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자 시집
별 하나 꽃불 피우다
책머리에
금년 8월이면 등단한지 1년이 된다. 여기 수록된 시들은 등단을
전후하여 쓴 시들로 시창작에 있어서 첫 스승이신 성찬경 교수님
의‘시란 영혼 구조의 드러남’이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아 맑
은 영혼을 담으려 노력하며 쓴 것들이다.
아울러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 시절, 문학회에서 활동하며 즐겨
암송하던 유치환님의 시 <바위, 생명의 書> 등에서 시맥이 형성
되어 대부분 주지시다. 목숨만큼 소중한 한편, 한편의 시 속에
천둥쳐도 무너지지 않을 [삶의 기둥 하나] 박으려 최선을 다 했다.
이제 21C 시법에서 요구하는 이미지화에 좀더 충실하고자 한다.
백지 위, 고독한 시의 길, 그러나 태양빛은 눈이 시리고 고적한
달빛마저 호사스럽고 실빛 별 하나면 늘 절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 별 하나가 되어 꽃불 피우도록 이끌어주신 성찬경 교수님과
졸시를 귀한 평설로 빛내주신 박진환 교수님께 깊은 감사드리며
예리한 시평으로 발전을 도와준 동인, 문우들, 오늘이 있기까지
아낌없는 격려로 용기를 주신 부모님, 가족 외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2001년 8월 짙푸른 여름 날
제1시집을 상재(上梓)하며
김 윤 자
차례
제1부
시를 위한 소나타(sonata)
1.명주詩 한꾸러미
2.인동의 꽃
3.백화점 단상(斷想) 1
4.백화점 단상(斷想) 2
5.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
6.항아리
7.별 하나, 꽃불 피우다
8.난(蘭).꽃.향(香)
9.하늘 보기
10.오답 속의 정답
11.산(山) 바라기 새
12.수리부엉이
13.#(샾)보다 b(플랫)의 음이 아름다운건
14.그물 벗어난 은빛 물고기
15.설원을 걷는 독수리
16.詩 사랑
제2부
삶의 등마루에서
17.제비꽃
18.고무신
19.나이테의 벽
20.신문
21.봄날, 오후의 서정 1
22.봄날, 오후의 서정 2
23.봄날, 오후의 서정 3
24.꽃을 터는 손
25.고목
26.안개비
27.비탈에 선 모나무의 절규
28.하얀 탑
29.못
30.철없는 강아지
31.만리포 가는 길 소나무는
32.감은 익으면서 큰다
33.단풍 이불
34.가을 장미
35.가을산
36.겨울산
37.겨울새
제3부
생(生)을 위한 질주
38.익어가는 연습
39.백지 위에도 길은 있다
40.날개 달린 꽃
41.자동차 1
42.자동차 2
43.자동차 3
44.자동차 4
45.자동차 5
46.자동차 6
47.자동차 7
48.자동차 8
49.자동차 9
50.자동차 10
51.섬은 바다를 품는다
52.고무나무 수난기
53.징검다리
54.전철, 세월 거스러오르는
55.방 하나 있으면
56.과일을 고르며
57.등걸나무 비탈길 오르다
58.돌멩이
제4부
과거와 미래의 조우(遭遇)
59.심봉사 다리 건너기
60.식영정(息影亭)
61.대나무
62.하늘 가까이에서 「나」는
63.수직선 레일 위로 세상이 달리다
64.물이 빠지고 있어요
65.수덕사
66.아름다운 유월, 눈물이 납니다
67.사랑 1
68.사랑 2
69.사랑 3
70.사랑 4
71.사랑 5
72.우산 꼭지
73.삼막사 스님
74.모자이크
제1부
시를 위한 소나타(sonata)
명주詩 한 꾸러미
김윤자
열일곱 살 문학 소녀가
詩를 먹은지 삼십 년
누에라면 명주실을
수천 꾸러미
풀어 내었을 텐데
나는 이제 겨우
詩 한 꾸러미 풀어내려
詩의 눈 뜨고
詩의 입 벌리고
이 세상 詩의 마당에 나왔다.
누에는 뽕잎 먹고
명주실 뽑아내는데
나는 글을 먹고
생각을 먹고
명주詩 뽑아낸다.
인동의 꽃
김윤자
봄 햇살에 움돋이한 나의 싹
숙망의 몽우리 맺으려 애끓는데
아직은 여린 나의 몸.
짙은 초록빛이 돌 때까지는
사바나 초원
풍성한 식탁 앞 게으른 들짐승보다
포르티시모로 히말라야 산맥
숨가쁘게 차오르는
독수리의 고뇌를 먼저 배우고 싶다.
그 맹금의 탈 속에
나의 몸 몰아 넣고 시베리아 동토로 간다.
미지근한 땅에서 키운 발바닥으로는
철 지나 솟아오른 꽃대 받칠 수 없어
툰드라 설원
칼날 선 눈발 위 펭귄 걸음을 좇는다.
걷기도 전 날으려는 두 날개
언 가슴으로 끌어 안고 가는
고행의 길, 나는 지금 행복하다.
북극점 빙벽이
보드라운 솜벽으로 보일 때까지 걸어
여명의 하늘 열리면
나의 속살 여물어
인동의 꽃으로 피어나리.
그 때 화포 안 꽃자리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들어서련다.
백화점 단상(斷想) ·1
김 윤 자
백화점 진열대에
내가 상품으로 오른다면
어떤 품목으로
얼마의 가격표가 붙을까
과일, 야채, 생선, 의류?
몇 천원 …… 몇 백만원?
어떤 품목이든, 얼마의 가격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누군가, 나의 전신에 새겨진 싯귀 중
단 한구절이나마
마음에 들어 선택해 준다면
때가 지나, 철이 지나
할인가로 붙어 누워도 좋으리.
나의 혼, 하나
스러지지 않고 있다가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
곱씹히어
詩의 향(香)을 피울 수만 있다면.
백화점 단상(斷想) ·2
김 윤 자
백화점 식품 매장
국경 넘어온 과일들 합수하여 만수위다.
품계는 철저하여 등급이 매김된 자리에
머리 조아리고 들어섰는데
지난 가을, 겨울
토종의 귀빈으로 상석에서
세인의 뭇사랑 다 받던 사과
캘리포니아(California)산(産) 오렌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봄날, 외진 나락에 홀로 앉아
쭈그러들어 종창난 몸
애오라지 빈자의 손길이나마
목 늘여 기다리는데
허방 짚는 하루하루 막이 내린다.
얼마나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까
철 지난 저 사과
설 땅 잃은 저 사과.
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
김윤자
솔수펑이 사이 산수유
이파리가 꽃보다 늦게 나오는 건
꽃만큼 아름다움 선사할 자신이 없어
꽃등 뒤에 숨었던거래요.
글쎄, 귓속말로….
한 장의 책갈피 속 봄 언저리
목마른 그리움만 피우다가
안개 지듯 산화(散花)한 저 꽃가마
짙은 웃음 뒤에 회한만 떨구었는데
꽃 으스러져 웅숭깊게 패인 자리
이슬 물고 나와 새살 돋워주는
애순의 가쁜 숨결 들어 보세요.
놀라지 않게 사알짝 다가가
파래진 몸 아랑곳없이
벌써, 염천(炎天) 가리어 주려
쭉쭉 펼치는 저 차양 손바닥
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
항아리
김윤자
깊은 산 속 나무 곁에서
겸손으로 다져진 흙을 파다가
가슴 속에 항아리 하나 빚어 놓고
사랑을 피우고자 장미꽃 수를 놓으려니
검은 오만이 손끝을 흔들어
고운 꽃잎을 다 털어 버렸다.
떨어진 사랑 꽃잎 향기를 주워
항아리 가득 채워 그윽이 풍기려니
못난 자아가 발길질하여
공 든 항아리마저 깨어 버렸다.
별 하나, 꽃불 피우다
김윤자
등불없는 길 넘어 세월 날아간 자리
연둣빛 풀떨기 젊음 수혈하는 봄마루
해묵은 씨앗 고즈넉이 나와 앉았다.
책상 서랍 뒤켠 이름없이 숨어
갈꽃 지고 무서리 내리던 날
싹도 틔우기 전 시들까봐
가슴 속 잉걸불 지펴 겨울 사르고
훈기 모아 키워온 파아란 두뇌.
청솔에 꽃 피워 봄을 부르니
봄빛은 머리 위에 서렸는데
말라 오그라진 혈관의 여린 맥
씨눈의 빗장 풀지 못함에 애닯다.
애끊는 속살의 몸부림에
천심(天心)은 문 열어 단비 내리시고
물너울 지어 심장까지 스민 봄물
우지끈 등 갈라 발아케 하니
잎눈 벌써 하늘빛 자태다.
