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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나눔터 스크랩 실로암안과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
주님의 머슴 추천 0 조회 538 13.12.30 1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에 희망의 빛을 주는, Helen Keller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
 
최종옥 대기자
 
        ▲ 실로암안과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    ?나눔뉴스
한국의 희망의 빛  Helen Keller 탄생!
나눔 뉴스는 두눈 실명으로 현재 실로암 안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 김선태 목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완석 목사는 “영국에는 밀톤이 있었고 미국에는 헬렌 켈러가 있었고 일본에는 이와하시다께오가 실명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는데 한국에는 희망의 빛을 주는 김선태 목사가 있다.”고 하였다고한다.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 ! 희망은 절망으로부터라는 그의 삶의 철학을 들어 본다. 

-. 김선태 목사님! 어떻게 해서 실명이 되셨는지요?
= 네 말씀 드리죠 . 내 나이 열 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월 25일,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그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곧장 옆집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달려와 보니 폭격에 의해 우리 집이 몽땅 없어졌습니다. 아침 식사로서 이 세상에서 부모님과 영영 이별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엄마! 아빠!”를 목이 메도록 부르면서 온 동네를 쏘다녔지만 부모님을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고아 신세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외동아들이었던 나는 그나마 친척조차도 별로 없었던 터라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고 이웃집도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서울은 불바다를 이룬 판국이었습니다. 어린 나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처참한 상황으로 당장 배도 고프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고 문을 두드려 용케 음식을 얻어먹었지만 남의 동정을 받아 눈물 섞인 밥을 먹는 내 신세가 한없이 처량하고 슬펐습니다. 거지 행각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8월 어느 날, 나와 함께 뛰놀던 어린 친구들 여덟 명과 참외, 수박 서리를 하기 위해 뚝섬 쪽으로 원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일밭에서 과일들을 정신없이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친구들이 뭔가를 호기심 있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펑 하고 터지는 굉음과 함께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찌 된 일인지 조금 전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높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 흐르는 한강과 친구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류탄이 터지는 순간 양쪽 눈이 상처를 입는 바람에 실명하게 된 것입니다. 
 
-. 선천적으로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열 살 때 6.25전쟁으로 실명을 하셨다면, 무척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실명하신 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 고달픈 삶은 말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앞이 캄캄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기가 막힌 비극의 삶이었습니다. 땅을 기어 다니면서 논두렁에 고인 물이라도 마셔야만 갈증을 면할 수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했지만 난리 중이라 정작 먹을 것을 주는 이가 없어 밭을 뒤져서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풀잎이라도 뜯어먹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모든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를 무렵이었는데 나는 떠나기 전날 밤에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선태 저 녀석은 집에 둘 수도 없고 데려갈 수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 평상시보다 밥을 두 배 주면서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을 밥 속에 넣어 먹여 죽여 버립시다. 죽으면 산에다 파묻어 버리고 떠납시다.” 그 얘기를 우연히 들은 나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오직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집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하고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목사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맹학교가 아닌 일반 정규대학과 대학원 석, 박사과정을 마치시고 최고 학부를 거치셨는데 이처럼 하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땀을 바치고 눈물을 바쳐서 나의 생명과 맞바꿀 정신으로 공부했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제대로 잠을 편히 못 잤고, 너무 가난하여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고 살았고 추운 겨울에도 이불이 없이 텅 빈 기숙사에서 홀로 사는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고 새롭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일어섰거든요. 
 
-. 가장 힘들 때 힘이 되는 건 아무래도 가족인데 목사님의 가족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 서울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했으나 부모님은 전쟁 직후 폭격으로 모두 사망 현재 가족은 저와 제 아내 두 딸과 한 명의 사위, 한 명의 손녀딸 그리고 양딸 Lucky Seven 7식구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까지 합하여 10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다복합니다.
과거에는 저 혼자였고 호적에도 저만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실로암 안과병원 식구들, 복지관 식구들, 세계에 흩어진 나의 동역자를 합하면 참으로 식구들이 많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없이 빈 손 입니다만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재워주고 밥 주시고 용돈 주시고 개안 수술비를 주시기 때문에 가장 부자입니다. 
 
