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전 세계에 금빛 물결을!
NBA 선수로서 정상에 선 마이클 조던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100%가 아닌 몸과 마음 상태로 어렵게 경쟁하며 챔피언이 되었기에, 이번 여름엔 정신적 압박과 육체적 피로에서 벗어나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름 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했고, 또 지난 여름처럼 친한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골프도 치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겨울과 봄 내내 거칠게 경쟁하며 농구를 했는데, 휴가 없이 여름에도 계속 농구를 해야 한다니!)
그리고 사실 마이클 조던은 1984년에 이미 패트릭 유잉, 크리스 멀린 등과 함께 올림픽에 참여해 금메달을 목에 건 바가 있었기에(당시 17.1득점으로 대표팀 1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은 자신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팬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니 팬들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과 선배들, 또 NBA 전체와, 그를 후원하는 나이키, 그리고 조던과 광고 계약을 맺은 모든 업체들은 그의 올림픽 출전을 강력히 희망했습니다. 그럴 듯한 대외 명분도 존재했습니다. “조던이 없던 지난 1988년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에 그쳤었다!” 데이빗 로빈슨, 미치 리치먼드 등이 출전했던 서울 88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은 금메달 획득에 실패한바 있었습니다. (당시 금메달은 소련, 은메달은 유고 슬라비아가 차지했고, 미국은 동메달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팬들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조던이 출전하기를 강력히 바랐습니다.
정말 쉬고 싶었던 조던이었지만, 이런 팬들의 성화, 그리고 미디어의 압박, 무엇보다 매직 존슨의 설득에 못 이겨 결국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감독은 조던과 어떤 면에서는 원수 사이일 수 있었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의 척 데일리 감독이 맡았습니다. 사실 마이클 조던은 2년 전 플레이오프에서 있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선수들의 예의 없는 행동(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피스톤즈 선수들이 불스 벤치를 가로질러 락커룸으로 들어가버린 사건) 때문에 척 데일리 감독에 대해 이미지가 안 좋긴 했지만, 어쨌건 척 데일리는 미국 대표팀 감독이 되었고, 조던도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한편 “조던이 너무 잘해서 리그가 창피할 정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누구보다 조던의 위력을 잘 알고, 그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던, ‘농구 황제의 산 증인(?)’ 척 데일리는 조던이 미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주길 바랐는데, 조던은 이 부탁에 대해서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조던은 “주장은 내가 아닌 매직 존슨이나 래리 버드가 했으면 좋겠다”라는 뜻을 밝혔고, 결국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대표팀의 공동 주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미국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멤버로 찰스 바클리, 래리 버드, 클라이드 드렉슬러, 패트릭 유잉, 매직 존슨, 칼 말론, 크리스 멀린, 스카티 피펜, 데이빗 로빈슨, 존 스탁턴, 크리스찬 레이트너 그리고 마이클 조던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약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멤버 구성이었습니다. 이 멤버로 금메달을 못 따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팀 선발 과정에도 다소 논란은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당연히 선발되었어야 할 선수였던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대표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미닉 윌킨스, 케빈 존슨 등도 제외되긴 했지만, 아이재이아 토마스는 당시 마이클 조던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탈락했다라는 루머가 있어 더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사실 여부를 100% 확인할 수 없긴 하지만 ‘아이재이아 토마스의 대표팀 탈락은 마이클 조던과 깊은 관련이 있다’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당시 리그에 떠도는 루머였습니다.
어쨌건 드림팀은 올림픽 출전 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금메달은 따논 당상이다!”, “역대 최고의 농구팀이다!”라는 찬사와 함께 기대감도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런 드림팀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들을 좀 풀어 보려고 합니다. 드림팀은 올림픽 출전 전에 손발을 맞추려는 목적으로 미국 대학 대표팀과 ‘비공개/비공식’ 연습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대학 대표팀에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페니 하더웨이, 크리스 웨버, 자말 매쉬번, 앨런 휴스턴 등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이 대학 대표팀이 드림팀과의 첫 연습 경기에서 58 대 52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앨런 휴스턴은 마이클 조던과 드렉슬러 등이 버티고 있는 드림팀 가드진을 상대로 3점슛을 무려 7개나(!) 성공시키기도 했습니다.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다 망신을 당한 마이클 조던과 드림팀은 이후 마음을 다 잡게 되었고, 바로 다음 날 또 다시 있었던 대학 대표팀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자신들의 본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경기 전 마이클 조던은 앨런 휴스턴에게 “오늘은 어제 처럼 3점슛을 넣지 못할 거다”라고 미리(?) 말해주었고, 이 날 조던과 드림팀은 대학 대표팀을 무려 56점차로(점수차를 자신들이 어제 경기에서 넣은 총 득점보다 더 많이 내다니!) 제대로 짖밟아 누르며 실력 발휘를 해냈습니다. 그렇게 대학 대표팀에게 ‘악몽’을 선사한 드림팀은 이후 연습 경기 하나 하나를 마치 NBA 파이널 치루듯 하기 시작했는데, 늘 ‘매직 팀’과 ‘조던 팀’으로 나누어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습니다. 안 그래도 강할 수 밖에 없던 드림팀은 그렇게 ‘완벽한’ 팀이 되어 갔습니다.
