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수기비지(不死誰其非之)
죽지 않는다고 누가 비난할 것인가?
不 : 아닐 불(一/3)
死 : 죽을 사(歹/2)
誰 : 누구 수(言/8)
其 : 그 기(八/6)
非 : 비방할 비(非/0)
之 : 어조사 지(丿/3)
일제의 강제 병합 뒤 만주로 망명해 쓴 이건승(李建昇)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我無死責(아무사책)
나는 죽을 책임은 없으니
不死誰其非之(불사수기비지)
죽지 않는다고 누가 비난할 것인가?
曰死而不死(왈사이불사)
죽을 거라 말해놓고 죽지 않는다면
是誰欺(시수기)
이는 누구를 속이는 것인가?
卒以老斃牖下(졸이노폐유하)
마침내 늙어 바라지(창) 밑에서 죽을 것이니
吁其悲(우기비)
아! 그것이 슬프구나!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이 1918년 만주에서 스스로 지은 묘지명(墓誌銘)이다. 그의 저서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에 실린 '경재거사자지(耕齋居士自誌)'에 나온다. 그가 스스로 지은 묘지(墓誌)는 행장처럼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으로 별도로 있다.
이건승(李建昇)은 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을까? 삶의 이력을 잠시 보겠다. 그는 양산군수를 지낸 이상학의 세 아들 중 둘째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형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이건창, 아우는 학자 이건면이다. 조부는 병인양요 때 죽어서도 적을 무찌르겠다고 자결한 전 이조판서 이시원이다.
이건승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정제두의 6세손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죽으려 했으나 뜻을 못 이뤘다. 그 뒤 나라가 치욕을 당한 건 강토가 작아서가 아니라 백성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결과라 여겨 후진을 기르려고 강화도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열었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이 있자 그해 10월 2일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는 정원하가 먼저 와 있었다. 이건승은 1924년 만주에서 세상을 버렸는데 스스로 지은 묘지에서 "내가 나라를 떠나 이곳(만주)으로 온 것은 일본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옛사람은 생전에 자기 묘표(墓表)와 묘지(墓誌)를 적고, 심지어 자기를 애도하는 만시(輓詩·挽詩)를 지었다. 묘표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비명, 묘지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지명이라 했다. 이런 기록을 통칭 자찬묘지명 또는 자찬묘비명이라 한다.
어제 국어 교사 출신 지인이 전화해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그럴듯한지 들어보라”고 했다. 필자가 "내용이 너무 길어 줄여야겠다" 하니, "줄여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거창하게 무덤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묘비명이나 묘지명은 최대한 축약해야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묘지명에 칠언절구를 쓴 경우가 더러 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자찬묘지명은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여 자신의 삶을 자신이 직접 쓴 묘지명으로서, 묘지명의 내용 요소를 수용하되, 지행(志行)의 포폄(褒貶)에서는 칭찬[褒]보다는 나무람[貶]이 두드러진 양식이다. 이러한 자찬묘지명에 드러난 창작 동기를 왜, 언제 짓느냐는 관점으로 구분하여 내적 창작 동기와 외적 창작 동기를 살펴보았다.
내적인 창작 동기는 외부의 과장된 평가에 대한 반발이며, 이는 곧 나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외적인 창작 동기는 정치적 탄핵이나 가족의 상실, 임종과 같이 원치 않은 외부적인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긴 불평지심이다.
자찬묘지명은 분명 과거의 글이지만, 오늘날 노인 자서전 쓰기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찬묘지명의 내용 요소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 듯, 현대의 노인 자서전 쓰기의 내용 요소도 타자화하여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협동 작문의 산물인 자찬묘지명에서 협동 작문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자신의 묘지명(墓誌銘)
유배에서 돌아온지 4년 뒤 회갑때 지나온 파란의 삶을 회고하며 지었다. 무덤에 넣는 소략한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실을 상세한 집중본(集中本) 두 가지가 있다. 집중본을 중심으로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열수(洌水)정용(丁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 하듯'이란 뜻에서 지었다. 어려서 영특해 문자를 알았고, 10세때부터 과예(科藝)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집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경사(經史)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15세에 서울에서 이익(李瀷) 선생의 글을 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22세때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였다. 임금이 '중용'에 대한 80개의 조목을 내리자 친구인 이벽(李檗)과 함께 답변을 준비했다. 이벽은 이황(李滉)의 학설을 지지했고, 정약용은 이이(李珥)의 학설에 합치했는데 1등을 받았다. 이때부터 임금의 총애가 각별했다.
1784년(정조 8) 4월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해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그렇지만 과문(科文)과 변려(騈儷), 일과(日課)의 학습으로 다른 겨를이 없었다. 1789년 봄 성균관에서 보던 시험에 표문(表文)으로 수석한 다음, 대과(大科)에 응시해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고,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제수받으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서학을 믿어 위패와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한 사건으로 일차 곤혹을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중에 임금의 명으로 수원성 축성에 쓸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다. 사도세자를 추증하는 도감(都監)을 맡아 공을 세워, 벼슬이 더욱 높아져 삼사(三司)의 요직과 암행어사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794년주문모(周文謨) 사건으로 서교의 혐의가 다시 불거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그곳의 서학을 금하고 신자들을 회유시키는 한편, 이삼환(李森煥) 등과 함께 온양 석암사(石巖寺)에서 강학했다. 매일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고 성호 선생의 문집을 교정해 열흘만에 마쳤다.