-. 목사님께서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일을 믿음과 기도로 이룩해 오셨는데 앞으로 목사님의 계획과 비전이 있으시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만일 젊었다면 음대에 가서 피아노 아니면 첼로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60이 넘어서 그 꿈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시각장애인들이 노후에 신앙생활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생활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양로원을 건립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의 대 다수의 직업이 안마입니다. 50만 넘으면 엄지손가락에 관절염이 와서 고통스러워하는 분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마의 대지만 어느 분이 기증해주신다면 그 분을 기념으로 해서 양로원을 세웠으면 합니다. 그것만 이루면 제가 세상에 와서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고 빛을 찾아주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바칠 계획입니다.

-. 실로암 안과병원은 언제 개원하였으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교적 사명을 본받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바 어떻게 진료를 하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실로암 안과병원은 1986년 2월 17일에 개원하였으며 현재 실로암 안과병원은 중국 연변의 실로암 안과센타, 46인승 리무진 버스에 병원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는 “움직이는 실로암안과병원”,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에 “자리 잡은 실로암 안과병원”등 모두 3곳의 병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안과전문의사가 8명, 내과 전문의사 1명과 수련의 4명, 간호사를 비롯하여 약 75여명의 직원이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진료를 시작하는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인 병원입니다. 그리하여 실로암 안과병원은 한국교회와 사회의 명예를 걸고 진료하는 자랑스러운 안과전문병원입니다. 
 
-.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수술을 받은 사람들도 있지만 직접 찾아가서 의료봉사를 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국내 의료봉사 “움직이는 실로암 안과병원”은 농?어촌 섬지역, 나환자 정착촌, 소록도, 감호소, 전국 맹학교 및 각 보건소와의 자매결연을 맺고, 무의촌 지역의 저소득층을 위해 선교적 차원에서 1년에 40회 이상 무료진료 및 개안수술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간은 1주일로 월요일~금요일까지 현지에서 실시합니다. 사실 가정을 떠나 숙식이 불편한 곳에서 일주일간 진료와 수술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치유정신에 입각하여 기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 실로암안과병원은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국내뿐만 아니라 저개발국가에 찾아가서 사랑의 무료안과진료와 개안수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국 어디 어디에서 봉사를 하셨는지요?
=. 저는 실로암 안과병원을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에 실명예방과 개안수술을 위한 아이(eye)센타로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50후반부터 60, 70, 80이 되면 백내장이 발생하고 당뇨로 인한 망막박리가 생기고, 녹내장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비문증이 생겨서 마치 눈앞에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불편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농?어촌과 섬 지역에는 0.2이하의 저 시력을 가진 실명위기에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모든 분들을 위해 실로암 안과병원이 사랑의 아이 센터로서의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 그렇다면 그렇게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소요되는데 그 예산을 다 어떻게 확보할 계획이십니까?
=.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사랑의 헌금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가정에서의 결혼기념, 자녀 입학기념, 돌 기념, 그리고 일일찻집, 바자회 등을 하여 도와주고 있습니다. 2001년 맹 학생 선교대회도 뜻 있는 분들의 자그만 도움이 모여서 큰일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실로암 안과병원은 기본적인 재정을 예치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필요한 것을 주셔서 모든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와 여유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와 도움을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와 선교와 개안수술을 위해 협력해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한 사람에게 개안수술로 빛을 찾아주려면 약 30만원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30만원의 돈은 의사들의 월급이나 병원 운영비가 아니고, 요즘에 수술을 받으려면 반드시 영구적인 렌즈와 같은 인공수정체를 눈에 삽입합니다. 이 렌즈를 삽입하는 데 1인 한쪽 눈에 25만원이 소요가 됩니다. 기타 마취 비를 포함하여 30만원이 해당하는 후원금입니다.
 
     ▲ 김선태 원장이 기도하는 장면    ? 나눔뉴스
-. 실로암 안과병원이 22년간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22년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로 큰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된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기저기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새 생명의 빛을 찾는 일에 여러분들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큰일을 하여 올 수 있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가장 인상 깊고 감동적인 일 중에서는 귀한 아기의 돌 반지 257개를 개안수술기금에 써 달라고 직접 가져와 바친 부모님이 있었고요. 어떤 분은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그 길로 실로암 안과병원을 찾아와 돌아가신 어머니 뜻을 따라 베개 밑에 차곡차곡 모아놓으신 용돈을 개안수술 헌금으로 바친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 권사님이나 집사님들은 김장때 새우젓이나 고추판매를 하고 일년 내내 계란 장사를 하여서 그 기금을 모아 헌금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실로암 안과병원이 세워진 초장기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때 천안중앙교회 이순 목사님이 목회 방침으로 가정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축하잔치 경비를 절약해서 한사람에게 빛을 찾아주기 운동을 하여주셔서 모든 교인들이 그 뜻에 참여해 30만씩 협력해 주어서 대단히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여성 맹 인분은 어렸을 때 피난 나와 영양부족으로 눈이 안 좋았지만 가난하여 치료받지 못해 그만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한이 맺혀서 정부에서 생계비로 받는 보조금 중에서 일부를 개안수술 헌금을 할 목적을 세우고 보험을 들어 몇 천만이 되는 돈을 만기가 되는 날 그대로 개안수술기금으로 바치셨습니다. 임대주택에서 혼자 매우 어렵게 사시는 분이지만 자신이 기도하고 작정한 것이기에 내 돈이 아니라고 하시며 자신을 이제 잊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크게는 지난해 몇몇 교회에서 교회 창립기금으로 개안수술 기금을 창립 년수 대로 조성하여 주셔서 그 어느 해 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빛을 찾아 줄 수 있었습니다.
 
