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때기청봉 털진달래는 나를 아직껏 기다리고 있을까
1. 귀때기청봉
산을 걸으면 산의 미술을 본다.
산을 걸으면 산의 음악을 듣는다.
산을 걸으면 산의 철학을 배운다.
산을 걸으면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승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산을 걸으면 나를 위해 산이 있다는 은총(恩寵)으로 해서 황홀하다.
―― 이병주(李炳注, 1921~1992), 『산(山)을 생각한다』에서
▶ 산행일시 : 2024년 5월 25일(토), 맑음, 안개
▶ 산행코스 : 한계령,한계령삼거리,귀때기청봉,큰감투봉,대승령,대승폭포,장수대 분소
▶ 산행거리 : 도상 12.3km(이정표 거리 12.6km)
▶ 산행시간 : 6시간 46분(10 : 44 ~ 17 : 30)
▶ 구간별 시간
10 : 44 – 한계령, 산행시작
11 : 16 – 1,306.3m봉
11 : 44 – 한계령삼거리(1,353m)
12 : 31 – 귀때기청봉(△1,576.4m), 휴식( ~ 12 : 40)
14 : 12 – 큰감투봉(△1,408.2m봉)
15 : 49 – 대승령(大勝嶺, △1,210.2m)
16 : 28 – 대승폭포
17 : 17 – 사중폭포(四重瀑布)
17 : 30 – 장수대 분소, 산행종료
2. 앞은 상투바위, 뒤는 가리봉
3. 매발톱나무, 나뭇가지에 매발톱 같은 가시가 있다
4. 털진달래, 털진달래꽃이 한창일 때는 입산통제기간이어서 보기 어렵다
5. 연령초,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이다
6. 나도옥잠화
8. 대승폭포. 닷새 전에 비해 물이 크게 줄었다
▶ 귀때기청봉(△1,576.4m)
언제 어느 때라도 설악산은 갈 때마다 빈 눈으로 오는 경우가 없다. 오늘 설악산 귀때기청봉을 가는 목적은 세 가지
다. 첫째는 봄꽃을 보는 것이다. 털진달래와 참기생꽃, 산솜다리 등이다. 둘째는 설악산의 경치를 보는 것이다. 서북
주릉의 장쾌한 봄날의 경치와 거기서 보는 전후좌우로 펼쳐지는 첩첩 산이다. 셋째는 나물을 뜯는 것이다. 그러려면
등로를 벗어나 잡목 숲을 뚫고 혹은 너덜을 지나 초원을 찾아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한계령이 설악산을 오르는 늦은 시각이라 한산하다. 무박이면 줄서서 오르던 108계단이 텅 비었다. 설악루 옆 초소
는 문이 잠겨 있다. 바윗길 오르고 암봉 돌아 계단 오르고 왼쪽 사면 길게 산모롱이 돌아 대슬랩을 덮은 데크계단
오른다. 등로 벗어난 전망바위는 들어가지 말라고 금줄을 쳤다. 안개가 짙어 등선대와 칠형제봉, 가리봉이 명료하지
않으니 굳이 들르지 않는다. 한계령에서 서북주릉 한계령삼거리까지 2.3km, 그중 초반에 0.3km쯤 가파르게 오르
는 돌길을 나는 가장 힘든 험로라고 본다.
1,306m봉 주변은 전후좌우 조망이 아주 좋다. 특히 귀때기청봉 남릉의 상투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가리봉이
장엄하고, 끝청으로 이어지는 서북주릉이 장쾌하다. 서북주릉의 1,449.4m봉 아래 너덜지대가 여기서는 오르내리지
못할 거의 수직으로 보이는데 2년 전에 거기를 내려 석고당골 우골을 갔다는 것이 큰 자랑이다. 뚝 떨어졌다가 데크
계단 오르기 세 번이다. 데크계단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지나온 연봉과 그 뒤로 점봉산이 가경이다.
서북주릉 한계령삼거리에 많은 등산객들이 몰려 있다. 대부분 대청봉 쪽으로 간다. 나는 곧바로 귀때기청봉을 향한
다. 잠시 숲속에 들었다가 너덜을 지나고 다니 너덜 숲속에 들었다가 본격적인 너덜을 오른다. 암릉 같은 너덜이다.
