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려는 자, 준비하는 자
마가복음 14:1-11 / 권오진 목사
마가복음 기록한 사람은 ‘마가 요한’입니다. 요한은 – 유대인 본래 이름이고, 마가는 – 로마식 이름입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책이고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는 주후 65년에서 70년 사이로 봅니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마가는 로마 황제의 박해로 힘들어하는 성도를 격려하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려고 마가복음을 쓴 것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생각하게 되는 14장 말씀부터가 사실 마가복음의 핵심 부분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살펴보고 있음을 알고, 그에 합당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그럼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절이 한 단락 / 3~9절이 한 단락 / 10~11절이 한 단락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성경에 단락을 구별하는 동그라미 두 개의 표시가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 단락을 모두 본문으로 정했을까요? 이 말씀이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샌드위치 구조 】 1~2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남성) 예수 살해 음모 성전 3~9절 한 무명의 여인(여성) 예수님의 죽음 예비 문둥병자의 집 10~11절 12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남성) 예수님을 배반 성전 지금 저자는 이 말씀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자도 있다. 샌드위치 구조에서 핵심은 항상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가운데 부분이고, 저자는 이 가운데 나오는 무명의 여인처럼 우리가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럼 샌드위치 구조, 앞과 뒤에 있는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1-2절부터 보세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이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처치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혜성처럼 등장해서 성전이 기능을 상실했고, 멀지 않아 성전이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그들에게 쏠려던 인기가,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언행이 그들에게는 가시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과 무교절>이 다가왔기에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어떤 절기인지 잘 모르는 성도를 위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표를 보시면서 말씀을 들어보세요.
【 유월절과 무교절 이해 】 니산월 14일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20일 21일 (3-4월) 하루 7일간 유월절 무교절 유월절은 – 고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남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무교절은 –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에서 겪은 고생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유월절, 무교절>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하나의 절기인 것입니다. 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은 인산인해가 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때 예루살렘 평소 인구보다 5~6배가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 때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부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절에는 예수를 처치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에 화답하는 자가 한 사람 등장합니다. 샌드위치 아래쪽에 그가 누군지 말씀합니다. 10-11절 보세요.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〇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예수를 처치하고 싶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화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였습니다. 기막히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가 어떤 인물입니까? - 그는 갸룟(그리욧) 지방 출신으로 아버지는 시몬이었습니다. - 유다의 이름에는 ‘하나님 찬양’이란 뜻이 있습니다. -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도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 제자가 왜 예수님을 팔게 되었습니까? 성경과 학자들은 말합니다. - 예수 공동체 회계책임자로서 돈에 욕심이 많아 돈 때문에 팔았다. - 가룟 유다는 열심 당원으로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해 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팔았다. - 사단이 들어가 사탄의 노예가 되었기에 예수를 팔았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인리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하나의 이유가 나옵니다. <자기 관리 실패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입니까? 그런데 모세에게도 민수기 16장에 가보면 <고라와 다단, 아비람이 당을 지어서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반역합니다> 모세가 뭘 잘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신들도 모세처럼 높아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자기 관리 실패했기에> 반역했고, 그 결과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 더 생각해 볼까요? 고린도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사도바울이 개척하고, 아볼로가 바울의 뒤를 이어 목회자로 들어가서 섬겼습니다. 여러분 <바울보다 훌륭한 목회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볼로 같이 훌륭한 목회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훌륭한 목회자가 섬긴 고린도 교회에 네 파당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목회자 탓이 아닙니다.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성도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주신 마음, 사명과 직분을 관리하지 못하고, 사탄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가서 마음 관리 못한 자로 통해 교회는 어려움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관리의 실패로 노예 한 사람의 값인 은 30에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먹은 것입니다. 1-2절에 말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로 인해서 목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국식 표현으로 <손 안 대고 코 풀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죽이려는 자의 내용이 본문 앞뒤로 배열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그렇게 대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마가가 강조하고 싶어 했던 사람, 성도가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샌드위치 중앙에 있는 한 무명의 여인입니다.>
<샌드위치 가운데 부분> 3~9절 한 무명의 여인(여성) 예수님의 죽음 예비 문둥병자의 집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 기름 붓는 이야기가 모두 나옵니다. 자세히 연구를 해 보면 <공통점도 있지만, 약간씩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부정적인 사람들이 모면, 이 말씀을 비교하면서 차이가 난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따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요?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저자의 기록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참된 헌신자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3~9절을 교독하며 집중해봅시다.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장소 -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 시몬이 아마 과거 나병에 걸렸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고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예수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한 여자 –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 이름이 있었겠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기에 우리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 여자가 향유를 식사 중인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3절 다시 보세요.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무명의 여인의 부은 향유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저자가 <매우 …, 값진 향유, …,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무명의 여인이 부은 향유를 <순전한 나드>라고 했는데 — 존더반 주석에는 <나드는 원산지가 인도인 쥐오줌풀과의 다년생 풀인데, 그 뿌리와 잎에서 추출한 것을 나드 향유라고 했습니다.> 향유의 향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을 가늘게 만든 병에 넣었는데, 본문에는 그 향유를 다 부어 드리기 위해서 그 병의 목을 깨트려서 예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순식간에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주님의 머리에는 나드 기름이 흘러내렸고, 그 공간에는 향유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반응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반응(제자들, 유다, 어떤 사람들, 바리새인)은 이것은 – 낭비다(허비다) 만약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으로 구제하면 더 좋을 것 아니냐? 며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달리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생각하면 그들의 말도 인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향유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에요. 당시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노동자 한해 연봉입니다.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여러분의 연봉이 <향유 한 옥합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향유를 부음 받은 예수님은 그렇게 반응하시지 않습니다. 6-8절을 보세요.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반응 5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가만두라. ② 그 여자는 좋은 일을 했다. ③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할 것이다. ④ 그 여자는 나의 장례를 위해서 내 몸에 기름을 부었다. ⑤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 여자도 기억될 것이다. 향유를 부은 <무명의 여인>은 앞에서 살펴본 마가복음 12:41-44절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닮았습니다.> 이미 살펴본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본문의 <무명의 여인> 역시 가보처럼 귀한 나드 향유를 예수께 부어 드림으로 신앙 안에서 <관대함과 섬김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자신의 배만 채웠던 종교지도자들과 대조가 됩니다. 이 말씀에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가 되심을 말하고 있고, 여인이 향유를 부은 행위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가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향유 부음의 사건을 통해 <거룩한 낭비>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고,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룩한 낭비>을 한 번쯤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림 1.『고귀한 시간 낭비』 책 표지> 미국의 루터교 신학자 마르바 던이 쓴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야말로 고귀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생산해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낭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귀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영적 광휘(환하고 아름답게 빛남)에 사로잡히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 거룩한 시간 낭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십일조, 감사, 선교, 장학)도 – 거룩한 물질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만두라. / 좋은 일을 했다. /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다. 너의 행위는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죽이려는 자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해당합니까? 예수님은 <무명의 여인>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고, 그 여자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그녀의 뒤를 이어가는 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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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