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그 고개 마루턱에 서면 강릉은 발 아래다. 멀리 경포호가 보이고 눈을 조금 조이면, 동해 푸른 물이 눈가를 적신다. 이것을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금강산 화첩을 그리려 가는 길새였다고 한다. 그 때 선교장이 있었다면 그 또한 반드시 들렸을 터이다.
동짓날 일요일 아침, 옛문화답사회원들을 모시고 처음 들른 곳은 선교장이다. 옛문화답사회 회원이자 이 선교장의 후손 중 한 분인 이강륭 선생(전 조흥은행장)의 속깊은 배려로, 이 댁 후손 어른분께서 직접 안내를 하고자 매표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렇게 미안하고 송구할 수가...........
제철이면 연향이 십리 밖까지 퍼질텐데, 대신 맑고 청정한 겨울 공기가 정신을 말끔하게 다듬어준다. ■ 강릉 선교장 --- 조선 최대 102칸 살림집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잡고 있는 선교장은 전통가옥 중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존재이다. 우선 현재 남아 있는 가옥의 규모만도 건물 9동에 총 102칸으로, 국내 최대의 살림집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선교장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건물들의 용도와 구성도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면, 사랑채에 해당되는 건물만 해도, 활래정, 열화정, 동별당, 서별당, 작은사랑 등 5군데에 이른다. 왜 이처럼 많은 건물들을 지었을까? 대저택 선교장은 한순간에 건축된 집이 아니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 1693~1781)이 배다리(船橋)에 터를 잡은 18세기부터 200여 년 동안 적어도 네 차례의 대대적인 확장과 변모를 거듭해왔다. 따라서, 주택 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초창기 마스터 플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건물의 성격이 변하고 영역의 경계가 확대되는 독특한 건축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 경포호의 둘레는 4km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12km에 달할 정도로 드넓은 호수였다. 그 때는 선교장 활래정 바로 앞까지 물이 차 나루터가 있었고, 나루터에서 다리를 건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배다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호수가 지금처럼 줄어든 이유는, 자연적인 퇴적 현상과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벌인 간척사업 때문이었다.
선교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집안의 패밀리 히스토리도 알아야 한다. 오늘의 답사는 어쩔 수 없이 활래정부터 보아야만 한다. 지금의 활래정 모습은 초기에 비해 많이 바뀌었으나, 순차적으로 사진과 함께 설명을 해나가기로 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다소 설명이 길어질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매표소 입구에서 바라다 본 활래정과 사방연지(四方蓮池). 활래정을 왼편으로 끼고 걸으면, 월하문에 이른다. 선교장 답사는 반드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옛날 조선시대 사대부로 돌아가 이 집을 심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장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에는 월하문(月下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편액 아래 두 기둥에는 주련이 두 개 걸려 있다. 밤 늦게 다다른 객이 이 주련을 읽고 이해했다면 그는 좋은 방에서 좋은 식사 대접을 받고 편히 쉴 수 있으나, 이 글의 뜻을 모른다면 수고로움이 낭패일 것이다.
鳥宿池邊樹 새는 물가의 나무에서 잠자고 僧鼓月下門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월하문에 걸린 이 시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늦은 저녁 선교장을 찾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월하문을 두드리십시요. 반가히 맞이 하겠습니다. " 월하문을 들어서면 바로 활래정(活來亭)을 눈 앞에 마주하게 된다. 활래정이란 이름은 주자(朱子)의 시 " 관서유감(觀書有感)" 에서 유래하였다.
半畞方塘一鑑開 반무방당일감개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 問渠那得淸如許 문거나득청여허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 爲有源頭活水來 위유원두활수래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이지
활래는 이 시의 마지막 귀절에서 따온 것이다. 활래정의 물은 실제로 서쪽 대장봉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정자 앞의 연못으로 들어오고, 그 물은 다시 경포호로 흘러들어간다. 연(蓮)은 조선 초기에 강희맹이 중국 남경의 유명한 전당지(錢塘池)에서 가져와 키운 것이 최초라고 알려지고 있다. 활래정의 연은, 이내번의 손자 이후가 강희맹의 연을 후손에게서 얻어왔다고 전해온다.
