느끼며 울더니 아들의 코와 입을 눈물젖은 얼굴로 비벼대었다.아무 것도 모르는 젖먹이는 놀라 자지러져 울자 다른 사람이 신홍이를 업어갔다.강복순은 진리로 끌려갔고 이삼일 후 진리 앞 뻘바닥에 생매장되었다.그 곳은 물이 들면 바다요 쓰면 갯펄인 곳이었다.
주1 한국전쟁사 제4권,국방부,p754
주2 살해 직전 김손관의 사촌누나 김부덕이 김손관을 찾아가 아침 밥 속에 아편덩이를
몰래 넣어 가지고 손관에게 가 창고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애걸,창고 문으로
넣어 주었다.손관은 추위와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그 것이 그들 사촌 남매 간의
이별이 되었다.당시는 아편재배가 보편화 되어 있어 약으로 쓰이고 있었다.
주3 그녀도 결국 친정 지도에서 그녀의 가족과 함께 피살되고 말았다.
주4 최영섭의 친동생이 훗날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역 중 일인인 최영도이다.그녀의 집
안은 결국 좌와 우의 틈바구니에 끼어 쑥밭이 되고 말았다.
91. 해군 백부대,임자도를 수복하다
국군은 수복한 호남지방의 치안확보를 위해 육군 11사단 20연대를 투입 삼랑진으로부터 10월 15일 광주에 진격토록하였다.해군에서는 진해지구 후방 요원들로 구성된 [백부대](부대장:白南杓 소령)를 선편으로 목포에 파견하여 광주 주둔 20연대와 보조를 맞추도록 하였다.백부대는 소위 [을종 해병대](주1)라 하여 조롱조로 불리던 해군부대였다.
백부대는 전남 서해안 지역의 치안권 회복을 추진하였다.그러나 인근 지역 도서지방의 치안확보에는 이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경찰이 나서고 있었다.임자도에도 경찰에 의한 수복작전이 시작되었다.그러나 2차에 걸친 임자도 상륙작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외지에 나가 있던 임자도 출신 인사들이 [임자도에 중무장한 인민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어 경찰력만으로는 수복이 불가능하다]며 군부대의 투입을 요청했다.마침내 백부대가 임자도 수복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백부대는 10월 19일 임자땅에 상륙을 개시하였다.이 날은 중구날(음력 9월 9일)이었고 시각은 아침 동이 틀 무렵이었다.진리쪽에서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박격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면민의 잠을 깨웠다.
백부대는 바다에서 한 시간 이상 사격을 가한 다음 상륙을 시작하였다.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백부대 요원들은 진리 면소재지로 진입하면서 눈에 보이는대로 사격을 가하였다.이 때 주민들은 통신 상태가 두절되어 바깥 상황의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급기야 일부 주민들은 백부대를 인민군으로 착각해 [인민군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다 사살되기도 하였다.
인민군은 섬안에서 이미 퇴각하였고 인공의 주요 간부들도 모두 도망쳐버렸다.며칠 전 자은 등에서 임자로 도망쳐온 부역 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국군이 진입하자 배를 타고 영광쪽으로 탈주해버렸다.
백부대 일개 분대가 대기리, 회산을 거쳐 장동으로 들어 왔다.장동리 인민위원장 김하용은 동네 사람들에게 [피신해야 할 사람은 피신하고 환영 나갈 사람은 환영나가라]고 이야기하여 주었다.동네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보둑 밑으로 환영 나갔다.
백부대원들은 장동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수색,괘종시계 속에서 해양 경비대원 명부를 찾아내었다.그들은 명부를 가지고 대보둑 위로 올라왔다.그 때 김영률이라는 청년이 대보둑 위로 올라가 [동무들 환영합니다]하며 이들에게 악수를 청하였다.백부대원들은 그가 엉겁결에 말한 [동무들]이란 말을 듣고 그를 뒤돌려 세운 다음 등에 대 여섯 발의 총을 쏘아 대었다.김영률은 [픽]하고 고꾸라져 즉사하였다.
백부대원들은 [호명하는 사람은 큰 소리로 대답하고 둑 위로 올라 오라]고 명령하고 해양경비대원 명부에 기재되어 있던 경비조장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김인태 ! 김종용 ! 정복동 ! 김정태 ! 박쌀봉 !...] 불리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채 둑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정운길이라는 사람의 차례가 되었다.[정운길!...?] 둑 아래 있던 정운길은 자신을 부르는 고함 소리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순간적으로 큰 소리로 말하였다.[그 놈 진작 도망가 버렸오] 백부대원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하였다.호명된 10명 중 정운길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둑 위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해산되었다.
백부대원들은 불려나온 조장들을 일렬로 세워 [하나 ! 둘 !] 구령을 붙여 회산앞을 지나 백산 쪽으로 데려갔다.그리고 그들을 밭둑에 앉혀 놓고 한 명씩 일으켜 세워 순서대로 사살하였다.한편 김인태와 정복동 두 명은 총을 급소에 맞지 않아 즉사하지 않고 있었다.그들은 죽은 척 쓰러져 있다가 백부대원들이 현장을 떠나가자 [사람 살리라!] 고 손짓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김인태와 정복동의 아버지가 달려가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던 아들들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데려가 호박을 삶아 총상 자리에 붙여주며 치료하였다.그들은 모두 3일 후 신음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장이라 불리워 졌던 사람들은 평범한 동네 젊은 사람들이었다.단지 보초서라는 명령을 받고 몇 명씩 무리지어 보초서로 나갔던 청년들이었을 뿐이다.리 인민위원회에서 그 중 나이가 많거나 조금 낫다 싶은 사람을 조장에 임명하여 놓았던 것이다.
백부대원들은 장동 경비조장만을 즉결 처형한 다음 다른 데는 가보지도 않고 그날 바로 임자도에서 떠나갔다.이들이 급히 임자를 떠난 것은 상륙작전을 벌이던 바로 그날 작전권이 해군에서 해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작전권이 이관된 것은 해군의 요청에 의해서였다.해군은 비록 백부대가 목포지구 치안확보 임무를 받았으나 육전에 경험이 없었던 그들로는 치안회복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해병대의 투입을 요청하였던것이다.
해병 제 2대대(대대장 :김종기소령)는 인천에 주둔하고 있다가 목포 진입을 명령받자 10월 18일 18:00 LST [단양호]에 탑승코 목포를 향해 출발하였다.그리고 밤새도록 서해를 타고 내려와 백부대가 임자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던 바로 그 시간인 10월 19일 08:00에 목포항에 도착하였다.그들은 도착 즉시 목포 산정국민학교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백부대로부터 목포시의 치안과 경비업무를 인수(주2)받았다.백부대원들은 더이상 임자도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그들은 임자도 접수 후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귀대를 위해 부랴부랴 철수하였다.임자도는 또 다시 힘의 공백지가 되었다.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1 한국전쟁사 제4권,국방부,p184
주2 한국전쟁사 제4권,국방부,p186
92. 피해자와 가해자
6.25 발발후 1명만을 남겨두고 철수하였던 경찰이 임자도에 들어왔다.신임지서장은 [장세동]이라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깃발이 꼽히자 사태는 역전되었다.인공세력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가해자로 돌변했고 지금까지의 가해자는 피해자로 처지를 바꿈했다.외지에 나가 죽음을 모면했던 피해자의 가족들이 속속 섬으로 들어오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 되었다.곳곳에서 분풀이가 자행되었다.며칠전까지의 가해자들은 맞아 죽어가고 피해자들은 그들을 죽이고도 모자라 땅을치며 울어대었다.
