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생각하라-㉓ 로마서 12장 3-8절 / 이동원목사 “3.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각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나니 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 6.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다른 선물들을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 7. 혹은 사역이면 우리가 우리의 사역하는 일로 섬기며,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섬기고, 8.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섬기며,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 그 일을 하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KJV)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뇌기업으로 알려진 IBM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IBM의 창설자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Senior)이라는 사람은 회사의 창업 시기에 사무실의 모든 벽마다 “think(생각하라)”는 단어를 부착해 놓았다고 합니다. 회사의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는 종종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더 깊이, 더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연설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회사의 번영기 때에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의 3절에서 우리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원문에 보시면 ‘지혜롭게’ 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관적으로 번역된 것으로 ‘지혜롭게’라는 말의 본래 뜻은 ‘냉철한 판단, 혹은 건강한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씀은 ‘냉철한 판단에 근거하여 생각 하십시오.’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성적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는 보다 더 이성적 종교에 속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 부분이라는 것을 강조했고 12장부터 16장 마지막 장까지는 크리스트 인들의 윤리적 삶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삶을 바로 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혹은 이웃을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제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개인적인 이기심을 뛰어 넘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길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로마서 12장2절에서 “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르게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가 있다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물론 과소평가도 나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열등감의 발로이며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과소평가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것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왜냐하면 과대평가를 하게 되면 자신을 신(神)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전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은 아직도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의 3절에 보시면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관해서 생각하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원문에 보시면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제한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과 믿음을 갖고 있어도 여전히 제한된 존재이며,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야 할 복음은 소크라테스 복음입니다. 즉 “네 자신을 알라”는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냉철하게 올바른 판단을 하십시오. 둘째로, 지체에 올바로 생각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들의 이웃에 대해서, 다른 성도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완전하시고 충만한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신앙의 가장 커다란 명제입니다. 부족한 내가 어떻게 내 안에 오신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은사와 직분과 역할을 주셨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신 이유는 우리가 부족함이 많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형성할 때 바로 이 교회를 통해서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중요한 의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저마다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통하여 함께 사역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놀라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첫째 단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요, 또 하나의 특성은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체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 마치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웃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웃의 존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과 갖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면 내 이웃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4절을 보시면,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나니”고 강조하고 있고 6절에도, ➤“6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다른 선물들을 가지고 있으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왜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하고 끊임없이 이웃을 비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성을 아직도 발견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교만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획일성일 뿐 일치성이 아닙니다. 일치라는 개념은 성경적이지만 태도나 방식 따위가 한결같은 것은 결코 성경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다양한 개성과 다양한 은사(선물), 그리고 다양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들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치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획일적으로 사고하고 획일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이웃을 비판하고 고발하고 비난합니다. 최근의 젊은 여기자인 전여옥씨가 쓴 글 가운데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말하는 풍토에 대해서 자기가 직접 살아본 일본에서의 산 체험에 근거해서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역습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지적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은 오늘날 너무나 규격문화의 틀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획일적인 문화는 결코 선진문화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진문화는 선택의 다양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모든 문화적인 지향은 지나치게 획일화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몰개성 패션주의’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여자들은 다 똑같은 루이비똥 백을 들고 다니고 시계는 다 롤랙스, 샤넬, 카르티에 시계를 차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문화 속에서는 새로운 창조적인 21세기의 문화를 지향할 수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우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개성과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치된 한 목표를 향해서 갈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교회의 과제입니다. 교회의 상처가운데 하나는 교회 속의 어떤 사람들이 지나치게 교만해서 자기처럼 다른 회원들에게 똑같은 생각을 강요하고 똑 같은 스타일을 강요할 때에 교제의 상처와 갈등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젊은 목사님이 새 교회에 취임을 하셨는데 그 교회는 갈등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과 비난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이 교회의 일상적인 풍토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성도들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으로 강대상에 무엇인가를 담요에 둘둘 말아서 들고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이 담요 안에는 한 생명체가 있습니다. 지금 열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하고 담요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큰 눈이 하나 그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사람의 눈입니다. 여러분, 이 눈을 보시면서 솔직히 느끼는 감정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젊은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도 이처럼 한 시각만 있다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에게는 다양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 다양한 시각이 어우러져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 나갈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어우러져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광스러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서야 합니다.”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런 지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교회 안에 가져야 할 성도의 인식인 것입니다. 셋째로,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강조한 것처럼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물론 없는 것 갖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갖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른 성경 말씀에 보시면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의 은사가 있지만 본문의 로마서 12장에서는 대표적인 크리스트인의 봉사의 동기를 형성하는 은사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트 인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게 주신 선물/은사를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사역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서야 할 자리를 발견한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 일을 맡겨 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브라함 링컨의 일대기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 당시 링컨의 정치적인 정적 중에서 특별히 스탠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적이 있었습니다. 