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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우리는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랑스런 노도부대 용사다~!
대한민국 국군 제2보병사단. 일명 노도부대.
주둔지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그래도 양구보단 나으리로 유명한 인제, 원통, 양구를 모두
아우르는 부대다. 12사단에서 복무한 사람들은 원통까지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21사단, 2사단 출신의
군필자들이 양구부분까지 얘기한다. 가끔 전역후에 21사단 출신 군필자와 12사단 군필자간의 누가 더 힘들었냐로
병림픽이 발생하기도 한다.
메이커 사단 중 수도사단, 8사단과 함께 전방 철책 근무를 하지 않는 사단이다. 참고로 수도사단, 8사단은 기계화보병
사단이다. 3군단 예하 예비사단으로 산악전과 대침투작전에 특화되어 있으며, 있는 훈련은 모조리 하고 없는 훈련은
만들어서 한다.
북한이 무슨 도발을 했다. 아니면 누군가 '강한 군대' 드립을 쳤다. 하면 최소 3박 4일 정도의 훈련을 각오하면 된다.
전 육군 보병 사단 중 가장 많은 훈련을 행하는 보병 사단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군생활 중 훈련 일수를 계산해보면
대략 15일에 한 번 꼴로 훈련이 있다. 보병 사단에서 가장 빡센 부대중 하나다.
특히 산악 행군과 산악 구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혹한기 훈련을 뛰어 보면 제대후 한동안은 웬만한 추위에 끄덕
없게 된다. 한 중대는 21사단의 작전지 중 한곳인 대X산으로 훈련중에 이동했는데 전자 온도계에서 영하 39도가 나와서
온도계가 고장난줄 알았다고... 21사단이 조금 더 춥지만 어차피 둘다 양구에 주둔한건 마찬가지다. 2사단 병력은
21사보고 더 춥고 험한데서 GOP경계한다고 짠하게 여기고 21사단 병력은 2사단 병력보고 훈련 많고 많이 구른다고
불쌍히 여긴다.
훈련이 힘들고 자주 있는 만큼 전투력 또한 매우 높은 정예 사단이다. 참고로 예전 팀 스피리트 훈련 최다 참가 부대.
기본적으로 전투력 약한 부대를 한국군 대표로 보낼리가 없다. 그리고 옆에 주둔한 모 사단 연대들과의 연대 전투단
훈련에서 거의 항상 우위를 차지 한다. 2사단의 32연대 수색중대(사단 수색대도 아니고 연대 수색중대가)는 옆 화천
모사단의 지휘통제실(대대나 연대도 아니고 사단 지휘통제실!!)을 턴적도 있었다. 군생활 중 삽보다 총을 더 많이
들었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부대 중 하나.
참고로 민간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사실 간부가 아닌 의무복무자들은 군대를 나왔음에도 잘 알지
못하기도 하는 부대. 하지만 상대적으로 간부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별 따는
코스 중 하나라고. 그 덕분에 후에 장군이 되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특전사에서 복무하던 간부들이 꽤나 많이
거쳐가기도 한다. 2사단장을 역임한 이순진 장군은 3사관학교 출신 최초로 합동참모의장에 오르기도 했다. 어느 예하부대
이등병이 취사장 선임하사(?!)의 가슴에 달린 박쥐 뱃지에 노란 별이 세개가 달려있어서 멋있다고만 생각했더니 그 의미를
알게되고나서 흠좀무 했다는... 실제로 월계관에 노란 별이 세개있는 공수 휘장이면 강하 회수 300회 이상이다. 한편,
예비군 훈련을 가보면 별로 안보인다. 여튼 그렇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면서 역사가 길고 빡센 부대.
1947년 12월 1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제2여단을 모체로, 제2연대, 제3연대, 제4연대를 기간으로 대전에서 원용덕 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창설하여 1948년 여순반란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유승열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제2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여순사건 진압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기세가 성난 파도와 같다고 하여 노도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1950년 7월 25일 대구지구 방어사령부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5연대, 16연대, 26연대로 제7보병사단과 함께
의정부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예하부대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건제에 상관없이 전방으로 축차투입되어 이게 다 채병덕
때문이다 궤멸[1], 결국, 7월 24일에 사단이 해체되고 만다.
2사단이 재편되기 전인 1950년 9월, 아직 독립연대로 남아있던 17연대는 당시 연대장이었던 백인엽 대령의 지휘 아래
육군에서 유일하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
서울이 수복되고 2개월 뒤인 11월 17일, 2사단은 서울 성동공업중학교에서 17연대, 31연대, 32연대로 재편성되었다.
1951년 5월 16일 파로호 전투, 9월 1일 김화지구전투 등에 투입되고, 1952년 10월 14일 김화지구와 저격 능선에 투입되었다.
1953년도에 제1야전군에 배속되었고, 1959년 8월 28일에 양구 지역으로 이동한 이래 50년 넘게 주둔하며 양구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다. 현재는 제3군단 예하에 있으며, 1968년 11월 울진ㆍ삼척지구 대침투작전, 1996년 9월 강릉 대침투작전 등
10여 차례 이상 대간첩작전을 수행하였다.
