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日+甲)1795-1849)
省齋先生文集卷之四十二 / 柯下散筆
禹下柳公行錄 a324_378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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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
。字公元。柳氏高興人。居楊根之禹揖山下。自號禹下居士。上祖高麗僉議政丞高興伯諱濯。仕恭愍朝。直諫死。入我朝光海時。吏曹參判夢寅。以文章顯。仁祖靖社。節行卓然。正廟贈吏曹判書。謚曰義貞。義貞有兄子諱潚。弘文舘副提學。討昏朝五賊。卽公八世祖也。曾祖諱雲漢。贈承政院左承旨。祖諱璟僉知中樞府事。贈戶曹參判。考諱榮五兵
曹參判。妣貞夫人任氏。貫豊川。學生容白女。公以正宗乙卯八月二十八日生。天禀忠信寬厚。處事有範圍。見世俗鄙薄之人。如不欲與語。兒時。參判公命就學于故縣監簡齋沈公弘模。沈公性度簡重。學術甚正。見公器之。其敎之必以繩墨。公自是知古人自修之方。居家好讀中庸心經等書。黃承旨基天。文章傾一世。與參判公友善。嘗過之見公所讀。不喜曰。以若之才。專意治詞翰。世間功名。可探囊取之。何乃自外如此。公笑而無辨。心甚不服也。及長治擧子業。一再發解。遂廢不理。純祖丁亥。參判公言時事忤權
貴。竄遠島。尋放還。盡室入楊根山中。始僉樞公治命。子姓從事正學。參判公承訓不忘。遍交當世有識之士。至是聞同郡有華西李先生隱居講道。往與之遊。公與弟洛隱公鼂。將車從之。李先生見公德性敦厚。爲加禮敬。許以心契。春秋相來往。行鄕飮酒禮。輪講四子三經及程朱之書。禮儀甚盛。李先生挽公詩所謂大雪竆經夕。深山習禮年。盖識平日遊從之樂也。又睡翁南公啓來。嘗以詩屬參判公云弟兄聯白髮。父子讀朱書。亦此時事也。弟指公叔父通德公。李先生每與公相對話說亹亹。竟日忘倦。語及洋夷事。未
嘗不憂形於色。相與浩歎不已。有若禍在朝夕者然。李先生嘗以書及之曰。西洋之敎。如砒礵鴆酒。近唇則五臟裂坼。百脉沸盪。不可復救。盖其竆㐫絶悖。瞞不得人。然或浸漬迷眩而不知反者。爲其曆筭醫藥器物製造精巧。非中國所及。幷與其說而師之。然其所長。亦不過禽蟲之偏智曲技耳。蜜子之造甘。非易牙所及。鮫人之産珠。非魯般所能。豈其智不若哉。禽自禽。人自人。工匠自工匠。道德自道德。合而同之得乎。公深悅其言。以爲近世諸公闢邪說者甚衆。其肯綮所在。一斧劈下。未有若此論之痛切也。自是持論
益嚴正。凡係洋物世人所茶飯聽用者。一不近身焉。公從李先生遊。凡十五年。讀其書聽其說。而察其心迹之微。嘗歎曰。華翁所蘊。吾固不足以知之。觀其表裏洞徹。無一毫雜覇。古所謂眞儒。殆其人也。非遊從之久。察識之深者。鮮不以吾言爲妄矣。公事親克孝。自僉樞公歿後。公繼幹家事。不令參判公累其心。凡親意所欲爲。雖甚難。無不極力成就。南公宿德長老。與參判公襟期相得。公致敬奉迎。同處一堂。寢處飮食。一如事參判公者八九年。其家甚貧。又繼給以物。以安其心。李先生高弟金重庵平默。時年尙少。篤志
力學。顧家貧不能自給。參判公欲延接之。公割庄爲治生事。三年如一日。嘗謂華翁之學傳之者衆。則吾道之幸。但有志於學者。每患力不贍。無以自致。賣江榭得千金。謀置一庄於其書社之傍。未及下手而卒。士友至今恨之。宗族環墻下而居者十餘家。公資其産業而收敎其後進如一室。遠近有以急來告者。酬應如流。士大夫家居鄕。不謹刑憲。侵虐小民者。疾之若凂焉。公沒數十年。鄕人猶誦慕不已。有一農夫乏糧失耕。釀涕語婦子曰。使柳公而在。必不至如此。此重敎之所目睹云。公性好禮。平居多聚本朝諸先