이후 지역 예선 6전 전승을 거두고 스페인으로 날아간 드림팀은 앙골라, 크로아티아, 독일, 브라질, 스페인, 푸에르토리코,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 등을 누르고 당당하게(당연하게)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대학 대표팀과의 비공식 경기를 통해 얻은 교훈 덕분에 드림팀은 그 어떤 경기에도 방심하거나 대충 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늘 '최고의 기량'을 '최선의 태도'로 보여주었는데, 심지어 앙골라 전에서는 116 대 48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스코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드림팀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재밌는 건, 당시 드림팀을 상대했던 팀들의 태도였는데, 그들은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승리’가 아닌 ‘마이클 조던을 보는 것’이었고, ‘조던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마이클 조던의 인기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팬들과 미디어들은 마이클 조던을 인간이 아닌 신처럼 대우했고,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 스페인까지 날아와 드림팀을 본 줄리어스 어빙 조차도 조던에 대해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 그 이상의 존재처럼 느껴졌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조던은 올림픽 기간 동안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교통 마비를 불러왔습니다. 분명 마이클 조던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은 NBA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데 큰 공헌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1992년 여름, 마이클 조던은 생애 최고로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는 시기를 보내게 되었지만,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개의 NBA 챔피언 반지와 2개의 금메달을 가지게 된 최고의 선수가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이클 조던에겐 올림픽 금메달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던을 괴롭게 한 것은 바로 그가 ‘더이상 도전할 도전과제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마이클 조던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필 잭슨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내게 더이상 새로운 도전 과제를 줄 수 없습니까?” 지독할 정도로 경쟁심이 강했던 그는 계속해서 자기에게 동기부여가 될 도전 과제들을 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던은 지금 그가 뛰고 있는 ‘농구’라는 스포츠 안에서는 더이상 무언가를 이룰 것이 없는 선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사실이 조던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새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2장 승리의 X벨트
에어 조던 7을 신고 두 번째 NBA 우승을 이루어내고, 전 세계로 나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최고의 선수가 된 마이클 조던을 위해 팅커 햇필드는 또 다시 새로운 에어 조던 시리즈를 디자인했습니다.
햇필드는 여지껏 해낸 프로젝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중 하나로 ‘나이키 에어 레이드 프로젝트’를 꼽은 적이 있었는데, 햇필드는 뉴욕의 콘크리트 농구 코트와 격렬한 게임에서 영감을 얻어 이 에어 레이드를 디자인하며 X밴드를 농구화에 장착한바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발목 보호를 위해 테이핑하는 데서 영감을 얻어 만든 에어 레이드의 X밴드는 곧 에어 조던 8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마치 과거 에어 조던 4가 에어 조던 4보다 조금 더 일찍 출시되었던 플라이트 89와 상당 부분 닮아있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에어 조던 8과 에어 레이드는 배 다른 형제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햇필드는 에어 조던 8에는 에어 레이드보다 좀 더 진일보한 형태의 X밴드를 고안해 부착했습니다. 에어 레이드의 X밴드는 그저 '어퍼 옆의 범퍼'에 달려있는 밴드를 당기는 느낌이었다면, 에어 조던8의 경우엔 '어퍼 그 자체를' 잡아 당겨서 X자로 교차해서 묶는 느낌으로 디자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어 조던8은 에어 조던 시리즈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핏팅을 보여주는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X밴드 자체가 발목 보호를 위한 테이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기에, 발목 높이도 높게 디자인했습니다. 