1968년 1월 23일에 육군 사단 특성화 계획에 따라 3개의 특수사단을 지정했는데 그 중 제2보병사단을 산악사단으로 운용한
적이 있다. 산악지형이 많은 곳에 주둔해서 미 육군 제10산악사단을 벤치마킹하여 산악사단으로 전환한 것인데, 얼마 지나지
도로망이 정비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2보충대에서 2사단으로 배치를 받으면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양구
선박중대가 관할하는 LST라는 이상하게 생긴 군용수송선[2]를 타고 소양강을 질러 양구선착장으로 이동 후 트럭을 타고
사단 신병교육대로 이동하였다. 이후 이동수단이 수송선에서 버스로 바뀌었고, 버스로 홍천을 거치는 루트를 이용했다가,
배후령터널을 비롯하여 양구로 가는 터널들이 뚫린 이후에는 46번 국도를 타고 이동했다. 102보충대에서 입대 장병들을
각 부대 신병 교육대로 보낼때 21사단 배속 장병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다. 기간병들에게 절대 21사단이나 2사단으로는
가지말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는데, 안그래도 자대를 통보 받고 나서 좌절해 있는데 거기에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면 왠지
모를 으스스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102보충대가 사라진 지금은 집에서 신병교육대로 바로 입소한다.
사단사령부 및 직할부대 등 소속부대 대부분이 양구에 주둔하고 있으나, 1개 연대는 인제, 포병연대는 예하 1개대대를
제외하고 모두 원통과 그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 양구지역의 전방경계를 담당하는 21사단, 인제지역의 전방경계를
담당하는 12사단과 함께 3군단을 구성한다.
포병연대는 2사단 해체 후 연대 자체가 군단직할 포병여단로 재배치 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막사 신축계획이
전무했으나, 2012년 9월 기준으로 1개 대대와 연대 본부를 제외한 3개 대대가 신막사 사용 중에 있다. 연대 본부는 땅이
좁아서 신막사를 못 짓는다는 말이 있고 남은 1개 대대는 가 보면 도저히 신막사를 지을 엄두가 안나는 흠좀무한 고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라고 카더라사단 내에서의 소문에 따르면, 4월에 보일러가 동파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봄이 오고도
동파가 되는 한파와 고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형자체가 산 중턱을 깎아만든 곳이라 신막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경사 또한 없는 곳이 없다.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차리포대의 장병들은 행군 훈련시 45도 각도의 언덕을 0.7km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일명 눈물고개. 사실, 인근 부대로 넘어가는 3.5km 정도의 행군로가 있는데 부대 전체에서는
그 행군로는 눈물 고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차리 포대원들 마음속의 눈물고개는 포대로 복귀하는 그 길이 맞다.
복귀 중 다른 중대들이 중간에 줄줄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정말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한다. 2005~07년에는 둘팔고개로
불렸고 대공초소로 가는 길이었다. 참고로 둘팔의 뜻은 그 28...
2001~03년까지 2사단 32연대 3대대가 중대급 KCTC 대항군 부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현재 수행하고 있는 KCTC 전갈
부대의 원조격인 셈. 이 대항군 임무로 인하여 3대대는 4개 중대 중 2개중대(및 본부중대의 지원)는 KCTC 훈련장에 나가
있고, 나머지 절반의 부대로 부대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덕분에 불침번도 절반(…), 각종 초계 임무도 절반의 병력으로
수행하여야 했다. 물론 이는 대항군 훈련장에 나가있는 인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신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연간 훈련에서는 모두 제외되었으나(유격은 제외되었으나 혹한기는 뛰었다.), 대대 인원 절반으로
대대 임무와 대항군 역할을 모두 수행하였던 만큼, 대대원들은 말이 안나오게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일정기간
대항군 훈련을 하고 나머지 인원들과 교체하여 영내 거주하던 병력들이 대항군 훈련을 했으며, 훈련장에서 훈련 없을 때
대항군들은 삽을 들고 각종 작업을 병행하여야 했으니 그 고초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이 당시 대항군의 전투 능력은 현재의 KCTC 전갈부대의 전투 능력만큼이나 타부대를 압도했는데, 이는 훈련을 하러
오는 부대에 비해 대항군이 지형적으로나 훈련 횟수로나, 경험으로나 당연히 앞설 수밖에 없기 때문.
2003년에 이르러 대항군 임무가 종료되고 기존 보병대대 편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전적은 2년간 무패(648전 648승)를
기록했다고.
그리고 전군 최초로 포병이 KCTC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 사단 인원들이 마르고 닳도록 중대 마일즈, 소대
마일즈까지 아주 마일즈 장비는 도가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똥군기도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훈련이 많아서
들어오면 빨리 자야하기 때문에 갈구거나 할 틈 새가 없다. 갈굼의 주요 골자는 "빨리 정리하고 자자" 이정도. 이것은
사단 전체의 분위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병장이라고 풀어지는게 아니라 병장 진급 하고 나서 더 힘들어지고 골아파지는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오늘 중대전술 나갔다 왔으면 야밤에 전반야, 후반야 해야되고 내일 오전 과업이 주특기이고 오후는 진지
보수이고 그 담날은 사격... 뭐 이런식의 일과였다.
당시 KCTC 훈련장에 나가있던 3대대 인원들은 소대별로 대형텐트에 살면서 간이화장실과 천장이 뚫린 간이샤워장을
이용하고 설거지는 개울가에서 하는 원시적인 생활을 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오래 외지에 나와있다보니 대대장,
주임원사도 없고 간부들의 터치도 적어 옷차림, 이동군기 등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훈련이나 교육이
없는 날은 작업거리가 없으면 그냥 자유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숲속 한 가운데서 국방색 런닝셔츠 차림으로 텐트치고
살면서 비 올 때마다 물골작업하고 날 맑으면 한쪽에선 마일즈 영점 맞추면서 사격연습하고 한쪽에선 총기손질하고
있고 어제 훈련나갔던 옆 중대는 거지꼴로 돌아오고 다음은 우리가 나갈 차례고... 분위기가 꼭 월남전 때 최전방
임시숙영지가 따로 없었다.