正禮說。手不停披。鄕人有以疑禮來問者。爲之悉心指敎。務令得正。家中吉㐫之禮更定者甚多。至如衣服之節。深衣必用李先生攷定本。嘗言行禮者。必冠屨衣帶四者具然後。其服乃備。今於致敬之地。只着冠衣帶。而於屨則畧之。殊非禮意。招工依家禮製黑履。每於家廟行禮時用之。公之歿。在憲廟己酉九月三日。是年十月。葬加平之高峴。明年春。移厝于春川冠川里艮坐原。實承旨公墓階下也。孺人鄭氏貫溫陽。承旨澤孚女。性勤幹周詳。愛人喜施。凡公之事親奉先。接賓友撫宗族。藉夫人之內助。得如意焉。後
公十七年卒。基同兆。二男長重善。次重鎭。三女適李烇,李寅韶,李佖。重善取族子麟錫爲後。女適李載煕。重鎭取族子鳳錫爲後。外孫李烇男時翊。李寅韶女壻某某。餘幷幼。上之四年丁卯四月日。不肖從姪重敎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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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 유공 행록〔禹下柳公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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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가 갑(
)이고 자가 공원(公元)이며, 고흥 유씨(高興柳氏)이다. 양근(楊根)의 우읍산(禹揖山) 아래에 살며 자신을 우하거사(禹下居士)라고 불렀다. 상조(上祖)는 고려 첨의정승 고흥백(僉議政丞高興伯) 휘 탁(濯)인데, 탁은 공민왕(恭愍王)의 조정에서 벼슬을 살며 직간하다가 죽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조 참판 몽인(夢寅)이 문장으로 현저하였고, 인조(仁祖)가 사직을 편안하게 하자 지조 있는 행실이 우뚝하였으며, 정조(正祖)가 이조 판서로 추증하고 시호를 ‘의정(義貞)’이라 하였다. 의정공의 형의 아들 중에는 휘 숙(潚)이 있었는데, 숙은 홍문관 부제학(弘文舘副提學)을 지냈고, 혼조(昏朝 광해군)의 오적(五賊)을 성토하였으니, 곧 공의 8대조이다. 증조는 휘가 운한(雲漢)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조(祖)는 휘가 경(璟)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영오(榮五)로, 병조 참판을 지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임씨(任氏)는 본관이 풍천(豊川)이고, 학생 용백(容白)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正祖) 을묘년(1795, 정조19) 8월 28일에 태어났다. 천품이 충신(忠信)하고 관후(寬厚)하며 일처리에 절도가 있어, 비루하고 천박한 세상 사람을 보기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듯이 했다. 공이 어렸을 때에, 참판공이 고(故) 현감(縣監) 간재(簡齋) 심홍모(沈弘模) 공에게 나아가 배우도록 명하였다. 심공은 성정과 도량이 소탈하고 중후하며 학술이 아주 발랐는데, 공을 보고는 그릇으로 여기고 반드시 법도에 맞게 가르쳤다. 공은 이때부터 옛날 사람들이 스스로 수양하던 방법을 알아, 한가로이 집에 있을 때에는 《중용》과 《심경》 등의 서적을 즐겨 읽었다.
