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우리집 작은 방 벽면에 수묵화 한 점이 걸려 있다. 사방이 겨우 한 뼘 남짓한 소품인데 제목은 귀우도(歸牛圖)이다. 조선조 중기 이정(李楨)이란 사람이 그린 그림의 영인본이다.
오른 쪽 앞면에는 수초가 물살 위에 떠 있고, 어깨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노를 비스듬하게 쥐고 있다. 간단하면서도 격조 높은 그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의 배 한 척이면, 그것이 설경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간에 무조건 좋아하는 버릇이 생겼다.
잔잔히 흐르는 물살, 그 위로 떠가는 시간.
그러한 강물과 마주하게 되면 이내 서사정(逝斯亭)이 떠오르고 ‘가는자 이 같은가’ 했다는 공자의 그 말이 생각나곤 했다. 나 또한 발길이 막히면 강가에 나가 ‘가는자 이와 같은가’를 되뇌어 보기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강물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숨죽인 강물의 울음소리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아버지께서 자주 부르시곤 했던 노래,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목소리.
“이즈러진 조각악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이런 강물 위에 달빛마저 실린다면 가을 풍경으로서 나무랄 데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강물과 배와 달빛은 내게 우연히 각인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이든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가지를 내다 태우고 돌아 온 날 밤, 동생들 모르게 실컷 울어보려고 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도 달빛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달빛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왜인지 그다지 서럽지 않았다. 흰눈이 더러운 흙을 감싸듯, 달빛은 지상의 온갖 것들을 순화시키는 따스한 손길을 갖고 있는 듯싶었다.
달빛은 또 감성의 밝기를, 그리고 그 명암의 농도를 조종하는 장치도 있는 듯했다.
16년 전쯤 되나보다. 교단에서 두시(杜詩)를 가르칠 때였다.
마침 가을이어서 추흥(秋興) 여덟 수 가운데 나는 첫 번의 시를 골랐다.
또 국화는 피어 다시 눈물 지우고
배는 메인 체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고향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척의 작은 배
그 고주일계(孤舟一界繫)은 두보 자신일 것이다. 그는 오랜 표랑 끝에 무산(巫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벌써 폐병과 소갈증(당뇨)으로 신병이 깊은 후였다.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배 안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쉰 아홉이었다.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설경(雪景)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아니 내 경험 속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들어와 있었다. 서울이 집인데도 명절날 집에 가지 못하고 자취방에 멍하니 혼자 있을 때, 그때의 만월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빈 방, 그리고 달빛.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때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누르기 어려운 충일, 아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을까?
빈배와 달빛과 그 허기를
그래서 아마 그때부터 달빛은 나의 원형이 되었고, 빈 배는 그대로 나의 실존을 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저 수묵화 속에서 노옹(老翁)을 뻬버리고 아예 빈 배로 놔두고 싶다. 그 위에 달빛만 가득하다면 거기에 무얼 더 보태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나는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그 때문인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떠먹고 간다는 토끼처럼 도중에서 아예 목적을 버리고 마는 버릇, 투망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또 어획 자체를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배에 달빛만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무형의 그 달빛은 내게 있어 충분히 의미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으며, 언젠가부터 나도 혼자서 차오르는 달처럼 내 안에서 만월을 이룩하고 싶었다.
저 무욕대비(無慾大悲) 만월을.
*맹난자는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국대 불교철학를 나왔다.
우리나라 수필문학상은 모두 받았고, 오늘의 한국수필 대표하는
수필가이다. 상도 많이 받고, 문학단체 감투도 너무 많아서
여기에 소개하려니 끝이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