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부치지 못한 편지(2004/09/06) - 미륵사지에서
그대
가을 햇살이 엄청 따갑습니다.
이래야만 아직도 성긴 곡식들 익어야만 한다는 걸 압니다.
한낮의 징헌 햇볕에 나락들 여무는 소리 들립니다.
흰 종이 씌워 둔 포도 송이 앞섶 터진 농장을 지나고
달콤한 휘발성을 머금은 농약 내음이 코끝에 스며드는
햇살뿐인 들판, 푸름 출렁이는 논길을 지나
백제의 고사(古寺), 미륵사지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남쪽으로 바라 뵈는 미륵산(430m).
근교 교가(校歌)에 [미륵산 정기] 귀절이 모두 들어가고
여느 산들에 비해 턱없이 얕은 산임엔 분명하지만,
올라 보면 사방 넓은 들판의 한 가운데 차지하고 있어
근방에선 우뚝 솟은 하나의 영산(靈山)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미륵사지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느새 깨끗하게 정비된 주변이 왠지 낯설다는 느낌입니다.
황량하던 옛 정취는 사라지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구탑(서쪽), 우리가 늘 보아오던 6층의 허물어져 보이던 탑은
커다란 창고형 건물에 갇혀 복원 공사를 하고 있었으며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복원=1998년~2007년 까지)
이미 복원한 동원(동쪽)탑의 하얀 위용이 미륵산보다 높아 보입니다.
하얗게 무게도 없이 보여 말끔한 신사 같습니다.
마치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절터의 주춧돌과 크기를 가늠케 한 많은 돌들.
석등대좌의 움푹한 곳에 고였던 세월은
여름을 아쉬워하는 햇살에 다 마르고 설화마저 닳았습니다.
그대도 미륵사지에 대한 설화를 알지요?
여느 설화와 비슷한, 용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
마를 캐고 살던 서동이 신라의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흠모해
기이한 노래를 지어 꾀어 가 아내를 삼고,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되어 낳고 자란 이 곳에
커다란 절을 지어 새로운 백제의 정기를 이어 가고자 했던 이야기.
그러나
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버려질 뻔 한 들판에서 볼 뿐입니다.
익산시의 미륵산과 그 아래 드넓은 절터만 남은 미륵사지.
주변 들판과 이어지는 산밑 평범하게 자리한 미륵사지에
쨍쨍한 가을볕만 와글와글,
일반 사찰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동원탑 72개의 풍경과 함께
야단법석(野壇法席)인 채 아직도 미륵을 기다리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세월을 이고 창창했던 돌들에게
손길 한번 어루만져 주는 이 없었었지만,
그대
세월의 더께를 두른 모든 사랑이,
저처럼 고색 창연했던 고찰의 탑처럼 영원할 순 없겠으나
시간의 마술에 조금 낡아지고, 일그러지고, 허물어진 우리의 관계도
뒤돌아보며 묵은 때를 벗겨 주고, 베인 상처 안쓰럽게 안아 주면,
영화로웠던 시절의 한때로 다시 돌아 갈 수 있겠지요?
복원되는 석탑의 묵묵했던 염원처럼, 미륵불의 출현처럼...
그런 희망을 안고 발길을 돌립니다.
우리 사랑이 아름답게 불타오를 때 보다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며 고개 숙일 줄 아는 벼들처럼
이제 우리의 사랑에도 더 많은 내면의 강물이 흘러
산빛, 들빛, 달빛의 사연들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의 재앙이나 시달림(태풍, 홍수, 폭설 등)을 한번 받지 않은
우리가 나서 자란 이 비옥한 들판의 풍요로움이 더없이 좋은
초가을의 들녘에서 그대에게 아직도 미륵같은 사랑을 보냅니다.
★★★ 彌勒寺(미륵사) 創建(창건) 緣起說話(연기설화)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서
당시 수도인 부여 왕궁 남쪽의 연못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그를 낳았다.
아명은 서동(薯童)이니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고 곱기 짝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동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들이 그와 친해져 따르게 되었다.
이래서 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달래어 이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이 동요가 서울 안에 잔뜩 퍼져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모든 관리들이 난리을 피워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향 보내게 되었는데
떠날 때에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살이 처소를 향하여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뛰어나와 절을 하면서 호위하고 가겠다 하니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였지만
공주는 우연히 마음이 당기고 좋았기 때문에 따라오게 하여
남몰래 관계를 한 뒤에야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은 것을 믿게 되었다.
서동은 선화공주를 취하여 백제로 돌아온다.
선화가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하자
그 때야 서동은 황금이 보배임을 깨닫게 되고,
마를 캐던 곳에 흙더미 같이 쌓여 있던 금을
사자사(師子寺) 지명법사의 신력을 빌어 신라 왕실에 보내게 된다.
이후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오른 후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 곳에 彌勒三會(미륵삼회)의 殿(전), 塔(탑), 廊(낭무)를 세 곳에 두고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도 百工(백공)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첫댓글 풍경소리님의 미륵사지! 고향길에 들려오셨남요~ 그 곳은, 늘 민족의 애섪은 마음에 알금처럼 남아 역사의 서러움을 되씹게 해줍니다. 드넓고도 장엄했던 당시의 스케일을 연상하면 십만의 대僧들이 붐비었을 불교 중흥 역사가 그리워집니다
백제를 수호하려던 저 마륵사의 대탑이 한이 서려 천수백년을 무너져 내리지도 못한채 후손의 눈빛으로, 깊은 마음 속에 못 다 부친 독백으로 잔잔한 가을 빛을 받고 있네요. 늘 서동과 선화공주의 해피엔딩 설화가 감돌고 있는 땅, 미륵사지 다시 도 가보고 싶네요. 박물관 앞 길 건너 순두부집 맛도 다시 보러...
<우리가 문화 민족으로 살아 남는 길> 사라져 버린 선조들의 옛 문화를 다시 복원하는 길이라고 늘 힘없는 사명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오랜 긴 역사를 복원하는데 인색한 위정자와 그 부류의 무관심한 국민들에게 던지고 싶은 일갈, 너희 전생에 선조들은 망국자 였겠느냐, 애국자 였겠느냐, 라고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