인천상륙 1대대
화령장전투 2대대
수도탈환 3대대
연대 직할중대(본부, 통신, 수색, 수송, 의무, 전투지원)
국경경비대 시절부터 존재했던 연대로, 2사단 내에서 가장 역사가 길다. 본래는 백인엽[3]장군의 지휘 하에 육직부대[4]로
옹진반도를 수비하던 독립 연대(당시 육군본부 직할부대)였으나, 개전 이후 복잡해진 전선 상황에 따라 지연전을 벌이며
후퇴했다. 이때 화령장 전투에서 높은 전공을 세운다. 그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육군 유일의 예비 독립연대
[5]로 활용되었으며, 그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에 육군 유일의 작전 참가부대로써 작전에 참여했다. 그 후에 수도까지 탈환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가장 높은 전공인 인천상륙작전, 화령장전투, 수도탈환은 각각 편제된 보병대대의 이명으로 사용 중에 있다.
전후에는 주로 대간첩 작전에 투입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현재는 예비사단의 예비대로, 인제에 주둔하여 인제 방면의
수비를 맡고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연대로써 자부심이 강하다. 자부심이 강한 만큼 상당히 힘들다. 훈련도 내무 생활도
전통은 개나발 폭행과 부조리와 사고의 역사만 가득하다거 하나...
사단을 구성하는 주요 보병연대와는 다르게 17연대는 수색중대를 제외한[6] 모든 대대가 연대본부와 그 직할대와 같은
주둔지로 묶여있다. 어지간한 지방의 대학교 캠퍼스 크기의 주둔지를 갖고 있다. 재미있게도 모든 중요 시설은 양구에
있는데[7], 17연대만 단독으로 인제에 있다보니 그 어떤 훈련을 참가해도 행군 거리가 격이 다르다.[8] 지금이야 강원도의
도로 사정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양구로 가는 길 조차 변변치 않았다. 1970년대까지 17연대에 자대배치를 받는 병사는
양구의 사단 본부에서 군용 보트를 타고 소양강을 줄기를 따라 연대로 왔다고 한다.
주둔지 상태는 2대대를 제외하고는 신막사를 사용중이다.[9] 지형적인 특징으로는, 연대 바로 앞을 지나가는 내린천의
존재로 인해 여름엔 달궈진 내린천의 후끈한 공기가 주변 고지들에 막혀 못 빠져나가면서 연대를 삶아버린다. 겨울엔?
연대 자체가 고지대에 위치한데다가 산 중턱이라 끝장나게 춥다. 진짜 오지게 춥다.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주 초소 근처의
풍속 또한 굉장히 빠르니, 죽을 맛이 따로 없다.[10]
2사단에서 자대배치 받을 때 조교들이 좆칠연대, 꽃필연대라고 가르쳐주지만 사실 조교들도 자기 부대 빼고는 제대로
알리가 없으므로 쫄지 말자 하지만 여기 연대는 긴장하는 것을 권장한다. 이 정도로 사단내의 다른 연대들에 비해서
유독 악명이 높은 부대다. 민간사회에서도 유명한지 부대의 멸칭이자 악명인 좆칠연대를 포털에 검색하면 검색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특징으로는 각 대대가 미래과학화 전투실험 보병부대 를 돌아가면서 맡는다는 것인데, 국군 보병부대의 발전을 위해
개발되는 신편제, 신식 교리나 무기체계를 실험하는 부대이다. 정작 그러면서 신형 장구류 보급은 요원하다. [11] xx년도엔
2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XK11의 시험운용부대로 매일매일 마일즈 장비를 착용하고 KCTC 수준의 실전적 훈련을 시행하는
실험에 참가했다. 예를 들자면, 오전에 기상하여 밥 먹고 바로 출동, 점심을 밖에서 먹고 저녁도 밖에서 먹고, 야간전투를 한 뒤
다음날 오전을 부대에서 먹고 근무취침을 하는 일과를 행하곤 했다. 이후 xx년도에는 연대 전체가 통째로 여단급 실험에 참가
하게 되었는데, 부대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끌려가 거기서 T24 텐트를 치고 반년동안 생활했다. [12]
부조리가 꽤 심한 연대다. 제2보병사단 내에서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포병대를 제외한다면 사단 내에서 사단 본부-연대 간
거리가 제일 멀어서 연대장이 사단장급의 권력을 가지는지라 사단 본부의 명령따위 씹어버려도 알 방도가 없어 연대 자체적인
전통이니 뭐니 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헌병대가 즉각 출동하기 어려워 헌병 파견대라 하여 분견대가
연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조리는 보통 '전통'을 내세워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워낙 오래된지라 각종
부조리가 성행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악명높은 삼청교육대의 교육장이 여기다.
