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6일 영국 머지사이드 주 SouthPort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황톳빛 깃들은 고운 해변. 그곳은 수영하는 사람, 요트를 즐기는 사람, 혹은 모래찜질을 하는 사람등으로 한창 북적이고 있었다.
"오...... 대단히 아름답네요."
"여기 굉장히 유명한 휴양지에요. 모르는 이들은 영국의 해변이라고는 브리튼(Brigtton)밖에 없는 줄 알지만 여기도 브리튼에 뒤지지 않아요. 더구나 수만의 인파가 몰려서 사람에 치이고 마는 브리튼보다는 여기가 아름답고 깔끔하죠."
"아, 네.......""
"관광지이다 보니 주민보다 외지인이 휠씬 많지만 시내도 들어가면 건물도 아담하고 마을도 참 이뻐요."
김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의 설명이 없었다라도 그는 이미 이곳의 아름다움이 흠뻑 취해있었다. 자갈하나 없는 고운 모래의 드넓은 해변, 도도히 흐르는 푸른 바다. 곧 부서질 듯한 청명한 하늘은 이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여기 얼마나 머물 수 있는거죠?."
정혜가 문득 돌아보며 빙긋 웃는다.
"찬수씨가 원하는 만큼일지도 모르죠?"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내일 가야 할지도 모르구요......"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정혜, 그러나 김찬수는 크게 마음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영문을 모르고 온 길인데, 더욱 모르는 것이 생긴다 한들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이때, 김찬수의 발 앞으로 비치발리볼이 굴러온다. 김찬수는 공을 쫒는 백인 아이에게 공을 던져주며 정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일정이 어찌 돼죠?."
"일정이라뇨?."
"방송이라면서요?. 방송이라면 뭔가 스케줄이 있을거 아닙니까?. 아참 그러고 보니 좀 이상
하네요?. 무슨 방송이 카메라맨도 없고 PD도 없고, 리포터만 덜렁 오는 방송도 있는가요?."
"아..... 아...... 그, 그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정혜. 얼굴마저 붉어지고, 이것을 본 김찬수는 이제껏 당차기만 하던 정혜의 이같은 태도변화에 의아함보다는 기쁨부터 앞섰다. 그는 지금껏 정혜와의 대화에서 내내 수세에 몰리다가 이제야 공격의 찬스를 잡은 것이다.
"거기다. 응...... 그 뭐더라...... 아 그래!. 가이드도 없네 가이드도.! 이거 수상한데 이정혜씨......?."
짖궂게 웃으며 정혜를 놀린다. 정말 통쾌하다.
"가이드가 왜 필요해요!. 나만큼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어. 이곳을 잘 안다고요?. 이곳에 자주 오시나봐요?."
"그럼요! 내가 사는 동네가 이곳...... 헙!"
"????"
잠시 침묵했던 정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취재 차 여기 자주 온다구요. 헤헤."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운 찬수.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 같은 찬수의 반응을 보고 기운을 얻었는지 정혜가 다시 기세를 부린다.
"그리고 말이죠. 김찬수씨. 이번엔 까먹지 말고 잘 들어봐요. 이번 프로그램은요. TV 방송이 아니구요. 라디오라고요. 라디오!!!. 알겠어요?. 라디오에 카메라맨이나 PD가 왜 따라와요?. 라디오방송은 말이죠~ 이 녹음기하나면 딴 거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몰랐죠~ 이 바보~"
말 끝에. 정혜가 보여주려는 듯 핸드백 속에 워크맨을 꺼낸다. 사실 해외여행 프로그램이 라디오로 진행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인데다. 라디오 방송을 위한 녹취용으로 워크맨을 들이댄 것도 코미디 같은 일이었지만, 지난 3년 간 지은 농사와 축구말고는 당최 아는 것이 없는 김찬수로서는 그런 생각 따위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그런가"
"당연하죠, 김찬수씨, 아무리 방송인이 아니라지만 넘 방송을 너무 모르는거 아니예요?. 암만해도 내가 좀 가르쳐야 하겠는걸. 방송이란 건 말이죠. 굉장히 심오한 작업이예요......"
