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각좌도(却坐圖) 언제 : 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설채 규격 : 146.8 x 77.3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각좌도는 한나라 문제(文帝)와 원앙(袁앙)이란 충신과 문제의 총희. 그리고 시녀들을 배경으로 하여 그 고사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즉 문제가 상림원(上林園)에 놀러 갔을 때 그가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이 황후가 되고 싶어 왕후의 자리에 앉으니 옆에서 보고 있던 원앙이 면전에서 황후가 이미 있으니 용납하지 말라고 직언을 하자 황제와 신부인이 모두 화를 냈지만 그후 다시 부당함을 직언하자 문제가 깨닳고 그에게 상을 내렸다는 고사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그림은 그 화법이 송나라 절함도(折檻圖) 와 흡사하여 같은 사람의 솜씨로 보이는데 낙관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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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양해(梁楷) 제목 : 발묵선인도(潑墨仙人圖) 언제 : 南宋 재료 : 화첩종이에 수묵 규격 : 48.7 x 27.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양해는 지금의 산동성 동평 사람으로 영종(寧宗).가태(嘉泰) 연간에 대조가 되었는데. 후에 화원의 규정이 까다로와 자유로이 행동하고 그림을 그릴수가 없어서 금대를 벽에 걸어놓고 도망을 갔다. 술을 좋아하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낙천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활량이란 뜻으로 양풍자(梁風子) 라고 불렀다. 도석인물화와 불화 그리고 귀신 그림등을 잘그렸는데. 처음 가사고(賈師古)에게 그림을 배워 차츰 일가를 이루었다. 일종의 몰골화법인 감필법(減筆法)으로 자유분망하게 그림을 그렸는데 화면에서도 기운이 생동한다. 이그림도 굵은 붓에 듬뿍 먹을 묻혀서 선인(仙人)이 배를 내보이게 옷을 걸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완전히 발묵의 농담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화면에 양해(梁楷) 라는 낙관이 있고 청 건륭황제의 수장 인이 있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송암선관도(松巖仙館圖) 언제 : 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71 x 115.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관
해설 : 이 송암선관도 는 구름으로 둘러쌓인 강가의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청록설색이 매우 아름답다. 소나무 숲 아래엔 세 사람이 앉아있고. 한 사람은 배를 타고 앉아 있으며. 사공이 배를 젓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부채질을 하며 걸어 오고 있으며. 다섯 사람의 시동들이 있는 그림이다. 산에는 누각이 이곳 저곳에 지어져 마치 관광 명승지를 방불케 하는 그림이다. 산석의 표현은 부벽준법(斧劈浚法)으로 표현하였으며. 근경과 원경의 표시를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여 구도상 매우 완벽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낙관은 없고 청나라 건륭황제의 시제와 어인이 있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민산청설도(岷山晴雪圖) 언제 : 宋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15.1 x 100.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관
해설 : 이 민산청설도는 화풍으로 보아 곽희(郭熙)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강물이 흐르는 양 언덕을 구도로 하여 좌편에 중심을 잡고 우편으로 전개시킨 일종의 좌변구도로서 우편 언덕엔 높은 소나무가 직립하여 있으며 좌편 언덕엔 층암의 석산이 첩첩이 뒤를 이어 솟아 있다. ?〈?다리와 행인. 정자. 사찰. 어린애들. 중들이 그림안에 점철로 배치되어 잇다. 또 산에는 폭포. 산새. 연기와 아지랑이. 심오한 산골짜기가 함께 표현되어 있다. 화필로 보아 완전히 곽희의 초춘도(早春圖)를 방불케 한다. 아마 곽희가 그렸거나 아니면 곽희일파가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수장인으로는 청나라 건륭황제 와 가경황제의 어인이 있고. 단씨극명수장서화(段氏克明收藏書畵)등이 있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절함도(折檻圖) 언제 : 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설채 규격 : 173.9 x 101.8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관
해설 : 이 절함도는 한나라 성제(成帝)때의 주운(朱雲)의 절함(折檻) 고사를 그린 것이다. 주운 은 한나라 산서성 사람으로서 자를 遊 라고 하였는데. 성제 때에 괴리령(槐里令)을 지내면서 상소를 하여. “위로는 황제를 잘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안창후 장우(張禹) 입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소관(小官)이 어찌 상관(上官)을 욕되게 하느냐 ! 죄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하옥하였다. 그러나 주운은 계속 상소를 하여 황제를 설득하였다. 이 그림은 바로 그 고사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애석하게도 작가를 알 수 없고. 다만 송나라 때 그림이란 것만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오른쪽에는 황제와 시녀 두명 그리고 따르는 자가 있으며. 왼쪽에는 무사와 장군 그리고 신하가 있고. 뒤로는 큰 소나무 아래에 괴석이 대나무와 어울려 표현되었다

