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만에 영화관에 가서 ‘국제시장’을 관람했다. 파란만장의 일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필자와 같은 연령대로서 마치 필자가 살아온 人生歷程(인생역정) 같아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관람했다. 한평생을 가난과 배움의 굶주림 속에서 山戰水戰(산전수전)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人生黃昏(인생황혼)의 들녘에서 서성이면서 手記를 엮어보려 한다.
1911년 生이신 나의 부친은 20세의 청춘 나이에 일본군의 徵用(징용)에 끌려가 일본 大阪(대판)의 미Tm비시 군수공장에서 1년 동안 賦役(부역)하신 후 우여곡절 끝에 대판의 철물상회에 점원으로 일자리를 구하셨다고 한다. 거의 10년 가까이 일본에 체류하시게 됨에 홀로 누님 두 분을 키우시던 어머님께서 무작정 두 자매를 이끌고 일본 대판으로 부친을 찾아가 합류해서 거주하게 되어 두 살 위의 형님, 그리고 나도 日本 오사카에서 출생하였다.
나는 1941년생이다, 일본에서의 나는 ‘뎃소~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본 해군함대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어 나는 幼年時節(유년시절)에 전쟁을 체험하게 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것은 누님의 등에 업혀 지․하방공호로 피난하던 일들, 높은 하늘에서 미 공군기와 일본 공군기의 전투장면들이 가물가물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점차 미 공군기의 폭격이 빈번해서 위험에 처하게 되자 해방 직전에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조국인 한국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였다. 이후 부친께서 딱 한번 일본을 다녀오시었는데 우리가 살던 집은 폭격으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피난길에 오른 탓에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家産(가산)을 일본에 두고 온 탓으로 우리는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경우 겨우 일본말을 더듬거리며 배우던 중이어서 우리 한국말은 생소하여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조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대전 근교에서 살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大田으로 이사를 했다. 부친께서 초등학교 2학년이던 형님을 나와 함께 다시 1학년으로 입학을 시킨 탓으로 우리 형제는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난처한 일들이 많았다.
대전 동광국민학교로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分校(분교)가 되어 대전 자양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의 1학년 성적은 반에서 45등으로 성적표를 보시는 부친의 안색이 굳어있음을 감지하고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그때의 성적부진 원인을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겨우 일본 언어를 배우다가 한국으로 나온 탓에 언어소통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 2학년 1학기에는 5등으로 성적이 향상되었고 2학년 2학기부터 1등으로 거듭 뛰어서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늘 1등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2학년부터 6학년 졸업까지 줄곧 학급 반장을 했다. 당시에는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이 반장을 맡는 것은 마치 不文律(불문율) 같은 관행이었다.
敵 치하 대전 생활
1950년 6월 25일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한국전쟁이 勃發(발발)하였다. 아무 대비가 없었던 우리 대한민국은 불시에 밀어 닥치는 북괴군의 남침으로 무저항 상태로 수도 서울을 내주고 벌떼처럼 밀어닥친 북괴군은 순식간에 大田도 함락했다.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으나 도보로 피난 도중에 북괴군이 행진하는 모습을 도로에 나가 구경하게 되었는데 북괴군 1개 소대 병력인 듯 맨 뒤에 따라가던 북괴군이 내게 묻는 것이었다. 혹시 미군이나 국군을 보았는가? 철이 없던 시절이라서 아마도 미군이나 국군을 보았다면 가르쳐 주었을 터이지만 나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미군을 비롯한 참전 UN군의 지원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戰況(전황)이 호전되어 우리 군의 북진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공산치하에서 살았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애국가를 배우던 기억도 남아있다.
敵(적) 치하에서 가장 명확히 기억되는 것은 아군인 미군기들의 폭격, 기총소사 등의 장면들이다. 프로펠러가 달린 F51 무스탕 전투기들의 폭탄 투하장면, 쌕쌕이라 불리던 F86 세이버전투기의 기관총 사격장면 등이다.
