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이란 무엇인가(신성상 교수)
1) 소설의 성격
습작기에는 때로, 원고지가 백지의 공포로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자기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좌절감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보다, 자기의 진정한 감정과 사상을 호소하기에 앞서 '언제나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인가'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 조바심 치는 명예 욕보다는 마음을 텅 비우고 여유를 가질 때, 우리의 감정은 봄 날 언덕 위의 들꽃같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우리의 가슴에 만발하게 된다.
우선 소설의 성격부터 살펴보자. 소설은 그 성격에 따라 몇 가지 종 류로 나눌 수 있다. 크게는 형식적인 형태와 내용적인 요건에 따라 다 음과 같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가 있다.
첫째는 형식에 따라 분류할 수가 있다 그 소설의양量 즉 전체 길이에 따라대하-장편-중편-단편-꽁트로 편 의상 구분한다. 장편보다 더 긴 것은 대하大河 소설이라 하고, 단편보다 더 짧은 것은 꽁트Conte掌編라고 한다. 장편은 일반적으로 단행본 한 권 의 분량으로 대개 1천 매 이상(2백지 원고지 기준)이다. 보통 장편소설 한 권이 3백 쪽 안팎으로 발간되고 있는데 약 1천5백 매 정도가 대부분 이다. 단편은 1백 매 안팎이 된다.
중편은 단편보다 길고 장편보다 짧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백 매 이상 1천 매 이하에 해당되는 길이는 전부 중편이 될 수가 있다. 그 러나 현재 신문, 잡지 등에서 구 분되고 있는 중편은 대개 3백 매 안팎이 다. 일간지 신춘문예나, 월간지 문학잡지 등 언론매체에서 모집하는 중 편 분량도 3백 매 안팎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단 편과 장편 사이에 드는 것은 전부 중편으로 보아야 한다.
실례로, 김성동의 <만다라>가 <한국문학> 잡지에 당선되었을 때는 약 6백 매 정도의 중편이었다. 나중에 작가가 장편으로 늘려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약 6백매 정도의 중편인데 한국 에서 번역-출간하면서 장편으로 둔갑한 것이지만 실제의 분량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역시 중편이라고 할 수 있다.
꽁트는 대개 30매 안팎으로 본다. 현재, 각종 회사 사보社報에 양념 으로 보이는 꽁트들이 그것이다. 대하는 보통 단행본 3권 이상을 기준 한다. 글자 그대로 큰 강물이 흘러가듯 소설의 무대가 광활하다. 말하자 면, <삼국지>같은 것이 대하소설이 된다. <삼국지>는 박종화 정비석 등 이 초기에 번역되어 나올 때는 3권 정도의 대하소설 분량이었지만, 지 금은 한 권으로 축소 요약한 단행본도 있고, 이문열 김홍신 등과 같이 평역하여 10권으로 나온 것도 있다. 일본의 <대망>도 10권으로 되어 있 으며, 박경리의 <토지>, 안수길의 <북간도>,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 맥> 등도 대하소설이 된다.
우리 나라 옛 소설에 '가문소설家門小說'이란 것이 있는데 <이씨세대 록李氏世代錄> <김이양문록金李兩門錄>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등 은 총 30권내지 50권 이 되는 방대한 대하소설이었다. 유럽에도 이러한 유형의 '가족사소설'로서 독일 토마스 만의 <붓덴부르크 일가>는 5대에 걸친 가족얘기를 전 20권에 걸쳐 썼으며, 프랑스 마르땡 뒤가르의 <티 보일가>는 십 년에 걸쳐 전 50권의 대작을 만든 것이다. <붓덴부르크 일 가>와 <티보일가>는 그 오랜 기간의 집념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 다. 유명한 에밀 졸라의 <루공 마까르>총서도 전 20권의 과학적 자연주 의 소설의 전형을 보여 준 것이다. 한국에 소개된 <나나>는 그 총서의 한 권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는 내용에 따라 분류할 수가 있다. 주제와 성격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면 전쟁 소설, 사랑을 소재로 한 것이면 연애소설이라고 편의상 분류한다. 이런 유형을 나열해 보면 탐정(추리)소설, 해양소설, 종교소설 등이 있다. 황 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신상성의 <아 버지의 뜰> 등이 전쟁소설이고, 박계주의 <순애보>, 괴테의 <가난한 애 인들> 등이 연애소설, 김성종의 <제5열>, 루팡 전집 등은 탐정소설, 천 금성의 <가고 또 가고>, 멜빌의 <흰고래> 등은 해양소설, 생 텍쥐베리의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등은 항공소설이 되겠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은 종교소설이 되겠다.