암울한 터 겹겹 어둠 헤집고
예까지 나왔음에
찰흙 같은 밤 이제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빛의 연속이다.
오히려 작열한 태양빛 눈이 시리고
고적한 달빛마저 호사스러워
무명실 다리(橋) 늘이는 별 하나면
밤마다 심지(心志) 엮어 꽃불 피우리라.
난(蘭)·꽃·향(香)
김윤자
난(蘭)
지조(志操) 굳은 선비이어라.
인고의 세월 초개(草芥)로 접고
동창(凍瘡)에 스미는 햇살 한가닥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뜻 높이 솟아라.
꽃
겨울을 가른 학(鶴)이어라.
잔설(殘雪)이 채 지기도 전에
긴 목을 늘이고 품어 올린 기상은
창공(蒼空)에 뜨는 천년의 날개이어라.
향(香)
청운에 서린 옥향(玉香)이어라.
천일(千日)을 피워도 마르지 않을
하늘과 맥(脈)을 잇는 당찬 기운이
둥우리 골마다 서리서리 피어 올라라.
하늘 보기
김윤자
세상을 열 손가락으로 세어 볼 때는
하늘이 머리 위에 있어
손만 뻗치면 잡을 것 같더니
세상을 주판알로 튕겨 볼 때는
하늘이 산 위에 있어
산에만 오르면 잡을 것 같더니
세상을 계산기로 두들겨 볼 때는
하늘이 구름 위에 있어
비행기만 타면 잡을 것 같더니
세상을 컴퓨터로 떠 볼 때는
하늘이 방안에 있어
마우스만 클릭하면 잡을 것 같은데
자꾸만 증발되는 하늘, 하늘이 보이지 않아.
0과 1로 반복되는 디지털 시대
zero 아니면 one, empty 아니면 full
0과 1 사이 그리도 멀까, 하늘은 점점 까마득한걸?
오답 속의 정답
―열린 시대, 무한의 길
김윤자
담쟁이 덩굴
담으로 기어오르라고
담 밑에 심었더니
산으로 올라
하늘에 길을 내고
우주 공간의 유성을 잡길래
모래 벌판으로 기어가
바다에 길을 내고
깊은 바다의 탑을 휘감길래
21세기 컴퓨터에 넣어 물었더니
채점 결과는 정답 처리
내 기준의 잣대로는 오답인데.
거울 속에만 내가 보이더니
돌 속에도 내가 보인다.
지금은.
산(山) 바라기 새
김윤자
빛과 어둠의 경계선 없는 산은
도시 끝에 뿌리 깊게 좌정하여
넓은 품을 열고 있다.
나는 산(山) 바라기 새
푸른 물 출렁이는 도심(都心)에서
두뇌 속 숭어가 큰 지느러미로 나와
태평양 비단길을 꿈꾸어도
산이 그리운 가슴 속 작은 새는
산으로 탑을 쌓는다.
해는 서둘러 도시를 떠나고, 어둠에 잠긴 콘크리트 숲들
수초로 흐느적거릴 때, 나는 날개 접은 목조(木鳥)
도시의 모래뻘에 비껴앉아 유년의 목청으로 산을 부른다.
동트는 새벽이 오면
산으로 가는 길이 열릴거라고, 거기 산에 가면
찢긴 날개 새살 돋아 모자란 깃털 채워질거라고
부스러진 영혼 살아나 숨쉴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밤을 접어 베고 누운
나는 산(山) 바라기 새.
수리부엉이
김윤자
빛이 무너진 곳인 줄 알면서도
시나브로 퇴화되는 날개 추스르며
마른 생목 가지 위에 정물인듯
생인발로 죽창 깔고 앉았구나.
광채나는 눈 하나, 초점 지키려
먼 산에 초록꿈 삽질하여 쌓으며.
빗장이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심상치않은 예감이
산봉우리 송전탑에서 전송될 때
철창은 넘어서는 안되는 벽임을 감지하고
애저녁에 빙옥(氷玉)의 새로 살기로 작심했으련만
창살 틈으로 비껴가는 애증의 세월
속절없이 잃어버린 밤
성숙한 인내로 참으며
싸늘한 달빛에 파르르 떠는구나.
동녘 하늘 붐하게 갈라지면
뭇별은 지천으로 달려와
실타래 빛줄기 풀어 몸을 얽동이고
어김없이 뒤따라 내려오는
뾰족한 햇살은 사정없이 눈꺼풀 쪼아대니
싸한 마음 한자락 기댈 얄상한 바위조차 없어
숫저운 얼굴로 그렇게 면벽하는구나.
목멱산 기슭의 새장 속 수리부엉이
천연 기념물이라는 가문의 명예에 숙연을 끊고.
#(샾)보다 b(플랫)의 음이 아름다운건
김 윤 자
피아노 뚜껑을 열면
흑과 백 88개 계단에
화음의 꽃이 피어오르고
살짝만 건드리면, 音의 요정이
손끝을 타고 나와 촛불을 켜는데
점점 밝아오는 계단에, 열 손가락이
오르내릴 때, 천상의 구름까지 울리는 음은
반박자 넘쳐서 우듬지 위로 고개 든 #음이 아니라
반박자 모자라서 땅 밑 낮은 곳으로 고개 숙인 b음이다.
반음계 내려앉은 b음 속엔
반박자 늦어 날아가지 못한 철새의 울음이 있고
반박자 늦어 익히지 못한 풋열매의 상처가 있고
반박자 늦어 흐르지 못한 시냇물의 여울이 있다.
가슴 반쪽 비워 놓은 b음
미완의 이슬꽃, 승화되어 불 밝다.
그물 벗어난 은빛 물고기
김윤자
어부는 날마다 깊은 물에 그물을 치는데
치어는 작아서 나가고, 성어는 날쌔서 나가고
어부는 다시 넓고 촘촘한 그물을 짜는데
망둥이까지 걸리도록, 새나가지 못하도록
그물 밑으로, 옆으로 용케 새나가는 저 물고기.
아무리 넓은 그물을 던져도, 촘촘한 그물을 던져도
몇 마리쯤 빠져나가는 고기가 있음을 어부는 안다.
세월은 끝없는 그물
내가 한발 나가면 두발 앞서 나가 가로막는 그물.
어부는 이미 날 놓아주었는데 발목을 잡는 그물.
맴을 그리던 범주, 벗어나기 힘든 그 한계 수역
촘촘하고 넓은 그물 안에서
수학자의 이지로 함수그래프를 그리며
날마다 그물을 민다.
영근 비늘을 꿈꾸며, 큰 지느러미의 유영을 꿈꾸며
더 넓은 강으로, 더 깊은 바다로.
그물도 비껴가는 심연의 바다에서
내 영혼 살찌워
산호 숲 밝히는 은빛 물고기가 되리라.
설원을 걷는 독수리
김윤자
길을 이탈한 건 아냐
하늘 아래엔 땅이 있고
그 사이엔 무한대의 길이 있어.
여기는 설원
보이는 건 순백의 눈뿐.
고독한 흰 길에
하늘을 나는 오만을
묻으려 내려온 거야.
공중에서 자란 거친 발톱
여기서 닳아 무디게 만들고.
사자 뒤를 따르며
부스러기 먹이를 줍던 행운
기억 저편 인광에 사르고.
설야
때론 밤이 하얀 걸 알았어.
사각의 틀에 갇힌
단단한 나의 사고(思考)
하얀 밤에 우수수 쏟아져 죽고 있어.
사나운 깃털이 사뭇 울어
열린 저 하늘 길이 그리운 거야.
깃털, 너마저 죽어
빈 몸일 때 날게 해준다고
저만치서 태양은
링거액(Ringer液) 들고 기다리고 있어.
詩 사랑
김윤자
밥보다 네가 좋다.
잠보다도 네가 좋다.
밤새 너와 뒹군다, 동녘 하늘이 붉도록.
예전엔 어설픈 풋사랑으로 만났지만
이젠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다.
바람이 우릴 가르랴.
눈비가 우릴 떼어 놓으랴.
거친 들녘을 갈 때도
험한 산길을 갈 때도 늘 동행한다.
머리 속엔 온통 너로 꽉 차 있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면
폭포같이 쏟아내리는
자음과 모음이 너의 모습을 그려낸다.
예쁜 아가도 되었다가
늠름한 소나무도 되었다가
밝은 태양도 되었다가
굳센 바위도 되었다가
나의 혼까지 빨아들이는 고운 요정
목숨만큼 사랑하는 넌
스러져가는 내 육신 받치는 버팀목이다.
제2부
-삶의 등마루에서-
제비꽃
김윤자
이른 봄 들녘 끝자리
행인의 눈에 띌까
보랏빛 수줍음 물들이어
가슴 열어 핀 꽃.
