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춘추영웅
담정은 재차 포권지례를 취하며 미소했다.
"이제 보니 바로 배 소협이었군요. 춘부장어른을 통해 이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운옥은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제 아버님올...... 만나셨단 말입니까?"
"우리 일행은
춘부장의 거처에서 하릇밤 신세를 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랬었군요."
배운옥은 신음 같은 어조로 독백하더니 문득 강렬한 시선으로
담정을
정시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신분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청성파의 장문인 직을 맡고 있습니다."
담정의 대답에 배운옥은 새삼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곧 더할 나위 없
이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소생은 무림의 일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구대문파 중에 청성파가
속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귀인을 뵙게 되니 실로 큰 영
광입니다."
"별말씀올."
담정은 밝게 미소했다.
그때 그의 시선이 우연히 백난향의 눈길과 마주쳤다.
백난향은 약간 당황한 듯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담정은 새삼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심기가 진탕되는 느낌이었다. 그제
서야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옷차림새는 이미
좌초량에게 당해 죽은 보타암의 여제자들
과 똑같앗지만, 그녀들과는 달리 머리를 삭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흘러내린 그녀의 검은 머리결은 눈처럼 희고 가
녀린 목덜미와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올 것이다.'
담정은 내심 생각하며 그녀를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크나큰 환고를
당했으니 마음의 상처가 크겠습니다."
백난향은 곧 합장의 예를 취하며 차분한 옥음으로 말했다.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럽니다.
우리 보타암은 장문인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담정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우선 저회들과 함께 거처로 가서
상처부터 치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백난향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곧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호의에
감사드럽니다."
일행이 산신묘의 거처로 되돌아온 건 이른 새벽 무렵이었다.
광층을 비롯한 청성파 제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떤 자들을 만났길래 장문인께서 저렇게 다치셨단말인가?'
배진학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들 배운옥이 똑같이 부상을
당
한 몸으로 함께 돌아오는 걸 본 때문이었다.
한숨을 돌린 일행은 서로의 부상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외상은 담정이 가장
심했고, 보이지 않는 내상을 가장 크게 입은 사람
은 백난향이었다. 장우령은 순간적으로 무리한 내공을 운용하여 생긴
내상이기에
이삼 일 정도의 운기조식으로 회복이 가능할 것이었다.
의외로 금세 회복세를 보인 인물은 배운옥이었다.
좌초량에게 당했을 때만 해도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심각한 내상을
입은 그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운기조식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
력을 회복한 것이다.
담정은 그런 배운윽을 보고는 의문을 느끼지 않올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배운옥이야말로 가장 상세가 심해야 할 상황이 아니던가?
"배 소협의 무공은 태음신공만 있는 게 아닌 듯하구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문을 말해줄 수 있겠소?"
담정의 물음에
배운윽은 즉시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게 무공을 전수해주신 분은 적미불이라는 스님이십니다."
담정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스쳤다.
그는 이미 그의 무공이 적미불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터였다. 그러나 배진학 노인의 말에 의하면 적미불과
배운옥이 함께
지낸 기간은 불과 나흘뿐이지 않은가?
배진학 또한 담정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겨우 나흘 동안 그 스님과 함께 있었을 뿐인데 무슨 무공을 배
웠다는 것이냐?"
배운옥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스님과 함께 있었던 기간은 나흘뿐이었지만, 그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분이 전수해주신
무공을 단련해왔습니다."
"이제 보니 너는......"
배진학은 그제서야 아들이 초저녁부터 모습을 감추었다가 아침이 되어
서야 돌아왔던 이유를 깨달았다.
배운옥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스님의 당부 때문이었습니
다. 때가 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시는......."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 애비에게조차 그 사실을 숨겨왔다니, 너는
참으로 지독한 녀석이로구나."
배진학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표정에는
아들의 기연을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담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 소협의 재질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것이라 할 수 있겠소. 불과
나흘 간의 무공전수를 받았을 뿐인데도 그후 혼자서 그토록 놀라운 경
지를
이루어냈으니 말이오."
배운옥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것은 전혀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선 그 나흘 간의 시간
동안 불문개정대법 으로 제 몸의 생사현관을 타통시켜 주셨을 뿐 아니
라, 벌모세수의 은혜까지 내려주셨습니다."
순간 담정을
비롯한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
다.
"........."
"........."
실로 엄청난
단어들이 배운옥의 입에서 홀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미 생사현관이 타통되었다면 최소한 이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일단 생사현관이 타통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내공의 흐름이 막히는 법
이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큰 부상을 입더라도 순식간에 자연
치유
되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모든 무림인들이 꿈에서도 그리는 것이 바로 생사현관을 타
통시키는 것이었다.
배운옥이 중상을 당하고서도 금세 기력을 회복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
이었다.
더욱이 그는 벌모세수의 기연까지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전신의 피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웬만한 병기나 무공에는 부
상을 당하지 않는 벌모세수의 경지! 익힌 자의 내공
깊이에 따라 그
위력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보통
무림인이 자나깨나 열망하는 상승무학의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담정과 장우령 등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운옥을 불과 나흘 만에 그러한 경지로 탈바꿈시킨 적미
불의
블문개정대법이었다.
'불문개정대법은 이미 사백여 년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적미
블이 그 대법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문개정대법은 가장 단기간에 최고의 고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블문
무학의
정수이며, 그 난해함과 신비로움은 그 어떤 무학에도 비할 바
가 아니었다.
만약 불문개정대법을 잘못 시전하는 날에는 상대방과
자신이 동시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설사 완벽하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시전한 자는 내공의 태반을 잃어
버리게
마련이었다. 상대방을 가공할 고수로 만들어 내는 대신 자신의
무공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배운옥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제가 불문과는 인연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사제의
인연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분은 떠나시면서 제게
태음진경이라는 무공
비급을 남기셨고...... 전 십 년 동안 오직 그 태음진경의 무공을 연
성하는데 힘써왔습니다."
좌중에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담정은 적미블이라는 신비한 고승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우령을 비룻한 다른
인믈들도 마찬가지였다.
배운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만면에 결연한 빛이 가득 감돌았다. 그
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담정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엄숙하게 외쳤
다.
"장문인께선 부디 절 거두어 주십시오!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십 년이
지난 후 몸올
아끼지 않고 제 생명을 구해주는 은인올 만나게 되면 그
에게 몸을 의탁하여 장차 큰일을 도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제
목숨은 장문인의 손에 달렸습니다."
"배 소협!"
담정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의 빛이 물결쳤다.
배운옥은 단호한 신색으로
담정을 정시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이 배운옥은 이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
에 없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배진학도 떨리는 목소리로 거돌었다.
"부디 제 아들의 청올 거두어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 부자의 뜻일 뿐
아니라 하늘의
뜻이기도 합니다."
담정은 만면에 복잡한 빚을 띄운 채 배운옥을 바라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운옥 같은 인재가 몸올 의탁해오는
건 크게 기뻐
할 일이었다. 그러나 배운옥의 자질이 너무나 뛰어난 점이 오히려 담
정으로 하여금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도록 만들
었다.
한참 후에서야 담정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배 소협은 무공만 따지자면 가히 일파를 이끌어갈 지존의 경지라고
할 수 있소. 단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 유일한 흠일 뿐이오. 세월
이 흐르면 오히려 이 몸을 능가할 수
도 있을
것이오. 그런 배 소협을 거둘 만큼 내가 자격이 있는 인물인
지 의문이오."
"거절하신다는 말입니까?"
배운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배진학은 황망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정녕 제 아들에게 큰 허믈이 없다면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것만이
우리
배씨 문중이 새롭게 번창하는 길입니다."
그때 장우령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장문인, 거두시게나. 주종관계가 아닌 우리 청성파의
제자로 입문시
키면 문제가 없을 것이네."
담정의 안색이 순간 크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사형께서 제자로 거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장우령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발했다.
"그것 좋지! 내 그 동안 이상한 두 녀석을 가르치느라 고생이
심했는
데 오늘에서야 쓸 만한 제자 하나를 거두는군!"
화악린과 현우금의 표정이 순간 괴상하게 변했다.
배운옥은 만면에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담정에게 대례를 올렸다.
"배운옥, 장문인께 정식으로 인사드럽니다."
이어 그는 장우령을 향해 사부를
모시는 구배지례를 올렸다.
장우령은 크게 만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좋아! 네 사형들과도 인사를 나누도록
해라."
배운윽은 즉시 현우금과 화악린에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사형들께 인사드럽니다."
현우금은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막내 사제가 생겨서 좋기는 한데 약간 부담스럽군. 사
문에 들어오기도 전에 사형들을 능가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화악린이 동감이라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난 사부님이 걱정이야."
그 말에
장우령이 두눈을 부라렸다.
"무슨 뜻이냐?"
"사부님께선 좌초량 같은 노마와 맞싸운 막내사제에게 대체 뭘 가르칠
작정이십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무공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장우령의 단호한
말에 화악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뭡니까?"
"바로 네놈처럼 골치아프고 교활한 놈을 상대하는 방법이다."
"그런......."
화악린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담성은 자신도 모르게 낭랑하게 웃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이내
참지 못하고 모두 대소를 터트렸다.
"핫핫핫......."
"하하하......"
여명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
백난향은 아스라한 안개 속을 천천히 걷
고 있었다.
담정 일행을 따라 이 산신묘의 접에 기거한 지도 벌써 삼일이 지났다.
그사이 그녀의 몸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한줄기 차가운 새벽 바람이 그녀의 섬세한 몸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백난향은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아스라한 여명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이 순
간 그녀의 뇌리 속에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사랍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지만,
대신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그렇다.
그녀는 담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에게 구명지은을 받은 순간 부터......
그녀는 마
치 마술에 걸린 듯 담정에게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단지 깊은 미궁에
빠진 듯 흔란스런 느낌 속에서 예전에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
을 발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감정은 딱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결코 밝은 빛깔만은 아니었
다.
가슴이 저며오는 듯한 슬픔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전함과
안타까움..
....
달을 보면 달 속에 온몸이 녹아버리는 듯하고, 바람이 블면 한 조각
낙엽이 되어 그 속에
날리고....... 눈부신 태양이 뜨면 그녀의 가슴
에도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솟구치곤 했다.
백난향은 그러한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문득 백난향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돌아가야 한다. 지금 내가 생각할 일은 금란초를 가지고 한시라도 빨
리 보타암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바로 그때였다.
안개 저편으로 아스라히 담정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백난향의 몸이 얼어붙은 듯 그자리에
정지되었다.
무슨 생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담정은 막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천년석상처럼 미동도 않은 채
서 있었다.
백난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그에게 다가갔다.
담정.
이 순간 그는 청성파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 문파의 흥망성쇠는 인재와 무학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금후 청성파의 미래는 그야말로 밝다고
할 수
있었다.
무학올 논하자면 나머지 절반의 절영부를 얻은 지금 건곤삼식올 익히
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또한
장우령은 평생 동안 연구해서 완성
단계에 이른 이기어검술을 전수해주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인재룰 논하자면 또 어떤가?
장우령을 비롯해서 현우금과 화악린, 그리고 배운옥 등은 하나같이 기
라성 같은 거목들이었다.
......미래의 청성은
구대문파의 최고가 될 것이다......
문득 담정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윽한 꽃내음 같은 향기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서는 걸
감지한 때문이
었다.
담정은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보지 않고서도 상대가
백난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난향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서 있
었다. 백난향은 볼 때마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담정
은 잠시 넋을 잃은 채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난향은 그의 눈길을 의식하고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
다.
"작별인사를 드릴 때가 된 듯해서......."
담정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보살펴 주신 덕분에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담정은 진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조
심스럽게 믈었다.
"법명을 믈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그의 이 질문은 보타암의
제자이면서도 머리를 깎지 않은 이유를
물은 것이었다.
백난향의 얼굴에 일순 수줍은 빛이 스쳐갔다.
"전 아직 사미니의
신분이에요. 구족계를 받지 못했으니 법명이 있올
리 없지요. 원래는 벌써 정식 비구니가 되었어야 마땅하지만, 보타암
을 수호하는
삼호령에 속해 있는 탓에......."
백난향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 입을 다믈었다.
담정은 나름대로 그녀의 말뜻을 헤아려
보았다.
'보타암을 수호해야 하는 신분이라면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는 일이
종종 있을 것이다. 정식 비구니가 된다면 함부로
수도에 홈이 되는 일
을 범할 수 없올 터......'
그러나 담정의 그 추측은 사실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여신을 모
시는 삼호령은 보통의 제자들보다 늦게 구족계를 받는 것이 보타암의
규율이었다. 삼호령 중 한 명은 보타암주로
선출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세상의 문물을 익히거나 까다
로운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인 것이다.
침묵.
담정과
백난향은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알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
속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순간 백난향은 거짓말처럼 평온한
안색을 회복하더니 합장의 예를
취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만......."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렸다.
담정은 이대로 그녀와 작별을 한다고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
다. 그가 막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무슨 말인가 하려는
순간이었다.
"제 이름은...... 백난향이에요."
그녀의 나직한 옥음이 거짓말처럼 담정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담정은
망연자실한 신색으로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
다. 그것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러
나 하필이면 사미니의 신분을 지닌 여인이란
말인가!
'그녀는 어차피
보타암의 제자다. 비록 지금은 정식 비구니가 아닐지
라도 가까운 장래에 머리를 깎을 여인......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윽고 백난향의 모습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담정은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흘려냈다.
그
순간 장우령이 바람처럼 몸올 날려와 그의 옆에 내려섰다.
"그녀가 떠났는가?"
"그렇습니다."
담정은 차분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장우령은 그의 얼굴에 스쳐가는 한즐기 쓸쓸한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지......."
무슨 뜻일까?
담정이 미처 그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장우령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군."
그날 저녁.
담정 일행은 배진학 부자와 함께 관운령의 산신묘를 출발했다. 만 하
루가 지난 다음날 저녁에 담정
일행은 오천에 당도했다.
임단흥의 배는 어김없이 오천의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을 태운 배가 오천의 포구를 벗어나
망망대해에 접어들었을 무렵,
담정은 임단흥과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한 가지 반갑고 놀라운 소식
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곡운성의 혼인과 장문인 취임에 관한 소식이었다.
담정은 즉시 임단홍에게 해남도로 뱃머리를 돌리도록 분부했다. 그만
큼
곡운성에 대한 담정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오천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담정 일행의 배는 해남도에 도착했다.
이미
해남도에는 천하각지의 문파에서 보낸 축하사절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담정은 그들과 함께 오지산을 넘어 해남파로 향하면서 새삼
곡운성의
명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담정은 곡운성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북룡문의 침공을 같이 막아냈던
일들을 회상하며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곡운성,그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구나!
유성,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눈부신 광휘로
명멸하는 유성은 보는 이에
따라 수많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것은 평온한 일상의 삶 대신 한 자루 검에 모든 것을 건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는 무림인의 삶과 비유되기도 한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들이 사라졌을 때마다 유성이 떨어진다고 믿는 사
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성이 떨어지는 틈올 놓치지 않고 소
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가인과 백년가약을 맺올 날을 하루 앞두고 유성을
바라보는 사나이의 마음은 어떠할까.
곡운성은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에 우뚝 선 채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
다. 오늘따라 밤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마치 현란한 축제
라도 벌이는 양 연이어 유성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약간 서늘한 기운을 담은 밤바람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조용히 지나
간다. 그의 신색은 어찌 보자니
수도숭처럼 고요하기도 했고, 달리 보
면 복잡하고 쓸쓸한 기운을 담은 듯 보
였다.
흔인전야의 밤이다.
해남파의
모든 인물들이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채 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혼인 당사자인 곡운성은 밤의 고요한 정적과 벗
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찌르르...... 껑쩡 !
간간이 풀벌레 소리가 평화롭게 울려퍼진다.
이 순간 곡운성의
뇌리에는 무림 출도 후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세월이었다.
어려웠던 좌절의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한순간도 을바른 정도
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단신으로 활동해왔던 과거와는 달리
앞으로의 미래에는 실로 어렵고
막중한 책임이 따를 것이다. 아직 장문인으로 등극하지는 않았지만 이
미 해남파의 미래는 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가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법이다.
권력은 종종 총명한 사람의
심기를 흐트러뜨리고, 시야를 가리게 만들
며, 독선을 잉태시킬 수 있으며, 나중에는 본성마저 변질시키는 마력
을 지니고 있다.
'하명...... 그녀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곡운성은 문득 적하명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녀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은 연화설에 대한 그의 마음속 상처를 충분
히 감싸줄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해남파의 장문인이 되기 위해
정략결흔올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곡운성의 입가에 회미한 미소가 스켰다.
혼인과 장문인 승계에 대한 제의를 받고 고뇌했던
당시, 그는 누구에
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적인풍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곡운성은 적인풍에게 물었다.
......제가 하명 소저와 장문인 직 중 한 가지만 선택하겠다면 어찌하
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적인풍의 대답은 실로
단호한 것이었다.
.... ..그렇다면 해남파의 장문인 직올 맡아주게. 내 딸의 사윗감은
또 있을 수 있지만 해남파의 장문인 직올
맡을 사람은 오직 자네뿐일
세.
그 한마디는 곡운성으로 하여금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도
움을 주었다.
찌르르...... 찡찡 !
서늘한 기운을 담은 밤바람에 실려 풀벌레 소리가 평온하게 울려퍼진
다.
그때였다.
화원 안으로 한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곡운성은 이내 그가 등비임을 알아보고 미소지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인가?"
등비는 공손히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귀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알려드리는 게 나을 듯
해서......."
곡운성은 일순 의아한 심정이었다. 이미 해남귀에는 천하각지의 문파
에서 보낸 축하사절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관례상 그들은 모두
내당에서 접대했고, 간흑 배분이 높
은 인물이 있어도 적인풍이 맞이했던 것이다.
등비는
그의 의문을 헤아린 듯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청성꽈 장문인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곡운성의 안색이 순간 놀람과
반가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담형이 왔단 말인가! 당장 그를 만날 터이니 안내해주게."
등비는 미소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실 줄 알고 이미 모시고 왔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등비의 뒤쪽으로 담정이 환한 미소를 떠올린 채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
다.
"곡형, 참으로 오랜만이구려."
곡운성은 격동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담형!"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몸올 굳게 포옹했다.
그것은 이 하늘 아래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지기지우의 재회
였으며...... 장차 무림의 대풍운을 주도해갈 두 주역의 포응이었다.
드디어 혼인의 날은 밝아왔다.
해남파의 드넓은
대연무장에는 혼인을 축하하는 수백 개의 깃발이 걸
리고 거대한 대연회장이 마련되었다. 그 거대한 대연회장을 각문파의
축하사절들과
해남도의 한인들, 인
근 섬의 유지 등이 가득 점령하는 데에는 불과 두 시진도 걸리지 않았
다.
왁자지껄.......
시끌벅적....
"하하하......"
"호호호......."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올까.
한순간 거대한 대연회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광장 안쪽에 마련된 석대로 모아지고
있었
다.
그렇다.
그 석대 위로 막 붉은 흔례복을 입은 선남선녀가 눈부신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곡운성과 적하명의 기품은 그야말로 속세를 초월한 천상의 그것이었
다.
사방 여기저기서 경탄 어린 탄성과 한숨소리가
홀러나왔다.
"오오! 실로 황흘한 한쌍이로군!"
"어머 , 저 신부 좀 봐, 어쩜 내가 젊었을 때와 저리 똑같담?"
한
바탕 소란이 해일처럼 광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곡운성은 주례자의 주창에 따라 천신과 지신에게 일배를 한 후 곡자량
과 적인풍에게
다시 큰절을 올렸다.
이어 그는 적하명과 서로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맞절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곡자량과 적인풍의 신색에는
흐믓한 빛이 감돌았
다.
담정은 석대의 맨 앞쪽에 마련된 의자에 장우령 등과 함께 앉아 있었
다.
장우령이
두눈에 기이한 광채를 담은 채 말했다.
"실로 비범한 기품을 지닌 청년이로군."
담정은 진심으로 그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년 전 남북무림의 대겁난을 치른 직후 헤어졌었는데.
.....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나직히 말을 이었다.
"가히 일대종사의 풍모입니다. 저 친구로 인해 이 해남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입니다."
"흐음......."
장우령은 새삼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장문인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을 테지."
담정은 그 말뜻을 헤아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저 친구를 좋아하는 만큼 어떤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입
니다."
"좋아, 좋아! 그같은 친구가 옆에 있다는 건 사나이로서 행복한 일이
지!"
장우령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그때 화악린이 묘한 표정으로 담정을 보며 불쑥 믈었다.
"우리는 언제쯤 소사숙님의 국수를
대접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 말에 담정은 쓴웃음을 떠올렸다.
무엇 때문이었올까?
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백난향의
아름다운 자태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백난향......'
담정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든 의식이 끝난 건 황혼이 내릴 무릅이었다.
모용문은 합환주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며 짓궂게도 신방까지
따라들어와 적하명에게 눈총을 받았다.
모용문마저 신방을 떠나 둘만이 남은 건 그나마 밤이 이슥해진 시각이
었다.
곡운성은 새삼 적하명의 눈부신 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넋을 잃었다.
"하명, 참으로 아름답구려."
그러했다.
혼례복을 입은 채 은은한 촛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모
습은 실로 환상적인 것이었다.
감히 곡운성을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본래 강한 기개를 지닌 여인일수록 한번 사내에게 꺾이면 오히려
믿기
힘들 만큼 복종심을 보이는 법이다. 만절곡에서의 그 당돌하고 매섭던
소녀의 모습은 이 순간 간 곳이 없었
다.
스윽......
곡운성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두른 붉은 비단을 벗겨 주었다.
그러자 적하명은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린 듯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곡운성의 뇌리에 불현듯 연화설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 것은.
'잊어야 한다! 오늘 이 순간부터 영원히 그녀를 잊으리라. 그리고 오
직 이 여인만을 사랑할 젓이다.'
곡운성은 복잡한 심사를 떨쳐버리듯 적하명을 끌어 힘있게 안았다.
촛블이 꺼졌다.
흔례를 치른 지 정확히 열홀 후.
곡운성을 해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으로 추대하는 의식이 성대하게 거행
되었다. 드디어 곡운성은 해남파의 흥망과 생사를 관장하는 지존의
자
리에 오른 것이었다.
해남파로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대전환점으로 기록될
날이었다.
담정은
그때까지도 해남파에 남아 곡운성의 장문인 취임을 축하해 주
었다.
그날 저녁,곡운성은 담정을 비롯한 청성귀의 인물들을 위해 연회의
자
리를 마련했다. 곡운성과 담정은 밤새도록 슬잔을 나누며 무림계의 미
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새삼
서로의 뜻이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걸 발견하고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다음날, 담정은 곡운성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해남파를 출발했다
쏴아아!
배는 서서히 물살을 가르며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담정 일행은 갑판에 우뚝 선 채 시야에서 멀어지는 해남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장우령은 담정의 얼굴에 스쳐가는 한줄기 허전한 기색을 발견했다. 그
러한 담정의 표정이 곡운성에 대한 정을
말해주는 것임은 말할 필요조
차 없었다.
문득 장우령은 나직한 탄식을 발했다.
"장강의 앞물결을 뒷물결이
밀어내듯...... 금후의 무립계는 새로운
영응들의 시대가 될 것 같네."
"앞물결이 뒷물결을 이끌어내는 것이겠지요."
담정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장우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구대문파 중 이미 두 개의 문파가 젊은 영웅을 지존으로
맞이한 형국
이 아닌가? 무림사상 이러한 예는 일쩍이 없었다네. 내 장담하지만 청
성파와 해남파의 두 젊은 장문인이야말
로
금후 무림계를 이끌어갈 기둥이 될 것이네."
담정의 두눈에 깊숙한 광채가 어렸다.
"곡 장문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저보다
뛰어납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화악린이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곡 장문인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결코 소사
숙님을 능가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배운옥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감복한 분은
오직 소사숙님뿐입니다! 미래의 무림계에선 그 누
구도 소사숙님을 따를 자가 없올 것입니다."
담정은 대답 대신 신비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멀어져가는 해남도를 응
시했다.
착각이었을까?
장우령은 그러한 그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악 같은 기개를 엿보았다.
그 순간 장우령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청성파는 실로 위대한 거인을 품
었음올.
크다! 청성파의 미래는 창대무궁하리라!
제37장 장문인의 길
곡운성은 신임 장문인으로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러
장로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탓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특히 모용문의 도움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는 조직을 정비하고 관장
하는
일에 대해선 천부적이라 할 만큼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하명의 내조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든간에
곡운성의 뜻에 무조건 순종했으며, 단 한 순
간도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한 그녀의 변모는 너무나 놀라
운 것이어서
부친인 적인풍조차 믿기 어겨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남파의 모든 일이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일단
의 방문객들이
해남도에 갑자기 찾아들었다. 그들은
무림맹의 사자들이었다.
해천각의 한 정실.
실내의 긴 원탁에는 곡운성을 중심으로 십여
명의 해남파의 장로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모용문을 비롯한 좌중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긴장 어린 신색으로 곡운
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순간 곡운성은 막 등비에게서 받아든 방문
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방문첩에는 무림맹에서 보낸 사자들의 이름
이 적혀
있었다.
곡운성의 얼굴에 문득 미세한 파랑이 일었다.
"뜻밖이군요."
모용문이 두눈에 이채를 발하며 물었다.
"특별한 인물이라도 끼어 있소?"
모용문의 어투는 정중했다. 곡운성이 장문인으로 취임한 이상 장로의
신분인 그로서는 예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직접 보시지요."
곡운성은 방문첩을 모용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펼치던 모용문의
안색이 가볍게 경직되었다.
방문첩에 적힌 명단 맨 위에 적혀 있는 이름 때문이었다.
무림맹 천각 각주 정풍.
"천각 각주
정풍...... 현 무림맹의 실질적인 이인자로 알려진 그가
직접 왔단 말인가?"
모용문은 나직히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장로들의 얼굴에 일제히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곡운성은 등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들을 어디로 안내했는가?"
"성화전입니다."
"이 방문첩에 적힌 세 명 외에 몇 명이나 더 왔는가?"
"삼십 명의 호위기마대가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성화전의 입구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등비는 시종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곡운성은 정풍이 무림맹 사자의 신분으로 찾아온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때가 온 셈인가......"
지난 일년여 동안 해남파는 무림맹이 주관하는 대소사에
철저한 외면
으로 일관했었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독고무적의 철권통치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그것은 적인풍을
비롯한 해남파의 확고부동한 입장이기도 했다. 애초 처음부터 적인풍
은 하극상에 의한 거사로 맹주에 등극한 독고무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적인풍은 대외적으로 그러한 입장표명을 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독고무적이 뛰어난 통솔력으로 무림계를
긍정적으로 발전시
켜온 이유도 있었지만, 무림맹과 정면으로 층돌할 자신이 없었던 때문
이었다.
그러나 곡운성의 생각은
달랐다.
'백도무림의 맹주는 반드시 모든 백도인들을 대표하는 원로원에서 선
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는 독고무적이 아무리 무림계를 잘 다스린다 해도 그 출발이 하극상
에 의한 무력으로 이루어진 이상 머잖아 한계에
부딪히고 말리라 예상
했다. 그것은 마치 한 그루 나무를 썩은
토양에 심어놓고 잘 자라기를 바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비록 그 나무가 잘 자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뿌리째
썩어들어갈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고 맹주가 진정한 무림의 영웅으로 남기 위해선 스스로 맹주
직에서 물러나
원로원에서 맹주를 선출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독고 맹주와 백도무림이 다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잠시 후,
곡운성은 장로들을 대동한 채 성화전의 영빈청에 당도했다.
정풍을 위시한 삼인의 사자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정증하게
포권의 예를 취한 건 정풍이었다.
"곡 장문인께 인사드리오."
곡운성의 눈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누가 뭐래도 무림맹의
이인자로 알려진 정풍이 아니던가.
더구나 예전의 그 오만했던 정풍을 기억하는 곡운성으로선 내심 뜻밖
이 아닐 수 없었다.
'달라졌구나. 예전의 그가 아니다.'
곡운성은 새삼 그가 현 무림맹의 실질적인 이인자라는 점을 상기하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별말씀을."
정풍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러한
표정과는 달리 이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적지 않은 충
격을 받고 있었다.
'이자......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졌구나!'
그와 곡운성과의 인연은 벌써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남창지부에서 만나 비무를 한 것이 최초의 단남이었고, 이후로
무이산
에서 북무림의 전면침공에 맞서 함께 싸
워온 사이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독고무적을 도와 무림맹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곡운성을 대한 적이 있었다.
'대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변해 있다니......!'
정풍의 가슴 깊은 곳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강렬한 무엇이 솟구켰
다.
그렇다.
정풍이 곡운성의 놀라운 변화를 대하고 느끼는 감정은 담정의 그것과
는 달랐다. 그것은 일체의 호의를 배제한 호적수로서의 팽팽한 긴장감
이었다.
정풍은 곡운성이 변모해가는 모습을 대할 때마다
오히려 불같은 투지
가 끓어오름을 느끼곤 했었다. 그건 반드시 남창지부에서의 비무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곡운성은 언제나 당당하기만 하다. 그러한 곡운성의 기개
는 이 순간에도 거대한 무형의 압력처럼 정풍의 숨통을 죄어왔다. 그
것은
또한 독고무적의 그늘에 묻혀 숨을
죽이고 지내온 정풍으로선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였올까?
정풍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이 회합이 결코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올.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심을 감춘 채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
다
"괄목삼일이라더니 곡 장문인께서는 매번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
끼게 하시는구려."
"무슨 뜻이신지?"
"매번 대할 때마다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하셨음을 느낄 수 있음이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갰소?"
곡운성은 담담하게 미소했다.
"과찬이시오. 내 미미한 변모가 어찌 정 각주의 활약에 비할 수 있겠
소? 당금 무림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각에 대해 모르는 인믈
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오."
비록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는 하나 곡운성의 어투는
차가운 기운
을 담고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조용히 말올 이었다.
"천각의 법은 무림맹의 모든 법에 우선한다는
말까지 들려 오는 것을
보면 정각주의 활약을 능히 짐작할 수 있소이다."
"........."
정풍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근히 말 속에 뼈가 담겨 있지 않은가.
하나 정풍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 말을 무시하며 옆에 앉아 있
는 두 사람을 소개했다.
"우선 곡 장문인께 이들을 소개시키는 게 순서인 듯하오."
곡운성은 이미 정풍과 대화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주의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두 명의 기개가 심상치 않았던 때문이었다.
정풍의 좌측에 있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쪽은 용불군이라 하고......."
그러자 오른쪽의 청년이 이내 포권지례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주청산이오."
곡운성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용불군이라는 청년은 매우 온화해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으나, 두
눈 깊은 곳에서 잔잔한 신광이 일렁이고 있어 깊은 심기를 지닌 인물
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반면에 스스로를 주청산이라고
밝힌 청년은 이글거리는 눈빛에 바윗덩
어리처럼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패도적인 기도는 결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청년은 서로 상반된 듯하면서도 어딘가 공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냈
다.
곡운성은 그런 두 청년의 모습에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정풍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무천군에서 가장 걸출한 인재들이오. 그야말로 무림맹의 후대를 이끌
어갈 기재 중의 기재들이라고나 할까요."
정풍은 두 사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곡운성은 빙그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각주께서 굳이 말씀하시지 않았어도 한눈에 인중지룡의 인재들이
라는 걸 느끼고 있었소."
".........."
주청산과 용불군, 두 사람의 시선이 그 순간 곡운성익 눈길과 허공떼
서 무섭게 뒤엉켰다. 순간
곡운성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
다.
용불군과 주청산에 대한 곡운성의 인상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때
시녀들이 슬상을 들여왔다.
서로 권주를 하는 가운데 좌증의 분위기는 적이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포장된 분위기일
뿐, 실상은 팽팽히 당겨진 활
시위처럼 긴장감이 감도는 자리였다.
문득 정풍이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곡운성에게 말했다.
"해남파의 전경을 구경하고 싶은데 장문인께서 안내해주실 수 있겠소
?"
곡운성의 눈가에 짧게 이채가 스쳤다. 정풍은 지금
독대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대일로 담판을 짓자는 것 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렵지 않소."
곡운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곡운성이 정풍과 따로 자리를 마련한 곳은 영빈청과 다소 떨어진 수월
각이었다.
호수 위에 달이 걸리면
그 달은 다시 호면에 비쳐져 두 개의 달이 지
상과 하늘에서 마주본다.
그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너무도 맑은 푸른 믈결
그래서 수월각이라 이름 붙였던가!
정풍은 주위의 뛰어난 풍광에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나 곡운성과
마주앉기 무섭게 그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졌다.
"곡 장문인께서는 무림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곡운성은 이미 정풍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는지라 말을 흐렸다.
정풍이 정색했다.
"무림맹은 전무림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단체요. 하나 기실 그 동안 썩
어빠진 무리들이 무림맹을 욕되게 했음은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
정풍의 전신에서 점차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고 맹주께서 무림맹을 맡은 이후 대대적인 개혁이 성공했다
는 걸 부인할 무림인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오."
"............"
"작금의 무림 정세는 무림맹이 황실을 비롯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 또한
북룡맹과의 전쟁을 대비해야만 하는 상황이오."
"............"
곡운성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미 정풍이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풍은 곡운성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
무림인들은 일심으로 단결해야만 할 것이오."
정풍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곡운성이 어찌 모르랴?
정풍은 무림맹의 일에 일체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해남파를 질책하
고 있는 것이다.
정풍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이었다.
독고 맹주께선 이번에 개최되는
구대문파의 회합에 곡 장문인께서도
동참해 주시길 원하고 있소. 새로운 무림의 역사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시면서 말이오."
곡운성은 정?이 말을 마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극히 차분한 태도였으나 그의 입에서 홀러나오고
있는 내용은 무림
맹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였다. 그는 무림맹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열거했으며, 심지어 독고무적에 관한 평가
를 서슴지 않았다.
"결론을 내린다면.... . 아무래도 독고 맹주의 뜻과 우리의 입장은 서
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오."
".........."
정풍의 얼굴이 화강암처럼 굳어졌다.
곡운성은 정풍의 표정이 무서우리만치 굳어진 걸 무시한 채 말올
이었
다.
"먼 길을 오신 정풍 대협께는 실로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해남파에서는
이미 이번 구대문파의 회합에 대해 불참을
결정했소."
".........."
정풍의 얼굴에 일순 불쾌해 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곡 장문인께서는 진정으로 무림의
일에 영원한 방관자가 될 셈이시오
?"
"방관이 아니오."
곡운성이 잘라 말했다. 그는 정풍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본인을 비롯해 해남파의 모든 사람들은 무림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
소. 단지 무림맹의 독고 맹주와 뜻이 서로 다를
뿐이오."
"설마 곡 장문인의 그 결정이 장문인을 비롯해 해남파 전체에 엄청난
블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을 터."
싸늘한 정풍의 말에 곡운성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난 외부의 압력에 뜻을 굽히는 건 무인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
람이오."
"............"
정풍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곡운성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불을 토할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하나 곡운성은 담담하게 정풍의 시선을 맞이했다.
'이자......!'
정풍은 내심 놀라지 않올 수
없었다.
불현듯 곡운성이 너무 커졌다는 느낌이 그의 전신을 뚫고 지나간다.