내가 사는 집은 대전시 동구 가양동이었는데 그 당시에 시내로 가려면 정동 부근의 철로 아래의 보행자들이 다니는 지하 굴다리를 지나서 다녔다. 미군기가 날아오면 그곳은 防空壕(방공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대피소로 이용하곤 했다. 어느 날 어머님과 함께 문화동의 고모님 댁을 방문하고 나올 무렵 하늘 높이 미 공군의 B29 폭격기 9대가 날아와서 폭탄을 투하했는데 마치 삐라를 뿌린 듯이 수많은 폭탄들이 반짝거리며 지상으로 투하되어 폭발하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며 대전시내의 모든 가옥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의 진동을 하는 엄청난 위력이었다. B29 폭격기의 목표지점은 북괴군의 군수물자 이송용 철로를 파괴하기 위한 철로교량인 지하굴다리였다.
지하굴다리를 방공호로 이용했는데 이곳이 폭격을 당하니 아수라장이 되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길바닥에는 과일 등 노점상들의 물건들이 팽개쳐 나뒹굴고, 철로의 레일이 수백m 까지 날아갔다.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으로 戰況(전황)이 호전되어 북괴군은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북으로 도망가는 장면들도 기억이 난다. 운송수단이 단순한 步行(보행)이었으며 간혹騎馬兵(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퇴각하였다. 북괴군의 머리 위에는 미 공군기들이 비행했으나 그들을 향해 공격은 하지 않고 위협비행만 하는 것이었다. 남침 이후 3개월여 만인 1950년 9월 15일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28일에는 수도서울이 탈환되었다.
급우들이 月謝金 代納(대납)해 주기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3년여 간의 긴 전쟁이 종전이 아닌 休戰(휴전)을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에 쪼들리는 나날들이었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에는 아궁이에 땔감이 없어 인근 민둥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올라 낙엽이나 청솔가지를 낫으로 잘라 지게에 걸머지고 왔다. 온돌 아궁이에서 저녁밥 지을 때 불을 지피면 아랫목이 미지근할 정도의 난방이 되지만 밤이 되면 온돌방은 살얼음판으로 식어 양푼에 담아놓은 숭늉물이 얼어버리곤 했다.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우리 집은 매일매일 끼니를 이어갈 식량이 없어 굶주림 속의 나날들이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어머님은 시장에 나가 고등어 등 생선을 사서 광주리에 이고 대전 근교의 시골마을로 생선 장사를 하러 가셨고 어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수십 리 길을 따라다니며 생선과 맞교환하는 고구마, 보리쌀, 밀가루 등을 등에 짊어지고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떤 날은 해가 저물면 남의 집 사랑방을 빌려 하룻밤을 새기도 하였다. 두 살배기 막내 동생은 집에서 아버님이 키우셨다. 이 글을 쓰면서 어머님의 그 당시의 고생하시던 모습을 돌이켜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공부는 잘하는 편이어서 2학년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급성적이 1등이어서 학급반장을 도맡았다. 당시의 대전 자양국민학교는 매 학년 2개 반의 학생 규모였는데 형님은 1반의 반장이었고 나는 2반의 반장을 맡았다. 그 당시엔 의무교육제도가 없어서 학생들이 月謝金(월사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몇 개월씩 체불을 하면 학급 급우들이 코 묻은 돈을 모아서 나의 월사금을 代納(대납)해주기도 하였다.
6학년 때의 일로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추억도 기억이 난다. 나의 학급 담임선생님은 유별나게 잘사는 부잣집 아이들을 偏愛(편애)하셨다.
어느 날인가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시는 날이었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을 때에 우리 집에는 부모님께서 모두 不在(부재)중이었다.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알고 계셨지만 저녁거리 쌀을 구하러 친척집으로 외출 중이었던 때문이다. 담임선생님께서는 홀로 맞이하는 나를 보고는 매우 실망스런 표정으로 돌아가셨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나를 호명하시며 노발대발 화를 냈다. 담임선생이 가정방문하는 날에 어른들이 아무도 안 계시냐고? 하시면서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몇 개월 밀린 월사금을 가지고 오라”며 호령을 하시었다. 나는 치미는 서러움에 흐느껴 울면서 집으로 쫓겨나고야 말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평생 동안 그 尹(윤) 모라는 스승을 증오하며 살았다.
