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988년 8월호]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2) 성녀 모니카
① 가난한 이 동정하신 ‘경건한 자모의 거울’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자녀가 부모 속을 썩이는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가. 부모 뜻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귀가 막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가.
만약 자녀 때문에 맘 고생 심한 부모가 있다면 함께 모니카 성녀(Sta. Monica. 축일 8.27)를 바라보자.
요안나 샹탈이라는 과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품행이 방정치 않은 아들 때문에 걱정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음성이 들려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8편을 읽어라!” 책을 읽어보니 모니카 성녀의 이야기가 있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모니카 성녀는 수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했고, 결국 아들의 회개를 이끌어 냈다는 기록이었다.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열심히 수덕에 힘써 대성인이 된다. 요안나는 이에 탄복하고 노력을 하며 성녀 모니카를 본받았다고 한다. 물론 요안나의 아들 또한 회개를 하고 올바른 길을 걸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모니카 성녀를 교회는 경건한 자모의 거울이라고 부른다. 성녀 모니카는 332년 아프리카 북쪽 타카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명문 출신이었으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어린 모니카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착하고 온순한 아이였다. 특히 기도를 위해 성당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특히 병중에 있는 빈민에게는 따뜻한 동정의 손을 펴 가끔 자신이 먹을 것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때도 있었다. 또한 그녀는 용감스런 순교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누가 보아도 동정으로 일평생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야말로 모니카에게 적합한 성소였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를 결혼시키려고 결정했고, 그녀는 온순히 부모의 뜻에 따랐다. 상대자는 가톨릭신자가 아닌 이교인이었다. 이름은 파트리치오다.
남편은 가난한데다 나이도 많았고,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의 한량이었다. 처음에는 젊은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변해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 그것만으로도 모니카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어머니도 매우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사에 모니카를 괴롭혔다. 아직 나이어린 모니카로서는 이 모든 것이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니카는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남편과 어머니를 회개시키고, 신앙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언제나 온순하고 친절하게 상대방을 대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흉을 보거나, 헐뜯어 말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괴로워도 얼굴에 짜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가장 먼저 시어머니가 변화됐다. 시어머니는 그녀의 한결같고 순결한 태도에 감복해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였다. 남편 파트라치오도 모니카의 고결한 삶에 감명을 받았고, 차츰 신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더니 결국 세례를 받고 신심 깊은 신자가 됐다. 당연히 난폭한 성격도 고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태도도 변화됐다.
이후 모니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제 모니카는 세 자녀를 낳았다. 둘째 아들 나비지오와 셋째 딸 페르페투아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늘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장남 아누구스티누스는 달랐다. 장남은 불효자였다. 그는 나쁜 행실로 오랫동안 어머니 모니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장남의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질은 어린 시절부터 나타났는데, 학창시절부터 이미 향락에 빠져 살았다. 공부는 잘했지만, 윤리적으로는 타락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가톨릭신앙이 아닌 이단 마니교에 심취했다.
어머니 모니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점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이대로 나간다면 아들의 앞길에는 멸망과 절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 파트라치오가 죽었다. 모니카는 가사를 비롯해 집안의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14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3) 성녀 모니카
② 진리를 위해 평생 외길 걸으셨던 성녀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동은 점점 더 어머니의 뜻과는 멀어져갔다. 오직 재물과 향락의 늪에 빠져 살았다. 지식을 쌓은 공부도, 오직 세속에 대한 관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니카 성녀는 아들의 품행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절대로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성녀는 그럴수록 오히려 부드러움으로 아들을 대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단순한 청원기도가 아니었다. 성녀는 아들의 죄를 대신 보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아들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고행을 자처했다. 가난함 중에서도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았으며, 항상 이웃 사랑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니카 성녀는 주교님을 방문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런 성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둔 아들은 결코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성녀는 주교의 말을 천상으로부터 듣는 대답으로 생각했다. 그래 더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며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인내심을 갖고 기도하기로 했다. 이후 성녀는 아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갔다. 아들이 머물던 카르타고에도 갔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까지 갔다. 모니카 성녀는 이렇게 아들의 회개를 위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녀 모니카의 정성은 곧 열매를 맺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잠시 밀라노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마니교도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박할 거리를 찾기 위해 성당에 들러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직접 방문하기에 이른다. 논쟁에 있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명쾌한 논리에 결국 두 손을 들게 된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말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됐다. 분명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동은 받았지만,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지만,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 세속적 문제 때문에 내적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어느날 정원을 산책할 때였다. 하늘에서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무심코 펼쳤다. 그곳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
이때가 서기 386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해 8월 교수직을 당장 그만둔다. 그리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Alypius)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교리를 받고,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 주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의 은수자들의 전기를 읽게 되고 그 고행의 생활에 매우 감동되어 “이 사람들이 한 것을 어찌 난들 못할 것이냐!”하고 부르짖었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한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자 주교, 더 나아가 성인이 된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라고 갈망하던 것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성녀는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 행복한 마음을 안고 마침내 성녀는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 였을까. 귀향길에서 중병에 걸린다. 아들 아우구스티누스가 급히 달려왔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의 품 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387년 5월 4일,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모니카 성녀를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상념은 투명함과 순수함이다. 규율을 엄격히 지키는 엄정함이 아니라 맑고 깨끗하고 밝은 순수한 영혼이 떠올려진다. 아들을 위해 평생 동안 눈물의 기도를 바쳤던 성녀, 진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그 진리를 위해 평생동안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던 성녀. 그 열정과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떻게 가능했을까.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2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4) 성녀 모니카
③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본보기로 사신 성녀
모니카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제 발로 성당을 걸어서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분명 어머니가 성당에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성당 다니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다른 많은 것들이 파생되게 된다. 모니카 성녀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이웃도 도와주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환경만 잘 조성해 주면, 저절로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 하느님과 쉽게 합치되고 이웃과 융화되며,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그렇게 형성되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는가 하는 문제다.