이렇게 에어 조던 8은 안정성과 지지력 면에서 매우 훌륭한 농구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에어 조던 8은 전작 7에 이어 또 다시 이너부티를 도입했습니다. 농구화 안 쪽에 마치 덧신처럼 발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형태의 이너부티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에어 조던 8은 전작 7처럼 편안한 착화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웃솔은 지난 에어 조던 6때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원형 아웃솔 무늬를 또 다시 채택했습니다. 이 원형 아웃솔 무늬들은 청어가시 무늬 정도는 아니지만, 실내 코트에서는 크게 문제 없는 접지력을 보여줍니다. 에어 조던 8은 발볼이 좁게 나온 시리즈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발볼이 아주 넓지만 않은 분이라면 대부분 정사이즈를 선택하셔도 문제가 없는 편입니다. (물론 여유 있게 신는 분들은 5mm 정도 올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디자인이 개성 있고, 예쁘며, 확실한 핏팅을 가지고 있는 등 여러 장점들이 있는 에어 조던 8이지만, 정말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통풍’입니다. 신발 자체가 모두 꽉 막혀 있습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덩치 큰 농구화에 제대로된 통풍구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농구화를 커다란 X밴드가 완전히 가려주고, 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바람이 들어올 수도, 또 내부의 더운 공기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에어 조던 시리즈 사상 가장 Hot한(?) 농구화’가 되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마이클 조던 조차도 이 에어 조던 8을 신고 악성 무좀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인데, 그 루머의 진위 여부가 어찌되었건 그만큼 에어 조던 8은 꽉 막히고 더운 농구화입니다. (이건... 쉴드가 안 되네요. 그냥 겨울철에 신으세요.) 또한 시간이 지나며 중창이 갈라지는 단점 역시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에어 조던 레트로 모델들이 대개 다 그렇지만 이 에어 조던8도 가수분해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 에어 조던 8은 분명 매력적인 시리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디자인적 특징은 다소 무난했던 에어 조던 7에 비해 매우 개성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안정감 있는 발목 지지와 적절히 단단하면서도 괜찮은 쿠셔닝, 그리고 에어 조던 8의 트레이드 마크인 승리를 위한 X벨트까지! 통풍이 취약하다고는 하나, ‘실내 겨울철 스포츠’로 농구를 즐기시는 분들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어 조던 8은 마이클 조던의 세 번째 우승을 위해 신발 전체가 매우 ‘든든’하고 ‘안정적’으로 잘 만들어진 훌륭한 모델로, 개인적으로는 에어 조던 2와 함께 사진 보다는 실물이 훨씬 더 매력적인 시리즈라고 생각합니다. 개성 있는 농구화를 원하는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3장 최고 선수의 최고 전성기
누구보다 경쟁심이 강했던 마이클 조던은 새 시즌을 앞두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 과제를 찾았습니다. 미디어와 팬들은 ‘3연패’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마이클 조던 역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조던이 찾은 ‘유일한 도전 과제’요 ‘동기부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던은 새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팀 동료들에게 “만약 3연패를 해낸다면 그땐 은퇴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조던의 계획대로라면 어쩌면 농구 선수로서 자신의 마지막 시즌이 될지도 몰랐기에, 조던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슛을 던지고, 열심히 파고 들었고, 또 열심히 덩크를 했습니다. 첫 11월 한 달, 조던이 남긴 기록은 33.7득점 5.7리바운드 6.0어시스트! (마이클 조던이 하도 이런 기록들을 많이 남겨서 지금쯤 여러분에겐 그다지 감흥이 덜할지도 모르지만,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매우 훌륭한 기록입니다!) 조던은 시즌 오픈 첫 달인 11월에 이 달의 선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1월 22일에는 이 주의 선수상에도 선정되었는데, 이 때 기록은 무려 40.3득점 6.3리바운드 5.3어시스트! (별로 안 놀랬죠? 아 이 아저씨가 사람들 눈을 너무 높여놨어!)