황철봉 너덜과 비교하면 난형난제다. 너덜 오르면서 둘러보는 주변 경치는 황철봉보다 여기가 더 낫다. 너덜 사면
멀리 첩첩 산 너머로 안산이며 가깝게 바라보는 귀때기청봉의 모습 또한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군데군데 야광 폴이 등로를 안내한다. 관목 숲을 지날 때다. 관목 대종은 털진달래이고, 드문드문 마가목은 꽃봉오
리 맺혔다. 전에 보지 못한 매발톱나무가 의외로 흔하다. 아직 지지 않은 털진달래꽃 몇 송이를 본다. 이곳 털진달래
꽃은 입산통제기간인 4월 하순쯤에 만개한다니 나로서는 보기 어렵고 이만해도 다행이다 싶다. 국가생물종지식정
보시스템의 털진달래(Rhododendron mucronulatum Turcz. var. ciliatum Nakai)에 대한 설명이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의 정상 부근에 분포한다. 생육환경은 햇빛이 잘 들고 배수성이 좋은 사질토양이나 바위틈
에서 자란다. 성질은 강건하나 내공해성은 약하다. 잎은 어긋나기 하며 긴 타원상 피침형 또는 거꿀피침모양이고
첨두 또는 점첨두이며 예저이고 톱니가 없으며 표면에 비늘조각이 약간 있고 뒷면에 비늘조각이 밀생하며 잎에 털
이 있다. 꽃은 잎보다 먼저 피고 가지 끝의 겨드랑이 눈에서 1개씩 나오지만 2-5개가 모여 달리기도 하며 꽃부리는
벌어진 깔때기모양이고 지름 3-4.5cm로서 자홍색 또는 연한 홍색이며 겉에 잔털이 있다. 수술은 10개로서 수술대
기부에 털이 있고 암술대가 수술보다 길다. 개화기는 5-6월이다.”
9. 끝청 남릉
10. 서북주릉 끝청 가는 능선
11. 귀때기청봉 남릉 상투바위
12. 멀리 가운데는 점봉산
13. 왼쪽 중간 마을은 인제
14. 멀리 가운데는 점봉산과 대선봉
16. 가리봉. 오른쪽은 주걱봉
17. 매발톱나무
19. 털진달래
20. 상투바위
21. 털진달래
▶ 큰감투봉(△1,408.2m봉)
털진달래는 인공증식한 평강수목원에서도 보았지만 이곳 귀때기청봉에서 보는 맛과 전혀 다르다. 노산 이은상이
지리산에서 산백합꽃을 보고 ‘내 마음속의 주인’이라고 부르던 여인이 그리워 불렀다는 노래가 생각난다. 내게는
털진달래가 그 정경이다.
높은 산언덕 머리 산 백합 피었구나
아침 이슬 반(半) 입에 물고 바람결에 피었구나
한 송이 덥석 움키려다 차마 손을 못 댄다.
꺾지 못한다길래 깨물어보고 싶어
입을 대다 말고 뺨만 겨우 스치고서
애꿎은 꽃 줄거리만 쓸어안아 본다.
귀때기청봉을 오가는 등산객들과 자주 마주친다. 장수대 쪽에서 오는지 물었더니 한계령에서 올랐다가 그쪽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귀때기청봉 정상을 약간 벗어난 털진달래 옆에서 휴식한다. 탁주 독작이지만 술맛 난다. 돌길
내리고 하늘 가린 숲속 잠시 지나면 바윗길이다. 뜻밖에 그간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 보던 귀화(貴花)를 만난다.
금강애기나리(Streptopus ovalis (Ohwi) F.T.Wang & Y.C.Tang)다. 꼭 한 송이다. 산림청은 「수목원ㆍ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라 희귀식물을 6등급(야생멸종, 멸종위기종, 위기종, 취약종, 약관심종,
자료부족종)으로 정하고 있다. 금강애기나리는 개체수가 비교적 많아 ‘약관심종’이다. 여기던가 저기던가 작년에
보았던 참기생꽃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데크계단 오르막이다. 계단마다 경점이다. 발걸음 멈추고 뒤돌아보면 귀때기청봉이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다. 미끈
하다. 봄단장 하였다. 암봉인 1,456m봉을 내리고 예전에 바위틈에서 보던 산솜다리는 자취가 없고, 큰앵초와 백작
약이 나 좀 보아달라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등로로 뒤돌아오고 숲개별꽃인가, 다시 보니 참기생꽃(Trientalis europaea L.)이다. 이제 피기 시작한다. 참기생
꽃은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이다. 산림청이 선정한 희귀식물이며, 환경부가
멸종위기식물로 선정한 보호식물이기도 하다.
이제 얼추 내가 보고자 했던 건 다 본 셈이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앞으로 보는 풀꽃은 덤이다. 귀때기청봉에서
대승령 가는 길 6.0km 중간쯤에 있는 준봉인 큰감투봉(1,408m봉)을 넘는 게 땀난다. 두 차례 가파른 데크계단을
오른다. 그런 만큼 그 정상에서 둘러보는 조망이 뛰어나다. 가리봉은 그 옆에 첨봉인 주걱봉이 있어 더욱 의젓하게
보인다. 큰감투봉을 넘고 북사면 길게 도는 길은 꽃길이다. 나도옥잠화와 큰앵초, 는쟁이냉이가 떼로 내 발걸음을
붙든다.
