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註: 한국디카시협회에서 우수 시론으로 권장하고 있는 글입니다. 내용이 디카시 창작응용의 정곡을 찌르고 있어 양해하에 펀글을 공유합니다. 조르조 아감벤의 지론대로 " 시는 철학을, 철학은 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가 시창작 공부하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철학적 인식이 반영되지 않는 시는 "몸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꺼내는 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언의 지론대로 "맥아리"가 없는 결과가 되겠습니다. 디카시 속에도 반드시 철학적 인식이 어떤 행태로는 담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카시를 쓰시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悳泉>
디카시의 철학적 가능성에 관한 시론試論
김겸(문학평론가․시인)*
2004년 4월, 이전 이후
1.
이상옥 시인이 한국문학도서관 개인서재 연재 코너에 처음으로 디카시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여 작품을 게재한 2004년 4월, 그리고 같은 해 9월 최초의 디카시집 『고성 가도 固城 街道』를 출간한 이래, 디카시(dica-poem)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되고 더 나아가 교과서에도 게재되어 그 장르적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장르의 창안자는 물론이거니와 이에 쏟아부어진 수많은 시인․비평가들의 각고의 노력이 오늘의 디카시의 부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경남고성국제디카시페스티벌과 같은 지역 축제로, 여러 공모전으로 그 대중적 기반은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으며 한류콘텐츠의 하나로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2.
이러한 디카시가 새로운 문학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그 문학적 전사(前史)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1980년대 “구체시의 영향 아래 형태시로써 전통 시형식의 해체와 전복을 시도”한 황지우는 콜라주와 몽타주, 패러디 등을 통하여 사진이나 시사 만화 등을 시에 도입하여 폭압적인 정치현실을 풍자하였다. 더 나아가 거대서사(grand récit)가 붕괴한 1990년대는 디지털 환경의 맹아와 만나면서 시의 탈장르화와 장르 확산은 보다 가속화되었다. 특히 “시가 사진을 설명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진과 한 몸을 이루며 새로운 의미의 공감각성을 확립”하는 시적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준 신현림의 경우는 디카시의 전사로서 뚜렷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외로운 마약, 외로운 섹스」와 같은 시를 보면,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순간 포착하여 짧은 언술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는 오늘날의 디카시와는 차이가 있지만, 포토포엠(photo-poem)과 같이 “시가 먼저 씌어지고 그와 어울리는 사진 영상을 병치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제목과 사진과 언술이 각각의 자장을 지니며 서로를 밀치고 삼투하면서 대화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어 디카시의 전사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주차장 앞에서 한 사내가 지워지고 있소
우리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인생을 모를 거요
나날은 빌린 모자처럼 헐렁거려 쉽게 날아가오
나는 고독과 그리움만 느끼며 헤매왔소
시를 쓰며 외로움을 잊는다는 희망이
외로움을 견디게 하오
―신현림, 「외로운 마약, 외로운 섹스」전문
3.
먼저 좌측에 사진은 거리의 텅 빈 의자를 비추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주차장 입구에 기울어진 검은 그림자이고, 마지막 사진은 ‘詩가 마약이고 슬픈 애인이다. 95. 7 신현림’이라고 씌어있는 스크레치이다. 이 시의 제목, ‘외로운 마약’은 세 번째 사진을 통해서 보면, ‘詩’와 ‘詩를 쓰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외로운 섹스’는 ‘詩’가 ‘슬픈 애인’과 같다는 것과 의미가 통한다. 결국 시와 시를 쓰는 일은 외로운 마약과 같은 것이고, 슬픈 애인과 같은 것이다. 첫 번째 사진은 시인의 숙명적 외로움, 실존적 고독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또 두 번째 사진 ‘텅 빈 주차장 입구의 검은 그림자’와 연결된다. 이 사진은 첫 행에서 ‘주차장 앞에서 한 사내가 지워지고 있소’와 통한다. 그 이하의 진술들을 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생을 모를 것이고, (시를 써왔던) 나날은 빌린 모자처럼 헐렁거리며 쉽게 날아간다고 진술된다. 나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왔고, 그러나 이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외로운 마약과 같은, 외로운 섹스와 같은 시(詩)라는 진술(세 번째 사진)과 다시 호응된다. 이처럼 신현림의 시에서는 시와 그림 등이 보조적인 자료로 활용되지 않고 대화적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변증법적인 벡터가 시적 의미의 자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4.