꽃병에 꽂혀 본 적
화단에 심겨 본 적
없이
봄꽃이라 불리우는
그 한마디에
마음 열어 핀 꽃.
꽃송이 작으니
키라도 컸으면
줄기 짧으니
잎이라도 넓었으면
작음에
숨어 숨어 참빛 발하는
보랏빛 겸손.
고무신
김윤자
신발장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웅크리고 앉아 계시다니요.
한 박자 늦은 걸음이 어때서요.
행여 젊은 눈길이 따갑거들랑
보릿고개 넘으시던 잰걸음 되짚어 보셔요.
시류의 물살 가르고
면면히 이어오는 그 푸른 맥 속에
번뜩이는 예지(叡智)가 찬연한걸요.
진흙탕 속에서도 망가지지 않으셨던.
잠시 굽어질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으셨던.
빠지면 빠질수록, 꺾으면 꺾을수록
더 큰 몸부림으로 튕겨 일어서셨죠.
외세의 가시돋힌 꺼럭, 전신을 옥죄어도
백의민족 하얀 가슴에
몹쓸 터럭 하나 박지 않으셨고
폐허의 잿더미 풀풀 날려 휘감아도
냉혈의 피로 되쏘아 날리시고
서슬퍼런 가난의 깊은 강
나라 기둥 박히지 않은 붕 뜬 징검다리
꾹꾹 누르며 건너오시느라
살이 녹고 뼈가 휘셨군요.
나가시자구요.
청솔바람 고이던 길은 아니어도
연분홍 꽃길은 아니어도
구두 사이로, 운동화 사이로
틈을 내어 나와 보셔요.
밝은 해 아래 열린길
고무신은 나가면 안되나요.
그늘 속에 숨어사는 우리의 혼, 고무신.
나이테의 벽
―구조조정, 오십대의 고뇌
김윤자
사공(沙工)은 말한다.
이 배는 안전하다고.
최신식 설비를 갖추었다고.
절대로 파선되지 않을거라고.
낡은 목선을 철선(鐵船)으로
다시 개조하였고
암석 계곡으로 치닫던 뱃머리
대해(大海)로 돌려 놓았다고.
항구엔 밝은 불이 켜졌고
저멀리 등댓불도 환하여
출항(出航) 준비 완료라고.
다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살아온 연륜이 무거운 사람도
승선(乘船)할 수 있는지 그게 의문이다.
신문
―죄없이 포승(捕繩)줄에 묶여가는 너를 보며
김윤자
하루만 살다 가는데도
할 말을 다 하고 가는구나.
하루만 살다 가는데도
온 세계를 다 알고 가는구나.
하루만 살다 가는데도
뭇 사람의 사랑을 다 받고 가는구나.
하루만 살다 가는데도
미련없이 생(生)을 접고 가는구나.
하루만 살다 가는데도
아무런 원망도 없이 가는구나.
봄날, 오후의 서정 1
김윤자
오랜 산통 끝에
겨울이 낳은 아가, 봄.
뽀얀 눈 뜨고 기어 나와
빈 들을 헤적이니
무지개 꿈꾸던 풀잎들
한 폭의 수채화로 피어오른다.
걸음마 배워 산으로 올라간
개구쟁이, 봄.
마른 나무 사이 헤집고
산마당에 궁그르니
나목의 청구슬 웃음소리
한편의 오페라로 막이 열린다.
봄 아가의 예쁜 짓에
한눈 팔다가
발 한번 헛디뎌 넘어져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봄날 오후, 병아리 햇살이
구겨진 영혼을 다림질 한다.
봄날, 오후의 서정 2
김윤자
길 끝자락에 거꾸로 매달려
피가 하얗도록 몸부림치던 고드름
겨울 지나고 눈 떴을 때
하늘이 땅 되고, 땅이 하늘 된 설움
흐르는 눈물에 몸이 휘감겨
똑바로 일어서지 못한다.
고층 빌딩 앞 난간
버리고 싶지 않은 겨울을
또아리 틀어 깔고 앉아
초점 잃은 눈동자로 배시시 웃는 남자
지하도 시멘트 바닥은 포근한 침대였는데
쏟아져 나온 봄 물결은
그 자리 마저도 빼앗아 간다.
길 모퉁이 담벼락 아래
으등그러진 손으로 더덕을 베껴
봄을 담듯 비닐 봉지에 담는 할머니
진종일 앉아 채워도, 애타도록 그리는
진달래, 개나리는 피어날 줄 모른다.
봄날, 오후의 서정 3
내 뇌리 속 최초의 봄은 감나무에 매달려 밤 늦도록 불꽃 피우던 호롱불,
그리고 가마니 짜던 사그락 소리. 겨울 속에서 봄은 그렇게 열리고….
김윤자
봄이 증발된 마른 벌판에
겨울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가슴 얼리던 시절
살바람 휘덮인 산하에 꽃불 피우려
우리들의 헐벗은 아비가
낮은 자리에 포복하다.
계절은 늑대 같은 겨울뿐
꽃은 죽은 꽃, 가산은 찢긴 황무지
흙탕물 속 낚싯코에 끼니 건지기도 힘든
오연한 세월이 수면 위에 뜰 때
혹독한 빙하 지대에도
전염병은 열꽃 물고 달려들어
생떼 같은 자식 앗아가
긁힌 자리 또 찢겨 빠지는 진창
이승에서 봄을 보지 못하니
저승에서나마 산새와 벗하며 살라고
애장(葬)은 산 곳곳에 그리도 늘어만 갔던가.
세한 속에서도 풀꽃은 피어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겨울 옹벽 사이로
밤 속에 파고든 대낮
감나무에 잠든 호롱불 깨워 걸고
쭉정이 사이로 알곡 건지며
춤추는 불꽃 따라 탕감되는 어둠
성마른 겨울, 사그락 사그락
가마니 짜는 소리로 세워진 봄멍울 솟대
해맑은 꽃그늘 속에 목을 내민 봄빛
그것이 내가 본 최초의 봄이다.
시절은 지금 찬연한 봄
정녕 세상은 가경의 꽃마당인데
해거름 짙은 너럭바위에
적멸의 초연함으로 서성이는
우리들 아비의 점멸된 여령(餘齡)에 봄은 없다.
봄날 오후, 바늘구멍으로 통과된 햇살 한줄기뿐.
봄 속의 겨울, 벙그러진 하얀 목련은
이녁의 가슴에 마지막 묻고 가고픈
한겨울 얼음꽃으로 무섭게 달려 온다.
꽃을 터는 손
김윤자
잠시, 봄자락 붙들고
봉곳 핀 자목련
그 고개를 분지르려는 손
나는 보았다.
보호자로 따라가겠다는
초록 잎 뒤에 떨구고
고운 빛 세상에 깔고 싶어
꽃잎 먼저 나왔는데
한껏, 그 빛 풀기도 전
마른 하늘길 타고
북녘에서 달려온 황사 바람
죄없는 가지 물고, 진종일 늘어지더니
꽃잎을 죄다 휘말아 간다.
저 갈퀴손 무서워
꽃들은 그렇게 빨리 문을 닫는가보다.
사월(四月) ― 사월(死月)의 애련한 꽃들.
고목
김윤자
하늘과 맞닿아야 할 지점에
원래 물이 흘렀고
네 거친 등에는 젊은 의지가 흘러라.
수 천년 엮어 온 자리
바람소리 스치어 가고
나그네 짐 풀어 生을 키우는
제 1 神의 넓은 가슴팍
안으로만 활활 타오르는 정력가
가시밭 길 헤쳐
내 다 해진 의상 기워 입히고
폭우 몰아올 때 부축해 주는
너는 믿음과 사랑으로 모셔오는
나의 어머니
너에겐 5월을 위한 한벌 의상도 없는가.
젊음으로 빚어 온 녹의
심중에 묻어 둔 의지의 빛
주위 잡목이 푸르렀는데
넌 그렇게도 여전히 가난한 몸매이어라
그리도 가난한 삶이어라.
안개비
김윤자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모른 척 외면 하였습니다.
자동차 문을 힘주어 닫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분명 뒤에 두고 왔는데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 있습니다.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차창에 한줌 눈물로 다가와 앉습니다.
비탈에 선 모나무의 절규
김윤자
심곡 기어오른 초록의 젊은이들
메마른 난전에 투혼의 깃발 심박으려
오체가 어룽어룽 물레 돌듯 가뭇거린다.
광고비 돌려준다는 말에
눈 귀 어두운 아낙들만
봉사 단청 구경하듯 멀거니 앉았는데
불덩이에 덴 살점, 또 데지 않으려
잿더미 위에서 뒹구는 비릿한 절규
저게 어디 춤이더냐, 단애의 몸부림이지.