승지(承旨) 황기천(黃基天)은 문장으로 한 시대에 명성을 날렸으며, 참판공과도 벗으로서 친하게 지냈다. 황승지가 일찍이 참판공의 집에 들렀다가 공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너의 재능으로 전념하여 문장을 전념하여 공부하면 세상의 공명은 주머니 속을 더듬는 것처럼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렇게 자신을 소외시키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웃기만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성해서 과거 시험공부를 하여 한두 번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마침내 그만두고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았다. 순조(純祖) 정해년(1827, 순조27)에 참판공이 시국사건을 말한 것이 권문귀족의 심기를 거슬러 먼 섬으로 귀양갔다가, 이윽고 풀려나 돌아와 전 가족을 데리고 양근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첨추공이 바른 학문에 종사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신 후로부터, 참판공은 그 가르침을 받들어 잊지 않고 당세에 식견을 갖춘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근에 화서(華西) 이 선생이 은거하며 도를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교유하였다. 공은 아우 낙은공(洛隱公) 조(鼂)와 함께 수레를 타고 따라갔다. 이 선생은 공의 덕성이 돈후한 것을 보고 예절과 공경을 더하고 마음을 터놓고 사귀기를 허락하여 봄과 가을에 서로 왕래하며 향음주례를 행하고, 사서삼경과 정자와 주자의 글을 돌아가며 강론하며, 예의가 매우 성대하였다. 이 선생이 공을 애도하는 만사에, “큰 눈 내리는 가운데 경서를 연구하던 저녁”과 “깊은 산에서 예를 익히던 해”라고 한 것에서 평소에 교유하던 즐거움을 알 수 있다. 또 수옹(睡翁) 남계래(南啓來) 공이 일찍이 시를 참판공에게 보내어, “형과 아우가 흰 머리카락 나란히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주자의 글을 읽네〔弟兄聯白髮 父子讀朱書〕”라고 하였으니, 또한 이때의 일을 읊은 것이다. 아우는 공의 숙부 통덕공(通德公)을 가리킨다.
이 선생은 공과 대화할 때마다 끊임없이 하루 종일 하고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양이(洋夷)의 일을 말할 때면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드러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마치 재앙이 조만간 닥칠 것처럼 서로 탄식을 멈추지 못하였다. 이 선생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서양의 가르침은 마치 비상(砒礵)이나 짐주(鴆酒)와 같아 입술에 가까이 대면 오장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모든 맥이 들끓어, 다시는 구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끝없는 흉악과 패역은 기만으로 사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혹 거기에 물들고 미혹되어 되돌아올 줄 모르는 자가 그들의 역산(曆算 일력(日曆)과 산술), 의약, 기물의 제조에 정교함을 중국이 따라잡을 수 없다고 여겨, 그들의 학설까지도 인정하여 스승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의 장점은 또한 금수나 곤충의 치우친 지혜나 작은 기술에 불과할 뿐이다. 벌이 꿀을 만드는 것은 역아(易牙)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어가 진주를 만드는 것은노반(魯般)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찌 역아와 노반의 지혜가 벌과 인어만 못하겠는가? 금수는 본래 금수이고 사람은 본래 사람이며 기술은 본래 기술이고 도덕은 본래 도덕인데, 합쳐서 같은 부류로 보려고 하면 되겠는가?” 공이 이 말씀에 매우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근세에 여러분이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글을 많이 지었으나, 그 복잡하게 얽힌 부분을 단칼에 쪼개버린 것이 이 논설처럼 통렬하고 절실했던 것은 없었다.” 이때부터 지론을 더욱 엄정하게 하여, 세상 사람이 다반사로 받아들이고 쓰는 서양과 관계된 물건은 하나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이 이 선생과 교유한 기간이 모두 15년인데, 그 글을 읽고 그 설을 들으며 그 마음의 은미한 자취를 살펴보고는 일찍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화옹이 온축한 것에 대하여, 나는 본래 알아보기에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겉과 속을 살펴보면 투명하여 패도가 조금도 섞인 것이 없으니, 옛날에 이른바 ‘참된 유자(儒者)’가 아마도 이 분일 것이다. 오래 종유하여 깊이 살펴 알아본 자가 아니면 나의 말을 망녕되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드물 것이다.”
공은 부모를 섬기며 효도를 다했다. 첨추공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공이 이어서 집안일을 주관하여, 참판공이 마음을 쓰지 않도록 했다. 부친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도 힘을 다하여 성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남공(南公)이 큰 덕이 있는 어른으로서 참판공과 뜻이 맞았으므로, 공은 공경을 다하여 맞이하여 참판공과 함께 한 집에 모시며 침식을 참판공을 섬기는 것과 같이한 것이 8, 9년이었다. 남공의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또 물품을 계속 대주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 선생의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 중암 김평묵이 당시에 나이가 오히려 어린데도 뜻을 독실하게 하여 배움에 힘썼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생활을 자급할 수 없었으므로, 참판공이 집 가까운 곳으로 맞이하여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공이 농장을 갈라주어 생계를 잇게 해주었는데, 삼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화옹의 학문을 전수하는 자가 많으니, 우리 도로서는 다행이다. 다만 배움에 뜻을 둔 자가 매번 재력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노력을 다하지 못하니, 강가의 정자를 팔아 천금을 얻어서 서사 옆에 농장을 하나 장만해 둘 생각이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시어, 사우들이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다. 담장 아래에 빙 둘러 사는 친척이 십여 가구 있었는데, 공은 그들의 생업을 도와주며 한 집안처럼 그들의 자제를 거두어 교육시켰다. 원근에서 급한 일로 와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물 흐르듯이 응대하며 도와주었다. 사대부의 집안으로서 향리에서 법을 지키지 않고 백성을 함부로 학대하는 자를 자신을 더럽히는 듯이 미워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향리의 사람들은 여전히 공을 칭송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양식은 모자라고 농사는 망친 한 농부가 눈물을 흘리며 처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공이 계셨다면 이런 지경에는 분명히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중교가 직접 본 일이다.