기세를 완전히 회복한 정혜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김찬수는 정혜와의 지난 이틀간의 동행으로 한가지 배운 것이 있었다. 정혜가 떠들기 시작하면 그저 듣는 척 해주는게 약이란걸 말이다.
얼마를 떠들었을까. 목이 말랐는지 정혜는 수다를 갈무리 했다.
"하여간 이번 프로그램 중 오늘의 일정은 말이지요. 이 지역, 유지인 찰리 그래햄씨를 만나는 거예요, 알았으면 따라와요!"
김찬수는 더럭 성질이 났다.
"내가 그 사람을 왜 만나야 하죠?. 나한테 그 사람이야기는 한번도 한적도 없으면서"
"우리 프로그램 일정의 일부이니까."
더 덧붙일 필요도 없다는 듯 정혜는 한마디 툭 던지고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김찬수. 낮 설은 이국땅에서 그가 뭐 어쩌겠는가, 얌전히 따라가야지.
버스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곧 김찬수의 눈 앞에 허름한 3층짜리 빌딩이 드러났다.
"
찬수씨. 내려요, 다 왔어요."
마치 이제야 집으로 돌아간다는 듯 정혜는 보무도 당당하게 척척 걸어나갔다. 그에 비해. 김찬수는 무슨 별천지를 본다는 듯. 연신 두리번거리며 정혜의 탐스런 엉덩이만 쫒는다.
"여기가, 어디죠?."
"아까 찰리 그래햄씨 만난다고 그랬잖아요?. 찬수씨 또 까먹었구나?."
"그럼...... 여기가?."
"그래요, 여긴 그래햄씨 사무실이에요."
"에이, 설마. 지역 유지라면서.... 무슨 유지사무실이 이리 후져 빠졌어?"
"시끄러워욧!. 남자가 군소리는......"
이윽고 한 방문 앞에 다다른 두 사람.
"선생님! 저왔어요!"
정혜는 노크도 않고 냅다 소리질렀다.
방안에서 울리는 정체 불명의 목소리
"미스 LEE. 성공했나?"
"당연하죠!. 그럼 데리고 들어갑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무심결에 방안을 살피던 김찬수를 깜짝 놀랐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어디계세요?. 그만 나오세요. 선생님 장난도 이젠 지겨워......."
정혜의 볼맨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열린 창문 틈으로 검은 물체가 뛰어든다. 흠칫.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김찬수.
"헉...... 이게. 뭐야."
까닭모를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빼는 김찬수 앞에 검은 물체는 당당히 버티고 선다.
"아임 배트맨, 웰컴 투 싸우스포트!"
뭐..... 뭐지..... 여기가 디즈니 랜드였나?. 여긴 영국인데?.. 황급히 정혜를 돌아보는 찬수 그러나 정혜는 이미 배꼽을 잡고 바닥을 뒹구는 중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검은 가면을 쓴 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소. 배트맨이라고."
아니. 그럼 배트맨이 실존 인물이었나. 그, 그럼 배트맨이 영국이로 이사 온 건가?."
배트맨은 김찬수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게 웃는다.
"수퍼맨이 시민을 구하러 와 줬는데. 마땅히 배트맨이 마중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니겠소?. 아하하하!."
"수, 수퍼맨??????. 당신 제정신이요?"
찬수의 제정신이냐는 말에 화가 났는지 배트맨은 김찬수의 코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움찔하는 김찬수. 배트맨은 찬수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가만히 속삭인다.
"혹시. 당신 속옷, 빨간 팬티를 입고 있지 않소?. 스판재질의 붉은 팬티 말이요. 오호. 그런데 당신은 옷을 잘못 입었군. 내 한 수 알려주지 그 팬티는 말이오. 바지 위에 입는거라오. 킥킥킥"
"???????."