활래정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요민속문화재인 이 정자는 1816년(순조 16)에 선교장 3대주인 이후가 처음 지었던 것을, 6대주인 경농 이근우(鏡農 李根宇)가 1906년(고종 43)에 다시 지은 것이다.
활래정은 온돌방 부분과 누마루 부분이 직각으로 놓이며, 두 부분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지붕을 가지면서 모퉁이 끝만 살짝 붙어 있는 형국이다. 다시 말하면, 두 개의 건물이 직각으로 붙은 ㄱ자형 건물이다. 원래는 연못 속 섬 위에 지어진 한 칸 짜리 정자였는데, 이근우가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은 것이다.
활래정에는 편액이 여럿 걸려 있다. 아래 사진은, 한말(韓末) 궁중 화원이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이었던 해강 김규진(1863~1945)의 글이다.
활래정 누마루의 내부. 사방이 겹문으로 되어 있어 계절에 적절히 대응한다. 문살, 평방의 굽받침, 천장을 가로지르는 들보, 천장 등의 가구(架構)가 돋보인다.
누마루에서 내다 본 연못. 연이 피는 계절에는 연향(蓮香)이 활래정을 휘감고 돈다. 특히 여름철 비오는 날 연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절창(絶唱)의 숨고르기 같다고 한다.
소나무와 연이 어우러진 이곳에는 원래 오은 이후(鰲隱 李厚)가 지은 한 칸짜리 활래정이 있었으나,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이 사진은 여름철 사진이다.)
활래정 누마루에서 바라다 본 온돌방. 사진의 오른편에, 문고리 달린 작은 방이 활래정의 독특한 구조 중의 하나인 다실 (茶室)이다.
온돌방에서 누마루쪽, 왼편의 작은 방이 다실이다. 이곳에서 방문객들에게 대접할 차를 준비한다.
활래정 온돌방. 아취있는 방이 꾸며져 있다. 20여 년 전 여름에, 바로 이 방에서 이틀을 묵은 적이 있는데, 전 날 과음으로 늦잠을 자다가 늦은 아침에 연향에 깜짝 놀라 깬 적이 있었다. 그 때에는 이 방에 해강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이번 답사에서 보니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제철에는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다회(茶會)가 열린다고 한다. ![]()
초여름날, 연이 피어나려 하고 있다.(겨울 답사에 삭막한 느낌을 다소나마 줄이고자 제철 사진 몇 장을 넣어본다.) ![]() ![]()
활래정에는 편액이 여럿 걸려 있어 순서대로 소개할까 한다. 흰바탕의 금색 행서는, 고종 때 동궁의 시종관을 지낸 학자로, 행서와 초서를 잘 썼던 규원(葵園) 정병조(1863~1945)의 글씨이다.
아래의 글씨 역시 규원의 것이다.
조선 왕조 마지막 도화서 화원이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이었던 해강 김규진의 글씨. 화중계산.
성재(惺齋) 김태석(1875~1953)의 글씨. 성재 김태석은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로 전(篆), 예(隸), 해서와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일찍부터 협기와 풍류로 알려진 성재는, 중국에 갔을 때 대총통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고, 그의 서예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는 고승들의 비명도 많이 썼는데, 합천 해인사의 "慈通弘濟尊子四溟大師(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 비가 그의 글씨이다.
합죽선 모양의 편액에, 쪽빛 바탕 흰 행서. 규원 정병조의 글씨이다.
아래 사진의 편액은, 당대의 대표적 서예가 중 하나였던 성당(惺堂) 김돈희(1871~1937)의 글씨인데, 활래정 편액 중 가장 크다. 선암사 강선루의 편액이 성당의 글씨이다.
당대 명사와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
활래정을 보고 본가로 가는 길.