링컨의 일생 전기를 읽어보면 이 사람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링컨에게 욕설을 많이 해 댔는지 한번은 “여러분, 오리지날 고릴라를 보시려면 동물원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스프링휠드, 일리노이에 가시면 거기에 오리지날 고릴라가 있습니다.”라고 링컨을 비웃었습니다. 그곳은 링컨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링컨이 생긴 것을 가만히 보면 정말 고릴라같이 생겼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 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정부의 장관 각료를 조각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장관 자리의 적임자를 두고서 링컨이 말하기를, “아, 이 자리는 스탠튼이 좋겠소.”라고 그의 정적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참모들이 깜짝 놀라서 묻기를, “어떻게 그 사람을 추천할 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링컨은 자신의 특유의 미소를 띠고서 말하기를 “여러분들, 이 자리는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비판했느냐? 토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자리에 누가 가장 적합한가? 논의하는 자리이며, 제 생각에는 그가 가장 적합한 자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한평생 그 자리에 서서 흔들림이 없이 맡겨주신 삶의 목표를 향하여 자기의 여생을 몰고 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제가 은사를 사용하는 실질적인 제안을 드립니다. 첫째, 잠정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양대에도, 주일학교 교사로도, 안내위원으로도, 그리고 우리 교회 안의 여러 위원회가 많이 있는데 각 위원회마다 다 들어가서 봉사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봉사를 할 때 가장 큰 기쁨과 환희가 있는지요? 그 일만 하기만 하면 너무 너무 기쁜, 그런 일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워싱톤 교회에 있을 때 한 자매에게 들은 간증인데 자기는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이 일 저 일을 해 보아도 기쁨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중보기도의 사역이 시작된 이후에 기도시간에 가서 중보기도를 시작하니까 너무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제게 와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평생 할 일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매님처럼 자기에게 맞는 사역을 발견할 때까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잠정적으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 일에 대한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만 평가를 해 보실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평가를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자기만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스스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제 목소리가 괜찮으니까 찬양대의 은사를 주셨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성가대에 끼어서 찬양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 인정을 받아서는 안 되며 자타가 공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정확하게 냉철하게 평가해 보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생 헌신을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확신이 들면 이 일을 평생 하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성가대를 보고는 어떤 분이 우리 교회 찬양대에는 나이 많은 분이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젊은 분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 많은 분들이 계신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미국교회를 방문해 본 경험을 통해서 참 부러운 것 중에 하나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열심히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찬양대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분들은 평생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은퇴할 때가 가까워 오면 은퇴하기를 많이 기다리십니다. 왜 그렇게 은퇴를 기다리느냐? 하고 물어 보면 은퇴 후에 교회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려고 기다린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미국교회의 큰 교회를 가서 보시면 그 교회의 사역자의 절반 이상이 다 자원봉사로 이루어집니다. 주어진 시간동안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플로리다주의 한 큰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그 목사님의 비서가 여러분이 계신데 그 중에 한 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환한 미소를 띠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은 평생 동안 비서로 일하시다가 은퇴하신 후 교회에서 자원봉사로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어떤 행정상의 조정을 위해서 임명하는 절차가 있지만 저는 성서적인 진정한 방법은 자원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안내에 은사가 있다고 생각되어 자원하시면 그런 분은 교회에서 임명해 주시는 것과 상관없이 평생 동안 안내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 인상보고 괴로운 사람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자타가 함께 인정한다면 안내를 평생 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회봉사에 은사를 주신 것 같다고 확신할 수만 있으면 그 사람은 사회봉사위원회에서 평생을 일하셔야 합니다. 위원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위원장을 하신 후에도 다시 위원으로 내려 오셔서 함께 섬길 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을 그만 두셨다고 그 일을 몰라라 하면 안 됩니다.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내가서야 할 그 자리에 서서 중요한 것은 내 한평생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신 선물(은사)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우리 편의 책임도 있습니다. 은사를 개발하는 방법은 은사를 땅에 파묻지 말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본문의 6절 이하에 보시면 각각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대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대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만약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메세지를 자기의 짐작과 생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가짜 예언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합니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자꾸 섬겨야 그 은사가 개발됩니다. 또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사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권위 하는 자, 권위 한다는 것은 권고하고 위로한다는 것이며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꾼다면 상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종종 구제의 은사를 갖고 구제의 사역을 하다보면 돈을 많이 만지게 됩니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제의 은사를 가졌으면 성실함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나태함 속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병원 심방을 많이 하게 되며 과부와 고아들을 돌아보는 사회사역 쪽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찌푸리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즐거움으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한 평생 기쁨으로 섬기려면 생각해야 할 3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하십시오. 둘째는 이웃에 대해서, 내가 이웃과 어떻게 더불어 잘 일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셋째로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사를 주셨으며 이 선물을 내가 어떤 사역을 한 평생 감당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 주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이루어 제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자기의 사역 앞에 한 평생 성실했던 사람을 언급할 때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얼마나 멋지게 인생을 사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카터 대통령이 어렸을 때 성장과정에 있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후에 자신의 은사를 살펴보니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일찍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고향 죠지아 주(州)의 플레인스에 있는 작은 자기의 본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는데 요즘 그 교회가 카터대통령 때문에 많이 부흥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관광객들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구경을 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카터 대통령이 주일학교를 가르치는 광경을 뒤에서 구경한 뒤, 구경이 끝나고 나면 의례히 빠지지 않는 행사 중의 하나가 카터대통령과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계속 사진을 찍으려면 힘들지 않냐? 라고 기자들이 질문하자 그는, “나는 기쁨으로 사진을 찍힌다. 나 때문에 교회가 알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가 있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계속해서 찍히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진정한 섬김의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은퇴한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바로 카터입니다.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분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왜 사람들이 카터를 찾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가 믿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타임지가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뒤에 카터의 활동을 소개한 문구 가운데 아주 인상적인 대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the only President who used White House as the stepping stone(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했던 유일한 대통령)” 이 말은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백악관이 그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권력이 목표가 아니고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라,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해서 예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의 한 평생의 삶을 드려 복음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이 한사람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다가오는 명절, 우리는 함께 모여서 우리들의 선조들의 일들을 추억하며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먼 훗날 내가 떠나간 내 삶의 자리를 지켜보며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의 아빠는, 엄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시다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는 고백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동원목사 저서 / 로마서 강해 중에서 타이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