배트맨이 계속 어이없는 소리만 늘어놓자 김찬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정혜씨, 웃지만 말고 뭐라고 좀 해봐요!, 지역 유지를 방문한다더니 왜 난데없이 미친 사람집으로 날 데려온거요?!"
그 말에 지금껏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던 정혜가 웃음을 물며 일어난다.
"아...... 아...... 배 아퍼... 하하하. 선생님. 이제 그만하세요. 이 사람이 까무라치기전에 저부터 죽겠네요. 아이고 죽겠네....."
"미스 LEE. 그런소리 마. 내가 이번 쑈를 위해 얼마나 돈을 들였는 줄 알아?. 배트맨 의상도 미국에서 공수해 오느라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니라고!"
정혜는 정색을 하며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인다.
"그래두요. 선생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내가 고생고생해서 일껏 데려왔는데 그냥 보내실 작정이세요?"
그 말에 배트맨은 가면을 벗으며 한숨을 쉰다.
"휴. 그런가?. 그럼 1000달러짜리 나의 쑈도 여기서 끝이로군."
"안녕하시오. 나는 찰리 그래햄이라고 하오"
"아. 예...."
주춤거리며 악수에 응하는 김찬수.
"내 선생을 좀 즐겁게 해주려고 쑈를 준비했었는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오?"
"......"
"앉으시오. 미스 LEE도 다가 앉고"
그래햄은 실패한 쇼가 아직도 섭섭한지 힘없이 물었다.
"선생을 내가 부른 이유가 궁금할거요. 그렇지 않소?."
김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를 부르다니요?. 나는 다만 방송일정상 당신을 만난 것인데?."
"방송일정상?. 무슨 방송? 나는 미리 연락받은 바 없는데 무슨 촬영을 한단 말이요?"
"TV가 아니고 라디오입니다만."
그래햄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연락받은 적도 없었던 데다가 선생은 방송 감독과 나를 방문한게 아니라. 우리 미스 LEE와 함께 왔지 않소?. 방송이라니. 그럴리가?."
"뭔가 잘못아시는 모양인데. 저기 있는 정혜씨가 한국에 KMS방송 리포텁니다. 오늘 당신과 나를 동시 취재할 모양이던데요?."
그래햄은. 옆에 앉은 정혜를 획 돌아본다.
"미스 LEE. 대체 선생한테 뭐라고 설명하고 나에게 데려온건가?. 이 사람 우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 않는가?."
정혜. 대답은 않고 빙긋 웃는다. 장난끼 가득한 웃음이다.
"미스 LEE가 선생에게 뭐라고 하면서 여기까지 데려온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디 용서하시오. 뭔가 의미 전달이 잘못되어진 것 같소."
그래헴은 말 끝에 물 한잔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혜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러나 여전히 정혜는 가벼운 미소룰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설명을 해 드리지."
그래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한바퀴 휘~ 돌기 시작했다.
"우리 미스 LEE는 말이오. 우리 사우스포트 구단의 회계담당직원이오. 방송국 리포터는 아니라오. 핫핫"
다시 혼란스러워지는 김찬수. 정혜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보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혜의 도톰한 입술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핑크빛 혀뿐이었다.
그래햄은 다시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미안하오...... 나는 이런 진지한 이야기는 좀 부담스러워서 말이오. 물을 자꾸 찾게 되누만. 핫핫, 그래도 지금은 진지해져야 하니 어찌하겠누."
"이제 내 소개를 바로 하리다. 나는 찰스 그래햄이라고 하오. 싸우스포트의 바다와 해변. 그리고 해변에서 피부를 태우는 끝내주는 몸매의 여인을 사랑하는 싸우스포트의 구단주이지. 핫핫. 선생의 존함은 뭐요?."
