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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만 장식하는(外飾)
기독교인들이여(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얀 회칠(灰漆)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얼굴치례와(外飾) 불법(不法)이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장 27절~28절
믿음과 기쁨은 무형(無形)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이다 !
딸의 죽음을 다룬 자전적(自傳的)인 소설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를 쓴 미국의 작가
앤 라이스(Anne Rice 1941.10.4.)여사가 있다.
※뱀파이어 (vampire)-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흡혈귀(吸血鬼. 드라큘라)
책속의 글 줄거리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주인공 루이스는 200년 동안 흡혈귀(吸血鬼)로 살아왔다.
죽지 않는 축복(祝福또는 저주)를 받은 주인공이었다.
이야기 속의 글을 읽는 사람은 뱀파이어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흡혈귀들은 인간과는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들의 세계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루이스 자신은 괴로움으로 번민한다.
왜 자신이 사람의 피를 먹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신(神)과 악마가 어떤 조화(調和)를 부렸기에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를 고민하는 보기 드문 흡혈귀이다.
인간의 피를 원치 않는 그는 자신의 충족시킬 수 없는 식욕(食慾)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물론, 주인공과 같은 종류의 흡혈귀들에게 까지 버림 받아
소외된 존재로서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휴머니즘(humanism)에 연민(憐憫)을 느끼게 한다.
앤 라이스(Anne Rice)는 주로 종교적 주제(主題)의 소설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고 문학계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인턴넷상의 위키페디아(Wikipedia)는 그녀를 이렇게 소개 하고 있다
【앤 라이스의 책은 1억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현대 역사의 가장 유명한 작가 중의 한사람이다.
그 유명한 앤 라이스가 최근에 세계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화제(話題)의 인물이 된
것은 그녀가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 남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Wikipedia)-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사용자 참여의 온라인 사전.
앤 라이스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그녀는 태어 날 때부터 모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18세 되던 해에 스스로 가톨릭을 떠났다.
그 이후 무려 30년 이상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살던 앤라인스는 50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다.
신앙을 되찾은 앤 라이스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갖고 베일에
가려져 있는 예수님의 유년기(幼年期) 시절을 소설로 복원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예수” 라는 재목으로 출판되었던
“크라이스트 더 로드: 아웃 오브 이집트(Christ the Lord: Out of Egypt)”
(그리스도 주(主):이집트에서)가 바로 그 책이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서 12세(누가복은 2장 41절~42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유년기 시절 기록이 단 한번 나온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누가복음 3장 23절)
외는 공생애(公生涯) 단어도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보지 못했다.
그랬던 앤 라이스가 공개적으로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 남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基督敎)어원-그리스도의 한자(漢字) 음역(音譯)인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유래하였다.
가톨릭 개신교를 합쳐서 기독교(基督敎)라 한다.
성경에는 기독교 천주교(가톨릭) 개신교 등의 명칭이 없다.
앤라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의 중심은 구주(救主예수)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창조(創造)하시고 이끌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이 반드시 기독교를 따르는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기독교보다 예수님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이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앤 라이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와 기독교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래서 앤 라이스는 앞으로도 자신은 평생 개인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겠지만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는 남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한 것이다.
큰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성경이나 불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위대하다고 생각되는데
기독교나 불교의 신앙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과 같은 것 같다.
미국의 브라이언 매클라렌(Brian D. McLaren) 목사는 말하기를
【앤 라이스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독교 교인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상(尋常)한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일은 “예수님(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부한 기독교는 그녀가 그동안 몸담았던 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
인도의 성자(聖者)로 불리는 마트마 간디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쓴 소리를 했다.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예수)는 존경하고 좋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예수)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인도의 간디가 나는 싫다고 공개 선언한 기독교인들은
간디가 주로 인도나 영국에서 직접 만났던 인도 영국의 성공회 교인들 즉 개신교신자 들이다.
간디는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변호사 자격을 가졌다.
일본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신학자(神學者)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1861-1930)는 개신교 신자다.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는 교회라는 건물을 짓는 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찌무라 간죠의 한국제자들 김교신. 함석헌. 노평구. 유달영. 송두용 등이다)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현재의 교회건물이나 교회 제도(制度)나 의식(儀式)을
부정하고 오로지 성경( 聖經) 속의 복음(福音)의 진리(眞理)에 입각한 믿음에 의해서만 인류가 구원(救援)될 수 있다고 하는 주장.
같은 시대에 중국에서 살았던 중국의 석학(碩學) 오경웅(吳經熊) 박사는 가톨릭신자다.
그런데 각각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개신교도와 가톨릭신자가 묘하게도 똑같은 말을 한다.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도저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데,
성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가?
왜 미국의 소설가 앤 다이스가 개인적으로는 평생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겠지만
기독교인으로는 남지 않겠다고 공개선언을 했을까?
왜 인도의 간디가 예수그리스도는 좋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신자들은 싫다고 선언했을까?
왜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와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박사가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의 언행을 보면 도저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데
성경으로만 되돌아가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을까?