오늘날 디카시의 장르적 정합성은 “영상과 문자가 (대등하게-인용자 주) 결합하여” 완성되는 것이지, “영상에 시가 (종속적으로-인용자 주) 결합된 것은 아니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디카시가 사물을 통해 시인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물은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시인은 사물을 통해 말하는 경지”를 가리킨다. 이때 날시(raw poem)로 명명된 디지털 카메라에 포착된 “시창작의 단초”라 할 수 있는 시적 영상은 문자와 결합하게 되면서 “‘날’이라는 말은 떨어져나가고 하나의 완전한 시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진과 시적 언어가 하나의 디카시로 완성되는 사태는 “짧은 찰나의 예리한 감각과 안목으로 영상 미학을 발굴”한다는 뜻에서의 순간예술과 이에 결합되는 “콤팩트한 시적 언어가 견고한 의미구조를 생성하며 길이 명작으로 남을 기대감을 표출”한다는 의미에서의 영속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을 성립시키는 형국”으로 이해될 수 있다.
5.
이상옥 시인은 “시는 언어 너머에도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어 이전에 숨어 있는 시적 비의이면서 언표화되기 이전의 근원 존재(은폐된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원의 송신자의 손짓에 디지털 카메라가 가 닿고 그것에 의해서 포착된 영상이 시적 언술과 결합하여 수신자인 실제독자 안에서 “다차원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디카시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적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시적 의미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여러 오브제와 시적 진술 내부의 시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다성성polyphonic, 대화적 관계
6.
일찍이 미하일 바흐친(M. Bakhtin)은 카니발(carnival)의 개념을 동원해 다원성과 상대성을 중심으로 대화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금육이 시작되기 전 사순절 전야에 술과 고기를 먹으며 놀이를 하던 사육제는 중세인들에게는 금욕적인 기독교적 공식문화의 엄숙성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세계로서, 바흐친은 이러한 금기를 넘어서는 카니발적 세계 감각에서 민중의 자유분방함과 웃음, 계급적 전도, 정치적 해방 등의 메타포를 감지해 낸다.
7.
여기서 바흐친이 착목한 민중 정신의 다성성(polyphony)은 계급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 속에 내장된 ‘대화적 관계’에 그 핵심이 있다. 바흐친에 따르면 ‘대화적 관계’란 언술과 언술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언술의 한 부분이나 개별적인 어느 한 단어에서도 가능하다. 한편, 대화적 관계는 언어 스타일이나 사회적 방언에서도 생겨날 수 있으며 심지어 한 개인에서도 가능하다. 이 경우 그것은 언술 전체나 언술의 한 부분 혹은 한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화적 관계는 기호적인 모든 현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
8.
담론적 층위에서 언어는 일종의 사회적 실천이고 그 실천은 사회구조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쉬르(F. Saussure) 언어학은 연구 대상을 사회적․공동체적 언어체계(랑그)를 대상으로 삼으면서 휴머니즘적 사회관을 도입하여 모든 사회적인 것은 동질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된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추상적 객관주의 언어학’은 사회의 모든 갈등을 무시하고 심지어 담론 간의 차이까지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쉬르 류의 추상적 언어학이 언어를 단순한 수단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바흐친의 초언어학(translinguistics)은 소통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가 톨스토이의 단성적 소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성적 소설에 주목했던 것은 인물들의 개성적인 목소리들(발화) 속에 담긴 상호 대화적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비결정적 담론 때문이다.