-. 그러면 목사님! 실로암 안과병원이 개원된 지 22여년이 넘었는데요? 지금까지 실로암 안과병원을 통해서 몇 명에게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로 실명을 예방했으며 몇 명에게 개안수술로 빛을 찾아 주었습니까?
=. 대략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을 받고 실명예방과 눈의 고통을 덜어준 형제자매는 약 34만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개안수술을 받고 새 생명의 빛을 찾은 수는 약 2만 7천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어느 종합병원에서도 할 수 없는 매우 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 목사님, 실로암 안과병원이 다른 종합병원이나 개인병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 저희 실로암 안과병원은 모든 직원들이 매일 아침 8시에 경건회를 30분간 드리고 진료와 수술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술 시에는 반드시 의사와 간호사가 수술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시작합니다. 실로암 안과병원은 간호사들로 구성된 엔젤스 보이스 중창단이 있어서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에는 대곡을 연주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예배 시에는 반드시 환자와 보호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목사와 의료진들이 병실을 회진하면서 환자를 위해 기도해드립니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동안 감동 받고 주님을 영접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떤 환자는 떡도 해오고 과일도 사오고 사탕도 사와서 모든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 동안에 병원에 오는 환자들에게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망교회에서 성탄절 헌금 중 일부를 보내주시는 헌금과 예수소망교회에서 보내주시는 헌금으로 하고 있습니다.

-. 실로암 안과안병원은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매우 상상 못 할 신비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지요?
=.우선 국내에서나 세계에서 맹인이 안과병원을 설립하고 맹인이 원장이 되는 일은 실로암 안과병원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대다수 병원은 설립하게 되면 전문 의사들이 분야별로 원장을 하나 실로암 안과병원은 맹인 목사가 설립의 시초가 되어 맹인이 안과병원 원장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또한 46인승 리무진 버스를 개조하여 버스 안에 완전한 안과 의료시설을 갖춘  “움직이는 실로암 안과병원”을 만들어서 농?어촌과 섬지역을 1년에 40주간(회)을 순회하면서 현지에서 진료하고 그 자리에서 수술하는 것은 실로암안과병원이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실로암 안과병원은 적자가 나야 설립정신이 살아나는 병원입니다 모자라기 때문에 기도하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후원해 주신 그 힘으로 사회와 교회를 위해 헌신봉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2년간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많습니다만 엑시머 레이저라는 라식기계로 인해 의사들이 돈을 버는데 너무 관심이 많아 예고 없이 계약기간을 지키지 않고 떠날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날이 가까워지는데 돈이 없어서 제대로 급여를 지급 못할 때 마음 아팠습니다. 그리고 환자 중에서는 기대를 걸고 실로암 안과병원을 찾아와 진찰을 받은 후 망막과 신경이 다 파괴되고 상해서 수술을 해도 빛을 찾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환자가 실망하고 우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 실로암 안과병원이 개원한지 22년이 되었는데요? 앞으로 보다 더 성숙한 안과병원으로써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 저는 실로암 안과병원에 대한 앞으로의 꿈을 매우 크게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있는 병원보다 좀 더 넓은 대지를 사서 병원다운 병원을 건축할 계획입니다. 환자가 병원 안에 들어오면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치료와 더불어 안정할 수 있도록 교회나 수도원 느낌을 줄 수 있는 병원의 면모를 갖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진료실도 쾌적하게 하고 신형의료기계도 구입해서 다른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실로암 안과병원에서는 치료와 수술을 해서 한국에서 제일가는 안과병원으로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더불어 병원 주위에 각종 과일나무를 심고 환자와 보호자가 나와서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솜씨를 느낄 수 있도록 자연을 통한 치유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뜻 있는 분들의 도움이 있을 때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아이(eye)센터로 발전 시켰으면 합니다. 현재 건물과 대지를 가지고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원래 목적한데로 837평의 최창근 장로의 소유 대지 산 그대로 사용했다면 가능했을터인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게 재매각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실로암 안과병원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바라기는 선교와 더불어 영의 눈과 육의 눈을 치료하는 새 생명의 밝은 빛을 치료하는 아이(eye)센터가 저의기도 제목입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가 있을 때 잘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  시각장애 환아에게 희망의 빛을 주는 김선태 목사 
-. 목사님께서는 실로암 안과병원뿐만 아니라 사회복지법인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회를 만드시고 복지관도 운영하면서 많은 맹인들이 각종 재활훈련과 직업훈련을 받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은 어떻게 조성하시게 되셨는지요?
=.사회복지법인을 조성하게 된 경우는 어떤 분이 회갑을 맞아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두 부부가 모두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장례식을 치른 후에 부모님이 사놓으신 봉천동 198평 대지를 맹인선교회에 기증하시므로 그것이 시초가 되어 사회복지법인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을 세워 맹인들이면 누구나 와서 재활훈련과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복지관은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2분 거리로 복지관 중에서 제일 교통이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 같은 경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또는 사회사업기관에 헌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교회나 장애인들을 위해서 유산을 바치는 정서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바쳐주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합니다.