처음 곡운성을 만날 때부터 이미 곡운성과 자신이 알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기분을 느낀 정풍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곡운성은 실로 정풍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너무도 거대해져 있었던 것이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주청산은 붉은 노올을 등에 진 채 흘로 화원을 거닐고
있었다. 이 순
간 그의 신색에는 화강암처럼 강인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해남파가 비록 구대문파 중 하나라곤 하지만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
주청산의 얇은 입술 끝에 불현듯 한줄기 냉소가 떠을랐다.
'전대 장문인 적인풍이 남해지방에선
이름을 떨쳤는지 몰라도 중원 전
체로 볼 땐 실로 하잘 것 없는 인물이 아니던가!'
천하를 놓고 볼 때 해남파는 실로 미약한
존재라는 게 주청산의 생각
이다. 한데 그 조그마한 문파에서 무림맹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주청산은 무엇보다도 힘의 논리를
믿어왔다.
강한 자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약한 자는 따라야 한다. 무림맹은 강자
이고 해남파는 약자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의 불균형이 거기에
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청산
은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무림을 강한 자가 다스리는 건
대자연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다. 거기에 무슨 다른 논리가 필요하단 말인가?"
주청산
호남성 상강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이름 없는 무인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념과 야망이 대단한 소년이었다.
부친의 무술로
만족하지 못한 그가 무술 수업을 위해 천하를 떠돌기
시작해 남칠성 북육성을 유랑하며 수많은 무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십사 세 때의 일 ...... 그는 어떠한 무술이라도 순식
간에 습득하는 놀라운 재질을 지니기는 했으나 그 많은 무술 중 그를
만족시킨 무공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실로 우연히 하나의 기연을 만나게 된다.
어느날 대설산에 접어들어 길을 잃고
혜매다가 눈사태를 피해 들어간
동굴 안에서 신륜경이라는 책자와 비천금륜이라는 두 개의 무기를 얻
었던 것이다.
신륜경에는
실로 가공할 무공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비천신륜십삼절!
이 비천신륜십삼절은 사백 년 전, 송나라 때 한 쌍의 륜로 천하를 휩
쓴 륜왕 소만용의 무공이었다.
광세기연을 만난 주청산은 광야의 동굴 안에서 오 년간 수련한다. 그
러나 륜왕 소만용의
놀라운 광세기학을 연마하기에는 그의 기초가 너
무도 부족했다.
어느 정도의 성취에 달하자 한계에 부딪친 주청산은 결국 하산하기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당시의 무림은 남북무림의 전쟁이 끝난 극도의 혼
란기였다.
주청산은 무림정세를 대략 파악하게 되자
거침없이 무림맹의 무천군에
투신했다. 무천군에 소장되어 있는 무공을 통해 기초를 다지려는 의도
적인 행동이었다. 이후 그의 무공은
일
취월장해서 무천군의 수많은 인재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게 된다.
주청산이 무림맹의 오염에 대한 연판장 사건에 휘말린 것 역시
무천군
의 젊은 기재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후에 독고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가 독고무적의 편에 합류해
공을 세
우고 결국 무천군의 실력자로 부각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랄
수 있었던 것이다.
상념에 잠겨 화원을 거닐던
주청산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한적한 죽
림에 당도했다.
너무도 한가로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기는 곳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멀리 왔구나."
주청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몸올 돌리려 했다.
하나 그는 문득
이채를 머금으며 몸을 멈추지 않을다.
십여 장 전방, 낡은 흑의차림의 오십대 인물이 한 자루 검을 늘어뜨린
채 언제부터인가
석상처럼 황혼을 마주한 채 우뚝 서 있었다.
한데 그 자세가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검의 손잡이가 아닌 검날 끝을 잡고
있었다. 더욱이 그 검날은
자신의 목을 향해 겨누어진 상태였다. 실로 해괴한 자세가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노인의
전신에서는 거대한 산악을 연상
케 하는 기도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흑의 초로인은 바로 철목영이었다.
"..........?'
주청산은 철목영의 이해할 수 없는 자세에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
들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이내 멈춰지고 말았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강력한 무영의 살기가 전신을 눌러온 것이었다.
'실로 놀랍구나. 칼끝은 노인의 목을
향해 있는데 어찌 이토록 강렬한
살기가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때였다.
"틀렸어. 또 틀렸어!"
흑의노인이
돌연 긴 탄식과 함깨 검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주청산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무어라 혼자 중얼거렸다
"이게 아니야......! 이래서는 절대로 이를 수가 없어."
주청산은 혹의노인이 자신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걸어가는 것올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철목영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하나 그의 눈및은 여전히 깊은 생각
에 잠겨 있었다.
주청산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해남파의 사람이시오?"
"..........."
그제서야 철목영의 눈에 언뜻 변화가 스쳐갔다. 마치 이제 처음으로
주청산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너는 누구냐?"
철목영은 기실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성품인지라 장로가 된 후에도 해
남파의 일에 일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무림맹의
고수들이 해
남파를 방문해 머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였는데.......
주청산은 철목영의 거친 태도에 검미를 찌푸렸다.
하나 상대가 누구인
지 알 수 없어 말투만은 정중했다.
"본인은 무림맹의 주청산이라 하오."
"무림맹에서 왔다면 영빈청에
있지 않고 왜 이런 곳까지 돌아다니느냐
!"
"............"
일순, 주청산은 말문이 막혔다.
무림맹의
손님이라는 신분을 밝혔음에도 볼구하고 철목영의 거친 태도
는 추호도 변함이 없지 않은가?
"어서 썩 영빈청으로 돌아가거라!"
철목영은 차갑게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주청산의 굵은 눈썹이 꿈톨 경련을 일으켰다.
스슷!
그의 신형이 소리없이
미끄러져 철목영의 앞올 가로막았다.
호승심이 강한 그로서는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두눈을 무섭게 빛내며 정중하게
포권했다.
"본인은 노인장의 기도를 대하고 실로 놀람을 금할 수 없소이다. 그래
서 한수 하교를 부탁드리고자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시길."
철목영은 그제서야 새삼 주청산의 위아래를 흘어보았다. 허나 그는 이
내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수
하교를 부탁한다고? 남의 집 안방에 들어와 대뜸 고하를 결해보
자니 참으로 천방지축이로군. 돌아가라. 난 그리 한가로운 사람이 아
니다."
철목영의 태도는 단호했다.
하지만 주청산은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이미 허리춤에서 비천금륜마저
꺼내 썬 채 당장이라도 공격을 시
작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철목영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호승심이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한 녀석이로군."
"..........."
단지 자신을 바라보며 대소를 터트렸을 뿐이다. 하나 그 순간 주청산
은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태산 같은 기운이 그를 압도해 온다. 그는 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허점투성이로 보이는 철
목영의 자세에는 사실 단 한 곳도 빈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주청산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때 철목영이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쿵!
엄청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의 독문무공인 만근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마치
거대한 태산이 눈앞으로 밀려 들어오는 느낌과 흡사했다.
아니 이미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발이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듯 무서운
압박감이었다.
"허허.....,! "
철목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
무서운
압박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주청산은 백지장처럼 안색이 창백해진 채 멀어지는 철목영올 바라보았
다. 그의 전신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받은 건 독고무적 이후로
단연코 처음
이었다. 비로소 주청산은 해남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 성급했음
을 깨달았다.
멀어지는 철목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의 두눈에 섬광 같은 광채가
어렸다. 비록 순간적으로 위축을 당하긴 했지만 이 순간 그의 마음속
에서는 무서운 호승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수중의 비천금륜을 불끈 움켜쥐며 맹세했다.
"언제고 반드시 당신을 꺾는다! 반드시!"
정풍과
곡운성의 회담은 사홀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사흘 동안 정풍은 곡운성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건 곡운성과
해남파를 무림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기보
다는 그 자신의 입지 때문이었다.
이 일이 실패로 끝난다면 후량의 독설을 피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독
고무적의 신임에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곡운성을 설득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풍은 결국 그 사실을 깨닫고 해남파를 떠나지 않올 수 없었다.
정풍이 떠난 후, 해남파에서는 긴급히 중대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전장로들과 수뇌급 인물 삼십여 명이 총동원된 회의였다.
"이제 활시위는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곡운성은 무거운
신색으로 좌중을 쓸어보며 말올 이었다.
"무림맹의 독고무적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본파를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
장로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무겁고 진중했다. 굳이 곡운성의 말이 아니
더라도 이미 앞으로의 상황을
능히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곡운성은 두눈에 은은한 광채를 담은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우리 해남파는 결코 그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 입니다."
적인풍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일센. 지금 이 쟈리에 앉 아있는 시람들 중 어누구도
장문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걸세."
적인풍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로들을 쓸어보았다.
"차라리 검을
꺾을지언정 뜻을 굽힐 수 었다는 장문인의 결정은 무인
이라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할 의기일 터
그러자 장로들이 앞다투어 지지발언을
시작했다.
"이를 말씀이갰소. 무립맹이 당대에 이르러 제문파들을 구속하며 패권
을 꿈꾸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오."
"절대 굴복해서 안될 것이오!"
곡운성은 장로들의 발언을 차례로 경청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단호
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해남파의 이전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할 때라
고 생각합니다."
"............"
"............"
순간 좌중의 모든 인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전 이라면?
그것은 실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
다. 증원의 가장 남단에 위치해 있는 해남파는 그 위치상의 문제로 많
은 손실을 보아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북무림의 전쟁처럼 큰 대변란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오히려
그 피해를 덜 받은 이점도 없지는 않았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무림맹과의 알력에도 어느 정도 여유를 지
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곡운성이 본파의 이전을
언급했다는 건 곧 중원의 심장
부로 진출해서 모든 문제에 직접 부딪치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
는가?
"당금의 무림정세를
놓고 볼 때 더 이상 본 해남파 역시 고립될 수 없
다는 게 본인의 판단입니다."
곡운성은 좌중의 인물들이 느끼는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있게 말
을 이어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
의 표시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해남도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미래가 없습니다. 안주할
수는 있어도 발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으음........."
적인풍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모용문은 만면에 경이의 ?올 담은 채 곡운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곡운
성에 대해 평소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해온 그조차도 이 순간의 상황은
전척 상상밖의 것이었다.
"본토로 진출한 후에는 어쩔 생각이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중원의 다른 문파들과 연계를 맺는 것입
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문파들과 교류를 맺어 우리 자
신의 힘올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무림맹의 전횡을
막고 그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곡운성의 말은 거기에서 일단락되었다.
좌중에는 쥐죽은 듯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누구도 감히 의견을
내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만큼 곡운성의 제안은 파
격적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본파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
주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엄청난 일인가!
곡운성은 두눈에 날카로운 신광을 발하며
좌중을 둘러보고 다시 입을
떼었다.
"본인은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해남파를 천하 위에 세울 수 있는 적기
라고 생각합니다."
이때였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곡자량이 차분히 입을 열었
다.
"장문인의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긴 하나......
해남파가 언제까지고
무림계의 일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오."
"..........."
"앞으로의 해남파는
무림계의 일부분에 만족할 게 아니라 그 장래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따라서 본인은 장문인의
전격적인 제안에
찬성하는 바이오."
적인풍이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장문인의 제안에 찬성이오."
이렇게 되자 망설이던
장로들 역시 일제히 일어나 곡운성의 뜻에 따를
것을 천명했다.
"장문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찬성합니다!"
곡운성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격동과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뜨
거운 열망이 어린 눈길로 좌증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본 장문인은 최선을 다해 해남파와 무림의 미래를 위해
전력투구할 것입니다."
무림천하에 거대한 ?운을 몰고
올 결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해남파의 일대 변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이 간단한 진리를
누가 모르겠는가!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게
생리이다. 그러나 곡운성의 제안은 오랫동안
해남파의 제자들 가슴 깊
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웅지을 일
깨웠음이니.......
그로부터 해남파의 이주계획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주 장소를 선
정하는 기간은 일년 이내로 결정되었으며 이주에 따른 세부적인 모든
사항은 모용문이 맡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때가 될 때까지 철저한 대외비에 붙여질 것이었다.
"잠시 해남도를 떠나겠다는 것인가?"
적인풍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곡운성이 찾아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 때문이었다.
곡운성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정시했다.
"흑 천은 선생을 아십니까?"
적인풍의 눈이 또 한 차례 크게 뜨여졌다.
"내가 어찌 당대의 대석학이셨던 그분을
모르겠는가?"
"전 그분에게 실로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채 거두
어들이지 못한 그분의 배려가 있습니다."
곡운성은 감회 어린 신색이 되었다.
그는 천은 선생과의 인연을 적인풍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적인풍은
몇 번이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데 아직도 거두지 못한 그분의 배려가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분은 제게 비연장이라는 곳을 찾아가 인재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곡운성은 천은
선생의 유언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적인풍은 크게 수긍하면서도 일면 당흑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력자가 필요하게 되면 소양의
풍운령 기슭에 있는 비연장을 찾아가
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두 명의 인재 중 반드시 한 명만을
선택해야 된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저도 그 뜻올 알 수 없으나 천은 선생께서는 분명 그렇게 당부하셨습
니다. 두 명 모두가
절 따른다면 그 중 한 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으음......"
적인풍이 묵직한 침음을 흘려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천은 선생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실로 대단한 인재임에는 틀
림없을 터...... 장문인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비연장올 찾아가 보는
게 좋겠네."
"그럼."
곡운성이 예를 표하며 몸올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적인풍이
문득 정
색을 하고 당부하듯 말했다.
"장문인, 떠나기 전에 환 사백님을 한번 방문해 주시게."
곡운성은 내심 의아했으나
이내 혼쾌히 대답했다.
"그것이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지금 당장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적인풍의 거처를 나선 곡운성은 곧바로
환일도의 거처인 청죽헌으로
향했다.
환일도는 자애로운 웃음과 함께 곡운성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장문인!"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내 몇 가지 전할 말이 있어 장문인을 기다렸네."
환일도는 신색을 엄숙하게 가다듬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내 이야기는 과거 백여 년 전...... 장문인의 선조이시기도 한 곡청
운 노사께서 천강검법을
창안하셨을 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네."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중대한 이야기임을
느낀 때문이었다.
"그 당시 본 해남파에서 그분의 검법을 수용하지 못했음을 장문인도
이미 알고 있을 터...... 그 이후 본파의
검법은 답보를 면치 못했음
이니. 실로 천추의 한이 될 만한 일이었네."
거기까지 이야기한 환일도는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더니
침묵을 지켰
다.
곡운성의 뇌리에 순간 적하명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스쳐갔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환일도는 평생을 청죽헌에
머믈며 오직 검법만을
연구해왔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곡청운의 천강검법이 해남파에 전
해지지 않은 사실을 안타까워한 인물이었다.
다시 눈을 뜬 환일도가 정색한 채 말했다.
"이제 노부가 감히 해남파의 검법과 천강검법을 비교하여 논하고자 함
이니
장문인께선 허물치 말아주기 바라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첫째 , 해남파의 쾌검은 너무 빠른 변화에만
치중한 나머지 깊이가
없음이 큰 단점이네."
"............"
"반면에 천강검법은 실로 뛰어난 검법이기는 하나
변화를 지나치게 배
제한 것이 또한 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네."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일도의 지적은
추호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
졌다.
해남검법과 천강검법의 차이점이 한초식 한초식, 철저하게 분석되고
있는 것이었다. 평생을 검법 일도에만 정진해 온 환일도의 치밀한 분
석은 곡운성으로 하여금 어떤 경이감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만약에 백 년 전 두 가지 검법이 합일되었다면 단언하건대 지금쯤 해
남파는 사대검파 중 으뜸이 되었을 것이네."
환일도는
긴 장탄식을 발하더니 문득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주게."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 책자를
받아들었다. 책자의 표지에는 환일
도가 직접 쓴 듯 용필휘지의 두 글자가 제호로 붙어 있었다.
<천관>
"그것은
평생 동안 쾌검의 묘리만을 연구해온 내 삶의 흔적일세."
환일도는 감개무량한 신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 속에는 모든 단점을
제거한 완벽한 쾌검의 정해가 적혀 있네. 하
나 안타까운 건 이 늙은이가 그것을 창안해 내기는 했으되 너무 늙어
수련할 수가
없다는 점이네."
곡운성을 바라보는 환일도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것은 어떤 열망과
기대의 빛이 담겨 있는 시선이었다.
"만약 이것을 체득한 후 천강검법과 합일시킬 수만 있다면 무림사상
가장 뛰어난 검가를 이룰 수 있올 것이네."
나직한
가운데 확고한 신념이 배어 있는 한마디, 오오, 실로 엄청난
이야기가 아닌가?
환일도는 자신의 삶을 바쳐 탄생시킨 비급
<천관>을 이용한다면 무림
사상 가장 뛰어난 검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한 것이었다.
"............"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어져 있는 책자를 내려다 보았다. 환
일도가 평생을 고수체득한
쾌검의 정해가 담겨 있는 책자, 그것을 자
신에게 전해주는 그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곡운성의 전신을
전율처럼 훑어내렸다.
'이 어른은 이토록 내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시는가.......'
어디 환일도 뿐이겠는가. 곡운성은 근래에
해남파의 모든 인믈들이 오
직 자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실로 어깨가 무겁구나.'
그러나
그러한 그의 중압감은 이내 환일도의 기대를 결코 저버릴 수
없다는 새로운 각오로 변해 불타올랐다. 그는 두눈에 단호한 결심의
빛을
담은 채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신명을 다 바쳐 고귀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네, 장문인!"
환일도는 빙그레 웃으며 곡운성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곡운성은 그의 주름진 얼굴이 참으로 눈부시다고 느꼈다.
이튿날
곡운성은 해남파를 출발했다.
그는 단 한 명의 호위무사들도 거느리지 않은 채 해남도의 포구에서
배에 올랐다. 오직 등비만이 그를
마중하기 위해 따라왔을 뿐이었다.
배는 사흘 후 광서성의 대아에 당도했다.
곡운성은 등비와도 작별한 후 육로를 택해 강서성 쪽으로
행로를 잡았
다. 해남파 장문인의 신분을 지닌 채 다시 밟은 중원의 땅은 그로 하
여금 새로운 감회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천은 선생이 마지막으로 유언올 남기던 모습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
생하게 느껴진다.
......언제고 너익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몇 명의 조력자
가 필요할 것..,... 풍운령의 비연장을 찾아가면 두 명의 인재가 있올
것이다. 명심해야
할 젓은 반드시 둘 중 한명만을 선택해야 된다는 점
이다. 만약 둘 모두를 택하게 되면 천리가 어긋나 대파탄에 이를 것인
즉 둘
모두 너를 따른다면 둘 중 한 명을 죽여야 할 것이니라.....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순간까지도 천
은 선생의 말올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연장을 찾아가보면 뭔가 알 수 있올테지.'
곡운성은 복잡한 상념을 정리한
후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긴 여행길이 이어지는 동안 열흘이 다시 지나갔다. 곡운성은 광서성을
벗어나 강서성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행 도중 그는 적지 않은 무림의 풍문들을 들올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한두 명의 무인들은 있기 마련이었고, 그런 자리에서는
반드시 무림의 온갖 소문이 화제로 올랐다.
한데 강서성의 한 주루에서 휴식을 취할 무렵이었다. 곡운성은 옆자리
의
무림인들이 바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알았다.
"자네 해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으로 천의인협 곡운성이 즉위했다는 사
실을 알고 있나?"
"그걸 왜 모르겠나!"
주루의 입구쪽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섯 명의 무림인, 그들은 한결같이
청의
차림에 붉은 수실이 매여져 있는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한
눈에 보아도 표믈들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표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천하각지를 움직여야 하는 표사들은 원래 세간의 소문에 가장 정통한
부류의 인믈들이다.
"천의인협 곡운성
대협은 벌써 청성파의 신임장문인인 청무군 담정과
함께 중원쌍정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처지일세. 두 사람이 모두 젊은
장문인인 데다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중원쌍정이라고?"
"이런 아직도 그걸 몰랐다니, 자넨 도대체 귀가 있건가, 없는
건가?"
"........."
"그뿐이 아닐세. 천일비의 아들인 천세명이 해남도를 장악하려다가 천
의인협 곡운성에게
격퇴되어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는 건 이제 세 살
먹은 아이들도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
이네."
"흐음,
중원짱정이라......!"
표사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 열을 올리며 곡운성과 담정에 관한 무용
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곡운성은 입가에 쓴웃
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어느새 내게 또 다른 별호를
붙여준 모
양이로군.'
그때 표사들 중 가장 젊어보이는 인물이 느닷없이 엉뚱한 이야기를 꺼
냈다.
"빌어먹올,
무림맹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
".........."
표사들은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안색이 굳어진 채 주위를 황급히 돌아
보았다.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청의노인이 눈살을 쩡그리며 나직히
나무랐다.
"소삼,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황천으로
가는 수가 있다."
그 음성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조차 듣기 힘들 만큼 미약한 것이
었다. 그러나 백 장 밖의 낙엽 흔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곡운성
의 청력이 아니던가.
노인은 주위를 힐끗 둘러보았다. 객잔 안에는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더 있었으나 모두 장사치들이었다. 노인의 시선이 구석자리에 앉아
있
는 곡운성에게 옮겨졌다. 그러나 등올 돌
린 채 음식을 들고 있는 곡운성의 조용한 모습은 특별히 신경이 갈 만
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조심스럽게 말올 이었
다.
"무림맹의 횡포를 모르는 사랍이 누가 있겠느냐? 그러나 천각의
정보
망이 천하 곳곳에 심어져 있음을 항상 명심하도록 해라. 잘못하다간
무서운 살신지화를 입게 된다."
좌측의 중년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한데 천각이 무림맹이 아닌 황산에 따로 장원왼을 지어 이전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듣자하니 황산에
지어진 천각은 철혈의 성이라고 블리
운다더군요."
"............."
청의노인의 안색이 무겁게 경직되었다. 그는
두려움이 배인 어조로 음
성을 더욱 낮추었다.
"사실이네. 무림맹에 항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곳으로
끌려간다는군. 일단 그곳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없다네."
그 말을 들은 표사들의 얼굴이
일제히 두려움과 긴장의 빛으로 물들었
다.
청의 노인은 한줄기 장탄식을 발하며 말올 이었다.
"천각을 이끌고 있는 정풍이란
자는 실로 무서운 인물일세. 그는 전무
림에 수백여 개의 비밀 조직을 만들어 놓았지. 그 비밀조직들을 통해
천하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무
림맹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나 단체는 사전에 가차없이 제거하고 있는
것일세."
청의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연달아 세 번의 슬잔을 비워냈다. 마치 무
거운 마음을 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러한 마음은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곡운성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천각의 악명이 그토록 높았던가!'
곡운성의 심기는 천근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표사들 중 한 명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북룡맹의
백한령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북무림의
전쟁이 끝난 후부터는 아예 그에 대한 소문조차 없으니 말입니다."
순간 곡운성의
눈가에 미세한 파랑이 일었다.
지난날 선하령에서 백한령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겪어본 곡운성이 아
니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청의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올 열었다.
"글쌔, 소문으로는 무이산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뇌부에서
물러났다는 말도 있네만...... 그보다는 백한령이 북도무림 내에서 너
무 비중이 커지는 걸 두려워 한 천일비가
미리 제거시켰다는 소문이 더 신빙성 있게 여겨지네."
"그럴 수가?"
" 천일비가 제거했단 말?입니까?"
표사들이
홈칫 놀라며 서로의 눈올 마주보았다.
한쪽 식탁에서 무심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곡운성 역시 내심 놀라지
않올 수 없었다.
청의노인의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백한령을 따르던 측근 고수들이 모조리 숙청당한 걸로 봐선 거의 확
실할 걸세."
표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떠올렸
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요즘들어 표물을 약탈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성
토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화제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었다.
곡운성은 음식을 들던 젓가락을
놓고 잠시 상념에 잠겨들었다
'시간이 문제일 뿐, 이 상태로 가다간 남북무림은 반드시 또 한 차례
엄청난 전쟁을 치르고야
말겠구나.'
당금 천하정세를 한마디로 논한다면 남무림에서는 무림맹이, 북무림에
서는 북룡문이 언제고 닥쳐올 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분하에 각자 패도
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선 전횡을 서슴지 않는 점에서, 북룡맹의 천일비나 무림맹
의
독고무적은 서로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곡운성은 새삼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무림은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무도를
닦는 모든 무림인들의 터
전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또다시 패도무림을 꿈꾸는 자들로 인해 시
산혈해의 전쟁을 일으키도록 할 수는
없다.'
곡운성은 무거운 마음으로 몸올 일으켜 객잔을 나섰다.
제 38 장 천은 선생의 예언
곡운성은
강서성에 접어든 지 엿새 후에야 풍운령에 당도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정작 목적지에 당도한 그는 이내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말
았다.
근처 일대의 사람들 중 비연장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단 한 명
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모르는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비연장에
대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십중팔구 곡
운성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풍운령의 초입에서 맨 마지
막으로 만난 나무꾼은 그래도 친절한 편에 속했다.
"풍운령에 장원이 있단 말이오? 에이, 이보슈! 풍운령은 지세가 너무
험해서 나는 새도 앉지 않는 곳인데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곳에 장원을 짓는단 말이오!"
나무꾼은 그렇게
떠들어대고는 뒤도 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곡운성은 갑자기 골치가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천은 선생
이 허튼 소리를
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별수없군. 풍운령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비연장을 찾아 내는 수밖에..
....'
곡운성은 지체없이
풍운령의 정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천공을 뚫고 솟아오른 풍운령의 거대한 주봉은 마치 수십 개의 검날을
차례로 포개놓은 듯
날카로운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친 석림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보기 힘든 죽음의 오지..
....
계곡 아래쪽에서 소용돌이쳐 을라오는 돌개바람은 돌가루를 휘날
리며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황량하다 못해 귀기롭게 느껴지는
곳이구나!'
곡운성은 주위 일대를 차례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친 암벽틈을
오가며 아무리 살펴보아도 장원은 커녕 오두막집
하나도 보이지 않았
다. 시간이 점차 흘러 어둠이 내려앉았다.
곡운성은 별수없이 바람을 피할 만한 바위틈을 찾아 노숙을 해야만 했
다.
이튿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곡운성은 다시 풍운령을 샅샅이 살피기 시
작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곡
운령을 몇 차례나 오르내렸지만 장원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곡운성은 내심 낙담한 가운데 다시 거친
바위틈에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정말 이상하구나. 천은 선생께서 잘못 말씀하셨을 리는 없고......'
그렇게 또다시
삼 일이 흘렀다.
그러나 곡운성은 지치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풍운령을 수색하고 있었
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오기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때문
이었다. 그는 아예 풍운령의 지세를
눈감고도 외울 지경이 되었다.
'기막힐 일이군. 더 이상
찾아볼 곳도 없는데.......'
곡운성은 문득 신형을 멈추고 멍한 신색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막
서쪽 하늘로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붉은 노을로 물든 구름이 마치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천은 선생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곡운성은 그 순간 갑자기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차
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계곡 저편으로 한 촌로가 모습을 나타냈다. 약
초바구니를 든 그 노인은 곡운성을 보고 멈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젊은이는
누구신데 이런 곳에 있는 것이오?"
곡운성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
"소생은 곡운성이라고 하며, 이 풍운령에 있다는 비연장이라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비연장이라고 했소?"
촌로는 눈살을 쩡그리더니 고개를 내흔들며 말올 이었다.
"이곳
풍운령에는 사람이 살지 않소. 나는 이곳에서 오십년 동안 돌아
다녔기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모르는 것이 없지만 비연장이
라는 곳은 보지 못했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흑 오랜 옛날에라도 사람이 살던 곳이
없었습니까?"
"글쌔...... 오십 년 전이라면 사람이 살던 곳이 있었소만."
"그곳이 어디입니까?"
곡운성은 흑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촌로는 회상에 잠기며 두눈을 내리감더니 자신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
다.
"풍운령의 남서쪽 계곡 안에는 수만 그루의
백양목들이 자라고 있는
데......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비씨 일족과 연씨 일족들이
살고 있었소."
"비씨와
연씨 일족들......?"
곡운성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바싹 긴장하고 말았다. 비와 연. 기묘하
게도 그 두 개의 성씨는
비연장이라는 이름과 딱 일치하고 있지 않은
가?
촌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나 오십 년 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곳
사람들이 몽땅 떼죽음을
당해버렸다오. 그 뒤로는 절대 누구도 그곳에는 가지 않소야다. 대낮
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오."
"그곳이 어느쪽입니까?"
곡운성은 솟구치는 홍분을 누르머 항급히 물었다.
촌로는 고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탄식하듯 대답했다.
"방향이야 갸르쳐 즐 수 있소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오. 폐허
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이오."
촌로가 말한 백양목 숲을 찾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풍운령의 남서쪽
계곡 아래에 군집을 이루고
백양목 숲은 하늘을 완전히 가릴만끔 울창
했다.
휘익!
곡운성은 발도 내딛기 힘든 우거진 백양목 숲을 혜매기
시작했다. 그
러나 촌로의 말대로 폐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이한 일이로구나! 아무리 세월이 홀렀어도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
다니......'
곡운성은 재차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어떤 흔적을 찾아
낸다
하더라도 죽은 귀신만이 살고 있는 곳에서 누굴 만날 수 있단 말
인가?
곡운성은 잠시 망설이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계곡 안을
뒤져보기로
결심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
을 발견했다.
".........."
그의 시선은 유난히 거대한 한 그루의 백양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백양나무는 워낙 크고 모양이 괴이해서 한눈에 기억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착각이었올까?
곡운성은
계곡 안을 혜매는 도중 그 백양나무와 똑같은 형태와 크기를
지닌 나무를 몇 그루 더 목격한 느낌이었다.
'블가능한 일이다! 수백
년을 자라온 나무들이 어찌 가지 모양새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자랄 수 있단 말인가?'
곡운성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
주위의 나무들을 자세히 살
피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
백양나무는 오십 보 간격으로 일정하게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나무
를
등지고 다시 걸어도 오십 보 뒤에 다시 그
나무는 여전히 전면에 보이는 것이다.
"이, 이건......!"
곡운성은
그제서야 퍼뜩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그는 숲 전체를 수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일
정한 구역만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진법이다!"
그렇다.
그 수수께끼는 바로 진법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진법 안에서 같은 장
소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진법은 어떤 환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경물이 바뀌어 한자리에서 맴돌게 되어 있구나.'
곡운성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예의 거대한 백양나무에 표시를 해놓고 다시
걸음을 옮겨 보았
다. 역시 정확히 백 보 뒤에는 다시 그 나무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야단났구나.
대체 이 진법을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곡운성은 기막힌 심정이 되어 망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로 번뜩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는 황급히
품안을 뒤져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들었다.
바로 남황신타 육자홍이 넘겨준 천둔신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
자홍으로부터 이 천둔신서를 받은 후 그 동안 대충 몇 번 흩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해남파에서의 일이 워낙
많았고. 어쩌다 시간이 나도
무공일도에만 전념하느라 그 내용을 자세히 연구해 본 적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천둔신서를
보아둘 것올....'
곡운성은 후회막급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천둔신서를 읽고 이곳의
진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원래 천둔신서는 고대의 기인인 귀곡자가 남긴 것으로서, 그 내용이
너무도 심오하고 난해해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학문이 절대 아니었
다.
하나 달리 방법이 없는 걸 어찌하겠는가?
곡운성은 바닥에 편한 자세로
앉아 천둔신서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천둔신서에는 모두 이백여 가지의 진법에 대해 수록
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신기막측한 내용
으로서 천지간의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들이었다.
그중 어떤 것은 한 개의 진법을 터득하는 데에만 몇 달, 몇
년의 세월
이 걸려야 하는 실로 심오한 내용이었다.
곡운성은 일단 진법의 의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흘
후,곡운성은 백양림 전체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걸 발견해냈
다.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자라난 백양목들이지만, 한 그루 한 그루 그
배치와 방위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심어진 것이었다.
다시 이틀 후, 곡운성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백양목 숲에 펼쳐져
있는 진볍을 천둔신서에서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구구종횡연환진>
그것은 도합 여든한 가지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진법으로, 외부의
침입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막기만 하는 데에는 가장 적절한 진법이
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곡운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치 사막에서 믈을 찾아낸 기분이라고나 할까. 곡운성은 흥분을 가라
앉히며 이내 백양림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는 천둔신서에 나타난
진법의 원리대로 일일이 숲의 형세를 책자와 대조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연 백 보가
지났음에도 블구하고 표시해 놓았던 백양나무
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올까?
실로 놀라운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맙소사,.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단 말인가?'
믿올 수 없게도 넓은 부락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림처럼 아름
다운 부락의 전경은 풍운령의 거친 산세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속세와는 다른 별세계라고나 할까. 무
려 수백 호에 달하는 인가들 사이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
다.
'설마하니 이토록 큰 부락이 숨겨져 있을 즐이야!'
곡운성은 한동안 움직일 즐 모른 채 평화스러운 마을 전경을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풍운령의 깊은 숲속에 이런 마올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
가? 곡운성은 새로운 기분에 사로잡힌 채 다시 걸음올 옮겼다.
마을은 어느 한 구석 잘 꾸며지지
않은 곳이 없올 만큼 단정하고 아름
다워서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낯선 외부인이
들어왔음에도 블구하고 아무도 곡운성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곡운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갔다.
'거 참 묘하군.'
곡운성은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청년에게 예를 취했다.
"실례하겠소만...... 비연장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청년은 힐끔 곡운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청년은 일체의 대꾸도 없이 그의 옆을 지나가
버렸다. 머쓱해진 곡운성은 이번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남자
를
향해 다시 입올 열었다.
"비연장을 찾아왔......"
곡운성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말을 걸었건만 중년
사내는 마치 그를 보지 못한 듯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곡운성은 내심 기막히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다시 몇번이나 지
나가는 사람을 향해 말을 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곡운성은 괴이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재차 의혹의 ?이 솟아났다.
'그러고 보니 오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구나.'
더욱 더 이상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점이었다. 게
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있으나, 함께 행동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이리저리 흘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오두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분명히 눈앞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가끔씩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을 뿐, 마을 전체가 마치 무덤 속같
이 적막하고 괴괴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곡운성은 당혹과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계속 마
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그 사이에도 계속 같은 상황만이 반복
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마을을 벗어난 걸 깨닫고 홈칫 놀랐다.
맑은 개울믈이 흐르는 작은 내
상류쪽으로 작은 폭포 하나가 보였다.
폭포 아래쪽에는 널따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위에서 두 명의 노
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곡운성은 처음으로 두 사람이 뭔가를 하는 것을 발견하자 반갑기까지
했다. 그는 재빨리 두 노인에게 다가가 정중히 입올
열었다.
"두 분 노인장께 잠시 여쭙겠습니다."
두 노인은 묵묵히 바둑판만 내려다볼 뿐 아무런 반옹도 없었다. 흑시
나
하고 기대를 걸던 곡운성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삼 두 노인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좌측에 앉아 있는
노인은 황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마치 대나무처럼
깡마른 데다 그 피부 또한 고목나무의 껍질처럼 피폐해 있어 실로 나
이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하나 바둑판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두눈에서는 날카로운 신광이
어려 있어서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인믈임이 분명했다.
맞은편의 자의노인은 화색이 감도는 붉으스레한 얼굴에 긴 수염을 단
전까지 늘어뜨린 모습이 그야말로 신선의 풍도라 할 만했다.
곡운성의 눈길은 다시 바둑판으로 옮겨졌다.
금사도에 있을 때 그는 모용문과 바둑을 즐겼었다. 모용문의 바둑 실
력은 무척
강해 번번이 패하기는 했으나, 덕분에 바둑에 대해서는 남
들에 결코 뒤지지 않올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곡운성은 바둑의 형세를
살피기도 전에 이상한 점올 발견했다.
