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히로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오시이 마모루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카이 크롤러>는 감독 자신의 연출변 그대로 이 시대 젊은이에게 던지는 질문과 메세지의 영화다. 청소년기에서 성장이 멈춘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삶과 죽음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지배했던 전공투 시대의 기억을 판타지의 시공 안에서 되살려 회상하고 있다. 여기에 수십년전 사회의 분위기가 짙게 감지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간간히 보이는 신문이 안보조약 체결 기사를 싣고 있다든가 세계 대전을 거친 뒤의 완전 평화와 경제번영의 뒤안길에 청소년들의 투쟁이 관전이라도 하듯 남의 일로 외면당하는 현실은 영락없는 전후 경제 부흥기의 일본이다. 파일럿의 일상 생활에 관한 세부적인 묘사 또한 감독이 쓴 자전적 소설 [야수들의 밤]에서 기술된 지나간 세대의 모습을 반영한 결과이다. 감독은 동시대를 본질적으로 몸소 겪어온 혁명기와 동일한 성질의 등가물로 파악하고 있다.
영화는 창공이라는 공간을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보여준다. 하늘의 맑고 투명함과 지상의 어두움, 실내와 실외의 극명한 차이로 빚어낸 독특한 비주얼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의식한 듯 [빛의 제국] 연작을 연상케 만든다. 지상의 세계와 창공의 세계는 아주 상반된 성질을 가진다. 구름만으로 덮여 있는 몽환적인 세상.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현란한 공중전투장면으로 영화의 포문이 열린다. 심심치않게 보이는 전투기의 총격 장면은 <스카이 크롤러>의 구경거리다. 이카로스 신화가 말해주듯 하늘과 비행하는 사물의 이미지는 무한 자유의 상징이며 땅은 단순하고 지겨운 일들의 반복으로 얼룩진 피폐함과 억압과 구속의 공간이다. 흑표범 문양이 새겨진 기체가 다른 기체를 격추시키는 오프닝신을 유심히 보자. 관습처럼 도입 부분에 스토리전개와 무관한 액션 장면을 집어넣은 것 같지만 심플한 구성의 이 장면에서도 중요한 모티브가 포착된다. 아름답고 서글픈 비행 전쟁. 비상과 추락의 상반된 교차. 따라서 영화는 비상을 좌절당한 존재의 비극과 그들의 도약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키르도레라 명명되는 특수한 종의 인간 무리가 있다. 사춘기의 상태에서 성장이 멈추어 버린, 영원히 아이일 수 밖에 없는 존재.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언제나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존재의 궁지에 몰린 인물에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왔다. 다른 작품에 등장했던 사이보그나 조직원들처럼 키르도레 역시 일정한 형태에 정지되도록 강제당한 이들이며 이들의 고통은 변이의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온다. 칸나미 유이치를 포함해서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과거의 기억이 망실되고 없다는 점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정체성이란 성장이란 과정에서 겪게되는 경험정보에 근거하는데 키르도레에게는 현상태라는 결과만 주어져있지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에서 부모의 기억을 가지지 못한 레플리컨트들과 동일한 존재론적 문제에 봉착해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 중 인물들의 일상은 비슷한 일과의 연속이고 공간내 인물의 배치 또한 변화가 없다. 가게 주인은 유이치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파이와 커피를 챙겨준다. 노인은 낮이든 밤이든 계단에 앉아 쉬고 있으며 외박할 때 식당의 인물 위치는 늘 그대로이다. 마치 정물화같은 풍경. 실사영화 <아바론>에서 이미 목격했던 죽음을 일깨우는 중세적 바니타스의 정지 이미지.