작가 : 작가미상 제목 : 인물화(人物畵) 언제 : 宋 재료 : 화첩 비단에 채색 규격 : 29 x 27.8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관
해설 : 이 인물화는 한 사람의 사대부 문인이 서상(書床) 위에 앉아서 한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무엇을 쓸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으로. 뒷면 가리개에는 자신의 초상을 걸어 놓았으며. 서상 좌우엔 연상과 각종 문방류가 있다. 오른쪽에는 책을 쌓아둔 책상과 거문고가 있으며. 시동(侍童) 한 명이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주변에는 꽃과 화분 차를 달이는 향로 등. 선비에게 필요한 문방기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그렸다. 화폭 상면에는 송나라 휘종과 고종의 어인이 있고. 그외에도 많은 수장가들의 인장이 있다. 이 작품은 의습의 표현이나 용필의 성격으로 보아 당나라 한간의 목마도(牧馬圖)와 매우 흡사한 점이 보이는데. 후세에 어떤 사람이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 : 목계(牧谿) 제목 : 팔팔조도(叭叭鳥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78.5 x 39 cm 소장 : 일본개인
해설 : 목계는 남송 말엽 사람으로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사천성 사람으로 법호를 법상(法常)이라 하였고 호를 목계(彛齋)라 하였다. 남송 말년에 지금의 절강성 항주의 무림 장상사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원나라 지원 연간에 죽었다. 목계는 용. 호랑이. 원숭이. 학. 새. 산수. 수석인물화 등을 즐겨 그렸는데 그의 그림을 강남의 사대부들이 좋아하였다. 그의 필법은 묵점과 음양화법으로 그리며 선을 중요시 하지 않는 물골법이다. 동양화에서 이와 같은 그림을 일품화라고 한다. 이그림은 전경을 노송의 등걸과 그 위에 서 있는 팔팔새를 외롭게 묘사하였고 상면에는 소나무 가지와 잎을 묘사하였다.

작가 : 목계(牧谿) 제목 : 어구도(魚狗圖) 언제 : 南宋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 규격 : 79.4 x 30.9 cm 소장 : 일본 구세영해 미술관
해설 : 이 어구도는 오래되어 말라죽은 가시나무 위에 부리가 길쭉하고 날카로운 물새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서 물위를 내려다 보고 있는 그림이다. 새의 표정이 외롭고 정적이며 간결하다. 대부분 목계의 그림은 수묵의 표현이 간결하고 고요하며 적적한 느낌을 많이 주는데. 아마도 목계는 서정적인 자질이 있었던 사람으로 추측된다. 화면에 목계의 낙관이 있다.

작가 : 목계(牧谿) 제목 : 원후도(猿猴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73.3 x 99 cm 소장 : 일본 대덕사
해설 : 목계는 경치 좋은 소상팔경(瀟湘八景)의 깊숙한 산중의 사찰에 기거하면서 산 속에 있는 원숭이들의 생태를 실지로 잘 관찰하고 그림에 옮겼다. 그는 그림에 대한 안목이 깊고 불교의 초자연적인 사상이 작용하여 양해와 같이 선화(禪畵) 즉 망양화 (罔兩畵)를 잘그린 사람이다. 그는 중당(中唐) 이후에 발전한 선화법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자연을 관찰하고 섭렵하여 자유방림한 수묵화를 그렸으며 화면의 공간성도 사물의 고립성을 이용하여 매우 시원스런 조화를 이룬다. 이 그림은 늙은 소나무 위에 원숭이 모자 가 서로 안고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동양화에 있어서 새로운 화법을 제시한 작품이다.

작가 : 진거중(陳居中) 제목 : 문희귀한도(文姬歸漢圖) 언제 : 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설채 규격 : 147.4 x 107.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진거중은 영종(寧宗). 가태(嘉泰) 연간에 화원의 대조였다. 그는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이그림은 한으로 돌아가려는 문희(文姬)를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두아이가 문희의 옷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를 따르는 사람 7명과 영접하러온 한나라 사람 20명도 함께 그렸는데. 인물과 말들이 생동감있게 활기가 있으며 전체 구도가 짜임새 있다.

작가 : 하규(夏珪) 제목 : 서호유정도(西湖柳艇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비단에 담채 규격 : 107.2 x 59.3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하규는 자를 우옥(禹玉)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절강성 항주 사람이다. 영종(寧宗) 때에 화원의 대조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이당의 화법을 취하여 용필이 뛰어나고 대부벽준법 으로 그림을 그려 당시 사람들이 그의 화법을 시니대수준(施泥帶水浚) 이라고 칭하였다. 즉 물에 접해있는 절벽이나 바위를 대부벽준법으로 그린다는 뜻이다. 이그림은 봄날에 버드나무와 꽃들이 숲을 이룬 호수가에 배를 정박시켜 놓은 풍경을 평원법으로 시원하게 그렸다. 원나라 사람 곽비(郭毘)의 제식(題識)이 있는데 "필묵이 임리(淋璃)하고 연운에 변화가 있으며 사대부의 기풍이 있다" 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시화제문(詩畵題文)이 있고 청나라 건륭황제의 어인도 있다.

작가 : 이적(이迪) 제목 : 풍우귀목도(風雨歸牧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20.7 x 102.8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적은 지금의 하남성 맹현 사람으로 효종. 광종. 영종때까지 화원에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주로 화조화와 대그림. 돌그림을 잘그렸고 간혹 산수화 소경도 잘 그렸다. 이그림은 해질 무렵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있는 풍경을 그렸다. 언덕에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고 소를탄 두 목동이 도롱이를 쓰고 있는데 한 목동의 삿갓이 바람에 날리어 땅에 뒹굴고 두 소가 서로 싸우려는 듯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그림의 상면에 갑오세이적필 이라는 낙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그림은 1174년에 그려졌음을 알수있다.