조던은 1992년 11월 20일 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54득점을, 12월 23일 워싱턴 불리츠(현 위저즈)와의 경기에서 57득점을, 1993년 1월 16일 올랜도 매직과의 경기에서 무려 64득점을 터트리는 등 시즌 내내 40, 50, 60득점을 우습게 빵빵 터트려 주었습니다. 결국 마이클 조던은 1992-93 시즌 평균 32.6득점 6.7리바운드 5.5어시스트 2.8스틸 0.8블록슛이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7년 연속 득점왕, 생애 세 번째 스틸왕, 그리고 7년 올 NBA 퍼스트팀, 그리고 6년 연속 디펜시브 퍼스트팀에도 선정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최고의 활약이었습니다. 조던은 훗날 자신의 최고 전성기를 바로 이 92-93 시즌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해당 시즌 마이클 조던의 경기력은 훌륭했습니다.
https://youtu.be/nnGCDUHEoms
92-93 시즌 마이클 조던의 몸 상태와 밸런스가 얼마나 좋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스카티 피펜의 자유투가 림을 맞고 나온 것을 바로 덩크로 연결시키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조던은 정말 “혹시 새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빠르고 자연스럽게 ‘날아’ 덩크를 가볍게 꽂고 자신의 코트로 돌아갑니다.
분명 조던의 평균 득점이 92-93 시즌보다 더 높았던 시즌도 있었고, 더 높이 점프했던 시즌들도 있었겠지만, 확실히 92-93 시즌 마이클 조던은 신체 밸런스, 경험, 운동 능력, 슛팅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절정에서 조화를 잘 이룬’ 시즌임에는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즌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조던의 라이벌이자 절친, 찰스 바클리! 필라델피아에서 피닉스 선즈로 이적한 찰스 바클리는 시즌 평균 25.6득점 12.2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2미터도 안 되는 선수가 25-12-5라니!) 이적 첫 해, 팀을 62승 20패, 리그 1위로 올려 놓으며 MVP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조던도 개인적으론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팀 성적에서 밀렸기에 바클리에게 MVP 트로피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92-93 시즌은 ‘훗날 조던의 뒤를 이어 리그의 지배자가 되는 샤킬 오닐이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리그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시즌’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샤킬 오닐은 올랜도 매직에 1라운드 1번으로 드래프트 되어, 23.4득점 13.9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생애 단 하나 뿐인 신인왕에 등극했습니다.
샤킬 오닐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닐과 조던의 첫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샤킬 오닐과 마이클 조던이 NBA 코트에서 처음으로 대결한 것은 1993년 1월 12일이었습니다. 이 날 마이클 조던은 23득점 8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스카티 피펜은 13득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이 아저씨 트리플 더블 참 아무렇지 않게 기록하네요.)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샤킬 오닐도 19득점 11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농구 황제 앞에 나름 선전했지만, 팀을 패배에서 구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경기 후 조던은 “샤크에겐 무척 힘든 경기였을 것이다. 하나하나 잘 배워 나간다면 훗날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이후 조던과 샤크는 4일 뒤 1월 16일, 또 다시 만났는데 이 날은 샤킬 오닐도 29득점 24리바운드 5블록슛이라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만! 조던도 이 날 무려 64득점(!)을 퍼부어 버리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64득점 허허.....)
훗날 샤크는 “미래에 내가 아버지가 되면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아버지는 마이클 조던이라는 전설과 함께 뛰었노라고”라고 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4장 시카고 다이너스티
플레이 오프에 진출한 시카고 불스는 더욱 기세를 올렸습니다. 시카고 불스는 1라운드에서 만난 애틀란타 호크스와 2라운드에서 만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단 1승’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비가 없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사정 없이 그들을 공격했고 그들은 조던과 불스에게 초토화된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동부 파이널이었습니다. 상대가 바로 전년도 시카고 불스를 탈락 위기까지 내몰았던 뉴욕 닉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던과 불스를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조던에게 그들은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를 잇는 뉴욕 ‘배드 보이즈’나 다름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조던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약했던 존 스탁스를 비롯 뉴욕의 선수 한명 한명이 모두 조던의 심기를 긁었고, 거칠게 불스 선수들을 대했습니다. 게다가 92-93 시즌엔 정규 시즌 성적마저 뉴욕 닉스가 불스보다 좋아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없는 상황!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 2차전을 연속으로 뉴욕 닉스가 잡아낸 것입니다. 조던과 불스 입장에선 정말 충격적인 결과! 이대로라면 NBA 3연패는 물건너 갈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여기에서 신이 난 뉴욕 언론이 또 주접(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상대가 조던인 만큼 그냥 주접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을 떨었습니다. 그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조던을 자극하는 일이었습니다.