40년 獨學의 길에 힘이 되었던 수학선생님의 칭찬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 진학의 학교 선택에서 마음 속에 갈등이 초래되었다. 두 살 연상의 형님과 같은 학교에 진학하기 싫어 형님은 大田중학교로 나는 大田 한밭중학교를 선택해 진학했다. 그 당시 한밭중학교는 야구 명문학교로 소문이 나있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기억한다. 어린 나는 이때부터 한국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신익희, 조병옥 선생의 대통령선거 강연 유세장에 나가 강연을 듣기도 하였다. 뜻밖에도 국민의 존경을 받는 거물정치인이셨던 어른들이 命을 달리하시게 되어, 학교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弔辭(조사)를 말씀하시던 기억이 새삼스러워진다.
우리 집의 경제사정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부친께서 조그마한 家內 手工業(가내 수공업)인 아교풀 공장을 차려서 동아연필 공장 등에 납품을 하시게 되어 조금씩 나아졌다. 나의 중학교 성적은 학급에서 5등 정도였는데, 특히 수학공부를 잘 했다. 3학년 당시 일제고사 시험이 끝난 며칠 후 수학선생님께서 우리 학급에 들어와 내 이름을 호명하면서 칭찬을 하셨다.
“전교 3학년(주간 8개 반, 야간 2개 반, 각반 60명씩 합계 600명)에서 오상환 학생이 수학공부를 제일 잘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문제를 풀어 정답을 쓴 학생은 단 한 명뿐이다.”
이날 수학선생님의 칭찬의 말씀은 그 이후로 성인이 되어 40여 년간 獨學(독학)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대개 수학공부를 잘하면 머리 좋은 학생으로 알려져 있으니 나는 어려운 난제들을 봉착할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머리를 유산으로 생각하고 자신감 속에 긍정적인 思考(사고)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회고해 본다.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우리 집의 경제사정은 원활했지만 부친께서 하시던 사업이 사양길을 걷게 되어 다시 춥고 배고픈 가난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특차인 대전 사범학교 및 前期(전기)인 大田고등학교에 입시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가난한 우리 집 경제 형편을 고려해보니 훗날 대학입학 등 우리 두 형제가 같은 학년으로 진학하는 것은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고 생각이 되어 고의로 꾀병을 부려 심한 감기몸살을 핑계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모두 기권하고야 말았다.
훗날 중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부르셔서 나의 실정을 고백한 바, 선생님께서는 직접 나를 데리고 그 당시의 大田한밭상고 장학생으로 입학하도록 배려해 주시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구입할 돈도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업전선에 서다
1958년경으로 기억되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백수로 지나던 중 부친의 知人(지인)께서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가내공업인 제과업을 동업자와 신장개업하는 기회가 있어 나는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채용이 되어 난생 처음으로 경상도 땅을 밟게 되었다. 제과공장의 위치는 마산시의 성호골로 올라가는 인근이었다. 설탕, 계란 등을 넣은 밀가루 반죽을 홍두께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과자 모형의 금형을 이용해 손으로 찍어내서 과자구이 철판에 깔고 숯불화덕에 넣어 구워내는 원시적인 가내공업 제품이었다. 이 빵을 자전거에 싣고 마산시장의 도매상으로 배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는 자전거 탈 줄도 몰라 처음에는 과자상자를 싣고 걸으며 자전거를 끌고 다녔다. 자전거 타는 법을 숙달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경상도 사투리 등 마치 외국의 먼 나라로 移民(이민) 온 느낌의 생활을 6개월 정도 경험했다.
