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과 ‘꽃바람’은 허구의 이야기라고 풀어보았다. 꿈이나, 몽상은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욕망이라고 하니, 자신의 욕망을 풀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욕망은 작가만의 욕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적 욕망이기 때문이다.만약에 꿈을 빌리더라도 사실에 입각하여 상상력을 펼친다면, 소설적인 허구와는 성격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수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수필도 이런 형식을 빌려서 자신의 욕망을드러내자는 것이다. 우리 수필이 도덕주의와 경건주의에 사로잡혀 너무 엄숙해지므로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왔다. 이런 시도를 함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 소설 형식을 쫓느라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며 우려할 수도 있다. 김귀선의 수필은 그런 우려를 나름대로 비껴가려 하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수필에 소설의 형식과 기법을 과감히 가져왔다. 그의 작품 ‘꽁초’는 ‘낮달’이나, ‘꽃바람’보다 소설 쪽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본다.
꽁초
김귀선
조용한 오후, 산골 마을이 흔들렸다.
“굴러묵다 온 년이 어디 아가리 벌리노.”
도리깨를 든 영감의 술주정에 주실댁도 간짓대로 대들었다.
“와, 와? 니가 머가 잘났노? 내 자식 내삘뿌고 니 자식 맥여주고 입히주고 했으믄 됐지. 뭐를 더 우예라 말이고?”
질세라 서로 쑤시고 때리고 휘젖(젓)는다. 잿간 옆의 염소가 매애매애 울어댄다. 뒤엉킨 소리가 골짜기로 깊숙이 스며들자 구경군(꾼)이 모여든다. 한 무더기 코흘리개들과 소쿠리를 든 아지매, 뒷짐을 진 할배, 지게를 진 장정도 삽짝 앞에 서성인다.
술주정에 지친 영감이 잠이 든 후였다. 주실댁의 치받는 울음소리가 정지(부엌)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날 아침나절이었다. 기명물을 마당에 훅 뿌린 주실댁은 외닫이 장지문(정지문)을 닫았다. 건넌방 댓돌 위를 살폈지만, 영감 백고무신이 보이지 않았다.
“지랄도 대에도 한다. 그새 주막으로 갔는가베. 농사도 읎는 집에 아끼도 시원찮을 낀데.”
말을 우물우물 씹으며 주실댁은 툇마루에 얹힌 재떨이 속에서 꽁초를 집었다.
“쯧쯧 와 이리 마이 남은 걸 내삐리 뿟노.”
주실댁은 손바닥에 꽁초를 올린 뒤 조심스레 깠다. 한 손으로 치마를 획 걷어 올려서는 속바지에 달린 담배 주머니를 풀었다. 후줄근한 풍년초 봉지 속에 방금 깐 꽁초 부스러기를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궁둥이를 치켜들고 문지방 안을 더듬었다. 팔꿈치 길이만 한 담뱃대를 꺼냈다. 머릿수건을 풀어 툭툭 털더니 다시 썼다. 등에 담뱃대를 꽂은 채 삽짝을 나섰다.
골목은 경사 심한 내리막길이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앞으로 쏟아지는 몸을 바로 세우려 후줄근한 몸뻬바지가 제 먼저 비틀거렸다. 돌다리 같은 쇠똥을 피해 아랫집 길산댁 삽짝 앞에 섰다. 반쯤 열린 사립문을 오른손으로 잡고 집안을 들여다 봤다. 축담에 놓인 광주리에 나물이 널려 있었고, 몇 가닥의 김이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식구들이 벌써 밭에 간 모양이었다.
주실 댁은 길 옆 돌 위에 엉덩이를 얹었다. 산비둘기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부스럭거리며 차고 있던 주머니를 열어 풍년초 봉지를 꺼냈다. 꽁초를 까서 모은 것이었다. 대통 수북하게 담배를 얹었다. 그리고는 엄지가 휘어지도록 꾹꾹 눌렀다.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오른손으로 엉거주춤 성냥불을 그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물부리 빠는 소리가 뻑뻑 났다. 그것도 잠시 허연 담배 연기가 뭉실뭉실 입에서 풀어져 나왔다. 산비둘기 소리가 연기에 골고루 버무려졌다. 주실 댁은 허공을 바라봤다.
주실 댁이 스물 한 살 때였다. 돌아올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돈 벌러 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온갖 수소문에도 찾을 길 없었다. 사망했을 거라 생각한 부모는 서둘러 딸을 재혼시켰다. 세 살 난 딸 하나 데리고 였다. 그러나 재혼한 남편도 딸 하나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새댁은 살던 곳을 훌쩍 떠나 아무도 모르는 산골로 왔다. 될 수 있는 한 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다. 애비 다른 딸 둘을 데리고 였다.
