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망치 않는 기도
(누가복음 18장< 1 >)
성경말씀을 읽고 깨달아 아는 자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영적 무지 속에 소경으로 멸망할것입니다.
-- *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는
끊임없이 언제나 행해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더해간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낙망하지 말고 끈기있게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
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늘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인자가 오시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인자의 오심 즉
재림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성도의 낙심과 기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누가복음 18 :1-3)
고대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는 '무기력'과
'무능력'의 대명사였습니다. 관원들은 자주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재판관에게 뇌물을 줄만한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23참조)
이처럼 공공연히
불의한 재판이 행해져
백성들은 법관들을 향하여 '도둑 재판관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같이
비양심적인 도둑 재판관들
조차도 끈질긴 과부의 청원 때문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2. 불의한 재판관과 가난한 과부.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
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누가복음 18 :4-6)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위하여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호소를 외면하고 묵살했지만 한번 두번 찾아
와서 호소하는 횟수가 많아지자 번거로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귀찮게 굴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과부의 원하는 풀어주어야겠다고 햇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오직 끈질긴 호소로
자신의 문제를 악덕하고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해결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7-8)
그런데 하물며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오래
지체하거나 계속 외면치 않으시고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크고 좋으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 믿음이 많이 상실되고. 우리 주위의 상황이
불신을 갖게 할지라도 믿음은 능력의 원천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것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3.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누가복음 18 :9-10)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기 짝이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죄인'을
대표합니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로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누가복음 18 :11-12)
바리새인은 나는 토색하고 불의를 행하며 간음하는 자들에게서
제외되어 있다고 그는 믿었으며, 세리와 같이 민족 반역자의 위치에
서 있지도 않다고 자긍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자기는
타인과 같지 않다는, 구별된 우월의식, 신분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의로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세리와 같은 겸허한 기도.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
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 :13-14)
세리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바라며 기도하던 자리는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아는 자리였습니다.
자신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멀리 서서 기도할 수 밖에 없다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자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한 자리와 세리의 자기
분수를 아는 자리 중 지금 우리는 과연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자신을 살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죄인 된 자여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양심의 소리에 세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이처럼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가복음 18:15-16)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와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장면입니다.그런데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꾸짖고 어린이들을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어린아기의 심령을 본받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 -17)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18 :18~19-
당시 유대교의 풍토로 인간에 대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정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만이 선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이 예수님을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관원이 예수님을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는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누가복음 18 :20-21)
이 관원은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 정도면 됐다고 하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만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상대적 비교우위에 의한 자족감에 기인한 것입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진작부터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시리라고 자신있게 확신했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바리새인의 교만과 허세로 치장된 기도와 같이
우리 자신이 이 정도 신앙생활이면 괜찮다고
스스로 교만의 자리에 있지는 않은지 다시한번
돌아보고 속히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에 서도록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세리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바라며 기도하던 자리는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아는 자리였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멀리 서서
기도할 수 밖에 없다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5. 4.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