중반에 뮤직비디오처럼 효과음이 제거된 상태에서 영상만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음향적 몽타주. 이건 새롭게 그림을 작화하지 않고 기존의 그림을 재활용해 스토리와 러닝타임을 보강하려는 경제적 효과를 노려 텔레비전 상영용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프레임의 색채나 구도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지만 한 눈에 동일한 프레임을 사용한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편집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카이 크롤러>에서 이 수법은 주제에 완벽하게 결합된다. 정해진 공간, 정해진 인물들을 계속 반복해서 나오게 하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을 이루고 게임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은 그런 식의 삶을 영원히 반복할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술은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막막함을 드러내기 위한 소도구로서 습관처럼 애용된다. 전투기의 이륙과 착륙, 병영 안에서의 생활, 아이와 뛰노는 개, 단골 가게와 홍등가를 오가는 일상. 어제와 같은 오늘의 삶, 오늘과 같은 내일의 삶을 살면서 삶은 전진하지도 흘러가지도 않는다. 어떠한 흥분도 재미도 없다.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면서도 부동의 삶이 되는 것이다. 간략해진 인물의 작화와 정적인 연출이 시종일관 무기력한 정적 상태의 먹먹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고 미로를 헤매는 것과도 같은 기시감.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반복되는 요소도 있지만 차이들을 통해 시간의 경과 같은 것이 나타나고 있다. 절망 가운데서도 희노애락의 흔적은 남아있다.
영원한 아이일 것만 같은 키르도레들도 실은 차츰 성장하고 있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기지를 이동한 뒤 열린 파티에서 어린 아이들의 장난감에 올라타있는 장면이 그 증거다. 장난감은 이미 그들의 성장한 몸에 비해 작고 맞지 않다. 소설에서 작가는 키르도레와 보통 인간의 구분을 명확히 해놓고 있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는 키르도레의 정체를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다. 임신하여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유년기를 벗어난 물리적인 성인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시적이진 않지만 변화의 조짐은 미묘하게 나타나 있으며 다만 늦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하다면 정신의 미성숙 상태를 지연시키는 힘의 자장은 무엇인가. 오시이 마모루 작품의 메세지를 간파하려면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집중하는 숏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스이토의 딸이 공군 기지에 놀러오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아이의 옷의 단추에 파일럿들의 옷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동료들이 소속된 군수산업 기업체 로스톡의 상표이다. 이처럼 자본과 권력의 힘은 개인의 미시적인 일상에조차 침투해있으며 그들의 이름-자리를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처음부터 백지이거나 없었던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기관에 몸을 담게 되고 직업을 얻는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부모의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게 되리라.
라우테른의 파일럿, 일명 '티처'라 불리는 인물은 비행기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는 맞서기 힘든 힘을 가진 '어른 남자'이며, 티처와 맞선다는 것은 곧 그의 존재로 집약되는 현실 사회을 직시하고 부딛쳐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는 한편 땅에는 마마(mama)라는 별명을 가진 정비사가 있다. 정비사는 언제나 그녀가 수리한 비행기가 격납고로, 그녀의 상징적인 자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폐쇄 공간에서 야외로, 다시 닫힌 곳으로 이어지는 동선. 이런 신화적 구도로 인하여 <스카이 크롤러>의 지정학적 공간들은 가정이라는 견고한 보수적 체제의 틀에 가두어져 있는 것이다. 사회와 투쟁하지만 가정의 틀안에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식하고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허구에 빠져서 만화나 소설 혹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고 하는 모순적인 존재들. 키르도레는 자유를 갈망하는 한 편으로는 부자유의 조건안에 안주하며 순종하는,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다른 모습이다.
전쟁이 국가간의 대결이 아닌 기업과 기업, 자본과 자본의 대결 구도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조종사들은 산업 사회를 뒷받침하는 부속품으로서 기계적인 성분을 이루며 그들의 손과 다리는 정해진 작업을 수행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라고는 전투기 조종기술 밖에 없다. 익숙해진 기체는 회수당하고 새로운 기체를 처음 타는데도 능숙히 조종하는 모습을 보라. 이는 무엇을 위함이던가. 가계의 주인 부부가 뉴스를 보다 유이치에게 뭔가 기대하고 당부하는 태도를 보이는 장면이 잠시 지나간다. 이 작품에서 기지 지휘관 이상의 장성이 어른이라는 점, 그리고 쿠리타 진로의 이름이 '인랑(人狼)'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어른들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방송으로 중계되는 저편에서 죽어나가는 청년들의 정체성의 박탈과 피의 착취 그리고 희생으로서 가능했다는 잔혹한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며, 키르도레의 영원한 젊음이란 실은 어른들의 필요에 의해 현상태에 고착화된 나머지, 자신들이 주체적인 어른이 되어 운영하는 신질서를 창조해내지 못한 젊은이들의 상황을 빗댄 것이다.