뉴욕 언론은 마이클 조던의 도박 습관에 대해 대서특필했고, 조던의 사생활을 공개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조던이 경마 도박을 했고, 골프를 칠 때도 늘 도박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이에 조던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조던은 자신의 사생활을 그렇게 파헤쳐서 만 천하에 공개한 그들을 증오했습니다. 소위 ‘뚜껑이 제대로 열린’ 조던은 4차전 54득점(!)으로 그 댓가를 치루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3차전부터 내리 4연승을 거두며(허허…) 뉴욕 닉스와 뉴욕 언론이 짐을 싸서 그들의 차가운 도시로 돌아가 버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뉴욕 언론도 참... '배움'이 없습니다. 상대 좀 보고 기사 쓰라니까...)
마이클 조던과 불스는 그렇게 파이널에 진출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바로 피닉스 선즈. 조던의 절친이자 라이벌인, 그리고 해당 시즌의 MVP 찰스 바클리가 버티고 있는 팀이었습니다. 피닉스 선즈는 92-93 시즌 정규 리그 챔피언인 팀이었지만, 조던에겐 자신이 여전히 최고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나 다름 없었습니다. 팀 성적이 조금 떨어져서 MVP를 놓쳤지만, 그리고 그 새로운 MVP가 찰스 바클리였지만, 여전히 리그의 지배자는 자신이며, 자신과 불스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당시 경기 전 바클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우리가 승리하길 바란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은 그런 바클리의 도발과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세기의 라이벌전 시작!
조던은 ‘피닉스에서 열린’ 파이널 1, 2차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을 만났을 떄는 포인트 가드 놀이를, 드렉슬러를 만났을 때는 슈팅가드로 뛰더니 이번에는 찰스 바클리 때문에 파워 포워드 놀이라도 하는 걸까요? 조던은 두 경기 동안 36.5득점 9.5리바운드(!) 7.0어시스트 3.5스틸을 기록하며 피닉스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적진에서 2승을 추가했기에, 대부분 불스의 손쉬운 챔피언 등극을 예상했지만, 정규 시즌 챔피언 피닉스 선즈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습니다. 3차전은 정말 박빙이었습니다. 양 팀은 첫 쿼터를 29 대 29로 시작했고, 그 이후 거의 모든 쿼터들을 같은 점수나 1점차의 우열 속에 치뤘고, 두 팀은 결국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1차 연장전에서는 양 팀이 각각 4점을, 2차 연장전에서는 각각 7점씩을 낸 그들은 3차 연장전까지 가서야 15 대 7로 점수가 갈라지며 피닉스 선즈가 승리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무려 44득점을 올렸지만, 24득점 19리바운드를 기록한 찰스 바클리가 마지막에 웃었습니다. 사실 이 경기는 조던과 불스 선수들에게는 참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홈에서 무려 3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으니까요.
이를 갈고 나온 마이클 조던과 불스는 4차전을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2쿼터를 제외한 모든 쿼터에서 승기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찰스 바클리는 이 날 32득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지만, 무려 55득점(!)을 퍼부은 마이클 조던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NBA 파이널은 정규 시즌보다 훨씬 더 긴장감이 큰 경기이고, 수비도 터프해지는 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55득점이라니. 확실히 마이클 조던은 큰 경기에 강하고, 파이널에선 더 더욱 강해지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시카고에서 열린 5차전은 피닉스가 승리했습니다. 1쿼터 부터 12점이나 앞선 가운데 경기를 시작했고, 2쿼터를 제외한 모든 쿼터에서 불스를 압도했습니다. 조던이 44득점으로 분전했지만, 선즈에선 찰스 바클리, 케빈 존슨, 리차드 듀마스 세 선수가 모두 24득점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6차전! 6차전은 피닉스에서 열렸습니다. 7차전도 피닉스에서 열릴 것이기에, 마이클 조던과 불스는 6차전에서 반드시 시리즈를 끝낸다는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경기 시작부터 피닉스를 강하게 몰아 붙였습니다. 1쿼터 스코어는 37 대 28! 시작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피닉스가 이후 잘 따라 붙었고, 결국 경기 막판 98-96으로 피닉스가 2점 앞서 나간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14초! 인바운드 패스는 조던이 했습니다. 조던은 피펜에게 볼을 건넸고, 피펜은 호레이스 그랜트에서 패스를 했습니다. 수비수들이 그랜트에게 집중할 때 그랜트는 외각에 서있는 존 팩슨에게 볼을 빼주었습니다. 팩슨의 3점슛… 골인!!! 스코어 99 대 98! 역전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4초!