놀랍게도 두 노인은 모두 흑돌을 쥐고 있지 않은가?
'실로 괴이한 일이로구나! 그렇다면
백돌을 놓은 사람은 누구란 말인
가?'
곡운성은 당흑 어린 심정으로 바둑판의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데, 어느 정도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그의
은몸을 휘감아 왔다.
언뜻 보기에 흑백은 팽팽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백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흑의 세력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흑의 세력
은 생로가 전혀 없는 몰살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곡운성은 점차 자신도 모르게 바둑판으로 빠져들었다. 일단 바둑의 형
세에 빠져들자 그는 백의 가공스러운 기운에 소름이
끼쳐옴을 느껴야
했다. 마치 거대한 어떤 형세가 자신의 영혼
조차 욱죄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노인은 여전히 바둑판에
빠져들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접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머리에서는 수중기 같은 하얀 연기마저 솟아나고
있었다.
이때, 한참 바둑의 형세를 살피던 곡운성은 문득 백의 형세가 눈에 익
다는 것올 깨달았다.
'이것은......?'
곡운성은 문득 품속에서 천둔신서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정신없이 책자를 넘기던 그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구나.흑올 에워싸고 있는 진세는 바로 팔문금쇄진이다!'
'생로라고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 가공스러운 진법, 흑돌은
실로
몰살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구나!'
곡운성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둔신서를 품안에 집어 넣었다.
이때, 성격이 급해 보이는
황의노인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파삭!
동시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흑돌이 가루가 되어 없어졌다.
"틀렸어......
틀렸어! 이건 죽는 날까지 해도 풀 수가 없어!"
다음 순간, 황의노인은 와락 바둑판을 집어들더니 그대로 내팽개쳤다.
바둑알과
바둑판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슷!
스스슷!
하나, 자의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바둑판과 흩어진 바둑돌들이 신
기하게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가!
자의노인이 대소를 터트렸다.
"껄껄껄...... 어차피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시작할 것 아닌가! 실로
수많은 세월이 홀렀건만 자네의 그 급한 성정은 여전하구먼."
"으음......."
"지금에 와서
포기한다면 지난 오십 년의 세월이 너무 원통하지 않은
가! 어차피 우리 두 늙은이는 이 반상 위의 돌 같은 처지...... 이것
을 풀지 못하는 한 우리의 인생 역시 흑돌과 진배없네."
자의노인의 말에 황의노인은 벌떡 일어서며 노성을 질렀다.
"난
포기하겠네!"
"포기한다고? 허허헛! 마음대로 하게. 하나 난 절대로 포기할 수 없
네."
"........."
황의노인이 눈썹을 꿈틀 찌푸렸다. 그러더니 그는 길게 한 숨을 내쉬
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이때였다.
곡운성의
낭랑한 음성이 두 노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두 분의 생각이 반상을 떠나지 못하는 한 흑돌은 영원히 난관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두 노인은 그제서야 곡운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황의노인의 눈에서 벼락 같은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네 놈은
누구냐?"
"후배는 곡운성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낯짝이로구나. 외부에서 왔느냐?"
황의노인의 말투는
거칠기 이를 데 없었다. 곡운성은 황의노인의 성격
을 이미 짐작하고 있어 개의치 않았다.
"그렇습니다."
곡운성이 태연히
시인하자 자의노인과 황의노인이 놀람을 감추지 않은
채 서로의 눈올 마주보았다.
자의노인이 확인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는 약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여길 들어오느라 한참 헤매었지요.
그보다......
혹 비연장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곡운성의 질문에 황의노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구구종횡연환진은 우연히 헤매다가 들어을 수
있는 진법이 아니다.
더욱이 비연장이 풍운령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
도 없올 것......."
황의노인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이곳에 비연장이 있다는 걸 알았느냐?"
당장이라도 덮쳐들 듯한
황의노인의 태도에 곡운성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었었다. 하나 결국 천은 선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
는데......
"천은 선생......?"
자의노인과 황의노인의 눈에 곤혹스러워 하는 빛이 스쳐갔다. 곡운성
의 태도는 진솔하기 이를 데
없어 절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한데 천은 선생이라는 이름은 그들로서는 처음 들었던 것이다.
곡운성은 그들의 태도에
아랑굿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비연장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씨와 연씨뿐이다. 다시 말해 이
마을
전체가 비연장인 것이다."
".........."
일순, 곡운성은 난감하지 않올 수 없었다. 마을 전체가 비연장이라면
과연 천은 선생이 말한 두 사람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흑시 이 두 노인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곡운성은 새삼 자의노인과 황의노인을 살펴보았다.
이때, 황의노인이 섬뜩한 눈빛으로 곡운성을 쏘아보았다.
"조금 전에 네놈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느냐?"
황의노인의 질문은 바로 바둑의 형세를 보고 곡운성이 한 말에 대한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하나
곡운성은 짐짓 모르는 체하며 반문했다.
"제가 한 말이라니요? 비연장이 어디 있냐고 물어본 것 말입니까?"
"넌 분명히 우리의
생각이 반상을 떠나지 않는 한 흑돌은 영원히 난관
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과연 그 말뜻이 무엇이냐?"
"글쌔요......"
곡운성이 짐짓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의노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돌연 쥐고 있던 바둑돌을 곡운
성을
향해 던졌다.
쉬이익!
마치 암기가 날아오듯 가공스러운 속도로 바둑돌이 곡운성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바둑돌에 담겨
있는 힘은 무섭기 이를 데 없어
바위라도 꿰뚫을 것 같았다.
스웃!
곡운성은 소리없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바둑돌을 피해냈다.
하나 다음 순간.
패애액!
곡운성의 몸올 스쳐갔던 바둑돌이 호선을 그리며 되돌아와 이번에는
곡운성의 뒤통수 뇌호혈을
노리며 덮쳐 오지 않는가!
'실로 기막힌 암기술이로구나!'
곡운성은 내심 크게 놀라며 진기를 끌어을렸다.
사실 그는
노인들을 통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내기로 마음을 굳히
고 있어 일부러 성격이 급해 보이는 황의노인의 성미를 건드린 것이었
다.
아니나 다를까, 황의노인은 곡운성이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
을 하자 참지 못하고 대뜸 공격을 펼쳐온 것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될쳐진 상황은 완전히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쐐애애?
이번에는 한꺼번에 십여 개의 바둑돌들이 한꺼번에 허공을
가르며 춤
추듯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바둑돌들은 발출된 시기가 제각기
달랐다. 하나 놀랍게도 곡운성의 몸에 격
중되는 시기는 모두 같았고, 또한 요혈만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곡운성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의노인의 공세는 결코 가볍
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천원신공을 끌어올린
후 두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쉬이이익 !
그의
두 손이 수맘은 장영올 만들어내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응천구장을 오성 이상으로 끌어올리자, 이내 그의 주위로는 무수한 장
영이
떠올라 하나의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곡운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던 황의노인은 이내 놀랍
에 찬 신음성을 발했다.
자신의 바둑돌들이 모두 곡운성의 장법에 갇
혀 단 한 개도 돌파하지 못하고 막히고 있지 않은가 !
옆에서 지켜보던 자의노인 역시
놀란 신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의노인이 버럭 노성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구나! 분명 비학, 그놈이 수작을
부리려고
보낸 놈이 분명하다!"
꽈우우!
황의노인은 벌떡 일어서며 한 무더기 쥐고 있던 바둑돌들을 일제히 뿌
려냈다.
엄청난 한망이 곡운성의 전신을 향해 덮쳐왔다.
하나하나의 바둑돌에 담긴 경력도 가공스러웠지만, 그 바둑돌 모두가
곡운성의 전신대혈만을 노리고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뿐이랴!
황의노인은 바둑돌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대붕처럼
허공을 덮쳐
왔다.
곡운성은 응천구장을 극도로 끌어을려 한편으로 허공을 가득 메운 채
덮쳐오고 있는 바둑돌들을 상대하며 또
한편으로 황의노인의 매서운
장법을 막아냈다.
꽈릉!
꽈꽈꽈꽝!
이내 두 사람의 주위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엄청난
경기의 소용돌
이가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곡운성은 더욱 황의노인의 무공에 경이심
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무공은 그동안 대적했던 인물들 중
가장 강했던 천독신군 사천우과 비교해도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이렇게 강한 고수가 있었다니 !'
곡운성은 결코 방심할 수 없음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 응천구장을 펼쳐
냈다.
황의노인의 층격 또한 곡운성에 못지 않았다.
'새파란 애송이가 백 년 가까이 무공만을 연마해온 나와 맞상대를 할
수 있다니!'
게다가 곡운성이 사용하고 있는 무공이 천원신공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 놀람은 극에 달했다.
'도가에서
오래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천원신공을 네 놈이 어찌.
.... .?'
기실 그는 워낙 오랜 세월을 깊은 산중에서만 살아온
탓에 천원신공을
백수범이 얻었으며. 다시 곡운성에게 전수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
했다.
"좋다! 네놈의 솜씨를
보겠다."
더 이상 곡운성을 가볍게 볼 수 없음을 깨달은 황의노인은 전력을 다
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꽈우우우!
고목나무의 껍질처럼 피폐한 황의노인의 손이 벼락같이 곡운성의 가슴
을 향해 덮쳐왔다. 곡운성은 재빨리 응천구장을 시전해 방어했다.
한
데 놀랍게도 황의노인의 공격은 거짓말처
럼 방향을 바꾸며 계속 파고드는 게 아닌가.
'이건!'
곡운성은 황급히
신형을 뒤로 빼내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꽈꽝!
곡운성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펼
쳐내긴 했지만 기혈이 크게 들끓는 충격을 받았다.
거의 동시에 주위에서 끝없이 회돌고 있던 수많은 바둑돌들이 일제히
곡운성을 향해 쏘아져 왔다.
실로 놀라운 무공이었다.
일단 한번 격출해낸 바둑돌들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곡운성의
주위를 회전하며 계속 덮쳐오는 것이다.
'안되겠구나!'
곡운성은 응천구장으로는 더 이상 상대하기가 벅차다는 것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검을 뽑아 들어 덮쳐오는 바둑돌들을 상대했다.
카카캉!
일순, 찬란한 검광이 부?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허공에서 휘돌며 계속 곡운성을 향해 덮쳐들던 바둑돌들이 검날에 부
딪치기 무섭게 베어지거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검강?"
황의노인의 안색이 일시 창백해졌다. 그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몸올 퉁기듯 뒤로 빼내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늦었더라
도 검강에 전신이 양단되고 말았을 것
다.
그러나 어느새 삼장 밖에 물러나 있는 황의노인의 몰골은
낭패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비록 부상은 당하진 않았으나 입고 있던 황의가 갈
가리 찢어진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곡운성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분노와 경악으로 하얗게 변색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황의노인은 안색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히
더니 두 손을 가슴 앞에 끌어모았다. 그
러자 그의 머리 위로부터 횐 연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검강이 비록 뛰어난 무공이긴 하지만 무적이라곤 할 수 없다!"
자의노인이 몸올 날려 황의노인의 앞을 막아선 건 바로 그때였다.
그
는 장탄식을 발하며 무겁게 말했다.
"그만 하게. 호승심을 부리기엔 자네나 나나 너무 늙었네."
"............"
황의노인은 멈칫하더니 이내 복잡한 신색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군."
자의노인은 정색한 채 곡운성을 돌아보았다
"젊은이는 누군가?"
곡운성은 그렇지 않아도 더 이상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던터라
다행으
로 여기며 대답했다.
"후배는 해남파의 장문인으로서 곡운성이라 합니다. 천은 선생의 유명
을 받들어 비연장을 찾아
혜매던 중 실로 우연히 여기까지 오게 되었
을 뿐입니다."
"진정 비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단 말인가?"
"전 비학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오르는데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자의노인의 눈에 다시 의아해 하는 빛이 떠을랐다.
곡운성은 그들이 진정 천은
선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황
급히 말올 이었다.
"제가 이굿에 온 이유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천은 선생께서 인
재가 필요하게 되면 이곳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문득. 자의노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대가 말한 천은
선생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흑시 연조량이 아닌가?"
곡운성은 두눈에 홈칫 이채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천은 선
생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천은 선생이라고만 부를
뿐 아무도 그의 본명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전 그분의
함자를 알지 못합니다."
"혹시 왼쪽 눈썹 위로 콩알만한 붉은 점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곡운성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은 선생의 왼쪽 눈썹에는 분
명 그러한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노인장의 말씀대로입니다."
일순, 두 노인은 약속이나 한
듯 망연자실한 신색이 되었다.
자의노인은 이내 묵직한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곳 비연장 출신이네."
"그런.,...!"
곡운성이 놀라 뭔가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자의노인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할 말은
나중에 하고 우선 우리를 따라오게!"
휘릭!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의노인은 황의노인과 함께 몸을 날렸다. 곡
운성은 두
노인의 태도에 내심 당혹해하면서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노인이 가고 있는 방향은 곡운성이 통과해 온 마을의
반대쪽이었
다.
계곡 안쪽으로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매우 아름다운 풍광속에 수십여
호의 인가들이 보이는 또 다른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곡운성이 통과해온 마을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평화로
운 기운이 홀러나오는 곳이었다.
두
노인은 곡운성을 인도한 채 마을 북단의 외따로 떨어진 통나무집으
로 걸음을 옮겼다. 통나무집 내부는 가구도 거의 없고 아무런 장식품
도 없는 간결한 분위기였다.
곡운성은 이곳이 바로 두 노인의 거처임을 알 수 있었다.
자의노인은 탁자 앞에 앉기가 무섭게
입올 열었다.
"이 늙은이는 연우진이라 하네. 저 사람은 연능강이고......."
곡운성은 새삼 포권지례를 갖췄다.
"블쑥
찾아와 두 분의 수양을 방해한 점올 용서바랍니다."
자의노인. 연우진이 장탄식을 터트렸다.
"자네가 찾는 비연장은 비씨 일족과
우리 연씨 일족으로 이루어져 있
는 마을 전체를 말함이네."
면우진은 곡운성의 궁금함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바로
비연장의 내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백 년 전....,. 비추룽과 연옥풍이라는 기인들이 자신들의 가족들
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해 왔네. 곧 마을 전체을 자신들의 성을 따서
비연장이라 이름 붙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블어났네."
곡운성은 묵묵히
연우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음을 느낀 때문이었다.
"비연장의 비씨 일족과 연씨 일족은 서로 화합하면서
실로 평화롭게
살아왔네. 그러다가 오십 년 전...,.,."
연우진은 격동 어린 신색으로 말올 잇지 못했다. 그는 한참 후에서야
어느 정도 마음의 격동을 가라앉힌 듯 말을 이어갔다.
"오십 년 전...... 실로 무서운 사건이 마올에 벌어졌네."
그때
황의노인 연능강이 불쑥 끼어들며 비통하게 외쳤다.
"빌어먹을! 죽음의 독수를 모두들 희대의 영약인 줄 알았으니......!"
곡운성은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으나 잠자코 그들의 말올 기다렸다.
자의노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것은
샘믈이었네. 그러나 보통 샘물이 아니었지. 놀랍게도 그 샘물
은 한 방울만 마셔도 범인들은 불로장수하고,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내공이 몇 배로 급증된다는 신비의 공청
석유였네."
샘믈 전체가 공청석유였다는 말입니까?"
곡운성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연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야 공청석유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신의 축복이라고 믿고
사람들 모두 그 샘물을 마셨네. 그러자 모두들
내공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무섭게 급중
되었네. 한데 비극은 삼 년이 흐른 뒤부터
시작되었네.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기 시작한 것일세.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신
샘믈이 공청
석유와 비슷하지만 공청석유와는 그 성질이 판이한 음화신수라는 걸
알게 되었네."
"음화신수......?"
"음화신수의 모든 효능은 공청석유와 비숫하네. 하지만 그건 죽음의
독수였네. 체내에 흡수된 지 삼 년이 지나면 그 음기가 몸에
퍼져 죽
음에 이르는 것이네."
"으음!"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성을 흘려냈다.
실로 놀라운 괴사가
아닌가?
"그 한기가 어찌나 차가운지 시체조차 썩지 않을 정도였네. 마을 사람
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수없이 죽어갔네. 결국 마을
사람들 중 구 할
가량이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네."
"치료방법이 전혀 없었습니까?"
"하늘의 도움인지 우리 연씨 일족의 연조량이 치료방법을 발견해내기
는 했네."
"연조량이라면...... 천은 선생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 치료방법이란 그 음화신수가 있는 동굴 속의 샘믈 주위
에서 자라나는 석균을 복용하는 방법이었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균
의 양이 매우 적어 모든 사람들이 복용하기에는 부족했네."
"게다가 석균을 한 달 이상 먹지 못하면 음기가
다시 살아나 결국 죽
음을 맞게 되니 완전한 치료방법이랄 수도 없었네."
곡운성의 얼굴이 불현듯 경직되었다. 돌연 한 가지 섬뜩한
생각이 그
의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석균의 양은 일정하고 그것을 복용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수효가 많다
는
것은......!"
아니나 다를까!
연우진의 입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곡운성의 예측대로였다.
"결국 석균의 분배문제를 놓고
비씨 일족과 연씨 일족간에 치열한 싸
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네. 음화신수의 중독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
들조차 그 싸움에서
대부분이 죽고 마는 무서운 혈전이었네."
연우진의 음성은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한옆에 묵묵히 앉아있던 연능
강 역시 새삼 과거의
끔찍한 혈전을 떠올린 듯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허공만 응시했다.
연우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싸움끝에 비씨 일족과 연씨 일족을 다 합쳐 살아 남은 사람은 블
과 이십여 명 ....., 그제서야 두 가문은 서로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
네."
곡운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이후 계곡 주위에 있는 백양림에
구구종횡연환진을 만들어 외부인
의 접근을 막은 다음 서로가 규칙을 정해 석균을 분배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는 겁니까?"
"'그 뒤로 다시 식구들이 불어나긴 했으나 겨우 백여 명에
블과한 지
경일세."
연우진의 대답에 곡운성은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백여 명......? 하지만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처음 지나온 마을은
규모가 상당히 컸고 직접 본 사람들만 해도 수백여 명은 될 것 같았습
니다."
연우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가 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닐세."
",.... .?"
"자네가 스쳐 지나온 그 마을은
가상의 마을에 불과하네. 살아 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죽음의 마올이랄까,.....!"
곡운성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연우진을 바라보았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비씨 일족의 수장인 비학은 음화신수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썩
지 않는다는 걸 알고 사악한 술법을 이용해 시신들을 강시로 만들었
네."
"강시!"
곡운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우진의 말대로라면
곡운성이 마을에 들어서서 목격한 수많은 인믈들이 모두 죽은 시체가
아니겠는가?
"그 마을은 원래 비연장의 옛 모습이네. 그곳에 비학은 죽은 사람들을
강시로 만들어 영원히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네.
그야말로 죽은
뒤에도 영면을 취하지 못하게 한, 시
신올 모독하는 악독한 처사일세."
연우진은 비분강개한 신색으로 말올
이었다.
"게다가 비학은 사악한 술법으로 강시가 된 그 시신들을 이용해 다시
우리 연씨 일족을 몰살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네. 이
어찌 한탄스러
운 일이 아니겠는가!"
"............"
비연장의 모든 내막을 알게 된 곡운성은 망연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이 순간 한 가지 의흑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한데 어떻게 천은 선생께서는 이곳을 떠나실 수 있었습니까?
석균을
계속 복용하지 않으면 음기가 발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연조량은 바로 우리들의 아우일세. 그는 처음부터 모든 세사를
초훨
해 무공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에만 전념해 왔네."
'이분들이 천은 선생의 형님들이었단 말인가!'
곡운성은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아우는 학문 이외의 모든 것에 초연해 처음 음화신수를 발견했을 때
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것을 마시지 않았네."
"..........."
곡운성은 실로 감복하지 않올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병장수할 수 있고 무공을 익힌 사람
이라면 그 내공이 수 배로 급중되는 신비의 영약이다. 천하의 어떤
사람이 과연 그런 엄청난 효능을 지닌 공청
석유를 대하고도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뒤 연조량은 양가의 끝없는
혈전에 염증을 느끼고 홀연히 이곳을
떠났네."
연우진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곡운성은 그제서야 모든 내막을 알게 되
었다.
연우진이 곡운성을 직시했다.
"한데 연조량이 분명히 이곳에서 가?"
"그렇습니다."
곡운성은 거침없이 천은 선생이
남긴 말을 들려 주었다. 후일 조력자
가 필요하게 되면 이곳 비연장에서 두 명의 인재를 찾아내 그중 한 명
을 선택하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 두 명의 인재들이 모두 자신을 따른다면 그중 한 명을 반드시 죽
이라는 내용은 너무도 충격적인지라 함부로 두
노인에게 말할 수가 없
었다.
사람을 찾으라고 했는
연우진이 길게 탄식했다.
"실로 놀라운 사람이로고.....,
그가 그런 말올 했다면 그중 한 명은
연화가 분명하네."
"연화......?"
"나의 손녀일세. 내 손녀라서가 아니라 그
아이는 실로 하늘이 내려준
귀재임은 분명하네. 비록 여자로 태어나긴 했으나 연조량 이후 우리
연씨 일족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라네."
"아......!"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누굴 말하는 건지 추측할 수가 없군."
연우진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독백성을 흘려냈다.
그러나 곡운성은 그것만으로도 내심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우진은 새삼 만면에 감회와 경이의 빛을 띤 채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연조량은 과연 대단한 예지력을 지녔군. 그가 이곳을 떠날
당시에는 연화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앞날을
예측하고 있었다니.....
.."
연능강이 음울한 신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만은 예측하지 못한 것
갈군."
곡운성은 의아한 신색이 되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연능강은 안색을 무겁게 굳혔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연우진이 처연한 신색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후세들도 음화신수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
실일세."
"..........."
곡운성은 망연히 할 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두 명의 인재 중 나머지 한 명이 과연
누구일까 하
는 궁금중이 일었다. 연우진의 말대로라면 그 나머지 한 명도 역시 음
화신수에 중독되어 있으리라.
이때였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연능강이 곡운성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
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네가 바둑판을 보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이냐? 반상
을 벗어나지 않는 한 흑돌은 영원히 난관을 벗어나지 못한다니.....,
?"
곡운성은 이미 연능강의
거친 성정을 잘 알고 있어 이내 입을 열었다.
"흑돌을 에워싸고 있는 백돌들의 형세는 팔문금쇄진을 형성하고 있었
습니다. 곧 여덟
곳의 생로가 모두 차단된 상태인지라 애써 뚫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로에 깊숙히 빠지게 되어 있는 진세입니다."
연능강의 눈에
어떤 기대의 빛이 물결쳤다.
그는 체면도 무시한 채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걸 파해하는 방법이 있느냐?"
"여러 곳을 포기하면 가능합니다."
곡운성의 대답에 일순 두 노인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하소
곧 그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연능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놀랍군. 놀라워! 연화도 풀지 못한 걸 자네가 알아보다니!"
곡운성은 단지 천둔신서라는 희대의 기서 때문에 바둑판으형세를 알아
낼 수 있었다.
하나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연우진과
연능강은 평생을 풀어도 풀 수
없던 바둑의 형세를 곡운성이 단숨에 알아내자 경외지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정말
홀륭하네! 이건 내 진심이야."
곡운성은 연능강의 태도가 갑자기 친근하게 돌변하자 내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뭔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 팔문금쇄진을 풀려고 애쓰신 이유가 무엇
입니까?"
"............."
연능강의 안색이 순간 돌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우진이 긴 장탄식을
내쉬며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차차 알게 될 것이네. 단지 그 팔문금쇄진에 이곳의 운
명이 달려 있다는 것만
알아두게."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자네에게 이곳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겠네."
제 39 장 플 수 없는 수수께끼
소식을 들은 연씨 일족은 삽시간에 공터에 가득 모여들었다.
곡운성은
연능강과 연우진의 배분이 이곳에서 가장 높다는 걸 알게 되
었다. 곧 연씨 일족들을 대표하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곡운성
과
상견례를 가졌다. 곡운성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실로 공손한 것이
었다.
이윽고 상견례가 모두 끝났을 때였다.
"연화야,
이리 나오너라!"
연우진이 나직하면서도 위엄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곡운성은 연화라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는
느낌
이었다.
곧 사람들 돔에서 한 섬세한 몸매의 혹의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곡운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대략 이십삼사 세 가량 되었올까?
그녀의 미모는 그 어떤 형용사로도 형용할 수 엄는,
그야말로 극미의
눈부심이었다. 그녀는 곡운성이 지금껏 본 그 어떤 여인보다 더 아름
다웠다.
연화설이나 적하명조차도 그녀에
비한다면 그 빛을 잃고 말것이었다.
굳이 단점을 찾는다면 너무나 이지적인 분위기를 지녀서 오히려 차갑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웬만해서는 가까이 근접하기 조차 거북한 도도
한 기운이 그녀의 섬세한 몸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연우진의 자애로운 음성이
울려퍼졌다.
"대단한 학식을 지니신 분이시다. 네 작은할아버지뜰 쩔쩔매게 만든
무공도 무공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팔문금쇄진을
한눈에 알아냈다는
점이다."
"..........."
시종 표정의 변화가 없던 연화의 얼굴에 순간 미세한 파랑이 일었다.
연우진은 그녀와 곡운성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올 이었다.
"우리가 수십여 년 동안 플지 못했던 팔문금쇄진을 한눈에 파악해낸
걸 보면 분명히 그 파해법도 알고 있을 터........ 지혜로만 따져도
너와 쌍벽을 이를 것이다."
곡운성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천둔신서를 보고 간신히 그 진세의 명칭만 알아낸 내게 너무 칭찬이
과하구나. 게다가 그 파해법도 아직 다
알아내지 못했거늘......."
연화는 잠시 차가운 눈으로 곡운성을 바라보다 나직히 입을 열었다.
"팔문금쇄진이 기문팔괘를 기초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까지는 나 역시
알아냈어요. 하지만 팔괘의 배치가 상리를 벗어나고 있어 아직까지 파
진법을 완성하지 못했어요.
곡 대협께서 과연 팔문금쇄진에 대해 정통
하시다면 언제고 제게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내 좁은 식견이 드러날까 부고러울
뿐이오."
곡운성은 당황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는 연화가 팔문금쇄진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질문하는 것올 피하기
위해
시선을 연우진에게로 옮겼다.
"사실은 제가 의슬을 익힌 적이 있는데 음화신수를 보여주실 수 있습
니까? 흑시 석균의 도움 없이도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를테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연우진은 적이 놀란 신색이 되었다.
놀라기는 연능강과 연화도 마찬가
였다.
겨우 약관을 넘은 젊은 나이에 팔문금쇄진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도 신
비하거늘, 의술에도 정통해 있다니 어찌 기이하지
않으랴.
연능강이 황급히 몸올 돌렸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 당장 가져올테니."
연능강이 음화신수를 가지러 간 사이에
연우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
빈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연우진의
거처
와 앞마당은 술과 진수성찬이 준비된 연회석으로 돌변했다.
그날 저녁.
곡운성은 자신의 방에서 연능강이 가져온
음화신수의 성분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될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성
과도 얻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곡운성
은 연우진이 보낸 사람을 통해 음화신수의 성분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약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그러나 다시
하루가 지났을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곡운성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음화신수의 독성을 해독할 수 없다
는 걸 자인해야만
했다.
연우진과 연능강은 크게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곡운성은 그들의 마음을 층분히 혜아릴 수 있었던 터라, 내심 안타까
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연우진은 곧 본래의 온화한 웃음을 되찾고
는 오히려 곡운성을 위로하고 돌아갔다.
다시 저녁이
되었다.
곡운성은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체로 잠을 이를 수 없었
다. 그는 문득 연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천은 선생께서는 이굿에서 두 명의 인재를 찾아내라고 하셨다. 하지
만 반드시 그중 한 명만을 선택하라고 하셨지.'
천은
선생의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의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왜 둘 중 한 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셨을까? 만에
하나 죽여야
하는 대상이 연화 소저라면 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곡운성은 침상에 누웠으나 생각이 꼬리를
믈어 결국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방안에서 오락가락하던 그는 문득 품속에서 천둔신서를 꺼내
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한시바삐 천둔신서를 공부해야겠구나. 우선 팔문금쇄
진의 파해법이라도 알아내야 연화 소저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을 것이
다.'
곡운성은 천둔신서에서 팔문금쇄진에 관해 수록되어 있는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 난해함은 실로 머리가
지
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대략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까.
갑자기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창밖으로부터
한 즐기 강렬
한 살기가 느껴진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천둔신서를 품속에 갈무리하는 찰나 창문이 터져
나가며 한
줄기 검광이 곧바로 짓쳐들었다.
번쩍!
그것은 설명하기엔 길었지만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곡운성은
설마하니 상대의 공격이 그처럼 가공할 빠름을 지니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는 간발와 차이로 겨우
암습을 피해냈다. 그러나 암습자의
검은 곧바로 방향을 바꿔 재차 섬
전처럼 쏘아져 왔다. 그 악독한 기세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
다.
차앙!
일순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블꽃이 사방으로 퉁겨나갔다.
어느새 곡운성이 금사검을 뽑아들고 상대의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그
는 그제서야 암습해온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암습자는 아무렇게나 산발한 머리에 애꾸눈을 지닌 괴인이었다. 헝클
어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괴기스렴기 짝이
없었다.
"대체 당신은......."
곡운성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쉬이익 !
괴인이 다시 귀영처럼 미끄러져 오며 무서운 공격을 펼쳐내는 것이었
다. 그것은 곡운성이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살벌한 검법이었다. 검날
이 노려오는 부위는 모두 치명적인
요혈이었고, 찰나간에 수십 차례 방향을 바꿀 만큼
변화무쌍했다.
차앙!
또다시 두 검날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격돌음은 단 한 번이었으나, 기실은
십여 차례 이상 검과 검이 부딪친
것이 속도가 워낙 빨라 소리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었다.
두번째의 공격으로도 곡운성을
어쩌지 못한 괴인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한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눈빛은 마치 바늘끝처럼
예리했다,
"제법이구나."
싸늘하게 뇌까린 그는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른 인
믈들이 소란을 눈치채고 몰려올까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네놈이 정녕 사내대장부라면 날 따라오너라."
그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부서진 창문 너머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
곡운성은 자신을 암습해온 괴인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 괴인의 검볍이 더욱 흥미로웠다.
'저자의 검법은 해남파의 검법처럼 빠르고 또 천강검법만큼 강력하다.
게다가 천하
사대검파의 어떤 검법보다도 신비무쌍하니 실로 놀랍기
그지없구나.'
강렬한 호승심이랄까?
곡운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날려 괴인을 추적하가 시작했
다.
괴인은 곡운성이 추적해 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둔 채 빠르게 움직
여
나갔다. 거침없이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것을 보아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한데, 어느 한순간 곡운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괴인이 가고 있
는 곳이 바로 자신이 맨 처음 통과해왔던 죽음의 마을이었던 것이다.
과연 괴인은 원래의
비연장이었던 마올에 당도한 후 신형을 멈춰 세웠
다.
괴인의 입에서 이내 싸늘한 냉소가 터져나왔다.
"네 용기가 가상하여
가능하면 고통없이 빨리 죽여주마."
그것이 시작이었다.
파파팟!
실로 가공스러운 검세가 쉬지 않고 곡운성을 덮쳐들었다.
마치 해일이
밀려오듯 첫번째 공격과 두번째 공격이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이어
졌다. 종내에는 수십여의 검초가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엄청난 검법이었다.
곡운성은 괴인이 왜 자신을 암습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자신을 죽
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나 말을 걸 여유조차 주지
않는 독랄한 공세에 추호도 방심하지 못한
채 전력을 다해 천강검법을 펼쳐냈다.
카카캉!
훗찼??
차앙!
사위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가운데 무서운 검광과 검기가 난무했
다.
곡운성과 괴인은 순식간에 일백여 초를 쿄환했다. 하나 초수가 거듭될
수록 두 사람의 기세는 더욱 빨라져 종내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
지도 않을 정도였다.
"연조량이 과연 대단한 고수를 보냈구나!"
괴인은 곡운성의 검법에 적지 않이 놀란 듯 한편으로
검을 쳐내며 한
편으로 분노에 찬 일성을 터트렸다.
곡운성은 괴인의 말에 흠칫 이채를 떠올렸다.
"당신도 천은 선생을 알고
있단 말이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건가? 연조량이 비록 연씨 일족의 사람이
었지만 그 고매한 성품을 나름대로 존경했거늘
역시 한통속이었어!"
괴인의 비분강개한 어투에는 배신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곡운성으로서는 상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다
블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당신은 비씨 일족의 사람이오?"
"그렇다! 내 이름은
비조웅이다."
쉬이익!
비조웅의 공세가 더욱 위력적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무턱대고 상대해줄 수는 없다.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는지 이유를 알아내야겠구나.'
곡운성은 일단 결심을 굳히자 곧바로 천원신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우우웅!
일순, 금사검에서 찬란한 빛의 즐기가 솟구쳤다.
하늘을 뚫고 솟아오르는 검기의 폭풍이 돌연 사위가 무거운 적막으로
뒤덮였고
그 적막 가운데 찬란한 검광의 줄기가 주위의 모든 빛을 흡
수하며 더욱 광휘를 뿌려냈다.
그렇다!
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검강이 펼쳐진 것이었다.
"검, 검강!"
비조웅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꽈꽈꽝!
파팍!
비조웅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
비조응은 손잡이만 남은 검을 쥔 채 망연자실
석상처럼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검강이 그의 검만을 향해 집중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여지
없이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상황이 아니었던가!
곡운성은 상대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 검만을 부수어 버렸으나 검강
의 여파에 노출된 비조웅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입고 있던
옷이 갈가리 찢겨진 건 둘째치고, 전신의
곳곳에서 선혈이 홀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조웅은 엄청난 충격으로 자신의 부상조차 의식하지 못한 듯
망연히 곡운성만을 바라보고 있올 뿐이었다.
곡운성은 검을
거두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난 해남파의 장문인 곡운성이라 하오. 외부에서 이곳에 들어온 지 얼
마 되지 않는 나를 무엇 때문에
공격한 것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그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비조응은 가증스럽다는 듯 차갑게 내뱉았다.
"네놈이 짤문금쇄진을 파해하도륵 내버려 들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비씨 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팔문금쇄진이 비씨 일족의 멸망과 관계가 있다니 무슨 뜻이오?"
곡운성은 크게 의아해 반문했다.
하나 비조응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돌연 한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품속에서 검은 단소를 꺼내들었다.
삘릴릴리......
이내 적막을 깨며
피릿소리가 사방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어찌 들으면 애절한 곡조였다.
그러나 곡운성은 그 피릿소리에 왠지 모르게 섬뜩해지는
느낌올 받았
다. 그는 알 수 없는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들러보았다.
그때였다.
처벅! 처벅!
마치
피릿소리에 답하듯 돌연 괴이한 발걸음소리가 사방팔방으로부터
울려오기 시작했다.
무덤 속처럼 적막하던 마올 곳곳에서 돌연 수맘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으스스하고 공포스렵지 않올 수 없엇다.
"..........."
곡운성의 눈이
이내 크게 뜨여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나 걸어오는 수맘은 인물들!
일체 생기를 느낄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하나같이 모두가 눈에
초점
들이 없었는데......
'맙소사!'
곡운성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이곳에 들어와 처음 마주쳤던
사랍들. 바로 강시들이 아니고 무엇이겠
는가 !