산골 동네에서 세 번째 남편을 만났다. 늦둥이 아들도 하나 두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데다 건강이 좋지 않던 세 번째 남편도 몇 년 후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늦둥이 아들을 데리고 다시 살러 간 것이 네 번째 남편인 지금의 영감이다. 입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처지라 보따리 장수를 믿고 두 딸을 남의 집살이로 보냈다. 하지만, 십여 년 넘도록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도 성내에서 오는 사람을 붙잡고 주실댁은 딸 소식을 물었지만 소용 없었다.
‘우리 연숙이와 윤숙이는 어데서 살고 있을꼬. 있는 곳을 누가 갈키준다꼬 캐도 글자도 모리는 내가 어째 찾아가겠노.’
멍하니 돌 위에 앉았던 주실 댁은 불기 없는 대통을 돌에다 툭툭 쳤다. 담뱃대를 다시 등 뒤에 꽂고 골목을 돌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었다.그 길 끝에는 속내가 통하는 안골댁의 집이 있었다.
주실 댁은 며칠 전부터 두 딸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딸에 대한 그리움은 주기적인 화병으로 닥쳐왔다. 어디를 가야 딸을 만날 수 있는지. 죽었을지도 모를 자식을 생각하자니 가슴만 답답해 줄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안골댁에서 소댕 여닫는 소리가 난다. 주실 댁의 걸음이 빨라진다.
연배인 안골댁과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이다. 주실댁은 천장이 흐릿하도록 안골 댁과 맞담배를 피웠다.
“우리 윤숙이너 에리가 나갔는데 여어를 찾아오겠능교? 자식을 내삐리뿌스이 내가 죄가 만치럴. 묵을 꺼만(것만) 있었어도 내가 살러 안 갔을 낀데……”
“지가 엄마 찾으락꼬 마음만 묵으머 어지간하믄 찾아올끼니더. 함 보이소. 주실때기 인심이 다 복을 줄끼시더.”
연달아 한 대를 더 피우려 주실댁은 풍년초 봉지를 열었다. 화를 다스리늗데는 뭐니 뭐니 해도 담배가 최고였다.
편한 시간도 잠깐, 그날도 영감은 술주정으로 주실댁의 하루를 뭉개버린 것이다. 한바탕 울음을 쏟은 주실댁은 정지 바닥에 퍼질러 앉아 밤이 깊도록 담배를 피웠다.
이튿날이다. 앞밭에 갔다 오던 주실댁이 삽짝에 꽂힌 편지를 보았다. 편지를 쥐고는 서둘러 길산댁으로 갔다. 점심시간을 놓치면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봉투를 본 길산댁이 환하게 웃었다.
“하이구, 아들내미한테 온 편지임더. 뭐라고 썼는지 l가(지가) 읽어볼테니 들어 보이고.”
주실댁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린 나이에 돈 벌러 간 아들의 편지다. 읽어주는 편지글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못 알아들을 땐 다시 읽어봐 달라고 했다. 주실댁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소매 속의 멍이 시퍼렇게 보였다.
40여 년 만에 두 딸이 엄마를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객지로 나간 늦둥이 아들도 사업가로 성공했다.
차례로 찾아오는 자식들로 주실댁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인기있는 노인이다. 풍년초가 사라졌지만 주실댁은 여전히 대통을 고집하나(고집한다). 입을 오므리며 담뱃대를 빨 때마다 대통속의 꽁초가 노을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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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초’는 수필로서는 조금 긴 작품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법이나, 사용하는 언어들, 그리고 묘사하는 문장들이 수필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특성을 많이 갖추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라고 보았다. 수필집에 별다른 설명이 없이 실렸으니 작가는 수필작품으로 생각하였을 듯하다고 짐작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 형식의 수필이라고 말해보겠다. 소설이나 수필의 기본 문장은 산문체이다. 산문체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수필이나 소설에서 결어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전개와 진행이 논리적이어야 독자가 수긍한다. 솔직히 말해서 ‘꽁초’의 결말은 비논리적이다. 소설로서도 부적격하다 싶지만, 여기서는 그런 걸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소설 형식으로 쓴 그의 작품 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전형적이다 싶어서 여기에 예문으로 가져왔다. 수필집 ‘푸른 여행’에는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실려있다.
이 작품이 순전히 소설 형식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소설이기에는 사건이 시간따라 진행하기 보다는 주인공 주실댁의 의식과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역동적인 행동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적인 언어와 주실댁의 기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어의 도출도 논리성이 없기 때문에 좋은 소설로 보기는 어려우리라는 것도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김귀선의 수필은 우리가 흔히 읽는 수필보다는 구조나, 언어 구사 등에서 재미를 얹어준다. 수필이론에서 강조하는 점잖한 언어들이야말로 일상에서는 오히려 낯설다. 평소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우리는 수필글에서 비속어라면서 금기시 해왔다.(지난번에 양숙이 수필 읽기를 할 때도 수필에 사용한 언어가 일상 용어라서 호감이 간다고 말했다.) 생소하면 기피한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약간은 예의를 무시한 언어들이 더 친숙하다. 내가 강조하는 재미란 것이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친숙한 언어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할 때 더 많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 작품이 그걸 보여주었다.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