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과정을 마치다.
강헌모
가톨릭교리신학원 공부를 위해 본당에서 서류를 떼서 신학원에 제출하고 공부한 지 어느덧 6년이 지나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있다. 매달 문제지를 풀어 답안을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러면 채점된 점수가 날라오곤했다. 최저점수가 82점이고, 최고점수가 100점이다. 그렇게해서 6년동안 48번의 문제답안을 제출했다.
나는 정성들여 답안 작성한 것을 우체국까지 가서 부치곤했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때가 있곤했다. 우표를 붙여서 발송할 때의 기분은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한없이 좋았다. 학교에 비치된 우체통에도 한번인가 두 번인가를 넣었다. 그때도 기분만점이었다. 입학해서 1학년때 처음 공부할 때의 기분은 또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어려울정도로 좋았다. 신기한감마저 들었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시작한것에 대해 만족했다. 학기가 끝나면 연수가 있는데, 그때 더러는 참석하기도 했다. 참석하지 못할때는 리포트를 대신해서 제출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서울 가톨릭대학교와 교리신학원에서 신부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때마다 편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수녀님들도 있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신학전반에 관한 공부등을 했다. 지루하기도하고 딱딱한감도 있었지만 인내가 필요한 여정이라 보았다.
교리신학원 처음강의 듣는날 오전 9시부터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나는 청주에서 일찍나서서 늦지 않게 강의에 갈 수 있었다. 강남터미널에서 내려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을 타고 내려서 어느 정도를 걸어 올라가서 보니 교리신학원이 보였다. 가는 길에 동성고등학교와 혜화동성당이 눈에 띄었다. 동성고등학교를 기억하는 것은 예전에 이인복 마리아교수님이 성령쎄미나를 받고 은총을 받은 얘기에서 학교생각이 났다. 친절하신 분들의 안내로 하루강의를 마치고 어둠이 내린 서울거리를 두리번하며 내려왔다. 대학로라는 곳에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다. 언젠가 그곳에서 국밥을 사서 먹은 기억을 한다. 처음 강의를 마치고 어둑어둑한 서울의 밤길을 헤쳐나와 인천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 걸을 때 너무 좋았다. 나의 뇌리에 박혀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의 통화로 인천의 어느 지점에서 내리라 해서 장모님댁에 찾아갔다. 이미 아내는 그곳에 가 있었고, 나는 교리에 나오겠다는 학생에게 신경이 가서 통화를 하였다. 하지만 그 학생은 나중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공부한 다음에 성당에 다니겠다는 뜻을 비추어 사실상 선교에 실패해서 안타까웠다. 사람 하나 인도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새삼 느끼게 됐다.
그외에 몇번 더 서울을 가 봤지만, 어떤때는 전철을 잘못타서 당황이 되었고, 햇갈릴때도 있곤했다. 사람이 아주많은 서울에 가보니 사람 구경하느라고 한눈 팔때가 종종 있었다. 한편 전철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있어서 본받을만했다. 몇번을 가다보니 조금은 정이 들었다는 생각이다. 신학원에서 몇년전에 나의 본당에 계시다가 서울로 가신 수녀님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니 반가웠다. 어떻해서 넓은 서울에서 만날 수가 있을까. 정말 생각지 못했던일이라 기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주춤거리기도 했다. 가톨릭대학교에는 큰 성모님상이 있다. 그 뒤로 향나무가 있어서 보기에 좋다. 그곳의 점심은 정말 맛있다. 기억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교리신학원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하기전에 기다려졌고, 설레였다. 강의 마치고 파견미사때 신부님 강론중에 태풍이 온다는 소식으로 날씨가 좋지 않아서 걱정을 하셨나보다. 그런데 막상 연수하는날 날씨가 좋아서 공부하러온 수녀님들과 형제자매님들에게 여기에 '의인이 있는가보다'라고 말씀하신 기억을 한다. 또 어려운과정을 하는 교리신학원 학생들을 격려해 주셨다. 어떤 신학원졸업생은 박사학위를 받는것보다 신학원 졸업이 더 가치가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생각난다. 파견미사를 드릴때의 기쁨이 있어서 그것을 잘 간직해서 본당에 가서 함께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곳에서 전례봉사자님들이 정성된 미사를 위해 잘 준비하셨다. 나는 서울 올라가는 날, 즐거울 때가 있었고,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했었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이번에도 전철을 타고 가고 오는데 햇갈려서 짜증이 났다. 머리도 아파왔다. 