싸늘한 좌절 한자루 봄하늘에 묻으려
치솟는 마이크 목젖이 찢기는 굉음
어디 웃어야 할 노래더냐, 묏봉 피울음이지.
벤처(venture)호(號) 거룻배 한척
안개빛 바다 표류함에 산비(酸鼻)하다.
가시밭 틈서리 물초된 알몸, 포복으로 닳아 얇아진 등피
빈자(貧者)의 소슬한 황야에서
자릿값으로 받은 식용유 한병, 어디 그것이 기름이더냐.
비탈진 땅, 생몰의 경계선에서
밑동 박으려 애끊는 모나무의 진액이지.
하얀 탑
―시부모님 산소에서
김윤자
선산에 우뚝선 하얀 탑
면면히 흐르는 당신의 혼
나는 보았습니다.
산고랑 흙에 피땀으로 빚어낸
벽돌 한단 한단 쌓아 올려
여섯 탑 세워 놓고
천둥치는 날에도 무너뜨리지 않으려
치마폭이 해지도록 감싸 안으시던
어머님 그 넓으신 품자락
금보다 무거운 침묵으로
쇠창살 울 치시어 살바람조차 막아
흔들림없이 받쳐 주시던
아버님 그 크신 손길
산중에 누우시어
생시보다 더 큰 모습으로
지켜 주심에 눈물겹습니다.
탑은 탑을 낳고
그리도 원하시던 빛을 심어
영롱히 피어오르는데
캄캄한 땅 속에서 눈 멀어 솟아오른
고사리만 흐드러짐에 가슴 에입니다.
마지막 돌아서며 드린 약속
대물림하여 주신 작은 탑
청 빛으로 지킬께요.
못
김윤자
내 안에서 피는 가시 하나
강물 깊은 어머니 가슴에
못으로 박히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실못 대못 소나기 내리듯 꽂힐 때
포말지어 밀려오는 파동으로
피울음 멍울꽃 피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내 안에서 뜨는 샛별 하나
어머니 가슴 데우는 화롯불되어
박힌 못 사그라지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혜성처럼 떠올라 밤하늘 빛낼 때
못 진 자리 은하수 꽃무리되어
찬란한 보석꽃 피는 줄
어미가 되어서야 알았어라.
철없는 강아지
김윤자
강아지 한 마리
성균관 문턱에서 얼쩡거리다가
교내로 버젓이 들어간다.
사람들, 모태에서 떨어져
글줄의 코뚜레 뚫느라 십여년
지식의 자루 속 책벌레로 십여년
참선하듯
하얀 밤 수없이 말리고
채석장 마름돌되어
저 문턱 겨우 넘었는데
너는 쉽게 잘도 넘는구나.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온거니?
넌 발이 넷이구나.
달리기를 잘하여
두발로 뛰는 사람들 제치고
그렇게 빨리 들어온거야?
아니면, 너의 주인님 추천으로?
아무리 그래도
화장실 가는 법은 배우고 들어와야지.
철없는 강아지야.
만리포 가는 길 소나무는
김윤자
만리포 가는 길
서산 벌판의 소나무들은
높은 산에서 내려와
낮은 동산에 동아리 지어
바다로 달려간다.
하늘의 드높은 기상
배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바다의 드넓은 도량 배우자고
저렇게 다리가 붉도록
맨발로 뛰어가나보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만난
청마루 수평선에 목을 늘이고
하늘 너머, 바다 너머까지 바라보다
눈이 커진 소나무는
모래 벌판 헤집으며
미래 찾는 아이들에게
바다 저 멀리 나가면
대륙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바다 저 멀리, 하늘 저 멀리 나가면
우주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바다 겉빛만 읽고 가는데
소나무는 바다 속빛까지 읽고 간다.
왜, 소나무가
한겨울에도 하얗게 마르지 않는지
이제야 알 듯 싶다.
만리포 가는 길 소나무는
하늘 끝까지 오르려
몸부림치지 않고
낮은 바다로
땅보다 낮은 곳으로
머리 둘 줄 안다.
감은 익으면서 큰다
김윤자
새파란 감이 주먹만하게 큰 뒤에야
붉게 익는 줄 알았더니
조막만한 새파란 감이
노르스름하게 익어가길래
쪼그만게 벌써 익느냐고, 벌써 물들이면
언제 열매를 키울거냐고 했더니
다음날, 다다음날
감은 익으면서 크고 있었다.
어른들 눈에 새파랗게 보이는
조막만한 아이들
속살 키우기도 전에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것 같아
아이야, 아서라 아서라 했더니
감나무 잎사귀 뒤에 숨어 숨어
익으면서 크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른들 눈에 작아 보이는
아이들이 감의 지혜를 먼저 읽은 것이다.
저렇게 익으면서 크는 아이들이.
단풍 이불
김윤자
나무가 제 몸 살라
비단 이불 만들어
추운 겨울 지내라고
산자락에 깔았는데
사람이 그것도 모르고
좋아라 헤적여 밟으니
단풍 이불 아파서 울고
산자락 추워서 울고.
가을 장미
김윤자
고운 님이 곁에 올 땐
꽃잎만 보라고 가시는 숨기는데
야속하게도 고운 님은
꽃잎은 보지 못하고 가시만 봅니다.
미운 님이 곁에 올 땐
가시만 보라고 꽃잎은 숨기는데
안타깝게도 미운 님은
가시는 보지 못하고 꽃잎만 봅니다.
고운 님은 잡으려 해도
가시가 앞서 멀리 달아나고
미운 님은 보내려 해도
꽃잎이 앞서 자꾸 따라 옵니다.
꽃잎 질 때 고운 님 떠나가고
가시 질 때 미운 님 떠나보내고
향기 하나에 목숨만큼 사랑을 쏟는
눈먼 님만이 곁에 있습니다.
가을산
김윤자
베틀에 앉으신 어머니십니다.
사그락 사그락
어머니의 베짜시던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립니다.
봄날의 씨줄과 여름날의 날줄
피서린 손끝으로 엮으시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요를
세상에 깔아주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배부르게 먹고 산 것 죄스럽습니다.
겨울을 준비하시느라
피땀으로 붉어지신 어머니의 등을
구경삼아 오르내린 것도 죄스럽습니다.
겨울산
김윤자
그렇게 등이 휘신 줄 몰랐습니다.
거칠어진 잔등에
그렇게 골이 깊게 패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봄 언덕 오르내리듯 마냥 좋아라
삼백 예순 날 질겅질겅
밟고 다닌 것 죄스럽습니다.
따스한 피가 흐르던 시절에
품안에 파고 들던 산꿩도 산다람쥐도
제 둥지 틀어 떠나가버린 동지 섣달
서릿발같이 서걱이는 한숨만 스미는데
허연 달빛마저 은가마 타고 내려와
성긴 머리에 귀빈(貴賓)인양
상석(上席)에 자리하시오면
초로(草露)의 섧은 가슴, 어이하시란 말입니까.
가을이 으스러진 자리
다 찢긴 베적삼, 잠방이 구겨 깔으시고
등걸잠으로 누우시니
낙조(落照)에 걸린 산 그늘이
허리를 휘휘 감아
쓰러져 굳어진 장승인듯 보입니다.
매화 꽃송이같은 노래 깔아드리면 일어나실까
언 입 옹알이며 종일 속삭여드려도
복숭아 속살같은 옛얘기 펼치드리면 웃으실까
언 손 내저으며 종일 재롱을 떨어도
쩍쩍 갈라진 살점 사이로 아픔만 토해내실 뿐
바위보다 무거운 표정 그대로이십니다.
겨울새
―무너진 일터에서
김윤자
숲이 무너지면 숲을 떠나야겠지.
대대로 터를 지켜오던 큰 새가
앙상한 나뭇등에 버거운 둥우리 지어 놓고
뿌리가 흔들린다는 예령에 먼 하늘 날아갈 때도
미명의 작은 새는 그 숲을, 그 나무를 지켜왔지.
기우는 나무, 힘주어 받들고 있음은
서녘으로 떠난 태양의 살가운 약속 때문일까
내일이면 실한 몸으로 다시 떠올라
헝클어진 숲을 정렬하겠노라는.
기약없는 빙점 하의 세월
오지않는 내일을 기다리다
마른 나무에서 가늘어진 다리로
춉춉총 울던 새가 오늘은 쬽쬽쭁 운다.
겨울새야,
하늘에서 쏟아내린 저 흰울음 속에
숨어 흐르는 봄의 숨결 들어봐.
지구 저편에서 다시 걸어나오는 태양의
힘찬 발소리에 귀 기울여봐.
빛저운 네 울음에 동녘이 붉다.