마산에서의 제과업 창업은 원활하지 못해 모든 것을 접고 동업자 한 분은 떨어져 나가고, 다시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의 초가집 사랑채를 빌려서 창업을 하게 되고 나도 합류했다. 2~3개월 후에 제과업 사장님은 친동생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大田으로 귀향하시었다. 이를 물려받은 동생은 나보다 두 살 위의 大田 한밭상고 선배였다. 그는 친형으로부터 배운 제과기술이 익숙해 과자를 만들고 나는 마포 공덕시장 등으로 자전거에 싣고 판매를 맡았다. 이 당시에는 해태제과, 오리온 제과 등 우리보다 규모가 큰 제과업체들의 초창기 창업시대였는데 그들과의 경쟁에서 버티어 내지를 못해서 모든 것을 접게 되었다.
同苦同樂(동고동락)하던 선배와 작별하고 나니 당장 거처할 곳도 없었다. 마침 여름철이어서 종로의 파고다공원 벤치에서 마지막 날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내고 대전 집으로 귀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기차표를 살 돈이 없어 서울역에서 영등포역까지 가는 기차표를 구입해서, 일단은 대전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신탄진역에서 승무원에게 무임승차로 적발되어 역무원에게 인계되어 강제하차, 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출근한 역장님의 준엄한 훈계를 받고 풀려나 대전 가양동 집까지 삼사십 리 길을 걸어서 귀가했다.
18세 때 논산훈련소로 自願入隊
앞길은 캄캄했다. 아무데라도 취업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당시에는 소위 3D 업종이라는 일자리도 없었다. 어차피 군복무는 마쳐야 하는 의무이니 차라리 군복무라도 빨리 마쳐야겠다는 생각으로 自願入隊(자원입대)의 길을 알아보았다. 대전지방병무청에 들러 탐문해 보니, 이미 해·공군 지원병 모집은 끝나고 게시판에는 육군지원병 모집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입영지원서를 접수시키고 간략한 시험을 보고 건강검진 후 입영일을 통보받았다.
그 당시 지원병은 논산훈련소까지 본인 스스로 입영하도록 되어 있었는다. 훈련소까지 기차표 살 돈이 없어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니 어머님께서는 이웃집에서 기차표 살 돈을 꾸어 오셨다. 요즈음 화폐가치로 5000원권 두 장을 주시는데, 한 장은 저녁거리 양식을 구입하시는데 사용하시라고 어머님께 되돌려드리니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 돈을 받으셨다.
나의 입영일은 1959년 8월4일, 1056****의 군번을 부여받고 29연대에 배속을 받아 군 인사기록 카드를 받아보니 의아하게도 우리들 지원병의 인사기록카드 가장자리는 파란색으로 일반병과 달랐다. 이는 국가에서 직업군인의 增員(증원)이 필요하니까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원병 모두를 직업군인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우리는 속은 것을 깨닫고 모두 모여 훈련소 연대장님께 항의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군 당국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탓으로 시한이 없는 무기한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나는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장기복무 직업군인이 된 것이다.
훈련복과 군화 등은 당시 미국에서 보낸 원조물자여서 우리 체격에 맞지 않아 바늘로 품과 길이를 줄여서 착용했다. 찌는 듯한 8월의 삼복더위에 고된 훈련을 받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생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의 훈련소 중대장님은 정기육군사관학교 1기생 분이어서 원칙과 소신이 뚜렷한 매우 엄격한 분이었다. 대통령께서 논산훈련소를 순시오시는 날, 우리 훈련병들은 칼빈 소총과 M1 소총의 노리쇠뭉치를 빼내고 모두 연병장에 집합해서 年老(연로)하신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훈련병들에게는 고향 부모님들의 면회가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께 면회 날을 알려드리지 않고 홀로 외로움을 달래었다.
6군관구 종합교육대에서 만난 朴正熙 사령관
논산훈련소에서의 고된 훈련 일정을 마치고 나는 경기도 인천 소사 인근에 위치한 제6군관구 종합교육대로 배속되어 2개월간의 자동차 정비교육을 이수했다. 1959년 11월경, 내가 식사당번을 하는 날에 마침 제6군관구 사령관이신 朴正熙 司令官(육군 소장)께서 순시를 나왔다. 당당교관(대위)으로부터 사령관님 점심식사를 차려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별도의 장교식사도 아닌 우리 훈련병들의 식사를 식판에 준비해서 벌벌 떨면서 사령관님께 올려드렸다. 다시 30분쯤 후에 식판을 수거해 오는데, 短軀(단구)에 검은 색안경을 쓰신 사령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보시고 빙그레 웃음을 지으시기만 하시었다.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을 계기로 나는 보병 제33사단 근무 시 5·16혁명군으로 출동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 후에 베트남 전선에 파병되는 등 지금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조갑제 닷컴에서 출간된 ‘朴正熙 傳記’ 13권을 구입해 耽讀(탐독)하기도 하였다.