작가 : 이숭(李嵩) 제목 : 시담영희도(市擔嬰戱圖) 언제 : 南宋 재료 : 화첩 비단에 담채 규격 : 25.8 x 27.6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숭은 지금의 절강성 항주 사람으로 광종. 영종, 이종(理宗)연간에 걸쳐 화원의 대조를 지냈다. 그는 인물화와 계화(界畵)를 잘 그렸다. 이그림은 잡화 행상인이 짐을 내려 놓은 곳에 일곱명의 아이들과 부인이 둘러서서 보고 있는 그림이다. 아이들이 장난감이랑 접시 주발로부터 야채. 술. 과일까지 없는 것이 없다. 행상인은 목에 건 고리에다 이와 눈동자 표지를 달아 그가 치과와 안과 의사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앞짐의 아래에 있는 비올 때 쓰기위한 삿갓에는 그위에 공의우마소아 (攻醫牛馬小兒)라고 써서 그가 수의사와 소아과 의사를 겸하고 있음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삿갓 아래에 천에 신(神) 을 써서 재앙도 물리치고 악귀를 쫓는다는 것을 나타내고도 있다. 화면에 가정경오이숭화(嘉定庚午李嵩畵)라는 낙관이 있다. 조선사람 안기(安岐)가 소장했던 작품이다.

작가 : 유송년(劉松年) 제목 : 화라한(畵羅漢)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18.1 x 56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유송년은 지금의 절강성 항주 사람으로. 효종(孝宗) 순희 (淳熙)연간에 화원에 들어가 광종(光宗) 소희(紹熙) 연간에 대조가 되어 화원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는 장돈례(張敦禮)에게 그림을 배웠고 인물화.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작품에 신기가 넘치고 대담성이 있다. 영종 때에 경직도(耕織圖)를 그려 황제로부터 금대(金帶)를 받았다. 화라한은 모두 세폭으로 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그중 제2폭이다. 한 나한승이 설법의자에 앉아 있고. 옆에 다른한 승이 서권(書卷)을 받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뒤의 배경엔 깎아 세운듯한 바위가 있으며. 바위 틈새와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많은 사람들의 수장인이 있는데. 내부서화(內府書畵)와 태상황제(太上皇帝) 및 건륭황제의 어인 등이 있어 궁중에서 전래되어 왔음을 알 수있다.

작가 : 마원(馬遠) 아호 : 흠산(欽山) 제목 : 화등시연도(華燈侍宴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담채 규격 : 111.9 x 53.5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마원은 자를 요부(遙父). 호를 흠산(欽山) 이라 하였으며 본래 산서성 영제 사람이었으나 그가 자란 곳은 절강성 항주다. 증조부로부터 아들 마린에 이르기 까지 5대에 걸쳐서 화원의 화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그 역시 광종. 영종 때 화원의 대조를 지냈다.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이당의 화법을 배워 독창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그는 필법이 엄하고 정결하며 설색이 청윤(淸潤) 하다. 산석의 준법은 대부벽준(大斧劈浚)으로 하고 그림의 구도를 좌편 구석에서 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변각(馬邊角) 또는 마일각(馬一角) 이라 불렀다 이당. 유송년. 하규 와 함께 남송 4대가라 일컬어졌다. 이 그림은 넓고 큰 집의 5간 대청에 발과 등을 줄지어 달아놓고 집안에서는 네 사람이 주연을 베풀고 돌계단 아래서는 16명의 여인들이 손에 등을 들고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다. 정원에는 매화나무가 둘러있고 지붕너머로는 먼산이 떠있는 듯이 보이는데 주위는 온통 검푸른 밤의 색깔로 둘러 싸여있다. 그림 상면에는 남송 영종의 양황후의 어필이 있다. 수장인으로는 태상황제지보(太上皇帝之寶) 등의 어인고 많은 인장들이 보인다.

작가 : 강삼(江參) 제목 :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부분 언제 : 南宋 재료 : 두루마리 비단에 담채 규격 : 46.3 x 546.5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강삼은 자를 관도(貫道)라 하였으며. 지금의 절강성 오흥 사람이다. 그는 산수화를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의 필법으로 배워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산수화는 대부분 평원산수화의 문인화법이며. 호수와 하늘이 맑고 깨끗한 전경을 세필로 그렸으며. 소 그림도 수묵으로 잘 그렸다. 이 그림은 군산이 중첩으로 쌓이고 물이 연접하여 있으며 수림이 무성하고 깨끗한 경치를 이루는 신묘한 비경(秘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끝에 원나라의 대화가인 가구사(柯九思)의 감정서가 있고 또 명나라 동기창의 감정인도 보인다. 역대 수장가들 중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람 안기(安岐)의 인장과 청나라 건륭황제의 어인 도 보인다.

작가 : 임춘(林椿) 제목 : 십전보희도(十全報喜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설채 규격 : 173.2 x 97.6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임춘은 지금의 절강성 항주 사람으로 효종 순희(淳熙) 연간에 화원의 대조가 되었다. 그는 화조화 .초충화. 소과화(蔬果畵) 등을 잘 그렸으며. 조창(趙昌)의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설색이 가볍고 담채이며 사생(寫生)의 묘미가 있게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송죽 괴암과 까치가 떼를 지어 상하의 도면에 즐겁게 노니는 풍경을 그렸는데 봄의 기운이 소생하고 화창한 봄날의 생동감이 서리는 풍경을 활동성 있게 표현하였다. 관서에 화원대조임춘화(畵院待詔林椿畵) 라고 임춘자신이 쓴 글씨가 있으며. 명나라 때 진왕(晉王) 이 소장하였다는 수장인도 보이고. 청나라 가경황제의 어인도 있다.

