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심진희 집사 ▶시편찬송 시편90편(제네바) 다같이 ▶경 독 시편90편 고린도후서9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9편1-11절(연합)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26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6편(제네바) 헌 상 심진희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요일2:24-29③ 요한일서 강해(46) 주의만찬 행2:42 다함께 * 찬 송 찬송가187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모임: 성경과 교리”(70) 교리와 함께 읽는 야고보서 본문연구 |
제26주일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제69문: 세례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당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시켜 줍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외부적 씻음의 제도를 정하셔서 물이 더러운 몸을 씻어내듯이 그의 피와 영으로 우리 영혼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제70문: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 씻음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씻음 받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구별하셔서 점차 죄에 대하여는 죽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제71문: 우리가 물세례로 씻음을 받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와 영으로도 씻음받는다는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제정하실 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세례가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언급된 다른 성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
▣성찬본문 / 행2:42
『 (행0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설교본문/ 요일2:24-29③
『 (요일2:24-29)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이것이 기름부음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요한이 가르치는 ‘기름부음’이라는 독특한 상징언어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름부음’이란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승귀가 지상교회에 부어주시는 구원에 속한 모든 은덕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이 ‘기름부음’을 특징짓는 고유한 내용을 ‘성령과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속사의 성취와 그 위대한 전환을 알리는 ‘때’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요4:23)입니다. ‘성령과 말씀’은 성경과 사도적 신앙, 곧 개혁파 신앙의 경계석입니다. 이 경계석이 무너지거나 옮기는 자를 요한은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기름부음(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과 사도적 가르침에 대한 순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리가 낳은 사람들(약1:18)이고 또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약1:21-22)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름부음’의 진위를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참된 기름부음을 구분하는 것은 첫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믿는가하는 것과 둘째, 성경을 교회가 상속한 거룩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하고 믿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가르친 영분별인 것입니다.
▶(요일04:0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여기서 ‘영’을 분별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저 위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포착하는 직관적인 어떤 깨달음이나 영적도약을 일으키는 신비로운 체험이 아닙니다. 그런 주관적인 어떤 것을 ‘영분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영을 분별하라는 말은 그 ‘교훈’, 곧 ‘가르침’의 내용을 분별하라는 매우 객관적인 개념입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이 ‘영’이라는 말이 ‘말씀’과 어떻게 교호적으로 사용되는지 요한의 언어로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요0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은 영이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 곧 ‘말씀’이 생명이라고 정의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구원하실 자기 자녀들과 언약의 증표를 주실 것을 예언합니다.
▶(사59: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십시오. 선지자는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영원히 그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종말론적 구원의 은혜’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이 아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기름부음’의 실체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름부음’을 외부로부터 더해져야할 추가된 은사나 비범한 능력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데 ‘방언’과 같은 외부로부터 오는 ‘능력’이나 ‘각종 은사’들이 아닙니다. 사도시대에 나타난 사도적 표적들조차도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성령’ 자체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은사들은 말씀에 언제나 종속되었고, 그 진리가 선포된 곳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셨다는 엄위로운 시위요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표적은 그들이 증언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언제나 병행되는 것입니다.1)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 하늘보좌에 앉으사 ‘성령과 말씀’으로 통치하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표적은 예수자신의 행위와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했기에 그들은 예수의 증인(mavrtu")(행5:32)이요 그의 보내신 사도(ajpovstolo",전권대사,사신)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몸인 교회가 세워진 후 진리의 말씀(성경)의 뒤로 퇴장합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말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광야의 선지자에게로 나아왔습니다.(마3:5) 사람들은 요한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인가하여 주목했지만(눅3:15), 그는 단호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요1:20) 그의 존재와 사역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고, 광야로부터 들리는 소리였을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요0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 사라져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던 그의 역할을 거기까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 사도들은 그 존재와 사역(표적들)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몸인 교회가 탄생함과 동시에 그들도 퇴장해야합니다.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존재하는 한 더 이상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요 표적인 사도적 은사는 그 자리를 비워야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던 선지자였고,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증언한 선지자들입니다. 요한처럼 이들의 사역의 중심은 오직 진리의 말씀일 뿐입니다.
▶기름부음의 표지를 ‘방언’과 같은 비상한 은사라고 주장하던 은사주의, 2차적 축복으로서의 성령세례등은 요한이 경고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답습하는 위험한 교리였습니다. 21세기는 좀 더 세련된 방식의 영성운동으로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다시 왜곡되고 있지만, 해 아래 새것은 없는 법입니다. 언제나 이단의 생태는 같은 패턴을 가집니다.