[몽둥이로 맞아죽은 인민위 부위원장]
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탁OO는 동료들과 함께 모래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그들은 인근 밭에서 몰래 고구마를 캐어먹으며 연명하였는데 고구마 밭이 파헤쳐진 것을 수상하게 여긴 밭주인의 신고로 수색이 시작되었다.탁OO는 발각되자 [월하재]를 넘어 대기리쪽으로 도망쳤다.그러나 그는 대기리 쪽에서 추격자들에게 포위되었다.탁oo는 [내 목숨을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소리치면서 지니고 있던 칼로 자기의 가슴을 찔렀다.피를 흘리면서 [유언을 하겠다.여기 탁씨 성을 가진 사람 없는가 ?] 하였으나 아무도 없었다.그는 옆 듬벙에 엎드려 벌컥벌컥 물을 마셔대었다.이 때 그를 포위하였던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를 몽둥이로 쳐죽였다.탁문수는 인공기간 내내 최소한의 숙청을 주장하였던 생파의 대표자였다.
[한 내무서원의 죽음]
면 내무서원 탁OO은 백부대가 상륙하자 강OO 등 인공 간부들과 함께 [재원도]로 피신하였다.
그는 1927년 생이었다.중앙국민학교를 거쳐 광주에 있던 농업계 학교를 졸업하였다.탁내철은 결혼 직후 공군 비행기 정비기술병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 건너갔다.그는 일본에서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 이론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해방이 되자 귀국한 그는 군에 입대,광주에 근무하였다.근무 도중 한번은 목포로 오는 기차 속에서 공산주의 관계 서적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책이 없어져 있었다.기차가 목포역에 도착하자 경찰관 한 명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군인이 이러한 책을 읽어도 되느냐]하며 돌려주었다.그는 목포에 항공학교를 설립(지금의 목포소방서 자리)하였다가 6.25가 나자 임자에 들어와 남로당 당원들과 합류,임자도 접수의 전위대로서 활동하였다.
탁OO은 재원도 피신에 앞서 처가에를 들렀다.처남이 [피해 가족인 이인철의 집에 숨어 있으면 안전할 것 같다]하였으나 [그 집의 사망자가 몇인데 내가 그 집에 숨겠는가.차마 내 양심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그리고 많이 가야 한 달 안에 인민군이 다시 밀고 내려올 것이다]하였다.그들은 그곳에서 고구마를 캐어 연명하며 일 주일 정도 숨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목섬 봉홧대에서 봉화불(주1)이 피어올랐다.그리고 그 다음 날 인공세력들은 재원도에서 임자도로 나왔다.
탁OO은 장동 처가로 향하였다.환한 보름달이 불갑산쪽으로 기울며 천지를 비추어 사방은 대낮과 같이 밝았다.탁OO은 장모에게 처(주2)를 부탁한 후 도찬리 변인석의 집으로 가 피신하였다.변인석에게 자수를 상의하자 그는 [자수를 하더라도 감정이 격하여 있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사태를 보아가며 자수를 해야할 것이다]라고 권유하였다.
탁OO의 은신은 곧바로 탄로났다.동네 사람의 신고가 있었던 것이다.그는 체포되자 자신의 집을 거쳐 진리로 가자고 부탁하여 허락되었다.그는 집에서 옷을 갈아 입고서 부친에게 [아버지는 나와 사상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십시오]라고 말한 다음 끌려갔다.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정식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피해자들은 처형을 요구하였다.그는 처형으로 결정되었다.
처형이 집행되던 날 경찰관 셋이서 탁OO을 포함한 처형 대상자 다섯명을 이흑암리 [용난굴] 모래밭으로 인솔하여 데리고 갔다.처형대상자 중 인민위원장 강OO도 포함되어 있었다.탁OO은 끌려 가는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에게 [인민위원회에 참여는 했으나 생파로서의 행적을 이야기하며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그의 말에 감동한 형사는 [처형할 때 내가 당신을 맡아 총을 머리 위로 쏠 것이니 당신은 죽은척 쓰러지라]고 이야기하였다.처형지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그들의 눈을 가리고 나란히 세웠다.탁OO은 오른쪽에서 두번째였다.경찰관들은 일제 사격을 실시하였다.다섯을 다 처리한 경찰관들은 돌아가려다가 그 중 누군가가 [모두 다 죽었는지 확인하자]고 주장해 걸음을 멈추었다.탁OO을 맡았던 경찰관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 바로 돌아가자]고 이야기 하였으나 결국 확안하게 되었다.경찰관들은 확인 과정에서 탁OO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그의 왼쪽 이마에 총구를 대고 확인사살하였다.그 때 탁OO의 나이는 스물넷이었고 날짜는 해병대가 상륙한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9월 24일이었다.
주1 봉화불의 의미는 밝혀져 있지않다.좌익세력들이 재원도로 들어가며 누구에겐가
사태가 호전되면 봉화불을 올리도록 해놓았는데 이를 안 경찰들이 이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봉화불을 올린 것 같다는 말이 전해 진다.
주2 처 김윤애는 백부대 상륙 직후 남편이 재원으로 피신한 후 괘길리 피해자들로
부터 [탁OO이를 내어 놓으라]며 린치를 당하였다.매에 실신까지 하였고 진리에
끌려가 갇히기도 하였다.그녀는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게 된다.
93. 관용
이인철이 관용을 주장하고 나섰다.그는 최대의 피해가족이던 이학재의 장손이었다.자신의 전 가족을 잃고 그들의 시신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합동위령제(주1)에서 유족대표로 나서 [원수라 하여 함부로 죽이지 말자]고 역설하였다.
이 때 흑산도로 피난갔던 정태화가 면장으로 다시 복귀하였다.그가 흑산도에서 임자도로 들어와 보니 그의 가족도 피살되어 있었다.그는 가족을 죽인 사람을 알아내어 보복을 하고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이와 관련 재산을 잃은 측의 반발이 있었다.그는 구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임자면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당시 무안군수가 유족대표 이인철에게 면장 취임을 권유하였다.이인철이 거절하자 무안군수는 [당신이 수락하지 않는다면 임자사람이 아니라 피난나와 있던 이북 출신 인사를 임자면장에 임명할 수 밖에 없다]면서 재삼재사 설득하였다.이인철이 면장직을 수락 사태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각 동네를 찾아 다니면서 피해자 가족들을 설득하였다.[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직 설득력이 부족하였다.피해자들은 정부의 [부역자 처리지침](주2)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인공 가담자들과 그의 가족에 대하여 린치를 계속하였고 좌익계 인사들은 [이인철이가 지금 말을 저렇게 하고 다니지만 언제 우리를 칠지 모른다]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1 경찰이 들어 온 며칠 후 좌익에 의해 피살된 이들에 대한 위령제가 개최되었다.
주2 정부에서는 9.28 서울 수복과 함께 적치하에서 발생한 각종 형사사건에 대한 처리
지침으로 '부역자 처리기준'을 만들었다.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A급 부역자는 군재에 회부하여 의법처단.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6.25전에
좌익에 가담한 자로서 악질적인 자,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부역한 자,군경과 그 가족및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학살케하는데 앞장선 자 이
다.
B급 부역자는 포섭하여 대한민국에 충성케하되 지검에서 처리:이에 해
당되는 사람은 피동적으로 부역한 자로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면서 하는 수 없이
협력한 자,정상을 참작하여야 할 자이다.
C급 부역자는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선도하여 대한민국에 충성케 함. 이에
해당되는 자는 6.25전까지는 선량한 자였으나 자기 생명을 보존키 위하여 부득
이 소극적으로 부역한 자,6.25전까지는 선량한 자였으나 적에게 소극적으로 추
종하면서 군경,공무원,민족 진영의 지도자를 구조한 자들이다.