작가 : 염차평(閻次平) 제목 : 사락도(四樂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192.6 x 97.2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염차평은 남송 효종 융흥(隆興) 원년에 화원에 들어가 지후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도 선화(宣和) 연간과 소흥(紹興) 연간에 화원의 대조(待詔)를 지냈다. 염차평은 그의 가업을 계승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산수. 인물. 소그림 등을 화원화 방식으로 잘 그렸는데 화법은 이당에 가깝다. 이 그림은 기암 절벽이 무너질 듯 중첩으로 쌓여서 그 기세가 생동하고 중경의 누각 주위를 연못이 둘러싸고 있는 속에서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밭을 갈고 글을 읽는 네 가지 즐거움을 그린 그림인데 그림 속에 오직하는 사람만은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전체적인 분위기와 필법에서 화원화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다. 수장가들의 인장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와 가경황제의 어인이 보이고. 그밖에도 많은 사람의 수장인이 있다.

작가 : 소한신(蘇漢臣) 제목 : 추정희영도(秋庭戱嬰圖) 언제 : 南宋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97.5 x 108.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소한신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사람으로 휘종 때에 화원의 대조(待詔) 벼슬을 지냈고 남송의 고종 소흥 연간에도 다시 대조가 되었다. 그는 유종고(劉宗古) 에게 그림을 배웠고 미인도와 도석(道釋)인물화를 잘 그렸다. 그의 그림은 아주 세필로 정성을 들였으며 색채가 아름답고 윤기가 난다. 주로 어린애들이 노니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그림 역시 그의 대표작품중의 하나다. 부용이나 소국이 활짝 피어있는 뜰에 괴석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서 두 아이들이 노니는 모습을 그렸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고 신기(神氣)가 있으며 까만 괴석이 매우 정묘(精妙)하게 표현되었다. 화면 상부 좌편에 건륭황제의 시제문이 있고 어인도 있다.

작가 : 소조(蕭照) 제목 : 관산행려도(關山行旅圖) 언제 : 南宋 재료 : 화첩 비단에 채색 규격 : 24.2 x 26.2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소조는 자를 동생(東生) 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산서성 양성 사람이다. 정강(靖康)에 금나라가 송나라 서울인 개봉을 침략하자 송나라 국민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이때 소조는 태행산(太行山) 의 의병에 참가하여 화가 이당(李唐)을 만나 남송의 서울인 임안(臨安)으로 돌아와 이당에게 그림을 배워 소흥 연간에 화원의 대조가 되었다. 그는 산수화와 송석을 잘 그렸는데 그의 그림의 특징은 중묵(重墨)으로 필세가 무성하며 웅건하였다. 이 그림은 높은 산의 절벽아래를 나그네들이 지나가고 구름이 산을 감싸고 있으며 산에는 수림이 무성하다. 수장가들의 인장 가운데 조선조때 사람 안기(安岐)의 인장인 의주진장(儀周珍藏) 도 보인다.

작가 : 여기(呂紀) 제목 : 사계화조도~봄(四季花鳥圖~春)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먹과 채색 규격 : 175.2 x 100.9 소장 : 토오교오 국립박물관
해설 : 여기는 자를 정진(廷振). 호를 낙우(樂愚)라고 하였으며 절강성 영파 사람으로 홍치 연간에 활약한 명대 제일의 화조화가이다. 그는 인지전의 궁정화가로 봉직하여 금의위지휘를 제수 받았다. 그의 화조화는 대부분이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 그림으로 정확하고 세밀한 윤곽선과 색채를 사용한 것이지만 임량 의 영향으로 활달한 필치를 보이는 것도 있다. 여기의 고향인 영파는 송. 원대부터 대중적 화조화나 불화가 일본으로 수출되던 항구 도시로 이 지방의 전통인 보수적인 남송 화조화 양식이 그의 화풍 형성 과정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높은 명성 때문에 많은 장식적 화조화가 그에게 전칭되어 오나 대부분은 위작(僞作)이고 그중 동경 국립박물관의 사계화조도는 그의 기준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 그림은 그 중의 봄에 해당한다. 남송화원 화조화가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묘사한 반면 여기는 화면의 대형화에 알맞게 산수화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절파풍의 대담한 필치와 대부벽준의 바위 묘사. 그리고 강한 색채의 사용으로 장식성이 높고 박력있는 그림이 되었다.

작가 : 임량(林良) 제목 : 봉황도(鳳凰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164.5 x 96.5 cm 소장 : 쿄오토 상국사
해설 : 임량의 자는 이선(以善)인데. 남해 사람으로서 영모와 화훼(화훼)에 능하였다. 홍치(홍치) 연간에 공부영선소승(工部營繕所丞)이 되었고. 후에 인지전(仁智殿)의 궁정화가로 있었다. 그의 특기는 이 봉황도와 같이 채색을 쓰지않고 활달하고 능란한 필치로 먹만을 사용하여 그린 화조화 였으며. 그와 같은 작품들은 문인 감상가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이작품은 아침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바위위에 서있는 봉황을 묘사하고 있다. 봉황은 한쪽 발톱으로 바위를 견고히 잡고 위엄있게 서있고. 화려하게 늘어뜨려진 꼬리는 자세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 당당한 자태는 마치 상상속의 봉황이 실제로 나타난 듯한 생동감을 지니고 화면을 압도한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돌출한 바위. 그와 엇갈리며 화면의 대부분을 역시 대각선으로 차지하는 봉황으로 이루어진 힘찬 구도와 먹만의 강한 농담 대조는 극적이고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또한 먹빛만의 화면에서 태양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작가 : 임량(林良) 제목 : 추응도(秋鷹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146.8 x 74.8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 그림은 임량이 수묵화조화뿐 아니라. 채색화조화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매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쏜살같이 날아 구관조(九官鳥)를 덥치려 하고. 목표가 된 구관조는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고 있다. 화면 왼쪽 중간에서 뻗어나와 오른쪽 아래로 휘어진 나뭇가지를 경계로 위쪽에 매를. 아래쪽에 구관조을 배치하였는데. 구관조는 가늘고 늘어진 나뭇가지로 둘러쌓여 있어 이미 빠져나갈수 없는 상황임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두 마리 새의 자태와 눈초리도 긴박한 상황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충분히 전달한다. 빠르고 거친 필치로 나뭇 가지와 잎을 묘사하였고. 새의 깃털도 몇 번의 빠르고 분방한 붓질로 표현했으나 날고 있는 새의 율동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장승업의 매 그림이 임량의 것과 매우 흡사한점이 흥미롭다.

