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실규명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사건
청원군 오창면 성산 1구에 살던 26살 청년 김상근씨는 인근 마을 사람 400여 명이 사살됐던 양곡창고에서 시신에 덮여 생존했던 그 순간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사건은 6.25 발생 한 달여 뒤인 7월 10일경 청원군 오창면, 진천군 문백면, 진천읍 사석리 등지에서 김씨 등 민간인 370여 명이 좌익활동 세력으로 몰려 양곡창고에 감금된 채 마을에 들이닥친 국군에 의해 모두 학살됐다는 것이다.
오창 양곡창고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 김상근(82)씨는 16일 청원군 오창면사무소에서 열린 진실규명을 위한 증언대회에서 한 맺힌 56년의 세월에 대해 털어 놓았다.
김씨가 기억하는 당시 양곡창고 학살현장은 유태인 학살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옥'과 다름없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좌익 활동 경력이나 사상과는 전혀 관련없는 농민들이 어떠한 법적 절차와 재판도 없이 무차별 학살됐기 때문이다.
"마을주민들에게 비료와 농자재를 배급해준다고 보도연맹단체에 가입하라고 하더군요. 며칠 뒤 경찰에 의해 끌려가 양곡창고에 4~5일간 감금됐습니다. 마을을 찾은 국군들이 총과 수류탄으로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몰살했습니다. 저는 시신에 덮여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김씨 처럼 양곡창고에 감금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진천과 오창지역에 4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400여 명 중 30여 명이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희생자 노창우씨 사위인 한성종(68)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간 집이 많았다. 장인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협박에 못이겨 보도연맹에 가입했으나 며칠뒤 경찰에 의해 오창 창고로 끌려간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지난해 5월 3일 '과거사법'이 제정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으나 아직까지도 생존자를 비롯한 희생자 유가족들은 한 맺힌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결정사안]
1950년 6월 30일-7월 8일 충북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일대에서 400여명의 주민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헌병대와 군인, 지역 경찰 및 의용소방대원에 의해 소집-구금 되었고, 1950년 6월 30일 진천지역에서 10여명이, 1950년 7월 10일 오창지서에서 10여명이 주동자 및 도주자라는 이유로 사살당했으며, 이후 1950년 7월 11일 새벽 오창창고에 구금된 나머지 구금자 중 최소 304명이 6사단 19연대 헌병 및 수도사단 소속 군인에 의해 총격 살상당했고, 그 몇 시간 뒤 오창창고 인근에 발생한 미군 폭격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1950년 6월 30일에서 1950년 7월 8일 사이 당시 충북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일대에서 400여 명의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등의 이유로 헌병대와 군인, 지역 경찰 및 의용소방대원 등에 소집되어, 오창양곡창고, 오창지서,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등에 구금되었다.
2. 1950년 6월 30일경 진천지역에서 보도연맹원 중 주동자로 분류된 10여 명이 진천군 진천면 성석리 소재 할미성에서 총격 사살당했다.
희생자 중 홍백학외 2명과 생존자 2명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가해자는 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경찰로 판단된다.
3. 1950년 7월 10일경 오창지서와 오창양곡창고 구금자 중 주동자 및 도주자로 분류된 10여 명, 도주자 1명과 군인 가족인 구금자 3명이 오창지서 창고 및 오창양곡창고 내외에서,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희생자 중 박승하 외 5명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가해자는 수도사단 헌병대 등의 순인들로 판단.
4. 1950년 7월11일 새벽, 오창양곡창고에서 최소 304명의 구금자들이 창고 앞을 지나가던 헌병대와 군인에 의해 총격 살상당했고, 그 몇 시간 후인 1950년 7월 11일 08:30분경 미군 전투기에 의해 창고 인근이 폭격을 당해 살아남은 사람도 마저 피해를 입었다.
희생자 중 전종설 외 213명의 현장 사망자와 함께 최영복 외 89명의 부상자를 포함한 현장 생존자의 신원이 확인 되었다.
가해자는 제6사단 19연대 헌병대 등의 군인들로 판단.
5. 조사결과, 사건과 관련하여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수는 총 223명, 현장 생존자 수는 총 92명이며, 신원이 확인된 피해자 수는 총 315명이었다.
6. 희생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 가입자였으나 일부는 가입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신청인. 참고인. 증언에 의하면 보도연맹 가입자라 해도 강제 가입자, 또는 단순 추종자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희생자들은 희생 당시 비무장-무저항의 상태였다.
7. 비교전 상태에서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살해한 행위는 당시의 실체법이나 절차법을 위반한 행위이며 국제인도법에도 위반한 행위이다.
또한, 이는 헌법에서 규정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등의 이유로도 침해할 수 없다.” 라는 법치국가의 최소한 원칙도 위반한 행위로 판단된다.
8. 이 사건은 비록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국군이 급히 후퇴를 하던 급박한 상황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나, 비무장 민간인을 적법 절차 없이 소집-구금하고 임의로 사살한 가해 군.경에게 책임이 발생하며 이런 행위를 묵인하고 비호한 국가에게도 책임이 발생한다고 판단된다.
9.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 및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아울러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