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부활 신앙을 회복할 때
누가복음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성경에서는 안식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에 쉼을 가지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했을까요? 그에 대한 해답을 “안식 후 첫날 새벽에”란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려면 눅 23:56“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에 기록된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의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일성수를 하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더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거의 문자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2km 가 넘는 길은 걷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밤 12시 자정을 기점으로 하루가 새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해가 지면 하루가 시작해서 다음 날 해지기 전까지가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금요일 3시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주님의 시신을 급히 수습해서 안치하고 그날 해가 지기 전까지 일을 끝내어야 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막 16:2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일찍(λiαν πρωi 리안프로이)’은 새벽 6시 이전 시간 어두울 때, 캄캄한 새벽을 말하는 것이고, ‘해 돋을 때에(νατεiλαντο το λου 안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은 먼동이 터 해 돋기 직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선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캄캄하게 어두울 때 출발하였는데 동산에 도착하니 먼동이 터 오고 날이 밝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집과 무덤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는 주일에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하는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이른 시간에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빌라도의 재가를 거쳐, 바로 십자가 처형을 받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 3시경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죽은 것처럼 졸도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고, 운명한 뒤에도 로마 군인들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와 물까지 쏟는 것을 보고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낙심하여 옛 생활로 되돌아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확실히 죽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간 것도 전혀 아닙니다.
제자들이 만일 훔쳐 갔다면 무엇 때문에 무덤에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갔겠습니까? 유대인이 훔쳐 갔다면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때 시체를 제시하며 논박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시체를 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수의 부활을 논박하고 반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맞았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육으로 죽으셨고, 영으로 완벽하게 살아나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무덤에 갇혀있고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랑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뿐 아니라 믿음의 성도 누구에게나 예수님처럼 죽음에 매이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이라면 기독교의 힘의 원동력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에게 중요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죽음입니다. 이 사망의 권세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즉, 사망의 권세를 지닌 마귀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가와 괴롭힘과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므로 죽음에는 여러 가지 저주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저주의 연결고리에 슬픔, 모든 환난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부활 신앙에 대하여 오늘 말씀을 근거로 흔들리는 부활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고 참 부활 신앙은 무엇에 의하여 이뤄지는지 그리고 부활 신앙을 통한 승리하는 삶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흔들리는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난 후 주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 드리려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석회석 동굴에 안치된 예수님의 시신을 보려고 다가갔더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굴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여인들이 그 무덤 속을 쏜살같이 들어가 보니 무덤은 예수님을 감싸던 수의가 개켜져 있을 뿐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슬퍼서 이리저리 찾아보고 있는데 문득 두 사람이 빛나는 옷을 입고 옆에 서서 말했습니다. “여기가 그분이 누웠던 곳이라 너희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구나.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향한 열심도 특출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도 현장을 지켰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믿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막 11: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라는 말씀에서도 보이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익히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활 신앙은 이 여인들에게 없었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이런 분들이 존재함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나름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리더의 역할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활 신앙은 없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 생활하는 중에 다가오는 시련을 이기지 못합니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믿음을 지녔다고 자부하더라도 그것이 헛된 것이 되고 죄를 이기지 못하고 늘 쓰러지고 패배의 쓴맛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목회할 때 인근에 한 연로하신 장로님이 오랜 지병 끝에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로님께 몇 분의 권사님들이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장로님! 천국에 가시게 되는데 믿음을 잃지 않고 담대하세요.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고 주님께 생명을 맡기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세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뭐라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에구~~ 굿이라고 한번 해보고 죽을 껄~”그러면서 긴 한숨을 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분은 교회 생활에 열심히 있으셨던 분입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 종 치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행하셨고, 교회의 모든 봉사에 앞장서서 열심히 교회를 섬겼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죽어도 살아난다는 부활의 믿음이 그분에게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 두려워하고 결국 바른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였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멀리 있는 길을 달려오듯이 부활 신앙이 없으면 종교의 껍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진 빈 무덤을 바라보고 슬픔에 잠긴 것처럼 참 생명을 잃어버리고 미덥지 않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안타까운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참다운 부활 신앙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신약성서에서 남성들에 의한 여성들의 차별은 부활 이후의 사건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복음서를 비교해가면서 읽다 보면, 복음서마다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알고, 그 사실을 남성 제자들에게 전파한 이들이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남성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이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는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에 여인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댈 때 눅 24:5, 6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듣고 여인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척 진지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전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성들의 말을 무시하고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이 허탄한’ 은 ‘어리석은 말, 잡담, 쓸데없는 이야기’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하였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네 번째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 두 번째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 세 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지금이 네 번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하였던 생업의 터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면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하고 실패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기를 힘쓸 때 저들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잉태하실 때 함께 하셨고 요단강에서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시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영이십니다.
부활의 영이 제자들에게 임할 때 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순교의 현장에 나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들 가운데 부활의 영 성령이 영원히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 신앙을 통한 승리하는 삶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내게 보내셔서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친밀한 나의 아버지로 믿게 하십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친밀감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임을 믿어지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 모든 것에 더욱 뚜렷한 증거는 죽음에 대하여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믿음의 동료들이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타죽은 모습을 보면서도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 있으면 자기들도 굶주린 사자에게 물어뜯겨 죽을 위기 속에서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찬양을 합니다. 어떤 여인은 가슴에 아이를 안고 사자의 표효소리에 어린아이가 자지러지듯이 울 때 “아가야! 조금만 참자 곧 주님의 나라가 임한단다.”하며 위로하는 모습이 퍽 감동적이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고전 15:55에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을 줍니다. 사망 안에 담긴 모든 저주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시 오실 예수님이 가까이 올 때가 다가오면 올수록 세상은 점차 어지럽고 여러 흉측한 소식들이 들여오게 되어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 옵니다. 이때 부활의 신앙을 지니고 이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때 속히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성결한 신부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고 그 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더라도 반드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기에 어떤 환란도 곤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