한국전쟁사 제4권,국방부,pp753-754
94. 살림은 살림을 낳고
경찰이 부역자 처리작업에 착수하였다.
장동의 경우 당세포 정OO,자위대장 김OO,인민위원장 김OO이 압송되어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장동사람들이 이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다.목포 경찰서를 방문 해 [이들이 6.25전까지는 선량한 자였으나 적에게 소극적으로 추종하면서 군경,공무원,민족 진영의 지도자를 구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였다.
경찰서 측에서는 김OO와 김OO은 고려해볼 수 있지만 정OO은 살릴 수 없다고 하였다.장동 동민들은 살릴 가능성이 있는 두 명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탄원서에 [김OO와 김OO은 좌익이 아니다.어려운 시기에 동네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해 그 자리를 맡았고 숙청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 입장을 취해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OO은 사형에 처해지고 김OO와 김OO은 목숨을 건졌다.어려운 시기의 작은 자비는 감동을 가져다 준다.살림은 살림을 가져왔다.
95. 발견되는 주검
사람들은 생매장 되었거나 수장된 가족들의 시신을 찾으러 곳곳을 돌아다녔다.그들은 가족을 죽일 때 참가하였던 결사대원이나 자위대원들을 끌고 다니며 매장했던 장소를 찾아 내도록 하였다.
김두후 일가 시신은 사후 열사흘만에 뒷불 모래밭에서 발견되었다.모두가 입에 모래 를 한입씩 물고 질식해 죽어있었다.가족들이 달려 들어 손을 묶은 노끈을 칼로 자르고 솔가지를 꺾어 시신의 모래를 털어내었다.들것으로 시신을 집으로 옮겼다.관을 만들 판자도 없어 대청마루 판자를 급히 뜯어 내어 관을 짰다.그리고서야 정식 장례 절차에 들어 갔다.
이학재 가족은 진리 앞바다 물살 센 곳에 수장되어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어느 바닷가에 시체가 한 구 떠밀려 왔다는 말이 들리면 딸 이재월과 손자 이인철이 시신을 확인하러 다녔다.그러기를 여러 달 되었으나 식구들의 시신을 대부분 찾을 수가 없었다.사망자들의 이름을 써 그들이 생전에 쓰던 물건들과 함께 땅에 묻고 묘(주1)를 만들었다.이학재의 처는 생매장되었던 관계로 시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삼두리 뒷 바닷가 불안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혀 죽어있던 김순덕의 시체도 발견되었다.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죽은 딸의 삼단같은 머리칼을 잡고 넋을 놓고 울었다.삼두리에 김순덕과 그녀의 남편 최영섭이 합장된 묘가 있다.
인공 기간 중 임자도내에서 좌우 쌍방에 의해 살해된 사람 수는 약 1400여명으로 추정된다.인공기간은 88일간(1950.7.24-10.19)이었으며 당시 임자도 인구 수는 1만여 명이었다.전쟁이 끝난 후 우익측 인사들은 전쟁도중 좌익에 의해 사망한 우익인사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웠는데 그 때 파악된 사망자 수가 992명(비석건립 후 다시 2-3명이 늘어나 994-995명으로 집계)으로 최종 집계되었다.좌익 사망자들의 숫자는 400여명으로 추정되었다.
96. 상처와 치유
전쟁이 끝났다.겉으로의 사회는 안정되어갔다.그러나 아귀가 되어보았던 경험은 마음속에 살아남아 그들을 괴롭혔다.상처는 쉬이 낫지 않았다.전쟁은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아울러 문화와 질서,가치와 규범을 파괴하여 버렸다.모두는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였다.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미워하였고 문중과 문중이 대결하였다.사람들은 상처에 괴로워하며 황량한 심정이 되어 아편에 영혼을 맡기거나 술에 취해 취생몽사의 세월을 보내었다.
섬의 인재들이 일거에 사라져버림에 따라 섬내 지도력의 행태도 다분히 이기적이고 배타적 양상을 띠어갔으며 지역 공동체 발전에 대한 의식은 희박해갔다.이것은 연대와 유대가 사라지고 그자리에 증오와 분열만이 남게된 새로운 풍속도였다.
나가면서 휘저어 버리고 들어오면서 쓸어버린 참혹한 시기를 겪은 주민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것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어떤 일에 대해서도 목소리 큰사람이 그렇다 하면 반발하지 않았다.그들은 열 명의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으며 양극단에 지우치지 않는 중도적 자세를 처세의 훈으로 삼았다.
과거가 사람을 묶는다는 것보다 현재가 미래로 향한 출발점이라는데 비중을 더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씻어내려는 노력에 착수하였다.치유의 방향은 화해와 교육,건설,그리고 문화활동을 통한 공동체 의식의 회복이었다.
[화해와 교육]
살아남은 유림 인사들은 한문서당을 개설하여 과거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면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학을 가르쳤다.당시 임자도의 분위기로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보통 1년에 두 철을 열었는데 시월부터 섣달까지가 한 철,설세고 이월까지가 또 한 철이었다.장소는 각 문중의 제각이나 개인집이었으며 과목은 천자문,동몽선습,사자소학,명심보감,소학,대학,논어 등이었다.천자문,동몽선습,사자소학은 초보자 용이었고 대학은 서당을 몇 철씩 다닌 학생들이 배웠다.학생들은 새벽 다섯시 무렵이면 일어나 아침식사 때까지 전일 배운 것을 외우거나 쓰는 연습을 하였다.그리고 각자 자기 집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와 선생에게 자기가 그날 배울 배울 내용과 분량을 지정받았다.그 때부터 학생들은 저녁까지 지정받은 부분을 외우거나 쓰는 한편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에게 물었다.
학생들은 저녁이 되면 하루종일 공부한 내용을 검사받았다.선생은 학생들에게 배운 내용을 외우게 하거나 특정 부분을 써보도록 하였다.그러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용서없이 회초리로 벌을 주었다.검사가 끝나면 밤 열시쯤이 되었는데 모두 함께 잠을 잤다.서당에는 [총시험]이라는 것이 있었다.보름 동안 자기가 배운 내용을 종합하여 시험보는 것인데 최고 점수를 받은 학생에게는 [장원급제]라는 칭호를 상으로 주었다.장원급제는 서당에서 제일 큰 영광이었는데 급제한 학생 집에서는 떡을 해와 선생과 학생들을 대접하였다.
6.25 이후 원수가 되어 지내던 각집안의 청년들이 서당에 함께 모여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은 [景行錄에 曰 恩義를 廣施하라.人生何處 不相逢이랴.讐怨을 莫結하라.路逢陜處면 難回避니라](은의를 널리 베풀라.살다보면 어느곳에서인들 만나지 않으랴.원수를 맺지말라.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면 회피하기 어렵다, 명심보감 계선편)하는 명심보감의 구절을 눈물을 흘리며 암송하였다.부모끼리는 결혼은커녕 말도 하지않고 지내는 사이이더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한 서당에서 한 스승을 모시고 함께 공부하였다.선대의 원한에 대한 최초의 화해는 한문서당에서 이루어졌다.
[건설]
면장 이인철은 행정기관 차원의 민심수습 노력을 전개하였다.그는 면민의 의지를 한곳에 모을 수 있는 건설사업을 모색하였다.그에 의하여 구상된 것은 6.25로 인하여 중단된 개인의 염전 간척공사를 면에서 반환받아 이를 거도적으로 추진한 다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해방 후 이북출신 [김기석]이라는 인물이 한 푼의 재산도 없으면서 죄수등을 동원해 축조하겠다고 정부에 간척사업을 신청해 허가를 받았다.그리고 공사를 조금 벌이다가 6.25 발발로 인해 중단하고 있었다.김기석은 6.25가 끝나자 다시 공사를 시작할 계획으로 임자면에 공사지원을 요청하였다.
