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또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리고 행여나 잊어버릴라 종이와 펜을 찾아 적었다. 1, 3, 4, 7, 37, 47. 심장이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꿈은 너무도 단순한 것이었다. 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로또 당첨 번호를 맞췄다. 마지막 숫자와 함께 나와 우리 신랑, 그리고 우리 집에 잠깐 놀러온 내 동생 이렇게 셋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숫자가 생생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지난 달 이월됐다는 당첨금은 98억 원. 그래서인지 이번 달은 더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매달렸고 그래서 총 금액이 250억 원 가량. 한순간에 내 인생에 ‘대박’이란 글자가 붙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상한 1등 당첨금은 30억 원. 이 돈을 가지고 뭘 하면 될까 로또를 구입하기도 전부터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세금 떼이고 나면 20억 정도 남지 않을까. 20억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금액도 아니다. 서울 아파트 값은 로또 당첨금을 비웃을 정도니까. 전세를 알아볼 당시 정말 마음에 들었던 아파트의 매매가는 약 8억 원이었다. 세금이랑 약간의 인테리어 -그래도 지은 지 1년 밖에 안 된 아파트라서 고칠 곳도 없고 깨끗하다- 바꾸고 싶은 가구와 가전제품들 까지 다 합친다고 해도 10억이 되겠는가. 여태껏 아버지께 빌려 타고 있던 자동차도 좋은 차로 바꿔서 돌려드리고 우리 집 차도 한 대 뽑고 싶다. 이렇게 되면 친정에만 드릴 순 없을 것. 신랑과 상의해서 친정과 시댁에 평등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지. 나이가 꽉 찬 동생의 결혼 자금으로 5천만 원 정도는 몰래 챙겨두고 싶다. 그 정도는 신랑도 이해해 줄 것이다. 처제 사랑이 지극하시니 말이다.
기왕이면 2억 정도는 무기명으로 기부도 하고 싶다. 이 부분은 확실히 신랑이 반대를 할 듯하니까 당첨이 되면 그 자리에서 기부를 하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러다보면 5억이나 남을까 싶다. 그럼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드리고 싶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아파트 한 채. 그 뿐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자랐다. 학창 시절 매년 설문 조사랍시고 집안 형편을 적어오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런 건 알아서 무엇 하려고’ 싶은 통지서에 무슨 뜻인지도 모른 ‘자가’라고 적었던 것이 아무래도 큰 영향인 듯싶다.
결혼해서 지금까지도 적응을 할 수 없는 것이 ‘전세’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말들 하는데 난 도무지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집주인이라는 이름의 전화번호가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야 하는 사실이 이렇게도 힘든 일인지.
그래서일까. 난 ‘자가’를 갖고 싶은 것이다. 주택은 자가.
여느 때처럼 토요일 오후는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 외식을 나갔다. 요즘은 신랑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시어머님이 가건물로 이사를 가셨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은 신용불량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우리 가족의 이름으로 돌려놓으셨다. 현금 1억 2천만 원과 거래가가 1억 가까이 하는 오피스텔이 한 채 있었다. 게다가 친한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아직 회수되지 않은 5천만 원도 곧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그 돈을 누구에게 뺏길까 두려워 없는 척 사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스스로 주거용으로 만든 건물도 아닌 이상한 건물로 들어가셨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신랑의 태도였다. 돈이 있음에도 없는 척 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길에 신랑은 눈물을 뿌렸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살게 될 줄 몰랐어. 그런데 난 전세가 2억이나 하는 집에 살고 있는 거잖아. 부모가 이렇게 힘든데 난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거야?”
라며.
대출금 때문에 이번 달 생활비가 고작 20만원뿐이다. 고액연봉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은행원인 신랑의 월급도 대출금의 이자를 갚기는 여전히 빠듯했다. 은행원은 무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들 알고 있는데 허무한 루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아이 문화센터비도 내지 못하고 있고 부부동반 주말여행은 두 군데나 잡혀있다. 그리고 신랑 말대로라면 앞으로는 불쌍하신 시어머님께 매주 평일 하루 정도, 그리고 주말 저녁 식사를 사드려야 한다.