탈영병의 누명을 쓰다
제6군관구 종합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인근의 보병 제33사단으로 부대를 배속받았다. 부대복귀일까지 2일간의 여유가 있어 나는 군에 입영한 지 4개월여 만에 고향 부모님을 찾아뵙고 보병 제33사단 보충중대에 전입신고를 하였다. 1959년 12월 9일로 기억한다. 저녁 6시경에 사단 보충중대에 들르니 轉入未着(전입미착)이라고 심한 꾸중을 듣고 산꼭대기까지 구보를 하는 기합을 받았다. 후에 확인한 바 전입미착의 탈영보고가 되고 이로 인해 중노동 3일간의 행정처벌도 받게 되었다.
부대 복귀일인 12월 9일 밤 24시까지 입영하면 되는 것임에도 나는 저녁 6시경 입영했으나 억울하게 탈영병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오후 4시께에 사단 보충중대와 사단사령부 부관참모부 인사 담당자간에 전화상으로 그날의 日報(병력일일 변동사항)를 대조하는 관행이었는데 오후 4시 이전에 전입신고하지 않아 나는 보충중대에 체류 중임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탈영보고가 되어 탈영병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훗날 장교임관시험에 합격하고도 탈영 사실이 인사기록카드에 남아 실격되고야 만다.
참으로 나에게 官運(관운)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장기복무 직업군인이 되었는가 하면 탈영사실이 없음에도 탈영병으로 둔갑하는 軍 병영행정의 희생물이 되고야 만 것이다.
보병 제33사단 병기중대에 배속되어 처음으로 예하부대의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나이가 어린 탓으로 병기중대의 문서연락병으로 보직을 받아 각종 문서를 사단사령부의 각 부처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당시 사단사령부 작전참모는 육사 8기 출신의 오학진 중령(훗날 5·16 혁명주체세력, 국회의원 역임)이었는데 그분께서는 나이 어린 나에게 당신의 당번병으로 근무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으시었지만 나는 성격상 그런 일은 하기가 싫어 정중히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군에는 태권도 吾道館(오도관, 관장:최홍희 소장, 훗날 월북)이라는 무도관이 사단에도 있었다. 나는 군 입대 전에 대전역 인근의 武道館(무도관)에 다닌 경험이 있어 일과 후에 도장에 나가 태권도를 연마하기도 하였다. 사단 태권도 요원들은 육군본부에서 태권도 승급심사를 받는 날, 나는 공수특전대대 장병과 대련심사를 받았다(5급에서 3급으로 승급). 심사 종료 후에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그 사진을 기념으로 받았다. 그 사진 속에는 훗날의 청와대 경호실장인 차지철 대위도 함께 同席(동석)하고 있었다.
5·16 새벽의 출동
나는 장기복무 직업군인이었지만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그리고 상등병, 병장으로 진급되면서 사단병기중대의 서무, 인사담당 행정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4·19혁명 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데모가 성행되어 우리는 데모진압을 위한 소위 폭동진압훈련을 수시로 실시하였다.
사단 CPX 훈련이 예정되어 있던 1961년 5월 15일 밤 12시경 우리는 비상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철모, 배낭, 총기 등 군장을 차리고 연병장에 집합하였다. 연병장에 모였으나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고 웅성거리다가 해산명령이 내려져 모두가 병영으로 돌아가 다시 취침에 들어갔다. 다시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연병장에 집합하니 수송부대의 차량이 집결하고 병기중대의 탄약고에서 실탄을 싣고 와 실탄도 지급을 받고 차량에 승차해 어디론지 출발하여 달려갔다. 이때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이었다.