그래햄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연신 웃었다. 김찬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 없었지만 궁금증은 잠시 잊고 일단은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을 맡겨보기로 했다.
"김찬수라고 합니다만."
"오~ 김선생이시구먼. 김 선생."
그래햄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작은 마음이오 인구도 9만명 정도밖에는 안되고 말이오. 공장이래봐야 별것도 없어서 . 다행히 자연경관을 쓸만해서 관광수입은 꽤 짭짤하다오."
"......"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도 축구팀이 있다오. 바로 내가 구단주로 있는 싸우스포트 클럽이오. 어여, 그래도 김선생. 우리팀을 무시하진 마시오, 지금은 컨퍼런스 리그로 내려가 있어 프로팀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한때는 2부리그에서 경기했던 영광도 있었던 팀이었소."
그를 만난지 처음으로 그래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우리 싸우스포트팀이 말이요. 지금 컨퍼런스리그에서의 유지도 힘들게 되었소. 인구가 워낙 적다보니 수입도 적고 해서 적자는 날마다 늘어나고, 그러다보니 팀의 유능한 선수들도 하나둘씩 팀을 떠났소. 지금 남아있는 선수들이래봐야 동네축구수준의 기량미달 선수이거나. 40이 다된 고령의 선수 뿐이라오."
"......"
"그러다 보니, 성적은 곤두박질쳐서. 전임 감독인 필 윌슨 감독은 작년 시즌의 비참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소. 나는 작년의 성적이 윌슨 감독의 탓이 아닌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임을 만류했지만. 그는 떠나버렸소. 때문에 나는 후임감독 인선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고민 끝에 내가 낙점한 감독은 당신. 바로 김 선생이오!.
"!!!!!"
"김선생을 낙점한 후. 선생이 이같이 작은 마을에 와줄까 하는 불안감에 한국 사정에 밝은 미스LEE를 보내서 당신을 데려오게 한 것이오. 나는 선생이 사우스포트를 구해줄 수퍼맨이 되어주길 원하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곳에 관광을 왔을 뿐입니다."
지금껏 잠자코 있던 정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니 찬수씨!. 아직도 모르겠어요?. 찬수씨는 TV 프로에 응모한적도 없고, 당첨된 적도 없어요. 나도 방송 리포터도 아니구요. 찬수씨는 그래햄씨의 지시로 내가 데리고 온 거지 관광 온 게 아니라구요, 이 바보!"
끼어드는 정혜의 말에도 찬수는 무표정하게 대꾸도 하지 않는다. 무안해서일까?. 어지간한 정혜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햄씨.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저는 관광을 왔을 뿐인데다. 감독 경력도 10살 좀 넘는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것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아마 사람을 잘못 찾으신 듯 싶습니다."
그같은 찬수의 말에 그래햄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으나 이내 주제를 바꾸었다.
"그나 저나 혹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바르셀로나의 양종헌이라는 선수를 아시오. 선생?"
갑자기 그래햄이 양종헌의 이야기를 꺼내자. 김찬수는 의아했다.
"아...... 압니다만은."
"선생이 그 선수를 가르쳤다면서요?."
"가르쳤다기 보다는 잠시 함께 축구할 기회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햄은 실눈으로 김찬수를 흘긴다.
"호오. 그래요?. 양 선수는 그리 생각 안하는 것 같던데. 2주전에 챔피언스리그 2차전에서 양종헌이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바르셀로나 감독이 아니라 선생이었지 않소?."
"......."
그래햄은 다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무엇 때문인지 자꾸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결승골을 넣은 영광스러운 그 날에 양 선수는 이야기했소. 당신은 세계 유수 클럽에 감독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라고. 양 선수같은 대 선수가 능력없는 축구인을 능력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소, 내 말이 옳지 않소이까 김선생?"
김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닭없이 분노가 일었다. 이 분노는 무엇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하지만 김찬수는 정혜의 어두운 얼굴만은 철저히 외면하고 싶었다.
