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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즐거운 자유게시판 스크랩 `생거진천 사거용인` 전설
한리 추천 0 조회 454 11.07.02 14:12 댓글 19
게시글 본문내용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去龍仁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힌다.' 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이 어원에 대해서 여기 저기 좀 찾아 보았는데 분명치가 않네요.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었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順厚)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라네요.

 

어쨌거나 죽어서 간다는 용인은 우리나라에서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용인시의 입장에서 보면 죽어서 간다는 용인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겠지요. 그래서 요즈음은 진천군에서만

'생거진천'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로 군의 브랜드로 쓰고 있네요.

 

생거진천과 관련이 있는 세가지 기록을 올려 봅니다.

 

1. 먼저 '생거진천 사거용인' 전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그 통곡 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에 있던 자기의 아내였고, 곧이어 자식들도 따라 우는 것이다.

“왠 갑작스런 울음이오?”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목 놓아 울기만 했다.

"우리를 두고 먼저 저 세상에 가시다니..., 흑흑!"

 

그는 싸늘하게 누워 있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제야 지금 자신은

혼(魂)이 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멈칫거렸다.

 

곧이어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으로 인도되어 간 그는 염라대왕 앞에 엎드렸다.

“어디서 왔느냐?”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라 하는 자입니다."

"뭐라?"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동명이인인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다.

 

일이 꼬이려 했든지 두 사람은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이승의 자기 집으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몸뚱아리를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연이어 불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실의에 빠진 채 멍하니 있다가 문득 묘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용인으로 냅다 뛰었다.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엔 다행히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얼른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슬프게 통곡을 하던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기뻐 날뛰었다.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린 그는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여인과 아들딸은 죽음에서 깨어난 헛소리로만 여겼다.

어떠한 말도 먹혀들지 않자, 그는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내고

다음날로 즉시 진천을 향해 내달렸다.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고는 붙잡고자 뒤따라 뛰었다.

 

진천 고향집에 도착한 그는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외쳐댔다.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녀는 돌아온 남편이라 외치는 남자의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모멸감이 들었고 이내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뒤따라 온 용인 땅 추천석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미쳤다며 계속 용서를 구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고선 결국 관가로 끌려갔다.

 

고을 원님은 그의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去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2. 다음은 2000년대 필명 진천 동네 어르신들이 전한 생거진천 설,

 

진천은 예전부터 평야가 넓고 산물이 풍성하며 한해화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이 잘 되었는데 그 이유는,

 

폭풍을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도 이 곳 진천을 지나칠 때면, 숨을 훅 들이쉬고,

가만 가만 비껴나 산 하나 꿀떡 넘어 음성이나 제천 부근에 가서야

물고있던 빗방울을 냅따 쏟아 부었답니다.

그래서, 생거진천이란 말이 절대 거저 나온 것이 아니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이었습니다.

 

3. 서울대학교 박갑수 명예교수는,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란 이 말이 오늘날에는 풍수적인 의미로 와전되어 쓰이고 있다.

살기에는 충청도 진천 땅이 제일이고, 죽어서 묻히기는 경기도 용인이 제일 좋은 땅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본래의 의미는 위와 같은 옛날 얘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풍수적으로

인용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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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7.02 14:18

    첫댓글 충청북도 진천군 홈페이지(http://www.jincheon.go.kr)에 가보니, '생거진천'을 진천군의 로고로 사용하고 있네요. 일부 풍수설에서 그렇게 쓴다고도 하는데, 그 유래를 찾아보니, 다음 친구가 이렇게 답을 줬는데, 함 읽어보세요. 좀더 상세한 것은 진천을 더 공부한 뒤에 ^^

  • 작성자 11.07.02 14:28

    *진천 농다리: 고려초기에 놓여져 1천년의 신비를 지닌 국내 유일의 돌다리
    - 총길이 94m 폭 3.6m 교각의 두께가 1.2m이며 교각과 교각의 사이는 0.8m
    -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생거진천'의 문화유산
    - 자주빛 자연석을 그대로 쌓았음에도 견고하여 장마가 져도 다리위로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1000년의 세월에도 유실되지 않는 등 축조기술이 매우 뛰어남

  • 작성자 11.07.02 14:32

    아래 대장의 공지는 그림을 올린 탓인지, 폭이 제한된 상태여서, 내용 중의 일부는 보이지 않구요. 폭이 제한되다 보니, <등록> 창도 보이지 않아, 댓글을 달 수 없게 돼 있네요. 답글만 가능...ㅜ

  • 11.07.02 17:47

    조선왕릉을 공부하고 나서 회자되는 설 : 왕릉은 도성 밖 100리 안에 조성하도록 되어 있어 사대부 가문에서 도성에서 100리 안에 묏자리를 만들 경우 왕릉 후보지로 결정되면 이장을 해야 하므로 이를 피해 도성에서 100리의 한계인 수원의 바로 옆 용인에 사대부 집안들이 묏자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 작성자 11.07.04 18:33

    대장께서 붙이셨군요. 100리 안에 명당은 왕가 묏자리로 빼앗길 수 있으니...일리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렇다면, 용인을 대거 묏자리로 택했다는 것은..당시 서울에서 아주 먼...용인에도 명당이 많고, 그나마 서울에서 지근거리라는 점에서, 조상 및 가계 보전용 판단이 크게 작용한 탓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지금은 용인 명당이 주택가로 대거 변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조상묘 팔고 떠난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가 되네요... 허허...