작가 : 선종(宣宗) 제목 : 희원도(戱猿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먹과 채색 규격 : 162.3 x 127.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선종은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증손으로 이름은 담기(膽基)이다. 산수. 인물. 화조. 초충화를 잘 그렸고. 특히 동물을 많이 그려 송의 휘종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의 재위기간인 선덕(宣德) 연간에 많은 궁정화가들이 활약했고. 그들에 의해 명초 화원화풍이 정립되었던 사실에서. 선종이 화가들을 후원하고 작품활동을 적극 장려했음을 알수 있다. 이 작품은 물가에서 놀고 있는 세 마리의 원숭이를 그린 것이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품에 안고 바위 위에 앉아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비파(枇杷)나무위에서 열매를 따서 팔을 뻗치고 있는 새끼 원숭이에게 주려는 듯한 모습이다. 바위는 부드러운 피마준(披痲皴)으로 묘사했고. 나무와 대나무 역시 부드러운 필치를 사용하였으나. 원숭이의 털은 매우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자연스러운 원숭이의 자태와 표정은 생동감과 유연함을 잘 나타내어 당시 궁정화(宮廷畵)가 지녔던 기법의 수준을 대변하고 있으며. 특히 남송화원에서 영모화로 유명했던 모익(牟益)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작가 : 조옹(趙雍) 제목 : 준마도(駿馬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86 x 106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중국에서 마화(馬畵)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이미 그 예가 보이며. 당대의 조패(曹覇). 한간(韓幹)에 이르러는 전례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북송의 이공린(李公麟)까지 사실적인 마화의 발전은 최고도에 달했으나. 남송 때는 쇠퇴하였고. 원대초 복고주의 풍조하에서 부활하였다가 원 이후에는 다시 쇠퇴하였다. 원대의 말그림은 조맹부(趙孟頫)에 의해 유행되었고. 그의 아들 조옹과 손자 조인(趙麟)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옹의 화풍은 자연히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마화는 특히 그러하였다. 이 작품은 매우 세밀한 필치로 강가의 나무 아래에서 노니는 다섯 마리의 말을 그린 것이다. 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한가하게 쉬는 마부의 모습과 더불어 자유롭고 평화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말의 자태. 나무의 모습 등이 모두 조맹부의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작가 : 유관도(劉貫道) 제목 : 원세조출렵도(元世祖出獵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82.9 x 104.1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유관도는 강소성 율수 출신으로. 자는 중현(仲賢)이다. 인물화. 산수화. 화(花). 죽(竹). 조(鳥). 수(獸)의 그림에 능하였고. 지원 16년에 유종(裕宗)의 어용(御容)을 잘 그려 궁중의 어용화가(御用畵家)인 어의국사(御衣局使)가 되었다. 이 작품은 원세조 가 시자(侍者)들과 함께 만리장성 밖에서 사냥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모두 열 명의 말 탄 인물이 갖가지 자세로 그려졌는데. 화면의 초점은 흰색 모피옷을 입은 중앙의 황제에게 주어지고 있다. 뒤로는 모래언덕 너머로 보이는 낙타 대상(隊商)들의 모습이 사막지방의 경관을 강조하고 있다. 극세필(極細筆)로 인물. 말. 기구(器具). 의복의 무늬까지 자세히 묘사했고. 갈색의 배경속에 홍. 백. 청. 녹의 색채가 화려하게 느껴진다. 이는 요(遼). 금(金) 이래 몽고족 지배의 원까지 계속된. 초원지대 이민족(異民族) 생활의 묘사에 적합한 북방회화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 : 안휘(顔輝) 제목 : 철괴도(鐵拐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91.3 x 79.6 cm 소장 : 쿄오토 지은사
해설 : 안휘는 14세기 초에 활약한 도석인물화가로 강산 출신이며. 자는 추월(秋月)이다. 기괴한 형상의 인물을 많이 그렸고.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일본에 보존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철괴(李鐵拐)는 전설적인 도교(道敎)의 선인(仙人)으로 이름은 응양(凝楊) 이다. 어려서 도를 깨쳤는데 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루는 혼이 몸에서 나와 돌아다니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이 죽은 줄 알고 몸체를 태워버려 할 수 없이 굶어죽은 거지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났다. 그 이후 그는 항상 철괴와 연기나는 호로병을 든 거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여기서는 바위에 앉아 혼을 불어 날리는 모습을 보인다. 바위, 산. 폭포는 남송 산수화의 기법을 사용하였고. 얼굴과 머리. 수염은 세밀한 필치로 그리고. 옷주름은 굵은 필선과 선염을 배합하여 육중한 중량감을 드러내었다. 과장된 얼굴표정. 기운 넘치는 신체의 표현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작가 : 장악(張渥) 제목 : 요지선경(瑤池仙慶)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채색 규격 : 116.1 x 56.3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장악은 항주 출신으로. 호는 정기생(貞期生)이다. 백묘법(白描法)의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하며. 현존하는 그의 작품 중 백묘법의 구가도(九歌圖)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요지(瑤池)는 여선(女仙)의 우두머리인 서왕모(西王母)가 거처하는 곤륜산(崑崙山) 속의 낭원(閬苑)에 있는 호수이며. 도석인물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 작품에서는 시녀를 거느린 여선(女仙)이 바람을 타고 날고 있고 땅위에 서는 네 명의 노인이 축수(祝壽)를 보내고 있는 광경을 묘사하였다. 인물들의 모습이 매우 생동감있게 그려졌고. 신선의 휘날리는 옷자락은 육조(六曹)시대의 고개지(顧愷之) 이래로 계속 사용되어온 기법이다.