선교장의 입향조라 할 수 있는 이내번의 부친 이중화는 충주에 세거(世居, 대를 이어 산다는 뜻)하던 토착 양반층이었다. 그는 세 번의 장가를 들었는데, 이내번의 모친은 안동 권씨로 3재취로 시집온 것이다. 권부인은 남편보다 27살 연하였고, 아들 이내번을 낳은 것은 남편이 68살 때였다. 아들 이내번이 15살 되던 해 남편이 타계하자, 권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강릉 경포대 부근 저동에 자리잡는다. 이내번 모자는 가지고 온 재산을 기반으로 열심히 토지를 사들여 차근차근 부를 쌓아나갔다. 그리하여 창녕 조씨들이 살던 이곳에 집을 짓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교통과 영농의 요지에 터를 잡은 이내번 당대에는 지금의 안채를 중심으로 한 보통 규모의 상류주택 정도로 집을 지었던 것으로 전한다. 강릉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류주택의 전형인 강릉형 ㅁ자형 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등이 하나의 구조물로 연결되고, 폐쇄된 안마당을 갖는 ㅁ자집은, 영동지방 뿐만아니라 경북 북부 안동 일대에 널리 분포한다.
이내번 당시의 선교장은 ㅁ자형 집의 안쪽에 안채를, 앞의 서쪽 모퉁이에 사랑채를 들이고, 대문은 동쪽으로 두었을 터이다. 왜냐하면,안방과 사랑방을 대각선으로 엇갈리게 위치시키는 것이 이 지역 ㅁ자 집의 일반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내번의 손자 오은 이후(鰲隱 李厚, 1773~1832)는 현재의 선교장 구성틀을 마련하였으며, 보통 상류주택 수준의 선교장을 경제적 측면에서 대규모 장원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이후는, 이곳 토착 양반들이 자신을 질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왕족의 후예라는 뿌리, 학문보다는 농장 경영에 열심인 경제 실리적 성향, 자리잡은 지 불과 3대만에 자신들과는 비교가 안될 막대한 재산을 쌓은 등등. 이후는 자신에 대해 쏟아지는 지역 사회의 질시를 타파하기 위해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흐의 과거 급제에 대한 소망은, 두 아들 용구와 봉구가 잇달아 생원시에 합격하며 이루어졌다.
이후와 아들 이용구 대에 선교장에는 많은 건물들이 증축된다. 이는 다른 사대부가들이 후손을 분가시키면서 씨족 마을을 이루어 나갔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이씨 가는 한집에서 대가족을 수용하려는 독특한 모듬살이를 이어 왔다. 그 결과, 집의 규모가 커질 수 밖에 없었고, 건축적 영역에 대한 인식이 달라 질 수 밖에 없었다.
예전의 소작인 농막(農幕)들이 있었던 자리에서 바라다본 선교장.
이내번의 6대 손으로 한말 일제 초 격변기의 선교장 주인이었던 경농 이근우(鏡農 李根宇, 1877~1938)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배다리골에 "동진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려던 선각자, 애국자였고, 수많은 소작인을 통제하며 위세를 떨친 봉건적 대지주이기도 했다. 집 앞에 버젓이 "소실댁"을 지어 씨앗을 본 간 큰 남자였으며, 활래정을 새로이 지어 평생 전국의 지우를 끌어들였던 한량이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사진에서 왼편 화단 부분이 소실댁이 있던 자리이다.
이근우 당시에는 주목할 만한 건축적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활래정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짓고, 안채의 일부를 헐어내고 현재의 동별당을 앉혔다. 앞서 이야기한 소실댁도 지었다. 이 세 건물의 건축은 단지 선교장의 규모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배다리골 전체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계기였다. 그리고 여러 부속 농막들을 배다리골 안에 지음으로써, 선교장의 영역은 배다리골 전체로 확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 초기의 선교장은 삼형제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살기 위해 구성되었지만, 19세기 중반부터는 외부적 교류를 위한 공공적 주거로 성격이 바뀌었다. 열화당은 더 이상 대가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외부 손님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
선교장에는 출입문이 둘이다. 오른편의 평대문, 즉 동쪽 안채의 대문은 가족용 대문이라 할 수 있다. 왼편의 솟을대문, 즉 서쪽 열화당쪽 문은 손님용 대문이라 할 수 있다. 두 문 앞에는 수레의 잦은 이동을 배려하여, 돌로 만든 완만한 경사로를 두었다. 줄행랑은 내부 건물군과 집 밖을 구획하는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선교장 앞면에 줄행랑을 둠으로써 뒤쪽 건물의 산만한 느낌을 감출 수 있다. 필요에 따라 추가로 지어진 건물들로 인하여,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줄행랑이 시야를 차단해 버림으로써 질서와 통일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선교장 내부의 답사는, 솟을대문으로 들어가 객사랑과 열화당, 초정(녹야원), 작은 사랑채를 보고, 서별당, 연지당, 동별당, 안채, 사당의 순으로 살펴 본 다음, 집 밖의 외별당을 보는 순서로 한다.
