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여 전설의 시작 에어 조던1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코트 위에서 신었던 에어 조던 시리즈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드리면서 그 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의 발자취도 함께 엮어 이야기를 좀 풀어 보려고 합니다.
에어 조던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고, 스니커즈에 근본이 중요하지 않으며, 예쁘면 다인 세상을 지금 우린 살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절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또 동시에 스니커즈 뒤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께 배워보며 이 취미를 즐기는 것 역시 굉장히 가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 그럼 첫번째 시간 '전설의 시작 에어 조던 1편'을 시작합니다. 아! 주의하세요. 글이 좀 깁니다.
1장 전설의 시작
나이키와 조던 브랜드는 전 세계 농구화 시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점유률을 자랑하는 브랜드들입니다. 현재 사람들 머릿 속에서는 나이키의 라이벌로 아디다스를 떠올리곤 하지만, 적어도 '농구화 시장'에서만큼은 아직은 나이키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의 점유률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농구화 부문에서 1등 브랜드가 된 것은 바로 ‘마이클 조던’이란 선수 덕분이고, 그의 발에 신겨져 있던 ‘에어 조던’이란 농구화 덕분이었습니다.
풀 네임 마이클 제프리 조던.
조던은 1963년 2월 17일에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지나 1984년 NBA 드래프트 전체 1라운드 3번으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조던은 198cm의 키 크고 깡마른 슈팅 가드였는데, 어마어마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하늘을 나는’ 멋진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는 선수였습니다. 그 예전 '닥터J' 줄리어스 어빙 같은 선수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선수가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겁니다. 시카고 불스는 그렇게 자신들도 모르게 행운을 잡았고, 나이키도 행운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이 처음부터 나이키를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엔 컨버스 농구화를 주로 신었고, 프로 데뷔 이후 선호하는 브랜드로는 아디다스를 꼽았던 선수였으니까요. 심지어 조던은 프로 데뷔 전까지는 단 한번도 나이키를 신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나이키와 계약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당시 마이클 조던의 에이전트였던, 데이빗 포크의 역할이 컸습니다. 데이빗 포크는 엄청난 운동 능력을 가진 마이클 조던을 눈여겨 보았고, 그와 함께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야심을 이뤘네요!) 포크는 조던이 불스에 입단하자마자 조던의 스폰서쉽 업체로 적합한 여러 브랜드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포크는 당시 조던의 이미지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을 나는 사람’으로 설명하며 각 브랜드들에 추파를 던졌습니다. 더 나아가 포크는 나이키에 불스에서 주는 연봉 이상 가는 거액의 계약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포크는 조던의 발에 나이키를 신기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정작 주인공인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가 아닌 아디다스를 더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특정 집단에 대한 로열티가 매우 강한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신 대학과 그 동문 선수들을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번 소속된 브랜드나 팀, 그룹은 절대 배신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나이키가 큰 금액의 계약금을 제시했을 때에도 조던은 "좋다. 하지만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디다스에게 이 계약금과 비슷하게 맞춰줄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보겠다. 그들이 이 계약금과 비슷하게만 맞춰준다면 나는 아디다스를 선택하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디다스는 수뇌부의 여러가지 문제들로 정신이 없었고, 또 당시 그들은 조던 같은 가드보다는 키가 큰 빅맨을 더 원했기에 조던의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됩니다. (아디다스 역사상 최대의 실수)
결국 조던은 나이키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조던의 이미지 메이킹에 적극적이었던 데이빗 포크와 나이키는 "사람이 왜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Just Do It!" 같은 도전적인 광고 문구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엄청난 세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전설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장 최고의 히트상품
에어 조던1은 마이클 조던이 루키였던 1984-1985 시즌 처음 착용했던 제품으로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문화적 아이콘인 마이클 조던과 훗날 새로운 스니커즈 문화를 이끌어갈 에어 조던의 첫 시그내쳐 시리즈가 만난 역사적인 첫 작품입니다. 디자인은 피터 무어가 맡았고, 당시 가격은 65달러였습니다.
