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온통 해바라기 꽃이었다. 늦은 아침, 어느 시골길을 지나던 중, 끝없이 넓은 들판에 빼곡히 피어 동그란 얼굴로 웃고 있는 노란 해바라기 꽃밭을 만났다.
마침 수천 송이의 해바라기 꽃들은 얼굴을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하고 있어서, 천천히 운전을 하고 지나가며 그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모두들 얼마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태양을 향하고 있던지... 그런 해바라기 꽃들을 보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바라기 꽃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그 길을 천천히 지나갔다. 어김없이 수천 송이의 해바라기들은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향하여 일제히 얼굴을 돌린 채로 있었다. 해바라기 꽃들이 저녁 해를 향하는 바람에 그들의 환한 얼굴 대신 조용한 뒤통수들 밖에 볼 수 없어 섭섭했지만, 그 날의 신비스러운 감동은 아직도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해바라기 꽃밭을 지난 지가 한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해바라기 꽃밭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매 순간을 하나님과 열심히 동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듯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일에 때때로 실패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며...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새벽 동이 트고 찬란한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는 조용한 시간, 지난 밤의 생각들은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죽은 듯이 자던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 갓 올라온 아침 햇살이 온 누리에 퍼지듯이 문득 잠에서 깨어 의식이 들면, 온 몸의 세포에 퍼져가며 우리를 사로잡는 첫 번째 생각은 누구에 관한, 무엇에 관한 것인가?
잘 알려진 찬송은 아니지만, 아침이면 혼자 입으로 흥얼거리는 찬송가가 있다. 마치 해바라기 꽃밭처럼 그 찬송의 가사는 부를 때마다 마음에 감동을 준다. 제목은 “먼동 틀 때”라는 찬송인데, 고요한 아침의 정적 속에서 하나님과 조용히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아름다운 가사로 잘 그리고 있다.
먼동 틀 때 조용히 주와 함께, 새들 잠 깨고 어둠 걷힐 때,
나 주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 아침 해보다 아름답도다.
짙은 어둠 조용히 물러가고 장엄한 정적 밀려 올 때에
나 주를 사모하여 찬미하니 아침의 이슬 더욱 신선해.
아침마다 조용히 주와 함께, 광명한 햇빛 비쳐 올 때에
나 주께 더욱 가까워진 느낌, 아침 해 볼 때 더욱 크도다.
더욱 밝은 저 새 아침이 오네. 생애의 어둠 사라지는 날
이 아침보다 더욱 밝은 그 날, 나 주와 함께 길이 살리라.
동이 트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어 자리에서 처음 눈을 뜰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라면, 이슬도 숨을 죽이는 고요한 아침, 조용히 입을 열면 우리 입술에 발해지는 첫 번째 말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해바라기가 해 따라가듯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해바라기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경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아주 절실한 것이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전해진 하나님의 복음의 진수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도 적은 이유는, 아니, 복음의 진정한 목적인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하는 위대한 역사가 그렇게도 세상에 적은 이유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단순한 한가지 진리,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체험을 삶 속에서 충만히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또는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태초에 처음 창조 받을 당시의 완전한 인간,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하늘의 자녀로 회복되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처음 창조 받을 당시의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아가 완전히 죽은, 무(無)의 상태의 마음에 하늘의 새로운 생명이 심기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경험, 말씀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다.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마음과 성품과 행동은 신앙과 동떨어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경험, 진리가 내 세포에 녹아 들어 진리로 성화되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온전히 주장하시는 경험을 하며 사는 것이다.
동행하는 삶의 계단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꼴 지워지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떻게 하면 우리 생애에 밀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계단은, 먼저 바른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알게 된 그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그렇게 사랑스러우시고 놀라우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아직도 하나님이 생소한 분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전심으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두 번째 계단은, 날마다 자아의 철저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매 순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아가 죽는 경험은 뼈를 깎는 아픔이며,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안 사람에게 그 일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기쁨과 자유를 주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 번째 계단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험은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안테나가 늘 하나님을 향하며, 우리의 생각과 명상이 늘 하나님께 머무르도록 연습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숨쉬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삶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해바라기 그리스도인
마음 속에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쳐지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오늘도 태양을 바라기 위해 피어난 해바라기는, 사랑하는 님을 향하듯 일편단심으로 해를 향해 눈과 얼굴을 맞추며 서 있다. 우리 모두 해바라기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과의 동행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