그리고
불쌍한 자기 어머니를 위해 아들들이 천만 원씩 내서 전세를 옮겨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막내인 우리 신랑이 나선 일이었다. 어머님의 재산은 우리만 알고 있기에 다들 수긍을 했지만 정작 알고 있는 신랑이 나섰다는 것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야, 난 이해가 되질 않아. 미안해. 그런데 정말 어머님의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넌 부모가 그런 집에 산다는데 이해가 안 돼?”
이야길 해서 무엇하랴. 입버릇처럼 말하시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난 내 입을 다물었다.
신랑이 좋아하는 샤브샤브를 먹었다. 아이는 이제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래서 신기한 것이 많아 늘 부산스러웠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여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고 언제부터인가 아이를 업고 먹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소화불량은 내게 후식 같은 것이었다.
“지난 달 로또 당첨자가 없어서 이월됐다. 이번에 금액이 크다더라. 우리도 한번 해볼까?”
우리 식구는 ‘한탕주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여태껏 딱 한 번 복권이란 것을 해봤다. 그리고 역시나 단 한 개의 숫자도 맞춰내질 못했다.
“그럼 해야지. 당첨금이 크다면 해볼 만한걸. 당첨되면 다 당신한테 줄게.”
왜 난 그 말을 듣고 신랑을 시험해보고 싶었을까. 신랑이 날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 순수하지 못했던 나의 호기심으로 인한 일이니 내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든든하게 배를 채운 신랑과 아이를 둘러업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어 구역질이 올라오는 나는 근처 대여점에 들려 비디오 하나를 빌렸다. [내셔널 트레져] 나온 지 꽤 된 영화인데다 케이블 방송에서 수차례 보여줬지만 우리는 한번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시리즈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며 신랑은 머리가 많이 벗겨지고 주름도 자글자글해져버린 모습을 감추려는 듯 어두운 배경에서 옆모습을 보여주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집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서 복권을 두 장 샀다. 꿈속에서 봤던 숫자를 적고 나머지는 대충 숫자를 넣어 만들어 같은 복권을 두 장 달라고 했다. 신랑에겐 랜덤으로 나온 숫자 그대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 숫자가 실제로 로또에서 당첨이 된다면 신랑은 정말로 내게 그 돈을 다 줄 것인가. 왜 난 그것이 우리 사이의 애정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몇 분 안 되는 그 순간은 내게 신랑과 함께 한 8년보다도 길었다.
7이라는 빨간 공이 내려오자 신랑은 숫자 7이 들어간 것이 두 개나 된다며 흥얼거렸고
37이라는 파란 공이 화면에 비쳐졌을 땐 신랑은 오늘 왠지 느낌이 좋다며 어깨를 들썩였고
1이라는 노란 공이 나오자 신랑은 세 개나 맞았다며 500원 확보라고 자랑을 했고
3라는 빨간 공을 사회자가 집어 들자 신랑은 4개 맞으면 얼마냐고 물어봤고
4라는 노란 공을 보는 순간 신랑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47이라는 숫자를 확인한 신랑은 역시 1등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봐 라며 조용히 로또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꿈이 틀림없는 예지몽이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신랑은 컴퓨터 화면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아대고 있었다. 3등은 110만 원정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번 1등은 얼마래 라는 나의 질문에 몰라, 그런 거 알아봐야 배만 아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달 로또 1등 당첨자는 5명이 나왔습니다. 당첨금은 약 50억이며......”
신랑은 텔레비전을 껐다. 언제나처럼 주말의 늦은 저녁 식사였다. 국이 맛있게 잘 끓여졌다며 한 그릇 더 달라는 말도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액션연기는 좀 버거워 보이는 안쓰러운 니콜라스 케이지를 130분이나 보면서 후편도 봐야겠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로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른 때엔 쓸모없어진 로또 따윈 식탁 위나 거실 바닥에서 뒹굴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또는 빳빳하게 펼쳐진 상태로 편지봉투 안에 들어가 신랑의 호주머니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은행을 찾았다. 당첨된 로또를 들고. 국민은행 서울본점은 여의도에 있었다. 아이를 안고 여의도까지 나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장 멀리 나가본 곳이 고작 30분 거리의 잠실 롯데 백화점이었다. 여의도는 집에서 지하철로만 50분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자면 한 시간은 족히 더 걸렸다. 그나마 갈아타지 않고 게다가 자리도 잘 잡아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는 착하게도 내 품에서 잠이 들었고. 난 그 50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은행업무라면 잘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몇 십 년 동안 은행원 생활을 하셨고 나와 내 동생도 은행원이 되길 바라셨다. 아버지의 힘을 빌려 대학생 때는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급 8250원. 주말에만 일을 해도 한 달에 70가까이 들어오곤 했다. 밥값도 따로 지불되었다. 하지만 은행일은 죽어도 싫었다. 졸업 후 백수 생활을 일 년 넘게 하면서도 은행은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힘만 써주시면 바로 통과될 일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굶어 죽더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은행 일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내 남자친구였던 신랑에게 기대를 거셨다. 다행히도 신랑은 고액연봉이라는 매력적인 단어에 홀딱 넘어가 있던 상태였고 명문대학교에 높은 학점, 게다가 말끔한 외모에 화려한 말솜씨로 자신이 원하는 은행에 입사를 했다. 신랑이 사령장을 받고 나서 상견례를 했고, 수습기간이 끝나고 식을 올렸다.
