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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23-현충원
7월28일 유종완 어머님 유해를 현충원 납골당에 모시고 존경하는 고 박정희 묘소를 찾았습니다.
방문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6개월간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식을 바꿔내어 국가발전에 자발적
으로 동참하게 했으며 수출입국의 기치 하에 수철성과 경쟁을 유도해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기적적인 수출증대를 이뤄냈습니다. 또 중화학공업화정책을 통한 산업화의 성공은 농경
사회였던 대한민국을 오늘날 선진산업대국으로 도약시켰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오늘날
모든 나라가 갈구하는 포용적 동반성장을 훌륭하게 실현했으며 세계는 그것을 경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한강의 기적’을 칭송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은 통일의 길은 조국 근대화와 경제적 자립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도로 건설, 수출 증대, 국민의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새마을 운동 등의
업적을 이루었고 이것이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박정희의 업적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새마을 운동입니다. 근면,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이었는데 전국 동마다 시멘트를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자율적으로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하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정부는 숙원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낸 마을에 대해 시멘트와 철근 무상공급을 늘리는 식으로 자발적인 새마을
운동을 장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마을을 가꾸는 차원을 벗어나 한국사회의 근대화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근면,자조,자립 정신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이 이루어졌다
고 보여집니다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을 할 수 있는 기본자금이 필요한데 당시 한국에서는 국제
금융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차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공공 차관뿐만 아니라 민간 차관까지 모든 해외 차관을 정부가 지급 보증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자본가의 안정적인 육성을 위해서는 무한경쟁체제보다는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것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 고등학교나와서 은행에서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일한 우리 이태원.
한푼이라도 외국에서 돈벌겠다고 브라질로 이민간 이병철이가 옛날을 회상하며 묘소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당시 무역회사들은 달라 한푼이라도 벌겠다고 수출역군으로 일했던
그기억이 생각이 납니다.ㅎㅎㅎ
비가 오는데도 박대통령 묘소에서 참배하는 친구들.
이름도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애국자들입니다. 이 묘소를 보니 괜히 숙연해 집니다.
이나라가 이런 애국자들이 있기에 번영된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현 정세를 보니 괜히
화가 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 30가지
1. 대한민국 최초의 주민등록증 제도 실시
1968년11월21일에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했습니다.1968년1월21일에
있었던 1.21사태 즉 김신조를 필두로 북한 남파공작원들이 청와대까지 습격해 들어오자
그 뒤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2.친노동계급적인 서민을 위한 최초의 의료보험제도 실시
1976년 의료보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강제가입방식의 의료보험제도
3.친환경적인 그린벨트 설치로 산림을 보호하여 세계 4대 조림성공국의 반열에 오름
4. 학원-과외 전면 금지 조치를 통해 계층의 대물림 현상을 완화하여 교육의 평등을 실현
5. 1979년에 88 올림픽 유치를 위한 계획을 수립및 구성
박정희 정부는 1979년10월에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뒤 한달도 되지 않아 서거 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후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습니다.
6. 미국 브로드웨이에 인류를 위한 큰 공헌을 한 외국인으로서 환영을 받는 카퍼레이드를
행함
1965년5월19일 뉴욕시가 주최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일대에서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이 퍼레이드는 일명 영웅행진이라고 불리우는 퍼레이드로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한 공헌을 한 인물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광의 카퍼레이드였습니다.
이 흔적은 지금도 미국 브로드웨이 길거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퍼레이드 흔적을 바닥에 문구와
함께 석판으로 새겨 놓아져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맥아더 원수, 드골의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달착륙 우주인들이 이 퍼레이드 주인공이 되었는데 한인으로서
이 영웅행진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 바로 첫번째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이었습니다.
7. 홍수와 가뭄 환경을 대비해서 4대강 다 목적댐 준공
계절과 날씨에 따라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고통과 피해를 줄이고자 1972년11월
동양 최대의 사력댐으로 소양강댐이 선전되었습니다. 소양강댐은 1967년4월15일 착공되어
1973년10월15일 완공되었고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록, 서울지하철1호선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새대의 3대 국책사업으로 꼽힙니다.
8. 제주도의 명물 감귤사업을 조성하고 도로, 항만 등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입지를 구축
1972년 제주도를 들러 외국인들 상대로 한 국제 관광지로의 개발결심으로 그당시 국내신혼
여행지에 머물러 있던 제주도에 1천억원의 투자를 지시하여 1976년 5백억원을 투자하였고
80만평의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습니다.
감귤산업은 박정희대통령이 일본에서 감귤나무를 들여오라고 명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9.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진 사회, 경제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
10. 농촌의 진흥과 국민의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운 농촌혁명인 새마을운동실시
11.자동차산업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효자산업으로 성장시킴
1968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준공된이후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의 단일공장으로 1990년
6개 차종에 56만대 생산능력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2009년까지 차량누계대수
2,580만대에 이릅니다.
12. 화교 억제정책을 통해 서민들의 골목상권을 지키고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성을 수호
우리나라는 아시아국가에서 유일하게 화교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에 속합니다. 그당시
화교들이 현금소지를 선호하는 사실을 알려져 통화개혁으로 화교들의 현금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한국화교는 1가구12ㅜ택 1점포만 허영다고 주택면적 200평이하 점포는
50평이하로 제한되었습니다.
13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통한 "베트남 특수"를 누림
14.식량자급으로 가난을 해결하고자 다수확품종인 통일벼를 재배하여 녹색혁명을 이뤄냄
1960년대 중반 벼 신종품개발을 지시하고 1971년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다수확품종인 통일
벼 재배가 시작되어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00만석 돌파, 쌀 수입을 끝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이 달성되어 1976년 단군이래 최고 수확량으리 기록했고 5천년 역사상 처음
으로 전국민이 쌀밥을 먹는 우리 역사의 기념배적인 해가 되었습니다. 과거 잡곡밥 장려하고 도시락 조사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5. 훗날 2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기반을 닦은 남북적십자회담, 7.4남북공동성명 등의
대북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 1970년의 8.15평화통일구상선언, 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찾기운동,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이에 따른 남북조절
위원회 회담 그리고 1973년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과 6.23선언, 1974년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습니다.