면장 이인철은 협조 요청을 거절하고 [김기석에게 허가해준 것은 잘못된 행정으로서 면민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면민들과 힘을 합쳐 허가권 반납 운동을 벌였다.그들은 당시 무안군 지역 국회의원 [장염홍]에게 찾아가 허가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임자면 재정지원을 위해 임자면민이 이를 추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염홍은 이에 적극 찬성하고 [반환추진 위원]들을 데리고 내무부 장관에게 찾아갔다.그는 내무부 장관을 만나자 말자 [얼마나 뇌물을 먹었길래 부당한 짓을 하느냐]고 소리쳤다.장관이 깜짝놀래 [왜 이러시느냐.우선 자리에 앉으시라]고 자리를 권하자 장염홍은 [도둑놈의 의자에 어떻게 앉을 수 있겠느냐]하였다.장염홍은 또 건설국장의 방에 가서도 소리 질렀다.건설국장은 [억울하다]며 그간의 모든 서류 를 보여주었다.장염홍의 발의로 동건에 대한 국회 내무 분과위원회 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음력 8월 15일 국회의원 4-5명이 현지 조사 차 임자도를 방문하였다.
결국 허가권이 임자면민에게 돌아왔다.염전을 만들기 위한 제방 축조에 쏟은 주민들의 노력은 참으로 처참하고 비장했다.6.25를 통해 이리저리 만신창이가 된 대다수의 주민들은 영양실조로 부기가 겹쳐 죽어가는 와중에서 휘어진 허리를 간신히 일으켜 가며 개미떼처럼 뻘속을 허우적거리며 제방을 축조했다.
이 뚝으로 인해 약 20정보의 갯펄이 염전으로 바뀌었다.이 중 면민들은 몇 정보의 면염전을 얻었다.나머지는 김기석 등에게 돌아갔다.
[문화활동]
5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마을 별로 연극이 공연되었다.연극 행사는 정서적으로 메말랐던 당시의 여건을 배경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동네청년들은 애촌회 등 연극공연을 위해 모임(주1)을 만들어 스스로 연출하고 스스로 배우가 되어 극을 무대에 올렸다.대본은 동네에서 문학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썼다.동네에서는 이러한 행사준비를 물심양면에 걸쳐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주었다.배우로 뽑힌 청년들은 한겨울 내내 상당한 연습을 하였고 동네 사람들도 소품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 하였다.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하여 즐거운 장면에는 박수를 보내었으며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훔치며 함께 울었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울고넘는 인생선],[햇님 달님],[이수일과 심순애] 등이 주로 공연되었다.
연극행사는 60년대 후반 가요 경연대회인 [콩쿨대회]가 개최되면서 사라졌다.콩쿨대회는 연극행사를 간소화한 것으로 젊은 층의 호응을 받았다.일등상은 탁상시계였으며 삽,쇠스랑 등 농기구가 주요 상품 내용이었다.탁상시계는 동네에서 사용 중인 시계를 빌려와 상품으로 내건 것이었다.1등상은 항상 주최측 동네 선수에게 주도록 각본이 되어 있었다.콩쿨대회가 끝난 뒤 시계는 도로 원주인에게 돌려졌다.
주1
1950년대 중반 애촌회(愛村會)등 단체는 연극과 콩쿨대회 준비만에 국한되지 않았다.그들은 전쟁 후의 어지러웠던 마을 질서를 바로 잡는 임무까지 수행하였다.동네 주민들이 아편을 사거나 맞지 못하도록 감시하였고 술을 담그지 못하도록 계도하였다.동네의 풍속 사범도 규찰하였다.
Ⅶ. 새로운 천년을 향하여
97. 임자 중학교 설립
젊은 청년들(김희준,박인악,문판길,김봉옥,정회진,최원리 등)을 중심으로 중등 과정인 재건 중학교 설립되었다.
1968년 3월 대기리 공회당에 재건 중학교가 문을 열었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이 재건 중학교가 모태가 되어 1968년 12월 임자 중학교가 신설되었고 후일 임자 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된 것이다.김희준을 중심으로 한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은 일체의 댓가를 받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중학교가 설립되었다.
김희준 보다 앞서 2차례에 걸친 중학과정 운영이 있었다.최초의 것은 최원리가 운영한 것으로서 휴전 직후 역시 대기리 공회당에 마련되었으나 약 2년 가까이 지속되다 중단되고 말았다.최원리는 6.25라는 격변기에 조부모,부모,형제를 모두 잃어버린 피해자 당사자이면서도 후진교육을 통해 분열된 지역사회를 다시 복원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그러나 그는 지역내 깊은 갈등과 분열의 골을 확인하면서 2년 만에 폐교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당시 최원리와 시작을 같이 했던 지도의 경우 중학교 설립에 성공했다.최원리의 실패로 말미암아 임자도는 지도에 비해 십여년이라는 인재 공백과 고갈이 초래되었다.
염전 산업이 대 호황기가 되어 소금값이 금값으로 변했다.면민들이 만들어 놓은 면염전의 소득도 비례해서 커져갔다.그러나 그 결과물은 면민 사회에 발전적으로 투입되지 못하였다.당시 지서장을 하던 이가 면 특별회계 회의 석상에서 기관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그는 한 가지를 건의했다.[염전에서 생긴 수입을 흥청망청 써버릴 것이 아니라 후대 교육을 위해 한가지라도 장만해 놓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당신들이 해야할 일이요 또 그것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김희준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은 중학교 설립을 착안하고 방법을 숙의했다.그들은 학생모집에 나서 120여명의 학생을 모으고 대기리 공회당에서 면민 200여명 참석리 재건중학교를 개교식을 개최하였다.교사는 김봉옥 문판길 정회진이 맡았다.
이어 김희준은 재건중학교의 공립화를 추진한다.당시는 박정희 정권초기로서 재정난으로 중등학교 신설을 제한하고 있던 실정이었다.무안군 도서 지역의 경우 중학교가 이미 설립된 지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데도 중학교가 없어 중학 진학희망자들은 모두 목포나 광주로 유학을 나가야 했다.그 결과 국민학교를 졸업한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공립중학교 설립계획은 도 교육청 접수단계에서부터 벽에 부딛혔다.서류접수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추진위원들은 동분서주하였다.만일 조속한 시일내 설립인가를 받지 못하면 앞서 실패한 전철을 또다시 밟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먼저 학생이 흩어지고 다음은 힘들여 조성해놓은 학교 설립에 대한 면민들의 열의가 식어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그렇게 되면 중학교 설립의 세번째 싹도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김봉옥 문판길 정혜진은 학생지도에 매진하고 박인학은 학교 설립을 위한 도내 분위기 조성에 열성을 다했고 호남 매일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최원리는 과거의 실패를 경험으로 해 방해요소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 때 김희준은 임자도출신으로서 도 교육위원이자 목포에 사업을 하고있던 김종림을 만나게 된다.그는 임자중학교 설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김종림은 이들과 뜻을 같이 하여 안용태 도교육감 설득에 나섰으며 결국 안영태는 [정년퇴임하는 나에게 마지막 기념으로 낙도인 임자에 중학교를 허가해달라]고 문교부에 탄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문교부에서 당시 여건상 불가능하였던 공립중학교 설립을 임자도의 경우에만 특별히 허가하기로 내정하였다.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달렸다.정부의 예산이 없으므로 설립 이후 일 년간은 자체에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김희준 등은 교사가 지어지기 전까지 기 사용하고 있던 재건중학교 건물(초가집)을 임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68년 12월 16일 임자 중학교 설립 허가 통지서가 김희준 앞으로 우편 송달 되었다.무안군 도서지방에서는 지도 다음의 두번째 쾌거였다. 이듬해 임자 공립중학교에 교직원들이 발령되어왔다.그들은 그들앞에 놓여진 가마니 깔린 초가집 학교에 아연실색했다.한 명은 울기까지 했다.