-. 목사님께서는 35년간 앞을 못 보는 맹인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을 간단하게 피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첫째로 전국맹인형제자매들에게 점자 성경, 찬송가를 무료로 약15만부 이상 보급을 하였습니다.

둘째로 맹인교회를 세우고 10여교회 이상의 맹인교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세운 교회는 서울노회 소속 한국맹인연합교회입니다.

셋째로 맹인 대학생과 신학생 약 1천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서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들 중에는 박사도 탄생되었고 교수나 성직자, 교사 등이 되어서 전국기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넷째로 실로암 안과병원을 세우는데 주역으로서 실로암 안과병원을 20년 간 발전시켰습니다. 실로암 안과병원이 탄생된 동기는 전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님께서 맹인을 위한 음악회에 참석해서 맹인 소녀의 간증을 통하여 감동을 받고 뜻있는 실업인 들의 도움을 받아 837평의 대지를 구입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400평 미만의 대지 위에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다섯째로 이번에 서울노회에서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부 노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한국교회의 자랑이 되었고, 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시각장애인들도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어디서나 쓰임 받을 수 있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노회 노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서울노회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어려움과 가난과 절망 중에서 어떻게 정상인과 똑같이 공부 할 수 있었고 또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가능성을 확신하고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는 말씀을 믿고 신앙으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 정상인 학생이 8시간을 잘 때 나는 5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잠을 배척하면서 밤새도록 공부하고 새벽이면 교회에 나가서 새벽 기도를 드리고 그 당시 50환짜리 빵 하나를 사서 펌프 물을 받아 그 물과 빵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정상이 되기 위해서는 땀과 눈물로 순교의 신앙과 정신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 자리에 있게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 장애인들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희망은 절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제가 부산 맹아원에 있을 때 빈부의 차이가 없고 학대 받지 않고 사감이 희망이 있다고 칭찬했다면 맹아원을 나올 수도 없었고 정상인 학교에 갈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감의 절망적인 말은 저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땀과 눈물을 바쳐 노력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시는 놀라운 기적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 목사님은 꿈을 다 이루어서 한국의 남자 헬렌 켈러, 3가지 박사 학위를 가지셨는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더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저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교회를 세우고 맹인 교역자들의 사역을 도와주었고 천 여명에 가까운 맹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지도자 양성을 하였고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회를 설립하고 복지관을 통해서 맹인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故한경직 목사님의 기도와 격려와 많은 분들의 협력으로 실로암 안과병원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약 2만 7천여 명이 넘는 맹인들에게 개안 수술로 새 생명의 빛을 찾아 주었고 34만 명이 넘는 실명위기에 있는 대상자들에게 사랑의 무료 안과 진료를 통해 실명을 예방하고 눈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귀한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발전하여 실로암 아이센터를 건립하여 한국과 아시아 후진국의 맹인들을 선교하면서 실명예방과 개안수술을 하려고 한다. 실로암 아이 센터는 지하 3~4층, 지상 9층, 총 12~13층으로 건립하여 영혼과 육신을 전적으로 치료하는 전인치유센터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할 것이다. 실로암 아이센터는 총 2,400평 규모의 건물로서 약 2년간의 공사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한국과 아시아의 사랑의 눈 센터 역할을 하게 되며 현재 설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새로 건립하게 될 실로암 아이센터의 건축비 예산은 어느 정도 되나요?