"그것은. 양 선수가 스승인 제가 축구계를 떠나있는 것이 불쌍해서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위기의 싸우스포트를 구할 수 있는 수퍼맨이 못됩니다. 저는 이미 한 사람의 농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으로 한번 물색해보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혜가 따라나오는 듯 급히 뛰는 듯한 하이힐 소리가 들렸지만. 김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래햄의 사무실을 뛰쳐 나왔다.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그를 아프게 했다.
"나쁜 여자......나쁜..여자...."
2001년 6월 6일 저녁 11시 싸우스포트 시내 위치스 워즈 호텔
한국으로 갈 짐을 다 싼 김찬수. 침대에 걸터앉아 어깨를 주무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휴~~"
창밖을 내다 보았다. 우울한 찬수의 마음을 하늘도 아는지 저녁부터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 그래도 생각보단 좋은 여자였는데......내가 너무 심했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장에 이따금씩 곰팡이가 보인다. 불현 듯 떠오르는 정혜의 하얀 얼굴 김찬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차피 내 여자가 아니다......
- [김찬수]라고 피켓에 크게 써서요. 낼 아침 10시 김해공항 출입구서 피켓 들고 서 있으시라구요. 그럼 제가 찾을게요. 아셨죠?.-
-그리고 말이죠. 김찬수씨. 이번엔 까먹지 말고 잘 들어봐요. 이번 프로그램은요. TV 방송이 아니구요. 라디오라고요. 라디오!!!. 알겠어요?. 라디오에 카메라맨이나 PD가 왜 따라와요?. 라디오방송은 말이죠~ 이 녹음기하나면 딴 거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몰랐죠~ 이 바보~"-
이를 악물고 다시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본다.
"딩동!. 딩동! "
정적을 깨우는 초인종 소리에 김찬수는 힘없이 일어나 문켠으로 갔다.
"누구세요?"
"나예요. 정혜......."
김찬수는 잠시 고민했다. 왠지 선뜻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열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김찬수는 흠칫 놀랐다. 정혜가 우산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생머리는 비에 젖어 그녀의 얼굴을 휘감고 있었고 하얀 블라우스 역시 흠뻑 젖어 그녀의 가슴선의 굴곡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너무나 애처로운 그녀에 모습. 그러나 왠지 김찬수는 약해지기 싫었다.
"무슨일이죠?. 밖에 비가 많이 와요 할말 있음 빨리하고, 우산을 안가져 왔나본데 자. 이 우산 가지고 돌아가요."
"저.... 미안해요. 사과하려고 왔어요."
"......"
"정말 죄송해요 사실, 그렇게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는데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찬수씨가 너무 귀여워서. 거짓말이 너무 길어져버렸어요."
"......"
"용서해주는거죠?"
찬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속좁은 남자가 되기 싫었다. 금세 얼굴이 밝아지는 정혜.
"고마워요. 역시 찬수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헤헤. 그럼 싸우스포트 감독도 맡아주는 거죠?"
김찬수는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햄씨가 당신을 보낸거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느냐 이 말이요!."
"아, 아니. 나. 나는 그냥.... 찬수씨가 감독을 했으면 해서......."
"한번 속이는 것도 모자라 또 속이려 하나요?. 정말 잔인한 사람이군요. 몸쓸 사람 말이요!, 하하. 책임감은 강한 사람이로군. 끝까지 임무 완수를 하려는걸 보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속지 않을 거요.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당장 돌아가요!"
정혜가 발끈한다.
"찬수씨.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어찌 사람 진심을 그렇게 폄하하세요?"
"먼저 사람을 바보로 만든 건 당신 아니오!."
"정말 구제불능인 사람이네요. 한때나마 당신에게 호감이 갔던 내 자신이 저주스럽네요. 나는.... 그저.. 찬수씨가 싸우스포트에 좀 더 오래 있길 바랬던 것 뿐인데......"