9.
디카시는 사진이라는 시각 이미지와 시라는 언어적 진술 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양가치를 생산하는 ‘다성성’의 장르다. 이는 시가 사진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시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 행간에 감각의 중추가 숨어 있다는 의미다. 시가 지니는 구심적 장르로서의 가치는 사진과 언어가 융합된 디카시에서는 원심적 확장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바흐찐이 말하는 카니발화의 개념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단성적 세계를 복수악센트화(Multi-Accentualization)하는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10.
디카시에서 발생하는 대화적 관계는 시가 사진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기도 하고 사진이 시적 진술을 재규정하기도 하는 일련의 이질 음성(hétérophonie)들의 교환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는 사진과 시라는 두 영역 안에서 일대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적 관계가 본질적으로 담론의 전영역에서 발생하듯이, 사진의 구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오브제와 시의 모든 언술과 언술들 사이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햇살이 일찍 방문을 열었다
밤낮 밖이며 끝인 처마를
방안에 제일 먼저 들였다
좌정한 처마가 문밖 초록시를 읽고 있다
―최광임, 「아침」전문
11.
먼저 사진은 초록의 초목이 보이는 열린 방문 사이로 방바닥에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운 어느 한옥의 아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시각 정보는 눈에 들어오는 몇 가지 사물과 현상을 동원하여 이렇게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사진이 담고 있는 풍경과 마주 놓이는 시적 진술은 사진 속 장면을 낯설게 재구성하며 일상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평면적 풍경의 이면을 드러낸다.
12.
우선 시적 진술은 행위의 주체를 모두 사물에게 이양하고 있다. “시의 주도권이 시인에게서 사물에게로 옮겨진 것”이라는 디카시의 근본적 특질이 이 시에서 여실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방문을 연 주체는 사람이 아닌 햇살이다. 이렇게 전도된 인식은 “밤낮 밖이며 끝인 처마”를 방안에 제일 먼저 들였다는 현상학적 환원을 가능케 한다. 사물이 초점화자가 된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내포화자의 판단중지(epoché)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햇살에 의해 언제나 밖인 처마가 방안으로 들어왔다면, 시각의 주체는 햇살에게서 처마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방안에 “좌정한 처마”는 다시 방문 밖 초록의 풍경(초록시)을 읽는다. 통사론적으로는 방문을 연 햇살이 주어일 때는(“햇살이”) 처마는 목적어가 되고(“처마를”), 처마가 주어가 될 때는(“처마가”) 문밖의 초록 풍경이 목적어가 되는(“초록시를”)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물에게 주체가 이양되고 사물들 사이의 행위주가 교체됨에 따라 존재를 둘러싼 현상의 이면이 드러나고 안팎의 소통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13.
디카시에서 시인은 사진 속 풍경을 전하는 “에이전트(agent)의 역할”을 담당할 뿐, 사물들이 주체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가능케 하는, 대화적 국면을 형성한다. 이처럼 디카시에는 사진 속 대상(사물들), 내포화자, 화자(초점화자)가 역동적인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여 한 편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디카시는 ‘구심적 언어’라고 지칭되는 서정시의 특성을 지님과 동시에 사물들 자체가 행위주가 되어 카니발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원심적 언어’의 특성까지도 지니고 있어, 전통적인 장르 규범으로는 포획하기 어려운 다성성의 담화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동affect, 생성의 과정
14.
디카시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존재들― 송신자․ 실제 시인․ 포착된 사물(들)․ 내포 화자․ 화자․ 청자․내포 독자․ 실제 독자― 사이의 대화적 관계는 곧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정동(affect)의 생성 과정을 내포한다. 정동은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감정이 아니라 “재현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에 신체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렬도”에 따라 결정된다. 감정(emotion)은 희로애락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의식화된 마음의 상태이다. 하지만 정동은 의식을 매개할 시간적 여유 없이 바깥의 자극이나 정보가 직접적으로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마수미(B. Massumi)가 말한 바와 같이 감정(정서)은 경험의 질을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정동은 존재와 존재들 사이(in-between-ness)에서 의식이나 감정 혹은 사유들을 발생시키는 일종의 ‘되어감’의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
15.