  • 11.07.02 17:49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진천은 특별히 내세울 것이없는데 옛부터 살기좋고 풍수해도 적어 살아서는 진천에서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거진천이라는 말이 나오게되었다고.. 믿을 만한 것인지 확인은 안돼지만 왕릉공부를 한 나문답님들은 한번은 새겨 볼만하지 않을까 해서...

  • 11.07.03 21:51

    이거 옛날 전설에 고향에 가끔 등장했던 얘기인데....ㅎㅎ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1.07.05 12:10

    역시 열하일기님이 문헌을 찾았어요!! 구체를 알려는.. 사실을 알려는.. 학자적 소양 충만!! ㅎㅎ 방가^^

    - '생거진천, 사거용인'이 아니라 '생거진천, 사장용인'...죽은 사람이 가는 곳(去)이지만...거(居 살 거) 소(所)와 대비되기보다는,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니, 장(葬 장사 장)이 더 맞을 듯도 하네요. 발음의 편리성이나 일반에 유포되면서 쉬운 '거'가 더 쓰일 수는 있겠지만...조선 중기...?....임란 이후...한참 지난 영정조~순조에 이르는 때이니, 조선 후기가 더 적합할 듯...물론 이 분께서...중기 때 인용을 했다면 중기도 여지는 있겠지요.

    - 실학자 성해응 선생에 대해서는 좀더 풀어주면 좋겠어요!! ㅎ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1.07.05 11:29

    흐미...진천 군수님한테 전화가 오겠군요 ㅋㅋ...아마도, 진천군을 대표해서, 해설자님이 진천이 살기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듯합니다. 아님 군수님께서 답사에 직접 뜨시거나 ~ 진천을 확실하게 아는 계기가 될 듯^^

  • 11.07.04 22:20

    우리집이 용인인데.. 딴데는 오르는데 왜 우리집 땅값이 쌀까요...?? ㅎㅎㅎㅎ
    퀴즈....용인 지명의 유래 아는사람?? 팥빙수 갑니다...ㅋㅋㅋㅋ(컨닝하기 없기)

  • 11.07.06 10:41

    문헌상 '용인' 이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태종 14년(1414년) '태종실록'으로, 당시 조선은 고려시대 행정구역 명칭이던 용구현과 처인현을 병합한 뒤 용구의 '용'자와 처인의 '인'자를 합쳐 '용인'이라 이름 붙였다. 하는데 ^*^ 2014년이 용인이 생긴지 600년이 된데요. 사실 커닝한 건데 ㅎㅎ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 드려요.

  • 11.07.06 11:42

    빙고...답은 맞췃는데 커닝한건데 팥빙수를 어쩌나??? ㅎㅎㅎ
    용구는 지금의 용인시 지역이고 처인은 항몽 유적지인 처인성이 있는 지역 이랍니다... 제 고향이 처인성 근처...그런데 정작 처인성엔 올라가보지 못했다는거.....ㅋㅋㅋㅋ

  • 11.07.06 16:33

    ㅎㅎ 팥빙수 먹은걸로 할께요. 덕분에 또 한 가지 배웠는데 감사하죠... 기약없는 만남 이란 말이 생각나요... ^*^
    본래 가까울 수록 멀다는 것을 쉬~이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 같아요.

  • 11.07.06 10:27

    재미있는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 같아요. 덕분에 공부 잘 했어요. 근데 이번 답사는 신청하지 않고 좋은 지식만 전달하는 거 아닌지 ?? 얼굴 좀 보여 주구려... 한 동안 보지 않으니 눈에서 멀어질 것 같아용...

  • 작성자 11.07.07 16:13

    샬리에님의 '타박'에 저도 진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ㅠㅠ 한동안 공부하느라 개인시간을 냈으니, 본업에 더욱 시간이 잡힐 수밖에 없네요. 공짜는 없다! 거기에, 요즘 인력충원하고 있는데, 마땅치 않아 고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ㅜㅜ 잘 다녀오시구요.^^ 걷기도 꾸준히 다니시니, 나중에 함 끼워주세요~ ㅎ

  • 11.07.07 13:32

    이중환은 <택리지>를 적을 때 대동여지도의 김정호처럼 전국을 발로 뛰면서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죠... 당파싸움과 집안의 번성과 몰락 등이 겹쳐서 특정 지역이 살기 좋다는 개인적인 표현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 현상이나 전체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도움을 주는 책도 별로 없지만 특정 지역에 대한 好不好는 객관적인 자료가 아니라 주관적인 감정도 있다는 사실을 참조하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 11.07.08 10:17

    풍수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는... 용인에서 아들 하나 놓고 살던 여인이 남편을 여의고 진천으로 재가하여 아들을 한 명 낳았습니다. 두 명의 자식이 지극한 효자이어서 살아 생전에는 진천의 아들이 어머니를 잘 봉양했고, 목숨을 다 하자 용인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살아서는 진천의 아들이 효자, 죽어서는 용인의 아들이 효자. 즉 풍수와는 아무른 관계가 없고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에서 기인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제가 잘알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풍수에게 들은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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