또한, 작품이 발간된 연대에 따라 고전소설, 현대소설로 대별되며 그 문예 미학적 특성에 따라 민중문학-대중문학-순수문학 등으로 구분되기 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분류와 방법은 일반적인 구분일 뿐이며 어쩌 면 기계적인 도식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랑 이나 종교문제를 제시할 수도 있으며, 스포츠를 소재로 하면서도 탐정 이나 환경문제를 제시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도 얼마든지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의미와 그 사회적 가치문제를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상 또는 내용상 분류라는 것은 편의상의 장르적 구분일 뿐 이다.
2) 소설의 역사 철학적 문제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을 '비극'悲劇으로 규정하고, 그 시대와 민족의 특수한 역사성과 사회성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문학이 헌신해야 한다는 '미학적 본질성'에 근거를 둔다면 최초의 '종별'genre의 가설은 용이해질 것이다.
소설의 기원을 서양에선 몰톤R.G.Moulton이 고대의 서사문학에서 기 준했다. 그것은 소설의 속성이 이야기 또는 해설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서사시는 고대의 운문설화와 근대소설의 성격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과 모험의 문학과 <아더왕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근거하 여 전기소설傳奇小設적인 것을 로맨스Romance라 했다. 소설적인 형태 를 가지고 처음 등장한 것은 복카치오G.Boccaccio(1313~1375)의 <데카메 론>이다. 또는 근대 시민소설이라는 리차드슨S.Richardson(1689~1761)의 <파밀라>를 일부에서는 기원으로 잡기도 한다.
동양에선 중국 한서漢書에도 있고, <석문지昔文志> 권 17에 "소설가 자류개출어패관가담항어 도청도설자지소조야 小說家者類蓋出於稗官街談巷語 道聽塗設者之所造也"라 하여 소설은 시정의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개한정직開限正直이 그의 <소설사고小設事故)에서 "일본소설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몽야夢野의 <사슴 이야기> 이며, 그 다음이 도자島子의 담화談話 등인 듯하다"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帝王韻記>에 기록된 단군신화, 동명왕 전설 등의 서사문학이 있었으며, 세종때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데카메론과 유사한 구조라는데 흥미가 있다. 이 는 독일의 'Novelle'와 같 은 전기성이 있다. 노벨레가 '새로운'의 뜻, 'Novus'에서 온 것이라면, '새로운 사건'(색다른 일)의 <금오신화>의 '新'자와도 일치되어진다. 그 렇다면 광해군 때의 사회소설인 허균許均의 <홍길동전>이 서민의식의 주제성이나 시기가 비슷한 리차드슨의 <파밀라>와 흡사하다는 점을 고 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금오신화>가 아니라, 신라시대 의 <금오랑세오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의 속성은 '이야기'로서 흔히 말하는 신화 전설 민담 등이 다 소설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음은 위에 예거한 동서양의 개념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같은 동양 에서도 중국이나 일본 등에선 고대문학 장르 분류에서 5세기 전후에 이 러한 '이야기'류를 전부 '소설' 범주에 편입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전소설 편제는 10세기 전후의 <금오신화>를 최초의 소설로 기 준으로 한 것은 재검토 해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문학사에서 한漢의 문장, 당唐의 전기, 송宋의 담사, 원元의 희 곡, 명明의 소설로 시대적 문학양태를 대분해 본다면 명대의 <전등신화> 에 영향을 받은 <금오신화>가 이해될 것이고, 동-서양의 문학사상의 흐 름이나 의식이 한줄기로 흐르고 있으며, 어느 면에서 지나치게 닮았다 는 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동양 문학사상의 경우, 인도의 불교와 중 국의 도교-유교의 동백이 한국과 일본에선 유-불-선 조화사상으로 변화 발전되어 나타난 까닭이다. 