정신을 가다듬고 제대로 타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그게 그것같고, 술래잡기하는것처럼 빙빙돌고돌은 후에 찾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곤욕을 치루고 시간을 낭비했다. 조촐하게 졸업감사미사를 드리고 졸업장과 교리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생각했던것 같이 그렇게 많이 기쁘지 않았지만, 어려운 6년과정을 마쳤으니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했으리라 생각하니 감사하기 이를데없다. 늦은 나이지만,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가족의 도움도 있었고, 성령의 이끄심도 있어서 좋은 선물을 받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으로 졸업할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교리신학원 공부를 통해서 주님께서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선교하는데 더 튼튼한 발판을 내려주셨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남을 가르치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배움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힘도 얻었고, 자부심도 생겼다. 또 신학원 다니기전에 비해서 성장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 교만함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 용서하는 것에 자신 없는 것, 용서청하는 것의 어려움 악습등 이제 모두 그런 짐들을 내려놓고 정말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야겠다. 이번 서울 방문도 싫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언제봐도 정겹고 생기발랄하다. 그들에게서 따뜻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 많은 가운데 작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즐거운 한때를 지내는 모습은 분명,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연수회에서 신학원생들은 신부님의 열띤 강의를 놓치기가 아쉬운 듯 열심히 듣곤했다. 쉬는 시간에 먹는 간식과 차는 마음을 좋게했다. 또 가톨릭 대학교 출판사에서 신학원생을 위해서 가격을 낮추어 판매를 해서 마음에 닿는 것을 사곤했다. 이제 졸업하는마당이라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장소가 그리운건 왜일까. 막상 졸업하니 그것들이 한가닥 추억으로 남고만 마는걸까?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모르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되어 함께 공부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미국과 뉴질랜드에서도 4명이 졸업식장에 왔다. 신학에 대한 열정이 담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작은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야 만것이 아닐는지. 조그마케나 정들었던 서울의 아름다운 생각들을 고이 간직하련다. 그리하여 생동감에 넘친 그들의 삶을 본받아 밝게 살아가고 싶다.
나는 왜 전철의 사람들에 관심이 있는걸까.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좋아서일까. 그냥 사람들이 좋아서일까. 잘은 모르겠으나 혼자있을 때도 좋고, 1 : 1의 한사람과 한사람일때도 좋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에 대한 예의를 잘 지켜야 하리라.
이번에도 전철안에서 책을 읽는사람이 있었다. 저번때와는 달리 사람들 발디딜 틈없이 오밀조밀 몸이 닿은채 전동차는 쉼없이 가는 와중에서도 서서 영어책을 읽는 사람이 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게 했다. 그런모습을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까. 대단하다. 귀감이 된다. 그는 책에 몰두해서 다른 사람은 의식하지 않을거다. 또 어떤사람은 나와 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다가 나중에 씩웃는거다. 마치 나를 위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고, 충무로에서 내렸다. 괜찮다 싶은 사람을 발견한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성령의 힘이 통하는 것 같은 생각에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다.
강의를 들은 것중에 대게 신부님들이 하셨지만, 한분만 여성이 했는데 수녀님이셨다. 그분은 성경에 대해 강의하셨는데, 쉽게 잘 설명하셨다. 또 재미나게 간추려서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하셨다. 참 편한 강의를 들어 기억에 남는다.
다른 신부님들도 좋은 강의를 해 주셨는데, 어려운 면이 있었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까지 간 보람을 느끼고 돌아가곤했다.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는 그리움이다.
2014.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