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경주지역 주민을 김제지역으로
이주
흘해 21, 330 비로서 벽골제를 완성하였다.
1정보면 3000평입니다. 1800정보면 5백4십만평이
되네요. 김제 벽골제는 대규모의 저수지로 신라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벽골지로의 이주로 인하여, 신라는 경주지역과 김제지역의 2국으로 분할 됩니다. 이로부터 韓은 진한지역에 대해서는 피정복민을 이주시키고, 영역을 재배치하여 분할 통치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벽골지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삼한은 피지배국이 된 신라인을 강제동원 한 것입니다.
가야 멸망의 대표적인 유물은 칠지도이고, 신라 멸망의 대표적인 고고학은 김제 벽골제입니다. 3세기 중반의
한반도 상황이 삼국지 동이전의 모습입니다. 이때는 역사기록이 줄고, 천제
기록을 전혀 하지 못하고, 정월에 실세 관료가 등장하고 세습하지 않습니다. 풍습과 전통은 그대로 두고, 일체의 축성은 없고, 제사를 지내거나 구휼활동을 하는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구 통치자의 아들을 제외하고, 다른 구 왕족 중에서 새 통치자를 세우지만, 통치권은 박탈합니다. 부자상속을 못하고, 종주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왕비의 기록이 사라지고, 시조신이 아닌 제사를 지냅니다.
흘해 28, 337, 2월, 사신을 보내 백제를 방문 하였다.
신라는 한에 대항하여 마지막까지 맞선 사로국이고, 멸망하여 한의 진한에 들어가고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이 당시는 인구를
분산 시키는 정책을 한 것으로 보이고, 당시는 한의 평범한 소국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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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사학
김제에 가면, 역사적 박물관인 ‘김제 벽골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Byeokgolje Bank was established in
330 under King Biryu the 11th King of Baekje. It, along with the
Byeokgolje remodeling monument of the Chosun Dynsaty was designated Korean
historical relic No. 111 on January 21st 1963. In March of 2011,
they were renamed together, ‘Gimje Byeokgolje’.
사적 제 111호 백제 11대 비류왕 27년 (330)에
축조된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부비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111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3월 김제 벽골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It is thought that over 320,000
people worked on the construction of Byeokgolje Bank and more were needed to
build its water gates and watercourses. For this reason, referring to the
mountain of worn-out shoes the workers build up. Considering the population
size at the time, the construction, maintenance, and remodeling of Byeoklgolje must
have been a very large-scale project.
벽골제 제방을 쌓는 데만 연인원 32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 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 수 등을 고려한다면 벽골제의 축조, 유지, 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단위사업이었는지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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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비류왕 330년에 축조된 거라 말하는데, 사실 이 벽골제 기사는 백제본기에 나오지 않고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21,
330년에 나옵니다.
신라본기, 흘해 21,
330 비로서 벽골지를
완성하였다.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백제본기에 나와야 할 벽골제 기사가 신라본기에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역사가들은
김부식이 백제본기에 적어야 하는데 실수로 신라본기에 적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역사를 대충 추축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썼을 때,
모르면 모른다고 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신라본기에 벽골제
기사가 나오는 이유는 신라인이 김제에 가서 벽골제 축조에 동원 된 것입니다. 백제 비류왕은 당시에 한성백제이기
때문에, 벽골제와 관련이 없고, 당시 백제는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삼한백제왕이므로, 이 기록은 자연적으로 탈락 된 겁니다. 그래서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신라본기에만 남은 것입니다.
유례 14, 297, 정월, 이서고국 (진한, 삼한의 담로국)이 공격해와 대병을 일으켜 막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유례 15, 298, 2월, 사로국 안개가 끼고, 망한다.
기림 3, 300, 3월, 낙랑대방 양국귀복
당시 백제는 한성국가가 아닌 삼한백제였고 강한국가였다.
당시 마한으로부터 시작한 삼한백제는
요서 (요하서쪽),
한성백제 (한강),
진한 (경주지역),
변한 (전라남도지역),
임나 (낙동강 동쪽),
왜 (큐슈지역),
가야 (낙동강 서쪽)를 담로화하고,
신라 (경주)마저 담로화시키고,
2년 후 고구려에 망한 낙랑과 대방인들이 신라지역으로 이주됩니다.
그리고 월주신라 (석씨신라)를 넘어,
대만, (녹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미추왕 C지구 인면구술)까지 넓힙니다.
그리고 삼한백제는 신라인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이주민들을 분산시킵니다. 그래서 신라본기에는 이주한 기사가 나오지만, 당시 백제 주체는 한성백제가 아닌 삼한백제이기 때문에 한성백제를 기본으로 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삼한백제와 관련된 기사는 삼국사기에는 원칙적으로 삭제하여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으나, 신라본기에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나름 원칙을 정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칠지도가 가야멸망의 고고학적인 증거라면, 김제
벽골제는 신라멸망의 고고학적인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