그리하여 주제와 형식이 같은 맥락이 되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문예사조의 줄기는 신-구교의 크리스트를 정신적인 근 간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라틴, 중세와 르네쌍스, 고전, 낭만, 사실, 자연, 상징, 실존구조(주의)의 8단계를 거쳐 지금 구조주의에 이어 후기 모더니즘이 대두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문예사조적文藝思潮的 인 접근도 하나의 도식적인 사 료이며 현대에 와선 복합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위의 8가지 이상의 유형 가운데 어느 한 상자에 못질 해 넣기는 너무 복합적이고 심층적이기 때문이다. 현대라는 사회구조 자체가 중층적이고, 현대인의 인식과 의식은 대단히 역설적이기 때문이 다. 문학형태는 동시대적 상황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표상과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그것은 문예 사회학적으로 가변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에 있어서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장 의미있게 포괄할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것은 현재에 보편화되어 있는 단 편-중편-장편의 일반적 구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또한 모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질에 관 계없이 전혀 양에 의한 단편-중편-장편의 구분이란 얼마나 우스운 것인 가? 말하자면, 형태에 알맞은 절절한 내용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신문학기에 이광수에게서 장편을, 염상섭에게서 중편을, 김동인에게서 단편의 미학을 토착화시킨 한국적 문학지평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1930 년대는 가장 모멸된 식민지의 절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한국의 저 항문학이 만발하던 르네상스이기도 했다.
염상섭에 이어 박태원, 이태준이 중편문학에 대한 기초의 이론적 제 기를 하여 이 땅에 활발한 중편시대가 전개되기도 했다. 물밀 듯이 밀 려들어오는 서구문학의 양태에서 문예 사회학적인 논의는 전혀 없이, 최재서에 의해서 중편소설의 양量에 대한 수치와 질質에 대한 현실성과 현대성이 지적되었을 뿐이다. 그 이후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한 상 태에서 80년대에 들어와 중편문학이 필요적 번성기를 맞게 되었다. 장- 단편만이 대종을 이루던 한국문단이 내용과 형식면에서 적절한 목소리 를 찾던 것이 우습게도 반 세기 전의 중편문학 형태였던 것이다.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당시 현실과 맞물려 요구되는 양식이었던 것이 다. 숨막히던 80년대의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작가들이 단편으로 말하기 엔 그릇이 너무 작았고, 장편으로 소화하기에는 언론 통폐합으로 인한 발표 지면이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80년대 문학 이 70년대 관능적 상업주의 문학이 모순된 상품의 끄트머리에 연속해서 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른바 호스테스 소설이 저 너리즘을 타고 독자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끌어내는 군사문화의 우민정 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제 90년대는 밀레니엄 시대로서 영상 문학, 컴퓨터 문학이 새로운 매체로 부상되고 있다. '읽기보다는 보는' 문학형태로 급변하고 있는 것 이다. 여기에다 소재적인 면에서도 공상과학소설, 환타지 소설, 추리소 설 등 이른 바, 대중문학이 폭주를 하고 있다. 대중문학도 엄연히 문학 의 한 범주이기는 하나 정통문학이 아닌 주변문학일 뿐이다. 문학의 중 심에 서는 정통문학은 세계명작이 될 수 있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