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두 시선
임병식 rbs1144@daum.net
사람이나 작품이나 특별한 얘깃거리가 깃들어 있어야 깊이와 풍미가 더해진다. 특히 예술작품을 생각할 때 한 작가의 삶이 투영되는 현상이 그러하지 않는가 한다. 가난에 찌들어 산 고흐는 살아생전 작품을 제값을 받고 팔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극심한 가난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 사실이 알려져서 유명해 졌다.
그러기는 노벨문학상을 탄 헤밍웨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싸 죽음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또 한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한 할복자살을 함으로써 세인에게 깊은 인상을 각인시켰다.
그런 일은 외국에서만 찾을 일도 아니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천재화가 이중섭은 6.25전쟁 중에 화선지와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주로 담배 곽에 붙은 은박지를 떼어내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박수근화백 역시 동시대를 살면서 호구지책을 위해 미군부대에서 병사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판 이력이 화가를 부각시켰다.
그 사연은 나중에 박완서 선생이 소설 <나목>이란 작품을 써서 화제가 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나머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죽은 성악가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사연은 어떤가.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으로 인해 그미가 부른 ‘사의 찬미’는 오래토록 인구에 회자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근대를 더듬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풍성한 얘깃거리를 전하는 사람은 천재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李箱)과 역시 천재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화백이 아닐까 싶다.
먼저 이상은 1910년 생으로 27세라는 섬광의 불꽃같은 짧은 생을 살다 갔다. 당시에는 크게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수많은 문학평론가가 평전을 쓸 정도로 우리 문학사에서 굳건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난해한 시와 함께 심리묘사가 뛰어난 소설작품을 남겼다. 그의 번뜩이는 천재성은 기생 금옥과 종로거리에 다방 <제비>을 열면서 그 간판을 ‘J B“라고 단 데서도 알 수 있다.
‘오감도’라는 시는 하도 난해하여 문학평론가들 사이에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암울한 삶을 그린 것이라는 설과, 단지 수음(手淫)하는 짓거리를 썼다는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독자로부터 비난이 등등했음에도 신문에 그의 시가 50여회나 연재 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것은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상허 이태준이 밀어붙여서 연재가 지속이 되었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그의 봇장도 대단하다.
또 한사람은 김환기다. 그는 1913년 생으로 이상보다는 세 살이 적다. 그는 향년 61세를 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을 다수 남겼다. 그의 작품 <우주>가 두 폭을 합친 가격이 132억에 낙찰이 되었다니 최고가를 기록한 면에서 한국 대표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경미술대학을 졸업 후 서양에서 활동하다 나중 홍익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그런데 이 두 천재 사이에 걸쳐있는 여인이 있다. 한번은 본명대로 변동림(卞東琳 1916-2004)으로 살고 두 번째는 남편의 성을 따서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산 사람이다. 그미는 경성여고보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대단한 수재였다.
그미는 나이 20세에 이상을 만나 결혼했다. 작품 <오감도>을 읽고서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를 배다른 언니는 극구 반대했단다. 이상이 심하게 결핵을 앓고 있어서였다.
그렇지만 떼어 말릴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한 기간은 고작 4개월. 친구이면서 조카뻘이 되는 화가 구본웅이 다리를 놓아주어 만나고 또 그가 이상의 병 치료를 위해 여비를 마련해 주어 도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발걸음이 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돼 붙잡혀서 경찰서 유치장에 한 달 남짓이나 갇혀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병이 악화되어 도쿄대학병원에서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부인 변동림이 연락을 받고 급히 갔을 때는 거의 의식도 없는 상태였다. 가까스로 임종만을 지켰을 뿐이었다. 그녀는 유골을 봉안 해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변동림은 그 후 김환기를 만났다. 이때도 언니는 유부남인 그와의 동거를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셋이나 있는데다 엄연히 그의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동거에 들어갔고 나중에 이혼이 됨으로써 정식부부가 되었다.
변동림은 동거를 반대하는 언니와 의절하면서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셈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시선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상을 진심으로 사랑했느냐는 것이다. 사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언니가 극구 반대를 했음에도 결혼을 감행한 것과, 진심으로 이상 문학을 좋아하고 그 재능을 알아본 것, 그리고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일본까지 건너가 임종을 지켜보고 유골을 봉안해 온 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이 임종 시에 도쿄의대학생들이 데스마스크를 떴는데 그것을 수습하지 않았고, 나중 이상의 여동생 말에 따르면 그미가 유품을 가지고 나갔는데 나중 진술에 의하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점이다.
그리고 김환기화백의 부인으로 살면서 보인 태도도 그렇다. 그를 잘 섬기며 최대한 작품 활동을 안정되게 도운 점이나, 작품을 잘 관리함으로서 평가를 드높인 점은 인정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동거에 들어감으로써 본처와 이혼을 하게 만들고, 자녀들도 잘 돌봐주지 않았다는 말이 무성하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두 천재를 사랑한 여인으로 많이 미화가 되고 있지만 비록 이상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상태로 사별을 했다고 해도 그의 유품은 하나쯤 챙겼어야 하지 않는가. 그의 천재성을 생각할 때 너무나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김화백과 동거에 들어갈 때도 그가 일방적으로 매달렸다는 말이 돌기도 하지만 그미의 언니가 했다는 말 또한 영 게운 하지가 않다. 자기를 키워주다시피 한 언니를 매도했다는 것인데, 후실로 들어가는 것을 말리는 데도 성과 이름까지 바꿔가며 보인 행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사랑인지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한 시대에 특별히 두 천재를 만나고 사랑하여 특이한 스토리텔링의 화젯거리를 남긴 것은 노변정담의 풍요에 더하여 한자락 예술인의 편린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2022)
첫댓글 수필가이며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였던 변동림 곧 감향안의 일생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갑자기 그 분에 대한 관심과 정이 솟아나 제 스스로 놀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녀만큼 극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도 없을듯 합니다.
두 천재의 부인으로 산 것도 그렇고, 그만큼 그들 천재들을 잘 알는 사람도 없을테니
특이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