사실 에어 조던1은 같은 해에 같은 디자이너에 의해 발표된 덩크와 전체적인 디자인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농구화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에어 조던1과 덩크 하이를 구별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덩크는 대학 농구팀들을 위해 만들어진 에어 조던의 테이크 다운 모델이었고, 사실상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발목 높은 스니커즈였습니다. 그러면 당시 원판 에어 조던 1은 어땠을까요?
덩크에 비해 에어 조던 1은 일단 '에어'라는 이름답게 미드솔에 에어솔 쿠셔닝 시스템을 내장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쿠셔닝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당시에 매우 새로운 것이 시도되었고 (에어를 사용한 것이 에어 조던이 처음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 가볍고 하늘을 나는 '에어 이미지'에 젖어들어 이 새로운 신발이 매우 신선하다라고 느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어 조던 1은 발 등에 끈 구멍 9개를 배치해 끈을 모두 당겼을 때 신발이 발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발목 측면 부분에는 에어 조던의 초기 심볼인 윙 로고 디자인을 위치시켰습니다. (당시는 점프맨 로고가 신발에 사용되지 않을 때 입니다.)
사실 에어 조던1은 기능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형편 없는' 농구화입니다. 아니 이제는 농구화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수준의 스니커즈인 것이 사실입니다. 에어솔이 내장되어 있다고는하나 쿠셔닝은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고, 토박스가 낮아 발가락을 움직이기도 매우 힘듭니다. 거기에 발볼도 매우 좁아 발볼이 넓은 아시아인들에겐 오버사이징이 필수인 그런 불편한 농구화입니다. 게다가 발목도 높아 신고 벗기도 매우 불편하지요.
장점이라고 해봐야 핏팅이 괜찮고, 발목 지지력이 나름 괜찮다는 것 정도인데,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에어 조던 1을 신고 실제 농구를 하면 점프 후 착지할 때 뇌에 까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에어 조던 1은 지금 기준이 아닌 당시 기준으로 봐도 기능성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모델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마이클 조던 역시도 에어 조던 1의 쿠셔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덩크의 솔도 가져다 붙여 보고, 훗날 에어 조던 2로 발표되는 솔도 붙여 보는 등 여러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건 에어 조던 1은 기능성 면에서는 당시에도 그리 훌륭한 모델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에어 조던1이 이토록 엄청난 대중적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색(Colour)' 때문이었습니다.
3장 코트 위에 색을 가져다 주다!
사실 마이클 조던이 에어 조던을 신고 코트에서 날아다니기 전까지는 선수들의 농구화들은 거의 흰색이나 검정색 위주였습니다. 당시 NBA는 팀 유니폼에 맞는 색상, 그리고 팀 동료들과도 맞는 색상의 농구화를 신어야 한다는 규정이 존재했고 이를 어기는 선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조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나이키와 데이빗 포크는 새로운 세대에 맞는 도전적이고 새로운 농구화를 원했고, 당시 튀고 거칠었던 조던은 거기에 딱 맞는 선수였습니다.
에어 조던1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 피터 무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키워드는 바로 '튀는 색상'이었습니다! 에어 조던1은 당시 보통 사용되던 평범한 흰색 뿐 아니라, 붉은색, 검정색 등을 사용하여 강렬한 색상을 보여주었는데, 이렇게 에어 조던1은 당시 흰색과 얌전한 단색 위주로 구성되었던 농구화 시장에 '색(Colour)'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전 세계의 농구 코트 위에 강렬한 '색'을 입혀준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에어 조던1이 농구화 역사에 남긴 가장 큰 '발자취'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하늘을 나는 새로운 스타일의 선수가 신는 새로운 신발! 당시 젊은이들은 그렇게 에어 조던 1의 튀는 색상에 열광했고, 나이키는 이를 적극 광고에도 활용하며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
4장 탈락자에서 올해의 선수로
사실 마이클 조던의 초기 농구 인생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형과의 1:1 농구 시합에서 항상 패배했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다니는 학교 농구팀에서 '탈락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0학년 때 조던은 180cm 정도의 키였는데, 이 키로는 미국 농구 선수들 중에서는 눈에 띄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던은 학교 농구팀 선발에서 탈락했고, 혼자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조던은 계속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던은 10학년에서 11학년으로 올라가던 시기 키가 무려 11.5cm나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조던은 학교 농구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조던은 아직 실전 경기 경험이 부족해 가끔 기초적인 실수도 하는 그런 미완성의 선수였지만, 워낙 센스가 좋고, 운동능력이 압도적이었던 탓에 학교의 대부분의 기록들을 다 갈아치우고, 졸업반인 12학년이 되기 전에 올 아메리칸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건 마이클 조던이 어린 시절 응원했던 대학교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가 아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였다는 점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는 제임스 워디, 샘 퍼킨스 등의 스타 선수들이 있던 대학교였는데, 조던은 선수들을 단순한 '선수'로서가 아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우하는 점이 마음에 들어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로 진학했다고 밝혔습니다.
