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전설의 영약 만년옥장 3
다음 날 아침, 하북성으로 향하는 용성표국의 표행이 출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이번 표행은 용성표국의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했다.
목적지를 향해 순탄하게 나아가던 표행이 정암산 중턱에 있는 제법 널따란 공터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가 조금 지나서였다.
“멈춰라!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팔비검 우한명의 지시에 따라 표행이 일제히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우한명은 수하들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터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있었는데, 팔비검 우한명은 만일에 대비해 그들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팔비검 우한명의 시선이 표행과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는 십여 명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사내들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친 우한명은 그에게 살짝 고갯짓을 했고, 이에 상대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내들은 용성표국의 선발대로 방금 고개를 끄덕여 보인 것은 아직까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미다.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팔비검 우한명의 눈에 두 명의 사내와 여인 한 명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로 잠들어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허, 정녕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로군. 헌데, 저놈은 종복인 것 같은데 감히 주인과 같이 누워 있다니.’
그 옆을 보는 순간 팔비검 우한명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황의 사내가 있었는데, 둘은 한가하게 바둑을 두는 중이었고, 나머지 셋은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도검을 차고 있으니 무인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마치 맞춰 입기라도 한 듯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으니 동문이거나 형제일 것이다.
잠시 그들을 살펴보던 팔비검 우한명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표행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 단 한 번도 바둑알을 놓는 소리를 듣지 못했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셋의 시선도 수상했다.
자꾸 표행 쪽을 흘깃거리는 것으로 보아 황의인들의 관심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상한 놈들이군.’
팔비검 우한명은 표사로 변장하여 있는 용성표국주 일원검 전위상에게 전음을 날렸다.
[국주님, 저기 바둑을 두는 자들이 왠지…….]
[알고 있네. 우릴 주시하는 것 같군.]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표행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곤히 자고 있는 소년과 그 일행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쪽에 소년과 같이 있는 일행은 어떻게 생각되나?]
[글쎄요, 바둑을 두는 자들과 일행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경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후발대가 도착하면 자네가 바둑을 두는 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해 보게. 그리고 선발대에게 지시해 저쪽의 소년과 함께 있는 자들을 경계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두두두두.
잠시 후 십여 기의 인마가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왔다.
그들은 팔비검 우한명과 슬쩍 눈을 마주친 후 한쪽에 말을 매어두고 그늘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쿵!
“어이쿠!”
난데없이 터져 나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용성표국의 쟁자수 한 명이 허둥지둥하며 깨진 물통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팔비검 우한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쟁자수에게 호통을 쳤다.
“아니, 이 사람이 조심하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식수가 부족한데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쟁자수는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그만…….”
“이런…, 할 수 없지. 그럼 우린 좀 참고 말에게 남은 물을 먹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우 표두님.”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팔비검 우한명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둑을 두고 있는 황의인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팔비검 우한명이 말을 걸자, 황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무슨 일이시오?”
“식수가 떨어졌는지라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말을 하며 팔비검 우한명은 바둑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허, 저런. 대마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
대충 흩어 놓은 바둑알을 보고 대마가 죽을 것 같다고 하는 팔비검 우한명의 말에 황의인들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들 중 마치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뻘건 사내가 음산하게 웃으며 팔비검 우한명을 쳐다보았다.
“흐흐, 당신의 눈에는 대마가 죽을 걸로 보이오?”
“그렇소.”
우한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하자 다섯 명의 황의인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바둑알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내공을 실었음이 분명하다.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하하하!”
“윽!”
팔비검 우한명은 이들의 내공이 이처럼 대단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기혈이 들끓어 오르는 느낌에 우한명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럴 수가…….’
주위에 있던 용성표국 사람들도 대부분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쟁자수 세 명과 여인의 품에 안겨 자던 소년이었다.
그 순간, 자는 줄로만 알았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황의인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시끄러워!”
황의인들에게 고함을 친 사내는 바로 마대위였다.
당산으로 향하던 마대위 일행은 두사빈이 몹시 힘들어하자 잠시 쉬는 중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두사빈이 긴 여행을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두사빈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건 마대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고는 하지만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의 여행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마대위까지 코를 골며 일어날 생각을 안 하자, 능운엽과 홍소미는 그들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황의인들이 시끄럽게 웃는 통에 마대위가 잠에서 깼던 것이다.
마대위로서는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허나 내공이 담겨있지 않은 마대위의 목소리는 황의인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씨팔…….”
마대위는 홧김에 땅바닥에서 주먹만 한 돌을 주워 황의인들 쪽으로 힘껏 던졌다.
돌은 황의인이 아닌 바둑판에 명중했다.
와장창!
바둑알들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황의인들의 웃음이 멈추었고, 공터에는 정적이 흘렀다.
“한 번만 더 떠들면 죽을 줄 알아!”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마대위의 모습에 능운엽과 홍소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내가고수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황의인들이 방금 보여준 내공만으로도 그들은 고수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일개 종복처럼 보이는 사내가 감히 이런 고수들에게 고함을 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서 있던 황의인들은 마대위에게 소리를 지르려다 그의 곁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능운엽과 홍소미를 보고는 잠시 멈칫거렸다.