학교건물 신축작업이 시작되었다.김오배가 20만원을 기부하는 등 지역 내에서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었다.육군 31사단에서 자재와 인력을 협조하였다.임자중학교의 설립은 당시까지 자연부락,씨족,국민학교 등 기초적 공동체 밖에 없어 상호 배타적이고 분열적일 수 밖에 없었던 임자도의 여건에서 면민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낼 수 있는 구조적 틀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임자 중학교 설립의 산파 김희준은 학교설립에 부수되는 몇가지의 혜택(교사임용,사무직 채용)을 모두 같이 참여하였던 동지들에게 돌리고 훌훌 떠났다.김희준은 6.25를 전후해 비운속에 가버린 무수한 선배들을 그리며 [임자도 소야곡]을 작시한다.
大屯山 숲기슭에 설리살든 숫궁새는
명사십리 海堂花의 식어가는 純情을 울더니만 지양없이 가버리고
渡口浦 백사장 헤어진 砂丘마다
추모매진 헌 신짝 하나
旅窓을 뒤흔드는 깊은 가을 찬바람은
번지없는 주막집의 어떤 여인내의 예닲은 향수이랴
웃음은 가고 廢墟의 옛터전에
호롱불만 깜박이니
주인잃은 台耳島야
옛 영화는 그 시절 어데가고
老鹿島 등대불만 가신님을 기두리냐.
바위끝에 뉘었고 추겨매고
사공부르는 저 소리는
秋夜三更 깊은 밤에 悲哀만을 돋워준다.
찾아오는 사람없이
수평선에 달이떠
白沙場 발자욱이
괜히 슬프다.
아,정든 내고향
정든 옛님은 간 곳이 없고
사나이의 쌓은 탑이
흔들리구나.
屛風,台耳 석장 끝에
빈 나루배 매어서 어느 손 기두리냐.
외마디 타령
아,충성의 길이
효성의 길이 한길이언만
말 없는 임의 墓에 들국화 핀다.
98 신안군 설치
1969년 1월 1일 서해안 섬들을 모아 신안군을 설치하였다.섬만으로 하나의 군을 만든 것은 통일신라의 압해군,조선의 지도군 설치에 이은 세번째 일이었다. 신안군은 재정자립도 면에서 전국 최하위 수준이라 할 정도로 물적 측면에서 형편없는 군세였다.그러나 신안군은 섬사람들에게 섬사람들 끼리만 함께 모였다는 동질감을 가져다 주었고 육지사람들과는 다른 그들 자신만의 내면적 특성을 되새겨 보게 하였다.그 결과 섬사람들은 자신들의 바다가 絶海절해라 표현되는 위기의 바다이기도 하나 동시에 다이내믹한 역동과 승리를 예고하는 大洋대양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그들은 재력과 숫자가 아니라 수천년 섬이 가져다 준 특성을 가꾸어 국가의 경영에 반영하려 하였고 국가 진로를 결정하려는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그리하여 이름만 대어도 알만한 크고 작은 별들이 정치의 바다 위에서 명멸하고 있고 또 수많은 섬사람들이 재야와 노동은 물론 그 외의 각 분야 넓은 바다 큰 파도 아래에서 혹은 이름을 알리며 혹은 이름을 감추고서 자맥질하고 있다.
지역 연고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 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보통사람들의 입지는 태어난 지역의 객관적 세에 따라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는 것이 불행하지만 상례이다.신안군은 전국에서 가장 빈약한 자치단체 중 하나이다.그러한 신안군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좌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재력이나 구성원 숫자로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그것은 그들이 가진 섬 집단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으며 그 특성의 발현은 신안군의 설치로 인해 일정수준 가속화 되었다.
99.다가오는 섬
[신안 보물선과 섬마을 선생님]
650년간 바다밑에 잠겨있던 보물선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1975년 5월 임자면 이흑암리 앞바다 주민들이 어로 작업 중 청자수병 3점과 백자대발,백자접시 등 7점을 발견하여 신고하였다.문화재 관리국에서는 현지 조사를 벌이고 다음해 10월부터 유물인양 작업을 실시하였다.유물이 있던 현장은 임자도에서 4km 떨어진 바다 가운데 이고 수심은 20m 정도였다.
보물선의 출현으로 신안군은 무명의 군에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섬군이 되었다.궁벽한 곳,유배지로만 알려져 있던 섬들이 어렸을 적 읽은 스티븐슨의 [보물섬] 처럼 누군가가 귀중한 보물을 감추어 놓은 신비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자'의 가요 '흑산도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이,그리고 정훈희의 '무인도'도 공전의 히트를 치며 대중속에 애창되었다.이러한 노래는 국민들이 섬에 대해 정서적 친근감을 갖도록 만들었다.섬은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가고 싶지 않은 원악유배지가 아니라 대신 누구나 가고 싶은 곳,좌절 에 빠진 사람들이 그들의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찾아가 쉬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다
[연륙과 연도]
역사적으로 섬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그 모양을 달리 하였다.과거 6개의 섬이 하나로 묶이어 임자도가 되었고 안창도와 기좌도가 합하여져 안좌도로 새로 태어났다.
1960년 지도가 무안군 해제반도에 연륙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다.이어 안좌도와 팔금도가 90년에 다리로 연결되었다.이것은 연륙(連陸)이 아니라 연도(連島)이다. 자은도와 암태도가 96년에 연도되었고 같은 해인 96년에 비금도와 도초도가 함께 묶이어 이인삼각의 운명체가 되었다.이에 그치지 않고 팔금도와 암태도가 연결을 추진 중에 있다.팔금도와 암태도가 묶이면 결국 안좌(안창도+기좌도)ㆍ 팔금ㆍ 암태 ㆍ자은도라는 네 개의 섬이 하나로 모아져 '네가족 한지붕'이라는 큰섬이 될 것이다.이외에 또다른 연도의 대상지로 송도와 사옥도가 꼽히고 있다. 연륙으로는 목포시와 압해도,이미 육지가 되어 있는 지도와 임자도ㆍ증도의 합방이 검토되고 있다.그리하여 결국은 신안군 일대의 대부분의 섬들이 연륙이나 연도를 통하여 함께 묶이는 광역도(廣域島)가 되는 grand plan이 구상되어 있다.
섬사람들은 수천년간에 걸쳐 활발한 연륙ㆍ연도작업을 벌여 그들과 뭍의 거리를 좁혀왔고 좁히고 있다.그들은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흑산도 아가씨)처럼 소극적이거나 다소곳하지 않고 일단 맘에 들었다 하면 비록 떼어놓고 박대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않고'(무인도) 쫓아가 들어붙는 심성을 가졌다.섬들이 뭍으로 달려오고 있다.
[이농과 상경]
이농이 시작되었다.이는 1960년대에 시작된 이래 30여년이라는 길지않은 시간대에 걸쳐 진행되었다.이농으로 인해 몇십대를 섬에 갖혀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의이던 타의이던 뭍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신안군이 설치되던 1969년 1월1일 신안군은 17만 4000명으로 출발하였으나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97년 12월 31일 현재 5만 6857명으로 줄어들었다.무려 15만이 넘는 인구,아니 섬사람 대부분이 아들딸의 손을 잡고 연락선에 몸을 맡긴채 뭍으로 향하였다.