작가 : 맹옥간(孟玉澗) 제목 : 춘화삼희(春花三喜)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65.2 x 98.3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 그림은 얼마 전까지 명초의 화조화가 변문진(邊文進)의 그림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대북 고궁 박물원 출판물에는 그와 같이 표시되어있다. 그러나 화면의 오른편 아래 구석에 맹옥간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 발견되어 원래의 작가를 되찾게 되었다. 맹옥간은 14세기 전반기에 항주(杭州)에서 활약하던 직업화가였으며. 남송화원의 화조화 양식을 답습하여 짙은 색채의 구륵법(鉤勒法) 화조화를 많이 그렸다. 당시에는 그의 그림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나 원대 후기부터 점점 문인화 정신에 입각한 미술사관이 우세함에 따라 그의 그림은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봄의 꽃과 까치 세 마리을 대나무와 어울리게 배치하고 화면의 왼쪽 아래에는 바위와 흙을 수묵으로 묘사해 놓았다. 대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땅에서 노는 두 마리의 까치를 보며 짖는 모습은 그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꽃과 대나무잎. 그리고 새 깃털의 세세한 묘사는 남송화원 화조화의 능숙한 기술을 보인다.

작가 : 고안(顧安) 제목 : 묵죽(墨竹)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122.9 x 53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고안은 동회(東淮) 사람으로. 자는 정지(定之)이며.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의 노판관(路判官)을 지낸 사대부 화가이다. 그는 특히 묵죽으로 유명하였으며. 양유정(楊維楨). 예찬(倪瓚)등 당시의 문인화가들과도 교우관계를 가져 그들과 합작으로 그린 그림도 남겼다. 이 그림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세 그루의 대나무가 농묵과 담묵으로 뚜렷이 구별지어져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감을 느끼게 표현되었다. 죽간은 곧게 뻗어 올라가면서도 입체감까지 표현되었고. 대나무잎은 부드럽게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원사대가중 묵죽을 많이 그린 오진이나 예찬의 서예적이며 추상에 가까운 묵죽과는 달리.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해 놓은 듯 좀더 친근감이 가는 대나무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는 당의 죽화가(竹畵家) 소열(蕭悅) 과 비교되기도 하는 듯하다. 소열의 작품은 지금 남아있지 않으나. 당시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의 시 화죽가(畵竹歌)에 의해 그의 풍죽도(風竹圖)의 모습을 상상할수 있다.

작가 : 예찬(倪瓚) 제목 : 균석교가도(筠石喬柯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67.3 x 36.8 cm 소장 : 클리브랜드 미술관
해설 : 예찬은 원 사대가 중 오진(吳鎭)과 더불어 묵죽 또는 고목죽석도를 많이 그렸고.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표현주의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 그림은 복잡한 제목을 가졌지만 대나무와 바위. 그리고 교가(喬柯) 즉 우뚝솟은 나무 등 불변의 지조를 상징하는 것들을 배합한 그림이다. 이와 같은 그림은 원대 문인화가들 사이에는 몽고족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현으로 널리 유행했다. 예찬 만년작품에서 자주 보는 갈필로 바위와 고목이 묘사되었고. 거기에 좀 변화를 주는 짙은 먹으로 대나무잎들이 표현되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특히 갈필의 효과를 과시하며 예찬의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을 표출하고 있다. 예찬은 일찌기 대나무 그림에서 형사(形似)를 중요시하지 않고 자기 마음속의 자유분방한 기분을 표현할 뿐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예찬은 고목이나 대나무 또는 바위의 형태를 빌어서 자기의 느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 가구사(柯九思) 아호 : 단구생(丹丘生) 제목 : 만향고절(晩香高節)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26.3 x 75.2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가구사는 태주(台州) 사람으로. 자는 경중(敬中). 호는 단구생(丹丘生)이라 하였으며. 원대의 서화골동 감식가. 그리고 묵죽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원 문종(文宗)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당시 40세의 가구사를 규장각 감서박사(鑑書搏士)로 임명하였으니 그의 재질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그림은 고매한 인격의 상징인 대나무. 바위 그리고 국화를 소재로 하였는데. 이는 원대 문인들 사이에서 특히 유행하던 소재 중의 하나이다. 가구사의 대나무는 잎이 빗자루 모양으로 몰려 있고. 마디는 짙은 먹으로 강조되고 농묵과 담묵을 골고루 배합하여 변화있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 : 이간(李衎) 제목 : 수황수석도(修篁樹石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163.5 x 102.5 cm 소장 : 북경 고궁박물원
해설 : 이간은 묵죽과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의 죽화(竹畵)를 모두 잘 그렸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식물학자적 또는 사생화가(寫生畵家)적 면을 잘 나타낸다. 그는 많은 관직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여러지방. 특히 남쪽 지방에 갈 기회를 가져 가는 곳마다 대나무 모양을 잘 관찰하여 그렸고 자세한 기록도 남겼다. 후에 이와 같은 산 지식을 토대로 하고 고전(古典)을 참작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죽보상록(竹譜詳錄)을 저술하였다. 이 그림은 네 그루의 대나무를 중심으로 바위와 조그만 고목을 곁들인 간단한 구도를 보인다. 무성한 대나무잎을 하나하나 윤곽선으로 그리고 먹으로 그 안을 채운 특이한 기법이다. 즉 구륵전채법에서 색채 대신 먹을 쓴 셈이다. 먹의 농담 변화는 많지 않으나. 잎의 뒷면은 한결같이 희게 남겨두어 산뜻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바위 묘사에는 여러 단계의 농담 변화를 통하여 질감과 입체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반면에 토파(土坡)는 간단한 선으로 윤곽만을 나타내었다.

