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여행은 빛도 바람도 좋습니다. 그래서 상쾌하고 즐겁지요.
시월의 딱 중간에 청풍과 월악산에서 물과 산을 바라보며 답사를 했습니다.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종일 끊이지 않았던 가을날의 추억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교리 방단적석유구
거대한 바위 위에 기단만 남은 채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 탑, 기와 조각이 흩어져 았고, 건물터였을 축대 위에는 나무들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바위틈으로 흘러나와 절 사람들의 목을 축였을 석간수는 흔적만 남았다.
때로는 변변한 유물 하나 없고 이름도 전하지 않는 절터에서 진한 끌림이 느껴진다. '교리 방단적석유구(校里 方壇積石遺構)라는 이름이 붙은 석조물이 있는 청풍의 절터가 그런 곳이다.
크기가 일정치는 않은 사각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석조물이 모전석탑이었는지, 또는 제단이었는지 원형이 불분명해서 이런 어정떵한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1942년에 발간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탑은 정련된 기와 형태로 얇게 잘려진 석편을 겹친 7층탑으로, 높이는 모두 2장 5척(약 7.5m)이다. 부근에는 와편이 흩어져있고 사지로 일컬어진다.’라는 설명이 남아있다. 그 뒤에 사리장치를 노린 도굴꾼들에 의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여러 정황상 모전석탑이 분명할터인데,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구조상 내구성이 약해서 무너지기 쉽다. 석조물 주변에는 몇 년 전에는 없었던 철제 보호 난간이 생겼다.
절터에는 축대를 쌓은 건물터 등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발굴조사를 하면 절에 대한 여러가지 단서가 나올 것 같다.
청풍문화재단지에서 건너다 본 교리 절터
금수산에서 이어진 산줄기의 암반이 둘러싼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도로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지만, 청풍이 수몰되기 전에는 산속으로 꽤 들어간 중턱이다.
‘淸風明月(청풍명월) 山紫水明(산자수명)'의 땅 청풍
지금은 충북 제천의 일개 면이지만, 조선시대 청풍은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었다(제천현은 종6품 현감). 남한강을 따라 많은 사람과 물류가 이동했고, 경치까지 뛰어난 이름난 고장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댐이 들어설 후보지가 되고, 중앙선 철도가 제천으로 지나면서 청풍은 궁벽한 산골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 80년대 건설된 충주댐의 담수로 청풍면 일대가 몽땅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청풍호(충주호를 제천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가 다시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옛 청풍의 흔적들을 산 꼭대가 옳기며 만들어진 문화재단지와 유람선을 찿던 사람들은, 이제는 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을 오르며 하늘에서 청풍호를 내려다 본다.
청풍문화재단지
1985년 수몰되기 전 청풍의 관아, 민가, 향교 등 문화재를 이전했다. 작은 민속촌 같은 느낌이 나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망월산성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청풍호를 전망하기에 좋다.
한벽루 寒碧樓
흔히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남한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청풍의 상징적인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님한강변에 연해 있어 누각에 오르면 한벽(寒 찰한, 碧 푸를벽)이란 이름처럼 시원한 강바람이 느껴질 것 같다.
오른쪽에 계단식 측랑(側廊)이 잇대어져 있어 올라서 보고 싶게 한다. 그런데 오르지 못하게 한다. ㅠㅠ
영남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밀양강의 시원함을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가 보다.
워낙에 유명한 건물이라 많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72년 대홍수 때 모두 유실되었고, 그중 송시열이 쓴 현판의 사진이 남아있어 재현한 편액이 걸려있다.
여기가 고향인 아버지께서 어릴적 한벽루에 올라가 놀았다고 하셨었는데……
이주 전 청풍의 모습 몇 장
첫댓글 가을이 오는 초입을 눈에 담아갑니다.*^^
옛 사진과 그림까지 겯들인 글로 느낌이 강하네 전달되네요. 역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