선즈에서는 케빈 존슨이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팩슨에게 멋진 어시스트를 건네며 역전을 이끌어 낸 호레이스 그랜트는 마지막에도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랜트는 케빈 존슨의 마지막 슛을 멋지게 블록해 버렸고, 이때 경기 종료 버저가 울렸습니다. 불스의 우승! 3년 연속 우승을 이룬 것입니다. 조던과 동료들은 마지막 영웅이된 호레이스 그랜트와 존 팩슨을 껴안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파이널에서 무려 평균 41.0득점(!!!!) 8.5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또 다시 파이널 MVP를 수상했고, 정규 시즌 MVP인 찰스 바클리에게 여전히 자신이 최고이며, 자신이 시대의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조던이 지난 3년 동안 해보지 못했던 거라곤, '파이널 7차전 경험'과 '준우승' 뿐이었습니다. (허허)
조던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팩슨이 공을 잡았을 때,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직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년 연속 우승으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임을 증명해냈다. 보스턴 셀틱스의 60년대 우승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농구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3연패를 꿈꿔왔다. 이는 아이재이아 토마스도, 매직 존슨도, 래리 버드도 해내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조던의 말처럼 60년대 보스턴 셀틱스를 제외하고는 70년대 부터 조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3연패를 해낸 팀은 없었습니다. 조던 이후에도 2000년대 샤킬 오닐의 LA레이커스가 3연패를 이루기 전까지 그 어떤 팀도 조던의 업적을 다시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3년 연속 우승은 '전력 유지'나 '동기 부여'면에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3연패... 조던의 마지막 도전 과제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5장 아니라고 말해줘요, 마이클.. (Say it ain’t so, Mike)
NBA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위업을 이뤄낸 마이클 조던. 하지만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망 소식’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 조던은 한 장례식장을 다녀오던 길에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강도 두 명의 총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시 강도 두 명은 다니엘 그린과 래리 마틴이었는데, 이들은 제임스 조던에게 총을 쏜 뒤 금품을 빼앗고, 차를 훔쳐 도주했습니다. 제임스 조던의 사체는 얼마 후 근처 늪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살해 당시 제임스 조던의 손에는 아들 마이클 조던이 선물한 두 개의 NBA 챔피언 반지가 끼여 있었는데, 조던은 이후 아버지를 보내드리며 “슬펐지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과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부정적인 것은 늘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라.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떠나셨지만, 그가 내게 말해준 모든 교훈과 조언들은 영원히 가슴에 새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즌을 한 달여 앞둔 1993년 10월 6일, 마이클 조던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불스의 4연패를 기대하던 팬들 앞에서 조던은 “내가 의욕을 잃었다는 것은, 농구 선수로서 뭔가를 입증해야 한다는 의욕을 잃었다는 것은… 내가 이제 농구라는 운동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의 죽음과 이 은퇴 결정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늘 도전과제를 찾고, 동기부여를 원해왔던 조던은 아버지 사망 후 농구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는 걸.
다음 날 시카고 선-타임지는 헤드라인에 “아니라고 말해줘요, 마이클.. (Say it ain’t so, Mike)”이란 제목으로 마이클 조던의 은퇴를 슬퍼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에 있어서 그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많은 단계들, 그리고 그 과정들에 대해선 잊어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정상의 자리에서 그냥 물러서 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늘 아버지와 함께 의논했었다. 여름에 필 잭슨 감독을 찾아가 말했다. 다가오는 시즌에 내게 어떤 도전과제들을 줄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난 은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나와 필 잭슨 모두 다 말이다.” -마이클 조던
늘 새로운 도전을 원했던, 그래야만 살아 있음을 느꼈던 항상 '도전자'의 마음을 간직했던 챔피언,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그렇게 9년 동안 정 들었던 농구 코트를 떠났습니다.
6장 에어 조던 8이 남긴 의미
에어 조던 8은 팅커 햇필드의 창조적인 실험 정신과 안정성에 대한 염원이 제대로 실현된 걸작입니다. 또한 70년대 이후 단 한 차례도 없었던 리그 3연패와 함께한 농구화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이 농구화를 신고 웃고 울었으며, 3년 연속 NBA 파이널 MVP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과 불스 팀이 함께 이룩해낸 세번째 우승 트로피에 입맞췄고, 지난 9년 동안의 환상적이었던 추억들을 팬들의 가슴에 남겨둔 채, 그렇게 정상의 자리에서 코트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남기고간 ‘에어 조던 8’만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에어 조던 8이 우리 나라 팬들에게, 또 전 세계 팬들에게 '특별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