이 부조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굵직한 일이 많았다. 2009년도엔 2대대에서 초소 성군기 위반으로 헌병과 경찰이 동시에
부대 내에서 수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2011년도에는 사단 감찰부가 실시한 마음의 편지 수거 후 모 중대가 거의 해체
수준으로 갈려나갔다. 조사에 따르면 간부에 의한 내리갈굼 지시가 있었다고 하며, 어느 중대는 깔깔이를 못 입게 하는
부조리도 있었다고 한다. 2015년도에는 모 중대에서 간부에 의한 부조리가 적발되어, 중대 내 간부들이 다른 대대로
뿔뿔이 흩어진 적도 있었다. 임병장 사태후 매 설문 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후반기 교육까지 다 마치고 와도 자대로 전입하지 않고, 다시 쌍호교육대로 들어가 1주일 정도 교육을 받았다. 쌍호
교육대는 연대 내 군기교육을 담당하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연대 전통과 정신 불어넣기, 태권도 교육을 주로
받았는데, 이게 유격기초훈련과 유사해 매우 힘들었던 과정이었다. 2000년대 말에는 프로그램이 완화되었는데, 이전
처럼 군사훈련이나 정신교육을 받지는 않고 간단히 연내 내 시설을 돌아보거나 연대장과의 면담 등을 실시하면서
전입 온 신병들의 적응을 돕는 수준으로 완화되었다. 연대 내 전입 온 모든 신병들이 모이는 교육이라, 현재 운용
중인 부대 내에서 이 인원들을 수용할 만한 곳이 없어서 먼지 쌓인 구 1대대 막사와 구 쌍호교회 건물을 열어 사용한다.
1980년대 군대 체험판 2010년에 모종의 사유로 폐지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2012년에 다시 부활하여 현재까지 유지
중이다.
연대 입구 바로 안쪽 로터리에는 쌍호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연대가가 적혀있다. 연대 직할중대 PX로 가는 길에 있으니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주로 구보 코스의 반환점으로 쓰이는데, 지나가면서 쌍호상의 성기를 만지면 무사전역한다는
소문이 있다.
부대가 통째로 인제에 떨어져 있다보니 외진을 사단의무대로 가지 않고 바로 국군홍천병원으로 간다. 사단의무대로
가려면 광치령을 넘어가야하기 때문인데, 일단 외진만 받으면 99%가 홍천병원으로 떨어지니 유난히 외진율이 높다고
카더라여기서 1%는 국군수도병원. 그도 그럴 것이, 완전 구멍가게만한 PX가 달랑 하나 있는 사단의무대는 그야말로
치료받는 것 빼고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곳인데, 홍천병원은 중대형 PX도 있고 위병소 옆에 치킨과 피자를 파는 혜자
휴게소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료를 받고 나면, 출발 대기 중인 셔틀버스 안에서 의자 젖히고 누워 잘 수 도 있고
병원 안에서 출발 시간까지 하루종일 전화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한다(...)
1990년대 땐 전역 후 예비군편성을 신고할 때 부대코드 숫자를 전지 크기의 안내문에서 부대명순으로 찾아서 적는데,
안내문에 육군, 공군, 해군 등으로 나뉘어져 육군의 부대목록이 순서대로 있었다. 그런데 유독 이 연대만 일반 육군부대
목록에 있지않고 해병대, 공수부대, 특공대 등과 함께 별도 목록에 분리되어 있었다.[13]
2015년 전반기 마일즈 육군 최우수 중대로 11중대가 뽑혔다. 2, 3, 5, 27사단의 각 대표 중대가 참여한 육군 최강중대
선발대회에서 4강 3사단, 결승 27사단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것. 그 후 해당 인원들은 전부 17일에 해당하는 포상
휴가를 받았으며, 해당 대대는 출타율을 조정해가며 한동안 휴식여건 보장이 확실히 되었다. #
부대 예명은 백호부대. 1대대는 신병교육을 담당하며, 2대대(승공)와 3대대(통일), 의무, 수색중대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다. 1대대와 2대대는 신막사이며 3대대는 현재 구막사이나, 수색대대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수색대대 막사가
개수되는 바람에 시궁창. 3대대도 신막사로 개수를 검토중인데 차일피일 미루고있는 중이다. 하지만 2000년대~00년대
중반까지 3대대가 단일건물 즉 아파트 식의 신막사였고 1대대와 2대대는 완전 예전 구형 막사였다. 나무 관물대에 침상마루.
여름이 되면 3대대는 물 부족에 시달린다. 또한 물탱크가 뒷산 중턱쯤에 있기 때문에 보일러병이 여름만되면 땀을 뻘뻘흘리며
물탱크에 있는 물을 확인하러 가러 올라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글을 읽는 31연대 2대대, 수색, 의무중대 장병이 있다면
여름에 물을 아껴쓰자. 신병교육대대가 실거리 사격을 할 일이 있으면 나머지 대대 장병들은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는
1대대 실거리 사격장까지 멀쩡한 인도를 두고 2대대 뒷산을 넘어서 가야한다.배차신청을 해도 안내준다
부대가 한 울타리를 치고 사는데, 연대는 부대가 커지면서 주변 땅을 잡아먹은지라 군부대 안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병소 출입 및 보안 문제로 항상 주민과 위병소 근무자들간의 마찰이 잦다. 근무체계가 바뀌어 담당하던
전문팀이 빠지고 다른 팀이 해당 근무를 맡으면서 아예 관리가 안되던 시절도 있었다.
부대 입구에서 올라가는 중간에 교회가 있으며 백호연대 전 인원과 길 건너의 수색대대,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이는 성당과 법당도 마찬가지로, 31연대와 길 건너 수색대대, 화학지원대 장병들을 수용한다. 좀 기괴한게, 교회가 언덕
맨 위에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성당이 자리한다. 성당에서 교회를 올려다보면 짓누르듯 자리잡고 있는 묘한 배치. 게다가
성당 옆에는 무명봉분이 하나 떡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예하 부대인 수색중대는 2 대대 → 본부 → (수색) → 3대대로 독립적으로 따로 막사를 운용하던 중대 였으나
(2006년까지) 이후 신막사 건립등의 이유로 타 부대와 같은 막사를 쓰게 되었다.