한 선행 비평가의 지적대로 시의 창작과 해석과정에서 정동(affect)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이러한 정동(affect)의 흘러 넘침(overflow)은 ‘사회’, ‘시민성’의 경계를 문란하게 만들어버리는 ‘자연적인 것(자연 상태)’의 힘으로 출현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문학의 창작과 해석의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정치적 에네르기로 확산되기도 한다는 점에 깊은 의미가 있다. 결국 작품을 (혹은 세계를)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해석의 주체와 대상(들) 사이에서 정동(affect)이 촉발되고 흐름이 형성되고 흘러넘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동(affect)은 결국 사회적 약호 체계 안에서 다시 정식화되고 에네르기는 소멸되지만, 계속적인 해석학적 욕망은 끊임없이 정동을 산출해 낸다. 산다는 것이 곧 끊임없는 정보처리(해석)의 과정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정동이 발생하고 그 에너지는 우리를 여기가 아닌 저기로 인도한다.
느닷없는 너로 인해 지붕을 얻었어
천둥 번개도 이젠 두렵지 않아
고마운데 고맙단 말도 못하고
노란 잇몸 드러낸 채
배시시 웃고 있는 거 보이니?
―서 하, 「노란 미소」전문
16.
이 시에서 제시된 두 사물―차단석(bollard)과 노란 민들레―의 관계를 보자. 차단석은 앞에 보이는 타이어가 환기하듯 자동차 바퀴에 밀려 쓰러져 있고 그 그늘 아래로 노란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있다. 차단석이 더 심하게 넘어졌다면 민들레는 깔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사진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는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시적 진술은 이러한 상태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며 상황을 재해석한다. 초점화자로 등장하는 노란 민들레는 청자인 자신의 위로 넘어진 차단석에게 “느닷없는 너로 인해 지붕을 얻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천둥 번개”로 상징되는 어떤 시련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17,
노란 민들레와 그 위로 쓰러진 차단석 사이에 형성되는 정동(affect)적 상황이 민들레의 입을 통해 이렇게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차단석의 쓰러짐이라는 불행한 상황은 민들레가 죽지 않을 만큼의 절묘한 각도로 끝이 났고, 애초의 느닷없이 다가온 두려움과 공포(여기)는, 넘어진 차단석이 민들레에게 든든한 지붕이 됨으로써 보살핌과 고마움의 관계(저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들레는 “고마운데 고맙단 말도 못하고” 그저 “노란 잇몸을 드러낸 채” “배시시 웃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먼 자리에 있지 않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생의 위기와 그로 인한 공포는 쓰러진 차단석과 민들레의 관계처럼 살아갈만한 기적같은 순간들을 역설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8.
이처럼 존재와 존재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정동(affect)은 생성․ 변화․ 발전이라는 ‘되어감’의 흐름을 보여준다. 디카시는 이러한 사물(들) 사이의 정동적(affect) 상황을 예각적으로 포착하고 이를 해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인식의 백터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적 요소를 깊이 함의하고 있다. 이처럼 디카시는 창작과 해석의 과정에서 사물과 사물, 시어와 사물, 시어와 시어 사이에 창작자(해석자)가 개입하는 순간 정동(affect)이 촉발되고 흐름이 형성되며 흘러넘쳐 하나의 해석(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유목, 사이에-존재하기être-entre
19.
모든 파롤(언어능력/말투)은 타자를 향한 말 걸기이다. 독백의 경우에도 他者化한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든 다른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든, 모든 파롤은 하나의 이음줄(trait d’union)이다. 귀스도르프(G. Gusdorf)의 이러한 견해는 “언어의 감옥”으로 지칭되는 공시언어학 모델에 기초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타파하면서 개인의 구체적인 발화체로서의 파롤의 의미와 가치를 실존주의적 차원에서 재맥락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다.