신랑에게서 듣는 은행 업무는 굉장히 구체적이었고 그래서 난 동네 아줌마들의 은행 업무를 대신 봐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은행에 가기 전에 날 통해 이자를 알아본다든가 펀드를 알아본다든가 대출을 알아본다든가였다. 물론 은행마다 이자율도 판매하는 펀드 상품도 대출도 다 달랐지만 그래서 동네 아줌마들은 모두 우리 신랑의 은행을 거래하게 되었다.
은행원은 사소한 정보라도 마음대로 흘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날 국민은행의 어리숙한 직원은 내게 사소하지 않은 정보를 흘려버렸다. 물론 난 그것을 노리고 그 직원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은행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또 당첨자는 총 5명. 그 중 다음 날 바로 두 명이 당첨금을 찾아갔고 내가 세 번째라는 것이다. 한 명은 50대 정도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아들과 함께 찾아왔었다고 한다. 당첨금이 들어가있는 계좌를 받아들고 은행 안에서 펑펑 울었다며. 직원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해댔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좋은데 쓰이는 기분이었단다. 두 번째 찾아왔던 아저씨는 아마도 내일 신문이나 뉴스에 나올 법한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전액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것이다. 돈이란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떠나셨다고. 자동차 할부금도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자신으로서는 그 아저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에겐 어디다 쓰고 싶으냐는 질문도 했다.
“당첨금을 찾지 않을 계획입니다.”
그 은행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직 신랑은 당첨금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첨된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신랑은 국민은행이 업무하는 시간에 자신의 은행에서 일을 해야 하므로 못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직은 찾으러 올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상상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기왕이면 엔딩은 아름답게. 그 왜 해피엔딩이라는 좋은 단어 있잖아. 신랑은 그 많은 당첨금의 1원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내게 가져다주며 당신, 이제 고생 끝이야 라는 말과 함께 우리 이제 효도라는 것도 해봅시다 라며 내 손을 꼬옥 잡아주는. 드라마도 영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런 마지막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난 신랑이 로또를 잃어버리길 바랐다. 나한테 끝까지 말하지 못함과 동시에 꿈을 꾸듯 내 손안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그 큰 금액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비통함과 처절함에 휩싸여 좌절하길 바랐다. 그런 그를 내가 안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주머니 속에는 로또가 고이 보관된 봉투가 자리하고 있었고 신랑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날 아이가 밤새 토를 했다. 그 조그마한 속에 무엇이 그리 들어가 있다고 아홉 번의 구토를 하더니 노란 색의 위액까지 쏟아냈다. 새벽 2시 반에 근처 병원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구토 증상 외에 아무런 증세가 없어서 원인을 알기 힘들다며 입원을 하랬다. 열도 없고 설사도 없고 그저 토만 연신 해댔다. 의사는 장염인 것 같지만 뇌수막염일 수도 있다고 했다.
백과사전만한 아이 엄마들에겐 필독서인 [삐뽀삐뽀 119]를 펼쳐들고 뇌수막염인지 뭔지를 찾았다. 위험한 경우 장애아가 될 수도 있댄다. 다짐했다. 아이가 퇴원을 하는 그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다고. 그래서 내 손에 반도 되지 않는 아이의 손 등에 링겔 바늘을 찌르느라 몇 십 분을 그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울지 않았다.