열화당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에는 " 선고유거"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서별당 입구에서 본 행랑채. 이 행랑채에는 손님을 위한 객사랑방과 곳간, 부엌, 청지기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숙식객들을 위해 줄행랑에는 객사랑이 설치된다. 손님들은 격에 따라 각기 다른 공간에서 접대를 받았다. 무시 못할, 그러나 친하지 않은 손님은 열화당에서 정중히 대접한다.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한 손님들과는 활래정에서 함께 풍류를 즐겼다.
열화당에서 바라다 본 행랑채 객사랑방.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23칸의 줄행랑, 우리나라 전통 가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은 아니다.
객사랑방의 옛 가구들.
옛문화답사회원들이 선교장 후손 어르신의 안내로 열화당을 감상하고 있다. 옆의 흰벽 건물은 연지당의 뒷 모습이다.
「 열 화 당(悅話堂)」 오은 이후가 1815년(순조 15)에 지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지을 당시 최신 건축이었던 수원 화성의 모티브를 여러 면에서 따르고 있다. 수원성의 방화수류정과 같은 수직적인 느낌, 마루 아래부분에 높게 쌓인 검은 전돌의 벽, 그 가운데 뚫린 아취형 개구부(開口部) 등은 일반적인 한국 건축의 요소는 아니다. 특히, 개화기 누구나 꺼리던 벽안의 백계 러시아 인들을 머물게 해준 결과로 선물받은 러시아 제 동판을, 열화당 앞면에 너와처럼이어 차양 시설을 한 진취성은 대단한 배포였다.
![]() 동판 지붕을 받치기 위한 앞면 기둥 상부에 덧붙인 구름 모양의 조각 표현. 단조롭기 십상인 구조에 변화를 주었다.
열화당 서까래와의 이음새 부분에도 구리판 빗물 받이를 달았다. 천장 부분의 도리를 받친 동자주와 도리의 사각이 단순하면서도 정연해 보인다. 어설픈 장식보다 이편이 훨씬 좋아 보인다. 도연명의 시 " 悅親戚之情話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다정하게 이야기를 즐기는 기쁨 " 에서 취한 것이다.
열화당 대청마루에서 바라다 본 행랑채의 객사랑.
열화당과 서별당을 이어주는 협문.
열화당 누마루 하단의 누하(樓下) 기둥. 네모난 돌을 잘 다듬은 초석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누마루를 놓았다.
열화당 측면. 옆과 뒤로도 퇴를 둘렀는데, 벽은 널판으로 마감하였다.
퇴 난간의 ㄱ, ㄴ 자 모양 조합이 간결하다. 자세히 본 분들은 아셨겠지만, 열화당 앞면 동판 차양 지붕의 내부 천장도 이런 모양으로 마감 처리되어 있다.
퇴가 뒤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제철에는 들어열개 창을 들어올리고, 층단으로 이루어진 화단의 꽃과 나무를 즐길 수 있다.
위에 보이는 초가는, 열화당 후원의 정자로 1820년 무렵에 지은 것이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인 녹야원(鹿野苑)이라는 이름의 이 초가 정자는, 시를 짓고 책을 읽던 곳이다. 또한, 이 집의 후손들이 선교장 영향하에 있는 소작인들의 삶과 어려움을 생각하며, 검소와 베품을 배우던 곳이기도 하다. 후원의 초정을 둘러 보고 내려오면, 열화당 마당의 오른편(서쪽)에 작은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작은 사랑채는, 장차 선교장의 주인이 될 장남이 기거하면서, 바로 앞의 객사랑과 열화당에 머무는 중요한 손님들을 수발하면서, 자연스레 이들과 친숙해지는 이른바 2세 수업 장소였다. 계동풍월. 자의 삼수변을 위로 올린 멋을 부렸다.
열화당과 후원, 작은 사랑채를 두루 본 후에는 서별당과 연지당으로 발을 옮긴다.