모니카 성녀의 삶을 자세히 살펴 보자. 성녀는 성인(成人)이 되어 결혼을 한다. 그런데 남편이 문제다. 남편은 아내와 힘을 모아 좋은 가정을 꾸리고,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를 완성해 나가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시어머니도 만만치 않았다. 하는 일마다 어깃장을 놓고, 잔소리다.
남편도 밖으로만 겉돌고, 시어머니는 늘 달달 볶고…. 보통사람들 같았으면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는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잘 형성시켜온 내면적 성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있다. 작은 바람에 휘청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를 형성시키시는 신적 신비, 삼위일체 하느님께 영적 갈망을 드리게 된다. 이렇게 계속 기도하다보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이 생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그 확고함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이 어떻게 확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니카 성녀는 이런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니카 너에게 맡긴다. 내가 너에게 남편과 시어머니를 보낸 것이다. 너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니카 성녀는 끊임없이 기도를 바쳤다. 삶의 모범도 보였다. 이렇게 되면 가정의 팽팽한 긴장이 풀어지고 경직성이 깨진다.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남편과 시어머니가 회개하고 신앙으로 돌아왔다. 평화는 남을 탓하고 공격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간직한채 받아들일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은 그치지 않는다. 이 시점에 아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 후 10년 넘게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시달리다가 이제 좀 편안하게 사나 싶었는데 이제는 아들이 말썽이다.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참담했다. 아들은 부모님 뜻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았다. 막 살았다. 마니교라는 이단과 여자에 푹 빠져 살았다. 성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늘 아들 옆을 지키며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바오로 사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빛이 아들에게 내렸고, 결국 아들은 회개했다. 게다가 교회의 위대한 성인(聖人) 반열에 오른다. 여기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 열망이 큰 역할을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가 모니카 성녀 54세 때다. 모니카 성녀는 이렇게 아들의 회개를 보고 1년 후 편안한 마음으로 선종한다.
모니카 성녀의 삶을 보면 인간적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결혼 후 남편과 시어머니 때문에 고생했고, 그 고생이 그칠 즈음 아들 때문에 또 맘고생을 해야 했다. 그 기간이 34년이었다. 그 기간을 이겨낸 것은 확고한 신앙과 부드러움이었다. 마음안에 심어 있는 확고함과 부드러움의 성향은 하느님의 뜻을 이뤄내는 도구다.
반형성적 삶을 살아가던 남편과 시어머니는 모니카 성녀를 통해 형성적 삶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또 모니카 성녀가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성인이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모니카 성녀의 내면 형성을 준비시키고 완성시켜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늘 내면에 영적 힘을 강하게 해 주셨고, 모니카 성녀는 이를 경외와 순명과 의지로 받아들이셨다.
모니카 어머니를 위해서 박수라도 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모니카 성녀처럼 살 수 있다. 하느님은 이미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모니카 성녀처럼 살 수 있도록 형성시켜 놓으셨다. 우리가 마음안에 심어 있는 좋은 성향들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않아서 못할 뿐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28일]
[화학에게 길을 묻다]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
황영애
지난 겨울은 집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어찌나 추운지 그저 웅크리고 지낼 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이 내리면 가끔씩 낭만에 젖어들기도 했건만, 이번에는 부대로 쏟아 부어대듯 그것도 자주 내리니 어서 염화칼슘을 뿌려서 통행이나 편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쉽사리 얼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그런데 염화칼슘을 뿌리면 왜 얼음이 빨리 녹을까요? 또 왜 하필이면 소금이 아니라 염화칼슘일까요? 값이 더 싸서일까요? 가격을 알아보니 소금보다 염화칼슘이 더 비쌉니다. 그러니 가격은 이유가 아닙니다.
그건 염화칼슘이 섞였을 때 물의 어는점을 낮추는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대기압에서 순수한 물의 어는점은 섭씨 0도인데 물에 고체 같은 비휘발성 물질이 녹게 되면 어는점이 0도보다 아래로 내려가서 영하에서도 잘 얼지 않게 됩니다. 이를 용액의 ‘어는점 내림 효과’라 합니다.
용액 속에 녹아있는 물질의 농도가 크면 어는점은 더 많이 내려갑니다. 소금(NaCl) 의 경우에는 물에 녹으면 한 분자에서 2개의 이온, 곧 나트륨이온(Na+)과 염소이온(Cl-)이 생성됩니다.