우리는 이번 CPX 훈련을 실전과 같이 제대로 하는가 보구나 생각했다.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역 뒤편의 아현동, 만리동 고갯길 큰 거리에 약 50여m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아침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가 革命軍(혁명군)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33사단 출동병력은 102연대장이었던 이병엽 대령(육사 5기), 오학진 중령(작전참모:육사 8기) 등의 지휘 하에 출동했다. 하룻밤을 새고 나는 사단 병기중대의 인사담당 업무를 맡았던 탓으로 부대로 복귀했다. 며칠 후 우리 33사단 출동병력은 수도방위사령부 33대대로 편성이 되고 혁명이 성공하자 출동한 혁명군 모두는 1계급씩 특진이 되었으나 나는 여기에서도 일찍 사단으로 복귀한 탓에 혁명군 명단에서 누락이 되었다.
하사 진급 후 공병 정비중대로 轉屬
만 22세가 되던 해에 하사로 진급 후, 大田 인근에 위치한 제806 공병 정비중대로 전속이 되었고 보급부 선임하사의 보직을 받앗다. 직속상사로 보급관인 육군 중위(29세)에게 전입신고를 했다. 그는 나의 학력이 중학교 졸업인 것이 못마땅했는지 내게 漢字로 ‘庶務係(서무계)’를 써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한자 실력으로는 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때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한평생을 살면서 漢字를 克服(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은 웬만한 한자는 읽기도 쓰기도 할 수 있다. 한자능력검정시험 3급에 합격 후, 다시 2급 시험에도 합격했다. 공병 정비중대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퇴근시간이 되면 태권도 靑道館(청도관)에 나가 훈련을 지속해 初段(초단)으로 승격되었다.
1년여가 지나 나는 다시 전방부대인 제237자동차대대 제832중대(제1군단 전교육대)로 전속되었다. 평생을 살면서 체험한 바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로 전입해오는 사람들을 따뜻이 포용하기보다는 텃세를 부려 골탕 먹이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전입해 간 첫날 밤에 나는 내무반에서 누군가에게 모포로 뒤집어씌운 채로 몰매를 맞기도 하였다.
운전교육대의 차량정비부서에 배속된 나는 당시에 각종 차트용지 펜을 쓰는 일에 소질이 있어서 주로 중대장실에서 운전교육용 차트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나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 곳에 오래 머물기가 싫었다. 본의 아니게 시작된 장기복무에 불만이 많았던 탓일 것이다. 상급부대인 제505 輸運團 本部(수운단 본부)에 가서 마침 1964년도 12월경에 첫 월남파병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에 지원하게 되었다.
파월명령이 하달되자 중대장께서 무슨 영웅 심리로 전쟁터에 가려고 하느냐고 꾸짖으면서 직접 상급부대로 달려가 나의 파월명령을 취소시켜 월남파병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중대장님이 다른 부대로 전근이 되고 나는 다시 독수리부대 창설요원을 지원하여 전속명령을 받고 부산 대연동의 공병 基地廠(기지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장티푸스로 두 차례 大腸 수술
독수리부대는 나이키 地對空(지대공) 유도탄부대로 제222 이키유도탄대대 A포대에 배속이 되었다. 부산 공병 기지창에서 몇 개월 교육을 받고 1964년 12월 20일 우리는 A포대 기지가 있는 경북 영일군 구룡포읍 대보면 구만리(호미곶:우리나라 지도의 호랑이 꼬리)으로 이동했다. 부대 이동을 한 지 며칠 후 나는 알 수 없는 몸살감기 같은 병환에 시달려 식은땀을 흘리는 등 앓아눕게 되고 10여 일 후에는 극심한 복통으로 새벽 1시경에 가까운 포항해군병원으로 후송됐다.