훈련이 미치도록 많은 연대. 특히 2대대의 경우 2000년 초 당시 위관급 장교로는 건국 이래 최초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김승겸 중령이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사단 전체에서 악명높은 빡셈을 자랑했다. 일주일 내내 교육훈련에 수
요일마다 분대단위 사격(사로내에서 빵야빵야가 아니다. 사로위에 도열하여 총 내리고 있다가 분대장 구령에 맟추어
3점사로 북한군 타겟을 개발살내는 그런 사격이다. k3 사수도 사로위에 서서 연사로 갈겼다) 훈련마치고 주둔지 복귀
하면 다음 훈련 준비하는 그런 대대였다. 후에 김승겸 중령은 대령 진급 후 1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14], 이후
장성 진급 후 28사단장으로 부임하셨다고 한다.(사고많은 부대에 해결사로 가신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해결사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중장진급과 동시에 3군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ㄷㄷ)
31연대는 사단 예비라는 소문이 있었는데[15],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단 주력이라 여겨지던 17연대가 있음에도
주구장창 훈련에 불려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일주일 단위의 훈련은 물론 2주 이상의 대규모 합동 훈련에도 자주
나갔는데 어느 한 군번은 군 생활 동안 이러한 대규모 연합 합동 훈련을 세 차례 에다가 RCT[16]를 2차례, 유격을
3차례(....)[17]나 받았다고 한다.(여기에 일반 교육 훈련, 종합 전술 훈련, 주특기 교육에 각종 전투력 측정까지 포함
하면...거기에 혹한기, 호국 훈련 같은 것은 당연히 하는 훈련이다) 게다가 1996년 강릉 대침투 작전 당시 2개월 넘게
X성산 - X대산 - X로봉 등으로 돌아다녔다[18]실제로 그 당시 전과도 있었다. 다만 전공을 올린 병사가 상근 예비역
이어서 다른 현역들을 멘붕 시켰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7중대의 송관종 일병이 작전 중 전사하였으며 사후에
상병으로 진급되었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당시 전공을 올리면 남은 군생활은 거의 면제 수준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최상급 부대로부터 중대장에 이르기까지 휴가증을 받아 한 동안 쉰 다음, 간첩을 사살했으므로
민간인보다는 못하지만 나오는 포상금도 챙기고 남은 기간은 이리 저리 강연하러 다니면서 군생활할 수 있다는 소문.
그런데 공로를 세운 병사가 상근예비역에 남은 현역 생활도 채 2개월이 안남은 상황. 다른 병사들의 심정을 짐작할 만하다.
최근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서 떠도는 2011년 3월 외박나온 군인들을 민간 고등학생이 폭행한 사건의 피해 군인들 소속이
31연대 소속이었으며, 신병교육대대 신임 대대장이 부임직전 훈련병으로 위장하여 훈련받은 부대도 31연대다.
예명은 독수리 부대. 위 항목에서 언급된 대항군 부대인 3대대가 바로 이 연대의 3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공군과 유엔군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 한국전쟁 최대의 전투 중 하나인 저격능선 전투에서 17연대와 함께 고지 탈환
임무를 맡은 바 있다. 또한 이 연대의 7중대는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 1개 연대를 막아낸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734고지전투).
2000년도의 모 훈련에서는 연대의 수색중대가 화천 모 사단의 지휘통제실에 잠입하여 작계와 여러 보급품를 털어간
바람에 3개 사단이 1개 연대에게 춘천까지 거침없이 밀려 내려갔고, 결국 훈련이 강제로 종료되자(사실) 이에 분노한
화천 모 사단장은 작계를 갈아 엎어버렸고(소문) 3군단장은 입이 귀에 걸려서 703 특공연대 대신 이들 연대 수색중대를
군단 기동타격대로 임명해야 한다는 드립을 쳤다(사실) 이 사건 이후로 한동안 연대 장병들은 각종 신식 전술과 장비의
실험체로써 시달려야 했다. 3대대 전체가 대항군 부대로 탈바꿈한 사건이나 수색중대가 전군 최초로 마일즈 훈련을
실시했던 점 등이 그 증거.
연대 위치는 양구군내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에 있다. 현재는 2대대 3대대 모두가 신막사로 아주 좋은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어정쩡하게 신막사를 얻어서 상대적 구막사 신세가 된 1대대 지못미 직할 중대들도 신막사를 모두
이용하고 있어 여건은 좋은 편이지만 역시 훈련이 참 많은편.
여담이지만 2011년도 중반까지 충성 구호가 '충성 I can do!'였다. 이는 당시 연대장이 연대 자체적으로 추진한
부대운영시스템인 '독수리인생사관학교'의 일환이었으며, 이는 당시 사단장도 높이 평가하여 후임 연대장에게 이를
승계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권장한 사단장도 바뀐 이후, 충성 구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충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 연대장은 30사단에 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여기에도 I can do!를 심었다.
2010년 대 초에 1대대가 잠시 제2신병교육대대로 운영된 적이 있었다. 당시 훈련병들은 1신교대(31연대 1대대)에서
5주간 훈련을 받고 주특기 교육으로 2신교대로 넘어와서 3주간 훈련을 더 받았는데,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런지 조교들도 널널했고 우수소대는 PX도 이용하게 해줬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격과 각개전투 등을 했는데,
산 중턱에 훈련장이 있어서 매번 훈련을 받을 때마다 행군아닌 행군을 했다. 지옥같은 야간 40+10km 행군도 여기서 했다.
