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나타났다!”
“모두 숨어!”
“이쪽으로 달려!”
아파트 주차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소리치며 달아납니다.
“이 녀석들, 누군지 다 봐뒀다.
다음에 만나면 혼날 줄 알아!”
경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소리칩니다.
경수와 아이들은 경비 할아버지 별명을 고래라고 부릅니다.
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고 붙인 별명입니다.
모자 밑으로 가지런한 하얀 머리카락이 보이는 걸 봐서는 아주아주 나이가 많으시겠죠.
고래 할아버지는 언제나 목소리가 큽니다.
인사를 할 때도 크고 분리수거 일을 하면서 혼잣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우렁찹니다.
한번은 아파트 계단에 불이 안 들어와서 경비실에 갔습니다.
“할아버지, 103동 계단에 불이 안 들어와요.”
“104동에 물이 안 나온다고?”
“아니요, 백.삼.동.계.단.에.불.이 안.들.어.온.다.고.요.”
경수는 또박또박 큰소리로 다시 말했어요.
“그러니까, 103동 계단에 불이 안 들어온다는 거잖아!”
고래 할아버지는 시미치를 뚝 떼면서 처음부터 알아들었다는 듯이 메모장에 뭔가를 적었어요. 그러곤
“경수야, 넌 올해 몇 학년이 된 거냐?”
“할.아.버.지, 전.에.도.물.어.봤.잖.아.요?”
“이눔아, 내가 언제 물어봤다고 그래?”
“3.학.년.이.에.요. 할.아.버.지”
“아이구야, 세월이 많이 흘렀네. 네가 유모차 타고 다닐 때부터 봤는데...”
“할.아.버.지.는. 몇. 학.년.이.세.요?”
“몇 학년으로 보이냐?”
“6.학.년.은. 되.셨.겠.어.요.”
“흐흐 이 녀석이 할애비 기분 좋게 해주는 소리도 아네.”
어른들 나이를 말할 때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나이보다 열 살을 낮춰서 말하면 언제나 칭찬을 듣는다는 걸 경수는 잘 알아요.
고래 할아버지랑 이야기하다간 목이 쉴 거 같아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뺍니다.
할아버지가 점점 목소리가 커지자 아파트 주민들은 불편해했어요.
주민들의 말도 잘 못 알아듣고 고함치는 듯이 말을 하니 갈수록 사람들은 할아버지 대하기를 꺼렸어요.
더 젊은 경비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지요.
청력이 떨어지면 자기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자연히 말소리가 커진다는 것을 경수는 수업시간에 배워서 알아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려보았어요.
노래를 아주 크게 틀어놓은 헤드폰을 쓴 연예인이 나왔어요.
주어진 그림을 상대편에게 설명하는 예능프로였지요.
헤드폰을 쓴 연예인 목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다들 웃느라 난리였어요.
정작 그 사람은 자기 목소리가 커진 줄 모르는 거예요.
고래 할아버지도 그런 거겠죠.
주민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할아버지 목소리가 큰 것만 빼면 아파트에서 가장 일 잘하는 경비원이에요.
경수에게는 할아버지가 안 계세요.
경수가 태어나기 전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얼굴도 뵌 적 없어요.
외할아버지도 경수 두 돌 무렵 폐암으로 돌아가셔서 얼굴이 기억 날 리가 없지요.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고래 할아버지 덕분이지요.
할아버지는 경수가 아침에 등교하러 나서면 차들을 멈춰 세워서 경수가 안전히 나가는 걸 보면 차가 지나가게 해요.
경수는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요.
괜히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경수야, 오늘 비 온다. 우산 챙겨야 해.”
“아, 그.래.요? 집.에. 다.시 올.라.가.면 지.각.하.는.데.요.”
“이거 가져가라, 나중에 돌려줘야 해.”
경수는 꾸벅 인사하고 우산을 받아듭니다.
오늘은 아파트 반상회가 있는 날이었어요.
고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요.
목소리가 큰 할아버지가 불편하다고 일을 그만두게 하자는 안건이 나왔다네요.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성을 내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며 젊은 아줌마들이 다들 싫어한대요.
아파트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은 고래 할아버지와 정이 들어 반대했고요.
하지만 투표 결과 그만두게 하자는 표가 더 많이 나왔어요.
경수 엄마도 마음이 안 좋은가 봐요.
고래 할아버지가 경수를 친손자처럼 예뻐해 주는 것을 잘 알거든요.
내일까지 할아버지가 경비 일을 합니다.
경수는 할아버지가 안 계시는 경비실은 상상이 되지 않아요.
누가 우산을 챙겨주고 오며가며 ‘경수야!’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겠어요.
경수는 밤에 할아버지에게 쪽지를 썼어요.
글자 쓰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경수라서 딱 두 줄만 적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동안 저의 할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 경수 올림
경수는 어제 돌려주지 못한 우산을 들고 경비실에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고래 할아버지!”
첫댓글 아... 현실을 너무 잘 표현하셨네요.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거든요.
'고래와 쪽지'로 이렇게 동화가 만들어지다니요!
저도 이제 생각주머니를 풀어봐야겠습니당~
우리 아파트 경비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어봤어요.
고래라는 동물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접근하기가 어려웠어요.
어설프게 꾸며내느니 차라리 이런 쪽으로 틀어버렸지요.
얕은 꾀를 부려서라도 숙제를 내봅니다 ㅋ
오호! 묵직하구만요
퇴고가 덜 되어서 읽을 때마다 고칠 부분이 나오네요.
벌써 서너 개를 수정했어요.
주 5일제라서 어찌나 고마운지 ㅋㅋ
알흠다운 금요일 밤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