안채로 가는 쪽, 왼편에 서별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긴 장대석으로 디딤돌을 두어 만만치 않음을 과시하고 있는듯 하다. 워낙 큰 집인지라 구석 구석 소홀한 부분이 없다.
중문에서 바라다 본 서별당. 걸어올라가는 계단과 수레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설치되어 있다.
옛문화답사회원분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설명해주시는 선교장 후손 어르신.
서별당은 글자 그대로 서쪽에 지은 별당이다. 집 안의 남녀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하고 서재로 활용하던 곳이다. 때에 따라서는 노마님이 거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별당 에서 내려다 본 입구. 왼편은 안채에 딸린 아래채 뒷면이다. 선교장 건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주건물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서별당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안채에 딸린 아래채의 뒷부분인데, 두 문의 높이가 달라 시각적 아름다움을 준다. 아래를 보면, 경사진 돌 길에 막돌을 깔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잘 다듬은 돌을 올린 다음, 검은 전돌을 두 층을 더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돌담 문양이 이루어진 위에 퇴를 깔고, 청판에는 박쥐 모양의 바람 구멍을 내어 멋을 한껏 부렸다. 자세히 보니, 머름대를 댄 박쥐 풍혈 위에는 소로처럼 굽받침을 넣고 그 위에는 부드럽게 보이도록 둥근 봉을 두었다. 이런 부분에까지 배려한 도편수의 안목에 갈채를 보낸다. 조선 목수 만세..........
안채의 안어른이 이 툇마루를 통해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을 위해 입매거리(간식)를 받쳐 들고 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내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거든요.
서별당에서 내려다 본 연지당. 서별당이 깊숙한 곳에서 가족들의 연결체 역할을 했다면, 연지당은 가족 영역과 손님 영역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경계물 역할을 했다. 연지당은 주로 여자, 즉 아래 아낙네들이 기거하면서, 외부 손님들의 동정을 살피고 집안의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지어졌다. 서별당 영역에서 열화당으로 통하는 협문. 서별당 마루 끝에 서면, 열화당 마당 객사랑 마당의 동정을 살필 수 있다.
선교장의 또하나 중요한 영역, 동별당과 안채를 가는 길. 안채는 서별당을 통해 갈 수도 있으나, 선교장에 있어서 이 평대문의 의미 또한 크므로 이 문을 통해 들어가 보기로 한다.
부농의 집이므로 수레가 오르기 쉽게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다.
평대문 앞에 서면 내부는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앞면에 보이는 홈은, 원래는 외발 달린 교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정비하면서 앞에 장대석으로 계단을 두었는데, 이는 잘못 복원된 것이다.
어쨌거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대부가들의 문 안에는, 방문객의 발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아래 부분이 개방되어 있었다. 이 집 또한 그러했을 터인데, 지금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막혀져 있다. 당시에는 방문객의 발 즉, 신고 있는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예는 논산 윤증 고택의 대문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서별당 앞에서 바라다 본 동별당 방향. 중문의 놓임새가 전통 한옥의 묘미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동별당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선교장 건축의 또하나의 공통점인, 장대석 기단 위에 솟아 오르듯이 자리한 동별당. 글자 그대로 동쪽에 자리한 별당채이다. 1920년대에 6대주인 이근우는 ㅁ자형 안채의 동남 모서리를 헐고 동별당을 새로 지었다. 동별당은 주인이 기거하면서 가족들의 모임 장소로, 친척들의 만남 자리로 사용하는 곳으로, 여느 상류 주택의 사랑채에 해당되는 곳이다. 열화당 부근이 모두 외부 손님으로 차 있으면, 집주인이 기거할 수 있는 곳임과 동시에, 가족들이 모여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동별당이다. ' 가족 단란 "과 " 공적 교류 "라는 선교장의 두 가지 목적을 잘 설명해 주는 건물이다. 사진의 왼편 아래 부분에 작은 문이 보인다. 온돌방에 불을 들이는 아궁이인데, 불을 안 땔 때에는 저렇게 문을 닫아 미관을 배려하고 있다.
이내번의 손자이자 선교장 3대주인 오은의 집이라는 편액.
이 마루에 서면 평대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동정을 살필 수 있다.