섬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몸만 떠나온게 아니었다.그들은 신안군이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왔으며 그들의 문화를 함께 가지고 왔다.섬을 떠난 사람들은 어디에 가던 자신들이 과거 살던 섬의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마을단위 모임을 만들었다.그들은 한곳에 모여 살지만 않을 뿐 예전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에게 이웃의 애정을 갖고 애경사는 물론 관심사를 논의하고 지원하였다.그래서 누군가가 도시에 와서 잘되면 동네사람 모두가 기뻐하고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함께 안타까와 하였다.이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그들은 마을 단위 모임을 기초로 하여 섬단위의 모임체를 만들었고 또 다시 이를 구성단위로 하여 신안군 향우회를 만들었다.육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던 곳을 떠나 대도시로 오게 되면 기껏해야 군단위 정도의 향우회를 갖는 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행동을 보인다.섬사람들은 몸만 서울에 있을 뿐 서울 속의 신안군에 소속되어 있고 서울속의 고향 섬에서 같은 섬사람끼리 부단히 교우하며 ,또 서울속의 출신마을 사람들과 예전처럼 관혼상제를 치르며 살고 있다.
섬사람들은 공동체만 기지고 온 것이 아니라 특유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가지고 왔다.그들의 땅은 신라말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세웠고 진정한 의미의 민족통일을 사상최초로 이루어낸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정유재란을 겪은 그들의 15대 조상들은 궤멸해버린 조선의 수군을 재건해 냈다.그들은 까만 뻘 속에서 면화처럼 하얀 소금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바닷물을 몰아내고 갯펄을 옥토로 바꾼 갯땅쇠들을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두고 있다.그들은 수천년 섬생활의 고난을 통해 거품이 걸러진 삶의 원형질을 그대로 지니고 왔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의 과거보다 사람의 미래를 중시'하며 일을 함에 있어 '공리공론보다 실사구시를 숭상'한다. 또 '비관하기보다 낙관'하기에 본질적으로 낙천주의자이며 '강요되는 질서에의 순치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갖고서 '세련된 행동보다 야성적 행동'을 자주 선택한다.진실로 그들은 '큰고기는 큰파도 밑에서 산다'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100.미래를 위하여
섬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다.'절해고도(絶海孤島)'란 말은 섬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섬은 우리와 가까이 있다.가까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섬은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도가 아니다.섬 속에 인간이 살고 있다.그들과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 있다.우리가 사랑을 할 때 그들도 사랑을 하였으며 우리들 마음에 증오가 일 때 섬 사람들 사이에서도 푹풍우가 일었다.이러한 의미에서 섬은 바로 우리의 또다른 모습일 수 있다.
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다.혹시 과거에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섬에서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이가 섬에 첫발을 내딛으며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다소 용기를 내어 미래가 펼쳐질 섬속의 숲과 바다를 바라볼 때 그를 인도해 줄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확신,그리고 현실에서의 강인한 추진력 뿐이다.
출발하는 사람들이 가진 과거,그것이 역사였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비해주는 곳 그곳이 섬이었다.그 역사가 현실의 고통을 잊게했고 섬이 미래를 확신하게 했다.진실로 섬은 우리를 꿈꾸게 하며 자유롭게 하였으니 고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여 정열만을 가지고 꿈의 미래를 찾으로 그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섬으로 가자.
101.멍텅구리 배
1987년 7월 16일 새벽 3시경 태풍셀마가 할퀴고 지나갔다.재원도 서남방 3km해상에서 새우잡이를 하던 멍텅구리배 12척이 강풍과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멍텅구리배에 타고 있던 선장,선원 58명 가운데 5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멍텅구리배는 신안군 일대의 섬에만 남아있는 원시적인 어선이다.이들은 수백년 전 주민들이 입도하면서 만든 배들이다.낡은 배에 판자를 얼기설기 붙여 놓거나 밑창이 나간 오래된 배에 각목만 이어놓은 것이다.선령도 대부분 15-30년이나 되는 낡은 어선이며 크기는 15-25톤 급의 목선이 대부분이다.멍텅구리배에는 기관설치가 되어있지않고 돛이나 노가 없어 자기 힘으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바람이 불어도 다른 배가 끌어주지 않는 한 꼼짝할 수 없어 어선이라기 보다 고기 잡는 어구라 할 수 있다.따라서 갑자기 태풍이 불어오면 운명을 하늘에 맡겨야 한다.멍텅구리 선주들은 4-5명이 공동출자해 이들을 끌어올 예인선을 운영하고 있다.그러나 예인선마저 바다에 나갈 수 없는 바람이 불면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바다 고운 것과 여자 고운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뱃사람들의 속담처럼 아침에 조용하던 날씨가 밤에 갑자기 표변할 때는 구조가 불가능해져 선원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도 한다.
멍텅구리 배마다 선원이 4-5명으로 선장이 월 25만원 내외,선원은 10만원 내외의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이들은 한 번 출항하면 2-3개월을 꼬박 바다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선주들이 2-3일에 한 번 씩 날라다 주는 식량으로 밥을 해먹으며 물 때마다 새우를 잡는다.
멍텅구리배의 조업방법은 해안선에서 2-5km거리의 조류가 빠른 해상에서 2-3개월 간 정박하면서 양현 긴 장대에 그물을 설치한다.멍텅구리배는 선수 가운데에 닻을 감아올리는 호롱통이 하나 있고 호롱통 좌우에 사댕이 통이 하나씩 있는데 그물을 끌어 올릴 때 사용한다.동력을 사용하는 기계가 없으므로 닻을 감아올리는 호롱통이나 그물을 끌어 올리는 사댕이 통을 모두 손으로 감는다.그러므로 노동에 단련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렵다.
선원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선주들은 선원을 목포시내의 무허가 소개소에 부탁하게 되었다.소개소에서는 고속버스 정류소나 역앞에서 배회하는 청년이나 소년들에게 좋은 일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여 며칠간 여인숙이나 가정집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사창가에서 잠자리를 마련해준 대가로 20-30만원의 돈을 선주에게 받은 다음 멍텅구리배 그들을 선원으로 넘긴다.한번 멍텅구리배에 오르면 새우잡이가 끝날 때까지 바다에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선주들은 도주의 우려가 있어 될 수 있으면 선원들이 멍텅구리 배 위에서 선상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무허가 소개소에서 팔려 멍텅구리배를 타는 선원들은 거의 가출한 사람들이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셀마 태풍으로 사망하거나 실종한 사람 52명 중 1년이 넘도록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8명이나되었다.
멍텅구리배는 1994년 1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과 영광군내에 모두 95척이 조업하고 있으며 전체 승선인원은 400여명에 이른다.전라남도에서는 94년을 시작으로 3년간에 걸쳐 [물위의 돌]로 비유되고있는 멍텅구리배를 모두 없애기로 하고 사업비 42억 2000여만원을 확보(주1)하였다.
주1 주간 신안신문,1994.1.27 3면
102.이농
이농 현상이 시작되었다.이농현상은 단기간에 걸쳐 급격히 진행되어 지역 사회에 전쟁 이상가는 후유증을 남겼다.이농 현상은 1950년대에 시작된 이래 멈춤이 없이 수십년간 진행되고 있다.
<임자면 인구 감소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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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인 구 수 ||연 도 | 인 구 수 || 연 도 | 인 구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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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년 | 1만 1298명 || 63년 | 1만 1317명 || 70년 | 1만 205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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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년 | 1만 1275명 || 80년 | 9413명 || 85년 | 8067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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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감소 추이는 이농의 심각성을 말해준다.1970년부터 1985년간 15년 동안 임자도의 인구는 3988명이 감소,1970년 대비 33.1%나 감소하는 것이다.이농의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6.25의 상처로 임자에서 더 이상 살기가 어려워지자 임자를 떠났던 사람들과 직장을 구하여 돈벌이를 떠나는 사람들,그리고 자녀 교육을 위해 떠나가는 사람들이 이농의 주류였다.
