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왕이 오신다.
마가복음 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언제가 노년에 이른 부부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무척 좋아하여 결혼하였고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겼습니다.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직장과 가정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나름 성실하게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정년에 이르러 은퇴하고 돌아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상황입니까? 너무 기가 막혀 남편분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제게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 되는 분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함께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남편은 자기중심이었고 너는 없고 나만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하였기에 내가 좋으면 너도 좋아야 하고 내가 싫으면 너도 싫어해야 하는 고집이 자신을 질리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남편에게 매여 사는 노리개가 된 느낌이 들어 더는 이런 남편과 살기 싫어 떠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상대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자기를 알아달라고 자기 공로를 앞세웠다고 하였습니다.
한쪽은 내가 당신을 사랑했기에 행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한쪽은 그런 자기 위주의 방식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하소연합니다. 저는 이 부부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면서 참으로 사랑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랑의 열매는 무엇으로 이뤄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에 대한 결론은 사랑은 나를 비우고 상대를 우선으로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반드시 겸손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영국의 설교 황태자로 널리 알려진 스펄죤 목사님 역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사랑이 없는 겸손이라면 그것을 개역개정 성경의 골 2:18 ‘꾸며낸 겸손’이라고 하였고, 쉬운 말 성경에서는 ‘일부러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과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자기를 낮추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은 완벽한 줄 압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인간은 완벽해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존재입니다. 이를 바로 이해해야 교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본문에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고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려 주일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 부활 이전의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교회의 전통이고, 종려 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흔들었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종려 가지라고 하지 않고 나뭇가지로 되어 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첫 번째는 겸손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겸손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결국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는 겸손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근교인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명에게 막 11:2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귀는 짐을 나르고 일을 해야 하는 가축입니다. 그런데 일이 없습니다. 그것도 줄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일이 없이 한곳에 맴도는 상황을 말합니다.
저도 어려서 한때 시계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공품을 제작하는 선반부서에 배정되었는데 제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일에 매달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저는 할 일이 없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제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쓰고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쓸모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적한 곳에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고 온종일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빈둥거리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을 이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주님이 풀어 주실 때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서 하잖게 보이는 위치에 놓여 있고 자유를 잃고 한 곳에 매여 반복되는 일상에 살고 있더라고 사랑의 하나님은 한순간도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날이 반드시 오게 됨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겸손은 자기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제자 두 명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끈을 풀고 끌고 오려는데 주인이 “여보시오 내 나귀를 왜 끌고 가시오?” 했을 때 제자들은 “주님이 쓰시겠답니다” 했더니 주인이 허락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에 쓰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님이 쓰시겠다는 단 한 마디에 자기가 부려보지도 않았던 나귀를 선뜻 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러기에 그 말씀에 내 생각을 섞지 않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내 소견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고 났을 때 비로소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씀에 따르는 것이 겸손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산 제물’은 영어로 ‘a living sacrific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내 시간을 물질을 요구할 때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소득의 십일조를 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 내드리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두 번째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막 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깔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길에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외쳤습니다.(9,10절)
이 장면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탄 동물이 나귀 새끼라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왕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은 말을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른 나귀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슥 10:10에서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줄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제왕 의식에 속합니다. 이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메시아로서 평화의 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만왕의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능력이 큰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종려 가지를 흔들었다는 걸 근거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른 살이 넘은 한 남자가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은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잠시 구경을 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나의 촌극 정도로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대다수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군.” 하면서 잠시 구경하다가 흩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둘러보시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는 마가복음 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겸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뜻은 내 안에 말씀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뤄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형상이 내게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주도하셨던 성령이 내 안에 계셔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힘들더라도 머무르라고 하시면 소망을 지니고 참고 견디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함을 내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현재의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내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결국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사람을 섬기는 모습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분으로 모든 존귀와 영광을 지니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 분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좁고 좁은 문을 통과하신 것이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은 믿음의 성도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아들이 누리는 모든 존귀와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한 내용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에서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도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됨의 신비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의 대열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아들로서 누리시는 하늘의 모든 존귀와 영광, 그리고 행복을 함께 하게 하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우리도 겸손하도록 주님께 나를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망을 날마다 새롭게 하므로 믿음으로 굳건하게 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기 위하여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도 기쁨으로 순응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계명에 순종하고 낮은 자리라도 기뻐하는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입니다. 겸손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