=.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의 총 예산은 약 12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산하고 있다.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을 위해 작게는 벽돌 한 장에 천원으로 시작하여 벽돌 열 장, 백 장, 천 장, 형편대로 협력해 주실 것을 홍보하고 있다. 한 평을 기증할 시에는 4백만원~4백 5십만원을 도와주십사 하는 호소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진료실이나 입원실, 수술실, 검사실, 기타 한 실을 기증할 시에는 2천만원~2천 5백만원을 도와주십사 청원을 하고 있다. 한 층을 기증할 시에는 4억원~4억5천만원이 소요됩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위해서 국내외적으로 협력해 줄 것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아이센터가 다 세워질 때에 기증해주신 분들의 이름을 아이센터 현관 동판에 새겨서 자손만대 믿음의 유산으로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개인과 여러분들이 동참해 주어서 실로암 아이센터가 건립되면 하나님과 한국 교회 그리고 사회에 바쳐서 빛의 소망을 주는 병원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도의 목표이고 제목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3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앞으로 어떤 인생관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기쁨은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바치고 더욱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모든 분들을 더욱 섬기고 베푸는 삶을 살겠다. 사람의 성공에 대해 톨스토이의 명언을 빌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으며 성공할 수 있었다. 성공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별히 아내와 딸들에게 감사드린다. 가족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말씀과 책을 읽어 주며 잘 보살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아내에게 미안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맹인 수용원 고아원에서 맹인들과 함께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며 신혼의 밤을 보낸 것이다. 그 가난한 생활 속에서 어떤 때는 길가에서 파는 호떡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고 선교 기관에서 일할 때 도시락을 싸주면서도 막상 아내는 점심을 굶을 때가 많았다. 자녀들에게는 먹고 싶어 하던 아이스크림 하나 마음대로 사주지 못하여서 마음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일본을 다녀 올 때 사 들고 온 바나나를 다른 분께 선물로 드리고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딸들에게는 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 실로암안과병원 원장 김선태 목사 기도장면 ? 나눔뉴스
-. 세상을 어떻게 보며 또 감사한 것은 무엇인가요?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죄도 있지만 사람과 돈이 더 무섭다. 그러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 교회나 미국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 시각 장애인이라고 하여 동정심으로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며 또 그들이 그를 정상인으로 대하고 생각해주는 것이다. 모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생활을 절약해서 조금씩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바치고 교회 음악에 대한 발전을 위해서 몇 대의 피아노도 기증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신대원 3년, 대학원 2년, 모두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신학과 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정립하였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앞으로 모교의 발전을 위해 힘이 닿는 데까지 많은 부분을 바칠 것이다.
 
-. 이 기회를 통해서 목사님께서 교회와 사회에 특별히 제언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무엇입니까?
=.대다수 교회들은 해외선교에는 관심을 가지고 선교비로 큰 금액을 도와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데 국내 선교에는 소극적인 면이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개안 수술비를 돕는 교회를 보면 구제금 항목으로 5만원, 10만원씩 돕다가 교회 건축을 하거나 기도원을 건축하게 되고 사회부장이나 구제부장이 바뀌면 그것마저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많습니다. 교회들이 선교차원에서 협력해 주신다면 더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많은데 아직까지도 20만 시각장애인과 농?어촌, 섬지역의 500만 저 시력자 들의 선교와 사랑의 무료안과진료를 통한 실명예방과 개안수술을 위해서 전담 간호사나 전문안과의사 한사람을 책임져 주는 교회는 하나도 없는 것이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우리 통합측 교단만 하더라도 30억, 50억, 100억, 200억 심지어는 400억의 예산을 세운 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맹인들의 선교와 개안수술을 위해 참여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예산에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의미로 전담 간호사나 전문 의사 사례비 일부라도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비기독교 회사 삼성SDI에서는 매월 농?어촌과 섬지역의 이동진료를 위해서 한사람의 의사 사례비와 20명의 개안 수술비를 후원해 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비 기독교회사도 이 귀한 일에 참여하는데 대형교회들이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와 개안수술을 위해 협력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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