그런데 각각 다르게 보이는 이 세질문에 대한 회답은 모두 동일하다.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과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을 막론하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신앙인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같지 않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주고 있다.
“기쁨”은 추상명사(抽象名詞)이다.
추상적(抽象的)이라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고 생각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精神) 작용(作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문법적(文法的) 설명일 뿐 실제와는 매우 다르다.
기쁨이라는 단어(單語) 자체는 추상명사(抽象名詞)이지만
그러나 기쁨은 반드시 눈에 보인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참된 기쁨이 생기면 그 기쁨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마음밖 얼굴과 몸의 행동을 통해서 외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친구나 누구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거나
좋은 선물을 받거나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입 눈등의 표정으로 그 기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은 눈으로 볼 수 있다.
종교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종교인들은 신앙은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 마음속의 작용이라 한다.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는 추상명사(抽象名詞)이지만
불교나 기독교의 신앙인들도 신앙을 통한 말이나 행동하는 모습이 밖으로 나타난다.
말이나 행동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타나는 표현이다.
위의 앤 라이스나 간디 오경웅(吳經熊) 우찌무라 간죠등도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위의 네 사람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도 신앙인들의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신앙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實體)이다.
미국 소설가 앤라이스가 그동안 자신의 종교이던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가톨릭교회 교인들의 믿음생활 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저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도의 간디가 나는 기독교인들은 싫다고 선언한 것은 그가 만난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실체(實體)를 자기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신학자와 중국의 오경웅(吳經熊)박사가 기독교
성직자들과 교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도저히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기독교 성직자들과 교인들의 믿음의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
아닐까?
믿음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實體)다.
내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볼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내 믿음을 보고 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다”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신앙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젼인 미국 회장 리처드 스턴스(Richard Stearns)는
자기의 자서전적인 글을 쓴 책 이름을 “구멍 난 복음(福音성경)”이라 하였다.
이 자서전 안에서 자기 친구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친구가 신학교(神學校) 신학생(神學生)으로 공부 할 때 같은 신학생 동급생과 같이 중요한 실험을 하였다.
성경을 펴 놓고 구약성경이 시작하는 창세기(創世記)부터 구약성경이 끝나는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구절에 믿줄을 첬다.
믿줄을 다 치고 보니 “사랑과 정의(正義)”에 관한 구절이 무려 2천개 구절에 달했다.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66권가운데 “사랑과 정의(正義)”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구절은 거의 없었다.
그 다음에는 가위로 밑줄친 구절을 모두 오려 내었다.
성경에서 사랑과 정의와 관련된 모든 구절들을 모두 가위로 잘라 내어 버린 것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구멍투성이 누더기 성경뿐이었다.
그가 그런 실험을 한 것은 기독교 목사나 신앙인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들만 붙들고 있고 정작 하나님의 말씀인 “사랑과 정의(正義)”는 성경에서 마구 난도질해 버렸기 때문에 구멍 난 성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멍 난 믿음만 추구하는 현대 신앙인들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감동한 스턴스 회장이 자기 자전적 책 이름을(구멍 난 복음)이라고 지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뿐만 아니고 불교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기독교인에 대하여 “성경과 다른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교 신도도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큰스님의 말에 따르는 신도들이 대부분이다.
큰돈 드려 천도재(薦度齋) 지내라하면 지내고
무상보시(無相普施)를 강조하고 있다.
TV 기독교 방송에서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이야기만
해야 되는데 별별 세상이야기를 다한다.
핑계는 “세상 이야기를 비유로 한다”고 하지만 일주일에 3번 이상 설교를 하게 되니까
성경 이야기만 하면 교인들이 지루하게 생각하고 목사 자신도 성경내용만 이야기하기가 식상하니까 여러 가지 세상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기독교 목사로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온갖 이유로 하나님 행세를 한 유대교 제사장(祭司長)들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성경 어디에도 수천억 돈으로 교회건물을 지으라는 말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를 키워서 자식에게 대물림하라는 말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에게 월급과 여러 명목의 비용을 많이 주라는 말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헌금을 많이 내면 구원을 받다는 기록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가 설교하는 설교단이 신도의 자리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라는 말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가 요상스러운 가운을 입고 신비롭게 보이라는 기록은 없다.
목사 자신은 세상 따라 살면서 신도들에게는 세상 따라 살지말고 목사 설교따라 살라고 한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문화의 변천으로 모든 면에서 가치관(價値觀)의 혼란을 격고
있다.
인간의 가치(價値)
정치의 가치(價値)
기업의 가치(價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약 120년이 되었다.
교회주장은 신도수가 약 1200만 명 이라 한다.
1200만이 정의로운 한국사회를 위해 기독교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아하, 기독교인은 일반인들과 다르구나 !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가 !
종교의 역할은 사회의 가치가 변하여 혼란스러울 때 종교가 중심을 잡고 향도(嚮導)역활을 해야 하는데 종교가 세상 사람보다 물질에 빠져 있으니 한탄할 일이다.
세상이 종교 걱정을 하고 있으니---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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