20.
귀스도르프는 “모든 삶은 우리에게 표현적 존재”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수학을 세계를 기술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랑그로 파악한다. 랑그라는 체계에 의해서 세계가 유지되고 지탱된다 할지라도 고착된 랑그는 변화하지 않는 삶이자 부패의 신호이다. 시인은 이렇게 삼인칭으로 죽어버린 “랑그의 몰개성성”에서 벗어나 파롤을 통해 말을 되살리는데, 이것이 곧 “스타일(style)의 창조”를 의미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난해성은 언어적 혁신의 산물이지만 이것이 종국적으로 보편화될 때 “어제의 혁신자들은 오늘의 고전 작가들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은 탈코드화(decodification)와 재코드화(recodification)라는 기호학적 개념 혹은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와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라는 철학적 개념과 호환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파롤을 통해 끊임없이 언어적 탈주를 모색하는 자이다.
21.
질 들뢰즈(G. Deleuze)가 말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이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이에-존재하기(être-entre), 사이를 지나가기, 간주곡이기”라는 도주선(ligne de fuite)을 확보해야 한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나무와 리좀을 대조한다. 전자가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hierarchy)하는 반면,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나무처럼 되면 욕망으로부터 아무 것도 생기지 않지만, 리좀을 통해서 욕망은 생산되고 움직인다. 들뢰즈는 “손은 탈영토화된 과거의 앞발”이라고 비유한다. 원숭이의 그것에 비교했을 때 인간의 손은 얼마나 탈영토화된 것인가. 이처럼 인간의 입이 음식물과 소음이 아닌 말로 채워진 것은 얼마나 기묘한 탈영토화인가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22.
한 사람에게 강요된 교육이라는 이름의 정상화는 그 개인을 가정된 이상에 순응하도록 한다. 그러한 주체화의 점으로부터 언표행위의 주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공리계는 “모든 선들을 봉쇄하고, 모든 것들을 점 체계로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귀스도르프 식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랑그의 세계이다. 이에 대립되는 “도주의 벡터들 또는 긴장들의 전체 배치물”은 리좀화되는 예술의 모든 가치를 대변한다.
23.
디카시에서 사진과 언어는, 아니 사진 속의 오브제들과 언어 속의 모든 단어들은 사실상 어떤 기관으로 분화할지 알 수 없는 ‘알’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들뢰즈가 유기체의 확장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상태를 뜻하는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s, 이하 CsO)를 명시적으로 가리킨다. 이들은 각각의 언어적 밀도와 강도를 지니며 동시적으로 서로 넘나들며 온갖 변이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무수한 파롤들 간에 형성되는 이음줄은 고정되지 않은 채로 능동적인 도주선을 확보해 간다. 디카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카오스-리듬” 혹은 “카오스모스(Chaosmos)”가 발생한다. 이 그램분자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도주의 백터는 사이-내 존재가 빚어내는 대화적 관계에 다름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타자에게 말을 거는 이음줄의 연쇄가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생성의 블록과도 같이 유목적인 패치워크를 만들어 간다.
24.
이는 우리의 모든 저항을 “오배(誤配-한자: 인용자)의 재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관광객의 원리”와 통한다.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데리다(J. Derrida)에게서 빌려온 이 오배의 개념은 일종의 ‘바꿔 연결하기’라 할 수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바로 이러한 관광객이 “들뜸(우연성)”에 지배를 받는다는 데 주목한다. 이때 관광객은 “현실의 2차 창작자”로서, 다중이 데모하러 간다면 (쓸데없이-인용자 주) 놀고 구경하러 간다. 그는 이와 같은 관광객의 관용에 기대어 공동체주의(내셔널리즘)와 자유지상주의(글로벌리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우는 동안 나는
슬프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하였다
맞거나 맞지 않는 토정비결처럼
어디 앉아도 음표가 되는 생의 미묘함
무거운 듯 가벼운 듯 울음인 듯 노랜 듯
―나혜경, 「새들」전문
25.