보통 농구 선수들은 대학교 신입생이 되면 대부분 벤치 멤버로 뛰는 경우가 많은데, 마이클 조던은 신입생 시절부터 주전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NCAA 토너먼트 파이널에서 라이벌 패트릭 유잉의 조지 타운 대학교를 상대로
https://youtu.be/rIzUyerYILg
저 유명한 'The Shot'을 터트리며 소속팀에 우승을 안기게 됩니다. 마이클 조던에게는 전국구 스타가 되는 영광의 순간인 동시에, 패트릭 유잉에게는 조던과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조던은 전국구 스타가 되었고, 기량이 더 성장한 2학년 때 NCAA 선수들에겐 최고의 영광인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또 이듬해 조던은 3학년 때도 다시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에 선정되며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3학년을 마친 후 마이클 조던은 감독 딘스미스와 긴 대화 끝에 4학년에 진학하지 않고, 곧장 NBA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5장 3등에서 1등으로
마이클 조던이 아무리 대학 최고의 스타였다고는 하나, 조던이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NBA가 가드들의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빅맨 선호 현상이 강했는데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다는 빅맨 하킴 올라주원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팀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의 기량이 가드가 더 훌륭하다고해도 당시 NBA는 키 큰 센터들을 더 선호했고 실제로 센터들을 더 앞 순위로 지명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1순위 지명은 하킴 올라주원의 차지였습니다. 2순위는 누구였을까? 상식적인 선에서라면 적어도 2순위에서는 마이클 조던의 이름이 호명되었어야 했지만,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포틀랜드는 또 다른 스타 빅맨 샘 보위를 지명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이 결정은 '역대 최악의 오판'으로 남아있지만,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실수였다고 생각되는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보위 역시 켄터키 대학 재학 시절 리그 최고의 빅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포틀랜드에는 이미 마이클 조던과 동포지션이었던 스타 플레이어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 포틀랜드의 결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조던은 1년도 안 되어 그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말입니다.
사실 시카고 불스도 원래부터 조던을 지명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당연히 빅맨의 지명을 원했지만 앞의 두 팀이 빅맨들을 모두 챙겨가는 바람에 불스는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조던을 지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이클 조던은 1등이 아닌 3등으로 NBA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3년 마치고 3등으로 NBA에 들어온 조던의 소속팀은 3류팀 시카고 불스였습니다. 당시 불스는 지금 같은 명문팀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불스는 약체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플레이오프는 거의 구경도 못하는 그런 3류 팀이었지만, 조던은 "이제 불스는 매년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될 것이다"라는 당찬 약속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을까요?
물론입니다! 조던은 자신의 당돌한 인터뷰 발언을 현실화시켰습니다. 실력으로 말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루키 시즌에서 무려 28.2득점 6.5리바운드 5.9어시스트라는 경악(!)스러운 성적을 올리며 생애 하나뿐인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작은 3등이었지만 시즌은 결국 1등으로 마친 것입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인기 탓에 루키 첫 해에 바로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이는 사실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실 루키가 첫 해에 올스타에 선발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거든요. 물론 그의 이런 높은 인기 탓에 선배들이 조던을 질투하고 미워해 고의적으로 패스를 하지 않고 따돌려서 루키 첫 해 올스타 게임에서는 그리 큰 활약을 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따돌림 사건을 신발화한 '에어 조던 1 트로피룸'이 훗날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스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3등으로 지명한 마이클 조던은 불스 구단 뿐만 아니라 NBA 전체의 '1등이자 미래'가 되었습니다.