거짓 기름부음, 욕망의 두 얼굴
요한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는 어떤 인격적 대상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눅4:18;행10:38)는 표현은 진리의 상층부로부터 파생된 신비로운 에온(ion)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가현된 존재였을 뿐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오직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호칭만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제 2위격이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 신방(연합)을 경험한 천상의 에온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일합일의 신성화교리는 신방(新房) 성사의 교리(Mystery of the Syzygies) 혹은 플레로마의 합일(Pleromic Unoon)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와의 영적 합일은 일종의 부부간의 성정결합과 같이 은밀하고 신비로운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2)
예수는 신일합일을 이룬 이상적인 양성(兩性)구유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안에 있는 양성의 어떤 측면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성은 예수의 여성성과, 여성은 예수의 남성성과 결합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성례전의 의미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름부음을 일종의 성령의 성사(聖事)로 주장하는 일단의 영성주의자들의 주장과 닮아있습니다.
“주님은 신비를 통해 모든 것, 곧 세례와 기름부음과 성만찬과 구속과 신방을 행하셨다!”(빌립복음,3)
▶우상숭배는 항상 오컬트적 밀교의식과 말초적이고 직관적인 신비체험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방식을 단호하게 ‘영적음행’으로 규정합니다.(출34:15;삿2;17;8:27;호4:13등) 그러므로 신비한 카리스마(기름부음)를 추구하는 모든 유형의 신앙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도약대에 서는 것입니다. 그의 영적인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본다면 그 자신도 놀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그리고 마침내 그 하나님의 신성을 추구하려는 아담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장, 지속적 코이노니아의 길
그렇다면 참된 ‘기름부음’을 받은 신자들은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어떻게 삼위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가야 할까요?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경험되는 그 효과와 열매는 무엇입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상승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우주적이고 신비로운 ‘신성화’(신화)의 깨달음이라고 가르쳤지만 요한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천상으로부터 보내신 성령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의 지상적 인격과 삶속에 침투합니다. 신자의 거듭난 지성과 의지는 이 거룩한 기름부음 곧 성령과 말씀을 통한 ‘가르침’에 천착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신격화’(성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 곧 말씀의 종교입니다. 이 말은 경전주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흘러오는 모든 경건에 속한 은덕들을 창조의 현장안에 드러내는 삶의 종교요 덕의 신앙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온 세상을 창조하신 방식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만물을 붙드시고 경영하시는 분이십니다.(히1:3) 온 만물을 보시기에 좋다하신 것처럼 이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중생한 신자들의 삶과 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은 ‘하나님이 보기 좋은 상태’를 지향합니다. 비록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정직한 비관주의가 선행하지만 지상의 신자는 이 육신과 세상을 도피하거나 초월하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딛0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신자가 거듭남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재창조의 사역으로 말미암지만, 거듭난 신자는 다시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과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받음과 함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신 후 광야로 이끌리어 가신 것처럼, 신자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일상으로서의 삶’이라는 광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현재능동)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ejdivdaxen,과거능동)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말은 복음의 신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성령과 말씀으로 중생한 신자는 이미 그 안에 생명의 원리가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지성은 거듭난 새로운 지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골3:10) 그리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하는 의지의 경향성을 갖습니다. 이 생명의 총체적 경향성은 신자 안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자의 존재 안에 내재된 생명의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행하신 중생의 사역임으로 비상하고 신비롭습니다.(요03:6-8)4) 반면에 이 새로운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매우 통상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빙크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재창조는 창조에 적응한다’라고 묘사한다)
예컨데, 생명이 태어날 때 이 생명의 신비는 해명되거나 규명되지 못합니다.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도 모르고, 의사도 모릅니다. 그러나 탯줄을 끊고 자라가는 아이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은 누구나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양육하고 훈련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르침과 양육이라는 보편적인 성장원리가 개입됩니다.
중생한 신자 안에 생명의 원리를 심기신 성령께서 이제 중생한 신자를 말씀이라는 객관적인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라가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장이란 새로운 어떤 생명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부음’의 본질(성령세례)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신자의 인격과 삶안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지배력을 확장시켜가는 과정(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성장을 새로운 비기나 도약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신기루 같은 방황을 멈춰야합니다. 개혁파 신자는 영성이라는 모호하고 이교적인 용어보다 ‘경건’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딛2:12;약1:27;히12:28등)
훈련되지 않는 신앙은 없다!
