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국적 :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요수상 : 황금박차(拍車)훈장
주요작품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마적》(1791)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拍車)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入會試驗)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初演)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帝)의 인자(仁慈)》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魔笛)》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 피가로의 결혼
https://youtu.be/Cip9xF-jjDI?si=ECwGVywCr93ybK_g
모짜르트 -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작품해설
모짜르트는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징수필 등 여러 형식에 걸쳐 21편의 오페라를 썼다. 대 천재 모짜르트는 10세 때부터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 전부가 명작으로서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다른 장르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한 20세 전후의 것이 주로 긴 상연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오페라 3대걸작으로 꼽히며, 지금도 전세계에서 널리 상연되면서 그 젊음을 잃지 않는 것은 이 "피가로의 결혼" 과 그 이듬해 만들어진 "돈 지오반니" , 그리고 1791년 그가 죽기 직전에 작곡한 "마술피리" 의 셋이다. 그런데 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은 몰리에르 이후 최대의 명작으로 꼽히는 보마르세가 지은 동명의 희극이 바탕이 되어있다. 이 극은 1784년에 파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실은 보마르세의 3부작의 제2부가 되는 것으로서 제1부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다. 그러므로 이 "피가로의 결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제1부가 되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의 줄거리를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기와 평생의 정열과의 또 하나의 차이는, 바람기 쪽이 조금 더 오 래 간다는 점에 있다" 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평생의 정열" 이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인데, 이 오페라를 이해함에 있어서 좋은 단서를 제공하는 말이기도 하다.
18세기 스페인의 도시 세빌리아 가까이에 알마비바 백작이 살고 있었다. 조금은 잘 생기고 약간 바람기도 있는 독신의 영주다. 어느날 그는 바르톨로라는 의사가 후견을 맡고 있는 로지나라는 귀여운 처녀에게 반해 버린다. "사랑은 미치게 한다는 말은중복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광기입니다...." 라는 하이네의 말을 빌 것도 없이, 백작은 자나깨나 로지나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지나에게는 바르톨로라는 욕심많고 심술궂은 영감쟁이가 붙어 있어서, 그녀와 만나 자기 마음을 털어 놓을 기회가 없다. 어찌할 줄 몰라 궁리에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만능박사 피가로다. 피가로는 한낱 거리의 이발사에 지나지 않지만, 머리가 잘 돌기로는 당대 최고다. 물론 노동에 대한 보수는 톡톡히 받아낸다. 피가로는 백작에게서 돈푼이나 울궈낼 속셈으로 백작을 위해 나선다. 피가로는 온갖 지략을 발휘해서 바르톨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백작과 로지나는 혼인을 맺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피가로의 결혼" 전편에 해당하는 "세빌리아의 이발사" 의 줄거리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는 1782년에 파이지엘로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제2부에 모짜르트가 참여하게 된 동기는 이 성공을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뒤 1816년에 롯시니가 다시 이 "세빌리아의 이발사" 를 오페라화하여 크게 성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이 두번째의 롯시니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 이다.
다시 "피가로의 결혼"으로 돌아가자. 피가로는 혼인을 성사시킨 공로로 백작 직속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도 사랑을 하게 된다. 상대는 백작부인의 하녀인 수잔나이다. 그녀도 날 때부터 시녀 다이프의 아가씨여서, 피가로와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머리가 잘 돌았다.
알마비바 백작도 그녀를 밉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바람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작은 그것이 심했다. 그토록 고심했고 피가로의 헌신적인 주선으로 결혼하게 된 로지나이건만, 백작의 마음에는 벌써 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피가로와 수잔나의 혼담이다. 물론 백작은 이 결혼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잔나처럼 귀여운 처녀를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피가로에게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결혼날짜는 가까워 오는데 어떻게 하는 수가 없을까 하고 백작은 골똘히 생각한다. 드디어 백작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오래전에 폐지된 초야권을 한 번 더 부활시켜서 수잔나에 대한 욕심을 채우려 한다. 이 초야권이란 봉건시대에 있었던 악습인데, 서민의 혼인에 즈음해서 추장, 사제, 영주 등이 자신의 성에 거주하고 있는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하는 권리을 말한다. 지독한 악습이었는데, 이 초야권에 대한 인식을 미리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피가로의 결혼" 을 감상하는 재미는 반감된다.
드디어 결혼 당일이 왔다.
백작은 오늘이야말로 수잔나를 품안에 안게되리라 믿고 있다. 신랑 피가로는 그런 낌새도 모르고 무턱대고 좋아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속편에 해당하는 "피가로의 결혼" 의 제1막이 오른다. 이처럼 "피가로의 결혼" 은 "세빌리아의 이발사" 의 후속편에 해당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마르세의 이 두 극은 루소의 "사회계약설" , 몽테스키의 "법의 정신" , 볼테르의 많은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을 유도해낸 원인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보마르세는 이 2개의 극을 통해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지배계급을 통렬히 비판, 조소하고 있다. 예컨대 피가로의 독백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안됩니다, 백작 나리, 그녀만은 절대로 넘길 수 없읍니다. 안되고 말구요. 나리는 영주님이라고 뭐 대단한 인물로 알고 계시겠죠. 귀족, 재산, 위계, 또 뭐니 뭐니 하고 말예요. 하지만 그 만큼한 보물을 얻음에 있어서 나리께선 도대체 뭘 하셨습니까? 태어날 때 수고를 끼친 외에 또 무슨 일을 했느냐구요. 게다가 사람치고는 머리 꼭대기에서 발 끝까지 어리석기만 하고, 그런데 난 이게 무슨 꼴이람!"
보마르세가 이 희곡을 완성한 것은 1781년이지만, 정부와의 마찰이 있어 옥신각신 한 뒤에, 가까스로 파리의 테아트르 프랑세즈에서 초연을 하게된 것은 3년 후인 1784년이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불 과 5년 전의 일이니까 당시의 정부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초연날에는 사상자가 날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극은 당연히 빈에서도 상연될 예정이었으나, 황제의 명령으로 금지되었다. 그 대신 내용을 조금 바꾸어서 오페라로 만든다면 상연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로렌조 다 폰테가 대본을 쓰고 모짜르트가 작곡하여 1786년 4월에 완성, 5월 1일에 빈의 브루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모짜르트가 30세 때의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황제는 초연 때 이 오페라를 보고는 "브라보 !" 를 외치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말로 성공한 것은 프라하에서의 공연때였다.
이 "피가로의 결혼" 은 모짜르트가 가장 잘했던 오패라 부파의 대걸작이다. 오페라 부파란 18세기 초엽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희극적 오페라인데, 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취하며 노래와 노래 사이를 "레치타티보 세코" 라는, 절반은 빨리 지껄이는 말 같고 절반은 노래하는 듯한 대화나 독백으로 엮어가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