6장 실패와 부상
1985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불스와 조던은 1985년 4월 19일 밀워키 벅스와의 첫 플레이오프전을 가졌습니다. 이 날 조던은 44분을 뛰며 23득점을 올렸지만, 36.8%의 저조한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득점 외에는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날 경기는 밀워키 벅스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조던이 52.9%의 좋은 필드골을 올리며 30득점을 올린 2차전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던과 마찬가지로 30득점을 올린 테리 커밍스를 포함 밀워키 선수들은 총 세 명이 20득점 이상을 올렸고, 결국 115대 122로 불스는 또 다시 패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탈락 위기! 당시 플레이 오프 1차전은 5전 3승제였기에 불스는 반드시 다음 경기를 이겨야만 했습니다.
시카고 홈으로 와서 열린 3차전에서 조던은 35득점 8리바운드 7어시스트 4스틸의 맹활약을 하며 팀에 승리를 안겨 줍니다. 하지만 이어서 열린 4차전, 조던의 29득점 활약 속에서도 불스는 105대 97로 패배하게 됩니다. 조던의 '첫번째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조던과 불스 구단의 미래는 밝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명된' 선수는 자신이 들어오기 전보다 관중 동원률을 무려 87%나 끌어올렸고, 3류팀을 플레이오프 진출팀이자 리그 최고의 인기팀으로 변신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 1년 만에 말입니다. 심지어 마이클 조던이 덩크를 하려는 것을 파울로 끊으면 관중들이 심하게 아유를 퍼부을 정도로 조던은 전국구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다시 조던을 찾아왔습니다.
조던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85-1986 시즌. 조던은 단 세 경기만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와의 경기에서 다리 부상을 입었습니다. 불스 구단과 리그 전체의 재앙이었습니다. 조던은 이 부상 덕에 64경기나 쉬어야 했습니다. 한참을 쉬다 한 해를 넘긴 1986년 3월 15일에 코트로 돌아온 마이클 조던은 '한 경기에 전후반 7분씩, 총 14분 정도만 뛰게 하라'는 팀 닥터의 명령에 따라 매우 제한적인 시간만을 플레이했습니다. 복귀 후 첫 상대는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에게 첫 실패를 안겨준 밀워키 벅스! 조던은 13분 동안 12득점을 했고, 불스 팀은 또 다시 밀워키에게 패배했습니다.
이후 조던은 다섯 경기를 더 10분대 출장 시간을 배정 받은 뒤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가더니 결국 시즌 막판에는 예전 같은 출전시간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괴물 같은 부상 회복 속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통 선수들이었다면 분명 시즌 아웃 당했을법한 큰 부상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훗날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데릭 로즈의 부상에 대해 언급하며 "로즈는 천천히 복귀하게 할 것이다. 조던에게 했던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다. 결과적으로 조던은 성공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의 이른 복귀를 막았어야 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첫 플레이오프 탈락 후 다리 부상. 두 번의 시련을 겪은 조던과 불스에게 이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던 없이 형편 없는 성적을 기록했던 불스가 30승 52패라는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라운드 상대는 당시 동부 최강팀 보스턴 셀틱스. 조던은 1차전에서 49득점, 2차전에서 63득점을 기록하는 등 정말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래리 버드로 부터 "신이 인간으로 변장해서 농구를 하는 것 같았다"라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3연패. 조던의 두 번째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조던은 그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칼을 갈았습니다.
7장 에어 조던1에 대해 알아두면 좋은 몇가지 사실들
1. 에어 조던 1에는 발목이 높은 하이, 그보다 낮은 미드, 발목이 아예 없는 로우 세가지 버전이 존재하며, 그 중 발목이 높고 혀에 나이키 스우시 탭이 붙어 있으며, 신발 전체에 점프맨 로고가 없는 버전을 'OG 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1985년도 원년도 오리지널 버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형태의 실루엣과 디테일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2. 에어 조던 1 1985년도 원년산 모델은 한국 공장에서 생산되었으며 발목에는 신발의 사이즈와 신발제작날짜, 그리고 공장의 이니셜이 적혀 있습니다.