사진 속에는 잔뜩 흐린 듯한 하늘을 배경으로 오선지(실제로는 4줄의 전선) 같은 전깃줄의 제일 꼭대기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우리의 언어로 새는 울지만, 서양의 언어로 새는 노래한다. 이처럼 언어는 존재를 선험적(a priori)으로 규정한다. 그가 우는 동안 화자는 “슬프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기도 하였다”고 짐짓 담담함을 가장하여 말하고 있지만, 화자의 생의 이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맞거나 맞지 않는 토정비결처럼” 무수한 엇갈림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이 시적 진술의 절정은 “어디 앉아도 음표가 되는 생의 미묘함”이라는 그 다음 시행에 있다. 생의 시간은 우리를 끊임없이 어디로 데려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언명보다는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라캉(J. Lacan)의 말은 보다 실재에 부합한다. 우리가 생의 오선지 어디에 자리하더라도 모두 음표가 된다. 그(새)가 전깃줄에 앉아서 우는지 노래하는지는 모르지만 고독한 한 때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화자는 “무거운 듯 가벼운 듯 울음인 듯 노랜 듯” 알 수 없는 새소리처럼 알 수 없는 생을 나직하게 읊조리고 있다.
27,
화자는 거창한 생의 목적이나 가치나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뜻을 알 수 없는 새소리와 같이 생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분명 공리계에 살고 있지만 이 시의 화자는 언표행위를 통해 주체화의 한 지점에 자신을 복속시키지 않는다. 화자는 단순하게 새가 운다 혹은 노래한다라는 식의 랑그의 세계를 거부하고 있다. 이때 화자는 하나의 충만한 가능성을 품은 ‘알’(CsO)이다. 자신의 생을 어떤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다. 어디 앉아도 음표가 되는 유목적인 우리의 생처럼 말이다.
도주의 벡터vector, 해방의 가능성
28.
구조주의 철학의 초석을 놓은 소쉬르의 언어학의 기본은 기표와 기의가 공고하게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이러한 개념 자체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일체의 휴머니즘을 철저하게 파괴하려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라캉은 “현대 언어학의 기초가 되는 연산식을 S/s”로 표현한다. 소쉬르가 S에 기의를 대입시킨 반면, 그는 기표를 위치시킨다. 즉 라캉에게 의미는 기표들의 연쇄, 즉 “의미화의 사슬(signifying chain)”에 의해서 결합되는 것이다. 이때 기표는 기의 아래로의 끝없는 미끌어짐(glissement)이 있을 뿐이다. 단지 임시적인 안정의 순간이 있을 뿐인데 그는 이를 “누빔점”(point de capiton)이라는 용어로 비유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라캉의 언어의 욕망 그래프는 이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29.
위의 그래프에서 △으로 표현된 지점은 언표 즉 에농시아시옹(énonciation)을 가리키는데 이 발화는 포물선을 그리고 떨어진다. 이 사이를 언어적 팔루스가 관통하게 되는데, 여기서 바로 S’(이하 S1)의 지점과 S(이하 S2) 지점이 만나게 된다. 여기서 발화가 일어나면 S1이 표지되는데 이는 발화 주체의 ‘여기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S1은 아직까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도식에 따르면 S1은 S2의 지점에 가서야 비로소 ‘사후적’으로 의미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S1의 욕망은 왜곡되고 은폐될 수밖에 없는데 $의 표식이 그것을 의미한다.
