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 꽃양귀비
이은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가난한 자는 있다
성서 속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순간
흐르는 구름과 창살 사이
당신은 부끄러울까
일용할 양식대신 사들고 온 꽃양귀비 모종에 대해
많이 파세요, 드물게 밝았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에게 가난은 명사가 아닌 동사
내일 더 사랑해라는 비문(非文)처럼
점점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오래 믿는다
옥탑에서 구름의 투명을 흉내 내기
꽃양귀비, 꽃의 말은 망각과 위안이라는데
한나절 현기증의 색에 눈이 멀면
잠시 잊는 것으로 다독일 수 있을까
창살 너머 구름으로 흐르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죄다
죄가 아니다
죄다
부정할수록 또렷해지는 정답이 있고
우리는 일찍 고지에 오른 사람들
하늘이 보이는 방에 누워 함께 읽은 소설
전당포 노파를 숨지게 한 남자와 거리의 여인은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잖아, 생계형 사랑
우는 듯 웃는 가장도 기억나
아내의 양말을 팔아 술 마시던 날 결국 쓰러지지
문득 빗방울, 그럼에도
한 사람이 쓰러진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설 것이다
빛이 어둠으로 부서지는 창살에서
아직 없는 꽃양귀비 색에 눈 멀
죽은 양귀비를 곡함
손택수
양귀비를 키워보았음 했는데 마침 씨를 구했습니다 누구는 배앓이할 때 쌈을 싸 먹으면 좋다 하고, 열매즙을 짜서 담배에 묻혀 말린 뒤 피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꽃이나 좀 보고 싶어서 주말농장 텃밭에 겁 없이 씨를 뿌리기로 하였답니다 새로 꺼낸 솜이불이 살결에 와 닿는 감촉으로, 씨앗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너무 답답하지 않게, 흙을 덮을 때는 어린것들 다치지 마라 바람에 날려가지 마라 흙덩이를 일일이 손으로 비벼 뿌려주고 다독거려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을까요 알뜰하게 살피던 땅에 누가 때 아닌 쥐불을 놓은 게 아니었겠습니까 한눈에 멀리서도 활활거리는 불길에 아이쿠나 내 양귀비 모두 타 죽고 말겠구나 물통을 들고 달음박질친 곳에서 만난 불은 다름 아닌 양귀비였습니다 처음 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있는데 양귀비가 딱 그렇지요 넋을 잃은 저는 양귀비와 함께 밭 한 구석을 활활거렸습니다 삼겹살에 양귀비 쌈을 싸먹고 된장에 무쳐 먹으며 다디단 술잠을 불러보기도 하였습니다 양귀비를 애첩 삼아 끼고 사는 동안 사람들은 제 얼굴이 몰라보게 평안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평화가 게으름과 통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어쩌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게을러지니 성실을 으뜸으로 삼는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또 어느 날이었을까요 농장 쥔 양반이라는 분이 어째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꽃빛에 아주 질려버린 그는 꽃 하나 때문에 감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저를 설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하릴없이 뿌리들을 모두 화분에 옮겨 담아 오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로 시난고난 앓던 양귀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한 뿌리도 남김없이 혀를 깨물고 말았습니다 온갖 거름과 영양제를 주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노릇이었지요 양귀비는 옮기면 죽는 꽃, 제가 뿌리 내린 땅과 한몸이 되어서 땅덩이째 옮기지 않으면 목숨을 끊고 마는 독한 꽃 저는 그제야 양귀비를 보러 가던 내 발 소리와 일을 잃고 양귀비 옆에서 한숨을 짓던 날들과 밭 너머로 지는 노을에 둘 데 없는 눈을 맡기고 있던 어느 저물녘과 금기를 어기던 즐거움과 내 불안까지가 모두 양귀비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양귀비를 기르다
조용미
저것의 익지 않은 열매에 상처를 내어 받은 즙액을 건조한 것이 아편이라오 씨에 마약 성분이 들어 있다는 소리는 당치 않소 저것이라고 다 아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오
혹 물양귀비를 본 적 있소 한여름 연못에서 노란 꽃에 검붉은 빛을 띠고 있는 꽃술이 양귀비에 육박할 만큼 고혹적이라오 높은 산중턱에서 하늘과 구름을 이고 자라는 두메양귀비는 더 말하여 무엇 하겠소 그뿐 아니오 항우의 애첩 우미인의 무덤에서 핀 꽃이어서 우미인초라 하는 개양귀비도 있다오
한 번 눈앞을 지나고 나면 못내 그리워 살이 아파오는, 당신 같은 독이 많은 꽃이 저기 있소 푸른 산수국 같은 인연을 꿈꾸었지만 내 이렇게 당신을 잊기 위해 들판 가득 저것들을 키우고 있다오 이곳을 찾을 수는 없을 거요 그럼 내내 평안하시오
개, 양귀비
이화은
개복숭아 보다 슬픈 개양귀비
개살구 보다 슬픈 개양귀비
개를 끌고 가는 예쁜 여자 보다 슬픈 개양귀비
양귀비 보다 개 보다 더 슬픈 개양귀비
한 방울의 독이 없어
이름이 되지 못한 당신이여 나여
흔해 빠진 연애여
꽃이 피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진 말자
꽃의 심장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말자
다만
개양귀비 보다 더 어여쁜,
이름이 되지 못한 이름 하나가
잠시 다녀간 계절이 있었다고
독이 없어
지독히 슬픈 개양귀비
양귀비꽃
오세영
다가서면 관능이고
물러서면 슬픔이다.
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만 있는 것.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된다.
다가서면 눈 멀고
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활활
타오르는 꽃.
아름다움은
관능과 슬픔이 태워 올리는
빛이다.
양귀비
박혜람
몸에 칼집을 내면 흘러나오는 저 독은
사실 독이 아니다.
라오스 깊은 계곡에서 살다 간 어느 처녀의 순진한 저주다.
상처에서 새살이 흘러나오듯
모든 상처에서 흐르는 것들은 제각기 천국(天國)을 갖고 있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칼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누구도 그 경계에 베이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저주와 몸을 섞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세상으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
여기 한 인간(人間)이 있다.
(그는 잠시 몸을 말리러 이곳에 온다고 했다. 많은 순례객들 사이에 섞여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들르는 이곳은 단지 하나의 재미없는 코스에 불과하다고 했다. 축축한 옷을 말리면서 다시 독이 고이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스스로 독을 만들지 못하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고, 이곳은 그저 평범한 환각일 뿐이라고)
서둘러 보호색을 띠며 그가 말했다.
젊은 날 나의 뒤꼍은 수십 그루의 천국이 은밀히 자라는 음지였다.
아무도 몰래 피었다 사라지는 그 천국의 속국(屬國)이었다
지금은 그 누구의 천국이 되지 못하는 나는
아직 이곳의 손님이다.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 크라잉넛 노래<양귀비>중에서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은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순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하시시
안현미
바람이 분다
양귀비가 꽃피는 그녀의 옥탑방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어제, 다녀갔다
하시시 웃고 있는 여자
환각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오늘, 다녀갔다
사랑은 떠나지 않아도 사내는 떠났다
하시시 울고 있는 여자
검은 구두를 신은 경찰이 내일, 다녀간다
하시시 피어오르는 향기
그림자를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은?
마리화나 같은 추억
하시시 바람이 분다
아편과 같아 사내는,
중독을 체포할 수 있는 수갑은?
그녀의 옥탑방
하시시
양귀비꽃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