▶날개 있는 새라도 저절로 날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날개 짓을 배우고 바람을 타는 법도 체득해야합니다.(신32:11)
▶저는 자전거를 우연히 그냥 배운 사람입니다. 한강변 언덕에서 실수로 굴러가기 시작한 자전거위에서 살려고 핸들을 잡고, 패달을 굴리다가 순식간에 득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탯줄을 끊고 일어나기를 배우는 때로부터 직립보행을 해왔습니다. 두 발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전문가들입니다. 우리의 몸은 균형 감각이 체화되어 있습니다. 이 체화된 감각이 단지 자전거를 타면서 패달링과 핸들조작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너희 안에 거하는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막0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심겨진 씨가 밤낮 어떻게 자라나는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막4:27) 그러나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 시간은 말씀의 갱신과 인내와 순종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나 누군가는 뿌리고 누군가는 물을 주어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고전3:6)
그러나 어찌 훈련 없이 나는 새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이 사도의 교훈을 따라 어거스틴은 이른바 ‘습관을 형성된 인격’이라고 정의했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이 성화적 인격을 ‘죄죽임과 의의살림’의 여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도교회가 고백한 ‘기름부음’안에 거하는 것, 그리스도안에서의 코이노니아를 통해 진전되는 성화의 정로(正路)인 것입니다.(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70문)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의 은덕을 소유하는 유일하고도 통상적인 방편이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는 보편적 수단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54-155문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천국비유를 하시면서 지상의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어떻게 경청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눅0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흥미롭게 이 말씀이후에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의 방문 사건이 이어지고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정의가 이어진다. (눅8:19-21)
▶루더포드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저 가지기를 원하지만 그분의 값은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가벼운 복음, 손쉬운 믿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쉽고 간단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히02:0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말씀은 유념하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갑니다. 복음의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에 신앙의 바겐세일을 기다리는 태만하고 냉담한 신자는 자신의 영혼은 헐값에 팔아도 진리의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마25:1-13)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실한 신자들의 운명은 오직 주의 ‘기름부음’안에만 안전할 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당부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는 교회의 운명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그의 수고와 사심 없는 헌신에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안전할 것이라고 낙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교회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한 목자가 부재한 자리에 ‘사나운 이리’가 올 것이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올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행20:29-30) 교회는 항상 위기와 시험, 거짓과 온갖 오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교회의 운명을 ‘주와 그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안에서 그의 회중의 운명을 확신하는 사도 요한처럼 말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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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보다 이 같은 사도적 표적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심판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함과 동시에 회개치 않는 자들의 심판이 병행된 것처럼(마3:10)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말씀에도 구원의 초청과 함께 심판이 병행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방언이다. 이 방언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거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표적으로 작동한다.(고전1:22;14:22)
2) 영지주의를 반박했던 교부 이레니우스는 시몬 마구스(행8:9)같은 자는 이 신방성사를 빙자해서 이성을 꾀어 성적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기록한다. 오늘날 사이비교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말초적 성이미지를 결부시킨다.
3) 영지주의가 로마 캐톨릭의 형성과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들이 있다.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복음서에 보면 로마 캐톨릭의 7성사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성례전이 발견된다.
“어떤 이는 사도들이 ‘우편’과 ‘왼편’이라고 부른 십자가 권능 가득한 기름부음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받는 이가 있다.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빌립복음서)
4) ▶(요3:6-8)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92편
1. 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마음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에 집중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높이 칭송하는 일에 태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놀라운 일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주의 깊게 돌이켜보고 자세히 주목하는 순간 그 일들을 우선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그런 다음 우리로 하여금 힘차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당신에 대한 찬송을 선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여전히 감동받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으며, 악한 자들이 오랫동안 성공을 거두며 형벌을 피하는 것을 그들이 주목할 때 그들은 아마도 어두움으로 눈이 먼 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침체를 겪을 때 그리고 그 행복의 그늘이 지나간 후에 그들은 순수하고 단순한 재난 곧 영원한 재난에 빠져 들어가는 반면에, 의로운 자들은 마치 삼목과 종려나무처럼 복된 하늘 집에서 영원하고 순수한 복락들을 누리게 될 그때에, 그 악한 자들이 한층 더 깊이 슬퍼하게 하신 것이 당신의 뜻이라는 사실을 의로운 자들로 배우도록 하신 것이 이런 일들을 일으키신 당신의 뜻입니다. 선한 아버지여, 우리 안에 이 소망을 키워주시고 그 소망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셔서, 당신이 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심을 우리가 이해하게 하시고 당신의 판결에는 절대로 그 어떤 부정의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선포하게 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