30,
결국 이와 같은 끊임없는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이고 인류가 만들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항시 서사는 S1에 의해서 개시되었지만, 의미는 S2에 의해서 형성되고, 존재자는 결국 S2의 의미에 의해서 합의된 상징계의 권력 하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존재는 항시 은폐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기표가 또 다른 기표로 대체(라캉적 의미에서의 ‘환유’)되는 이 과정에는 “끈덕지게 틈새”가 남게 된다. 그러나 S2의 세계를 흔들 수 있는 것은 S1의 욕망이다. S2가 발화행위에 의해서 표지된 S1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S2는 자신의 질서를 낯선 S1의 욕망(라캉적 의미에서의 ‘은유’)에 개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1.
디카시의 언어적 욕망은 사진(사물)이라는 기표에 의해서 시작된다. 이것이 S1이라는 존재의 있음을 표지한다면 그 곁에 놓여지는 시적 언술은 그 존재의 의미를 고정(S2)하는 누빔점으로 기능한다. 이 과정을 통해 시인의 에농시아시옹(△)은 S2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욕망의 구멍을 낳게 되고 결국 존재 은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해석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의 욕망(S1)은 새로운 의미(S2)를 생산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공백은 해석자의 존재를 은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구멍이나 틈새로 표현되는 욕망의 잉여에 기인한다.
저버리다와 져버리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당신 곁에서
인생 한 짐이 쓰레기라고
말해주지 않아
고맙고 미안해요
―조혜경, 「미안해요」전문
32.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화의 주체가 무엇인가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마을 어귀에 서서 낙엽을 떨구는 나무이고 청자는 이 낙엽을 모아두는 노란색의 보관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실제 화자는 사건을 철저하게 밖에서 지켜볼 뿐 발화의 주체는 온전히 나무에게 이양되어 있다. 노란 낙엽을 떨구는 나무는 말한다. “저버리다와 져버리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나무의 한 해를 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낙엽이 ‘져 버리는’ 때는, 푸르른 생의 시간을 마감하고 삶(목숨)을 ‘저버리는’ 시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낙엽을 모으는 노란 보관함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쓰레기를 넣지 마세요!”라고. 이 경고문에는 낙엽이 쓰레기가 아니라는 뜻이 숨어 있다. 그리하여 나무가 말한다. “이렇게 당신 곁에서 / 인생 한 짐이 쓰레기라고 / 말해주지 않아 / 고맙고 미안해요”라고. 이러한 나무의 말에는 내포화자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지만, 사물들을 통한 해석의 과정에서도 그 발화의 욕망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33.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S1)은 분명 쓰레기(S2)이다. 이것이 곧 현실(상징계)의 문법이다. 그러나 낙엽 이외의 어떤 것(쓰레기)도 넣지 말라는 보관함의 경고문은 이러한 언어의 질서를 교란한다. 보관함에 입장에서 낙엽은 쓰레기가 아닐뿐더러 가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발화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존재(S1)는 낙엽을 쓰레기로 선행적으로 의미화했던 존재자(S2)의 세계를 사후적으로 폐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잉여와 같이 남은 감정은 무엇인가. 고마움과 미안함이다. 왜 고마운가? 자신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 미안한가? 한 생의 흔적을 가치있는 것으로 묵묵히 맡아주기 때문이다.
34.
디카시가 열어 보여주는 다성적인 대화적 국면 속에는 삶의 욕망과 의지가 다채롭게 개입되어 세계-내-존재인 우리를 성찰케 하고 삶의 새로운 지평에 눈뜨게 한다. 촌철살인의 “극순간의 양식”인 디카시는 강렬한 파롤의 시형식으로서 사진(사물들)과 시적 진술(언어) 사이에 수수되는 정동(affect)과 그 뒤에 숨은 시인과 독자의 언어적 욕망이 개입되어, 역동적인 카오스 리듬을 보여준다. 이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벡터는 거대한 존재자의 세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해방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랑시에르(J. Rancière) 식으로 말해서, 이것이 곧 우리 삶을 좀 더 자유롭게 하는 “미학적 실천(pratiques esthéthiques)”이라면 디지털 시대 “감성의 분할”을 새롭게 재규정하는 디카시야말로 그 첨병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시는 마약이고 슬픈 애인~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