공은 성품이 예의를 좋아하였다. 한가로이 집에 있을 때에는 본조의 여러 선정(先正)의 예설(禮說)을 많이 모았으며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예절에 대한 의문을 갖고 와서 묻는 향리의 사람에게는 마음을 다하여 가르쳐주어 바른 예절을 알게 하도록 힘썼으므로 집안에서 지켜온 길흉의 예식을 고친 자가 매우 많았다. 의복의 절차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 심의(深衣)는 이 선생의 고정본(考定本)을 반드시 따랐으며,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예를 행하는 자는 모자와 신발과 의상과 허리띠 4개를 반드시 갖춘 뒤에야 그 예복이 완비된다. 지금은 공경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자와 의상과 허리띠만을 착용하고 신발은 생략하니 전혀 예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기술자를 불러 《가례》에 의거하여 검은 신발을 제조하게 하고, 매번 가묘에서 예를 행할 때에 신었다.
공은 헌종 기유년(1849, 헌종15) 9월 3일에 돌아가셨고, 그해 10월에 가평의 고현(高峴)에 안장했다. 내년 봄에 춘천 관천리(冠川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는데, 실은 승지공의 묘소 아래다. 유인(孺人) 정씨(鄭氏)는 본관이 온양(溫陽)이고 승지 택부(澤孚)의 따님인데, 성품이 근면하고 꼼꼼하며 사람을 사랑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공이 부모를 섬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며 빈객을 대접하고 종족을 어루만진 것은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뜻대로 할 수 있었다. 부인 정씨는 공보다 17년 후에 돌아가셨고, 묘는 합장했다.
아들은 둘인데, 장남이 중선(重善)이고 차남이 중진(重鎭)이다. 딸은 셋인데, 이전(李烇)과 이인소(李寅韶)와 이필(李佖)에게 각각 시집갔다. 중선은 친족의 아들 인석(麟錫)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고, 딸은 이재희(李載熙)에게 시집갔다. 중진은 친족의 아들 봉석(鳳錫)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외손자는, 이전의 아들 시익(時翊)과 이인소의 사위 모모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상(上 고종)의 4년 정묘년(1867) 4월 일에, 불초 종질(從姪) 중교가 삼가 쓰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하영휘 김정기 (공역) | 2015
重菴先生文集卷之五十 / 行狀
嘉善大夫兵曹參判栗里柳公行狀 a
本貫全羅道古高興縣楊柳洞。
曾祖諱諄。贈通訓大夫,司僕寺正。妣驪興李氏 贈淑人。
祖諱雲漢。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妣漢陽趙氏贈淑夫人。
考諱璟。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揔
管。妣安東權氏贈貞夫人。學生顯應女。
公姓。柳氏。諱榮五。字叔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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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以回榜。陞嘉善。時年八十七。公中年以後。一切忘生循欲之事。絶不留心。以此能壽考康壯。至是以筋力爲禮。乘軒詣闕。升降殿陛。顔髮有精采。在直諸公。望之以爲眞仙。尋拜兵曹參判。俄兼五衛都摠府副摠管。以其年十
一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明年正月。葬於春川之恒谷。貞夫人任氏。墓右也。任氏。籍豐川。學生容白女。和順有婦德。擧二男三女。男長
。通德郞。先公卒。次鼂。進士。
....................................이하 생략............................
첫댓글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
𣅼(日+甲)에 대한 글 난삽하여 찾을 수 없으나 장남이 전주 柳 𣅼(日+甲) 씨라는 것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