삘릴릴리......
삘릴리.. ....
쉬이익!
피릿소리가
이어지자 마치 살아 있는 듯 걸어오던 수많은 시체들이 일
제히 곡운성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시체를 조종하는 강시차흔대법은
수백 년 전에 무림에서 실전된 것으
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구나!'
펑!
곡운성은 전면에서 덮쳐들고 있는
중년인의 시체를 향해 일장올 쳐냈
다. 비록 시신일지라도 훼손시키기 싫어 삼성 정도의 공력만을 실어을
린 장력이었으나 그 위력은
절대 가벼운게 아니었다.
한데,뒤쿵 서너 걸음 물러서던 시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이럴 수가!
아무리 삼성의 공력만을 운용했다고 해도 전혀 충격이 없
다니!'
곡운성은 눈앞의 현실을 믿올 수가 없었다.
휘이익!
이번에는 좌측에서 서너 명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마구잡이로 두 팔을
벌린 채 곡운성을 잡으려고 덮쳐오는 시신도 있었고 위력적으로
주먹
을 휘두르는 시체도 있었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그들이 자신의 육체를 아끼지 않고 공격해 은다는
점이었다.
곡운성은 실로 난감했다. 혈도를 찍어도 소용이 없었고 장력으로 적중
시켜도 끄떡없었다.
'할 수 없구나!'
차앙!
곡운성의 손에 다시 금사점이 거어졌다. 다음 순간 금사검은 가공스러
운 위력과 함께 곡운성을 포위한 채 덮쳐오고 있는 시신들을
향해 뻗
어갔다.
퍽!
퍼퍼퍽!
선두에서 덮쳐오고 있던 여섯 구의 시체들 전신에 금사검이 작렬했다.
하나
더욱 놀라운 광경은 그 다음에 벌어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곡운성은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검에 적중당하고도 쓰러
진 시신은 단 한 구도 없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시신들은 검에 맞아도
상처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어떤 공격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그 괴물들이 완전히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실로 전을스러운
일이었다.
"이 강시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검강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검강을 시
전하면 이 시신들은 모두 수섭 토막이 나 버릴
것이다."
곡운성은 난감한 심정이었다. 이미 죽은 시신을 다시 처참하게 도룩한
다는 건 그의 양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내 곡운성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
혀오는 강시들로 인해 더 이상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곡운성은 다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빠르게 흩어 보았다.
그의 시야에 여전히 한쪽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비조웅의 모습이 들어
왔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번뜩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는 갑자기 강시들 사이에서 몸을 빼내 비조응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패애액!
순식간에 무서운 검광이 비조웅의 전신을 덮어씌웠다. 곡운성의 이 공
격은 마음먹고 펼쳐낸
것인지라 일시지간 천지가 모두 검광에 노출되
는 것 같았다.
비조웅의 눈에 당황의 빛이 스쳐갔다.
그는 이미 곡운성이
덮쳐오는 것을 보기는 했으되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 미처 대응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쓰으윽!
비조응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내며 피하려 했다.
곡운성은 비조웅의 행동을 이미 예측했다는 듯 벼락처럼 은섬지를 발
출해냈다.
쐐애애액!
한줄기
가는 은빛 섬광이 곧바로 비조웅의 마혈을 향해 뻗어갔다. 비
조웅의 몸이 일순 벼락맞은 듯 부르르 진동하며 멈춰졌다. 혈도가 제
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휴우......!'
곡운성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강시들은 비조웅의 피릿소리가 들리지 않자 모두 동작을 멈추고 있었
다.
비조웅의 얼굴에 아득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나마저 당했으니 이제 우리 가문은 끝장이구나!"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거짓말처럼 모
곡운성이
그의 손에서 피리를 빼내더니 제압된 혈도를 풀어준 것이다
"나는 사실 처음 이곳에 온 외부인으로서 이 안의 사정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소."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는 음성이었다.
비조웅은 이 뜻밖의 상황에 놀라서 망연히 곡운성을 바라보았다.
곡운성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비씨 일족의 수장이신 비학이라는 분올 만나 자
세한 내막을 듣고
싶소."
"............"
비조응의 얼굴에 빠르게 놀람의 빛이 스쳐갔다.
그의 얼굴에 잠시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
다. 만약 상대의 태도가 거짓이라면 대적을 집안으로 블러들인 형상이
되는 셈이었다.
비조웅은
곡운성의 맑고 정대한 눈빛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참
을 망설이던 비조웅은 결국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소!"
비조응이 곡운성을 연씨 일족의 부락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곳은 연씨
일족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
다.
플 한 포기조차 찾아보기 힘든 황야에 검붉은 암석군이 늘어서 있는
곳...... 더욱이 널려 있는 암석 사이에는 온갖 독층들만이 우글거리
고 있었다.
"............"
곡운성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야말로 하늘마저 음울하게 가라앉은 듯이 느껴지는 살벌한 풍경이었
다. 그러다 문득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듯한 그 바위들은 알고 보니 팔문금쇄진을 이루
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곡운성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연우진과 연능강은 이곳에 펼쳐져 있는 진법을 파해하기 위
해......?'
그의 추측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비조웅은 곡운성에게 반드
시 자신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따라오도록 일렀다.
이윽고 바위들로 이루어진 팔문금쇄진을 통과하자, 을씨년스러운 마을
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검붉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황량한 곳이었는데 바위들
사이사이에 한 채의 모옥이 보였다.
비조웅은 곡운성을 그중 한 채의 모옥으로
안내했다.
곡운성은 그 모옥이 바로 비씨 일족의 수장인 비학의 거처임올 직감했
다.
모옥 앞에 당도한 비조웅은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접니다."
"들어오너라."
모옥 안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조웅은 곡운성을 향해 고개를 끄떡여 보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이 사람은 원래 비학이라는 인믈의 아들이었구나.'
곡운성은 서슴지 않고 비조웅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의 내부는 전체적으로 매우 초라한 분위기였다.
방의
한가운데에 포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포단 위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양 무릎 위로 흰 천올 덮고 있는 걸로 보아 두 다리가
없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얼굴 또한 화
상올 입은 듯 반쯤 녹아내려 있어서 실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저 노인이 비학이란
말인가?'
곡운성은 비학의 끔찍한 몰골과 주위의 황량한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학, 그는 막 들어서는 곡운성을
바라보며 두눈에 괴이한 광채를 뿜
어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내 일체 무심한 빛으로 조용히 가라앉았
다.
비조웅은
조심스럽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비학은 일체 표정 변화가 없이 묵묵히 듣고 있었으나, 곡운성이 검강
을 펼쳐낼 수
있는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시들을 췌손시키지 않
으려 했다는 말에는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비학은 그제서야 곡운성을 향해
나직히 입을 떼었다.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연조량이 젊은이를 이곳에 보냈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천은 선생께서는 언제고 인재가 필요하게 되면 이곳에서
두 명의 인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곡운성은
연우진에게 들려주었던 천은 선생의 말을 반복했다. 하나 두
명의 인재 중 한 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말은 마찬가지로 하지 않
았다.
비학은 무거운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연조량은 연씨 일족이면서도 그들에 대한 환멸감으로 이곳을 영원히
떠난 것이네. 연능강이 같은 핏줄이자 아우인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
일세."
"그들이...... 천은 선생을 죽이려 했단
말입니까?"
곡운성은 뜻밖의 말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순간 비학의 눈에서 가공스러운 살기가 즐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사람을 살린 건 바로 이 늙은이라네. 하지만 그때 연우진과 연능
강의 공격으로 이 모양이 되었네."
"............"
곡운성은 비학의 말올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비학의 이야기는 연우진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내
용이었다.
음화신수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과, 석균의 분배
때문에 서로 싸우기 시작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일치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의 이야기가 실로 엉뚱했던 것이다.
"연조량이 떠난 뒤 양 가문은 나름대로
서로 침범하지 않은 채 평화를
유지해 왔네. 하지만 이십 년 전 연우진과 연능강은 우리 일족을 완전
히 몰살시키기로 결심하고 석균
속에
극독을 넣어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네."
비학의 분노에 찬 음성이 이어졌다.
"그때 우리 부족 사람들은 대부분이
몰살당했네. 살아남은 사람이 겨
우 세 명에 블과했네."
"으음,......"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을
발했다. 마치 실타래가 얽히듯
온통 혼란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느 쪽의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그 당시
살아남은 저 아이와 내 손자, 그리고 이 늙은이는 간신히 이
곳으로 피한 후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입구에 팔문금쇄진을 설치했
네."
"..........."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강시차혼대법으로 죽은 우리 일족의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원래의 마을을 지키
도록 한 것이네."
비학의 신색이 처연하게 바뀌었다.
"시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네."
비조웅이 외눈에 무서운 신광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뒤 우리들은 이곳에서
이십여 년올 짐승처럼 살아왔소. 그때부터
지금까지 놈들은 팔문금쇄진을 깨뜨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렸소.
"
"한데
연우진의 손녀인 연화는 무섭도록 뛰어난 아이였소. 그는 지난
수년 동안 천재적인 능력으로 팔문금쇄진을 세 곳이나 풀어내었던 것
이오. 이 상태라면 이삼 년 안에 팔문금쇄
진은 뚫리고 말 것이오.'
"도무지 알 수 없군요. 그들이 왜 그토록 세 분을
죽이려 하는지.....
.."
곡운성의 말에 비조웅은 차가운 냉소를 흘려내며 대꾸했다.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소. 그들은 한 가지 물질을 노리고
있소.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양화신수요."
"양화신수......?"
곡운성은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비조웅의 외눈에 비수처럼 날카로운 광채가 어렸다.
"그렇소. 양화신수는 음화신수와 극성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을 복용
하게 되면 음화신수의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소."
"아!"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발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그 말대로라면 양화신수를 조금만 더 일
찍 발견했더라도 이 모든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그 말에 비학과 비조웅은 묘한 신색이 되었다.
그들은 곡운성의 진지한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조웅의 음성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뒤...... 우리는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해 이곳을 떠날 수
없었고 놈들
또한 음화신수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는
것이오."
"으음......."
곡운성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비연장에 얽힌 무서운 비극이 그의 가
슴을 묵직하게 내리 눌렀다. 하나 어느쪽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아직
도 종잡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그들에게 괄문금쇄진의 파해법을 가
르쳐 주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들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
곡운성은 머리가 더욱 복잡해짐을 느꼈다.
이때였다.
모옥의
문이 열리며 한 백의청년이 조용히 들어섰다.
대략 이십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청년의 용모는 너무나 수려하고 맑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발하게 할 정도였다. 비학파 비조응으로 인해 암올하기만 하던 실내
분위기가 갑자기 환해졌다.
비학의
안색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내 손자이네."
"아..,...!"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은 선생이 말한 또 한 명의 기재가 바로 눈앞의 청년이
라는 것을.
그러한 곡운성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백의청년은 이내 공손히 예를 표
했다.
"비영이라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귀인의 이야기를 숨어서 엿들었으니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곡운성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영의 표정으로 보아 그는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를 다
엿들은 게 분
명했다. 그러나 곡운성은 가까운 곳에 누가 있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토록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란 말인가?'
그러한 곡운성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비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이 모윽에는 약간의
기판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한가지를 이용
해서 이야기를 엿들은 것에 불과하니, 오해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비영의 말은
바꾸어 말해 자신이 결코 뛰어난 고수가 아님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좌중을 둘러보더니 조용한 어조로 말
을
이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비연 양 가문이 화해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곡운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마디였다.
비학과 비조웅 또한 설마하니 비영이 그런 말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
한 듯 놀란 신색이 되었다.
비영은 이미 결심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싸움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양가문 모두 비참해질 뿐입니다. 서로
살아남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과거의
원한을 서로 덮어버리고 손을 잡
는 것 뿐입니다."
그는 곡운성을 깊숙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올 이었다.
"이분이라면 양쪽
가문의 화해를 주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곡운성은 그 말을 듣자 어두운 기분이 가시며 새로운 의욕이 생겼다.
그는 비영의
말대로 기꺼이 그 일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내 실망하고 말았다. 비조웅이 만면에 무
서운 노기를 담은 채 비영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우리 비씨 일족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모른다! 놈들과는 절대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비학이 무거운 어조로 입올 떼었다.
"네 말뜻은 양화신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라는 뜻이냐?"
비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떻습니다,조부님."
비학은 무거운 신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들을 안다. 설사
양화신수를 넘겨준다 해도 그들은 우릴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조부님의 뜻은......."
"차라리 이굿에서 우리 모두
혀를 깨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양화신수는 넘겨즐 수 없다는 게 내 뜻이다. 만약 팔문금쇄진이 파괴
된다면 난 양화신수가
있는 곳을 매몰시켜 버릴 것이다."
"............"
"원한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들의 손에
양
화신수가 넘어간다면...... 사악한 그들의 힘은 이 풍운령을 벗어나
세상밖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실로 무서운 불신이
서려 있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비영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숙연한 표정을 머금었다.
"조부님의 말씀이 옳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
면 화해를 먼저 하는 게 순리입니다."
그 말을 마친 비영은 어떤 염원이 깃든 눈길로
곡운성을 응시했다.
곡운성은 힘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절 믿고 일을 맡겨주신다면 전심전력을 다해 두 가문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약속을 번복하거나 여기 계신 분들을
해치려고 한다면 저 역시 여러분들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비조웅의 신색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
개를 저으며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오. 그들은 그대마저 속인 후 우리를 죽일 것이오."
그때 비학의 입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곡
대협올 믿고 화해를 시도해볼 생각이다."
갑자기 변한 부친의 태도에 비조웅은 일시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님
이건......!"
"이미 오십 년올 끌어온 싸움이다. 수많은 사랍들이 죽었지만 어느 누
구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만 못박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
결심을 하는 이유는 비영의 뜻올 존중하기 때문이다."
"............"
비조웅은
멍한 표정으로 비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부친의 말뜻을 혜아
릴 수 있었다. 손자인 비영을 사랑하는 부친의 마음은 그 어떤 표현으
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지극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비영에 대한 깊은 신뢰이기도 했다.
비조웅은 이내 결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아버님의 뜻이라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곡운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양
가문의 싸움을 종식시키는 건 내 손에 달린 셈이구나.'
그로부터 얼마 후, 곡운성은 비씨 삼대의 배웅을 받으며 모옥을 떠났
다.
연씨 마을로 향하는 그의 마옴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새삼 깨달은 때문이었다.
그는 연씨 일족의 눈에 발각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거처에 당도했다. 다행히 아무도 그의 행적
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연화가 곡운성을 찾아온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곡운성은 방문 앞에 선 그녀를 보고 멈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밤사이에 전혀 다른 여인으로 변해버린 듯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로만 기억되던 첫 대면과는 달리 싱그러운 아
침 햇살
아래 우뚝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곡운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아찔한 현기증 마저 느꼈다.
그것은 상대의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일 듯 신비로운 눈동자였다. 그
리고 그 눈동자에는 아지랑이처럼 훈훈한 웃음이 배어 있는
것이다.
'어찌 한 여자가 이토록 전혀 상반되는 분위기를 동시에 풍길 수 있단
말인가!'
곡운성이 일시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는 순간이었다.
연화가 나직하면서도 해맑은 옥음으로 먼저 입을 떼었다.
"편히 쉬셨어요? 오늘따라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롭군요."
"......그런 것 같소."
"두 분 조부님께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셔요."
"알겠소."
곡운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연화는 약간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걷고 있었다.
곡
운성은 그녀의 가녀리고 횐 목덜미가 참으로 눈부시다고 느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연우진의 거처에 당도했다.
연우진과
연능강은 잘 차려진 아침식탁을 앞에 둔 채 서로 담소하다가
곡운성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허헛......."
"흘륭한
음식들이군요."
곡운성은 두눈에 묘한 뜻을 담은 채 푸짐한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 순
간 그는 비학 등이 살고 있는 그 허름한
모옥을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
다.
그러나 연우진은 곡운성의 말에 다른 뜻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하
고 껄껄 웃었다.
"어서 드시게."
"감사합니다."
곡운성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연화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으나 차를 마실 뿐, 음식은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가벼운 담소가 얼마나 오갔올까?
연우진이 문득 정색을 하고 곡운성을
바라보았다.
"이젠 자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가 된 듯하네."
곡운성은 내심 바싹 긴장하지 않올 수 없었다
연우진의
말이 깊은 회한을 담은 채 이어졌다.
"우선 우리가 왜 그토록 팔문금쇄진에 매달리는지부터 설명해주겠네.
사실 음화신수의 저주를 플
수 있는 방법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네."
곡운성은 이미 비학의 입을 퉁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터였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열쇠는 바로 비학이 지니고 있네. 그가 있는 곳에서 음화신수의
독성을 플 수 있는
양화신수가 발견되었던 것일세."
연우진은 장탄식을 발하며 말올 이었다.
"하지만 서로 깊은 원한이 쌓여 있는 상태이니. 그가
우리에게 양화신
수를 즐 턱이 없지 않은가. 그는 팔문금쇄진을 쳐서 우리가 양화신수
에 접근하는 걸 철저하게 막고 있다네."
연능강이 만면에 무서운 노기를 떠올리며 부르짖었다.
"비학 그놈은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놈이지! 우리가 모두 처참하게 죽
어가는 걸 즐길 심산이야!"
그 말에 연우진은 고개를 설례설레 흔들었다.
"따지고 보면 비학만을 원망할 일도 아니네.
어차피 모든 싸움은 음화
신수 때문에 시작되었음이니..... 일이 이렇게 된건 운명의 장난일 뿐
일세."
곡운성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믈었다.
'지금이라도 화해를 시도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우진은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그에게 화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네."
연능강이 다시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질렀다.
"죽은 자의 시신까지 이용하는
그런 간악한 놈과 화해가 될 리 없지
않은가! 화해를 청하러 그곳에 갔다가 죽은 우리 쪽 사람들이 삼십여
명에 달하네."
".........."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가? 그들은 몇 번이고 석균이 있는 곳에 침투를
시도했네. 석균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말일세. 석균올 없애버리면 우런
모두 몰살을 당할 수밖에 없네."
연능강의 말은 곡운성으로선 처음 듣는 것들이었다.
그는 다시 머릿속
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우진이 무거운 신색으로 말했다.
"그들은 이미 양화신수로 음화신수의 독올
치료했으므로 아쉬울 게 없
는 처지일세."
"만약 제가 그곳에 가서 서로 화해할 것올 제시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그들이 화해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왜 지금껏 하지 않았겠는가?"
연우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흔들었다.
곡운성은 이미
비학과 약속한 바가 있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어
보았다.
"그건 양쪽이 서로에게 너무 많은 불신이 쌓여 있는 탓일
수도
있습니다.제삼자가 나선다면......."
그 말에 연우진은 단호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만약 자네가 나서서 그들이 화해를 승낙한다
해도 그건 우릴 없애기
위한 음모일 것이네. 비학은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는 데에는 천하에
따를 자가'없을 정도로 교활하다네."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결코 벌하지 않을 것이네."
연우진은 무거운 탄식을 발하며 말을 이었다.
"팔문금쇄진을 파해하고 무사히 양화신수를 얻어 음화신수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면..... 지난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고 그들을
용서해줄 생
각이네. 그때가 되면 그들도 우리의 진
심을 알게 되갰지."
곡운성은 더 이상 그에게 말올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
았다. 만약 연우진의 말이 진심이라면 상황은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
었다. 단지 곡운성이 팔문금쇄진을
완전히 파해하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연우진이 다시 믈었다.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은 생각해 보았는가?"
곡운성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보름 정도면 완전히 와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실 그의
내심은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양 가문의 원한은 그야말로 바다처럼 깊었고, 그 불신의 벽은 도저히
허물 수 없을 만큼 컸다.
설령 서로를 응서해줄 수 있는 마음은 있다
해도 서로를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양쪽의 이야기가 오두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원
만하게 화해를 시킬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홀렀다.
곡운성은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비씨 일족의 마올을 오가며 양가문의
화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애썼으나 별반 소득이 없었다.
그 사이 그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파악해냈다. 연씨
일족의 수효는 모두 칠십여 명이었고, 비씨 일족은 단 세 명뿐이었다.
또
하나 변화가 있었다면 그 동안 연화와 매우 가까워졌고, 마찬가지
로 비영과도 친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곡운성
은 그들이 지닌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화와 비영이 지닌 천재성은 어떤 찬사로도 다 표현할 수 없올 정도
였다.
곡운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두 사람을 저울질하곤 했지만 도저히
우열을 가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나
연우진에게 팔문금쇄진을 파해하겠다고 약속
한 보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곡운성은 이미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완전히 알아낸
상태였다.
그러나 곡운성은 연우진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연우진이 설령
약속을 지켜 비씨 일족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성품이
과격한 연능강이
어떻게 나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계속 팔문금쇄진의 과해법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잡아뗄 수도 없는 상
황이다. 그렇게 되면 필경 날 의심할 터.......'
곡운성은 심사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을 더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비 노야를 찾아가 양화신수를 한 병 얻어내는 것이다. 그것으로 연씨
가문의 사람들을 해독시켜주는 대신 비씨
일가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터 ......'
밤이 이슥해지자, 곡운성은 소리없이
거처를 나와 비씨 일족의 거처로
신형을 날렸다.
한즐기 연기처럼 어둠에 잠긴 숲속을 얼마나 나아갔올까?
곡운성은 문득
전방에서 한 인영이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는 흠칫 신형
을 멈추었다.
'이 야심한 때에 누가?'
그는 재빨리 한쪽의 나무
뒤로 몸올 감추었다. 그는 그제서야 상대방
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 노야!'
그렇다.
어둠에 잠긴 숲속을 소리없이 빠져나가고 있는 인믈은 바로 연우진이
었다. 그는 백양림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분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곡운성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연우진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연우진은 구구종횡연환진이 펼쳐져 있는 백양림을 거침없이 치달리고
있었다. 그는 백양림이 끝나는
지점에 당도하더니 갑자기 신형을 멈추
었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 숲의 공터였다.
곡운성은 유령처럼 나무 위로 신형을
뽑아올린 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바위 뒤쪽에서 한 인믈이 소리없이 빠져나오더니 연우진 앞으로
접근했다. 때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빠져나오며 그 인물의 용
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매우 준수한 얼굴에 눈빛이 은은한 자색을 띠고 청년이었다.
'화극렬!'
곡운성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놀랍게도 연우진이 만나고 있는 인믈은 북룡맹의 화극렬이었던 것이
다.
'이럴 수가...... 연 노야가 어떻게 화극렬을 알고 있단 말인?'
알 수 없는 섬뜩한 블안감이 그의 등줄기를
전율처럼 흩어내렸다. 그
는 청력을 끌어올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곧 화
극렬의 음성이 회미하게 들려왔다.
"놈이 과연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알아낼 수 있겠소?"
"분명히 알아낼 것이네."
연우진의 확신에 찬 어투가 이어졌다.
"그가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말하는 즉시 나는 그곳에 쳐들어가 양화
신수를 얻을 참이네. 나는 일단 곡운성에게 약속한 대로 비씨
일족을
풀어주는 시간을 줄테니..... 그 뒤의 일은 북룡맹서 알아서 해주시
게."
화극렬의 입가에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미소가 솟아났다.
"백양림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제거할 것이니 그 문제는 심려하실
게 없소이다."
"허허.....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일세."
연우진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것은 무서운 살의가 어려 있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화극렬의 눈가에
음산한 광채가 스쳐갔다.
"맹주님께선 음양신수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계시오. 음
화신수와 양화신수는 각기 지독한
독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둘을 합치
면 천고의 영약이오. 그것은 북룡맹의 힘올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일세."
"이번 일이 해결되면 맹주님께서는 장주의 공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
이오."
"이번 일은
우리로서도 수십여 년 동안 이루려던 오랜 숙원..... 기필
코 양화신수를 손에 넣을 것이니 아무 염려 마시게. 그건 그렇고 해남
파의 곡운성은 어찌 처리할 예정인가?"
화극렬의 눈에서 일순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번 기회에 놈을 반드시
제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소. 놈을 죽
이는 일은 음양신수를 얻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오."
연우진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가 있어선 안될 것이네."
"장담할 수 있소. 놈은 절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오."
잠시 후 그들은
무어라 낮은 목소리로 두어 마디 더 이야기한 후 계곡
안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러나 곡운성은 몸을 숨긴 나무 위에서 굳어버린 듯
움직일 즐을 몰
랐다.
충격! 그것은 실로 감당키 어려운 충격이 아널 수 없었다.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그동안 연우진이 보여주었던 호의는 모두가 가증스러운 위선었던 것이
다.
'이럴 수가!'
곡운성은 참올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비학의 말이 새삼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연씨 일족은 비
씨 일족을 완전히 소멸시킬
심산이었다. 그것도 북룡맹과 연계해서 곡
운성까지도 한데 엮어 함정에 몰아넣으려
는 것이었다.
'결국 비 노야의 말이 모두
옳았구나!'
휘릭!
곡운성은 이 일을 서둘러 대비하지 않으면 큰 낭패가 있으디라 생각하
고 바람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씨
일족이 있는 장소였다.
제 40 장 대탈출
곡운성의 이야기를 오두
들은 비학과 비조웅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비조웅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뒤쳐나갈 자세로 외쳤다.
"지금 당장 그
악독한 늙은이들과 사생결단을 내야만 하오!"
비영이 차분한 어조로 그를 제지했다.
"진정하십시오, 아버님. 무작정 부딪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의 어투에는 묘하게도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힘
이 배어 있었다.
"일단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상황으로 봐서 이 풍운령 일대에
진올 치고 있는 북룡맹의 고수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듯합니다."
"으음......."
비조웅은 겨우 분노를 삭이는 듯 신음 같은 일성을 발했다.
비영은 두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담은 채
조용히 말올 이었다.
"북룡맹의 포위망은 제쳐두고라도 당장 연씨 일족의 포위망을 벗어나
는 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문득 곡운성에게 시선
을 던졌다.
"제 생각에는..... 만천과해의 수법
밖에 없을 듯합니다."
곡운성은 이미 그가 어떤 대책을 강구했으리라 짐작했다.
만천과해.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는 삼십육계
병법 중 제일계가
아닌가. 그러나 단지 그 한마디만 가지고 비영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건 블가능했다.
"경청하겠으니 의견을
말해보시오."
"필요한 것은 적을 속일 미끼입니다. 장문인께서 그 역할을 해주셔야
겠습니다."
"기꺼이 따르겠소."
곡운성은 혼쾌히 숭낙했다. 이미 비영의 두뇌가 설명이 필요 없을 만
큼 뛰어나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터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영은 만면에 신비로운 웃음을 떠올렸다.
"장문인께서 나서 주신다면 이 일은 분명 성공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곡운성은 다시 연씨 일족의 마을로 은밀히 돌아오
고 있었다.
한데 막 연씨 일족의 마올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한쪽
담뒤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연화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이 밤중에 어딜 다녀오시죠?"
연화는 두눈에 기이한
이채를 빛내며 믈었다.
곡운성은 내심 등즐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으나 태연히 대꾸했
다.
"달빚이 너무나 밝아서 잠시
산책을 하던 중이었소."
"그랬었군요......."
연화의 입가로 보기 드문 미소가 회미하게 떠을랐다.
그 미소를 대하며
곡운성은 뜨끔하는 심정이었다. 마치 속 마음을 들
킨 느낌이라고나 할까.
연화는 문득 시선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나직히
말했다.
"난 이곳에서 성장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밤하늘이 아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깊숙한 시선이
곡운성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지겠지요."
"..........."
곡운성은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느꼈으나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화의 눈빛이 일순 미세하게 파랑을 일으켰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산책길에 잠시 동행해도 될까요?"
"물론이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 요즘 증원에 대한 생각으로
날을 지새곤 해요."
곡운성은 일순 그녀에게 어떤 연민의 정올 느꼈다.
그동안 그녀는 틈틈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원에 관해
물어왔었다.
곡운성은 그때마다 중원의 풍물과 무림의 정세 등에 대해 설명을 해주
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재녀
라 할지라도 풍운령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상, 중원은 하나의 꿈이
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마을 중앙에
있는 화원으로 접어들었다. 교교로운
월광 아래 사위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속에서 한쌍의 남녀가 나란히 후원을 산책하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
운 연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곡운성은 그녀와의 이런 자리가 오히려
어색하기만 했는데.......
"무림에 북룡맹이라는 단체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은 어떤 세력인가
요?"
문득 연화의 입에서 의외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곡운성의 안색이 가볍게 경직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넘어
갈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연우진이 북룡맹의 화극렬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변이 없는 한 연화 역시 그 사실
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절로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친다.
그러나 곡운성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며 북룡맹과 무림맹의 기나긴
싸움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것은 무림의 비극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이
야기였다.
연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가끔씩 그녀의 아
름다운 두눈에는 어떤 어두운
그늘이 스쳐가곤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곡운성은 문득 그녀에게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너무 시간이
늦은 듯하니 중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또 들려주어야겠구려."
"네......."
연화는 어딘가 아쉬운 눈길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곡운성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곡운성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방금 전까지 곡운
성이 서 있던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의미 모를 한숨이 가늘게 새어나왔다.
다음날
아침.
바로 연우진에게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알아내겠다고 약속한 날이었
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연우진과 연능강이 그를 거처로
불렀다.
"그래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알아냈는가?"
성격이 급한 연능강이 곡운성을 대하기가 무섭게 물었다.
곡운성은 이미
마음속으로 대비하고 있던 터라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 하루만 더 연구하면 풀어낼 수 있을 듯합니다."
연능강은 크게 실망한
눈빛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하루라....., 오십 년을 기다렸는데 하루 정도야 더 참을 수 있지."
연우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재촉을 하는 것 같군. 하지만 양해해 주리라 믿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알아내기 전에
는 제 거처를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곡운성은 가볍게 예를 취한 후 몸을
돌렸다.
연우진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를 배웅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곡운
성이 돌아가자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능강의 눈썹이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뭔가 놈의 태도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글쎄.,....."
"놈이 혹
우리 몰래 비학을 만나기라도 했다면......."
"그럴 리는 없네. 연화가 그의 거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형님은 너무
연화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는 것 아니오?"
"나는 내 자신보다도 그 아이를 더 믿네. 나중에 중원으로 진출하게
되면 그 아이의
능력은 크게 빛을 발할 걸세."
연우진의 온화하기만 하던 눈에 일순 강렬한 야망의 빛이 불길처럼 솟
아을랐다.
"모든 일이
예정대로 이루어지고 북룡맹 맹주인 천일비의 도움을 받는
다면...... 우리 연씨
일족은 빠른 시일내에 무림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올 수 있을 걸세."
연능강의 입가에 음산한 웃음이 피어을랐다.
"하늘이 우릴 돕고 있소. 곡운성 그 놈이 때맞추어 나타나 우릴
도와
줄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바로 그때였다.
날렵한 체구의 혹의 중년인이 바람 같은 신법으로 실내에 모습을 나타
내더니 긴장한 음성으로 외쳤다.
"비조응이 또 나타난 것 같습니다! 마을 북쪽에서 피살당한 시체들이.
....."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비켜라!"
연능강이 벽력 같은 노성을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신형을 날렸다. 연
우진의 신형은 이미 그 이전에 연기처럼 그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발견된 시체는 모두 네 구였다.
연능강은 시체를
살피더니 버럭 노성을 질렀다.
"역시 비조웅 그놈의 탄월검법에 당했군!"
연우진은 주위에 운집해 있는 연씨 일족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당장 놈을 찾아내라!"
"예!"
연씨 일족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데 그들의 신형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쌍도를 멘 젊은 청년이 창백한 안색으로 신형을 날려오더니 외쳤다.
"큰일났습니다! 곡운성 장문인의 거처를
호위하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
되었습니다!"
연우진과 연능강의 안색이 일순 동시에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런..,...!"
"곡 장문인은 어찌 되었느냐?"
"비조웅과 결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청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진과 연능강은
벼락처럼 신형을
뽑아올렸다. 곡운성의 거처로 향하는 연우진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
다.
'만에 하나 곡운성이 비조웅에게
당하기라도 했다면 팔문금쇄진은....
..!'
채 숨을 서너 번 들이쉬기도 전에 두 사람은 곡운성의 거처에 당도했
다.
그러나 그곳에는 처절한 혈투가 벌어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곡
운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조응, 이놈!"
연우진과 연능강은 실로 아득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연화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침
착하게
방안을 흘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내 연우진에게 옮겨
졌다.
"곡 장문인은 죽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그는...... 비조응에게 유인당했을 거예요."
"비조응,그 교활한 놈 같으니!"
연능강의
두눈에서 새과란 광채가 짙어졌다.
연우진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이내 초조한 기썩이 되었다.
"강시들이 있는 마을이다. 곡
장문인이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거기선 살아남기 어려울 터!"
휘이익!
다음 순간 연우진 등은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려 한 방향으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시들의 마을에 당도한 그들은 망연자실 그 자리에 굳어지
고 말았다.
"저럴 수가!"
실로 엄청난 광경이 눈앞에 ?쳐져 있었다.
수백여 강시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쓰러져
있지 않은
가?
뿐이랴. 한쪽에는 비조웅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곡운성은 비조응의 시체 앞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에 빠
져 있었다.
이 뜻하지 않은 광경은 연우진, 연능강은 믈론이고 모든 연씨 일족에
게 엄청난 경악을
안겨주었다.
'저자의 무공이 이 정도까지라니!'
곡운성의 전신에는 적지 않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그 모습으로 미루
어볼
때 악전고투의 싸움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만했다.
그때 곡운성이 운공조식을 마치고 눈올 떴다.
연능강이 황급히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상황인가?"
곡운성은 한숨을 내쉬며 비조응의 시신을 응시?다.
"방 안에서 저자의 암습을 받았습니다.
실로 악랄하고 무서운 검법이
더군요."
"달월검법이네 ."
연우진이 고까를 끄덕였다.
"그 검법도 무섭지만 이곳의
강시들은 더욱 무섭네. 대체 이 강시들을
어떻게 잠재웠는가?"
"강시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피리를 불지 못하게 하는 방법뿐이었습니
다."
"오오!"
"먼저 피리를 부수어 강시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야 간신히 저자
를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 훌륭하네. 자네의 부상은 염려할 필요 없네."
연우진은 만면에 홉족한 ?을 띤 채 위로하듯 말올 이었다.
"그 정도
부상이라면 내가 지니고 있는 영약으로 곧 치료할 수 있을
걸세."
"내 평생 지금처럼 기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네!"
연능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비조웅은 비씨 일족 중에서도 그가 가장 꺼려하던 인믈이었다. 그 괴
이신랄한 탄훨검법도
가공스럽지만, 그의 무서움은 강시들을 조종하는
능력이었다. 한데 곡운성이 강시들을 조종
하는 비조웅을 제거했고, 그 자신도 심한
부상을 당해 있으니 그야말
로 손도 대지 않고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한 셈이 아니겠는가?
"빨리 곡 장문인을 모셔라!"
연우진의 명령에 연씨 일족들은 재빨리 곡운성을 부축하고는 마을 쪽
으로 움직였다.
연능강이 문득 괴소를 머금은 채 비조응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 동안 이놈 때문에 실로 ?은 고생을 했는데 결국 이 모양이 되었구
나."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비조응의 시신을 향해 벼락같은 일장을
쳐내었다.
퍼퍽!
"확실히 죽었군!"