이 곳간채는 동별당과 안채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작은 문을 열면, 안채로 이어지는 작은 툇마루가 꾸며져 있다.
동별당과 안채는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다. 또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뒷문과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사랑 어른이 안채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동별당의 내부. 약방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양반가에는 비상시에 대비한 약방을 갖추고 있었다.
동별당 대청마루에 자리한 교탁과 장의자. 이러한 양식의 가구는, 개화기 사대부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듯하다.
불발기창 옆에 놓인 사방탁자와 서안(書案, 경상이라고도 부른다). 맨아래의 사진은 6대주인 이근우가 당시에 사용하던 침대이다. 동별당 뒤에 자리한 안채. 동별당은 안채의 날개채를 헐고, 지금과 같이 사랑채를 들인 것이다. ㄷ자형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온돌방과 고방(庫房)을 두었다. 대가족이 사는 집 답게 부엌의 규모가 크며, 방과 마루, 고방, 다락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각 방마다 설치된 반침도 효율적이며, 창호와 툇마루 또한 적절히 꾸며져 있다. 안채에서 내려다 본 오른편 아래채, 서별당과도 연결된다.
강릉 지방만의 특징이라면, 안채 부분이 양통집(한 지붕 아래 방이 앞뒤로 포개어 두 줄로 구성되는 집)의 구조를 거쳐서 田자형으로 배열된 4칸의 방이 안방부를 이룬다는 점이다. 물론 안방부의 뒷줄칸은 골방이나 반침 등 수장공간으로 쓰인다. 田자형 방의 배열은 북쪽 함경도부터 시작하여 강릉, 삼척 일대까지 동해안 지역에 분포하는 양통집의 특징이다.
안채의 안방. 방 뒤에 또하나의 방이 있는 양통집 구조를 보여준다.
대청마루한 구석에 있는 평상. 마루에 그냥 앉아 있어도 시원할텐데....... 이 평상은, 더운 여름에 안주인이 집 뒤의 은밀한 공간에서 옷을 적게 입고 쉴 때 사용하는 것이다.
양통집의 뒷부분.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는 여인네들이, 앞문은 닫고 뒷문은 열어, 옷을 벗고 쉬었다고 한다.
사당쪽의 안채 측면. 기둥과 인방, 창문, 특히 부엌 뒷문 옆에 달린 문의 구성이 대단히 조화롭다. 부엌 안과 이 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채 뒤에도 퇴가 설치되어 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아낙들의 스트레스 해소 공간이다.
부엌 안. 작은 문은 채광을 위한 창이었다. 여름에는 환기를 위해 열고, 겨울에는 문을 닫아도 채광은 문제없다. 실제로 저 창을 막아 서 보았더니 부엌 안이 훨씬 어두웠다.
큰 가마솥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걸린 것을 보니, 이 집 살림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부엌을 나와 동별당 뒤를 끼고 돌면, 사당이다. 예법대로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한 단아한 형태의 선교장 가묘(家廟). ![]()
안채를 보고 평대문으로 나오면, 동쪽으로 외별당이 자리하고 있다. 외별당은, 선교장 4대주인 이용구가 동생인 봉구(선교장 후손 중에서 제일 먼저 관직에 올랐다)의 가족을 위해 안채 동쪽에 이 건물을 지어, 주거 영역이 집 밖으로 확장되었다. 외별당은 본채인 " 대택" 에 대해 " 소택" 으로 불리웠다. 훗날에 이르러서는 맏아들의 신혼 살림이나 작은 아들들의 분가 전에 사용하였으며, 손자의 거처로도 쓰였다. 선교장의 박물관. 1대주인 이내번 이후, 최근까지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후손 어르신의 자상한 설명에 의하면, 시초(始草)는 중국의 진시황릉에서 가져온 풀(?), 갈대(?)로 만든 것이라 한다. 아래의 호수는 호랑이 수염(虎鬚)으로 만든 것인데, 관모나 전립(戰笠)에 꽂았다고 한다.
선교장의 명품 은제 다기(茶器). 예전에는 안주인에게 아무리 구경을 청해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은제 다기는, 소작인들이 다같이 돈을 모아 만들어 헌납한 것이라 한다. 추사 김정희 글씨로, 원래는 활래정에 걸려 있었으나, 도난 방지를 위해 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