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 설하한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비판』 p.233
가을비가 내린다 떨어진 물방울들의 몸이 부서진다 나는 비를 좋아했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지 결국 물이 가장 낮은 곳에 머물 듯 나는 내 나음에 익사할 것 같은데 방 안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나뭇가지 아래에서 뻐꾸기가 비를 피하고 부서진 물방울들이 한데 모여 흐른다 물줄기가 배수구로 떨어진다 물은 이 도시의 배수 시스템을 따라 도시를 벗어나고 결국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 곳에 당도하겠지
우리가 다시 흙이 되고 물이 되면 부서진 채로 배수관을 흘러가는 물방울들처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슬퍼하지 않고 잠을 잘 텐데 네가 묻혀 있는 화분에서 죽은 너의 그림자가 자라난다 비가 그치면 뻐꾸기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이미 서너 명쯤이 내게 죽은 것 같다 어떤 이들의 고통은 낮고 어두운 곳에 머문다 빗소리 물방울들이 어둠 속에서 부서지고 있다 분명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나의 영혼이 나에게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구조에 속하고 이것은 세계의 생리이므로 인간이 뻐꾸기의 생태를 이해하듯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불을 끄고 누워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생각한다 천국이 없다면 우리를 용서해 줄 사람이 이미 없다면 어쩌면 좋을까 자라난 너의 그림자가 나를 읽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이 우리에게 있는 일 그날 나는 꿈속에서 나에게 죽은 사람을 만나 당신의 고통이 당신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구조에서 기인했듯 내 폭력 역시 구조로 인한 것뿐이었다고 그렇지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가 미워하는 이 나를 미워하는 이 이들 모두가 함께 사는 천국을 상상해 보았는데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죽은 뻐꾸기를 입에 문 고양이가 관목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또 비가 내렸고 일기예보에선 가을장마라고 했다 더는 부서지지 않는 곳에서 벗어난 물들이 부서지며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을 흠뻑 껴안았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부서지는 일 역시 인간의 일일 텐데 사람이 싫었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 설하한 / 본명 구본승. 1991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문예창작전공 석사 수료. 2019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