제3부
-생(生)을 위한 질주-
익어가는 연습
김윤자
처음엔 애처로웠지, 비에 젖어 떠는 나무가.
어미되어 품어주고 싶은 아가, 나무야
잎사귀를 꼬옥 오므려봐, 아님 빗줄기를 떠밀어봐.
외다리로 버티어 서서 따닥따닥 볼을 치는 비를
배꽃 하늘거리듯 웃으며 맞고 서 있어, 나무는.
자꾸 가 보았어,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거기 배꽃 하늘거리듯 서 있는 나무를 믿고.
차츰 내가 아가되어, 나무 곁으로 살살 파고들다가
나무 밑의 고요한 흙을 보게 된거야.
침묵으로 나무를 품고 있는.
검붉도록 사람들 발길에 채이면서도
다지고 또 다진 몸으로 나무를 받들고 있는.
―나무야, 흙에 꽂히려는 장대비 촉살을
그렇게 네 머리로 받아치고 있었구나.
너를 부축이는 흙, 흙을 위해서.―
비 오는 날 산에 가면
맑은 날 산에 가는 것보다 더 익어서 돌아온다.
백지 위에도 길은 있다
김윤자
지나온 길은 뚜렷한데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고
출발한 지점은 분명 있는데
종착할 지점은 표시가 없다.
수학 문제 풀듯이
정확한 해답이
기다려주지 않음을
애써 거부하며
1%의 물이나마
숨어 있을 샘을 파다가
내일을 위해
무거운 짐 내려놓고
사막 위에 무릎꿇는
낙타가 보일 때
나는 내일을 위해
백지 위에 무릎을 꿇는다.
나에겐 내일이 와도
나를 데리고 갈 주인은 없다.
낙타에겐 내일이 오면
예비된 길을 안내하는
주인이 있다지만.
나는 스스로 나의 주인이 되어
내 고삐 내가 쥐고
등짐진 낙타를 몰듯
나를 몰아야 한다.
백지끝 신기루가 길을 낳을 때까지.
때로 환상은 현실의 어머니라 믿으며
이름없는 풀(草)로 쓴 내 이름 석자 위에
수맥이 돌 때까지 샘을 파리라.
날개 달린 꽃
김윤자
뜨락에 피어난 꽃
심겨진 그 곳 한자리 지키며
꽃빛을 드리워 발하라고
향기를 피워 품어내라고
꿀을 모아 퍼주라고
그렇게 배웠기에 꽃술이 닳도록 다 주고
빈 씨방 하나 키우며 갇혀 살았다.
어느 날 時流의 거센 바람
빗장을 풀어주고 무등 태워
독수리가 새끼의 飛上 길들이듯
꽃을 밀어 날아보라고 했다.
새끼 독수리는 날개가 있음을 알면서도
용기없는 작은 가슴으로 떨겠지만
꽃은 날개 조차 없음을 알기에
바람 앞에 파르르 떨며
피가 마르도록 파드닥거릴 때
구름 사이로 쏟아 내린 섬광 깃털 심어주니
양어깨에 점점 돋아 커진 날개.
用不用說을 아는가.
나비도, 벌도, 새도 아닌 꽃아
심장에서 뛰는 고동소리는 꽃인 것을.
날개 접히면 다시 앉은뱅이 꽃이 되는 것을.
신호등도 건널목도 없는 창천이어라.
날개짓 멈춤없이 사부작 사부작 날아
책갈피마다 香煙 오르듯
솔솔 피어나게 품어 두고 싶은
하얀 영혼 찾아 은구슬 環으로 꿰어 오려므나.
자동차·1
―기다림
김윤자
나의 사랑 *프로그(frog)
난 다 알아.
목마르게 날 기다린다는 걸
너의 첫사랑이 나란 것도
꽃봉오리 기다리던 비로 갈까?
꽃숭어리 기다리던 나비로 앉을까?
한세월 그렇게 기다렸지.
비도 지나가고, 나비도 날아가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고
눈멀도록 기다리던
애틋한 사랑
빈 하늘 보일까 무서워
고개 숙인 네 심정
나도 다 알아.
*프로그(frog): 본인 소유의 자동차 애칭
(10년 간 기르던 개구리를 그리며 지은 이름)
자동차·2
―빈 집
김윤자
너도 빈 집이니?
님이 나가면 텅 빈 네 속
내 몸 속에도 빈 집 하나 있어.
손바닥만한 보랏빛 텃밭
한때는 그 곳에서 생명도 만들어 냈어.
그런데 지금은 꽃물도 안 나와.
바싹 말라가는 소리가 들려
빈 궁(宮)의 울음소리
님이 들을까 가슴 조이며 살아.
아무 것도 모르는 님은
이슬 머금은 들국화인양 바라 봐.
넌 내 맘 알지?
사위어가는 빈 대공의 슬픔을.
자동차·3
―길 위에서 자다
김윤자
얇은 이불 한자락 없어
알몸으로 길 위에 누웠구나.
찬비, 찬눈 다 맞으며
달리고 또 달리면
궁궐같은 집에서 살 줄 알았지.
몸만 닳았구나.
깔깔한 길 위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이젠 바람 잦아든
뽀얀 황톳길에
등 기대어 눕고 싶다.
자동차·4
―요조 숙녀
김윤자
매몰차게 자신을 다스리는
현숙한 여인.
가끔씩
솔향내 나는 사람 다가와
가슴을 흔들어도
절대로 문 열어 주지 않는.
곁눈질도 죄가 될까
눈 감아 버리지.
생각조차 죄가 될까
아예 지워 버리지.
끝없이 한 주인만 기다리는
고고(孤高)한 무지개.
자동차·5
―겁쟁이
김윤자
언덕이 그렇게 무섭니?
왜 당차게 못 올라가?
한번 불을 당겨 봐.
마음을 파랗게 물들여서
그렇게 숨이 차?
마음 속 두려움을 지워야지.
수없이 넘어 온 언덕
미끄러질 것 같아도 오르고야 말았던
언제나 적은 자신이었어.
너 자신을 이기는거야
지름길은 없어, 돌아갈 수도 없어
언덕을 오르면 내리막은 우수리 길이야.
액셀도, 브레이크도 필요없이 술술 달리는
사실은 그게 더 무섭단다.
허탈해서, 하얗게 질려버리거든
자동차·6
―망나니
김윤자
왜 그렇게 서두르니?
평지라고 그렇게
칼 휘두르듯 내닫지마.
나뒹굴어 깨어져 버리면
너 죽고, 나 죽고
침착하게 가는거야.
과속의 칼자루 버리고
무서워져, 때론 네가
소름이 돋아.
내 목이 네 손에 달렸단
생각이 드는 대목에서.
자동차·7
―눈물
김윤자
너도 우는구나
눈물을 아는구나
사정없이 퍼붓는 빗길
네 고운 얼굴 닦아도
마냥 눈물로 젖는구나.
내 울 땐 눈물 닦아줄 사람도 없었다.
홀로 꿀꺽 꿀꺽 삼켰지
그리곤, 해 뜨는 날이면
젖은 가슴 열어 말렸지.
그렇게 많은 날 동안, 시린 가슴 말리다가
내 안에서 길들여진 눈물
작은 설레임에도
잔잔한 바람 불어와도
몸 속에 그 기운 스미기도 전
어느새 눈가엔 수정 눈물 고여.
빛나는.
자동차·8
―비정
김윤자
업어 줄까? 안아 줄까?
네게 내 등짝을 보이고
돌아설 땐 가슴이 아려와.
널 버리고 떠나는 것 같아서.
보이지 않는 네 숨결이 내 발목을 잡아.
날 부르는 네 흐느낌이 귀울림으로 들려.
그래서 가다가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면
다시 네 곁에 다가가 한바퀴 둘러보곤 하는 거야.
날 욕하진 마, 잠시 사랑 접어 둔 거야.
밤엔 무서워 떨지?
잠 못 이루고 뒤척이지?
동트는 새벽을 기다리자.
바위로 굳어 가는 몸뚱아리
네가 날 사랑하고, 내가 널 사랑하면
가슴 데워져 따슨 피 흐르겠지.
자동차·9
―미안해
김윤자
너는 종, 나는 상전인양
수직선상에서 군림하며, 부려만 먹고
옷 한벌 변변한 것 못해줬구나
삭아가는 몸, 아프다고 삐걱여도
그 흔한 보약 한재 달여주지 못했구나.
네 몸 구석 구석 상처 투성이
긁히고, 닳아지고
가는 세월 늙음이야 어찌 막으랴.
하지만 미안해
못난 주인 만나 네 꼴이 초라한 것 같아서
내가 널 위해 어떻게 해줄까?