연능강은 음산한 괴소를
흘리더니 비로소 몸올 돌렸다. 그는 연우진의
의미있는 눈길을 주고받더니 서로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연화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홀로 남은 그녀는 비조웅의 시신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순간 그녀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차가운 냉기가 서린 조소였다.
그날 저녁
곡운성의 거처로 연우진과 연능강이 찾아왔다.
연우진의 손에는 호리병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어떤 외상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이네."
"감사합니다."
곡운성은 감사를 표한 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호리병의 약을 남김
없이 마셔버렸다.
일순 연우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갔다.
원래 그가 건네준 것은 영약이 아니라 정제된 음화신수였다. 일반적인
음화신수는 마신 뒤 몇 달 뒤에나 음기가
발작하지만, 그가 건네준 음
화신수는 불과 열흘 만에 음기가 발작하도륵 되어 있었다.
'네놈도 이젠 끝장이다. 열흘만 지나면
대라신선이라도 네 놈의 몸 속
에서 발작되는 음기를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곡운성은 약효를 전신으로 홉수하기 위해 운공조식을
시작하고 있었
다.
이윽고 그가 운공조식을 마친 후 눈올 뜨자, 연우진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좀 어떤가?"
"정말 신기한 약이로군요. 내상은 씻은 듯이 가라앉았고, 상처 부위의
퉁증도 사라졌습니다."
곡운성은 감탄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연능강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스쳐갔다.
'당연하지. 당장은 공청석유와 똑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곡운성이 이미 그들의 내심을 꿰뚫어보고 있을 뿐 아니라 품속에 한
병의 양화신수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올!
곡운성은 이미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비학에게서 한 병의 양화신수
를 얻어놓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곡운성 아니라,
은 한 병의 공청석유를 고스란히 체내에 홉수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
지였다.
그러나 곡운성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팔문금쇄진의 파해법을 알아낸
터라 두 분을
찾아뵈려던 중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연우진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곡운성의 두손을 덥석 잡
았다.
곡운성은 빙그레 미소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끌어당겼
다. 바둑판 위에는 이미 백돌과 혹돌이 팔문금쇄진의 형상으로
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팔문금쇄진의 숨겨진 정체입니다."
"오오!"
연우진과 연능강은 신음 같은 탄성을 발하며
바둑판 앞으로 황급히 다
가섰다. 그로부터 채 반 시진도 지나기 전에 그들은 흥분한 신색으로
곡운성의 방을 나섰다.
그렇다.
오십여 년올 기다려온 때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연우진은 병장기를 들고 운집한 연씨 일족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연
능강을 선두로 연씨 일족은 폭풍 같은 기세로 비학의 마을을 향해 움
직이기 시작했다.
"와아아!"
"와아!"
연우진은 맨 후미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전신의 피가 일시에 끓
어올랐다.
'이 순간을 위해 오십 년올 기다려온
셈인가......'
팔문금쇄진 하나 때문에 단 세 명에 블과한 상대를 어찌하지 못하고
인내해은 세월이었다.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한편,곡운성은 연씨 일족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한 후 품속에
서 양화신수를 꺼내어 들이마셨다. 이어 그는 주위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밖으로 나온 순간 그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연화!"
뜻밖에도 그의 앞으로 연화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안개처럼 회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딜
가시는 거죠?"
"나는......."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널 셈인가요?"
"..........."
곡운성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그녀
는 이미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연화는 이내 쓸쓸한
안색이 되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난 이미 당신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당신이 은밀
히 비학을 만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비조웅이 죽지 않았다는 사
실도 알아요. 내 손으로 그 시체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정교한 인피면구를
벗겨냈으니까요. 그건 단지 강시들 중
하나였어요."
그 말에 곡운성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뛰어난 재녀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즐은.......'
모든 게 다 탄로났다는 생각이 들자. 아득한 절망감이 그의 전신을 휩
쓸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만약 연우진
과 연능강도 이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면 어
찌 괄문금쇄진의 파해법을 그대로
믿고 달려갔단 말인가?
그렇다.
전후 상황으로 보아 연우진과 연능강은 아직 그 모든 사실을 모를 가
능성이 많았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왜 조부님들께 하지 않았소?"
곡운성의 질문에 연화는 두눈에 기이한 이채를 발하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당신의 행적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후후....
. 나를 죽이고 싶나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태연자약한
한마디였다.
사실 곡운성의 입장은 그렇게 해서라도 비씨 일족을 구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화에게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짐작하
고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연화 소저는 내가 어찌하기를 바라오?"
연화는 곡운성을 뚫어지게 정시하더니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데리고 중원으로 가준다면 모든 것을 비밀로 하겠
어요."
곡운성은 전혀 예기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연화의 두눈에 어떤 열망의 빛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당신도 이미
조부님이 북룡맹과 연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과 비씨 일족이 여길 벗어난다는 건 블가능해요. 하지만
나는
포위망을 벗어날 방법을 알고 있어
요."
곡운성은 만면에 당혹의 빛을 떠올렸다.
"연화 소저, 나는 도무지 소저의 말뜻을
알 수가 없구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연화는 두눈을 신비롭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셋째조부님인
천은 선생의 말씀대로 이곳에 인재를 찾아왔다
는 말을 난 믿어요. 그리고 비영이 대단한 인재라는 사실도 인정해요.
비영은 믈론이고
이 연화마저 끌어들
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그녀의 말은 곡운성으로선 솔깃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올 따를 수가 없었다. 천은 선생은 분명 둘 증 하나만을 선
택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곡운성은 난감한 심정으로 물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두 조부님과 연씨 일족들은 어찌되는 것이오
?"
연화는 만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할아버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군요. 설령 음화신수를 얻
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은 몇 년 이내에 모든 중독현상을 플고 여길
나갈 거예요."
"내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유는 할아버지와 나의 뜻이
다르기 때
문이에요. 할아버지는 북룡맹과 합치길 원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에요."
연화는 커다란 두눈에 가득
이채를 담은 채 곡운성을 지그시 응시하더
니 말을 이었다.
"난 북룡맹은 물론이고, 무림맹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당신에게
는 흥미가 있어요."
그녀의 한마디는 묘한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곡운성은 그녀의 뜨거운 눈길을 대하며 내심 크게
심기가 진탕되었다.
그의 뇌리에 천은 선생의 예언이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로되,
이를 어기면 천리가 어
긋나서 엄청난 파탄이 초래될 것이다. 만약 두 명이 모두 널 따른다면
반드시 한 명은 죽여야
한다......
'이토록 정확하게 그분의 예언이 들어맞을 줄이야. 그렇다면 죽여야
할 상대는 바로......!'
곡운성은
둥줄기에 전을이 스치는 걸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은 어떤 확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곡운성이 절대로 자신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곡운성의 둥줄기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연화
소저...... 이렇게까지 해서 날 도우려는 의도가 무엇이오?'
연화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얼굴을 가볍게 붉히
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곡운성은 순간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그녀의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위대한 사
랑의 마력 앞에
굴복한 것이었다. 곡운성의 모든 행적과 생각을 알면
서도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이제는 혈육의
정마저 끊으며 곡운성을 따르려는
그녀의 결심은 오직 사랑에 기인한
것이었다.
"용서하시오, 소저!"
곡운성의 손끝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 식
지에서 은섬지가 소리없이 뻗어나갔다.
연화는 가슴 요혈 몇 군데에 뜨끔하는 통중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 느
낀 순간 그녀의 전신에선 모든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맥없
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연화는 엄청난 블신이 담긴 눈길로 곡운성을
을려다보았다.
그녀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마혈마저 제압당한 터라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곡운성은
복잡한 신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오, 연화 소저...... 소저의 뜻은 고맙지만 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뇌리에는 천은
선생의 당부가 무섭게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연화를
죽일
수가 없었다.
휘릭!
그는 이를 악물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오습은 삽시간에 장내에서 멀어져갔다.
차가운 땅 위에 쓰러진 채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눈길....
연화의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깊은 절망과 배신감, 그리고 모멸감으로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점차로 무서운 중오의 빛으로 바뀌어갔다.
곡운성은 알지 못했다. 이날 연화를 죽이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할 엄
청난 결과를......
제 41 장
결의형제
바로 그 시각.
연우진을 비룻한 연씨 일족은 거침없이 비씨 일족의 마을로 쳐들어가
고 있었다. 팔문금쇄진은
더 이상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진법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약간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비씨 일족의 마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
다.
"비학은 썩 모습을 나타내라!"
연능강은 선두에서 움직이며 벽력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연씨 일족은 삽시간에 주위의 모옥들을 포위한 후 안으로 짓쳐들어갔
다. 그러나 비학과 비영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달아난 것 같습니다!"
한 흑의인이 모옥의 입구에서 연우진울 향해 크게 외쳤다.
"이런!"
연우진의
뇌리에 일순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양화신수를 찾아라!"
휘획!
명령을 받은 연씨 일족들은 급히 사위로 흩어졌다.
연우진과 연능강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눈길은 똑같이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양
화신수를 찾아 신형을 날렸다.
그렇게 차 한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이곳인 것 같습니다!"
마올의 맨 뒤쪽 한 거대한 암벽 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연우진과 연능강은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채 숨을 두 번 들이마시기도 전에 그 장소에 도착했다. 암
벽 밑에는 좁은 동굴이 나 있었다.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거대한 지하광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하광장
은 사방으로 막혀 있을 뿐, 어디에도 이어진 동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연능강이 한 곳을 응시하며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하광장 한쪽이 완전히 붕괴되어 있지 않은가?
"저건!"
하얀 자기병 하나가 평평한 바위의 틈새에 끼워져 있었다. 그 자기병
옆의 바위에는 금강지의 수법으로 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다른 생명들을 생각해서 한 병의 양
화신수를 남긴다. 양화신수의 샘은
원래 이 아래 백여 장 길이의 구불
거리는 좁은 통로 끝에 있었다. 그러나 그 통로를 비롯하여 주위에 연
결된 거미줄 같은 모든
통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설령 치수의 제왕인 제우가 일천 명의 인원으로 일백 년을 파낸다 하
더라도 그곳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연우진의 눈썹이 일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비,.....학, 네놈이......"
무서운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의 눈빚은 복잡한 여러 느낌을 담은 채 격하게 파랑을 일으키고 있
었다. 무저갱의 나락으로 추락해내리는 자신의
영흔을 지켜보는 기분
이 이러하리라.
"비학을 잡아라!"
연능강의 입에서 울부짖는 듯한 노성이 터져울렸다.
모든
인물들은 폭풍 같은 기세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푸화악!
누군가가 비상폭죽을 하늘 높이 쏘아올렸다.
연우진은 폭죽이
터져오르는 하늘을 보며 지그시 입술을 악믈었다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절대로......."
같은 시각, 곡운성은 막 백양림을 탈출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는 비학
을 업은 비영과 비조웅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이미 연씨 일족의 추격
권은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었다.
이토록 간단하게 연씨 일족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영의 지모 덕분이었다.
비씨 삼대는 미리 강시 마을로 나와 있었으며, 강시로 분장해서 다른
강시들 틈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연우진과 연능강이 가짜 비학의 시
체를 보며 기뻐하는 걸 바로 곁에서 지켜보
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텅 빈
팔문금쇄진 안으로 들어가 헤매는
동안 완전히 마을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진정한
험로는 바로 지금부터였다. 풍운령을 온통 뒤덮고 있을 북룡맹
의 포위망을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화극렬이 있는 걸로 보아 적지
않은 절정고수들이 따라왔을 것이다.'
곡운성은 해남도에서의 진저리쳐지는 혈전을 상기했다. 그곳에 있던
흑도고수들 중 절반이라도
풍운령의 포위망 속에 있다면 탈출은 거의
블가능할 것이다. 단신이라면 모르
되, 그의 옆에는 비씨 삼대가 있지 않은가.
'반드시 탈출하고야 말 것이다!'
그는 강렬한 신광이 어린 눈으로 비조웅과 비영을 바라보았다.
비영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조
웅은 수중의 검을 힘있게 쥐어보이며 굳은 결의를 드러내 보인다.
스슥..... .
일행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탈출이 목적이었다. 어떻게든 적의 포위망에서 빨리 벗어나
야만 했다. 곡운성은
오감을 최대한 이용하여 소리없이 전진해갔다.
이내 숲속 곳곳에 포진해 있는 북룡맹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져 왔다.
그들은
거의 십 장 간격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 틈 사이를 교묘하게
삼삼오오 짝올 지어
빠져나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
삼십여 장도 전진하기
전에 곡운
성의 몸은 식은땀으로 홍건히 젖어들었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이로군......"
따지고 보면 이 엄청난 북룡맹 고수들은 음양신수를 얻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곡운성은 새삼 북룡맹에서 음양신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의 귓가로 비조웅의 전음이 과고들었다.
'전방에 누군가 있는 것 같소.'
그러나 이미 곡운성은 그 사실을 감지한 채 수풀 속으로 몸올 은신하
고 있었다. 비영과 비조웅이 뒤따라 몸을 숨기며 호흡을
멈추었다. 일
행의 시야에 곧 일단의 무리가 포착되었다.
"어, 시원하다."
"흐흐..... 정말 시원한 맛은 계집의
속살에 있지.'
두 명의 텁석부리 장한이 바지춤을 털며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다시 다섯 명의 흑의장한들이
보였다.
그때였다.
휘릭!
장내에 언월도를 비껴든 위맹한 풍도의 혹포노인이 바람처럼 몸올 날
려 오더니 외쳤다.
"놈들이 탈출했다는 신호가 왔다! 모두 경계태세를 강화해라!"
순간 흑의인들이 민첩한 동작으로 일정한 진을 형성하기 시작햇다. 그
야말로 잘 훈련된 일사블란한 움직임이었다.
흑포노인의 곁에서 한 장한이 음산한 웃음을 홀려냈다.
"흐흐...... 놈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조장님의 묵룡언월도의 위용을
볼 수 있겠군요."
흑포노인은 두눈에 괴이한 빛을 뿜어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한편, 암중에 숨어 상황을 살피던 곡운성은 이 순간 내심 놀라지 않올
수 없었다. 그는 묵룡언월도라는 말을 엿들은 순간 한 인믈을
뇌리에
떠올린 것이었다.
'언월신도 주팽! 저런 인물이 북룡맹에서 고작 조장의 직위를 맡고 있
었단 말인가?'
언월신도 주팽.
그는 원래 산서의 명가인 언월보 출신이었다. 언월보는 특이하게 삼국
시대 촉한의 지장인 미염공 관우를
시조로 모시고 있었다. 언월보만의
특이한 언월십팔풍이라는 언월도법은
무림에서 일절로 평가되고 있을 정도였다.
주팽은 바로
언월보주인 신월무적 관패의 수제자였다. 무공만으로는
이미 삼십 세에 사부를 능가했다고 알려져 있는 고수자이기도 하다.
젊어선
산서제일룡이란 별명으로 블리기도 했던 그일진대...... 그런
그가 북룡맹의 당주도 아닌 일개 조장의 위치에 있다는 건 실로 이상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주팽의 시선이 갑자기 날카로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곡운성은 직감적으로 그에게 발각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떻게 느
낀 순간 이미 그의 오른손은 번개같이 반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파파앗!
다섯 즐기의 은섬지가 미세한 파공음을 울리며 쏘아져 갔다.
"헛!"
주팽은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와 동시, 그는 몸을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젖혔다. 서늘한 지풍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
만, 다른 흑의인들은 그만큼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헉!"
"크흑!'
주팽을 제외한 네 명의 흑의인들은 신체 일부가 블에 데인 듯 화끈함
을 느끼며 온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모두 마혈이 제압된 것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뽑
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동작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번쩍!
비조웅이 검날이 섬광처럼 그들의 목을 스쳐간 것이었다.
"크아악!"
"아악!"
두 마디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보라가 솟구쳤다.
비조웅은 여유를 주지 않고 야수처럼
민첩하게 주팽을 공격해갔다. 주
팽은 싸늘한 일갈을 토하며 퉁기듯이 몸올 허공으로 떠올렸다.
"제법이지만 아직 멀었다!"
그는 허공에서 몸올 한바퀴 회전하며 폭풍 같은 기세로 묵룡언월도를
내리쳤다.
카캉!
도와 검이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이 튕겼다.
"어억!"
조비웅은 검올 쥔 손목이 전기에 감전된 듯 저려옴을 느끼며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대단한
자로구나!"
왼래 주팽이 지닌 언월도는 구백칠십 근에 달하는 무게의 중병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지도 못하는 엄청난 무게를 그는
젓가락처럽 자유
자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만일, 비조웅이 음양신수를
복용하여 내공이 중진되지 못했다면 그의
손목은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으리라.
"재법이로군."
주팽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묵직한
일성을 뱉아내었다. 비조웅을 응시
하는 그의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경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언월도에
부딪히고도 병기를
놓치지 않은 상대를 본 적이 없었다.
우우웅!
그의 언월도가 다시 대지를 쪼갤 듯한 기세로 춤올 추었다.
그 일격은 아까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다시
검과 도가 충돌하며 시퍼런 볼꽃을 퉁겨냈다. 비조웅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흐욱!"
그는 주팽의 칼에 실려 있는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퉁겨
져 날아갔다. 위기의 순간, 주괭의 앞을 막아서며 섬전 같은 일검을
발출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내가 그대를
상대해주겠소!"
번쩍!
주팽의 얼굴에 일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상대의 검은 그의 도세를
무인지경으로 파괴시키며 짓쳐들고
있었다.
'곡운성이로구나!'
직감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그는 무서운 속도로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그에 따라 그의
언월도가 회오리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기를 폭출해냈다.
고오오!
곡운성은 일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가공할
도의 회오
리에 자칫 휘말렷다간 온몸이 수백 조각으로 갈라질 판국이었다.
'과연 명블허전이로구나!'
그는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올리며 혼신의 내공울 금사검에 집중시켰
다. 주팽은 숨쉴 여유도 주지 않으려는 듯 곡운성의
신형을 따라붙었다. 바로 그때였다.
창공을 향한 곡운성의 검끝에서
시퍼런 기운이 일직선으로 피어오른 것은.
번-쩍!
그 검기는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주팽의
도세을 종잇장처럼 간단히
박살내버렸다.
"검강!"
주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였다. 검강은 그대로 그의 가슴 기해혈
에 작렬했다.
"크흑......."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주팽은 모질게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이내 휘청거리며
몸을 세웠으나 다시는 언월도를 들어을리지 못
했다. 그는 엄청난 불신의 눈으로 자신의 기해혈에서 뿜어지는 핏줄기
를 내려다보았다.
"허허......."
마치 전신의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술새로
틀툴 새어나왔다.
본래
기해혈은 단전과 함께 내공을 발휘함에 반드시 통과되는 중요한
혈맥이다. 그는 이미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
다.
"졌소...... 죽이시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음성이었다.
곡운성의 눈가에 일순 복잡한
빛이 스쳐갔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는 주팽의 모습에서 적대감을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알 수 없는 친
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그 말을 남기고 곡운성은 몸올 돌렸다.
주팽의 입가에 일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내가 죽일 수밖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천령개를 찍어
버렸다.
곡운성이 홈칫 시선을 돌리는 사이 주팽의 몸은 썩은 고목처
럼 땅에 쓰러졌다.
쿵!
곡운성은 망연한 신색으로 주팽을
내려다보았다.
주팽은 은몸을 푸들푸들 경련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즉사를 하지 않은
것은 공력이 폐쇄된 탓에 천령개를 깊이 찍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렇
다 해도 이미 천령개가 치명적으로 망가진
상황이라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단지 무서운 고통 속에
천천
히 죽어갈 뿐. 그러나 죽어가는 주팽의 얼굴에 떠오른 건 고통이 아니
라 깊은 회한이었다.
"어서.....
떠나시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그것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음성이었다
곡운성은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북쪽에는...... 반드시 북룡맹을 추종하는 자들만...... 있는 건 아
니오..... .. 난 어쩔 수 없었소......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탓
에...... 차라리 구차한 삶을 끝내게
되어.....,다
행.....,."
주팽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곡운성은
망연한 심정으로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주 대협!"
무공만 따지자면 주팽은 화극렬과도 비견될 수 있는 인믈이었다. 그런
그가 조장의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비영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무서운 일이군요. 이 주팽 같은 인믈이 북룡맹에
적지 않올 것입니
다."
곡운성의 얼굴에 암울한 기운이 드리워졌다. 이 순간 그는 강호에 전
해지는 소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북룡맹에서 반역자를 다스리
는 방법에 대한 소문이었다.
'반역자는 단칼에 처형하고, 그 가족은 팔열지옥보다
더하다는 찰합미
의 열화산지대로 끌려가 죽올 때까지 유황을 캐야 한다더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라온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였다.
장문인!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비영의 긴장 어린 한 마디가 곡운성의
이성을 일깨웠다. 허공을 가르
며 화살들이 새카맣게 날아든 건 거의 동시였다.
쐐애?
쐐액!
곡운성은 벼락 같은
기세로 금사검을 휘둘렀다. 날아들던 화살이 모조
리 퉁겨나가거나 잘려진 채 흩어졌다. 그제서야 곡운성은 사방에서 수
백 명의
고수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살계를 열어야겠구나!'
곡운성은 이를 악물고 금사검을 고쳐잡았다.
"절대 내 뒤를 떨어지지 말고 따라오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벼락 같은 기세로 쏘아져 갔
다. 동시
그의 금사검이 거대한 반원을 수없이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
것은 실로 가공할 검기의 폭풍이었다.
고오오!
"곡운성이다!"
"으아악!"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대지를 적신다.
비영을 비롯한 비씨 삼대는 그의 놀라운 무공에 새삼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러나 비영을 감탄시킨 것은 곡운성의 검이 대부분 적들의 팔
과 다리를 잘라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혹 어쩔 수 없이
목이 잘리
거나 심장이 찔려 죽어가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전투 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부상만을 입은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나는 진정한 대인을 만났구나!'
비영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와중에도 어떤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비조웅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격을
?쳐내고 있었다.
"으아악!"
"끄아아!"
그의 탄월검법은 마치 야수의
발톱처럼 잔혹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의 악귀나찰을 방불케 했다,
곡운성은 끝없이 검올 휘두르며 일행을 이끌고 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뒤를 비학을 업은 비영이 따르고, 맨 후미에서는 비조응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홀렀을까?
비조웅의 의복은 완전히 혈의로 변해 있었다. 그 대부분은 다른 자의
피였지만,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적지
않은 외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에는 별다른 고통의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외
눈엔 독사처럼 차가운 살기가 번들거릴 뿐이다.
번쩍!
파아앗!
"크악!"
"허억......!"
그러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북룡
맹의 포위망은 그토록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영은 탈출이
성공으
로 끝나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혼천계가 가까워지고 있다!
혼천계는 비영이 선택한 탈출로였다. 그의
판단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협곡 아래로 흐르는 급류의 혼천계만이 유일한 생로였다. 처음부터 곡
운성은 비영에게 들은 혼천계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비조웅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북룡
맹 고수의 한 자루 철도가 그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비조웅의 검에
목젖이 꿰뚫렸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비조웅에게 다시 다섯 자루의 대
감도가 날아들었다.
"죽어랏!"
카카캉!
비조웅은 사력을 다해 세
명의 몸을 단칼에 베어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인물의 칼은 그대로 그의 목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위기의 순
간, 창백한 은빛
섬광이 날아와 그 두 자루
대감도를 떨쳐내었다. 어느새 곡운성이 은섬지를 날린 것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조웅은 다시
무서운 기세로 그 두명의 목을 잘라
버렸다.
울창한 갈대숲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일차 포위망은 뚫은 것 같소."
곡운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씨 삼대를 돌아보았다.
그의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
비조웅의 부상은 매우 심해보였고, 비
영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큰일났구나. 이 상태로라면 저들은 채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할 것이
다.'
그런 곡운성의 내심을 짐작한 것일까?
비영이 지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감에 찬 음성이었다. 그는 문득 몸올 숙여 한 줌의 흙을
움켜쥐더니
허공에 흩뿌렸다.
휘이잉.......
산풍을 타고 흙먼지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시부턴 바람이 계곡쪽으로 바뀌지요."
그 말에 비조웅은 신경질적으로 외켰다.
"아직도 혼천계까진 십 리나 남았는데 바람이 바뀌는 게 무어 대수냐
!"
그러나 곡운성은 비영의 말뜻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의 입에서 나직
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화공......?"
비영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렇습니다. 불과 바람은 찰떡궁합이지요."
그는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어 갈대밭에 블을
붙였다. 불길은 이내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화르르......
화르르......
그 광경을 보며
비조응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핫핫핫...... 이제 보니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그는 그동안의 피로와 부상의 고통도 잊은
듯 비영의 어깨를 다독거렸
다.
"과연 너는 내 아들이다!"
비영의 등에 업혀 있던 비학이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아버님,그건 무슨 뜻......."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움직이자꾸나."
비학의 한마디에 비조웅은 소년처럼 블만 섞인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일행은 다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혼천계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럴 수가......."
연능강은 망연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일행들은
놀란 눈으로 불타오르는 풍운령을 보고 잇었다.
이미 불길은 백양림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대자연의 위력이었다.
연우진은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연씨 일족들에게 명령했다.
"오두 여길 탈출해라!"
연능강이
다급히 물었다.
"음화신수는 어떡하고?"
"양화신수가 한 병뿐인데 음화신수가 무슨 소용인가?"
연우진의 음울한 말에
연능강은 새삼 분노가 치미는지 몸올 부르르 떨
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백양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연씨 일족은 썰믈처럼
백양림을 빠져나갔다. 몸올 날리는 연능강의 입
에서 문득 신음 같은 일성이 새어나왔다.
'북룡맹의 무사들이 만약 놈들을 잡지
못했다면......'
연우진이 얼굴에 순간 섬뜩한 한기가 드리워졌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내 손으로 놈들을
죽일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그들의 뒤로 불타오르는 백양림이 멀어지고 있었다. 조상대대로 살아
온 고향이
완전히 불바다로 변한 것이다.
비영이 지른 불길은 예상보다 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북룡맹 고수들은 추격을 하기는커녕
불길을 피하기도 바쁠 지경이었
다. 그러나 그 와증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
로 화극렬이었다.
......화공을 사용했다면 놈들이 갈 방향은 한 곳뿐이다!'
화극렬은 비영이 불을 지른 이유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놈들의 목적지는 혼천계다!"
화극렬은 벽력 같은 음성으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이내 화극렬을 선두
로 북룡맹의 고수들은
혼천계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곡운성을 죽여야 한다!"
화극렬은 해남도에서의 사건을 단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었다. 게다가
상황으로 보아 음양신수를 얻는 일도 이미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공산
이 컸다. 그 모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곡운성 때문이었다. 만약 음양신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곡운성마저 놓친다면 과연 무슨 면목으로 천일비 앞에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채 반 시진도 되기 전에 화극렬은 부하들을 이끌고 혼천계에 당도했
다.
"하류로 간다!"
화극렬은 무서운 살기를 발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혼천계의 계곡을 흐르는 급류의 물결은 실로 살벌한 것이었다. 거친
물살은
여기저기 계곡에 부딪치며 천등 같은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콰르릉!
콰르르.... ...
흡사 용이 몸부림치는 듯한
급류의 폭은 이십여 장에 달했다. 악마의
거품 같은 그 물살은 가과른 경사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
다.
혼천계의
하류에 도착한 화극렬은 수공에 익숙한 부하들을 추렸다.
"급류의 바위 뒤에 매복하라!"
백여 명의 북룡맹 무사들이 혼천계의 급류로
잠수해 들어갔다.
나머지 고수들은 급류 양쪽의 암반이나 나무 뒤로 모두 매복했다. 그
들은 모두 손에 갖가지 암기를 꺼내들었다.
곡운성 일행이 나타난다면 먼저 새카맣게 암기들이 뿌려질 것이다.
자시를 넘어 축시에 이르고 있는 시각이었다.
화극렬은 바위
뒤에 숨어 혼천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극렬의 두눈이 서서히 곤흑의 빛으로 물들었다.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곡운성 일행이 먼저 혼천계의 하류를 통과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화공
이 시작되었을 당시
화극렬이 있던 장소는 혼천계의 하류와 지척지간
이었다. 곡운성 등이 먼저 혼천계를
통과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쿠쿠쿠!
갑자기 귀이한 굉음이 사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혼천
계의 물살 속에 매복했던 인물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화극렬의 두눈이 순간 경악과 블신으로 부릅뜨여졌다.
그것은 끝이
뾰족하게 깎인 수백 개의 아름드리 나무들이었다. 그 나
무들이 혼천계의 무서운 급류를 타고 들이닥친 것이다.
"이,
이런......!"
화극렬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달빛도 없는 캄캄
한 밤중인 데다 매복을 위해 횃불조차 밝히지
않은 상확이다. 창졸간
에 기습을 당한 물 속의 부하들이 모조리 물밖으로 퉁겨져 나오고 있
었다. 그나마 퉁겨져 나오는 부하들은
다행이었다. 대다수 부하들은
나무에 몸이 꿰어지거나 머리가 박살이 나서 처참하게 죽어갔다.
"으아악!"
"아악!"
화극렬은 아득한 절망감과 분노 속에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속았구나! 놈들은
상류로 거슬러 을라간 것이다!"
혼천계의 상류도 분명 불길이 뒤덮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천계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블길은 피할 게
아닌가?
그렇다.
완벽하게 역으로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수백 개
의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서 하류로
떠내려 보내기는 불가능했다. 그
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 통나
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다. 화극렬의 그러한
판단은 정
확한 것이었다. 그 통나무들은 원래 백여 년 전에 비연장에서 외부세
력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준비
해둔 것이었다.
화극렬은 무서운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당했군, 깨끗하게......."
한편, 혼천계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간 곡운성 일행은 풍운령올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발 아래쪽으로는 불타는 풍운령이 보이고 있
었다.
화르르.......
화르르.......
그것은 그야말로 지옥의 겁화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바로 그 불바다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북룡맹이 펼친 천라지망의 포위를 뚫고...
....
그 기적은 바로 비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모두가
비형 덕분이오."
곡운성은 비영에게 진심으로 치하했다.
비영은 예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슨 말씀올......
저는 그저 머리만 조금 썼을 뿐입니다. 곡 장문인
이 안 계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곡운성의 얼굴에 문득 결연한 빛이
스쳐갔다, 그는 정색을 한 채 비영
을 응시하며 입올 열었다.
"비형 ...... 저 불길 속을 함께 빠져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몸
과 함께 해줄 수 있겠소?"
비영의 신색이 일순 엄숙하게 변했다. 이미 곡운성이 이 풍운령을 찾
아온 이유를 알고
있는 터, 어찌 그 말뜻을 모르겠는가?
"미력한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장문인을 따르겠습니
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영은 곡운성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순간부터 장문인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곡운성은 재빨리 비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나는 주종의 관계는 원치 않소. 그보다는 의형제를 맺는 게 어떻소?"
곡운성의 말에는 훈훈한 정감이 어려
있었다.
비영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의형제라니, 당치 않습니다."
곡운성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것은
내 진심이오. 비형은 해남파의 제자가 아니므로 의형제로 맺
어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소."
비영의 얼굴에 복잡한 격동의 빛이
물결켰다. 그것은 깊은 감동의 빛
이기도 했다. 그는 부친 비조웅과 조부 비학을 돌아 보았다. 비조웅과
비학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비영은 비로소 결심한 듯 곡운성을 향해 예를 표했다.
"비영, 형님께 인사드럽니다."
곡운성은 비영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하핫! 저 옛날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공명을 얻었건만 나는 한번의
만남으로 그대를
얻었으니 내 흥복일세."
"형님 !"
두 사람의 뜨거운 눈길이 서로 얽히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비학과 비조웅의
얼굴이 기쁨과 격동의 빛으로 물들
었다.
......이제서야 우리 비씨 가문이 날개를 펴는구나!
비학은 감개무량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겪어온 끔쩍한 고초가 이 순간 눈녹듯이 사
라지고 있었다. 지금 막 밝아오고
있는 여명의 하늘처럼.......
이틀 후, 곡운성 일행은 금계에 도착했다.
금계는 무림맹의 삼십육개 지부 중 하나인 금계지부가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북룡맹이라 해도 이곳까지 추격해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탈
출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었다.
제42장 보이지 않는 손
찌는 듯한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블
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추색이 완연한 계절이었다.
독고무적은 화원을 거닐며 막 봉우리를 터트리는 국화의 향을 음미하
고
있었다.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를 줄 뿐 아니라, 세월의 빠름을 가르쳐준다. 독
고무적은 이 순간 오직 앞만 보고 살아온 지난날들을
회상하고 있었
다. 돌이켜보면 벼랑 끝을 달리는 듯 위태로운 승부로 점철된 나날이
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다. 만인이
앙복하고 온세상의
모든 것을 뜻대로 이를 수 있다는 지존의 자리..,....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몇 가지 근심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무림맹 산하에 있는 여러 문파들의 거센 입김이었
다. 처음
무림맹을 전복시키고 맹주로 등극했을 때만 해도 그에겐 뚜
렷한 명분이 있었다. 부패와 혼란으로 치닫는 무림맹을 정화시켜 백도
무림의 미래를 꾀한 다는.......
그러나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명분은 뜻이 바랜 지
오래였다.
무림맹의 상당수 방파들은 그를 정통성을 지닌 무림맹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독고무적이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했으며,
집요하
게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썩은 무림맹을 정화시킨 후 물러나겠다고 한 한마디, 그 한마디가 족
쇄처럼
독고무적의 행보를 무겁게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새로운 원로원을 결성하여 정통성을 지닌 무림맹주를 뽑아야 한다는
소리가 각처에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으음......."
독고무적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을 흘려냈다.
그도 인간인 이상 권세에 대한 야망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물러난다고 해서 무림맹의 미래가
안정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독고무적은 누구보다도 무림을 사랑했으며, 확실한 미래를 이
끌어낼 자신감이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 외에 무림을 안정시킬 수 있
는 적임자가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설령
뜻이 올바르다 해도 능력이 부족한
자가 맹주로 등극하면 다시 백도무
림은 흔란의 길을 걷고 말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독고무적은 문득 시선을 들어
청명한 가올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헤아려 주지 못하는 무림방파들의 행동이 섭섭하게 여
겨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뒤쪽으로 환종비와 철무가 조용하면서도 절도있는 걸음으로 다가
왔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독고무적에게
공손한 예를 표했다.
"아침 문안 드럽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독고무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두 사람
의 눈빛에서 깊은 신뢰와 층성을 읽을 수 있었다.
독고무적은 몸을 돌려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환종비와
철무는 그림자
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림자.......
환종비와 철무는 철저한 독고무적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고무적의 고심은 곧 그들의 고심이었으
며, 독고무적의 생각은 곧 그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종비와 철무는 독고무적의 표정에서 그 내심을 읽
어낼 수 있었다.
문득 철무는 환종비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군의 마음을 괴롭히는 불순한 자들을 싹 쓸어버릴 방법만 있다면
난 당장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소.'
환종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철무와 같은 생각이었으므
로.
독고무적이 집무실 안으로 사라지자, 환종비와 철무는 옆으로 나 있는
호위실의 문을 열고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집무실 안에는 언제나처럼 후량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후량은 깊숙히
머리를 조아리며 미소 뛴 얼굴로 예를 표했다.
"요즘 들어 별로 신색이 좋아 보이시지 않습니다."
독고무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후 노사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군."
후량은 멈칫했으나 이내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맹주님 앞에서 어두운 얼굴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청성파와 해남파의 일입니다만......."
후량은 독고무적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올 이었다.