X레이 사진도 찍어보았지만 무슨 병인지 몰랐다. 나는 수술대에 올라 전신마취주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마취에서 깨어나니 담당군의관이 병세를 알려주는데 장티푸스였다. 응급대처가 지연되어 腸(장)이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30cm 절단 후 봉합하고 맹장도 절단해 내는 수술을 했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출혈이 심해 소속부대 장병 중에 O형 혈액을 가진 병사의 수혈을 받아 겨우 생명을 이어나갔으나, 1주일 후에 수술한 부위의 실밥을 뽑으니 수술 칼의 소독이 불량했던 탓으로 수술 부위가 곪아터졌다. 피고름을 거즈로 닦아내고 겉가죽이 붙지 않고 쩍 벌어진 곳을 반창고로 당겨 붙인 채로 매일 링거주사, 혈액수혈주사를 맞으며 지내던 중, 1개월 만에 해군병원에서 경주시에 위치한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18육군병원으로 응급실에 도착하니 병원장님을 비롯한 군의관 7~8명이 나의 곁으로 모여 이런저런 논의들을 하는데 ‘김종대‘와 비슷한 환자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간호장교에게 ’김종대‘가 누구냐고 질문하니 나와 같은 장티푸스 질환을 앓던 환자가 보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매일 교회 전도사님이 오셔서 내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는데 나의 죽음을 예측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고향에서 부친께서 내려오셔서 몇 개월간 나의 침실 옆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시면서 돌봐주시었다. 포항해군병원에서의 수술이 원활하지 못한 탓으로 나의 장은 꼬인 상태로 협착되어 재수술을 해야 했으나 환자의 기력이 쇠약한 탓으로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도록 기다려야 했다.
약 반년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중환자로 지내다 점차 회복되어 첫 수술 11개월 만에 再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재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15일쯤 지나 나는 자진퇴원을 요청해 부대에 복귀했다. 퇴원하는 날 담당군의관께서 禁酒(금주)를 권하여 이후로 술은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입대 후 9년 만에 中士 진급
퇴원 후 나는 수송부 선임하사의 보직을 받고 근무를 하였다. 수송부에서는 지프, 장교 및 하사관 출퇴근용 통근차인 스리쿼터, 보급물자 수송용으로 트럭, 그리고 구난용 레커차 등을 배차, 정비, 보급수송하는 등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공휴일에는 해변으로 나가 멀리 출렁이는 파도도 보고 해녀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바닷물은 西海와 달리 무척 파란 맑은 색을 띠고 있었다.
中卒의 하사관 중에서 특수 간부후보생으로 장교로 임관되는 과정의 시험이 있었다. 부산 1군수사령부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합격이 되었으나 앞에서 언급한 轉入未着(전입미착)으로 인한 탈영사실로 인해 불합격 처리되었다.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육군본부 감찰감실을 찾아가 감찰감님(육군 준장)께 탄원해 보았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기도 사건이 일어나고, 나는 1968년 10월 1일부로 하사에서 中士(중사)로 진급이 되었다. 하사로 진급 후 만 5년이 경과되었고 군 입대 후 9년 만이다. 中士는 최말단 9급 공무원 수준의 급여를 받았다. 바꿔 말하면 9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말단 공무원이 된 것이다.
베트남 戰線으로 自願
본의 아니게 장기복무 직업군이 되고 여기에 장교로도 복무할 수 없는 전입미착의 탈영병 누명을 쓴 나의 장래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우울한 군 생활에서 스스로의 앞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베트남 전선으로 가보겠다는 것이었다. 육군본부 부관감실의 파월담당부서를 찾아갔다. 같은 계급의 중사에게 월남파병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군번과 성명을 알려주고 부대로 돌아왔다.
1개월쯤 후 토요일 오후 파월명령이 하달되었노라는 전갈을 받고 황망히 짐을 꾸려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의 파월 보충대로 향하였다. 파월 보충중대에선 한밭중학교 동창이며 ROTC 2기로 이미 베트남 派兵(파병)을 마친 친구가 대위로 중대장 근무를 하고 있어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며 훈련을 마쳤다.
부산행 기차에서 제222 이키유도탄대대 A포대에서 副포대장으로 근무하던 허영욱 대위님(정규육군사관학교 18기)을 파월동기로 상봉하니 반가웠다. 부산항에서 2만 톤급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싣고 4박5일간의 항해 끝에 1970년 4월 초에 맹호사단 주둔지역인 베트남의 퀴논 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100군수사령부 제1군수지원단 제239자동차대대 제832중대에 배속되었다.