네가 나한테 충성한 만큼
널 내 곁에 오래도록 두고 사랑해 주면
작은 보답이 되겠니?
폐물이 되어 버려야 할 시기가 와도
내가 널 지켜주면 미안함 덜어질까?
자동차·10
―뜨거운 가슴 그리며
김윤자
가슴이 펄펄 끓어 올랐지.
숨가쁘게 오른 삶의 등성이
가시길, 돌짝길 지날 때
불같은 성미 답답함을 정면으로 내뱉지 못하고
뒷 꽁무니 하얀 열기로 품어대던 네 심정, 내 다 안다.
앞, 뒤 양옆에서 추격해 오는
무서운 질주의 대열에서도
숱하게 참으며, 양보하며 피 끓는 가슴 다독여왔지.
돌아보니 그래도 그 때가 행복했구나.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 그 순간들이.
가슴이 식어감을 느낀다. 사뭇 추워.
가을 끝자락에 겨울이 오려나봐. 눈, 무서워.
내 발을 묶어매는, 발발 기어야 하는
그냥 죽은 체 살아가야 하는
그래, 그렇게 살다 가는거야
시름시름 맥이 끊기는 줄도 모르게 죽어 가는거야.
지금 이 순간도 내 세포 하나
뜨거운 가슴 그리며 눈을 감는다.
섬은 바다를 품는다
김윤자
섬
작고 갇힌 영토라 여기지만, 사실은 태고의 전설같은 밑둥이
바다 밑에 가려져 있어 내면의 세계는 무한대 열린 터다.
해면 위로 드러난 몸을 멀리서 보면, 가련한 모습일지라도 가
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라. 절벽 비탈진 등짝에 제 살점 깎아
피워낸 해송(海松)을.
갯바람에도, 갈매기의 넘나듦에도 동요치 않고 함묵으로 자신
의 영역을 매몰차게 다스린다. 멀리 보이는 휘황한 뭍은 그에
게는 지구의 그림자일 뿐이다. 결코 동경의 대상이 아닌. 그
보다는 밤하늘을 칼날같이 지키는 초승달을 사모하며 밤마다
광활한 우주와 상면하여 쪽빛 꿈밭을 일군다.
바다
깊은 해심으로 바위처럼 묵중해 보이지만 얕은 해풍에도 요
동친다. 수시로 돌변하는 몸을 꼭 묶어 섬에 매어두려해도 자
신도 모르게 풀어지는 몸은 늘 뭍으로 달려간다. 뭍의 세계에
홀린 듯. 급한 제 성미에 못이겨 허연 거품을 꾸역꾸역 토해
내며. 그 풍랑에 해어(海魚)까지 중심을 잃고 쓸려 다닌다.
사해(四海)가 섞이어 유동함에 낮에는 색깔이 없다가도 밤이
면 어둠을 틈 타 사나운 본성이 이빨을 드러내고 쏴쏴 운다.
뿌리 깊은 성품을 키우려 먼 바다로 미끄러지듯 질주해 보
지만 더 큰 몸집으로 밀려오는 먼 나라 파도의 몸부림에 꿈은
늘 무산된다.
섬과 바다
섬은 침묵으로 바다를 품는다. 뭍에서 외면 당하여 쫓겨오는,
해일에 헐떡이는 바다에게 섬은 고향같은 존재다. 성난 파도
가 옆구리를 허물어도 괴팍한 바다를 늘상 다독인다. 허물을
감싸 안는다.
섬은 넓은 치마폭으로 해어를 품는다. 거친 물살에 시달려 기
진한, 심장이 작아 떠는 치어(稚魚)에게 섬은 어머니 같은 존
재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감을 알면서도 비스러진 고기들을
늘상 보듬는다. 가슴을 키워준다.
섬은 안다. 혼자임을. 궁극적으로는.
정작 자신은 마음 속의 또 하나 외로운 섬에 갇혀 꿈꾸듯 살아
가야 함을.
고무 나무 수난기
김윤자
고무 나무 사형제
동사 직전의 위기 넘기고
낯선 터에 뿌리 내려
이젠 자리를 잡았다.
*그 해 초겨울
함께 시들어 죽는 것보다
흩어지는 것이 낫다고
화단에, 산길에
굴욕의 자리 깔고 나왔더냐.
밑동 잘린 알몸으로
한가닥 뿌리도 없이.
손바닥만한 화분의 흙
목축일 만큼의 물로도
저렇게 살아나는 것을.
꺾어진 세월을
용케도 넘어 왔구나.
현기증 나는 그 삼년을.
아직 넘어야할 벽은 있다.
그늘 속에서 키만 멀쑥하게
키운 것 알지?
언 땅에도 봄은 왔구나.
햇볕 잘 드는 창가로 나가자.
이젠 속살을 살찌워야지.
*그 해: 1997년 IMF 체제 돌입하던 해.
징검다리
김윤자
누군가 거친 개울 물살로 건너가는 길이 힘겨울
때.
반듯한 돌이 되어 누군가의 징검다리가 되고 싶
네.
돌이 작아 물속에 잠기면 건널 사람 발 젖을 테
고.
돌이 커서 높이 솟으면 건널 사람 넘어질지도 몰
라.
누군가 밟고 지나갈 때 믿음의 등불을 밝혀 줄거
야.
개울 속에 단단히 돌부리 박아 물살에 요동침 없
이.
잠기거나, 불쑥 일어섬 없이 묵묵히 자리 지킬거
야.
물 건너 세상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음도 알려줘야
지.
보이지않는 풀섶 깊은 곳에 더러 웅덩이도 있으니
까.
전철, 세월 거슬러 오르는
김윤자
전철 3호선을 타면
세월 거슬러 오르는 구간이 있다.
압구정역에서 옥수역 사이, 그 곳 한남대교
전철이 한강물 가로질러 철교 위를 달릴 때
철제 난간 사이로, 반짝이며 살며시 흐르는
강물을 보노라면
舊세대에서 新세대로, X세대 건너 N세대로
넘어가는 기분이다.
덜거덕 쿵, 덜거덕 쿵 가슴벽 치는 바퀴의 굉음에
쿵 덕거덜, 쿵 덕거덜 내 안의 세월은 거꾸로 가고있다.
휘어진 시간의 담벼락 돌아
아침 햇살 불켜던 유년의 마당에 이르면
나는 푸른 눈 비비는 애솔가지.
손끝 마디마디 솔잎 피우고, 휘황한 도심의 물결에
솔봉오리로 익어 톡톡 튀어 오르다가
캄캄한 땅속으로 전철이 머리 들이밀 때도
싸한 불빛, 현실의 외줄기 등마루에 매달려
볼을 간질일 때도
깨기 싫은 환상의 경계선에서
나는 松花로, 금빛 松花로 눈을 감는다.
방 하나 있으면
김윤자
기쁨은 가랑비로, 슬픔은 소낙비로
여린 눈시울 속 알알이 고여
철없이 넘실대는 눈물의 강
길에 나가 눈물 흩날리면
바람이 부끄럽고
산에 올라 눈물 흩뿌리면
나무가 부끄럽고.
아니 아니 사실은, 심지 얕은 내 모습에
바람이 슬퍼할까봐, 나무가 슬퍼할까봐
이런 소식 전해지면
작은 뜨락 어여쁜 꽃들
덩달아 슬퍼할까봐.
이 세상 어느 한 곳 둘러보아도
눈물 쏟아낼 초막 한 채 없어
마른 푸샛길 홀로 헤집을 때
마음껏 울 수 있는 방 하나 있으면.
눈물도 보이지 않고, 흐느낌도 들리지 않고
통곡해도 부끄럽지 않을 방 하나.
과일을 고르며
김윤자
과일을 고를 때, 나는
모양 좋은 것
윤기 흐르는 것
싱싱한 것만 고를 때, 나는
그리고 남겨진 과일 곁을 떠나
돌아설 때, 나는
맨발로 떨고 있다.
좌판 위 한물간 과일 속에
잃어버린 시간이 보여.
거기 제껴 놓은
모난 과일이
상처난 과일이
핏기 마른 과일이
내 신발 신고 빈들을 달린다.
점점 삶의 무대 귀퉁이로 내몰리는
시간의 창을 뚫고.
등걸나무 비탈길 오르다
김윤자
뿌리 하나로 흙 움켜쥐고
몸뚱이 잘려 육신의 세월은 동강 났어도
묵은 둥치에 서린 영혼 썩지 않으려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쉼없이 숨 고르고 물 빨아들이고
어느 하루 안일하게 흘려보낸적 없다.