이나무는 옥천에서 가지고 온 목련화나무인데 이곳에 심어 이렇게 커져 있다고 합니다.
16.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용으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17. 경제적 자립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없체 기반.
60만톤 규모의 제철소를 총 1억3,070만2천달라 외자는 무려 9,500만2천달라 내자는 3,500만
달라로 1970년4월1일 포항제철 착공식 거했했고 전세계를 놀라게 하고 조강생산능력은
세계1,2위를 다투는 국가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18. 2001년-2012년까지 세계1위를 놓치지 않았던 대표적인 조선산업 기반 다짐
경제기획원 장관인 김학렬이 박정희대통령에게 정주영을 추천하여 4,300만달러의 어마한
차관으로 조선산업을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1위 조선국가가 되었습니다.
19. 공업인국 신호탄인 공업단지를 조성, 경공업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1962년 2월3일 울산에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울산공업단지에는
중화학공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1968년부터 가공에 들어갔고 1972년는 현대미포
조선소가 중공됐으며 당시 울산인구 8만5천명정도의 농어촌에 불과했는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고 1966년 카바이드법에 의해 폴리염화비닐(PVC)를 생산해 낸 것을
그 효시로 하였습니다.
20. 서민들의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1971년4월12일 착공해 3년4개월만 1974년 광복절에 개통했습니다. 그당시는 택시타기가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21 세계에서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효자산업인 반도체 전자공업의 기반을 다짐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의 승인과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기업체에서 시작되어 메모리형
반도체 산업육성정책을 연탄을 찍어내는 일, 또는 쌀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라고 보았습니다.
22. 외세에 의종하지 않고 자주국방을 통한 철통같은 국가 안보를 계획하여 실현시킴
미국 군사원조는 1973년 기점으로 급속히 줄기 시작해 1977년경에는 거의 없어지게 되어
국방부에서는 1974년에 전력증강8개년 계획을 입안하여 박정희대통령은 이를 '율곡계획'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율곡계획은 남북간의 전력비교가 50대100이라는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차 야포, 함정, 잠수함, 전투기등 국산화의 외부조달을 계획하고 국산화하였습니다.
K-IAI 전차개발을 계기로 독자모델의 전차를 생산하고 1974년12월 1단 무유도로켓
'홍릉1호'가 창공을 갈랐고 1978년 9월26일 '백곰'이 충남 서산군 안흥 앞바다 목표에 명중
했으며 자주국방의 효시를 놓았습니다.
23.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과학진흥계획을 수립 세계적이 과학국가 기반을
조성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설립, 1967년 과학기술처 발족, 과학기술진흥법제정,
1971년 한국과학 기술원(KAIST)를 설립하였습니다.
24.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숭고한 기념사업을 정부주도로
추진
아산시 백암리 일대는 이순신 장군의 옛집, 사당등이 있는 곳인데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이 행하여졌고 1968년4월27일 착공 7개월만에 20m
달하는 이순신장군 동상이 국내 최대규모로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습니다. 강감찬장군도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7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25. 국민에게 '우리도 할수 있다','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리더십을 통해 자신감을 심어줌
26. 현재 세계적인 강남스타일의 중심지인 한강이남 개발, 즉 강남 일대를 개발하는
사업을 실시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1967ㄴ녀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록로 건설계획이 완료됐고 강남일대 90만평이 토지계획지구
(영동지구)로 지정했습니다.
27. 전국에 있는 호국 문화유산과 같은 우리나라 중요한 문화재들을 발굴하고 정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도록 하였고 이 시기에 설굴암을 재보수
하고 광화문을 재건했습니다. 1975년부터 시작한 수원 화성복원 공사에 예산 32억원(현재
가치 1조원)을 들여 수원시와 경기도가 중심이 되는 5년일가는 시간의 노력 끝에 화성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시켰습니다.
28. 야간 중학 개설, 중학입시시험 폐지, 고교평준화와 같은 현대식 교육체계의 기반을 조성
1963년 8월8일 국사교육 통일 방안을 선포하였습니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입하여 한국학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고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였습니다.
29.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실리적으로 중동국가와 교류, '중동 특수'를
누림
1970년대 중동 특수가 경제개발 개혁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30. 외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한국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켜 동반자로서 입지를
구축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케다 수상과 1차회담을 1961년11월11일에 가져 한일관계 전반을
토의하고 이후 재산청구권과 평화선문제를 토의하기에 이르고 케네디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회담을 가졌고, 후임인 존슨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가졌고 독일을 통해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 재정 1,350만달러와 상업 2,625만 달러를 얻어냈으며 말레시아와 월남,
동남아 순방을 통한 태국과 말레시아 자유중국과 교류하였습니다. 1979년11월30일에는
수교국가가 무려 117개국으로 증가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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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세차....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벌써 40년이 흘러버렸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중앙청에 마련된 빈소에서
충격과 슬픔속에서 분향하고 절하던 그때가 생각나네.
아무쪼록 지리멸렬한 한나라당과 우파세력들이
환골탈태하고 다시 힘내서 국민의 신뢰와 사랑받는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네....
이나라가 어느틈에 이모양이 됐는지
건국100년만에 외교 안보 경제 등
사회주의로 넘어가고
곧 고려 연방제로 가려는 이때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바꿔야하는데
안일한 생각이니 큰일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