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향(餘香)
잠시 동안이었긴 하지만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신춘문예모집에 수필도 들어 있던 때가 있었다. 그 신춘문예모집에 수필 몇 편을 보냈다. 1983년 겨울이었다. 두 사람의 글이 경합한 마지막 단계에서 밀리고 말았다.
나는 1970년부터 지방의 일간신문이며 잡지에 더러 수필을 발표하고 있던 터이라 새삼스레 등단절차를 거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었지만 수필이 들어 있는 신춘문예모집 광고를 보았을 때 신문도 신문 나름인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이 훗날에 악연을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춘문예에서 떨어뜨린 나의 글을 심사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ㅂ씨가 나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어느 수필 잡지에다가 덜렁 초회추천을 해 버렸다. 심사평은 쓸데없이 혹독했다. 신춘문예 심사가 공정했다는 걸 강조하려 한 검은 속내를 내가 왜 몰랐겠나. 기분이 매우 언짢았지만 그때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신춘문예에 수필이 빠져 버린 터이라 이 잡지의 마지막 추천 과정을 거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심사위원을 특정인 명의로 하던 것을 단체 명의로 한다고 하더니 어느 날 나의 수필을 우롱했던 ㅂ씨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문화공보부 아무개 국장께 교섭을 해서 그 잡지의 ‘등록인가’를 받아 주면 나를 등단시켜 주겠다고 했다. 말만 단체 명의지 실권은 그 사람한테 있는 모양이었다. 언론통폐합을 했던 군부 정권 시절이어서 잡지인가를 얻기가 매우 어렵던 때였다. 아닌밤중에 홍두깨.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색은 않고 그냥 싫다고만 딱 잘라 말했다.
그 이듬해에 내가 등단을 하자 그 잡지의 ‘등록인가’ 운운하던 ㅂ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후견인’이 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은근한 목소리로 떠봤다. 깜작 놀랐다. 말이 후견인이지 충성 서약을 받자는 거 아닌가. ‘글쎄요’라고 답한 것이 비유하자면 용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 된 줄은 차차 알게 됐다. 근년에 그 잡지에서 낸 자료에 의하면 그 잡지에 게재된 나의 글이 후배들의 글보다 턱없이 적은 데는 다 까닭이 있었던 거다.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도 등단할 무렵 ㅂ씨로부터 후견인이라는 미명으로 충성 서약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았지 싶은데 그 사람이 주간했던 잡지에 글도 나보다 훨씬 자주 실리고 회장이니 뭐니 하고 여러 가지 감투도 쓰고 문학상도 타고 했던 걸 보면 그들이 뭐라고 답했는지는 알 만하다.
대학 선생들이 주축이었던 그 잡지는, 자중지란이라도 일어났던지 대학 선생들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나 보고 등록인가를 받아 달라던 그 ㅂ씨 한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신인추천을 남발하여 세를 형성했다. 출신 작가가 많아지자 첫 모임을 갖고 회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추천 서열에 따르는 관례대로라면 응당 내가 초대 회장이 되어야 하는데 자칭 그 후견인이 그 자리에 턱 나타나서 좌중의 의견은 한마디도 들어 볼 생각도 않고 대뜸 특정인을 회장으로 지명했다. 체육관에서 우격으로 대통령을 만들던 시절이라 그런 짓거리를 흉내낸 것인지는 몰라도 그보다도 더한 독재였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충성 서약을 잘 지킨 거다. 피지명자는 난잡하게 휘갈긴 엽서로 회합 통보를 했던 바로 그자이고 보면 그자와 짬짜미로 꾸민 짓거리였으리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었다. 내가 속이 상한 것은 회장을 못 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회장으로 호선(互選)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끝까지 고사하리라는 것이 나의 속내였기 때문이다. 회장이 된 김 모야라는 자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앉더니, 초면인 나를 보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박 선생님의 수필「취한의 허튼소리」는 예사 글이 아니라느니 어떻다느니 하면서 간드러지게 온갖 애교를 다 떠는 꼴이 꼬리만 없을 뿐이지 똑 주막집 강아지 같았다. ㅂ씨는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나에게만 그의 수필집을 한 권 주기에 나 또한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그 책을 궁둥이에 깔고 앉았다가, 덕수궁 지하철 굴속에서 침을 탁 뱉은 뒤 씩씩거리며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집에 와서도 그 사람이 지은 수필집을 모조리 찾아내어 그렇게 단죄했다. 그런 다음 비누로 손을 씻었다.
비누로 손을 씻던 일이 언제 적 일인데 신춘문예 때만 되면 아직도 신열이 나다니…. 신열을 앓으며 봄을 맞고 봄을 보낸다.
올봄에 누가 내게 팔공산 명소를 묻는다면 나는 그 첫 번째로 송광매원(松廣梅園)을 아느냐고 말할 거다.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에도 같은 이름의 매원이 있지만 그 매원의 종가라고나 할 팔공산의 매원을 소개할 거다. 팔공산 파계사에서 송림사 쪽으로 조금 가다가 보면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경계 지점인 작은 고갯마루가 나오는데 이 고갯마루 조금 못 미쳐 오른 쪽 농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막다른 곳이 기념관을 갖춘 송광매원이다. 1980년 6월 당시 영남대 교수였던 권병탁 박사가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에 들렀다가, 절 앞뜰에 서 있는 오백 년 묵은 매화나무 밑에서 우연히 매실을 발견했는데, 황색을 띈 그 열매가 대형인지라 이름 있는 나무는 열매부터 확실히 다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매실 몇 개를 얻어 온 것이 송광매원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3월 말 4월 초면 칠백여 그루의 매화꽃이 칠천여 평의 산골짜기 하나를 온통 하얀 구름으로 메워 버린다. 홍매는 고명이요, 백매가 주축이다.
그 후견인인가 하는 작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에 그를 이 매원에 초청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 본다. 그와 더불어 이 매원을 거닐며 꽃향기에 취해 본다든가, 잔을 기울이며 매화시를 읊어 본다든가, 이별보다 더 애절한 낙화의 사연을 생각해 본다든가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 신열이 조금은 내렸을까. 하지만 나는 강아지가 아니다.
햇볕이 따뜻해지거든 송광매원에 가볼거나. 꽃을 못 보면 어떡해. 꽃봉오리라도 보겠지. 꽃봉오리도 못 보면 어떡해. 낙화라도 보겠지. 낙화도 못 보면 어떡해. 여향을 찾으리.
허허한 가지 사이로 여향을 찾노라면 내 가슴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두렵다. 여향을 이루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대의(大義)가 아닐까 한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첫댓글 선생님을 글을 읽으며 그 속상함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매화를 보면서 모두 잊어버리세요. 거기에 매달려 있기는 선생님의 시간이 아깝잖아요. 어제 사진 찍어온 납월매 보시라고 남깁니다.
홍매 아릅답군요.
40년 된 우리집 백매가 만개하여
비에 젖고 있습니다.컴퓨타에 올리는 방법을 몰라서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