묏봉 꽃자리 훤히 보이는데
지름길없는 가파른 비탈길
스스로 몸을 얹고 차오를 때
천둥치듯 와그르 무너지는
내면의 용기 잃은 소리에 놀라
절벽 끝에도 몇 번 매달렸다가
잘못 들어선 길인양 섬짓 멈춰
중턱에서 몇 번 뭉그러지다가
예서 주저앉을 순 없다고
되돌아 갈 수는 더욱 없다고
꺾여진 다리 힘주어 툭툭 털고 일어나보면
애나무에 싹 트고 꽃 피는 모습 부러워
가슴 출렁이기도 하다가
더러는 늦깎이 나무에 새순 돋아
뒤늦게 계절 타고 오르는
철 지난 나무의 땀방울 보며
알뿌리에 힘을 저장하면 마른 하늘에
비도 몰아올 수 있다는 해답을 얻었다.
녹슨 바늘 깨워 가속으로 돌기 시작한
등걸나무의 아날로그 시계
현기증이 나도록 돌아
한꺼풀씩 묵은 탈을 벗을 때
등걸나무의 숨가쁜 비탈길 행보에
종착지임을 알리는 소식 전송되어 왔다.
이천년 팔월 짙푸른 여름날
시인의 꽃자리 하나 마련했노라는.
돌멩이
김윤자
나는 거칠고 볼품없는 돌멩이였습니다.
흙밭에 멋대로 굴러다니며 때 묻은 돌멩이.
아버지는 날 물 맑은 시냇가에 데려가 닦고 다듬어
넓은 세상에 쓸모 있는 돌이 되라 하셨습니다.
나는 모나고 고집 센 돌멩이였습니다.
길가에 홀로 나뒹굴어 다니던 외로운 돌멩이.
한 남자는 날 향기 그윽한 정원에 데려가 품고 보듬어
아름다운 세상에 고운 옥돌이 되라 하였습니다.
사십 고개 언덕에서 깨달은 밀알만한 삶의 슬기.
나 혼자서 굴러서는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
참된 구속의 굴레는 억압이 아니라 진정 자유로운 울타리라
는 것.
이제 나는 반듯하고 결 고운 돌멩이로, 겸손의 너울에 가리워
있다가
석양에 지는 금빛 노을이 나의 온 몸을 물들일 때
세월은 뒤켠에 접어 둔 채 영롱한 보석되어 빛나렵니다.
제 4 부
과거와 미래의 조우(遭遇)
심봉사 다리 건너기
―섬진강변 심청 마을에서
김윤자
심청이 살았다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 마을
집터 뒤 공방산 심청 효심인양 큰자락이고
마을 어귀, 뱃사공 기다리던 느티나무 이파리마다
심청 애곡 매달려 피울음 운다.
어린 딸 마중으로 심봉사 건너가던 섬진강 다리
시멘트 잠수교로 탈바꿈함에 태연히 건너는 걸음 부끄럽다.
이 강물 속에 빠져 심봉사는 그렇게 허우적거렸다고.
무심한 세월은 섬진강물 마저 삼킨걸까
아무일도 모르는 까막눈 다슬기만 지천이다.
나는 환한 빛 세상에 살아, 내 아이 마중나갈 일이 없어.
가로 놓인 강 없으니 다리 건널 이유도 없고.
심청네 만큼 가난치 않아 강 건너 일하러 간적 없어.
내 아비 눈 멀지 않았으니 팔려갈 이유도 없고.
내 아이 마중 갈 좁다란 다리 하나 있으면.
내 아이 마중 가다 빠져 허우적거릴 강 하나 있으면.
내 아이 가슴과 내 가슴 하나로 이을 다리
내 아이 눈물과 내 눈물 얼싸 안고 섞일 강물
너무 밝은 세상이 앗아간 다리가 그립다. 강물이 그립다.
식영정(息影亭)
―송강 유적지, 성산별곡 지은 곳
김윤자
여기선 그림자도 철이 들어 떨어지나 보다.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그림자 접어 놓고
성산별곡(星山別曲) 지었다고.
유배당한 아버지 따라 떠돌던 젊은 날
또 하나 짐짝으로 매달리던 그림자를.
무등산 마루와 성산 골 넘나들며
무애의 경지에 보답하듯
성산(星山)의 사계절 풍류를
그렇게 고운 가락으로 읊어 깔았나보다.
이 곳 담양 땅 선조의 고향
벼슬길 오르면서도 못내 아쉬운 마음을.
*식영정 뒤뜰 수백년 살아온 소나무 한 그루
그 날을 말하느라 용비늘 휘감은 목 자꾸 늘인다.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변신하며 무섭게 달라붙는.
본형과 포개져 하나 될지언정
결코 사라지거나 떠나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 그림자조차 버거웠던 선현들
그림자가 쉬고 있다는 정자, 식영정에 오르면
잠시나마 마음 편하셨을까.
식영정 정자에 올라 앉아 보니
곰실 곰실 소나무 손가락 사이로
석양에 춤추는 영산강 은비늘 물결.
내 그림자 혼이 빠져 누워 있길래
살짝 일어서 가까이 가보려니
제가 먼저 내려와 신발 신는다.
내 그림자 언제쯤 철이 들어 나를 놓아줄까.
*식영정: 전남 기념물 제1호. 송강 유적지, 성산별곡 지은 곳.
대나무
―죽향(竹鄕) 담양에서
김윤자
조선의 대나무가
여기 다 모였나보다.
내 고향 충청도 사라진 대나무들
이곳 담양 제 고향 산자락에 와서
올곧은 몸매 예전 그대로 서 있다.
내 어릴 적 도랑가 대숲
시린 겨울 칼바람이 점령할 때면
서로의 몸 부등켜 안고
꺾이지도 쓰러지지도 말자고
사락 사락 울던 소리.
수십년 뿌리 박고 몸통 굵힌
감나무도 밤나무도
모진 세월 하룻밤 된바람에
쩍쩍 어깨쭉지 부러져나갔는데
너는 어두운 세상에 태어나
눈 뜨던 순간부터
세상 빛보다 하늘 빛 우러러
성큼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온 몸 청빛 절개로 물들이더니
한세월 굽힘없이 꼿꼿하게 살더니
여기 영글어 모인 *죽물 박물관
속살은 여리고 뽀얀 겸손이다.
제 몸 돌돌 다듬어 정좌한 모습
죽부인, 바구니, 삿갓, 참빗….
순백의 결고운 선비다.
*죽물 박물관: 전남 담양읍 담주리 소재, 세계 유일한 죽물 박물관. 1981년 개관.
매년 5월 10일부터 열흘 동안 죽제품 경진 대회 열림.
하늘 가까이에서 「나」는
―북한산 백운대에서
김윤자
맨 처음 성전에 갔을 때도
이렇게 두렵진 않았습니다.
주님께 죄를 낱낱이 고백할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습니다.
북한산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
무서움으로 바위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대자연의 봉우리, 하늘 가까운 이곳에
내가 서기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바람이 흘리고 간
티끌 하나, 날아도 날아도
숨길 수 없는 알몸으로
광활한 갯벌 갈대숲 헤집듯
아린 상채기만 자꾸 드러났습니다.
하늘 가까이에서 「나」는
새로운 옷으로 몸을 감싸 주시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작아진 나를, 상처투성이인 나를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산으로 가는지 알았습니다.
수직선 레일 위로 세상이 달리다
김윤자
수직선 양 끝에 화살이 붙어서
세상을 밀고 당긴다.
플러스(+)화살과 마이너스(-)화살.
수직선 레일 위
영(0)에서 출발한 세상
+쪽으로 달릴까
-쪽으로 달릴까
가끔씩 혼미한 두뇌로 비틀거리지만
이천년이 넘어선 오늘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세상, 은회색 고운 세상
잠시 쉬어 가려나, 자꾸 주저 앉는다.
21세기 레일 위 한도막 금이 간걸까
세상 바퀴가 너무 닳아 미끄러운걸까
-쪽에서 당기는 힘이 세어졌음일까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헛도는 소리뿐, 좀 어지럽다.
세상아,
무릎에 힘주고 다시 일어서봐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아봐
+쪽으로, 양의 방향으로, 해 밝은 곳으로
저기 파란 레일 위 새벽이 열린다.
물이 빠지고 있어요
김윤자
도시는 깊은 물이었어요.
고요했어요.
숨쉬기도, 헤엄치기도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도
의지대로 가능했어요.
한세월 미끈하게 잘 살았지요.
어느 날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한 물
늪지대이더니
지금은 바닥이 훤히 드려다 보입니다.
예전처럼 가고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껄끄러운 바닥에 살갗만 멍이 들고
여기 저기선
소중한 사람들이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눈물을 얼마나 흘리면
피땀을 얼마나 흘리면 샘을 팔까요.
쪽빛은 아니어도, 강물은 아니어도
투명한 물
미래가 보이는 한방울 물이 그립습니다.