만 하루를 지내고 원인은 단순한 장염으로 판정됐다. 그제서야 내 목으로 먹을 것이 넘어갈 수 있었다. 소아병동은 지낼만한 곳이 아니었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어서 서로 옮기고 옮아, 있는 병에 없는 병까지 걸릴 판이었다. 그래서 아직 구토 증세가 멎지 않았음에도 의사에게 바득바득 우겨 아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4일 간을 보내고서야.
그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낸 뒤에야 로또 생각이 났다. 났다기 보다 신랑이 회식 자리에서 음식을 흘리는 바람에 세탁소에 맡기라며 양복을 벗어 놓은 것이다. 양복 주머니에 미쳐 빼놓지 않은 물건이 있나 찾다가 생각이 난 것이다. 양복 안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봉투는 있었다. 로또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급해졌다. 그 돈을 어느 은행에 넣어놨는지 어디에 쓸 계획인지 알아봐야 했다. 우선 당첨금은 국민은행 통장으로 넣어주지만 그 후는 자기 마음대로이다. 신랑이 은행원이기에 이미 모든 돈이 내가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감춰져있을 것이다. 다시 그 어리숙한 은행원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러기 이전에 신랑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신 로또 어쨌어?”
이렇게 말이다.
신랑은 너무도 서스럼없이 대답했다. 3등 당첨금이 110만 원 정도였고 100만 원은 대출금을 상환하고 나머지 10만 원은 아이의 입원비에 냈다고 했다. 마치 예상 질문지를 만들고 예상 답변을 작성해 외워놓은 것 마냥 술술 말이다.
그래서 난 신랑의 계좌를 추적해야만 했다.
신랑의 계좌 추적은 일반인들에겐 불가능이다. 아무리 부부관계더라도 타인의 계좌는 열람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가능했다. 은행원과 친분이 있으면 된다. 주민번호로 얼마든지 잔액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은 불법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안되는게 어딧니!
각 은행마다 아는 사람들을 총 동원해서 간단한 잔액 조회를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거다. 갑작스럽게 신랑의 계좌에 20억 가량의 돈이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알게 된다면 어떤 돈이냐 묻지 않을까. 내 살림이야 뻔히들 아는데 말이야. 그래서 소심하게 동생이 일하는 우리 은행과 아빠를 통한 국민 은행의 계좌만 조회를 부탁했다. 그리고 설마 가족이 일하는 은행에 넣어놨겠어 싶은 생각이 또 문득 떠올랐다.
그때부터 난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한 듯싶다.
신랑과는 친구로 12년, 연인으로 6년, 부부로 2년을 보냈다. 내 인생에 남자라는 것은 신랑뿐이었고 신랑에게도 여자라는 것은 나뿐이었다. 같이 보낸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친구라기보다 연인이라기보다 부부라기보다 그냥 하나같았다. 일심동체 말이다.
신랑은 언제나 내 손바닥 위였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꼭 만화책 말풍선 같았다. 표정 하나만으로도 난 물을 갖다 주거나 게임기를 꺼내주거나 라면을 끓였다. 신랑은 내가 자신의 허락 없이 머릿속을 왔다갔다한다며 기분 좋게 꾸짖곤 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내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아주 작은 거짓말까지도 들통이 나곤 했으니까.
하지만 20억은 신랑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던 거다. 큰 숫자는 작은 숫자를 이긴다. 신랑과의 20년은 인생 역전의 20억을 이길 수가 없다. 지는 게 당연한 게임을 한 셈이다. 나의 완패였다.
원래 싸우고 난 후 뒷정리는 진 놈이 한다고 난 20년의 세월을 정리하느라 기진맥진했다. 내 인생의 3분의 2를 정리할라치니 도무지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되는데로 갖다 버리기나 했다. 이를테면 신랑의 군복무 기간에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 따위를 말이다. 연애하면서 놀러 다닌 사진들이나 생일 때마다 사준 목걸이들을 버리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꼭 연애하다 심한 말다툼으로 괜한 승질을 부리는 듯 한 내 모습이 귀여워보였다. 다 필요 없어, 헤어져! 라고 앙탈을 부려보는 모습이랄까.
아쉽게도 연애 6년 내내 내 입에선 그런 소리 한번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없는 인생 자체를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서운하고 화가 나고 아쉬워도 헤어지잔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 혼자 이 사람과의 세월을 정리할라하니 괜히 우스워진거다.