작가 : 심주(沈周) 아호 : 석전(石田). 백석옹(白石翁) 제목 : 책장도(策杖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59.1 x 72.2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원 사대가 중 예찬(倪瓚)의 양식을 답습한 그림으로. 우선 구도에서 예찬 그림의 기본적 구성요소를 볼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갈필을 사용하여 담백한 맛을 낸 것도 예찬 그림의 특징을 반영시킨 것이다. 이 그림은 또한 심주의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던 문인화가 유각의 방예찬산수(倣倪瓚山水)도와 필법이나 구도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이며. 예찬양식의 명대에 들어와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고 표현되는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이다. 예찬 그림에 비하여 전경과 원경이 좀더 짜임새 있게 연결되었으며. 산의 괴량감(塊量感)도 두드러지게 표현된 점이 다르다. 예찬 양식뿐만 아니라 황공망 그림에 자주 나오는 석파(石坡)도 첨가하여 마치 집을 짓듯 산을 쌓아올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작가 : 심주(沈周) 아호 : 석전(石田). 백석옹(白石翁) 제목 : 야좌도(夜坐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4.8 x 21.8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길고 좁은 화면에 글씨와 그림이 거의 반씩을 차지하는 이 야좌도는 심주 자신이 어느 쌀쌀한 가을밤에 직접 겪은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효현한 것이다.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재에는 그가 책과 등잔이 놓인 책상 옆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글에 쓰인 대로 비가 방금 그친 달밤의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한 경치를 약간의 담채와 먹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화제를 대강 요약하면 다음과 같? 차가운 밤에 잠은 달콤한데. 갑자기 깨어나니 정신이 맑아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옷을 입고 앉아 깜박이는 등잔불 앞에서 책을 읽다가 피곤하여 접어두고. 방금비가 그치고 달이 떠오른 경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고요한 가운데 먼 곳의 바람소리. 북소리. 종소리들이 점점 더 잘 들리는 것을 느끼며 새벽까지 앉아 있었다. 나는 원래 밤중에 앉아 있기를 즐기는 성격인데. 오늘처럼 외정(外靜)과 내정(內定)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이와 같이 고요하고 안정된 가운데 모든 소리와 색채를 체험하였다. 그들은 내 정신을 더욱 맑고 깨끗하게 해주었으며. 의지(意志)를 일게 해주었다. 보통때도 이와 같은 소리를 못 들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란 외적(外的)인 것에 매달리고 마음 역시 이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것은 사람에게 이익되기보다는 손해를 끼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정정(靜定)의 상태에 들어가면 색과 소리의 영향이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그들은 나의 자아(自我)와 묘하게 일체(一體)가 되고 나 자신의 문화(文華)를 돕는 역할을 한다. 소리와 색은 점차 내 의식에서 사라지고. 이들을 모두 흡수한 내 의지도 점점 강해짐을 느낄수 있다. 지(志)라는 것은 과연 외적(外的)인 것인가 혹은 내적(內的)인 것인가? 그것은 외적인 물체에 존재하나. 혹은 물체에서 발(發)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이와 같은 사고(思考)의 과정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심주는 자신의 명상과정과 예술행위을 직접 연결시키지는 않았으나. 정신수양과 그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문인화 정신과 외계(外界)와 내계(內界)의 일치를 꾀하고 거기서 우주의 질서를 찾았던 당시의 신유교(新儒敎) 정신의 일치를 화제(畵題)속의 글과 그림에서 표현하였다. 그의 서예체는 힘있고 활달한 북송의 서예가 황정견의 글씨체를 본받았다. 글의 내용. 글씨체. 그림 모두 심주라는 인간과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가 : 왕불(王紱) 아호 : 우석(友石) 제목 : 산정문회도(山亭文會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129.5 x 51.4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왕불은 강소성 무석 사람으로서 자는 맹단(孟端). 호는 우석(友石) 또는 구룡산인(九龍山人)이라 하였다. 1376년 거인(擧人)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북쪽변방에서 고생하다가 1400년경에야 남경으로 돌아와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보냈다. 1403년경에는 문연각(文淵閣)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묵죽과 산수로 유명했으며 주로 원 사대가 의 양식을 답습하여 오파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 그림은 영각갑신(永樂甲申). 즉 1404년의 기년작으로 왕몽 양식에 따른 산수화이다.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전경의 초정에는 시원한 산속의 경치를 즐기며 시문으로 우정을 돈독히 하는 선비들의 풍류를 묘사하였다. 왕몽산수화에서 흔히 보이는 꽉찬 구도와 가늘고 동적인 우모준(牛毛皴)을 사용하였으나 왕몽 그림보다는 차분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준다.