파월근무 1주일이 경과해서 나는 분대병력 12명을 인솔해 M16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온몸에 모기약을 바르고 부대 인근으로 하룻밤 매복근무를 하게 되었다. 조그만 호를 파서 몸을 숨기고 우리의 5m 전방에는 클레이모어도 설치했다.
클레이모어 |
클레이모어는 직사각형의 형태에 약간 휘어져 있고 적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의 땅에 세워 설치한다. 일반적으론 전기식 뇌관이나 비전기식 뇌관을 클레이모어에 설치한다. 이 기폭장치(도화선 라이터, 격발기)를 눌러 뇌관을 터트릴 시에 클레이모어 안의 C-4가 점화되면서 안에 들어 있는 약 700개의 쇠구슬이 전방을 향해 산탄총처럼 튀어나간다. 지뢰는 땅 속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폭발력이 감소하여 상대적으로 살상력이 조금 떨어졌지만 클레이모어는 땅 위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일반 지뢰보다 인명살상 규모가 더 커진다.
클레이모어는 앞방향이 움푹 파인 면이 앞이다. 반대로 하면 큰일이다. 파월 고참병들을 인솔하여 하룻밤 매복을 끝내고 아침에 철수준비 중에 나는 아연실색하고야 말았다. 클레이모어가 우리 쪽을 향하여 반대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맹호부대 호송 지휘관으로 근무
나는 제3소대 소속으로 트럭 20여대를 인솔해서 맹호부대의 각 연대 및 중대에 보급품 또는 탄약, 병력 등을 수송하는 호송지휘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 전날 작전명령을 하달받고 다음날 아침 군용트럭 20여 대의 맨 앞 지프에 승차하여 목적지까지 호송지휘를 하는 임무이다.
때로는 보급품(식량, 의복, 탄약 등)을, 때로는 베트콩 소탕작전에 투입되는 병력을 수송하기도 한다. 내가 탄 지프에는 운전병, 그리고 기관총 수까지 모두 3명이 탄다. 나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운전병은 M16 소총, 각 트럭 운전병들도 M16 소총으로 무장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지날 때보다 비포장도로에선 바짝 긴장이 되어서 방탄조끼까지 착용해 식은땀이 흐른다. 베트콩이 매설한 지뢰가 폭발할지 몰라 마음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운전병들은 비포장도로를 통과할 때에는 더욱 가속해 달린다. 지뢰가 폭발해도 빨리 통과하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이다. 무성한 수풀 속의 산길을 지날 때엔 혹시나 베트콩이 매복하여 우리를 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지역에서는 맹호부대의 장갑차 두 대가 맨 앞과 뒤에서 우리를 엄호해준다. 장갑차는 수풀 속을 향해 기관총을 亂射(난사)하면서 달린다.
生涯 세 번의 전쟁 체험
나이키유도탄부대에서 함께 근무하며 나와 친교를 맺었던 전우(중사) 2명이 전역해서 이곳 퀴논의 ‘한진상사(대한항공의 모기업)’에 취업해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중사의 월급은 2만 원 정도인데 ’한진상사‘에서는 10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가끔 일요일에 이들 친구가 찾아와 함께 외출해 ’한진상사’에도 들르곤 했는데 그때 본 조중훈 회장님은 고생도 많이 하셨다.
유년시절에는 일본의 대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소년시절엔 한국전쟁, 그리고 청년시절에는 베트남전쟁 등 생애 세 번의 전쟁을 체험했다. 젊은 시절에 체험한 고생은, 강인한 정신을 갖게 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파월전선에서 7~8개월을 근무해보니 고향의 부모형제가 보고 싶었다. 이곳에서도 나의 장래는 어두운 암흑이었다. 지난날의 장티푸스 病歷(병력)을 핑계로 건강상 이유로 탄원해서 파월근무 8개월 후인 1970년 12월에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계속)
뒷줄 오른쪽이 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