자신들끼리 눈길을 주고받던 황의인들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마대위 일행에게, 나머지 세 사람은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마대위 일행에게 다가간 두 황의인 중 비쩍 마른 체격에 얼굴색이 시체처럼 푸르죽죽해 음산한 느낌을 주는 말상의 사내가 능운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개가 짖었으니 주인이 책임을 져야지.”
“풋!”
“큭!”
그 말에 능운엽과 홍소미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마대위는 이해를 못했는지 눈만 끔뻑거렸다.
슬쩍 황의인들을 올려다 본 능운엽은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마대위에게 말했다.
“큭큭. 이보게. 이 사람들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그 순간 황의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종복이 아니었나?’
그때까지 능운엽과 홍소미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마대위는 그제야 황의인이 말한 개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새끼들이 감히…….”
그러나 마대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퍽!
격타음과 함께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은 마대위가 멀찌감치 날아가 나무에 부딪쳤던 것이다.
쿵!
우지직!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나무가 부러지면서 마대위는 나뭇가지 속에 파묻혀 버렸다.
“흥, 별것도 아닌 놈이 감히 이 어르신에게 그 따위로 입을 놀리다니…….”
냉소를 친 말상의 황의인은 순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일행이라고 생각한 능운엽과 홍소미가 마대위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말상의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상의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능운엽과 홍소미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게다.”
말을 마친 두 사람은 홍소미를 쭉 훑어보며 입맛을 한 번 다시더니, 용성표국의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표사로 변장하고 있던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말상의 황의인이 마대위를 일장에 날려버리는 것을 보자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목숨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굳은 표정으로 황의인들을 나무랐다.
“무공도 모르는 젊은이가 말을 좀 잘못했기로서니 손을 너무 과하게 쓴 것 아니오.”
황의인들 중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다소 뚱뚱한 체격의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큭큭, 예전에 넷째의 성질을 건드린 놈들은 모두 사지가 잘려 죽었지. 지금은 그나마 성질이 많이 누그러졌기에 고통 없이 죽여준 게야.”
일순 용성표국주 전위상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한 표국의 국주답게 경거망동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천천히 표행 앞까지 걸어 나온 그는 황의인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태산파의 일원검 전위상이라 하오. 지금은 보시다시피 용성표국을 이끌고 있소이다. 이 전모가 낭리채의 노 채주님과는 내왕이 없었지만 오늘이라도 안면을 트게 된다면 큰 영광이겠소이다.”
태산파라면 강북삼대검파의 하나로 구파일방이나 사대세가에 비해 세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 독특한 검법 때문에 꽤 인정을 받고 있는 문파다.
용성표국주 일원검 전위상은 태산파의 속가제자로 하북 지방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고수였다.
그는 이곳이 녹림삼십육채 가운데 낭리채의 세력권이니, 황의인들이 혹 녹림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사문과 자신의 명호를 밝혔던 것이다.
허나 이러한 그의 예상을 무참히 깨고 황의인들 중 한 명이 냉소를 치며 말했다.
“흥, 태산파의 일원검이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 그리고 낭리채의 노 채주? 그건 또 뭐하는 놈이지? 큭큭큭.”
녹림은 물론 자신의 사문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황의인들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용성표국주 전위상의 안색이 붉게 상기되었다.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한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의인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러자 말상의 황의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 사천오협이라고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군.”
이에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사천 지방에 칠웅(七雄)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으나 오협(五俠)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군. 내가 듣지 못한 명호인 걸 보니 분명 이름을 떨칠 만한 일을 한 번도 안 했다는 뜻이겠지.”
화를 낼 거라 생각한 황의인들은 빙글거리며 웃고만 있을 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표행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용성표국주 전위상이 수하들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표사들이 신속하게 마차를 에워싼 채 검을 뽑았다.
선발대로 나선 십여 명의 표사들도 사태가 급박하게 변하자 검을 뽑아들고 마차를 호위하였다.
20여 명의 표사들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음에도 황의인들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들 중 체격이 크고 무척 강인한 인상의 황의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제안을 하나 하지.”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눈빛을 빛내며 황의인을 주시했다.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들의 우두머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자네를 상대한다면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걸세. 그 사이에 나를 제외한 네 명이, 아니 두 명만 달려든다고 해도 이곳은 단번에 시산혈해로 변할 게야. 어떤가. 우리에게 곱게 표물을 넘겨주고 수하들의 생명을 보존토록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모두 처자식도 있지 않은가.”
일순 용성표국주 전위상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금 전 황의인들이 보여준 내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쉽게 표물을 넘겨줄 수도 없었다. 단순히 표물을 잃음으로써 파산하게 될 용성표국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바로 무인으로서의 자긍심 때문이었다. 용성표국주 전위상은 자신이 비록 표국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무인이라는 사실만큼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목숨이 아까워 싸움을 마다한다면 어찌 다시 검을 들 수 있겠는가.
이는 무인으로서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갈등의 여지가 없다.
용성표국주 전위상이 비장한 표정으로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돌연 황의인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제안? 지랄하고 있네!”
황의인들의 안색이 확 바뀌며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헉! 네놈이 어떻게……!”
“이럴 수가!”
그곳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마대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황의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