솔을 분리해 보면 몇몇 모델에서는 '최고의 품질을'이란 글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3.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에어 조던 1 1985년도 모델의 발목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리마스터판의 시작이었던 조던 1 프라그먼트 부터의 에어 조던 1 하이 모델들이 발목이 더 높습니다.
4. 에어 조던 1 모델은 미드솔 뒷꿈치에 내장된 에어솔을 제외하고는 가수분해에 강한 모델입니다. 2002년 부터 시작된 SB 덩크들에 비해 솔 경화 현상도 현저히 낮아 1985년도 원년산 에어 조던 1 모델은 현재도 현역으로 착용이 가능합니다. 솔이 마모되면 다른 에어 조던 1의 솔로 솔스왑이 가능해 사실상 수명에 제한이 없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5. 에어 조던 1은 초기 굉장히 많은 수량이 제작되어 뿌려졌으며, 덕분에 훗날엔 재고가 많이 쌓여 할인폭도 컸습니다. 그래서 바닥이 평평하여 바닥필을 잘 느낄 수 있고 발목도 높으며 색상도 예쁜 가죽 스니커즈를 원했던 스케이트 보더들의 눈에 띄어 농구화가 아닌 스케이트 보드화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스트릿 패션 슈즈로서 에어 조던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6. 전체적으로 에어 조던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현재에도 에어 조던 1 만큼은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발목이 낮은 스니커즈들의 트렌드 속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하이탑 클래식 스니커즈라고 볼 수도 있는 모델인데 덕분에 트래비스 스캇, 버질 아블로 등 핫한 셀럽과 디자이너와의 콜라보 모델도 지속적으로 출시되고 있습니다.
7. 경기용 농구화서의 기능은 거의 없는 모델이긴 하지만 마이클 조던은 1998년 3월 8일, '불스 소속 선수로서는' 마지막 매디슨 스퀘어 가든 경기에서 에어 조던 1 모델을 다시 꺼내 신고 뛴 적이 있었습니다.
경기 이후 발에 물집이 잡혔다고 하는데, 이후 자신이 신었던 에어 조던 1 시카고 모델에 싸인을 하고 보증서까지 만들어 자신의 집 유리관에 따로 보관해 두었다고 합니다.
8. 마이클 조던이 경기 중에 착용한 에어 조던1 모델로는 시카고 모델과 블랙토 모델이 있고, 브레드 모델은 올스타 주간과 광고에, 로얄블루 모델은 광고 촬영 때 착용을 하였습니다.
9. 에어 조던1 검빨(브레드) 모델은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농구화로도 유명합니다.
10. 나이키가 최초로 기획한 에어 조던 1의 초기 컬러는 시카고가 아닌 검빨 브레드와 검흰빨 블랙토였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와 정식 계약 전 촬영한 이 사진에서 조던이 목에 걸고 있는 에어 조던 1을 잘 보면 발목에 윙로고 대신 'AIR JORDAN'이란 글귀가 보이는데, 이 모델은 에어 조던 1 완성 전 다듬고 있던 제작 샘플이었고 시카고 컬러보다 먼저 만들어진 샘플이었습니다.
원래 홈 경기에선 블랙토, 원정 경기에선 브레드 모델을 신으려고 했던 조던은 '검빨 색상에 대한' 리그의 제재가 있자 블랙토 모델에서 검은색 토박스를 빨간색으로 바꾼 시카고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 착용했습니다. 그래서 시카고 컬러가 에어 조던 1의 퍼스트 컬러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그렇지만 아니기도 하다'입니다. 애초에 기획된 퍼스트 컬러 모델은 브레드와 블랙토, 실제 경기에서 처음 신은 퍼스트 모델은 시카고였으니까요.