우리스 기지에 배속되어 온 유이치를 보고 도키노를 포함한 동료들이 짓는 의미심장한 표정들은 무엇이었던가. 기지의 사령관 쿠사나기 스이토 주변을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유이치의 전임자인 진로를 사랑했고 그를 쏴죽였다. 가끔 아무도 없는 유이치의 방에 들어와 유이치의 침대에 몸을 숙이는 그녀에게서 뭔가 유이치와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중에 동료의 대사에서 밝혀지지만 유이치는 진로의 후임자이면서도 그의 복제였던 것이다. 회사가 데이터화한 전투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 재생한 신체에 도로 불어넣었던 것. 동일한 기체에 동일한 신체라니.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동료들이 전사하자 충원되어 온 신입 파일럿이 정성스럽게 신문을 접는 모습을 보라. 그의 전임 파일럿과 흡사한 외모에 똑같은 행동 양식. 오시이는 영화를 공상과학처럼 만들지 않겠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타인의 것인지도 모를 엉뚱한 기억을 주입받고 진실을 깨닫자 괴로워하는 <공각기동대>의 피해자들이 떠오른다. 술집에서 유이치와 얘기를 나누는 스이토의 뒷배경에 전시된 인형이 포착되면서 그들은 인형과 동일시된다. 키르도레로 상정되는 젊은이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불러온 경제의 안정과 어른들의 시선에 준거한 획일화 작업으로 독자성과 개별성을 상실당한 희생양들이다.
성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에 뛰어들면서 자신을 둘러싸는 복합화된 관계망 내부에서 자아와 비아의 경계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려진다. 동일성의 굴레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이들이 택하는 길은 죽음이다. 창 밖의 유이치를, 아마 유이치에게서 떠오르는 진로의 환영을 보았을 쿠사나기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권총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있다. "너를 몇번 만나 몇번 사랑하고 몇번 죽였을까" 상공에서 '티처'에 의한 죽음이든 아니면 자발적인 죽음이든 이 지겨운 회귀를 그만두고 싶다. 그저 자신들의 육체를 통해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진정한 탈출구는 되지 못한다. 규범화된 프로그램을 거듭 재생산하고 유사한 존재를 양산해내는 사회의 복제 능력은 언제든지 이런 비극을 빚어낼 준비가 되어 있을 터이니까 말이다. 죽음은, 아무 것도 낳지 않는다. 단지 일시적인 기만이거나 도피, 행동에 옮길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치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자신을 죽여달라 요청하는 스이토를 향해 유이치는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총탄은 창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오시이 마모루의 필모그래피 면면을 들여다보면 창문이 깨지는 장면이 참 많이 나타난다. 무의식적이겠지만 나는 이것이 감옥의 이미지에 균열을 일으킴으로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경계를 부수고 변화와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의 순간, 발상 전환의 순간에 집어넣는 숏이라고 여긴다. 총을 버린 유이치는 자살하려던 스이토를 만류하고 강하게 끌어안는다. "당신은 살아요. 뭔가 변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살아요" 유이치는 죽음을 선택하지도, 기대와 격려라는 언어표현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일정한 틀에 가두어지길 원하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는 길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서 살아있는 삶이다. 긍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생의 저변들을 긍정하는 데서부터, 자기 실존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지금 여기에서부터 고착화되기를 거부하고, 강제되는 의식화를 거부하고 실존을 찾아나가야 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절망적인 현실을 은유로서 펼쳐내지만 그 안에 몰래 작지만 강렬한 희망을 감추어 둔다. 비밀은 작품 안에 다 들어있다. 창문에 뚫린 작은 구멍. 전체를 깨지는 못하지만 그 작은 구멍부터가 중요한 변화를 위한 단초인 것이다.