그래, 내가 졌다. 피식.
그래서 난 그 20억을 잊기로 했다. 신랑이 그 돈을 어디에 숨겨뒀던, 누굴 줬던, 어디에 썼던 잊기로 했다. 그 20억은 큰 숫자였지만 내 20년에 비할바가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은 ‘년’을 이기지 못한다. 이건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정말로.
연애하던 당시 내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뻔 한 적이 있었다. 신랑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학교 동기와 술을 마신 사건이었다. 그 동기는 여자였고 마신 시간은 자정을 넘겨 새벽을 향했고 장소는 그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나에게 거짓말 한 것도,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것도, 늦은 시간이었다는 것도 괜찮았다. 빈 방에 남녀 둘이 술을 마셨다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신랑은 그 부분에서 화가 났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려는 모습에 더욱 화가 났던 듯 싶다. 자기의 뒷조사를 했냐며 되려 내게 화를 내질 않나, 내가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할까 라며 자존심을 버리겠다는 시늉을 하질 않나, 같이 술을 마신 친구에게 내 여자친구가 너 때문에 화났다는 고자질을 하기도 했다.
너무 화가 나서 용서할 수 없다며 헤어지자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데 -꼬박 4일을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던 그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갑자기 내 마음이 평온해져버렸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도 용서를 했다는데 고작 이 따위로 무슨 이란 생각이 들어버린거다. 그래서 헤어지자 말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점심이나 먹자 라는 말을 해버렸다.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이랑 못 살아 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꼬박 2주일을 벼라별 상상을 하며 괴로워하느라 생겨버린 다크서클이 무색하리만치- 고작 20억 때문에 이럴거까지 있겠어 싶은거다.
그래서 신랑한테 어머님 전세를 알아봐드리자고 했다. 한 집 당 천만 원 가지고 서울 전세값 나오겠냐고 기왕이면 2천만 원씩 모으자고 했다. 신랑은 그냥 속상해서 해본 말이었는데 내가 이해해주니 고맙다며 신경 쓰지 말란다. 당첨금을 갖다 드렸냐 하는 말이 나올 뻔했다. 역시 쉽게 잊혀질 숫자는 아니었나보다. 후유증이란 것은 있는 법이니까. 괜찮아.
그러고보니 내게도 1등 짜리 로또가 있었다. 그 사실이 이제야 생각이 난거다. 이렇게 된 거 나도 우리 부모님께 효도나 하자 싶어서 다시 국민은행을 찾았다. 어리숙한 직원은 날 알아보았다. 역시 당첨금은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으셨죠 라는 약간의 조소를 날리면서 아는 체를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돈을 받아갔다고 했다. 한 명은 신부님이었다고 그래서 그 돈을 천주교회에 다 보냈다고 한다. 자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신부복을 벗고 말지 라는 농을 해댔다. 겨우 20억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엎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나의 말에 장난하시는 건가요 싶은 표정을 보였다. 부디 20억 앞에 ‘겨우’라는 말은 붙이지 말아달란다.
“이거 죄송한데요. 뭐 솔직히 고객님 같은 분이 간혹 한두 분씩 계시지요.”
알고 보니 -그야말로 행복하게도 난 1등이 아니었다. 내 꿈속의 숫자는 정확했지만 늘 시험답안지를 밀렸던 실력을 발휘해 로또 번호도 엉망이었다. 3등이시니까 110만 원 가져가시면 되네요. 아, 그렇군요. 110만 원. 백만 원은 대출금 상환해야겠네요. 십만 원은 내일 말복이니까 가족이랑 장어라도 먹으러 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대박’이라는 단어를 손 끝에서 놓치고 ‘행복’이란 단어를 움켜잡게 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바로 여기 있수다!
내 인생이 이렇다. 그래서 난 되려 행복하다.
첫댓글 아아, 안 행복해요.
아.. 그런가요? ^^;;;;;
대박을 날리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러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아깝기도 하고, 남편을 대신 패주고 싶고,, 그런 느낌에,,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걸까요 ㅠㅠ
그래도 재밌게 잘 봤어요. 나였다면, 하면서 생각도 해보게 됫구요~^^
^^;; 솔직히 저도 저 상황이면 행복할까 안할까 헷갈릴거 같아요 ㅋㅋ;; 암튼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