수덕사
―비구니 암자 견성암에서
김윤자
대웅전 큰 부처님 곁 산등성이
어머니가 벗어 깔으셨나
넓은 치맛자락 마당.
세속의 때묻은 발 딛고
염치없이 오른 비구니 암자 견성암.
世人들 풋열매 익혀가라고
초여름 햇살 사뭇 쏟아내리는데
都心 속 안개꽃으로 살아온 나는
그 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헐떡일 때
수덕사 쇠북소리에 귀를 씻은
댓돌 위 신발들, 보살인양 일렬로 줄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합장하며
여승의 불경소리에 귀 기울여 보란다.
고깔 사이로 보일듯 말듯
반만 보이는 얼굴, 은하수 섬 사이 옥별이다.
여리고 고운 대한의 비구니들
차령산맥 큰 등허리 기대어 살라고
산기슭 깊은 골에 견성암 세웠는데
여승들의 불꽃이는 참선에
덕숭산이 내려와 기대어 산다.
아름다운 유월, 눈물이 납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두 어른을 보고
김윤자
내가 북에서 산 것도
부모가 북에 계신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납니다.
남북 대결 철책 넘어 두 하늘 하나로 여시니
하늘이 곱고 땅이 고와
자꾸 눈물이 납니다.
어린 백성들의 숙원
평양 백화원에 꽃 피워 열매 맺으시느라
다 타신 숯덩이 가슴 속
평양의 산해 진미 앞에서도
통일의 씨앗 찾으시려는 깊은 눈시울
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언어로 마음을 그려내는 이 작은 손끝으로
무엇을 어떻게 그려내면 되겠느냐고
대한민국의 주부인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눈물로 묻고 있습니다.
55년 동안 한반도의 잘못 낀 단추
풀기 시작한 아름다운 날
이제 둥근 하늘에 무지개 솟으면
한반도는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로
곱게 색인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55년간의 냉전과 대결 버리자고
그 지루했던 하루하루 20075개(55년×365일)의
오색 풍선 날아간 하늘에
남북 공동선언 옥동자 하나 탄생된
아름다운 유월, 눈물이 납니다.
사랑·1
―아버지
김윤자
아버지는 늘 어두일미라 하시며
생선 머리만 잡수시고
살은 어린 자식들 밥 위에 올려 주셨다.
나도 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
생선 살을 발라 밥 위에 놓아준다.
나는 머리와 꼬리만 먹고.
내 자식은 그냥 놔두라고 한다.
때론 비린내 난다며
내 밥 위에 다시 돌려준다.
밥상 앞에만 앉으면 아버지가 보인다.
가시뿐인 머리와 꼬리를
맛 좋다 씹으시던.
그래서 자꾸만
생선 살을 바르는데
내 아이는 이런 내 마음 알까.
지금도 아버지는
생선 접시를 내 앞에 밀어 주신다.
사랑·2
―어머니
김윤자
스무살에 가까운 아들에게
아가라고 부르며 안아주고 싶은데
아들은 돌아서 달아난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아가라고 부르느냐고
징그럽다고 머리를 저으며.
그래도 난
아가라고 부르며 보듬는다.
잠든 머리맡에 다가가 아가가 듣지 못할 때
내가 기대고도 남을 넓은 등줄기 어루만지며.
내 어머니도
날 이렇게 기르셨을텐데.
나도 내 아들 나이 적에
아가의 옷을 벗으려고
어머니 품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는데
어머닌 아직도
날 물가에 떼어놓은 아가라 하신다.
사랑·3
―그대
김윤자
그대는 맑은 하늘입니다.
이십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내게 보인 것은
늘 맑고 잔잔한 하늘이었습니다.
나는 소나기
툭하면 먹구름장 몰고와 퍼부어대는 장대비
피할 사이도 없이, 비에 젖어 떠는
그대의 모습 아랑곳없이.
그 때마다 하늘은 저만치서
있는듯 없는듯 가리워 있다가
곰삭아진 나의 빗물
후줄근히 뿌리고 나면
무지개 꽃 피워 곱게
나의 몸을 물들였습니다.
이제서야 나는
그대, 하늘이 그토록 넓었던 것을
찬연한 청빛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4
―머리카락
김윤자
머리를 빗으려 거울 앞에 서면
머리카락은 두눈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서너살 갓난아기 어미 바라보듯.
―그래, 알았어.
살살 빗을께, 안 아프게.
모양을 내려거나, 좀 빨리 말리고 싶어
드라이 열기를 뿜으면
새파랗게 질려 엉엉 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화상은 안 입었니?
목욕할 때도, 샴푸량이 좀 많다싶으면
토라져 눈 감고 방방 뛴다.
―이걸 어쩌지?
눈 매웁구나, 잘못했어.
살아보겠다고 내 머리팍에 태어난 생명들.
달래고 얼러 보살폈더니
촉촉이 눈뜨는, 반질반질 빛나는 내 머리카락.
사랑·5
―헌 것들
김윤자
새 가구보다
헌 가구가 더 좋다.
새 그릇보다
헌 그릇이 더 좋다.
새 옷보다 헌 옷이
때론 구멍난 양말이
더 좋다.
나와 정든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
두 눈 크게 뜨고
내 손에
매달리는 것 같아서.
그 것들은
내가 버리면
갈 곳이 없다고
우는 것 같아서.
우산 꼭지
김윤자
전철을 타려는데
우산 꼭지 또르르 굴러 레일 위로 달려간다.
주우러 가고 싶은 순간
생명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치는 대목에서
우산만 만지작거렸다.
진작 보살펴 줄 것을
살짝만 조여줬으면 빠지지 않았을 것을.
그 날 이후로 우산은 자꾸 무너진다.
비가 새더니, 살이 녹슬더니, 삐걱이더니
이젠 아예 펴지지도 않는다.
화가 단단히 났나보다.
레일 위로 굴러간
내 삶의 꼭지
다시 찾아 조립할 수만 있다면
우두둑 무너져 내리는
우산과도 같은 내 육신의 반란
달랠 수 있을텐데.
삼막사 스님
김윤자
해는 붉게 익어 속찬 열매로
서산에 덩그러니 매달리고
하늘도 땅도 너그러이 눈감아
속세에 떠도는 허물
땅거미 내리어 덮으실 제
마디 마디 육신 꺾어
부처님 전 예불 올리는
*삼막사 스님
애간장 녹아 흐르도록
자신을 태워 사르고 또 사르고.
승복 속 하얗게 비운 마른 가슴에
더 씻길 그 무엇 남았길래
무심히도 흐르는 번뇌의 강 저리 깊어서
이 밤 百拜로 건너시려나.
관악산 허리 긴 능선
성불의 너럭바위 이루시어
하늘 가까운 이곳
山頂에 오른 뭇세인들
발 끝에 묻혀온 俗塵 털어 주시길
이 밤 千拜로 비오시려나.
三界의 얽힌 죄업 한줌까지
올올이 풀어내시려
묏봉 피 서리게 토해내는
묏등 뼈 휘도록 깎아내는
저 통성 염불소리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삼막사:관악산 해발 455.5m에 위치한 절.
모자이크
김윤자
절반도 남지 않은
내 생(生)의 흰 들녘.
파스텔조 꽃언덕, 청빛 산마루
지나온 조각(片) 길 아름다운데
단풍 길 산모롱이 돌아
결빙된 강안(江岸)이 보일 때
나는 추녀 끝 고드름 된다.
빈 터에 찬(寒) 손으로 짜맞춘
내 삶의 성채
북새풍에 떨어져 성엣장 될까봐.
날파람에 안긴 시간 아스라지고
먼산에서 달려온 하얀 바람꽃
담쟁이 덩굴손되어 휘감는데
겨울 설봉이 무너지면, 양지녘에
민들레 한송이 꽃 피워 조립해야지.
그 솜털 홀씨 속에
강인한 나의 혼 심어 놓고
한작품 마감해야지.
첫댓글 감수성이 예민한 중1때 조문자 국어 선생님의 권유에 의해
문예부에 가입, 매주 금요일마다 글짓기로 활동했는데
남학생은 5~6명, 여학생이 70~80명이라
여학생 판속에서 숨죽이고 글만 썼습니다.
계속했다면 지금쯤 백수나 건달이 될텐데
고교때 체육선생님에 의해 강제로 축구를 했습니다.
체육선생님 매가 무서워 몇달 억지로 축구를 하다가
본격적인 공부를 했지만 인생살이가 피곤합니다.
21세기에 요구하는 사람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합니다.
고독한 시의 길, 그러나 태양빛은 눈이 시리고 고적한
달빛마저 호사스럽고 실빛 별 하나면 늘 절벽을 넘을 수 있었는데
그 별 하나가 되어 꽃불 피우지 못함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