포병연대의 예명은 사단예명을 빌려 노도포병, 예하대대는 무공훈장의 이름을 따서 18대대 '충무', 62대대 '화랑',
63대대 '인헌', 633대대 '무공'.
4개의 대대와 1개의 연대본부로 구성되어있으며 3개 대대와 연대 본부는 원통~인제에 주둔해있고 다른 1개 대대는
양구에 주둔해있다. 3개의 자주포부대와 1개의 견인포 부대로 구성되어있으며 모두 155mm이다. 선진병영(?)정책으로
유명한 동기생활관을 맨 처음 시행한 부대가 여기 대대중 하나이다(63대대). 막사는 위에 써있듯이 연대본부와 굴지의
1개 대대를 제외한 전 부대가 신막사를 사용중이다 그러나 여기 부대에 배치되어 연대 내 다른 부대를 돌아다니다보면
1개 대대가 나머지 신막사부대를 월등히 초월할 정도로 전방부대치고 괜찮은 시설로 중무장되어있어 부러울지도 모른다.
18포병대대는 전군 최초 포병이라는 위업을 가지고있는데 이 최초포병이라는게 같은날 창설된 포병대대가 5개나 더
있어서 최초는 아닌것같지만 참 웃기게도 부대 창설식이 제일 일찍시작하고 제일 빨리 끝나서 사실상 최초포병
이라는데, 사실 최초창설 포병대대는 같은날 같은장소에서 동시에 했었다(...). 6.25 전쟁 당시 부대재편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되었을 뿐이다.
훈련 강도는 2사단에 걸맞게 한숨나올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4개 대대중 3개 대대가 인제군에 주둔하고있으며 인제군이
주둔지인 12사단의 간섭을 심하게 받는다 즉, 인제의 3개 대대는 12사, 2사 포병연대, 양구에에 주둔하는 나머지 1개대대는
21사, 2사 포병연대가 있어 잦은 훈련과 검열로 인해 간부든 병사든 깊은빡침이 올라올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포병이라
총 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포병 1개 대대가 사단 전투력순위 1위에 오른 적도 있을정도로 보병 못지않게 삽보다
총을 잘쏜다. 그래도 보병에는 못 미치겠지만 보병 지원해준다고 이리저리 차출되는 병사들이있으니 따져보면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위수지역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이다보니 각종 상황이 전술훈련날 포탄 쏘듯이 뻥뻥 터져서 근무자와
당직계통을 상당히 힘들게하는것도 한몫한다.2012년도에있었던 위병소 습격작전은 포병연대 출신들은 잘 알거다
그 당시 근무한 타 부대 병사들마저 상황전파로 그 상황을 들으면서 불쌍해 했으니 말 다했다(…)그리고 알 사람들은
아는 예비사단중 최상위권을 자랑하는 훈련많은 부대(특히 17연대)의 지원포병부대인만큼 상급부대의 관심 또한 높아서
때때로 별다신분들도 오시고 언론에서도 자주 취재나와서 상당히 바쁘다그래도 생활여건과 외출.외박시 바깥 환경도
괜찮아서 모범적으로 군생활을 한다는 가정하에 놀땐 확실히 놀 수 있다.부대를 나와서 버스나 택시를 타서 버스기준으로
20분정도면 군인의도시 원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고등학교(원통고)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대개 행보관or
주임원사님의 영애분이거나 군인과 긴밀한 커넥트가 있는게 함정
부대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상급부대 지침을 매우 잘 따라서 일과 시간이 딱딱 맞아 떨어져서 군인들의 빛과소금인
개인정비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단, 어느 부대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행보관(행정보급관)의 짬이 중요하다. 주임원사급의
원사 행보관 때는 4시부터 체력단련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의 일과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다음해에 중사 행보관이 부임되자.....
상상하는데로 였다고 한다. 물론 훈련중이거나 상황생겼으면 그런거 바라지마라 쉴땐 쉬는대신 확실히 굴리거든~~
여담으로 생일날 당사자에게 전투휴무를 주는 제도가 처음 생긴 게 여기 대대 중 하나다.생일빵때문에 아주 많은 일을
치른뒤에 생긴 제도라고 당당하게 말 못한다. 그마저도 눈치보여서 못쓴다는게 함정
한때 후반기 교육을 받는 자주포 조종수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부대였다. 오죽했으면 육군포병학교의 비공식 군가의
구절중 "노도로 가면 눈물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에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자주포 대대에서 한 병사의 결혼식을 올려준 일이 방송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해당 병사는 가정 사정으로 인해 식은 못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한 후 입대했는데 방송 촬영 중에 마침 좋은 소재이기도 해서
부대에서 가족을 초청해 결혼식을 올려준 것.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자주포에 타고 입장하는 신부의 모습이 압권이다. 당시
해당 부대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식 비용은 110억 200만원이라고. 11억짜리 자주포 10대 동원. 이후 해당병사는 부대에
계속 남아 부사관으로 임관하였고 부사관 장기복무심사 역시 통과하여 계속 복무중에 있다.