작가 : 오진(吳鎭) 제목 : 죽석도(竹石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90.6 x 42.5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오진은 원 사대가 중 가장 묵죽을 많이 그린 사람이다. 그의 묵죽화는 1338년작인 고절능운(高節能雲)만 제외하고는 모두 대기 감각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서예적 필치를 강조한 그림이다. 이 죽석도는 태점으로 덮인 부드러운 바위. 앙상한 두 그루의 키큰 대나무와 그 옆에 나지막이 자라는 짧은 몇 개의 어린 대. 그리고 바위 위에 다섯 줄로 쓰여진 관지로 이루어진 간단한 구도를 보인다. 바위와 대나무 사이에는 수평으로 그어진 엷은 먹의 붓자국이 지면을 형성할 뿐 그 밖에는 배경을 이루는 아무런 요소도 없는 쓸쓸한 그림이다. 몇 개 안되는 대 나뭇잎들은 죽간에 비해 너무 커 보여 마치 유령이 손을 뻗치고 있는 듯 괴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지의 내용을 간추리면. 북송시대의 두 묵죽화가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의 진작은 극히 드물며. 오진 자신은 선우가(鮮于家) 소장의 진작을 보고 그 진수를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필력이 부족하여 그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는 한탄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쓸쓸한 분위기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인장은 매화암(梅花盦)과 가흥오진중규서화기(嘉興吳鎭仲圭書畵記)로 오진 그림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들이다.

작가 : 보명(普明) 제목 : 난도(蘭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106 x 46 cm 소장 : 일본 황실
해설 : 보명은 설창(雪窓)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묵란으로 유명한 원대의 선승(禪僧)이다. 그는 강소성 송강(松江) 출신으로. 북경에 가서 원 조정에 그림을 그려 바치기도 하였으나. 후에 다시 소주(蘇州)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가 난보(蘭譜)를 썼다는 기록은 있으나. 지금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고 부분적 인용에 의해 그 일면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그림은 원대에서 비교적 과소평가되었었으나. 그가 원초(元初)의 정사소(鄭思消) 이후의 가장 유명한 묵란화가 임에는 틀림없다. 이 그림은 일본 황실 소장의 보명 그림 네 폭 중의 하나이다. 비스듬히 위로 뻗친 바위 위에는 잎이 큰 대나무가 기세좋게 뻗어올라 하늘을 찌르는 듯 하며. 그 아래로는 잎과 꽃이 무성한 난초가 거꾸로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을 하고 있다. 대나무의 직선적 필치와 난엽(蘭葉)의 유연한 곡선. 그리고 화면 상.하부의 긴장과 이완의 변화는 각각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작가 : 여기(呂紀) 제목 : 초화야금도(草花野禽圖) 언제 : 明 재료 : 족자 종이에 먹과 채색 규격 : 146.4 x 58.7 cm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이 작품은 유연한 필치와 고상하고 부드러운 색채로 가을 숲속의 새들을 매끈하게 묘사한 것이다. 화면 오른쪽에서 나와 휘어져 높이 올라간 세 줄기의 야생수수가 쌍구법(雙鉤法)으로 그려졌고. 그 아래쪽에 큰 꿩 한쌍이. 위쪽에는 작은새 세 마리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조를 사용했으나. 장끼의 눈과 꼬리. 산열매 등에 점점이 찍혀진 붉은 색은 화면의 생기를 더해 주기에 충분하다. 관지는 없고 위쪽에 심주(沈周)의 제찬이 있는데. 가을 풍경을 나타낸 화면에 춘풍각유시재락(春風各維時哉樂)이라는 구(句)가 있어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많다.

작가 : 왕면(王冕) 제목 : 묵매도(墨梅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55 x 58 cm 소장 : 오오사카 마사키미술관
해설 : 왕면은 절강성(浙江省) 제기(諸曁)출신으로 자는 원장(元章). 자석산농(煮石山農). 회계외사(會稽外史) 등 여러가지를 썼다. 그는 원말의 오태소와 더불어 묵매화로 가장 유명하였으며 현존하는 그의 작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그림은 그의 묵매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S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곡선을 이루는 매화가지에 활짝 핀 꽃송이가 화려하게 가득히 달려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개의 가느다란 잔가지 역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어 반복과 리듬의 음악적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이들 탄력있는 필선은 노간(老幹)의 비백(飛白) 필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왕면 자신의 제시와 관기(款記)가 있어 이 그림이 1355년 작품임을 알수 있다. 왼쪽아래에는 왕원유(王元裕)의 1359년(至正己亥) 관기가 있다.

작가 : 오태소(吳太素) 아호 : 송재(松齋) 제목 : 묵매도(墨梅圖) 언제 : 元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16 x 40.3 cm 소장 : 일본 개인
해설 : 오태소는 절강성 출신으로. 호가 송재(松齋)라는 사실 이외에 그의 생애에 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중국회화사상 가장 방대한 매보(梅譜)인 송재매보(松齋梅譜)의 저자 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원대에 묵매화로 유명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남은 몇 점 홴풔?그의 묵매화는 모두 높은 수준의 필치를 보여 그의 묵매화가로서의 자질을 과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역시 원말의 묵매화가인 왕면(王冕)의 그림처럼 그 당시 묵매화의 특징인 화면을 휩쓰는 듯한 뒤집힌 s자형 곡선을 한 매화 한가지를 그렸는데. 왕면 그림처럼 꽃이 많이 달리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럽고 청초한 맛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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