"아시다시피 정 각주가 직접 해남파와 청성파를 방문했지만 충성의 맹
약을 받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무림맹에 대한 비판만을 들었을 뿐입니
다."
독고무적의 안색이 일순 바윗덩어리처럼 무섭게 굳어졌다.
후량은 그의 눈가에
스치는 분노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이 일에 직접 나서볼 작정입니다만."
"어떻게 말인가요?"
"요점부터 말씀드린다면 청성, 해남 두 문과를 징계함은 물론이고, 다
른 문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즐 수도 있는 방법입니다.
고래로부터 수많은 전략가들
이 이용한 이이제이의 수법이지요."
후량의 어투는 마치 책 귀절을 읽는 듯 차분하고 명묘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그런 후량과는 반대로 독고무적의 신색은 점점 무심하게 가라앉고 있
었다. 그는
이 순간 엉뚱하게도 청성파나 해남파가 아닌 눈앞의 후량
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신기하리만치 이 눈앞의 모사는 자신의 생각을
깊이 꿰뚫어 볼 줄 알
았다. 그리고 항상 한발 앞서서 교묘한 대책을 강구해내는 것이다. 때
로 그 지나친 교활함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
껴질 정도다.
후량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현 무림을 이끌고 나갈 분은 오직 맹주님뿐이라는
걸 천하에
인식시키고 말 것입니다."
"됐소."
독고무적은 손올 들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그는 강렬한 눈길로 후
량을 정시했다.
"후 노사를 믿겠소."
후량의 얼굴에 일순 어떤 희열의 빛이 빠르게 스쳐갔다. 구체적인 계
획을
설명하기도 전에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후량은
깊숙히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실내를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서 득의의 미소가 피어을랐다.
'.....무림맹이란 배의
주인은 독고 맹주이지만,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는 건 바로 나 후량의 손이다.....'
초저녁 무렵이었다.
독고무적은 부인 유금하가 있는 내당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녀를 생각하면 어떤 시름도 이내 거짓말처
럼 사라진다. 그녀는 하늘이 독고무적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었다.
차를 준비하고 있던 유금하는 막 실내로 들어서는 그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보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다향은 깊어지는 법이지요."
독고무적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탁자
앞에 앉았다.
유금하는 언제나처럼 다소곳하면서도 우아한 몸가짐으로 차를 준비했
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독고무적은 새삼 신선한
감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금하, 당신은 하늘이 내게 준 가장 큰 축복이오."
독고무적의 말에 유금하는 놀란 눈빛이
되었다. 그녀는 생전 그에게서
애정의 표현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붉어진 얼굴
로 미소지었다.
"이상하군요. 그런 말씀을 다 하시고......"
독고무적은 약간 어색한 기분이 되어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생각해보니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받기만 했올 뿐,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소."
유금하는 마치 어린 소녀가 처음 사랑의 고백을
들었을 때처럼 설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설레임보다 더 큰 것은 어떤 불안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온 분이
아니었던가?
갑작스럽게 사람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왕왕 불길한 조짐으로
나타날 때가 있는 법이다.
"후훗......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제게 세 번의 큰 선물을 주었는걸
요."
"세 번의 큰 선물?"
독고무적의 얼굴에 의아한 및이
떠올랐다.
인기척과 함께 밝은 웃음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호호, 전 그 선물들이 뭔지 알지요."
장녀인 혜와 외아들 만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막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혜와 만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경쾌하게 예를 표했다,
독고무적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시선이 문득 아들
만의 건장한 어깨에 머물렀다. 만은 현재 무천군에서
수련중이었다.
만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심기가 조금 약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
나 몇 달 만에 한 번씩 나타나는 만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
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기라성 같은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 있는
무천군이 아닌가?
그때 독고혜가
자리에 앉으며 짤랑짤랑한 옥음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지금 어머님이 말씀하신 세 번의 선물 중 두 가지를 보고
계셔요."
독고무적은 그제서야 그 말뜻을 깨닫고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독고혜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둘째인
영이 시집을 가버리는 바람에 선물은 둘로 줄어든 셈
이지요."
"머지 않아 하나로 줄어들겠군......"
독고무적의 말에
유금하는 입올 가린 채 웃고, 독고만은 낭랑한 웃음
을 터트렸다. 오직 독고혜만이 얼굴을 복숭아빛으로 붉힌 채 짐짓 화
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이내 세 명의 시녀가 나타나 식탁 위에 풍성한 저녁음식을 올려놓았
다. 그야말로 화기애애하고 단란한 저녁이 아닐 수
없었다.
정풍이 모습을 나타낸 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식사중에 죄송합니다만 중요한 일이라서......."
정풍의 표정은 일체 무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고무적은 그 표정 뒤에 감추어진 초조함을 읽어낼 수 있었
다. 뭔가 중대한
일이 발생했음을 짐작한 그는 천천히 식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재로 가자."
유금하는 부드러운 웃음을 담은 얼굴로
독고무적을 배웅했다. 그러나
독고무적이 실내 밖으로 사라진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 대신 우려
의 빛이 드리워졌다.
알
수 없는 블길한 예감......
그녀의 예감이 빗나간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젯밤에 강령지부장인 손원이
피살당했습니다."
정풍은 화강암처럼 굳어지는 독고무적의 얼굴을 보며 빠르게 말을 이
었다.
"아직 흉수들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손원...... 손원이 죽었단 말이지......."
독고무적의 입에서 신음처럼 가느다란 일성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월영도 손원. 그는 무림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도의 대가
였다. 그의 도법은 월영도라는 별호가 그대로 설명해준다. 별호 그대
로 한번 칼을 뽑으면 달무리 같은 광휘만이 보일 뿐, 칼의
형체나 움
직임은 감지조차 할 수가 없다. 그만큼 손원의 칼은 빠르고 패도적이
었다.
오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의 칼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 절륜무쌍한 도법만큼이나 그는 뛰어난 지휘력을 지닌 인믈이었다.
그는 독고무적이 무림맹을 장악할
당시
거사를 함께한 일등공신이었고, 일 년 전부터는 무림맹을 에워싼 여섯
지부 중 하나인 강령지부의 지부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무림맹 주위에 있는 여섯 지부의 지부장들이 모두 그러했지만, 손원은
독고무적에게 친형제나 다름없는 아낌을 받아왔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손원 지부장 외에도......"
정풍의 안면 근육이 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부지부장인
육창을 비롯해서 강령지부의 일천 육백여 무사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몰살을 당했습니다."
".......... "
독고무적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뜨여졌다
"......몰살이란 말인가!"
"죽은 자들의 시체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습니다.
단지 죽기 전에 자신
들의 목과 가슴을 손으로 쥐어뜯은 흔적이 있을 뿐입니다. 상황으로
보아 판단하건대 어떤 가공할 독에 당한 게
분명합니다."
정풍의 얼굴에 어떤 분노와 공포의 빛이 동시에 떠을랐다.
독고무적은 두눈에 번갯불 같은 신광을 내뿜더니 신음 같은
일성으로
물었다.
"무려 일천 육백여 고수들을 눈깜짝할 새에 살상시킬 수 있는 독이라.
.... 너는 그런 가공할 독이
존재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느냐?"
정풍의 안색이 복잡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제 휘
하에 있는 독의 전 문가들이 조사해서 보고한 바에 의하면......."
정풍은 암울한 신색을 떠올리며
말올 잇지 못했다.
독고무적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정풍의 표정에서
이미 그 독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해라!"
"무림사상 한번도 출현한 적이 없는 새로운 독이며..... 그 위력은 우
리가 상상할 수 있는 독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 그리
고 적이 그런 독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정풍의 마지막 한마디는 마치 천둥처럼 크게 독고무적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독고무적의 안썩은 창백하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그렇다.
정풍은 지금 단순한 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강령지부의
손원을 비롯한 일천 육백여
무사들의 몰살조차도 문제가 아니었다. 정
풍은 지금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이 출현
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독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흉수가 북룡맹이라는 점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있던 독고무적의 심기가 일순 거짓말처럼 냉정
을 되찾았다. 타고난 위대한 승부사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났다고나 할
까.
"한 달 전 북룡맹의 고수로 보이는 수백 명의 인물들이 야음을 틈타
남하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천각은 이미 그들의 행적과
동태에 대
해 조사를 벌여왔습니다."
정풍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보를 분석해보면...... 그들은
북룡맹의 정예고수
들로 그동안 거의 소멸되어 흩어졌던 적풍단의 잔당들과 연계를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
독고무적은 묵직한 침음을 흘려냈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보느냐?"
정풍의 안면 근육이
일순 무섭게 경직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이 무림맹이 있는 황산 외곽의 강령지부를 공격했다
면...... 그리고 그 불가사의한
독이 지닌 위력를 확인했다면, 다음
목표는 이곳 무림맹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했던 것일까?
독고무적의
신색은 오히려 심해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서서히 활화산 같은 분노의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일비, 그대는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셈인가....'
독고무적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당장 무림맹과 삼십육개 지부에 비상령을 선포하라! 그리고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강령지부를 공격한 적의 살수들을 찾아 격멸하도록!"
무림맹은 발칵 뒤집혔다.
몰살당한 강령지부를 제외한 나머지 황산 일대의 오개
지부가 일제히
대대적인 수색에 착수했다. 무림맹의 모든 고수들에게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
다시 놀라운 소식이 무림맹에 전해졌다.
흉수의 무리들을 수색하던 설진지부의 고수 서른두명이 황산 명일곡에
서 떼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의 사인은 강령지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문의 독에 의한 것이
었다. 그 다음날에는 장강수비대의 무사
스물세 명이 똑같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무림맹은 그 연속적인 살상에도 불구하고 흉수들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사건 발생 사흘 만에야 드디어 독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을 알아낸 인물은 정파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독의
전문가이자, 육
대세가중 하나인 사천당가의 가주 당두성이었다.
당옥성이 독고무적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과거 원 말엽의 황실에서는 자신들에 대항하는 외부세력을 격멸시키
기 위해 천독신군 사천우를 비롯, 수십 명의 독 전문가들로
하여금 고
금 미증유의 독을 만들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독의 이름은 천멸지
독이며, 말 그대로 하늘조차 멸하겠다는 가공할
위력을 목표로 추진되
었습니다. 완성된 철멸지독 한 방울은 수천 명의 인명을 몰살시킬 수
있
으며, 어떤 해독약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독은 원 황실이
망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독올 만들어내는 일에 참여했던 자들은 비밀유지
를 하려는 원 황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는 법.......
그
일에 참여했던 독의 전문가들 중에는 본 사천당가의 반도였던 당풍
령도 끼어 있었고, 그는 기적적으로 원 황실의 주살령을 피해 살아남
아 본가에 모든 사실을 전해왔습니다.
당풍령은 그때의 후유중으로 오래 살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서찰로
남겼습니다.
그 중 하나는 미완성 천멸지독에 관한 것입니다. 당풍령의 서찰에 의
하면 그것은 완전한 천멸지독의 위력의 천분의 일도
못 미치는 것이지
만, 역시 현존하는 그 어떤 독에도 비견될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을 지
녔습니다. 그는 그 미완성 천멸지독이 원
황실로 전해졌으며, 언젠가
는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나타나리라 경고했습니다. 금번 강령지부를
몰살시킨 독은 바로 그 미완성
천멸지독임이 분명합니다. 그 미완성
천멸지독은 물이나 음식물을 매개체로 몸속에 침투할 수도 있습니다.
맹주께서 그 점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
독고무적은 당옥성의 보고를 받은 직후 모든 무림맹 인물들에게 은침
를
소지하도륵 긴급명령을 하달했다. 물이나 음식을 섭취할 때마다 반
드시 은침으로 독성 여부를 시험하도
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틀이 지나자 다시 삼십여명의 희생
자가 발생했다.
독고무적의 신경은 점차 극도로 날카롭게
변해갔다.
후량은 그런 독고무적을 지켜보며 내심 초조합을 금할 수 없었다. 해
남파와 청성파를 징계하는 일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이 일을 빨리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잘못하다간 무림맹은 물론이고, 백
도무림 전체의 안위가 위기에 빠질 것이다.'
후량은 사건 발생 일주일이 가까워지도록 흉수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미줄처럼 무림맹 산하
고수들과 오개지부의 무사들이 황산 일대를
수색하는 상황이다. 어찌 그 속을 적들이 이처럼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수백 명에 달하는 북룡맹 고수들이 몸올 숨길 만한 곳올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장소는 없었다.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두 명이 아닌 수백 명의 병력이다. 그들이 눈
에 띄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는 곳.......'
그때 갑자기 후량의 뇌리에 한가지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후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독고무적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독고무적은 만면에 불신의 빛을 띤 채 막 이야기를 끝낸
후량을 바라
보았다. 그의 옆에선 정풍이 역시 놀람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후량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
수수께끼는 오직 한 가지로밖에는 해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
로 이 황산 일대 육개지부 중 한 곳이 북룡맹 흉수들의 은신처로 이용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독고무적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일성이 새어나왔다.
정풍이 안색을
무섭게 굳히며 입을 떼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흉수들이 한꺼번
에 숨올 만한 장소는 그곳들 밖에
없습니다."
독고무적의 안면 근육이 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반역자가 있다는 뜻이로군......."
"당장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정풍은 예를 표한 후 즉시 후량과 합께 밖으로 사라졌다.
독고무적은 음울한 신색으로 의자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
그는 오개지부의 지부장들을 차례로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 오인은 하나같이 그가 자신의 분신처럼 신뢰해온 인물들이었다.
짙은 허탈감과 배신감이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그로부터 사흘이 빠르게 지났다.
정풍의 명령을 받고 은밀히 오개지부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들
이 속속 정보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 정보들을 분석하던 정풍은 육도 지부에 수상한 조짐들이 있다는
걸
파악해냈다. 정풍은 그제서야 퍼뜩 짚이는 바가 있었다.
남채명은 독고무적이 무림맹을 장악할 당시 대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독고무적은 그를 그리 크게 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휘
하에 있던 환종비와 철무가 더욱 중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의 출
세가 그처럼 늦은 이유는 바로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성격이 조
급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무용은 있으되 심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거사 이후 공공연하게 스스로의 공을 따지며 무림맹에 불만을
토로해왔다......'
정풍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다.
'만약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범인이 남채명이 아니라면 사태는 심각해
진다. 그와
절친한 다른 지부장들이 한꺼번에 반발할 수도 있는 일...
...'
무림맹 산하 삼십육개지부는 독고무적의 권력을 받쳐주는 가장 큰
힘
이었다. 설령 정풍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들을 건드릴 입장은 아닌
것이다.
정풍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천각과 무림맹 산하 삼십육개지부와는 은연중 갈
등이 싹터온 상황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건
기득권 싸움이었다.
천각의 힘이 강화될수록 삼십육지부는 불안한 눈길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삼십육지부 중 하나인 육
도지부장 남채명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천각의 존럽 자체가 위험해질 뿐더러 정풍 자신의 입지까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의 두눈에 기이한 광채가 떠올랐다.
'대리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천각의 개입을
절대 발설하지 않을 인물로.....'
정풍의 뇌리에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벗이자 무천군의 총령인 혁표였다. 정풍은 비로소 긴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혁표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정풍과 혁표의 회동은 즉시 이루어졌다.
회동이 끝난 후 돌아오는 혁표의 얼굴은 울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사안의 중대성
으로 볼 때, 성공시키기만 한다면 엄청난
대가가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혁표는 이 일의 동업자로 자신의 무천군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 두 명
을 선택했다.
그들은
주청산과 용불군이었다.
회합은 혁표의 거처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모종의 지시를 받은 주청산과 용블군은 혁표와 혜어진 후
의미있는 술
자리를 만들었다.
"용형! 이번 일만 처리하면 우리도 무림맹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겠
지?"
주청산이
우렁찬 음성으로 말하며 눈빛을 빛냈다.
용블군은 단아한 자세로 주청산을 정시했다.
"그리 쉽지는 않을 걸세. 철옹성이나 마찬가지인
육도지부를 은밀히
내사를 해서 증거를 확보한다는 건."
"잠깐!"
주청산은 안색을 무섭게 굳히며 용불군의 말을 제지하더니
연속으로
다섯 잔의 슬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어 그는 용블군의 슬잔을 노려보
았다.
용블군은 빙그레 웃고는 똑같이 다섯
잔의 슬올 들이마셨다.
주청산은 그제서야 용블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입을 떼었
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이
일을 해낼 것 같은가?"
"과연 다시 생각해보니 해낼 수 있올 것 같군."
용불군은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혀들었다.
주청산은 빈 술잔을 거꾸로 뒤집어 탁자에 내리꽂았다.
수공에 시뻘겋게 달구어진 술잔이
탁자를 태우며 깊이 들이박혔다.
"절대 실패는 있올 수 없네!"
"당연하지. 우리에겐 목표가 있으니까....,.."
용블군은 천천히 술잔을 뒤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산......."
"불군."
꽉!
네 개의 손이 겹쳐지며 힘있게 쥐어졌다.
때는 축시가 넘어가는 야심한
시각이었다.
육도지부는 평소와는.달리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강령지부
의 참극으로부터 시작된 연이은 독살극은 남방무림
전역에 극도의 긴
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육도지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육도지부의 북단에 위치한
우거진 송림.
"아함......."
송림의 앞에서 경비를 서던 두 명의 무사 중 한 명이 몸을 비틀며 하
품을 했다.
한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번 입을 벌린 그는 웬일이지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단지 눈을 부
릅뜬 채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왜? 달 속의 항아가 발가벗고 목욕이라도 하나?'
옆의 무사가 농을 건네며 그를 툭 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품을 하던 무사가 썩은 고목처럼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 이봐, 정삼!'
순간 무사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소매에서 호각을 꺼냈다.
그러나 그는 호각을 입에 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흐윽!"
이내 그의 몸도 경련을 일으키며 뒤로 넘어갔다.
쓰러진 경비무사의 목젖 천돌혈엔 미세한 철침 하나가 깊숙히 박혀 있
었다.
숨이 올라오는 기도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렸기에, 호각을 블기는
커녕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스슷......
어두운 송림에서 일단의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도합 구인, 그들은 쓰러진 경비무사의 주위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선
두의 인물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철옥상, 뇌강, 너회들이 먼저다."
두 명의 야행인이 품속에서
인피면구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썼다. 때마
침 구름 속에서 편월이 빠져나와 달빛을 휘뿌린다. 막 인피면구를 쓴
두 명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놀답게도 그들은 방금 쓰러진 두 경비무사가 아닌가?
실로 놀랍고 정교한 인피면구가 아닐 수 없었다.
변장한 두 인물은 자
신과 똑같은 얼굴로 쓰러져 있는 두 경비무사를 숲속으로 끌고 들어갔
다.
이내 뭔가를 땅속에 묻는
소리가 숲속에서 들려왔다.
이내 숲속에서 두 경비무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무 일도 없었
던 것처럼 경비를 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칠 인 중 네 명이 유령 같은 신법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은 세 명의 야행인은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내며 마주보고
있었다.
바로 혁표를 위시한 주청산과 용불군이었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혁표의 말에 주청산과 용블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스슷.......
이어 그들의 신형도 어둠 속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유가영.
그는
육도지부의 선봉무단인 금위천검대의 대장이었다. 그의 별호는
진천무적검이었다. 그가 한번 검을 날리면 은은한 우뢰성이 진동하고,
검에 맞은 상대는 마치 벼락에 그올린 듯한 모습으로 죽기 마련이었
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곰처럼 위맹한 외모
를 지닌 그였지만, 잠든 모습은 신기하리만치 온순해 보였다. 그의 머
리맡엔 폭이 다섯 치, 길이가 육 척에
달하는 거대한 철검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휘익!
열려진 창문으로 하나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기습자는 날아은 기세 그대로 유가영의 목을 겨누고 일검을 내리찍었
다.
번쩍!
찰나지간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유가영의 손이 머리맡의 철검을 움켜
잡았다. 아니 움켜잡았다고 느낀 순간 그의 철검은 이미 암습자의 공
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카캉!
"웬놈이......"
퉁기듯 몸올 일으키던 유가영의 동작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딱 정지되
었다. 그는 두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의 복부엔 비수가 깊숙히 꽂혀 있었다
원래 기습자의 일차공격은 그를 현혹시키는 속임수에 블과했던 것이
다. 상대는 믿을 수 없올 만큼 빨랐고, 또한 정확했다. 오른손에
들려
진 검과 왼손에 들려져 있는 비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습한 인물은 이미 유가영의 무공과 그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
었음이 분명했다. 설명하기엔 단순한 일격이었지만, 그 속에는 실로
치밀한 수법이 숨어 있는 것이다.
"너...... 넌....,.?"
유가영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암살자는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얼
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암살자의 오른손에 들려져 있던 검날이
창백한 섬광을 뿜어냈다. 유가영의 머리가 거짓말처럼 조용히 바닥으
로 떨어져
내렸다.
"잘 가시오."
암살자는 바로 주청산이었다.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품속에서 하나의 인피면구를 꺼내들었다. 이어
그것을 얼굴에 뒤집어쓴 순간, 주청산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또하나
의 유가영이 얼굴을 드러냈다.
죽은 유가영은 침상
밑으로 숨겨졌고. 핏자국은 살아 있는 유가영에
의해 깨끗이 지워졌다.
같은 시각, 위지도영은 후원의 한 나무에 매달린 채
버둥거리고 있었
다.
"커어억......"
그런 그의 목은 우악스런 손에 잡혀 있었다. 나무 위에서 뻗어내린 누
군가의 손이 갈퀴처럼 그의 목을 조여들고 있는 것이다.
남채명의 호위대장이자 절영비도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는 위지도영,
그는 그림자까지 베어버린다는 쾌도술을 지닌 초절정고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했다.
우두둑!
이내 목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위지도영의 전신이 축 늘
어졌다. 이어 그의 시신은 나무 위로 끌어올려졌다. 잠시 후
나무 위
에서 또 하나의 위지도영이 조용히 아래
로 내려섰다.
슥!
그는 문득 나무 위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나직히
중얼거렸다.
"위지도영, 이 혁표에게 죽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는 이내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장내에서 사라졌다.
천리비영 곽원표, 그는 천리길을 한번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철각
의 소유자였다. 그의
직책은 육도지부장 남채명의
전령이었다.
곽원표는 인시에 정확히 눈을 뜬다.
그리고 묘시까지 그는 자신의 철각을 수련한다. 그 일과는 사십 년의
생애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은 그의 생활철칙이었다.
밤안개를 혜치며 오늘도 곽원표는 경공을 수련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한줄기 바람이었다.
휘익!
한순간 그 바람이 딱 정지되었다.
콰당!
이어 울려퍼지는 둔탁한 소리, 곽원표는
무엇인가에 다리가 걸려 앞으
로 고꾸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넘어지는
이마의 바닥엔 날카로운 사기 파편
이 떨어져 있었고, 그 파면은 그의 뇌수를 완전히 휘저어버린 것이었
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늦게 죽었다면 최소한 그
술병조각에 대해선 알
아보았을 게 분명했다. 그 술병은 간밤에 그가 먹다 버린 것이었다.
"다행이군. 손에 피를 안 묻혀도
됐으니......."
곽원표의 발목에 휘감긴 천잠사를 풀어내는 인물이 나직히 중얼거렸
다.
"이젠 남채명의 본거지를 뒤져볼
차례군."
곽원표로 변신한 용불군은 멀리 한 채의 장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곽원표의 시신을
땅 속으로 파묻었
다.
이어 그는 빙긋이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는군."
천유원.
육도지부내의 한 별원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인물은 극소수로 제한되어 있었다.
담장의 높이는 삼 장.
어지간한 고수라면 뛰어넘을 수 있었으나 이제
껏 누구도 그 담장을 넘은 인물은 없었다.
담장엔 스쳐가는 흔적만 있어도 암기가
발출되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
었다.
한순간 천유원의 입구에 삼인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무사들은 세
사람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때고 천유원을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의 이름은 위지도영, 유가영,
곽원표였다.
천유원의 안엔 여섯 개의 전각이 육합의 방위로 자리해 있었다. 그중
중앙의 가장 큰 전각이 남채명이 기거하는
천도전이었다.
입구를 통과해서 정원으로 들어섰을 무렵,
"어떤가?"
혁표의 전음이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용불군과
주청산이 이내 전음으로 대답했다.
"발견했습니다. 제가 돌아본 두 채의 전각엔 북룡맹의 흑도인들이 우
글거리고 있습니다."
"제가 본 자들은 적풍단 이었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주청산이 차갑게 전음을 이었다.
"중거는 확실합니다. 무천군을
동월하여 놈들을 쓸어버리는 일이 남았
을 뿐입니다."
그 말에 용불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은 잔잔한
가운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닐세. 만에 하나 남채명이 자해를 하고 북룡맹에 제압당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걸세."
혁표는 두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놈이 달아날 구멍이 없는 완벽한 중거를
잡아야 한다.
"
그들은 신형이 이내 연기처럼 장내에서 사라졌다.
스슥.......
육도지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천도전, 그 중 한 실내에서는 지금 네
명이 좌정한 채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주홍이 무르익은 듯 네 인물의 얼굴은 은은히
화색이 감돌았다.
"흐흐...... 무림맹 놈들의 흔비백산하는 꼴을 보고 싶군. 듣자하니
천멸지독이 두려워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는군."
"독고무적이 직접 스스로 밥올 지어먹고 있지는 않올까?"
그러한 사인의 모습을 창문틈으로 엿보는 눈길이 있었다.
염탐자의 눈에 먼저 뛴 인물은 두 명의 흑의노인이었다.
그들은 검은 두루마기를 길게 늘어뜨려 흡사 제사장의 법복 같은 차림
새를 하고 있었다. 두 노인은 똑같이 유난히 창백한 피부를 소유했으
며, 두눈에서는 은은히 푸른 광채가
어려 있었다.
창문틈에서 빛나던 혁표의 눈길이 이내 경악의 빛으로 물들었다.
'저자들은...... 현명이로!'
혁표는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현명이로가 누구던가?
그들은 삼십 년 전 북무림에서 독공으로 악명을 떨치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천일비가 북룡문을 세우자 제일 먼저 투신하여 북무림의 백도
문파를 궤멸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들의
악명은 남무림에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제보니 저들이 우두머리였구나.'
그것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그들의 우측엔 풍채 좋은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화려한 전복의 그는
바로 남채명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강인하게 생긴 회의차림의 노인이었다. 그는 한 자루
의
흑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한쪽 다리는 목발이었다.
'담비우!'
혁표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귀검보의 보주로 과거
백한령과 함께 적풍단을 조직했던 담비우, 그는
선하령에서 철갑기마대에 적풍단의 모든 고수들이 몰살당할 때 백한령
과 함께 유일하게
생존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싸움에서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다. 담비우는 남무림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흩어진 적풍단을
다시 재건시켜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 술을 들이키던 남채명이 문득 생각난 듯 현명이로를 보며 질문
을 던졌다.
"현 노야,
천멸지독은 어느 정도나 남았소이까?"
"아직 반 병은 남았소이다."
현명이로 중 연장자인 음사혼이 음산한 어투로 말했다.
남채명은 꿈틀 이마를 찌푸렸다.
"아직 목적을 달성하려면 멀었는데 벌써 그 정도나 사용했단 말이오?"
"걱정할 필요 없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무림맹의 모든 고수를 독살시
킬 수 있소."
음사흔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는 문득 의아한 눈길로
옆에 앉아있는 음사귀를 바라보았다. 술잔을
들이키던 음사귀의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본 때문이었
다.
쐐?
음사귀의 손에 들려져 있던 술잔이 창문으로 섬광처럼 날아 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콰직!
창문이 박살나며 짧은
경악성이 들려왔다.
"웬놈이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좌중의 네 명은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혁표는 발각된 사실을
깨닫자 황급히 몸올 날렸다. 하나 이미 때는 늦
은 후였다.
휘익!
현명이로가 어느새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혁표은 등줄기에 전율이 스쳤으나 이내 태연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소생 위지도영,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뒤따라 장내에 내려선 남채명의 얼굴빛이 이내 온화하게 풀어졌다.
"도영, 웬일이냐?"
"다름이 아니라......."
혁표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음사귀가 갑자기 오른손을 갈쿠리같이 오므린 채 혁표의
면상을 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헛!"
혁표는 황급히 몸을 뒤로 퉁겼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음사귀의 금나
수는
그만큼 빠르고 절륜한 것이었다. 손톱에 스친 혁표의 얼굴가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흐흐...... 감히 나 음사귀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음사귀는 손톱에 끼인 찢어진 인피면구를 떼어내며 스산한 웃음을 흘
렸다.
남채명은 상대가 혁표임을
알아보고 두눈을 부릅떴다.
"그대는...... 무천군 총령!"
혁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자 남채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번쩍!
시퍼런 검날이 남채명의 가슴을 향해 폭사되었다.
남채명은 번개같이 신형을 비틀었다. 거의 동시 옆에 있던 담비우가
자신의 흑검을 뽑아들고 공격해왔다.
카캉!
시퍼런 블똥이 퉁겨올랐다.
용불군과 주청산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은 혁표를 구하
기 위해 섬광처럼 몸을 날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채 혁표 앞에 당도하
기도 전에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현명이로
가 그들의 앞올 막아선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혁표는 상황이 매우 불길하다는 걸 깨달았다. 담비우 혼자라면
층분히
상대할 수 있었으나, 남채명이 협공을 가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우응!
공기를 파동시키며 남채명의 일장이 혁표의
전신을 휩쓸어왔다. 혁표
는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남채명의 공세를 맞받아쳤다.
"벽력파천!"
콰꽝!
벼락이 작렬하듯
거창한 권풍이 일어났다.
혁표가 방금 시전한 것은 무림의 권법 중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그
의 벽력천권이었다.
"..........."
권풍에 휩쓸린 남채명의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다.
순간 담비우의 흑검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혁표의
팔뚝을 베어왔다.
"여기도 있다!"
혁표는 남채명을 공격해가던 자세를 바꾸어 담비우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냈다. 그는
담비우의 무공이 오히려 남채명보나 무섭다는 걸 깨닫
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혹도 거물답구나!"
혁표는 이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남채명과 담비우의 공격을 다 막아내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것이
다.
한편,
용달군과 주청산은 뜻밖에도 현명이로와 막상막하의 싸움을 전
개하고 있었다.
주청산의 무기는 두 개의 둥근 철륜이었다. 그 두개의
철륜이 뿜어내
는 위력은 마치 거대한 두 개의 태양이 요동치는 듯 무시무시했다.
'비륜천영!'
후우웅.......
"제법이로구나! "
음사혼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수중의 검을 흔들었다.
카캉!
주청산이 날린 철비륜은 그의 검에
부딪혀 퉁겨나갔다. 하나 음사흔은
이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비이잉 ......
퉁겨나갔던 철비륜이 돌연 네 개로
나뉘어
이 아닌가?
음사혼은 재차 검을 휘둘러 네 개를 한꺼번에 퉁겨냈다. 그러나 상황
은 더욱 나빠졌다. 철비륜은 이번엔
여덟 개로 나누어진 채 다시 날아
들었던 것이다.
"이건......?"
음사혼의 표정이 곤혹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가까스로
여덟 개의 철비
륜을 모두 베었다. 찰나지간 그는 그는 한가지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두 개만이 진짜다!'
여섯 개를
베었을 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단지 두 개만이 쇳
소리를 내며 퉁겨져 나갔던 것이다.
비이잉......
이번엔
열여섯 개의 철비륜이 음사혼을 덮켰다. 하나, 음사흔의 입가
로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림자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로군!"
휘익!
그는 오히려 쏘아져오는 철비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하나의 철비륜이 음사흔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살점이 베어
져 피가 홀러야 함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곱 개의 철비륜이 연
달아 똑같이 음사흔의 몸올 통과했다. 음
사혼의 눈은 달빛에 투영된 철비륜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여덟번?의 철비륜이 그에게로 쏘아져오는 순간,
"그림자!"
카캉!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음사흔이 휘두른 검에 의해 철비륜이 퉁겨져 날
아갔다.
주청산의 안색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그는 더 이상 환상비륜공이 통하
지 않음을 깨닫고 철비륜을 거둬들였다. 이어 그는 철비륜을 양손으로
나눠들고 음사혼과
맞대결을 펼쳤다.
차차창!
주청산은 이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음사흔의 검은 점점 더 위력을
더해갔다.
한편,
용불군이 처한 상황도 주청산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연이어 쏘아져오는 음사귀의 장?을 위태위태하게 막아내고 있었
다.
무슨 생각인지 그는 처음부터 무기를 뽑지 않고 단지 음사귀의 공
격을 피해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신법은
유유미종보라는 것으로 무림의 일절로 정
평이 나 있는 무공이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이로군. 십이연격장을 모조리 피해내다니."
음사귀는 갑자기 자세를 바꾸더니 오른손으로 천천히 원을 그렸다. 그
러자 그의 장심에서 동그란 흑점이 생겨나며 이내 크게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
눈깜짝할 새에 그의 손은 시커먼 먹믈빛으로 믈들었다.
용불군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혹수인!"
흑수인은 독장의 최고 경지로 일컬어지는 마도의 무공이었다. 그것은
이미 이백여 년 전에 실전된 무공으로 알려져
있었다. 흑수인을 연성
하기 위해선 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철녹(?쌈)과 독수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만 한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단 연성하면 금강불괴의 신체를 지닌 상대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위력을 지닌다. 그것은 곧
죽음의 손이었다.
위기를 느낀 용블군은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음사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은 손을 휘둘러왔다.
용블군은
전력을 다해 유유미종보를 시전하며 독문검법인 천류십팔풍
을 시전해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흑수인의 공세를 약간 늦추는 위
력에
그치고 말았다.
파아앗!
"흐윽!"
용블군은 어깨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화끈함을 느꼈다. 흑
수인에 스쳐
드러난 어깨에는 이미 검은 반점이 번져가고 있었다.
용블군은 황급히 혈맥을 봉쇄하고 자신의 검으로 검은 반점 부위를 도
려냈다.
"흐흐...... 소용없는 짓이다!"
음사귀는 득의에 찬 흉소를 홀리며 재차 흑수인을 뻗어왔다.
절대절명의 순간, 용불군은
몸올 뒤로 젖혀 땅바닥을 구르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퍼엉!
그것은 연막탄이었다. 용블군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연막탄을 준
비해두었던 것이다. 사위는 갑자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연막으로
뒤덮여 버렸다.
"이런 교활한 쥐새끼
같으니!"
음사귀의 분노에 찬 외침성이 터져울렸다. 연막은 삽시간에 주위로 번
져서 혁표와 주청산이 싸우고 있는 굿까지 뒤덮어
버렸다. 혁표와 주
청산은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에서 한줄기 밝은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
다
휘릭!
획!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혁표를 위시한 삼인은 신형을 날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음사귀는 품속에서 수십 개의
독침을 꺼내어 세 사람이 도주하는 방향
을 향해 닥치는 대로 뿌려댔다.
파파팟!
"추격해야 하오! 놈들을 살려보내면 우린
끝장이오!"
남채명은 몸을 날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현명이로와 담비우가 이내 뒤따라 신형을 날렸다.
남채명은 품에서 호각을
꺼내 세 차례 짧은 신호를 불었다.
그것은 비상사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눈깜짝할 새에 사방에서 구름처
럼 육도지부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침입자다! 반드시 주살하라!"
남채명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독고무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이번의
사태가 발각된다면 모든 게 끝장인 것이다. 그때 전방에서 치열한 싸
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채명의 안색이 크게 밝아졌다.
"부하들이 놈들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구나!"