22. 멀리는 안산
23. 털진달래
25. 가운데가 공룡능선 1,275m봉
26. 멀리 가운데 오른쪽이 안산
27. 가리봉
28. 금강애기나리.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 보던 금강애기나리를 처음 친견했다
30. 귀때기청봉 또 다른 모습. 미끈하다
31. 참기생꽃. 이제 피기 시작한다
33. 서북주릉 남쪽 지능선
34. 멀리 가운데는 점봉산
35. 백작약
▶ 대승령(大勝嶺, △1,210.2m), 장수대
아예 사면을 치고 내려가 박새 숲을 누빈다. 내 짐작이 들어맞았다. 금방 배낭이 무거워진다. 물욕을 줄인다. 백작약
이 또한 부지기수다. 경염하는 우아한 자태다. 등로가 가깝다. 대승령 가는 2.4km는 큰 오르내리막이 없이 완만하
다. 줄달음한다. 대승령이 금방이다. 오늘은 아무도 없는 대승령이다.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1782~1850)의 장시
「大勝嶺」의 시판을 들여다보고 내린다. 운석은 아마 장수대에서 대승령을 올랐다. 그 시의 끝부분이다. 나도 그렇다.
乃知身到此 이제 알겠노라, 이 몸 여기에 이르니
襟懷怳無際 가슴 속 생각 끝없이 황홀해짐을.
장수대(2.7km)를 향한다. 돌길이다. 여기 올 때마다 오른쪽 넙데데한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사면이 어떠한지 퍽 궁금
했다. 누빈다. 가도 가도 푸른사막이다. 다시 등로로 뒤돌고 쭉쭉 내린다. 우람한 전나무 숲 지나고 대승폭포 위쪽
계류를 세 차례 건너갔다 건너오고 산허리 돌면 대승폭포 전망대다. 그 전에 오른쪽 소로로 난 인적이 대승폭포를
더 가까이 볼 수 있기에 나도 들른다. 노송 사이로 대승폭포를 바라본다. 지난 닷새 전에 비해 수량이 크게 줄었다.
대승폭포 전망대 노송 아래에서 늦은 점심밥 먹는다. 곰취는 맨 밥을 쌈해 먹어도 맛있다. 봄날에는 쌈장만 가져와
도 좋다. 반주로 탁주 세 잔(주불짝수라고 했다) 비운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어제 밤에 아니오니골에서 온 오지산행팀이다. 산행대장인 하늘재 님은 배낭을 벗어놓고
털썩 누워버린다. 배낭이 무겁기도 하였으리라.
장수대 0.9km 그 3분의 2는 데크계단이다. 오늘은 금줄 몰래 넘어 사중폭포를 들른다. 사중폭포라는 명칭은 폭포가
비스듬하게 4단계로 흐르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비록 수량은 적지만 미폭(美瀑)이다.
장수대다. 우리 일행은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올라 오색으로 진행했다. 그쪽이 대승령보다 등로가 까다롭지 않다고
해서다. 그렇지만 오색으로 내리는 길고 긴 돌길이 마의구간이니 아마 녹아나리라.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장수
대 숲길을 지나 자양천에 들러 세면탁족하고 장수대 분소 주변의 화단을 둘러본다. 장수대 분소에서 오늘처럼 한가
한 적이 없었다.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의 「설악산이여!」 전문을 새긴 시비를 본다. 나는 곧 설악의
품속을 벗어나 티끌 세상으로 가야 한다.
설악산이여!
이 밤만 자면 나는 당신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티끌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마지막 애달픈 한 말씀
애원과 기도를 드립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여기와
흐르는 물 마셔 피가 되었고
푸성귀 먹어 삶과 뼈되고
향기론 바람 내 호흡되어
이제는 내가 당신이요
당신이 나인걸 믿고 갑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사는 동안
무슨 슬픔이 또 있으리요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통분할 일이 겹칠 적이면
언제나 사랑의 세례를 받으며
당신만을 찾으리이다
36. 큰앵초
37. 가리봉. 그 오른쪽은 주걱봉
38. 나도옥잠화
40. 멀리 가운데는 점봉산
41. 나도옥잠화
42. 는쟁이냉이
43. 곰취
44. 연령초
45. 참꽃마리
46. 대승폭포
47. 장수대 가까이 있는 사중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