8장 남겨진 이야기들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이클 조던의 NBA 첫번째 농구화는 에어 조던 1이 아닌 에어쉽이었습니다. 조던은 에어 조던 1이 조금 더 다듬어지고 정식으로 출시되기 전까지 에어쉽이란 모델을 신으며 NBA의 시범경기를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에 길이 남을 사고가 하나 터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당시 NBA는 농구화 색상에 대한 제한이 강한 시기였는데, 마이클 조던은 나이키에서 만들어준 검빨 색상의 에어쉽 브레드 모델을 신고 시범경기를 치룬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규정 위반이었습니다. 시카고 불스의 유니폼 색상은 빨간색과 흰색이었기 때문에 규정대로라면 조던은 흰색 바탕의 에어쉽에 빨간색이 조금 가미된 모델을 신어야 했는데 이 날 착용한 컬러는 절반 이상이 검정색이었고, 기반이 되어야할 흰색은 정말 조금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팀 동료들과 색상도 맞추지 않고 혼자만 튀는 색상의 농구화를 신었던 것입니다.
결국 '꼰대' NBA 사무국은 이 건방진 신인 선수와 이 농구화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사무국은 마이클 조던이 1984년 10월 18일에 착용한 이 농구화에 대해 벌금을 부여하고 '퇴출 명령'을 내렸습니다. 간단히 말해 "신지 마!" 라고 한 것이죠.
마케팅의 귀재 나이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이키는 광고를 통해 사람들에게 'NBA는 조던이 코트 안에서 이 신발을 신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코트 밖에서 당신들이 이 신발을 신는 것은 막을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단숨에 에어 조던 1을 '반항과 도전'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켓팅 정말 끝내주네요. 반응은 그야말로 광풍이었습니다.
코트 위에서는 그야말로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하늘을 날아 다녔던 마이클 조던의 기량과 맞물려, 이 에어 조던 1은 스트릿 패션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반항과 젊음의 분출 통로'가 되어 주었으며, 거기에 스케이트 보더들까지 합류하여 말 그대로 온 거리를 '색의 향연'으로 문들여버렸습니다.
거기에 마이클 조던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슬램덩크 대회에서 그동안 금지되었던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을 신고, 금목걸이까지 하고 나와 반항적이고 거친, 말 그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반응은 "미친 거 아냐?" 였다고)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듯 실제 시범 경기에서 퇴출을 명 받은 모델은 에어 조던 1이 발표되기 전에 조던이 신었던 '에어쉽'이란 모델인데 왜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을 신고 징계를 받은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었을까요? 모두 나이키의 홍보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나이키는 에어쉽이 퇴출 명령을 받은 것을 교묘하게 비틀어 마치 에어 조던 1 모델이 퇴출을 받은 것처럼 꾸몄고, 거기에 '매경기 벌금을 물고서라도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을 계속 착용했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루머까지 더해지며 에어 조던 1의 광풍이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이 거짓말로만 점철된 모델이고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생각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또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이 징계를 받은 것도 아니고, 실제 경기에 착용한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그건 마이클 조던이 신지 않은 것이 아니라 NBA 사무국이 '검빨 컬러' 자체를 실제로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은퇴 이후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NBA는 이 신발을 신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우린 시카고(흰검빨) 컬러로 타협해야 했다.' 이 말은 풀어서 설명하면 마이클 조던은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을 신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색상 때문에 실제로 사무국으로 부터 제재를 받아 아예 코트 안으로 신고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증거로 조던은 규정을 슬쩍 풀어주는 올스타 주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을 신고 코트를 누볐습니다.
즉 에어쉽 검빨 모델이 징계의 시작인 것은 맞지만,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 역시 '색상 때문에' 사무국에서 허락을 득하지 못해 신지도 못한 모델인 것 역시 맞다는 겁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검빨 색상 자체가 금지 컬러였던 셈이죠. 그래서 이후 조던 브랜드는 꼭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만이 아니라 검빨 컬러의 신발 대부분을 'BANNED' 컬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나이키가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100% 전부 날조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쨌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스니커즈의 붐과 도전적인 색상의 혁명을 누리며 패션을 즐기게 된 것은, 에어쉽 때문이 아니라 에어 조던 1 검빨 모델이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첫댓글 에어 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