그러나 그의 기쁨은 채 일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두두두두.......
굉음! 그것은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였다.
남채명은 물론이고 담비우와 현명이로의
안색이 일시에 창백해졌다.
'......저 소리는?'
그들은 이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뿌연 흙먼지를 구름처럼
일으키며 달려오는 수천의 기마대를!
'철갑기마대!"
'철갑기마대가 나타났다!'
운집한 육도지부의 무사들은 턱을 덜덜
떨며 공포에 찬 외침성을 토해
냈다. 철갑기마대는 이내 육도지부 안으로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쳐랏!"
선두에 선
정풍이 웅혼한 일갈을 지른다.
질풍노도!
거침이 있올 수 없었다. 철갑기마대는 해일처럼 덮쳐들었다.
"크아악!"
"아악!"
조각배가 폭풍우에 잠기듯 삽시간에 좌중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정풍의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일장 이척에
달하는 방천화극을 폭
풍처럼 휘두르며 짓쳐들었다.
"이렇게 ..... 끝나는가?"
남채명은 아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뭇하고
멍청하게 선 채 넋을 잃었
다. 그는 그제서야 담비우와 현명이로가 어느새 모습올 감추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채명! 그대를
역모죄로 체포한다!"
정풍은 남채명의 목줄기에 방천화극을 드리운 채 싸늘하게 외쳤다.
두두두두.......
철갑기마대는
무서운 기세로 육도지부를 덮쳤다. 어느 누가 감히 그
엄청난 위력에 맞설 생각을 하겠는가?
육도지부의 무사들은 거의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그러나 생포된 인물들 중 북룡맹이나 적풍단의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풍은 그들의 뒤를 추격하도록
명령하고는 서둘러 남채명을 무림맹으
로 압송했다. 독고무적에게 보내지는 전서구가 날려진 것 바로 그때였
다.
그로부터
정확히 반 시진 후, 독고무적은 모든 정황이 적힌 전서구의
서신을 받아보고는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는 무림맹 산
하
모든 조직에 긴급명령을 하달했다.
<......놈들이 도주를 못하도록 장강을 폐쇄하여 퇴로를 차단하라! 그
리고, 황산
일대의 모든 방파들에게 놈들을 척살할 것을 명한다!>
곡운성은 비씨 일족 삼인과 함께 광서성의 대아에 도착했다. 대아는
석 달 전 등비가 곡운성을 배로 태워다 준 곳이었다. 그곳에서 등비는
해남파의 제자들과 함께 곡운성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곡운성
은 무려 석 달만에 대아로 돌아온 셈이었다.
등비는 곡운성과 함께 온 비씨 삼대를 보고 적이 놀란 기색이었다. 양
다리가 없고 얼굴에 화상을 입은 비학이나, 야수같은 외모의 비조웅,
그리고 수려한 용모의 비영에 이르기까
지 모두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핫, 인사하게. 이쪽은 의제인 비영, 춘부장과 조부님이시네 ."
곡운성은 비씨 삼대를 등비에게
소개했다.
"아,.....!"
등비는 그의 말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안색을 가다듬으며 공손히 포권의 예를
취했다.
"집전당 부당주를 맡고 있는 등비입니다."
등비의 그런 행동은 장로급 이상을 대하는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장문인의 의형제와 그 식솔들인 것이
다.
"비영입니다.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비영도 마주
깍듯이 예를 취했다.
등비는 그런 비영의 기품 어린 모습에 내심 탄복하지 않올 수 없었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인믈이로구나.'
등비는 해남파의 젊은층에선 가장 뛰어난 인재 중 하나였다. 그의 직
책은 정보를 관장하는 집전당의 부당주였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활동범위가 넓었다.
이곳 대아에서 곡운성을 맞이하는 임무를 띠게 된 것도 등비에 대한
해남파의 신뢰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장문인. 우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떠실지?"
"그렇게 하세."
"절 따라오시지요."
등비는
곡운성과 비씨 일가를 한 객점으로 안내했다. 객잔 안으로 들
어서자, 계산대에 앉아 있던 인물이 황급히 다가와 곡운성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장문인."
"당신은...... 외당의 금소천 부당주가 아니오?"
곡운성은
어리둥절한 기색이 되었다. 해남파의 제자가 객잔의 주인행
세를 하고 있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제43장 옹비
그때 등비가 웃으며 설명했다.
"장문인께서 안 계신 동안 아예 이 객점을 본파에서 인수했습니다. 자
세한 이유는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랬군."
곡운성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내를 받으며 객실로 들어갔다.
비씨 일가도 따로 극진한 대우
를 받으며 객실에 안내되었다.
곡운성은 실로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목욕을 한 후 정성껏 준비된
식사를 했다. 이어 그가 잠시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등비가 조심스럽
게 실내로 들어왔다. 그는 그동안의 상
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모용 장로님께서 새로운 해남파의 거점지를 찾아내셨습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토목공사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벌써 말인가?"
곡운성은 의아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그는 최소한 일 년의 기한이 걸
리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파를 이주시키는 엄청난 일이었다.
당연히 적지를 물색하는
데에는 수많은 노력과 심사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찾으셨군.'
곡운성은 모용문을 떠올렸다. 새로운 거점지를 믈색하는 책임자는 바
로 모용문이었던 것이다.
등비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모용 장로께서 찾아낸 새로운 해남파의 거점지는 호남성의 운산입니
다."
"운산이라......."
곡운성의 얼굴에 기이한 이채가 떠올랐다.
운산은 그리 화려하고 거창한 대산은 아니었다. 하나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산세는
익히 중원 천하에 퍼뜨려져 있었다. 또한 지리적인 이
점도 빠뜨릴 수 없었다. 중원의 복판에 위치해 있음으로 해서 사방으
로
얼마든지 활동영역을 넓힐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
장 중요한 사실은 그 주위에 강한 세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매우
적당한 장소인 것 같군."
곡운성의 말에 등비는 만면 가득 밝은 기색을 떠올렸다.
"최적지라고 모든 장로님들께서도
감탄하셨습니다."
"홈.... .."
곡운성은 큰 호기심이 일었다.
"내일 당장 가봐야겠구나."
내심 그떻게 결정을
내리는 곡운성이었다.
다음날.
곡운성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비영과 함께 운산으로 떠났다.
비조웅은 비학과 함께 당분간
객점에 머믈러 있기로 했다.
등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까닭은 등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
때문이었다. 그는 대아에서 운산과
해남파 사이에 원활한 연락이 오고
가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객잔을 아예 사들인 이유 또
한 그 때문이었다
대아에서 운산으로 가는 길은 천리가 넘었다. 그런 장정을 하면서도
곡운성은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영
때문이었다.
곡운성은 긴 여로 도중에 비
영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곡운성은 비영에 대해
경이심을 느껴야만 했다.
그동안 그에게 감탄한 바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새삼 끝이 없는 그의
학문과 지식에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비영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었다.
그것은 중원무림에 대해 아무런 경험과 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곡운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비영에게 가르쳐 주었다. 비영
은 한 마디를 들으면 열 가지를 이해했다. 아니 그는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곡운성이 미처 생각지도 못
했던 점을 파악해내기도 했다. 비영의 머릿속에는 중원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중요인물들의 내력과 각
세력간에 벌어지는 힘의 알력, 그리고
전대의 무림비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
이 주입되었다.
열흘의 시간이 그떻게
지나갔다.
곡운성과 비영은 운산에서 칠십 리 정도 떨어진 상화촌이란 마올로 접
어들었다.
상화촌은 겨우 십여 호 정도의
사람이 사는 조그만 산간마올이었다.
그런 곳에 객점이 있을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한 민가에 양해
를 구하고 투숙했다.
야심한 밤.
시각은 자시를 횔씬 넘기고 있었다.
누워 있긴 했지만 비영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엔 반월이 황금빛 월광올 휘뿌리고 있었다.
비영은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휘잉......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
'벌써 가을이 지나고 있는가.......'
비영은 지난 한 달간의
일이 꿈만 같았다. 그의 인생에 너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과연 중원은 넓다. 내가 작아보일 정도로.......'
그의 얼굴에 어떤 신념의 빛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웅용만 한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적응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영은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성좌들올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는 어떤 자신감이 짙게 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한순간 그의 걸음이 멈칫 정지되었다.
그의 눈길은 곡운성이 거처하는 방으로
향해 있었다. 그 방에는 불빛
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오늘도?'
비영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홀러나왔다.
지난
열홀간 곡운성의 방은 언제나 불이 밝혀져 있었다. 도대체 그가
언제 잠을 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비영은 곡운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그의 나이는 불과 두 살
위였다. 하나 그는 모든 면에서 나이를 초월하는 원숙함을 지니고 있
었다.
"형님을 모시게 된 일이야말로 내 생에서 최대의 행운일 것이다.'
그는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다시 조응히
걸
음을 옮겼다. 그는 곡운성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곧 해남파의 미래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 비영 자신의 미래이
기도 한 것이다. 그 순간 비영은 한 가지 커다란 결심을 굳히고 있었
다.
'형님을 천하제일인으로 만드는 데 내 삶을 걸
것이다!'
비영의 모습은 이내 장내에서 사라졌다.
곡운성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지난 열흘 동안 밤마다 한 권의
검경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검
경은 바로 환일도가 넘겨준 비급 <천관>이었다. 비급 <천관>에 수록된
내용은 곡운성에게 쾌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에 층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천관비급에는 백아흡 가지에 걸쳐 해남파
쾌검의 이론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섭렵하는 곡운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강검법과의 합일이었다.
하지만 끈이 쉽게 잡히질 않았다.
두 개의 검법은 너무도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빠름과 파괴력 있는 패도, 그 중 하나라도 극의를 깨닫기 위해선 평생
을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곡운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그 두 개의 검법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무림사상 그 누구
도 이룩하지 못한 검도의 신기원이 탄생될 것이다.'
신검합일, 그것은 검도를 꿈꾸는 모든 무림인들의 마지막 목표다.
뜻만으로도 상대를 꺾을 수 있고, 자신의 몸이 하나의 검이 될 수 있
는 꿈의 경지인 것이다.
검강보다도 오히려 한차원
높은 검도의 최고봉!
그 길을 찾는 게 어찌 쉽겠는가?
'해낼 것이다. 반드시!'
어느덧, 창밖으로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운산.
거대한 산등성이를 굽이쳐 두르고 있는 구름의 띠가 장관을 이루는 명
산이었다. 오늘도 예외없이 운산은 그
신비로운 장관을 드러내고 있었
다.
곡운성과 비영이 이굿 운산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01었다.운산의 주
봉인 정봉쪽으로
움직
이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한순간 동시에 딱 멈추어졌다.
"엄청나군요!"
비영의 입에서 탄성처럼 홀러나온 한마디였다.
놀라기는 곡운성도 마찬가지였다.
오오, 보라!
실로 엄청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거정봉을 중심으로 운산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움직이는 인부만 해도 어림잡아 수천 명은
되리라.
아직 기초공사 단계였으나 그 규모는 실로
거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해남도의 현 거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구나!'
곡운성은 경이로움 속에서도 곤혹을 금치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아는 한 해남파에선 이만큼 거대한 공사를
벌일 정도의 자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비영은 이 순간 새로운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모든 건물이 들어서는 배열과 방위였다.
천문성좌의 오묘한 배열은 물론이고, 수많은 진법의 이치가 그곳엔 담
겨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것이 주위의 지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 ...
.
'누가 이런 설계를 했단 말인가? 중원에 뛰어난 기인이사가 많지만 이
만한 능력을 가진
인믈을 흔치 않을텐데.......'
비영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문을 닫으면 십만대군이 쳐들어와도 끄떡 없을
철옹성이었다. 문올 열
면 반대로 백만대병이 일시에 쏟아져 나올 수 있올 정도였다.
비영은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학문을
섭럽했었다.
천연적인 그의 능력은 모든 학문을 습득하고 스스로 창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토목공사를 보면서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
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었다.
"저기 계셨군."
곡운성은 한쪽에 있는 모용문을 발견했다.
모용문은 두루마리를 든 채 인부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비영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 대공사를 주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봐!
그 운남산 대리석은 저쪽이야!"
일단의 인부에게 소리를 지르던 모용문의 눈이 문득 한곳에 고정되었
다.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곡운성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모용문은 크게 반색하며 곡운성을 맞았다.
"이제 오셨구려, 장문인!"
"모용 장로님!"
곡운성은 환하게 웃으며 마주 포권지례를 취했다. 사위가 돌연 소란스
러워졌다.
"오오! 장문인께서 오셨구먼."
"어서 오시오, 장문인!"
주위에 있던 해남파의 장로들이 앞다투어 다가오며 예를 취했다.
"하하...... 모두 수고가
많으십니다."
곡운성은 장로들의 손올 맞잡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곡운성은 비영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의제인
비영입니다."
뒤이어 그는 비영에게 장로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었다.
장로들은 깊은 관심이 담긴 눈길로 비영을 응시했다. 그들은
이미 비
영이 천은 선생이 말한 인재임을 알고 있었다. 적인풍에게서 미리 말
을 들었거니와, 등비가 객잔에서 보내온
전서구에도 비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에는 이내 어떤 의구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
어리지 않은가?'
모두의 눈빛엔 그런 물음이 담겨 있었다.
비영은 그런 그들에게 정중한 태도로 포권의 예를 취해보였다.
"비영입니다. 여러 노선배님들께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공손하되 비굴하지 않은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모용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사부인 천은 선생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미래를
예언하고 천기를 짚는 스승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는 것이
다. 그렇기에 모용문은 비영의 능력을 아울러 믿었다. 오히려 그는 비
영이 젊다는 것에 더욱
고무되는 심정이었다.
곡운성 또한 젊으니 그와 함께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한 모용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비영은 마침 깊은 호감의 눈길로 모용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그
는 모용문이 이 엄청난 토목공사의 주관자임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당연히 모용문에 대한 비영의 느낌은 각
별한 것이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비영은
모용문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모용문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게 될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미소 띄운 얼굴로 응시하던 곡운성은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입올 떼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방대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
다."
"하핫...... 천하로 뻗어나갈 해남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것도 큰
건 아니외다."
모용문은 의미있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곡운성에게 묘한 눈짓을 보냈
다.
곡운성은
그 뜻을 헤아리고 빙그레 웃었다.
"제게 따로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이시군요."
"흐홈...... 글쎄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곡운성은 그와 단둘이 되자, 조카의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숙부님, 너무 무리하여 건강을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하하...... 걱정 말아라, 네놈이 장가가서 낳은 손주놈의 국수를 얻
어먹지 않고선 눈을 감지 않올테니까."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 자리가 되자 모용문의 말투 또한 허물없이
변했다. 숙부와 조카로서의 관계로 돌아간 것이다.
곡운성은 우선 궁금한 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우리 해남파의 자금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체 이런 대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
모용문은 싱글거리며 웃었다.
곡운성은 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황금길이 열린 모양이군요."
"황금길이 열리며 황금거인이 나타났지."
"그 황금거인이 누굽니까?"
곡운성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큰 뜻을 품은 거상이다. 그렇잖아도 그가 지금 여기 와 있으니 우선
만나보거라."
모용문은 공사장의 한쪽 언덕 위로 곡운성을 안내했다.
그곳엔 임시로 만든 수십 개의 대형천막들이 있었다. 그것은 인부들과
해남파의 사람들이 묵는 임시 숙소였다.
모용문은 그중 하나의 천막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한 명의 초로인이 앉아
장부들올 옆에 놓고 주판알을 움
직이고 있었다. 그는 모용문이 들어서는 걸 발견하고 느릿하게 몸올
일으켰다
"바쁜
시간일텐데 무슨 일인가?"
그는 금색 장포 차림에 어떻게 보면 문사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는 인
물이었다. 대추
빛처럼
붉은 홍안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 있었고, 두눈에서는 상대의
폐부를 꿰뚫어보
는 듯 깊숙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모용문은
빙그레 웃어보이더니 곡운성을 가리켰다.
"본파의 장문인이십니다, 금 장주."
"오!"
노인은 이채를 띄우더니 이내 엄숙히
포권를 취했다.
"금적산이라 하외다. 장문인을 뵙게 되어 실로 영광이외다."
곡운성의 눈가에 일순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금적산!"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올 수 없었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금적산은 양호 일대에서 제일가는 거부였다.
중원 천지를 통틀어서도 그는 산동의 거부인 왕추영과 함께 중원이대
거부로 꼽히고 있었다.
그는 비록 상인이었지만 너무도
유명해서 무림에도 그 명성이 익히 알
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양호 일대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소유한 땅은 말을 타고 며칠을 달려도 끝을 보지 못한 다고 알려
져 있었다.
당연히 그가 쌓아올린 재화에 관한 소문은 일반인들에게는
상상을 블허했다.
'금적산이 지닌 재산을 금으로 바꾸면 능히 산을 지을
것이다.'
그렇다.
곡운성은 지금 상계에서 거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믈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인물이 왜
해남파에 막대한 자금을 희사한단 말인가?'
곡운성은 상대가 금적산이라는 걸 알고 나자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그때 모용문의 입에서
뜻밖의 한마디가 홀러나왔다.
"장문인, 금 장주께선 나와 함께 만경원에서 동문수학한 학우라오. 나
이는 나보다
많으시지만......."
그 말에 금적산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허허...... 젊은 시절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잠시 만경원에
든 적은
있소이다. 원래 부친께선 천은 선생과 친분이 계셨었지요. 만경원을
재정비할 때 부친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그
때문에 능력도 없
으면서 만경원에서 수학할 수가 있었지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자질이 부족해서 중도에 포기하고 장사꾼으로 돌아선 겁니
다."
"하하...... 믿지 마시오, 장문인."
모용문은 웃으며 부연설명을 이었다.
"금 장주께선 대단한 능력을 지닌 분이시오. 다만 금장주의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가업을
잇기 위해 할 수 없이 학문을 포기하셨을 뿐이라
오."
금적산이 다시금 정중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남방대륙을 거점으로 두고 있는 터.,.... 장차
장문인과 해남파의 많은 도움을 바라고 있소이다."
곡운성은 비로소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금적산의 도움은 결코 모용문과의 친분만으로 이루어잔 건 아니었다.
그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 영역으로
이주하는 해남파를 도움으로써 막강
한 힘을 등에 지려 하는 것이다.
"그랬던가......."
곡운성은 마주 정중한 포권지례를 취했다.
"금 노야께서 이토록 깊은 배려를 해주셨으니, 해남파는 그 뜻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소이다, 장문인!"
금적산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이른바 하나의 공생관계는 그렇게
형성되고 있었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강력한 문파와 거대한 금력을 지닌 상가와의 결
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금적산의
얼굴에는 홉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의 투자는 성공적이다.'
<3>
천막 안에선 때아니게 술자리가 벌어졌다.
비영과 여러 장로들과 오십여 명에 달하는 수뇌급 인물들도 자리를 함
께 했다.
곡운성은 눈깜짝할 새에 차려지는 온갖
산해진미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음식들은 평소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
다.
'산속에서 어떻게
이런 음식을 마런할 수 있단 말인가?'
모용문은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것이 바로 황금의 힘이오."
그는 은근한
어조로 말올 이었다.
"장문인께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금 장주께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라오."
모용문의
시선이 비영에게로 옮겨졌다. 비영은 난생 처음 대하는 산해
진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새롭게 우리의 식구가 된
비영 소형제를 위해서이기도 하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비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망연한 눈길로 모용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온 이십 년의 세월.....
연씨 일족에 의한 끊임없는 생사의 위기를 넘나드는 고통의 나날이었
다. 생존이 걸린
생활에서 음식은 부치썩인 문제일 수밖에 없는 일이
었다. 그가 언제 이런 진수성찬을 받아본 일이 있었겠는가?
"쩝......."
비영은 문득 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 음식을 보니 대아에 계신 아버님과 조부님의 얼굴이 가슴 저미게
떠오르는군요."
"하하하.,.... 효자시로군!"
"허허헛!"
실로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술이 얼큰해진 금적산의 흥안은 더욱 붉어져 있었다.
문득 그는 곡운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의인협이란 장문인의 무용에
대해선 귀가 따갑게 들어왔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뵙고 보니 실로 기쁨을 금치 못하겠소."
"별말씀을......."
"내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참으로 궁금했소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무례한 부탁이 아니라면 장문인의 무공을 이 기회에
한번 견식하고
싶습니다만......."
"............"
곡운성은 일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정중한
태도로 청하는
금적산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장로들이 껄껄 웃
으벼 앞다투어 말했다.
"하하!
찬성입니다!"
"장문인의 솜씨를 한번 보여주시지요!"
곡운성은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쓴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없군요. 음식값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이어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시선은 천막의 우
측 구석에 있는 거대한
술독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술독은 장정 두
사람이 팔을 뻗어야 잡을 정도로 큰 것이었
다. 한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둥실......
그 큰 슬독이 가볍게 솜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휘익!
곧이어 술독은 빠르게 허공을
날아오더니 군웅들이 좌정해 있는 탁자
의 중앙에서 딱 멈췄다.
"허공섭믈!"
장로들이 경이 어린 탄성을 일제히 터트렸다.
'허 저런 경지까지 올라 있으셨는가.......'
모용문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허공섭물신공, 말 그대로 허공을
격한 채 멀리 있는 믈체를 순수한 내
공의 힘만으로 끌어당기는 수법이었다. 대부분의 무림인은 누구나 가
벼운 물체를 그와 갈이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장내의 그 누구도
수백 근이 넘는 술독을 가볍게 끌어올리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허공섭믈신공이 발휘된 거리는 무려 십 장이 횔씬 넘었다.
그 정도라면 거의 삼 갑자에 달하는 블가사의한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
한 일이었다.
'그 사이 놀라운 성취가 있었구나!'
모용문은 경이감이 담긴 눈길로 곡운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휘릭!
곡운성이 가볍게
손으 다시 혼들자, 허공에 떠 있던 술독이 갑자기 뒤
집어졌다.
"어, 어!"
군웅들은 놀라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술독엔 술이 가득 들어 있었고, 뒤접어졌으니 사방으로 쏟아져 나 올
게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모두의 기우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슬은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술은 한 방울도 없지 않은가?
술독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좌중의 인물들은 화롯불 옆에 있는 것 같은 열기를 느끼며 안색이 크
게 변했다.
파파팟!
연이어
술독이 균열을 일으키더니 깨지고 말았다. 그 파편들은 무서운
속도로 천막을 받치고 있는 중앙의 기둥을 향해 날아갔다.
퍼퍼퍽!
"저럴 수가!"
"오오......!"
장로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금적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몸
을 부르르
떨었다
보라! 기등에 박혀드는 술독의 파편들이 거짓말처럼 네 개의 글자를
이루지 않는가?
<해남무적>
그러나 장내의 인물들은 너무 놀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한가지가 궁금
했다.
술!
술독마저 깨져버렸는데 쏟아진 술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때 곡운성이 술잔을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남파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제가 여러분께 슬 한잔씩을
돌렸습니
다."
그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일제히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층격의 파랑이 격렬하게
번져갔다.
슬잔엔 모조리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직접 보고서
도 믿올 수 없는 하나의 마법과도 같았다.
금적산은 물론이고, 평생을 무림에서 보낸 해남파의 장로들까지 할 말
을 잃었다.
'언제 술독의 술을 이 많은 술잔으로 모두
옮겼단 말인가?'
조금 전 곡운성은 술올 기화시킨 후 모든 사람들의 술잔에 응결시킨
것이었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일일진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좌중의 군웅들은 오십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그들의 술잔은 원래 각
기 비어 있거나, 절반이거나, 혹은 차 있거나 했다.
술잔의 양이 모두 균일하지 않았음에도 곡운성은 그것을 똑같이 채워
놓은 것이었다.
좌중에 잠시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뜨린 건 바로 금적산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곡운성
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내 평생 수많은 무림기인들의 무용담을 들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들
어본 적이 없었소! 참으로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구려!"
그제서야 장내의 모든 인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 장문인 만세!"
"해남파 만세."
건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금적산은 연회가 끝난 후 양호로 돌아갔다.
곡운성은 모용문과
함께 산책하며 다하지 못한 회포를 풀었다.
"철 숙부님께선 같이 오시지 않았군요."
"그는 해남도에 있다. 철 숙부가 번잡한 곳에
끼는 걸 봤느냐?"
"지금쯤 우리 해남파가 이주한다는 소문이 중원 전역에 퍼졌겠군요."
"물론이다. 무림맹은 물론이고 모든
대소문파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독고 맹주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일이지. 분명한 건 우리 해남파에
대한 경계가 더욱 심화되리라는 사실이다."
"그렇겠지요......."
"운성, 그보다 한 가지 네가 결정해야 할 증대사가 있다."
모용문은 문득 안색을 무겁게 가라앉히며 말올 이었다.
"이것은
무림맹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백도무림의 안위와 관련된
이상 결코 외면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무슨 말씀이신지?"
곡운성은 뭔가 심상치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는 걸 직감했다.
모용문은 차분한 어조로 근래 무림맹이 있는 황산에서 벌어졌던 괴이
한 사건들을 설명했다.
"듣자하니 그 독은 천멸지독이라는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
녔다고 하는구나."
"............"
곡운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멸. 만약 이 세상에서 그 단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있
다면 그는 바로 곡운성이었다. 그는 사천우를 직접 만났고. 엄청난 양
의 천열지독이 있는 지하석실을 직
접
폐쇄시키지 않았던가?
'그럴 리가! 설마하니 누군가가 폐쇄된 사천우의 지하석실올 찾아냈단
말인가?'
모용문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천멸지독은 미완성의 것이라고 한다. 미완성의 독이 그
정도라면...... 완성된 천멸지독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하기
가 전울스러울 정도다."
".............."
곡운성은 그제서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사천우가 완
성시킨 천멸지독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진 것이다.
"북룡맹이 어떻게 천멸지독을 얻게 되었는지는
밝혀졌습니까?"
"원 황실에서 제조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어떤 경로로 북
룡맹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모용문은 두눈에 광채를 빛내며 말올 이었다.
"황산 무림맹을 위해하려던 북룡맹의 살수들은 대부분이 소탕되었다.
하나 절반 가량은 황산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주하고 있는 상태다."
"숙부님께선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마전
무림맹에서 본파로 서찰을 보내왔다. 그들을 소탕하는 데 도
움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곡운성의 신색이 일순 기이한 빛으로
물들었다.
모용문은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북룽맹의 잔당들이 하필 이 근처인
호남성
설봉산 일대로 도망쳐 왔으니....... 현재는 무림맹의 장사지
부에서 출동해 놈들과 충돌하고 있는 상태다."
곡운성은 모용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모용 숙부께선 독고 맹주가 이 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고 생
각하십니까?"
"북룡맹의
살수들을 없앤다 하더라도 우리 해남과에 적지 않은 손실이
따를 것은 분명한 일이다. 어쩌면......"
말끝을 흐리는 모용문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독고무적은 처음부터 일부러 북룡맹의 잔당들을 이곳으로 몰았는지도
모른다."
"으음.,....."
곡운성은 모용문의 말올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북룡맹의
살수들이 천멸지독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비록 미완성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이상 잘못하다간 해남파
도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곡운성은 확고한 신념이 어린 신색으로 조용히 입을 떼었다.
"설령 이것이 독고 맹주의
함정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
다. 이 일은 이곳 호남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모용문은 그런 곡운성의 기도에 절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
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운성, 너는 이제 이 모용문이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성장해 버렸구
나.......'
곡운성은 해남도로 정예고수들을 소집하라는 전서구를 보냈다.
엄선된 육십 인의 고수들이 운산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정확히
보름
후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곡운성이 막 운산을 출발하려는 순간이었
다.
곡운성은 출정하는 문파 고수들 중에 비영의
모습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비영을 데리고 간다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영, 거긴 네가 있올 자리가 아니다."
곡운성의 말에 비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왜 저를 두고 가시려는
것입니까?"
"비영, 아직은 네가 움직일 때가 아니다. 우선 강호의 경험을 쌓은 후
에......."
"전 이 일이야말로
강호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비영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확고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곡운성은 난감한 심정이었다.
사실 비영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무공이었다. 그리 강하지 못한 비영의 무공으
로는 잘못하다간 큰
변을 당할 수도 있었
다.
옆에서 지켜보던 모용문이 신비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문인께선 자네를 보믈처럼 아끼고
계시네."
비영은 빙그레 웃으며 곡운성과 모용문을 번갈아보았다.
"전 이미 맹세했습니다. 앞으론 형수님과 함께 계실 때 외에는
어디든
지 따라다닐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허어......."
곡운성은 그의 강경한 태도에 입맛을 다셨다.
그가
어찌 비영의 뜻올 오르겠는가. 결의형제를 맺었으니 생사도 함께
하겠다는 의중이었다.
"어쩔 수 없군."
결국 곡운성은
숭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문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필시 비영의 지혜가 큰 일을 해낼 것이다."
그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드디어 곡운성은 육십 인의 해남파 고수들과 비영을 대동하고 설봉산
으로 떠났다. 일행은 열이틀 후
설봉산의 용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봉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거친 산세는
중원에서 가장 험악하다는
평판이 나 있을 정도였다.
곡운성은 그리 오래지 않아 그러한 소문들이 한치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시사철
햇?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계곡이 봉우리 사이사이마
다 늘어서 있었고. 그 어느곳이나 예외없이 빽빽하게 원시림이 우거진
모습이었다.
곡운성은 어럽지 않게 무림맹 산하 장사지부의 무사들을 만날 수 있었
다. 그들은 설봉산 일대의 산로를 남김없이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연기신호가 피워올려졌다.
그것은 곡운성이 해남파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났음을 알리는 신호였
다.
일단의 장사지부 무사들이 곡운성 일행을 본부막사로 안내했다.
곡운성은 새삼 감회 어린 심정이 되었다.
'나는
장사지부와 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천일비의 북룡문 침공 당시 곡운성이 가장 먼저 합류하여 싸운 곳이
바로 장사지부였다.
당시 장사지부의 지부장인 양귀명이 마지막까지
북룡문의 침공에 대항해 싸우다가 산화한
일은 지금도 곡운성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안내를 하던 장사지부의 한 무사가 전방을 가리켰다.
과연 계곡 중간의 한 평지에 사십여
개의 대형 막사가 모습을 드러내
고 있었다.
"새로 편성된 장사지부의 원궁력이 신임 지부장이란 인물이라고 했던
가......"
곡운성은 원궁력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매우 거대한 체구를 지녀서 홉사 혹곰을 연상시키는
풍모를 지녔
다는 것, 그리고 외모와는 달리 매우 지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
을 뿐이었다.
이윽고 대형 막사들이 즐비한
장내로 막 들어설 무렵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마증나와 있던 원궁력이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부관
들과 함께 다가왔다.
"어서오시오. 장문인, 이몸이 바로 원궁력이을시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원궁력은 곡운성 일행을
막사로 안내했다.
원궁력은 지체하지 않고 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북룡맹 무리들은 적풍단의 잔당들과 함께 이곳
설봉산으
로 도주했소이다. 나는 본 장사지부를 비롯 인근의 수십 개 방파에서
지원을 받아 설봉산 일대의 모든 퇴로를
차단시켰소."
그의 어투는 체구에 걸맞게 웅흔한 것이었다.
곡운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생각난 듯 물었다
"우리측 피해상황은 어?습니까?"
"놈들은 산속에 처박혀 꼼짝도 안하고 있는 상태요. 우리가 들어가면
기습으로 치고 빠지는
통에...... 피해가 막급하오."
원궁력은 처음의 호기와는 달리 어두운 신색으로 말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설봉산 일대의
인원배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
다.
"......어찌되었든 놈들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자세한 이
야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 우선 군막을 배정해드리겠소."
곡운성 일행에겐 일곱 개의 군막이 배정되었다.
그것은 사실 파격적인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인원의 다른 방
파들엔 보통 네 개의 군막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원궁력이
곡운성과 해남파를 각별히 예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각파의 수뇌들이 원궁력과 함께 곡운성의 군막으로 찾아왔
다. 그들 대부분은 설봉산 일대의 군소방파 문주들이었다. 원궁력의
소개로 곡운성과 상견례를 가진
그들은 한결같이 기쁨의
빛올 감추지 못했다.
"정말 잘 오셨소. 천의인협의 영명은 그동안 귀가 따갑게 들었소이다.
"
"이런 데서 뵙게 되니 실로
영광입니다, 장문인."
"하핫! 곡 장문인께서 오셨으니 놈들의 소탕도 시간문제일것 같소이
다."
그들의 곡운성에 대한
예우는 실로 극진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그
러한 태도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는 구대문파의 하나인 해남파의
장문인이 아닌가. 같은 일파의 지
존이라 해도 자신들이 이끄는 군소방파와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
미 곡운성의 인품에 대한
평판을 뜰어온 터인지라 나이가 어리다는 것
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곡운성은 그들에게 일일이 포권지례를 취하며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
다.
"여러 선배님들께서 이렇게 반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거
한 힘이나마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전력을 다하갰습니다."
회합은 저녁식사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이틀이 눈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그동안 곡운성은 설봉산
일대의 상황을 대부분 파악해냈다.
그는 항상 움직일 때마다 비영을 대동하고 다녔다. 비영은 어떤 자리
에서도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곡운성이 나름대로의 계획을 수립하며 고심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인믈
들이 설봉산을 찾아왔다.
그들은 바로 육대세가
증 하나인 화가장의 장주인 화문청과 소십삼랑
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곡운성으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우였다.
<2>
"소십삼랑! 화 대협!"
곡운성은 저 멀리 장사지부 무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군막 쪽으로 다가
오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격동으로 몸올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로구나.,....."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소십삼랑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기도가 헌앙해져 있엇
다. 개방의 제자답께 전신에는
지독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당당하고 가벼운 걸음걸음마다 배어 있는
기품이 참으로 보기 좋은 것이었다.
화문청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오습이었다.
남북무림의 처절한 전란에서 무수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그였
다. 비록 당시 한 팔을
잃어버린 그였지만 일대종사의 풍모를 여지없
이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때 소십삼랑과 화문청의 걸음이 갑자기 딱 멈추어졌다.
비로소 그들도 곡운성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세 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일순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너무도 갑자기,
그것도 너무도 반가운 사람을 보게 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
쁨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망연히 곡운성을 바라보고
있던 소십삼랑이 성큼성큼 다가오더
니 힘있는 음성으로 입올 떼었다.
"혹시...... 자네 성이 곡씨고 이름은 운성이라는 사람이
아닌가?"
곡운성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격동을 애써 억누
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아들만 열세
명이 있는 집안의 말썽꾸러기 막내인 소십삼랑이
라면 나도 곡운성이 맞네."
순간 소십삼랑은 안면근육을 실룩하더니 그대로 곡운성의
몸올 포옹했
다.
"운성!"
곡운성도 그의 몸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소십삼랑!"
실로 감격적인 해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화문청이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곡 장문인의 부인께서 보시면 질투하시겠는걸. 핫핫."
소십삼랑은
그제서야 곡운성의 몸올 놓고는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제수씨가 그런 오해를 하신다 해도 어쩔 수가 없지요. 난 여자
보다 이
친구가 횔씬 좋으니까 말입니다!"
곡운성은 미소를 띄운 채 화문청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 장주,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곡 장문인, 하마터면 몰라볼 뻔하지 않았소?"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쥐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생사의 고락을 함께하면서 쌓여진 동지의 우정은 그들의 손을 통해 서
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를 떠나 서로를
친구처럼 여
겨은 터가 아니었던가.