2사단에서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을 수리하는 대대다. 화기, 통신장비, 방독면, 발전기, 차량 등 고장난 장비를
들여와 수리하기도 하고 위의 타 부대들로 수리를 나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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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단 유격장은 소양강 상류에 위치하며 상수도 보호구역이므로 샴푸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지금은 샤워장이 마련되어
있어 상관은 없다. 단지 샤워장에 물이 나오질 않아서 그러지 그러나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유격장에 들어서면
야영지가 점점 산위로 올라가고 도대체 어디서 훈련을 받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 곳곳에 유격 훈련장들이 숨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런 산중에 어떻게 훈련장을 만들었는지 처음 가면 새슴스레궁금하면서도 섬뜩한 기분이 든다. 참고로
예전에 삼청 교육대 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격장은 산의 계곡사이에 있으며 연병장에서 대략 30~50분간 PT체조로
몸을 굴리고 오전조, 오후조로 나눠서 계곡 곳곳에 있는 유격 코스를 차근차근 밟으면 된다. 각 유격 훈련장들이 산속에
곳곳이 숨겨져 있으므로 이동간에 간단한 오리 걸음만 시켜도 아주 강도높은 얼차려가 된다. 역시 유격엔 수통조가 최고다.
유격훈련 5일동안 맑은 산공기속에서 유격훈련을 배우면 된다. 이 곳에서 훈련의 백미는 부실한 안정망을 믿고 상당히
높은 절벽 사이에 설치된 도하선을 건너는 도하 훈련과 마지막 날 화생방훈련이다. 예전에는 11미터 수직 하강과 수평
하강 훈련을 했었다. 하강 훈련전에 입수해서 사고나지 않도록 물에 적응을 시키는데 한여름인데도 피티체조로 이미
헐떡거리는 몸에다가 강원도 산골짜기의 차가운 계곡물이라서 조교들이 잠수를 시키면 10초도 못버티고 꼬로록 소리
내며 물 밖으로 머리 내밀려고 바둥거리곤 했었다. 수직 하강의 경우 조교의 외침에 따라서 잡고 있는 줄을 놓고 물속
으로 입수하는 방식인데 스스로 잡고 있는 줄을 놓는 그 기분이 심히 골룸했다. 줄놓는게 무서워서 조교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도 끝내 입수하지 못해서 되돌아나와 다시 물먹고 피티 체조 복습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끝나면 차타고
가는게 아니라 대략 50km정도 복귀 행군을 한다. 전투 부대는 다음 날 한번 더해서 100km 한다. 기본적으론 무박 2일
100km 행군이다 올때도 마찬가지. 그래서 보통 일요일에 행군해서 도착해서 텐트치고 숙영한다. 특히 31연대의 경우
유격장까지 가는 행군과 주둔지 복귀 행군이 매우 힘들다. 유격장으로 가는 행군의 하이라이트는 대공진지를 넘어가는
코스. 어느 순간 자면서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웬만한 이등병들과 81미리 박격포 탄약수들은 거진다 낙오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끌고 들어서라고 끌고 간다.
나중에 애로사항 꽃피지 않으려면 평소에 체력을 길러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귀 행군은 한참을 아스팔트를 걷는
강행군이며 이때 병사들은 좀비같은 상태로 그저 걸어야 하니까 정줄놓고 걷는 기계가 된것처럼 걷는다. 그리고 복귀후엔
평균적으로 3~6kg이 빠진다.
유격의 꽃인 PT체조를 굴리는 연병장에는 '하면 된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상당히 기괴하다.
숙영지의 위치가 무척이나 괴랄하다. 지옥의 경사도를 자랑하는 타이어계단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타이어 계단은
애교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무릎 높이만한 100정도의 돌계단을 올라가야되는 곳도 있다. 연도에 따라 중대규모로 숙영지
로테이션을 돌리는데, 운 없으면 최상층에서 D형 텐트를 쳐야한다. 식당으로 밥먹으러 내려가기 싫을 정도로 높다. 말
그대로 훈련이나 숙영 자체가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고 보면 된다. 맨 윗쪽에 텐트를 치게 된 중대는 대대 피엑스와 취사장이
아래에 설치되므로 물건을 사거나 밥을 타러갈때 등산을 한번 한다고 보면 된다.
인제군 원통 이북의 포병연대 병력은 유격훈련을 2사단 유격장이 아닌 12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만약 2사단 유격장
으로 행군해서 간다면 가다가 전원 퍼진다 광치령을 걸어서 넘으라니, 지휘관이 미친게 틀림 없어요! 인제에 주둔한
17연대의 경우에는 인제에서 양구 2사단 유격장까지 광치령을 넘어 걸어 간다. 뭣이라?! 31연대도 혹한기 훈련을 서화
축선에서 하는 경우 광치령을 넘어간 사례가 있는 등, 2사단에서 광치령을 걸어 넘는 것은 그다지 엄청난 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군축령넘어 소양강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는길도 있다. 어디로 가든 복귀할 때는 싸가지골을 넘어서 인제군내를
통과해서 오는 길이 있눈데 말그대로 싸가지가없을정도로 힘든 코스.
양구 최전방에 위치한 1개 포병대대는 유격훈련을 부대위치와 가까운 21사단 유격장에서 받았었다.
2016년부로 사단장의 지시로 포병은 유격 훈련에서 제외되었다당시 사단장이 포병 출신인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포병에게 유격이 왜 필요하냐면서 포병을 유격훈련에서 제외시켜버렸다. 그 전에 2015년도부터 직할대는 자신들의
주특기나 잘하라고 유격이 없다. 당연히 유격이 주특기에 준하는 수색대는 예외.
사단장이 교체되면서 포병의 유격 훈련이 부활했다
경례구호는 1997년까지 '단결' 이었는데 이후 '충성'으로 바뀌었다. 신병교육대에서 배우지만 자대로 가면 부대에 따라선
해당 부대의 자체 구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2000년 이전에 경례구호는 '단결' 이었고 지휘자급 상관이 지나가면
한 명이 "단결, 연대장님 화이팅" 을 외치고 나머지 장병들이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엄지손가락을 높이들어 3번 제창
했다. 또 '노도의 얼'이라는 구호가 있다. 지휘자가 '노도의 얼'을 선창하면 나머지는 문서 최상단의 문구를 후창한다.