청년은 자신을 현상태로 가두는 견고한 체제의 벽 '티처'에게 도전한다. "내가 아버지를 죽이겠어" 티처가 주인공의 친부인 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상징적인 용어다. 사회의 질서와 안정, 권력과 체제. 기존 사회를 주도하고 새싹들의 성장을 억압하는 어른들에 대한 투쟁. 그리고 도전은 그의 패배와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카로스의 추락. 표준화한 교육과 훈련으로 대량 양산된 균질화된 개체의 운명은 이처럼 기업과 자본이 빚어내는 어른들의 질서 안에서 그들을 위한 소모품이요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설령 티처를 격추시킨다 하여도 바뀌는 것이 있을까. 섣불리 승리를 말하지 않으며 뒤로 물러서는 성숙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것은 패배주의의 낭만화를 뜻하지 않는다. 엔딩크레딧이 모두 흐르고 에필로그 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 유이치가 그러했듯이 신입이 들어온다. 아마도 유이치와 똑같은 용모의 친구일 것이다. 쿠사나기 스이토가 그를 반기며 말한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니체식의 영겁회귀. 그리하여 <스카이 크롤러> 전체가 하나의 데자뷰 덩어리였던 것. 신질서를 만들어내는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패배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싸우고 말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고요 속에 감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클리어가 가능해보이지만 불가능한 게임인가, 아니면 불가능해보이지만 클리어가 가능한 게임인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들리는 유이치의 독백이 인상깊다. <스카이 크롤러>의 주제 의식을 단번에 압축하는 명대사이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 매일 다니던 길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설사 그 길이 같다고 하여도 그곳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키르도레들의 삶은 영원하고 동일성의 자장 가장자리를 맴돌지만 일상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변화들을 찾아내고 음미할 수 있다면 살아있다는 감각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약간이지만 확연한 이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이 작품은 더할 나위없이 음울한 작품일 것이다. 반복되더라도 그 순간을 소중히 기억하고 지금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혁명은 사회구조 차원에서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사적인 관계면에서는 어느정도 변혁이 있었고 감독은 그 순간을 젊은 기분으로 추억하고 있다. 이것이 <스카이 크롤러>로서 관객에게 전하는 철학자 오시이 마모루의 희망의 전언이자 <스카이 크롤러>에 감추어진 영원한 운동권 청년 오시이 마모루의 진심이다. 복잡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사실 간단하고 단순하다. 질문을 던지지만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관객의 몫으로 유보할 따름이다.
현학적인 군더더기를 걷어낸 이 작품이야말로 감독의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진실하고 순수하며 절절한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회한이 어린 자기 고백이면서 진보와 혁명이 아득히 먼 일이 되어버린 당대를 근심하는 비주얼 사상가의 진심이 온전히 담긴 걸작의 탄생이다. 가와이 켄지의 사운드 트랙은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기 보다 상처입은 영혼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듯 한없이 유장하고 애절하고 간절하다. 현실에 대한 비관과 낙관이 겹치는 시선의 균형과 깊이, 두 시간을 이끌고가기엔 플롯은 농밀하지 않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비극적인 인식으로 도달하는 힘이 있다. 이 작품이야말로 사유하지 않음으로서 변변하지 못한 재생산만 거듭하는 가운데 독보적으로 빛나는 올해의 수작이다. 베니스 영화제가 <스카이 크롤러>에 그랑프리를 안겨주지 않은 일은 아카데미가 스탠리 큐브릭에게 감독상을 수여하지 않은 것처럼 훗날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관객과 평론가들의 치명적인 실수로서 회자될 것이다.
[필자 후기]
실의에 빠져 있던 필자는 수영만 야외 상영장에서 <스카이 크롤러>를 보면서 유이치가 스이토를 끌어안는 장면과 티처와 교전하기 전의 나레이션이 흐르는 부분에서 울고 말았다. 정전으로 인한 상영중지 사태가 빚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지나가는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에필로그 신과 감독의 이름이 뜨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날의 메세지는 내게 너무나도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