한편, 화문청과 소십삼랑의 방문은 원궁력에게도 상당히 뜻밖이었다,
원래 그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원궁력의
가문은 화가장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개방과도 한번 충돌한 적
이 있었던 것이다.
"화가장이나 개방엔 지원요청을 한 적이 없었소만......"
원궁력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북룡맹의 무리를 상대하는 일에 따로 임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
초문이오."
화문청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소섭삼랑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화 장주님과 우연히 만나 합류하게 되었소. 보시다시피 나는 혼
자이니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소."
"글쌔, 호의는 고맙지만 예정에 없던 인원이라서....."
원궁력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화문청은 강경한 어조로 못올 박듯이 말했다.
"본장은 이번의 일에 반드시 참여할 것이오!"
사실 북룡맹에 대한 그의 원한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화문청은 소문을 듣자마자 화가장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으
로 온 것이었다.
"음..,...."
원궁력은 도저히 그를 물리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원궁력은 화문청과 소십삼랑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
는 처지도 아니었다.
정파무림에서 가장 명망 높은 여섯 가문 중 하나인 화가장의 장주와
가장 방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개방의 방주 위지태무의 제자, 그 어느
쪽도 일개 지부장인 자신의 위치로 합부로
대할 수 없는 거믈들인 것이다.
그날 밤, 곡운성은 자신의 거처에서 화문청, 소십삼랑과 어을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하! 곡 장문인, 내 잔을
받으시오."
"아니 내 잔부터 받으시지요."
"이 소십삼랑에겐 잔을 주지 말고 술을 주시오."
주거니 받거니.......
세 사람은 주흥이 도도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잔을 비워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소십삼랑이 문득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느닷없는 그의 탄식에 곡운성과 화문청은 의혹을 담은 시선올 보냈다.
"소십삼랑, 갑자기 웬
한숨인가?"
"젠장 난 방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소.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일파
의 종사가 아닌가? 나만 빼고......"
소십삼랑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참담할 수가 있느나 말이야. 딴데 가선 그래도 목에 힘
좀 주는데 여기선 장문인이고 장주니 하는 높으신 양반들만 있으니 술
이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구나!"
그 말을 하는
중에도 소십삼랑은 술을 일곱 잔올 들이켰으며, 닭다리
두 개를 뼈만 남긴 채 해치우고 있었다.
화문청은 그런 소십삼랑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소아우의 엄살은 실로 대단하구먼. 개방의 구결장로라면 육대세가의
가주보다도 더 알아주는 위치 아닌가?"
"구결장로! 소십삼랑이 벌써 구결의 신분에 올랐단 말인가?"
곡운성은 놀란 눈으로 소십삼랑을 바라보았다
개방이 어떤
곳인가?
비록 구대문파에 끼진 않았지만 그 세력의 방대함은 구대문파와 육대
세가의 모든 인원을 합친 것보다 많은 곳이다. 중원
천하에 흩어져 있
는 개방 거지들의 숫자는 수십만을 혜아린
다. 당연히 그중에는 수많은 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혜아릴 수 없는 개방의 기인들 중에서도 오결 이상의 신분을
지닌 자는 극소수에 달했다,
개방문도들이 옷에 새겨진 결(매듭)의
숫자로 신분을 표시한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삼결까지가 보통제자에 속하고, 사결 이상은 한 지역의 분타주나 총단
의 향주급 신분이다. 당연히 오결 이상의 신분은 당주급에 속하는 신
분이었다.
섭결은 오직 한 명, 방주인 위지태무
뿐이었다.
구결은 장로급 신분으로 그 숫자는 다섯 명을 넘지 않았다.
구결장로들은 배분이 오두 위지태무와 동년배로 백 세에 가까운
인물
들이었다. 개중엔 이미 백 살이 횔씬 넘은 사람도 있었다.
한데 소십삼랑이 벌써 구결장로의 지위에 을라 있다고 하니 어찌
놀랍
지 않겠는가?
이때 다시 화문청이 소십삼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소아우는 장차 개방의 차기방주가 될 몸이
아닌가? 허튼소리는 아예
하지도 말게."
하나 소십삼랑은 여전히 시큰등했다.
"중요한 건 현재가 아닙니까? 비록 사부님의
연세가 백 세가 넘었지만
내가 보기엔 앞으로도 오십 년 동안은 끄떡없이 장수하실테고......
개방의 방주는
종신직이니....... 제길 ! 그렇게 따지면 고희가 넘은
나이가 되어야 겨우 방주가 될텐데 다 늙어서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
소십삼랑의 투덜거림과 블만은 끝이 없었다.
"하하핫!"
"후후...,..."
곡운성과 화문청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곡운성을 쏘아보며 소십삼랑은 블만의 화살을 그에게로 날렸다.
"해남파의 장문인에 즉위하면서 연락도
안해? 내가 거지라고 무시하는
건가?"
곡운성은 소십삼랑의 서운함을 층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장문인 취임은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네. 그
렇지 않았다면 내가 부르지 않았어도 자네가 달려 왔을 게 아닌가?"
"좋아. 이번에는
특별히 용서해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꼭 불러주게."
"다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하제일좌, 무림맹주로 취임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
곡운성은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입안의 술올 토해낼 뻔 했다. 화문청
도 멍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소십삼랑은 되려 그런 두 사람이 이상하
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뭘 그리 놀라는가? 까짓
무림맹주가 둬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졌네! 자네의 입담에는 당할 도리가 없군.'
곡운성은 고개를 내흔들었다.
소십삼랑은 슬잔을 들어올리며 한쪽 눈을 쩡긋했다.
소십삼랑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순간 화문청은 기이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곡운성에게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소십삼랑은 농담을 한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정말 그떻게 될
지도......'
"마시게. 벌주 석 잔일세!"
"석 잔이 아니라 세 말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네."
곡운성은 소십삼랑의 슬잔을 받으며 기분좋게 웃었다.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원궁력의
군막에서는 각파의 수뇌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설봉산에 숨어 있는 북룡맹도들의 소탕방법을 의논하는 자리였다.
원궁력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한 달 보름 동안 적들은 설봉산에 숨어 있다가 갑작스런 기습을
하고는 도망치는 비열한 수법으로
일관해왔소. 그 바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이오."
원궁력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더니 말올 이었다.
"더 이상
그들과 숨바꼭질을 할 수는 없소. 약간의 위험을 각오하더라
도 전면공격을 시도하는 게 좋을 듯하오."
"좋소이다!"
"언제까지 시간만 끌 수도 없는 일이니 놈들을 일격에 칩시다!"
각과의 수뇌들이 앞다투어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원래 계획은 암암리에 적
풍단과 북룡맹 잔당들이 숨은 곳을 찾아낸 후 일격에 섬멸하는 것이었
지만, 무려 한 달 보름의 수색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오
히려 그동안 적이 파놓은 함정과 기습에 당해 수없이 회생자를
냈을
뿐이었다.
원궁력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드리워졌다.
"설봉산이 아무리 험준하다 해도 한꺼번에 쳐들어가 사방으로 좌충우
돌하다 보면 놈들은 결국 꼬리를 드러낼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낭랑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설봉산은
조그만 야산이 아닙니다. 장장 수백 리나 뻗은 대산맥인데
천여 명의 인원으로 그들을 토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음성이 들려은 곳으로 집중되었다.
질문을 던진 인믈은 다름 아닌
비영이었다.
바로 그의 옆에 있던 곡운성은 내심 뜻밖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그가 아니던가?
원궁력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저 녀석은 항상 곡운성의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놈이 아닌가?'
이 자리는
원래 각파의 수뇌들만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블
구하고 비영을 제지시키지 않은 것은 곡운성의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이상 무시할 수 만도 없는 일이었다.
"소형제는 이름이 무언가?"
곡운성의 입에서 일순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일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내 의제인 비영입니다."
"하면....., 장문인의 말씀은?"
"그의 말은
곧 내 말과 동일합니다."
곡운성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순간 좌중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곡운성은 이미 무림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믈이다. 한데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청년을 자신과 동일하다고 말했으니 어찌
기이하
지 않겠는가?
원궁력으로서도 할 말이 없게 되고 말았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한 해남파의 장문인인
곡운성이 대
변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소형제는 할 말이 있으면 지탄없이 하도록 하게."
비영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봉산으로 전력을 기울여 쳐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상대는
북룡맹의 정예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숨어 있고 우리는 드러나 있는
상황입니다. 실은 확실하되. 득은 조금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원궁력은 언성을 높이며
비영을 쏘아보았다.
"그럼 이대로 한없이 방관하자는 말인가?"
비영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잔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수수방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방법을 달리하자는 것입니다."
원궁력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소형제의 말을
듣자니 뾰족한 묘수라도 있는 모양인데 한번 말씀해보
시게. 세이경청하겠네."
약간은 비웃음이 실린 어투였다.
비영은 그런
그의 태도엔 신경쓰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 달이 지나면 겨울입니다. 설봉산은 지세가 높아 더 빨리 겨울이
올 것입니다.
지형과 기후를 이용하는 것은 만고의 병법입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궁력은 단호한 어조로 잘라말했다.
"안될 말!
그들에게 겨울이 불리한 만큼 우리도 마찬가지일세. 설봉산
의 겨울은 흑독할 뿐더러 눈이 많기로 유명하네. 그런 상황에서 무엇
을
할 수 있겠는가!"
일순 비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지부장께서 느끼는 것과 똑같이 적들도 그렇게 예상할 것입니다.
우
리는 바로 그 허를 찔러야 합니다. 만약 제게 보름간의 기한만 주신다
면 그 계획을 완성시키겠습니다."
"보름이라고
했나?"
원궁력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비영은 엄숙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명이 걸린 일입니다. 보름이란
기일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
그 말에 화문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옳은 말이오! 한 달 보름을 끌어온
싸움인데 보름을 더 기다리지 못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소."
그러자 사방에서 각파의 문주들의 앞다투어 찬성의 뜻올 표했다.
"화 장주의 말에 동감하오!"
"나는 곡 장문인의 얼굴을 봐서 한번 믿어보기로 결심했소."
상황이 갑작스럽게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원궁력은 당혹스런 표
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찬성하는 판국에 자신만이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좋소. 보름 후에 다시 회합을 가지도록 하겠소."
그 말을 남긴 후 그는 몸을 돌려 군막을 나가버렸다
밖으로 나온 그의
얼굴은 무겁게 경직되어 있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원래 그에게는 이 설봉산 토벌 외에 또하나의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남파와 북룡맹의 잔당들을 서로 상잔시키라는 후량의
밀명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한달 반 동안 은연자중하고
있었던 것
도 곡운성이 나타나길 기다린 때문이었다. 한데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
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시일이 좀
지체될 뿐이다. 그 젊은놈이 보름 동안 제갈공명 흉내를
낸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대륙의 북방으로부터 휘몰아쳐오는
차가운 한풍은 점점 그 냉기를 더
해갔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떨어지는 듯 하더니 드디어 설봉산 일
대에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한 군막 안, 비영은 설봉산의 지형도를 보며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
었다. 그때 곡운성과 소십삼랑이 안으로 들어섰다.
"눈이 오고 있소."
소십삼랑의 말에 비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비영을 보며 소십삼랑은 물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알아낸 게 있소?"
"잘 될 것 갈습니다."
비영은 다시 시선을 지도로 옮기며 담담히 대답했다.
곡운성은 내심
크게 안도했다. 그는 비영의 표정에서 이미 모종의 계
획이 수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바로 비영이 군웅들에게 약
속했던
보름째 날이었다. 사실 그동안 곡운
성은 비영을 신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를 해왔던 터였다.
"이 지도를 보시지요."
비영은 손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에는 그동안 장사지부의 무사들과 북룡맹의 무사들이 충돌한 지점
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점은 모두 스물여섯 개였다. 지
도엔 그외에도 많은 세세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여러 가지 정보와 그동안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와 날짜 그리고 주변
의 지형을 참고로 해서 북룡맹의 무리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세 곳
알아냈습니다."
소십삼랑의 얼굴에 멈칫 놀란 기색이 떠을랐다.
"지도와 날짜만 보고 놈들이 숨어 있는 곳올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이오?"
비영의 눈가에 신비로운 빛이 스쳐갔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조건? 그게 무엇이오?"
"적들 중에 병법에 능한 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의 추측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곡운성은 두 눈에 날카로운 광채를 발했다.
"북룡맹에서 그들을 파견했을
땐 병법을 아는 자를 분명 딸려보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지도를 집어들었다.
"자네가 추측한 세 곳은 어딘가?"
비영은 즉시 지도에서 세 곳을 짚어 보였다.
지도를 살피던 곡운성의 얼굴에 어떤 홍분의 빛이 스쳐갔다. 그는 비
형의
능력을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변이 없는 한 비영이 지
적한 장소에는 반드시 적들이 숨어 있을 것 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곡운성을 비롯한 각파의 수뇌들은 원궁력의 군막으
로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싸움은 시작될 것이다. 단지 싸움의 방법을 선택
하는 일이 남아 있올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곡운성의 옆에 서 있는
비영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점 표정도 떠을라 있지 않은 비영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낸
다는 건 불가능했다.
좌중의
시선은 서서히 원궁력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이 연합토벌대
의 실질적인 주관자였다. 장사지부장이라는 신분을 초월해서 그는 무
림맹주 독고무적을 대신한 대리인의 위치
에 있었다.
좌중을 천천히 쓸어보던 원궁력이 드디어 입을 떼었다.
"나
원궁력은 오늘부터 모든 작전권을 해남파의 곡 장문인에게 일임하
기로 결심했소. 이미 천하에 명망을 떨쳐온 곡 장문인을 믿지 못한다
면 누굴 믿겠소?"
그 말을 끝으로 원궁력은 좌중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해며 자리에 앉
아 버렸다.
곡운성은 그런
원궁력의 대심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미리부터 올가미를 씌워 잘못되었을 때는 모든 책임을 떠맡기겠다는
뜻이로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좌중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원 지부장의 깊은 신뢰에 고마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이미 보름
전에
말했듯이. 내 의제의 말은 곧 내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일이 잘
못된다면 모든 책임은 이 곡운성이 지겠
습니다."
".............."
좌중의 인믈들은 일제히 기대와 우려가 섞인 눈길로 비영을 응시했다.
곡운성은 코에 서 있는 비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비영은 조용히 앞으로 나서더니 크게 확대한 지도를 탁자 위에 활짝
펼쳐놓았다.
"모두 이 지도를 보아주십시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눈
속에서의 이동은 적이나 우리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싸움이 벌
어진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상황보다 많은 희생이 뒤따를 겁니다. 그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업니다."
좌중의 인물들은 그 말을 수긍하면서도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최선이겠지만 대체 어떤 방볍이 있단 말인
가?"
비영은 투명한 눈길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무중생유, 조호이산의
병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무중생유라면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여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뜻
인데......?"
"그렇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이 숨어 있을 만한 세 장소를 파악해 놓
았습니다. 우리는 여섯 갈래로 흩어져서 곧장 그 세 장소로
진입할 것
입니다. 적들은 곧장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
는 우리를 보고 크게 당황할 것이며.,.... 필시 무슨 계책이 있으리라
여기고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비영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조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적들은 일괄 그동안 숨어 있던 장소에서
서둘러 이동할 것입니다. 눈 속에서의 이동은 아무리 조심해도 흔적을
남기게
마련일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추격하되, 결코 막아서지는 않습
니다."
"이제야 알겠군!"
화문청의 얼굴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조호이산!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게 한 뒤 잡는다는 뜻,
"적들을 우리가 매복한 곳으로 몰아 한꺼번에 제거한다는 뜻이
아닌가
?"
비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순간 사방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오오......."
"실로 절묘하군!"
비영은 좌중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자세한 공격 경로를 설명하
기
시작했다. 지형지세를 이용한 그 이동방법은 한치의 빈틈도 없었
다.
"그들을 유인할 마지막 장소는 설봉산의 가장 남쪽에 있는
해조강입니
다. 물론 그곳에는 우리 아군이 미리 도착해 매복해 있을 것입니다."
비영의 말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좌중에는
소리없는 흥분의 소용돌이가 찾아들었다.
그중에서도 원궁력의 놀라움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안중에
도 없었던 비영의
존재가 거대한 산처럼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그렇다.
원궁력은 말그대로 자승자박에 걸려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드디어 진격이 개시되었다.
장사지부를 비롯한 각파의 모든 인원이 여섯 갈래로 나누어져 눈덮인
설봉산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곡운성은 사방으로 멀어지는 다섯 갈래의 진압군을 지켜본 후 마지막
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십삼랑은 곡운성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잉,.....
살을 에는 한풍 속에 간간이 휘날리던
눈발이 이내 폭설로 변했다.
설봉산의 지형은 알려진 소문보다 더욱 험준한 것이었다.
게다가 두 자 깊이의 눈까지 쌓여 있으니 그
속을 전진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행은 노루 등을 잡아 날것으로 요기를 하고, 밤에는 눈웅덩이 속에
서 웅크린
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 곡운성 일행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
었다. 전방의 한 언덕에 수섭 구의
늑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던 것
이다.
"괴이하군. 설마하니 늑대떼가 추위나 굶주림으로 죽올 리는 없고....
..."
"냄새가 지독하군요."
비영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거의 전율스럽다고 해도 좋올 만큼 강력한 악취였다.
곡운성이 굳은 얼굴로 입올 열었다.
"오두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저 악취는 내겐 매우 익숙한 것이네."
휘릭!
곡운성은 홀로 몸을 날려 늑대시체들 앞에 내려섰다. 그는 늑대시체들
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상처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독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독에 거의 정통해있는 곡운성으로서도 늑대들을 죽게 만든 독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곡운성은 손끝으로 늑대의 시체를 건드려 보았다. 순간 불에 덴 듯 화
끈한 고통이
손끝에 전해져왔다. 그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금관
사왕의 정혈을 홉수한 덕분에 만독불침
의 경지를 이룬 자신이 아닌가?
그것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독이라는 걸 의미했다.
곡운성은 시선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그는 그제서야 늑대들의 시체가
한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휘릭!
곡운성은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렷다. 이내 그의 앞에 한 동굴이 나타났
다. 곡운성은 절로 긴장한 채 동굴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의 발
걸음이 이내 얼어붙은 듯 정지되었다.
"이럴
수가......."
동굴 안에는 북룡맹의 인물들로 보이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서로 엉킨
채 죽어 있었다. 살점이 여기저기 뜯겨져
나가 있는 시체들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들도 늑대떼들과 마찬가지로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끔찍하군......."
신음 같은 일성과 함께 한 그림자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소십삼랑이었다. 그는 시체들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내 당혹한 표
정으로 말했다.
"운성, 이자가 누군지 아는가?"
소십삼랑이 보고 있는 시체는 육십 세
전후의 비대한 체구를 지닌 노
인이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횐 피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거대한 두꺼비를
연상시켰다.
"이 자는 흑마독장을 쓰는 강뢰라는 인물로, 흑도에서는 매우 유명한
자일세. 무공도 무섭지만 독의 전문가로 명성을
날려왔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독의 전문가인데 그 자신이 독에 중독되어 죽다니 ..... 이자의 운명
도 꽤 기구하다고 할 수 있군. 원래......."
소십삼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곡운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걸 본 때문이었다.
"운성,무슨 일인가?"
"나는 이제서야 이 독이 무엇인지 깨달았네."
곡운성은 신음하듯
말을 이었다.
"이것은 바로 천멸지독일세."
"천멸! 무림맹 강령지부를 몰살시켰다는?"
소십삼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었다.
곡운성은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몸올 돌렸다
"일단 이곳을 나가는 게 좋겠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뇌리 속으로는 그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무림에 나타난 천멸지독이 미완성의 것이라는 건 분명해진 셈
이었다. 만약 사천우가 완성시킨 천멸
이었다면 소십삼랑을 비롯한 해남파 고수들은 단지 냄새만으로도 이미
몰살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건 무서운 일이다.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지니고
있던 천멸지독을 잘못 다루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게
분명하다."
상황은 분명해졌다.
적들은 뜻하지 않은 변고가 발생하자 서둘러 시체들을 버리고 떠났으
리라. 늑대들은 시체들을
뜯어먹다가 중독되어 죽은 것이었다.
곡운성은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동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
이어 그는 서둘러 해남파 고수들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
제45장 숙명이라는 것은
<1>
휘우응.....,.
새벽 무렵에
그쳤던 눈은 해가 지면서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계곡을 타고 블어닥치는 바람은 너무도 차가워서 칼날에 살갗이 베이
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청년은 방금 잡은 노루의 껍질을 비수로 벗겨내면서 마치 자신의 살올
오려내는 듯한 착각에
휩짜였다.
스슥......
노루를 손질하는 청년의 손은 매우 능숙했다. 청년은 매우 어렸을 적
부터 산짐승을 사냥해온 터라
눈을 감고도 이런 일들은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손끝은 웬일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손을 멈추고 완전히 컵질이 벗겨진 채 시뻘건 살덩이를 드
러낸 노루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점차 노루가 아닌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다름 아닌 바로 청년 자신의 모습으로.......
"으음!"
청년은 문득 신음성을 토하더니 이를 악물고 노루의
몸을 여러 토막으
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민첩한 손놀림과는 달리 그의 두눈
은 막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 이상으로
암울하게 변해갔다.
"우리는 죽올 거야......"
그는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청년의 이름은 단위종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고향인 남악령에서 부친의 무공을 전수받으며 보냈
다. 청년으로 성장했을 때,
그는 남악령 일대의 또래들 중 자신을 당
적할 자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위종이 넓은 바깥세상에 눈올 돌리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가슴에 커다란 꿈파 야망을 간직한 채 남악령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순간적인 혈기로 발을 잘못 디뎌 흑도의 모임에
가담하고 말았
다.
그 모임이 적풍단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단위종은 뒤늦게 그들의 뜻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미 그는 적풍단에 피의 맹세를 했
고, 단위종이라는 이름은 무림맹의
천각까
지 알려져 척살대상으로 분류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별수없이 적풍단에 적응하기 위해 남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적지 않은 백도무림의 고수들이 그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러던 중 얼마전 북룡맹에서 넘어온 고수들과 합류하여 강령지부의
사건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천멸지독을 이용하여 무림맹을 붕괴시키려던 음모는 실패로 끝
났다.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때부터 단위종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
다.
이제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으로 그의
숨통을 죄어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문득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단위종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황의청년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청년이라기엔 조금은 소년티
가 남아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놀랍도록 건장한
체격과 불꽃처
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소유하고 있었다.
"날이 저믈었소.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요?"
황의청년이 블쑥
물었다.
단위종은 새삼 자신이 숲속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덫에 걸린 노루가 있어서 ...... 손올 보던 참이네."
"호오! 이건 먹음직한데. 어서 가지고 갑시다. 눈 때문에 짐승들이 자
취를 감춰 하루 종일 배를 골았는데 정말 다행이오."
"그러세."
두 사랍은 손질한 노루를 나누어 짊어지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곧 그
들의 앞에 길고 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황의청년이 단위종을 웅시하며
의아한 질문을 던진 건 바로 그때였다.
"요즘 계속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소?"
"나는......."
단위종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황의청년은 이내 섭섭한 표정이 되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시오."
순간 단위종의 얼굴에 어떤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황의청년을
뚫어지게 정시했다.
"장 형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림맹에 투항하는 게 어떤
가?"
".........."
황의청년의 안색이 일순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는 한참동안 단위종을 웅시하더니 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힘드시오?"
단위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의청년이 다시 물었다.
"죽음이 두럽소?"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었다.
단위종의 얼굴이 참흑하게 일그러졌다. 황의청년은 나직한 괴소를 홀
려냈다.
"쿡쿡...... 그동안의 친분을 생각해서 못
들은 것으로 할테니 다시는
입밖에 내지 마시오."
그 말과 함께 황의청년은 먼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나 장천린은 적풍단에 가입하면서 이미 맹세했소. 이 세상을 한번 바
꿔보겠다고 말이오."
".........."
단위종의 몸이 일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넋나간 표정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끌리듯 장천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귓속으로 장천린의 신념에 찬 음성이 계속
파고들었다.
"단형은 능력에 관계없이 배부르게 사는 인간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슬픔을 생각해야만 하오. 백도무림은 바로 그 부조리를 바탕으로 이루
어진 세계요. 그곳으로 투항한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먹고 사는 거대한 괴물의 입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소."
"............"
단위종의 가슴은 천근
바윗덩어리로 짓눌린 듯 무거워졌다.
그는 장천린에게 내심을 털어놓은 걸 후회했다.
두 사람은 계곡의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북룡맹과 적풍단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극도로 초
체하고 지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모두의 눈빛은 야수처럼 무섭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선 위에 선 얼굴, 얼굴들......
처음 장강을 넘어온
북룡맹 인믈들과 남무림에서 합류한 적풍단 단원
들은 총 오백 명을 혜아리는 대병력이었다.
하나 이곳 설봉산에 도착했을 땐 겨우
이백여 명에 블과했다. 그나마
천멸지독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백여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처지였
다.
"..........."
단위종이 가지고 온 노루를 보자 모든 인물의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때로 굶주림은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평옥!"
장천린의 시선이 나이가 가장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소년
의 나이는 불과
십육 세 정도로 보였다.
"네가 똑같이 나누어라.만약......."
장천린은 무서운 눈빛을 발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조각이라도 더 가지려는 자가 있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평옥이라고 불리운 소년은 무표정하게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장천린은 계곡의 맨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세 명
의 흑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현명이로와 담비우였다.
몰골이 초췌한 것은 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음사귀는 얼굴
오른쪽이 독에 중독된 듯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담비우는 다가오는 장천린을 향해 회미한 미소를 던졌다.
"앉거라."
"예."
장천린은 공손히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담비우의 앞자리에 앉았다.
담비우에 대한 장천린의 존경심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사실 황산에서 이곳
설봉산까지 도망쳐을 수 있었던 것도 담 비우의
능력 덕분이었다.
그의 두뇌는 왕년의 백한령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무공만
따지자면 현명이로가 그보다 한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둘
가운데 음사혼은 북룡맹 고수들에 대한
지휘권을 지니고
있는 몸이었다.
"설봉산을 반드시 빠져나가 다시 장강을 넘어야 하오."
음사혼이 독백처럼 흘려낸 한마디, 담비우는 두눈에 싸늘한
광채를 뿜
어냈다.
"비록 예정대로 무림맹을 쓰러뜨리진 못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층분히
달성했다고 볼 수 있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몰살을 당한다면 그 전
과가 빛을 잃고 말 것이오."
"흐흐...... 벌써 겨울이오. 무림맹 놈들은 결국 견디지
못한 채 물러
날테고...... 봄이 되면 장강을 넘올 수 있을 것이오."
"그렇소. 그때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만
하외다!"
음사혼과 담비우의 눈길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그때 음사귀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스며들었다.
"........"
"괜찮은가, 아우?"
음사흔은 몸올 돌려 음사귀를 보며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괜.....
찮소, 형님."
음사귀는 창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나 그익 얼굴엔 극심한 고통을 힘겹게 참아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
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방울은 그의 내공이 거의 소실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음사귀는 수하들을 이동시키다가 우연히 장사지부의 무사들과 조우하
게 되었다.
당시 음사귀가
이끌고 있던 부하들은 백 명이 넘었고. 장사지부의 무
사들은 겨우 사십여 명에 불과했다.
싸움의 결과는 처음부터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방심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양명, 장사지부 무사들을 지휘했던 향주급 고수.
그는 다른 것은
그리 특출난 점이 없었지만 암기술 한 가지만큼은 눈
부시도록 빼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여덟 개의 비표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일시에
발출시키는 기교는
놀랍기 짝이 없었다.
재앙은 바로 그 양명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마지막까지 용전분투하다가 죽기 직전,
양명은 비표 여덟 개를 모조리
음사귀에게 발출시켰었다.
음사귀는 일곱 개는 막아냈으나 그만 마지막 하나에 격중당하고 말았
다.
한데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경우란 말인가?
하필이면 그 마지막 비표가 음사귀의 소맷자락 속에 있던 천멸지독 병
에 격중 되었던 것이다.
천멸지독을 담아두었던 옥병이 깨지고...... 그 다음의 상황은 생각하
기조차 끔찍한 것이었다.
주위에 있던 백여 명의 부하들 모두 독사 하
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음사귀가 목숨을 건진 것도 그가 독술의 전문가였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그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깨진 병에서 깨알 같은 한 방울의 천멸지독이 가슴 부위에 닿았던 것
이다. 그
즉시 음사귀는 가지고 있던 비수를 꺼내 그곳의 살점 부위를
도려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그는 여독을 다 제거하지 못했다. 그것
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쿨럭! 나는 이젠 틀린 것 같소, 형님......."
음사귀는 잔기침을 하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가! 절대 포기해선 안되네. 북무림으로 건너가기만 한다면
천 맹주께서 어떻게든 자넬 살려내실 걸세."
그때
단위종이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 덩어리를 내밀었다. 고기는 균둥하게 자른 세 덩어리였다.
"음......."
"고맙네."
음사혼과 담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루고기를 집어들었다.
그들은 잠시 시뻘건
생고기를 보더니 이내 입으로 가져갔다. 금방 그
들의 입 주위가 노루피로 얼룩졌다.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위치가
무림맹에
발각되는 날엔 무서운 결과가 초
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비릿한 날고기를 뜯어먹고 있을 때였다
삐익!
돌연
날카도운 비상호각이 울렸다. 그 호각소리는 계곡의 입구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 한겨울에 무슨 급한
일이라고 난리야?"
여기저기 쓰러져 쉬고 있던 북룡맹도들이 부시시 일어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휘익!
계곡의
입구에서 한 명의 적풍단 무사가 다급한 신색으로 나타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담비우와 음사혼의 앞에서 신형을 멈추더니
황망히 보고했다.
"천둔능선을 지키고 있던 곳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산 아래 포
진해 있던 백도놈들이 모조리
설봉산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다는 첩
보입니다!"
음사혼과 담비우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놈들이
이 엄동설한의 눈 속에서 움직일 줄은 미처 몰랐군. 득보다
실이 횔씬 크리라는 걸 알텐데......."
음사흔은 두눈에 번갯갈
같은 광망을 뿜어내며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주리라!'
담비우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건 좀더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소."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을 한단
말이오? 놈들이 우리를 찾기 전에 우
리가 먼저 선제공격을 해야만 하오!"
음사흔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하나
담비우는 여전히 신중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런 눈 속에서 놈들이 움직이는 데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
오.
어쩌면..... 타초경사의 술책인지도 모르오."
"........."
그제야 음사흔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담형의 생각은 무엇이오?"
"일단은 기다려 봅시다, 다음 정보를......"
".....알겠소."
음사혼은 즉시 경계태세를 완벽하게 갖추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사방
에 흩어져 있던 고수들이 믿올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일사불란
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휘릭!
담비우는 그제서야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계곡 일대를
경비하는 모든 부하들은 비들기를 통해 하루에 세
번씩 본진에 연락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사흘 동안 전서구의
연락이 끊어진 곳이 한두 군데
가 아니다.'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죽거나 제압당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놈들의
손에 전서구가 들어갔을 공산이 크다. 그 전서구를
날려 이곳의 위치를 알아낸다면.......'
담비우의 눈빛은 어둠처럼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그는 결심을 굳혔다.
'포위공격을 당한다면 백여 명의 인원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단 거점을
바꾼 뒤에 기회를 엿보는 게 좋다. 그들이 이곳까지 도착
하는 데는 나흘 이상이 걸릴 터......'
이튿날.
음사흔과
담비우는 수하들을 이끌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비영의 계산은 전율스러울 만치 완벽했다.
이미 처음부터 북룡맹의 무리들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 세 곳을 파악
해 놓았던 그였다. 그가 제시하는 방향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
았고, 나아가는 방향으로 미리
소십삼랑을
비롯한 정찰고수들을 보내 적의 감시망을 미리 접수해버린 것도 그 일
단이었다.
그러나 사로잡힌 적풍단원은 지독한
인믈이었다.
그는 잡히자마자 입에 물고 있던 독단을 깨물어 자결하고 말았다.
소십삼랑은 낭패한 표정이었지만 비영은 개의치 않았다.
곡운성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남무림에서 항거하는 적풍단의 단원들은 오히려 북룡맹들보다 더 흑
도 이념으로 중무장된
자들이다......'
사실 설봉산에서의 격전도 적풍단원이 없었다면 벌써 끝났을지도 몰랐
다. 그들은 실로 끈질긴 독종들이었다.
자신이 죽으면서도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백도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는.......
한편, 비영은 비둘기가 담긴 대나무 초롱을
발견한 것에 크게 만족하
고 있었다. 그는 비둘기가 자신이 추측한 세 곳 중 하나인 쌍관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던 것이다. 비영은 서둘러
여섯 갈래로 흩어진 고수들에게 한 곳에 모이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을
꿈에도 예측하지 못한 북룡맹과 적풍단
의 인믈들은 비영이 설정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 가고 있었다.
그곳은 해조강이었다.
두두두두.......
한 대의 황금 빛 마차가 장사지부의 문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경비무사들의
제지를 받은 후 삼엄한 절차를 거친 후에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장사지부만이 아니라 무림맹 산하 삼
십육개지부 모두가
그러했다.
한데 경비무사들은 제지하기는커녕 멀리 사라질 때까지 깊숙히 포권지
례를 취해보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차의 지붕에서
필럭이는 하나의
깃발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황금
봉황이 어우러져 있는 화려한 깃발!
그것은 그 마차가 무림맹에 단 세
대밖에 없는 봉황금차임을 의미했
다. 그 마차를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은 독고무적을 비롯해서 모두 다섯
손가락 안에 블과했다.
마차는 장사지부의 본관 전각에서 멈췄다.
마부가 황급히 마부석에서 달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서는 인물, 그는 다름아닌 무림맹의 군사인
후량이었다.
전각에선 한 증년무사가 황급히 뛰어나오고 있었다. 미처 정문에서 연
락도 받지 못한 듯 그는 허둥대며 후량의 앞에서 깊숙히 고개를 숙이
며 손올 모았다.
"어서...... 오십시오, 후
노사"
얼마나 당황했던 것일까?
그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승하였으며 직책은 장사지부의 부지부장이었다. 임승하
는 누구보다도 시류에 민감한
인물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지금의
위치에 을라설 수 있었던
것도 무공이나 순수한 능력보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능력에 의한 것
이었다. 그는 후량에 의해
선택되었다.
무림맹의 삼십육개지부 중 대부분의 지부엔 후량의 인맥이 심어져 있
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오직 후량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
다.
이곳 지부장인 원궁력도 후량의 층복이었다. 하나 후량은 그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은 후량만이 지닌 특이한 성격 때문이
었다. 원궁력에게는 감시자가 붙어 있었
다. 그가 바로 임승하였다.
임숭하는
후량을 귀빈을 맞이하는 방으로 안내했다.
후량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은 어찌 되었는가?"
그는 설봉산의 일을
묻고 있었다.
"일이...... 조금 이상하게 꼬였습니다."
"꼬였다고 했나?"
일순 후량의 날카로운 시선이 임승하의 눈에
고정되었다.
임승하는 이마에 식은땀을 홀리며 설봉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오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보고를 듣고 난 후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병법에 대해
선 무불통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비영의
계략을 듣
고 난 후 어떤 경이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해남파에 모용문 말고도 그런 인재가 있었던가......."
후량은 비영이란 인물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런 인재가 곡운성의 옆에 있다면 어려
운
일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후량은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찾아내야만 한다, 곡운성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제 5 권 끝>
첫댓글 재미있게 잘보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