103.해협
다도해 해역은 유사이래 수운의 요로로 활용되었다.해역은 임자도 해협을 북문으로 하고 명량해협을 남문으로 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흑산도를 끝으로 하는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다.
백제시대 해협은 일본 진출의 해상 관문이 되었다.이곳을 통해 백제의 문물과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백제의 인적 물적 요소가 [대화왜]를 성립케 했다.그리고 백제 멸망기 백제의 지배세력들은 이 해협을 통해 망명하여 [일본]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통일신라 때는 양자강 지방을 잇는 무역로로 이용되었다.해협을 통해 중국 남부 지방의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은 이의 쟁탈을 위해 대전투를 벌였다.이 해로를 차지한 왕건이 정치 군사적으로 성장 고려를 건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왕건이 지방근무를 자청 이곳에 내려와 힘을 축적하였고 아들 신검에게 쿠데타를 맞은 견훤이 이 해로를 이용 북상하여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
고려조에 들어와 이 해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고려는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해상 통로로 이 해로를 사용하였다.처음에는 고려와 송의 교역이 주로 황해도 옹진에서 중국 등주에 이르는 뱃길을 통해 이루어졌다.옹진에서 등주까지의 항로는 지리적으로 볼 때 송과 고려를 잇는 가장 짦은 거리였다.그러나 송이 만주에서 성장한 거란에 쫓겨 중국 남쪽으로 밀려나자 고려와 송 양국은 북방 항로를 버리고 남방항로를 사용하게 되었다.남방항로는 개성에서 예성강을 타고 바다로 나와 해협을 거쳐 대해로 들어가 흑산도를 경유한 다음 막막한 황해를 건너 명주에 이르는 길이었다.이 길은 먼 길이었으나 순풍을 만나면 불과 5-6일 밖에 안걸렸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 해협을 통하여 송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웠으며 송나라의 서적,도자기,예술품,비단,약재,향료,차가 이 해협을 통하여 들어왔다.이것들은 고려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다.중국의 천태종이 들어와 해동 천태종으로 심화되었고 중국의 인쇄술이 들어와 고려 대장경을 목각하게 한 고려 인쇄술의 모태가 되었으며 도자기 기술이 들어와 고려의 상감 청자 기술로 비약하였다.중국의 문화는 신안군 섬으로 이루어진 해협을 거치는 과정에서 토착의 문화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실로 우리의 해협을 빼놓고 고려의 건국과 문화의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조선조에도 이 항로는 군사,조운,교역로로 이용되었다.남부지방의 세미가 해협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되었으며 바다의 풍요로움이 이곳을 통해 북으로 올라가 전국을 살찌게 했다.임진왜란기에는 전라도의 양곡과 의병이 이곳을 통하여 북의 관군들에게 운반되어 전세 역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정유재란시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한 조선 수군이 바로 이 해역에서 재건되었다. 조정에서는 해협의 해로상의 가치에 관심을 가졌다.해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수많은 수군진영이 설치되어 이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사이래 국제항로로 이용되던 해로는 현대에 들어와 폐쇄되었다.시대를 강타한 냉전으로 인한 중국과의 국교단절 때문이었다.항로의 폐쇄는 수십년간 이 지역 일대를 소외시키고 변방화를 촉진하였다.그러나 역사에 있어 50여년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한국과 중국은 수교하였고 따라서 해로는 다시 열렸다.신안지역 해협은 다시 국가의 혈관지역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104.미래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끝난다.그리고 이제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섬을 떠난 사람들(주1)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섬의 역사에서 보듯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그러나 변화의 와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그것은 섬사람들의 정신적 특질인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미래를 꿈꾸는 실사구시의 정신이었다.섬 사람들은 섬 고유의 특성상 과거에 구속되기 보다 미래에 비중을 두고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었다.그리하여 그들은 [맨몸으로 이루어 낸다]는 정신적 특질을 형성하였다.
오늘 우리는 과거 우리의 입도조들이 맨몸으로 미지의 섬에 들어와 섬의 숲과 바위와 파도를 응시하듯 새로운 미래를 향한 또하나의 출발선에 서있다.우리를 도와주고 인도해줄 것은 과거 우리의 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짭짤한 기억밖에 없다.우리의 혈관속에 녹아 있는 소금기 같은 기억,그것이 우리의 역사이다.그 역사가 우리를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한다.
주1
이농의 파고를 타고 서울로 옮겨온 임자도민들은 1971년 주도윤,김대원 등 50여명의 발기로 1972년 [재경 임자향우회]를 결성하였다.그들은 1973년 5월 22일 창립총회를 열고 [주도윤]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이들은 1972년부터 매년 1회씩 야유회를 개최하는 등 면민단합을 도모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 등 시국의 혼란으로 단체모임을 할수 없는 사정이 되어 향우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1985년 임자도 출신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향우회 활성화를 구체화시키기로 하고 향우회를 재창립하였다.1985년 4월 21일 200여명이 참석하여 새회장으로 주영길,부회장에 정제완,이양택,임이국을 선출하였다.
이 때 부터 향우회는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면향우회의 활동은 리단위 향우회의 활성화를 기초로하여 이루어지고 있다.임자도내 거의 모든 부락의 재경 리단위향우회들은 동네별 모임을 갖고 관혼상제시 상부상조 활동은 물론 각종 친목할동을 전개하고 있다.