그에 반해, 염화칼슘(CaCl2)은 소금보다 물에 더 잘 녹기도 하려니와 칼슘이온(Ca 2+) 1개와 염소이온(Cl-) 2개를 가지고 있으므로 한 분자가 녹아도 3배의 농도가 되는 셈이어서 최대한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도 얼지 않게 됩니다. 참고로 소금은 어는점을 영하 15-20도까지 낮추므로 지난 겨울 같은 추위의 눈을 녹이기는 어렵겠지요?
여기에 염화칼슘을 제설 작업에 사용하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물질의 조해성(潮解性) 때문입니다. 조해성이란 고체가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액체가 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이렇게 염화칼슘은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염화칼슘 수용액이 되고 이 수용액은 얼음을 만나서 녹입니다. 이 녹은 물이 염화칼슘 용액과 합쳐지게 되면 어는점이 내려가 다시는 얼지 않게 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용액은 어는점 내림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끓는점 오름 효과도 있습니다. 끓는다는 것은 대기가 누르는 압력과 액체에서 올라가는 증기압이 같아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용매에 고체 물질이 섞이게 되면 그 액체의 증기압이 줄어들게 되니 끓게 하려면 더 높은 온도로 가열해서 증기의 압력을 높여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물에 어떤 물질을 넣어 녹이면 쉽사리 얼지도 않고 또 끓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의 냉각수로 사용하는 부동액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부동액의 주성분은 에틸렌글리콜이라는 화합물인데, 여기에 부식방지제 등 다른 화합물을 첨가함으로써 여름에는 폐쇄된 용기 내의 액체의 압력을 낮춰주고 겨울에는 얼지 않게 해줍니다.
마음이 얼어붙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라는 물 속에 기도라는 물질을 충분히 넣어 녹이면 용액이 된 우리의 마음도 쉽사리 냉혹해지거나 분노로 끓어오르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과 아주 많이 닮아있지요? 기도는 사랑의 표현이며 이웃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이렇게, 어떤 모욕을 당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결국은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므로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달랠 수 있고, 아무리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기에 마음이 얼어붙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인내한 어머니!’ 하면 누구보다도 모니카 성녀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다”라는 책에 실린, 자식의 회심을 위해 30여 년을 기도한 성녀의 생애를 전하려 합니다.
그녀는 이교도인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하면서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시작됩니다. 난폭하고 방탕한 남편에게 모니카는 관대함, 올곧음, 충실함, 품위 있는 언행으로 18년간의 결혼생활을 일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죽기 전에 회심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모니카는 남편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맏아들인 아우구스티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교도 명문교에 입학하였고 독서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때 아들은 이미 어린아이의 껍질을 뚫고 나왔음에도 그 내적 혼란을 철저히 숨겼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순진무구하여 죄에 물들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육체의 쾌락이 아우구스티노를 이미 삼켜버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충고는 모자 사이의 틈을 벌어지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알면서도 도리어 아들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더 높은 학문에 정진시키려고 카르타고의 수사학(修辭學)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곳에서 연애를 시작하여 18세에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잘못을 하고도 홀로 남은 어머니의 너그러움을 믿고 가족 부양 문제까지 떠맡겼으니, 속수무책의 아들로 말미암은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모니카 축일을 ‘어머니 눈물의 축일’이라 부를까요.
인생길에서 폭설을 만났을 때
당시에 아들은 선과 악의 이원론, 곧 사탄도 하느님 못지않은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육체적 감각과 물질적인 것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오류에 빠졌던 것이지요. 또한 성경이 수사학적으로 미려한 문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의 이론을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과 비교했을 때 자연현상의 계산에서 많은 착오를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기대했던 마니교 주교인 파우스투스의 연설을 듣고는, 그의 연설은 아름답지만 빈 꽃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떠나기로 했던 어머니를 속이고 아들은 몰래 로마로 떠났고, 그런 배신에도 어머니는 아들 사랑하기와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후에 어머니는 기어이 로마로 가서 아들과 만났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마니교도들과 어울렸고, 회의론(懷疑論)을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이때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를 만나 강론을 듣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배우려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참석하면서 편견이 무너지고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와 ‘정신’이란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평이한 문체로 기술되어 있지만 심오한 가르침을 내포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비참한 인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음을 고백한 바오로의 서간(로마 7,18-25 참조)이 그를 가장 감동시켰습니다.
육체의 죄로 고통 받던 그는 그 말씀에서 경건한 얼굴과 참회의 눈물, 그리고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 인간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욕망을 위해 육신을 돌보지 말라는(로마 13,14 참조) 말씀으로 법열이 넘쳤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아들을 가톨릭으로 귀의시키려고 모진 고통을 인내했던 모니카에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셨습니다.”(시편 30,12)라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뒤에 아우구스티노가 ‘은총의 박사’로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은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모니카 성녀야말로 인생길에서 뜻밖에 폭설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분 덕분에 막막한 인생길에서 염화칼슘보다 더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식 문제로 가슴 아파하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모니카 성녀가 띄우는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기도와 믿음의 힘이 아닐는지요.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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