부대마크가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 공군 라운델과 똑같다. 2004년 경 부대마크가 저시인성으로 바뀌었는데, 테팔 프라이팬
처럼 참 멋없게 변했다는 평이 많다.
마크와 관련된 농담 중 제일 흔한건 '과녁'. 또는 훈련이 많아서 피(가운데 붉은 원)가 맺히고 멍(파란 원)과 고름(흰색 원)
이 생긴다고. 고름 대신 붕대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농담으로는 한창 아이팟이 유행할 시절 선임들이 신병
전입오면 사단 마크를 눌러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2사단이 아니라는 가혹행위가 있었다.
2사단 헌병대가 초대형 병크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때 간첩에게 전사한 표종욱 일병을 탈영처리해
버리고 유가족 분들에게 탈영한 아들 내놓으라고 지랄발광을 저질렀다. 심지어 간첩이 노획해서 쓰던 표종욱 일병의 군복과
유품을 확인했는데도 아들 내놓으라고 지랄을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서 참조.
후방부대보다는 신형 보급물자가 빠르게 적용되는 편이다. 하지만 전방 GP, GOP사단보다는 약간 느린 편이다. 전군이
엑스반도 차던 시절 전투조끼는 01년에 보급되었으며, 신형헬멧은 약간 늦게 11년 이후 보급되었다. 그러나 일반 보병
중대의 대전차 공용화기인 판저파우스트 3의 보급은 동시기에 이루어진 듯 하다.
만화가 메가쇼킹이 정비대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스트리머 대도서관이 박격포 포수로 복무했다. 링크 링크
코미디언 김준호의 인터넷에 알려진 병역사항에 '노도특수부대' 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 부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특수부대라는 명칭은 당시 노도부대 수색대대가 국군 최초의 스키부대였고 그 이후에는 스키 타는 법 등을 특전사에게
위임하고 일반 수색대대로 회귀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 때 2사단이 특수부대 이미지를 가지게 되서 네티즌들이 김준호의
병역사항을 그렇게 작성하였을 확률이 높다.
2010년 여름에 모 연대장이 연대 주둔지 담 근방 2m 내에 있는 모든 나무를 '사계확보'라는 명목으로 전부 잘라낼 것을
지시했었다. 하지만 그 나무들은 사유지에 속한 사유재산이었는데, 이로 인해 물어준 돈이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2사단은 후반기교육을 타부대보다 일찍 부활시켰다. 링크 이에 따라 2010년 32연대 1대대가 후반기 교육 대대로 새로
편성되었고, 해당 대대의 병사들은 사단 내의 타 연대로 재편성됐다. 이 때에 병력관리가 매우 미흡하여 일부 병사는
머리카락을 민간인 수준까지 길렀다. 32연대 1대대는 2013년 말까지 교육대대로 운영되었고, 2014년부터는 다시 일반
보병대대로 전환되었다.
부대 개편과 관련하여 2사단의 향방에 대해 많은 소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방 GOP 경비여단 창설 떡밥과
기계화보병사단 개편 떡밥, KCTC 여단급 확장 계획이 어우러져서 2사단을 해체하며 신설 GOP 경비 여단 창설,
독수리연대를 KCTC로 보내버리고 남은 잔여 병력을 21사단, 12사단에 편입시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만든다는 소문,
2사단을 해체시키는 것은 상부의 강력한 건의로 무산되었고 대신 12사단을 쪼개서 2사단과 21사단을 기계화보병사단
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공존한다. 최근에는 기갑여단이나 공중기동강습여단으로의 개편설도 나돌고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내무 부조리나 똥군기는 별로 없는 편이었으며 부대내 사건사고도 거의 없는 부대이다. 이는 가공할만한
양의 훈련과 과업에서 기인한 것. 몸이 힘들면 똥군기 부릴 틈도 또한 관심도 없어진다는 속설이 들어맞는 사례.
최근에 모 언론에 따르면 공정사단으로 개편되고 경북으로 이동할거라고 한다.#
진짜사나이2에서 신병 이성종, 돈스파이크의 투입과 함께 이 부대로 갔다. 유격 훈련 기간이어서 김영철, 슬리피와 함께
이 둘은 열외 F4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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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사단 정보는 기네요/명품 부대 답네요
찬하모님 이글 보시고 전해 주세요
아주 아주 빡쎈 부대 라고요 ^^
겨울에 추워요~^
눈도많이오고~^
ㅋ군대 추억은 끝내줍니다~^
겨울에 군대는 다 춥죠
정도에 차이만 ㅎㅎㅎ
보통 숫자가 작은 부대가 명품부대요
소위 말하는 빡신 부대이지요.
전역후에는 상당한 자부심이 있고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1,2,3,5,6,7,8,9,11,12 사단등.......
앞쪽 사단들이 전통도 있고
625때 생긴 부대들 이라 ....
@오유석부150127(30사)서울/카페지기
그중에 제가 7사단..ㅎㅎ
@손상완 부(170321항작사 수송부)대구
저는 뒷 숫자 사단 25사단
우리 예비역은 환상의 사단
30사단 에서 보냈네요 ㅎㅎ
저와 제아들이 전역한 2사단.
해체되서 너무 가슴이 아파요.....
ㅎㅎ 그러게요
우리 예비역들은 감흥이 없어요
우리 예비역도 "그래서 뮈 어때서?"
이런 반응 이더라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