부록 1. 행정체계
신석기 시대 주민거주시작
청동기 시대
마한 시대
신미제국시대
백제 시대 고록지(개요)현
신라 시대 무 주 압해군 염해현
고려 시대 해양도 영광군 임치현 개요지도
전라도 영광군(정주)임치현 임치도
공도 시대
조선 시대 사복시 임자도 목장(1414-1436-----1796)
전라도 영광군 염소면 임자도진
전주부 영광군 염소면 임자도진
전라남도 영광군 임자진
전라남도 지도군 임자면
일제시대 전라남도 무안군 임자면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안군 임자면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
부록 2. 연표
신석기시대 주민거주 시작
마한 시대
369 백제국 고록지(개요)현
660 백제멸망,통일 신라신라 소속
757 신라 경덕왕 고록지현을 무주 압해군 염해현으로 편제
918 왕건,염해현에 진출 견훤의 교역선을 나포
995 성종 행정체계 개편 ,해양도 영광군 임치현으로 편제
1018 현종 행정체계 개편,전라도 영광군(정주)임치현으로 편제
1231-1259 몽고군 침입,영광군민 입자도 입보
1263.6 송나라로 가던 일본의 관선대사 '여진'등 230여명 임자도 표착
1270 추토사 김방경 공도령 발령
임치현민 지금의 영광군 백수읍 대전리 묘동으로 천읍
1273.3 기묘일 삼별초 토벌군 병선 47척 난파로 임자도 해역에서 115명 익사
1409 임치현 혁파,영광군의 직촌화 단행
1414-1436 태종14-세종 18년 어간 사복시 직할 임자도 목장을 장동에 설치
1400-1550 일부 주민들이 지금의 괘길리,진리,저동,이흑암리,재원
등지에 이주
1592 임진왜란 발발
1597 정유재란 발발,피난민 대대적 유입
1597.9.17-18 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승첩 후 어의도(어리,느리)경유
1597.9.19 왜군 법성포 침입 방화등 노략질
1597.9.21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 부락 거주 선비 정호인(당시 19세),
가족대동코 선박편으로 피난차 재원도 기착 후 족숙 정희득과 함께
임자도 최고의 시 2수를 남김
1597.9.20 강항 ,피난차 낙월도 경유
1595.8.15 이순신,한산도 본영에서 임치첨사 홍견등과 회식 후
[한산섬 달밝은 밤에...] 작시
1596.9.8 이순신,임치진 시찰
1597.9 중순 김현회,대기리 정착
1600 박중석,부동입촌
1611 박동원, 화산 입촌
1636-7 허상옥, 하우리 입촌
1680 최만신, 삼두리 입촌,경주봉씨 수도 입촌,강상호 조삼 입촌
김정희, 조삼 입촌
1700 이경국, 도찬리 입촌
1684 전라감사 이사명,서해안 설진 건의
1706 임치도등 6곳 설진 적합지로 비변사보고
1711.7.8 임자도진 설진
1731.4 임치진 첨사,영운차원으로 선발
1731.5 나주목 소속 도서에 고을 설치 논의
1793 임자도 목장 혁파 및 목장지 농토개간논의
1796.8.8 임자도 목장 혁파.목장지는 선희궁(사도세자 묘)에 편입
1801.2 한인 재원도 표류,대접소홀로 임자도 첨사 파직
1810.3 도민 다수 익사
1810.11 중국인 29명 이흑암리에 표류
1813 중국 복건성 상인73명 재원도 표류
1831 중국인 35명 표류
1840년대 콜레라 창궐,전도민의 절반정도가 사망
1848 무신대황
1852 임자대겸
1856 중국 강남성 사람 11명 표착
1857.12 전라우도 암행어사 성이호,임자도 첨사 최문철을 벌주도록
조정에 보고
1862.6.22 경상도 개령현감 김후근,가렴주구로 파직 후 임자도 유배
1862.9.4-8 경상남도 단성현 선비 김령,임자도 유배
1869 기사대무
1876-1877 병정대흉년 내습,사상 최대의 흉년
1886 전라도를 전주,나주,남원,제주의 4부로 나누고
영광군은 전주부에 편입
1886.9 일본인 3명 표착
1895.8 을미개혁 군제 개편으로 임자도진 폐진
1896 지도군 설치,초대군수 오홍묵
1895-1897 군수 오홍묵, 지도군 총쇄록 집필
1896.6.2 군수 오홍묵,향약 17조 절목 41조 시행
1896.6.22 임자도 파감 김복연 섬타리에서 일본인 들과 충돌 사망
1896.10.4 청나라 산동성 선상 3인,군수면담
1896 갑을세 거부 사건
1896 인구 토지 조사실시
1908 지도군지 편찬
1916 화산단 설치
1914.3.1 무안군 설치
1922.4.20 사설 학술 강습소 설치
1924 임자 보통학교 설립 인가
1924 임자 청년회 면민대회 개최
1897.10.1 목포개항
1925 임자 청년회,투옥 소안면 노농연맹 대성회 간부 지원 성금 모금
1925.4.30 임자 노농회 결성
1924 삼막동 교풍회 활동
1925.8.30 도구포 어업자 친목회 결성
1920년대 사회주의 유입
1940년대 장동 삼막 부동 저수지 축조
1945 청년단,치안대 제압코 해방후 임자주도권 확보.임자인민위원회 결성
1946 임자 인민위원회 해체
1946.10.31 31폭동사건 발생
1950. 보도연맹사건 발생
1950.7.24경 임자면 공산당위원회,인민위원회,내무서등 구성 숙청진행
음 9.9 해군 백부대 임자도 수복
1951 염전개간
1950년대 대이농 시작
1968.3 임자 재건중학교 설립
1968.7 임자도 간첩사건 발생
1968.12 임자중학교 신설
1968.12.31 전라남도 신안군 설치
1975.5 임자도 해저유물 발견
76.10.26-84.9.18 임자도 해저유물 인양
1983 대광해수욕장 개장
1971 임자도 재경향우회 결성
1971 삼막동 뒷산에서 마제 석기류 대량 발견
1975.6.20-8.20 최몽룡 서울대 교수 임자도 선사유적 조사
부록 3. 역대 주요 인사
가. 임자진 첨사
최문철(1856.11, 1857)
李錫俊(1880.11)
金孝源(1886.7.21)
金東肅(1895)
*연도는 재직시
나. 면장
1 대 高談圭 2대 兪現榮 3대 蔣錫元 4대 金談龍 5대 鄭龍澤 6대 鄭正澤
7 대 李種珉 8대 李相云 9대 朱貴天 10대 李種珉 11대 崔永彦 12대 鄭泰化
13대 李仁澈 14대 兪龍濬 15대 鄭泰老 16대 鄭正澤 17대 崔淏年 18대 趙宗植
19대 安載成 20대 金鈴仁 21대 李禧澈 22대 金廷寬 23대 白永雲 24대 崔元默
25대 姜大杓 26대 崔相淳 27대 朴亨柱 28대 남상창
다. 면의원
1대: 李仁宰 高四奉 金鍾玉 崔淏年 金雲述 李公述 李仁澈 李鍾宅
兪龍濬 兪張植 朴連福
2대: 鄭鍾溶 黃京春 金廷寬 金貴公 朱年圭 崔永彦 金啓三 任月宰
尹磁洪 崔永道 李仁澈 李東錫
3대: 高三用 金吾培 李完山 金廷寬 徐泰運 金夏準 黃學龍 崔永道
金相洙 姜大均
후기
나는 누구인가 ?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고 그 결과 본서에서 보듯 임자도의 역사를 나름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역사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정의가 있다.
영어의 History는 라틴어 Histotoria에서 유래된 말로 [찾아서 안다]라는 뜻이다.또 중국어로는 歷史 또는 鑑이라 하는데 歷史는 [지나간 일을 적는다]는 뜻이며 鑑은 [과거의 일을 거울에 비쳐 반성한다]는 뜻이다.동서를 막론하고 역사란 모두 과거의 사실을 연하여 현재를 바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의미의 역사정의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지않을 수 없었다.이해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의 인식체계는 너무도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삶의 한 방편,수단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저자는 임자사 연구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역사는 이러한 의미 외에도 인간애의 표현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과거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에 다름이 아니다.미래의 인간 역시 훗날에 우리의 삶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추적할 것이다.그 역시 마찬가지로 반성하려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 이유는 앞서간 사람들로서의 우리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이러한 과거에 대한 사랑을 끈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미래는 하나로 묶여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 중 얼마간은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펴며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의하여 강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대부분의 삶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던 의미조차도 잊혀져 버린채 두꺼운 세월의 심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자는 임자도를 중심으로 인근 섬에 살다가 포말이 되어 날아가버린 선인들의 작았던 이야기를 비록 흔적 뿐이겠지만 두꺼운 망각의 지층 밑으로부터 꺼내보려 하였다.그러는 과정에서 섬에 살았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진실로 역사는 인간애로부터 시작되며 인간애를 확인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외에도 섬에 대한 역사자료를 뒤적거리는 과정에서 저자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이 우울할 때 내뱉곤 했다는 [역사란 범죄와 어리석음,그리고 인류의 불행에 관한 기록에 불과하다]라는 독백에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아본 일이 없다.다만 공직자로서 근무 또는 휴가나 휴일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연구한 결과를 모은 것이니 만큼 본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럽다는 점을 고백한다.그러나 작업결과를 나자신의 참고자료로만 한정하려 했으나 주변사람들의 권유에 의하여 출간하게 되었다.훗날 섬의 역사에 관심있는 동호인이 있어 본서를 초고로 하여 더욱 훌륭한 섬의 역사가 만들어지면 나의 부끄러운 행위가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1995.9.12
金 永 會
섬으로 흐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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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 / 金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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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 약력
전남 신안군 임자면 대기리 장동 2851번지 출생
임자남국민학교 졸업
임자중학교 졸업
서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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