정혜의 눈망울에 언뜻 눈물이 비친다.
호감?. 김찬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아니, 내가 말을 좀 심하게 한 것 같아요."
정혜는 돌아서서 매몰차게 외쳤다.
"됐어요. 당신마음 너무 잘 알았으니까.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서 촌구석에서 그 좋아하는 농사나 짓고 잘 먹구 잘 살아봐요!. 찬수씨는 여자마음을 이리 모르니 평생 총각으로 늙어죽어버릴꺼야!"
말 끝에 정혜는 집을 방을 뛰쳐 나간다. 정혜가 떠난 그 자리를 찬수는 밤새 장승처럼 서 있었다.
2001년 6월 10일 싸우스포트 시내 싸우스포트 구단 사무실
"미스 LEE. 네 잘못이 아니야. 그와 우리가 맞지 않았던 거겠지."
내내 우울한 표정의 정혜를 그래햄이 위로한다.
"실망하지마. 다시 다른 사람을 한번 찾아보면 되지 뭐 힘내자구."
그러나 무심한 정혜는 그런 그래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니. 김... 선생?!"
놀라서 돌아보는 정혜. 얼굴에 기쁨이 어린다.
"저에게 기회를 한번 주시겠습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시즌 팀의 리그 승격에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래햄이 환한 낯빛으로 김찬수를 맞는다.
"오오. 김 선생. 드디어 결심을 하시었소?. 정말 잘된 일이오. 원하는 조건은 뭐요. 많이는 못주지만 될 수 있는데로 요구조건을 맞춰보겠소."
김찬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 묵고있는 호텔에 숙박료와 약간의 생활비만 주시면 됩니다. 정혜씨 월급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다만 한가지 중대한 조건이 있습니다."
"응?. 그게 뭐요?"
김찬수는 정혜 앞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내가 이번 시즌 컨퍼런스에서 3부로 승격한 후,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정식으로 데이트신청을 한다면 허락하겠소?."
그 같은 찬수의 모습에 정혜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말과는 달리 웃음을 물었다.
"당신같은 멍청이에다 속 좁은 바보가. 승격할 수 있겠어요?."
정혜의 얼굴이 햇살보다 더 환해보인다.
"하지만..... 승격한다면. 데이트 신청!, 기쁘게 받아드릴께요!"
듣고 있던 그래햄이 기분좋게 웃으며 김찬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호, 두 사람이 그런 사이인줄은 미처 몰랐구료. 어쨌든 좋소. 김 선생. 싸우스포트에 감독이 되신걸 축하하오.
제 3 부에서 계속.
*. 제 이야기는 프롤로그부터 읽지 않으시면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처음 보시는 님들은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검색어를 이용하시어 프롤로그 1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심가져 주심을 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사우스 포트 그 팀 감독하고 싶어지는데요..^^
오,, 굉장히 기대된다는,,
재미있습니다 ㅎㅎ
아,, 재밌습니다, 자서전 리플도 오랜만에 달아보는군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 긱스님,라울님,마이걸님이 자서전 올리시지 않는 지금 위치스님과 현재 자서전 양대산맥인듯 싶습니다, 갠적으로 진지모드를 좋아해서 위치스님보다 골키퍼님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아! 그리고 위치님에겐 죄송하고요, 앞으로 좋은 자서전을
쭈~욱 올려주세요^^
글쓰시는 능력은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4대천왕에 가까이 가기에는 뭔가 부족한감이..........처음부터 4대천왕이 아니었잖아요^^
감탄뿐입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사우스포트.. 정말 힘드실껍니다... 자금도 없고 수입도 적고 선수능력치도 별로죠... 골기퍼님의 능력을 보고싶습니다.. (참고로 전 컨퍼런스에서 승격후 그담엔 포기하구 파일지웠다는... 물론 지금 다시 미련이 남아서 시작은 하고 있지만.. ^^) 빨리 담편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