1791년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서학에 빠졌던 점을 반성해 사직하는 소(疏)를 올렸다. "책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마음에 흔연히 빠져들었다"고 고백하자, 충정을 헤아린 임금이 비방과 참소를 피하라는 뜻에서 외직인 곡산도호부사에 보했다. 38세 내직으로 불려와 동부승지에 이어 형조참의로 제수받으며 임금과 돈독한 교유를 재개했다.
39세 참소와 시기가 끊어지지 않자 낙향을 결심했으나 임금이 다시 불러 올려 교서를 맡았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세가 급변하여, 서학을 빌미로 한 1801년 숙청의 바람 속에 형 정약종(丁若鍾)은 죽고, 정약전(丁若銓)은 신지도로, 그는 경상북도 장기(長鬐: 포항의 옛 지명)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저술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정승 서용보(徐龍輔)의 방해로 석방이 좌절되었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이사했다. 천여 권의 장서를 두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다.
강진에 유배되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선왕(先王)의 대도(大道)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여가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침잠하여 탐구하고, 한위(漢魏) 이래로 명청(明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유학자의 학설로 경전에 보익이 될 만한 것을 널리 수집하고 두루 고증하며 오류를 정정하고 취사해 일가(一家)의 서(書)를 이루었다.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
모시강의보(毛詩講義補) 3권,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
주역심전(周易心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희정당대학강록(熙正堂大學講錄)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 등 경집(經集) 232권 등을 저술하였다.
저술을 통해 밝혀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시(詩)는 임금으로 하여금 선을 감발하고 악을 징치하도록 한 풍송(諷頌)의 노래 모음집으로 원래의 '춘추'보다 더 엄했다고 밝혔다. '서(書)'에서는 매색(梅賾)의 고문상서(古文尙書) 25편이 위작이라는 것을, '예(禮)'에서는 정현(鄭玄)의 주석에 오류가 많은데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 '악(樂)'에서는 오성(五聲)과 육률(六律)의 차이를, '역(易)'에서는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논어(論語)에서는 인(仁)이 총체적 덕목이고 효제(孝弟)는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세목임을, 맹자(孟子)에서는 기(氣)를 받치는 것이 의(義)와 도(道)라는 것을, 그리고 '본연(本然)의 성(性)'은 불교적 인식이므로 '천명(天命)의 성'을 말하는 유학과는 상용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중용(中庸)에서는 용(庸)의 의미가 평상이 아니라 꾸준한 지속적 파지의 의미임을, 대학(大學)에서는 대학이 필부와 서민을 위한 책이 아니라 통치 계급의 교범임을 밝혔다.
그 다음 현실 정치 개혁의 저술로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묵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방책을,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관의 통치 지침을,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옥사의 공정함과 합리화를 위해 저술하였다. "육경사서(六經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했으니 본말을 갖추었다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당대에 인정을 받기가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 천명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하였다. 당시 노론 벌열인 김매순(金邁淳)의 극찬에 크게 고무되기도 했지만, 그는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의 호인 사암(俟菴)에는 그처럼 당대에 대한 비관과 후대에의 절절한 기대가 깔려 있다.
정약용은 왜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야 했을까?
하늘이 불인정한다면, 경서의 주석,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라
평생을 육경과 사서로 수신하며 ‘일표이서’를 완성해 천하의 지침을 마련하려 했던 대학자가 누구인가.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다산은 늘 시대의 아우성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유배와 좌천은 역경도 아니었고, 터무니없는 모함과 치졸한 질시 따위는 그를 깎아내리지 못했다. 일생동안 다산의 학문과 관직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 네 글자였다. 그 정신만큼은 유배 기간에도 변함없었다.
올해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지 이백 년, 오랜 유배에서 해배된 지 이백 년이 되는 해였다. 그 이백 년이 지난 오늘의 세상은 어떤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를 어디서 찾을 수 있기나 하는가. 정치권, 재계, 금융계, 문화계 심지어 법조계,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풍토와 몹쓸 폐단이 나돌지 않은 곳이 과연 어느 분야에 있는가.
때문에 우리는 이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사의 스승으로부터 지혜와 가르침을 터득해야 한다. 헌데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다산의 말(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금과옥조라 한들 서고의 책과 역사 속에 파묻혀 있다면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다산의 일표이서는 가르침이 크다. 국가의 행정제도를 비롯해 문물제도를 통째로 바꾸고 고치자는 '경세유표'에서 오늘의 제도개혁과 지방분권의 논리를 찾아야 하고, 상하 모든 관리들이 청렴한 공직자윤리를 회복하고 애민과 봉공(奉公)해야 한다는 '목민심서'에서 부패와 타락을 막을 논리를 찾아야 한다. 또 '흠흠신서'에서 억울함이 없게 만드는 진정한 법철학과 인명(人命)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평생의 언행 내가 기록해 내 묘지문으로 삼는다
아무리 인간과 학문이 걸출했던 다산도 유배에서 풀려나고는 자신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했다. 그리고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필생의 파란과 곡절, 영광과 오욕을 조용히 정돈했다. 살아서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묘지명을 통해서였다. 그것도 회갑이 되는 해에 썼다.
바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내 일생의 기록은 내가 챙겨야지. 내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해서 내 무덤의 묘지문(墓誌文)으로 삼는다. 정말 나 같은 죄인의 글을 누가 새겨줄 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묘지(墓誌)에 새길 글자는 이렇게 남기고 싶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보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을 쓴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산은 왜 스스로 묘지명을 썼을까? 무덤 속으로 안고 들어갈 자신의 일생을 자처해서 쓴 것은 무슨 심사였을까? 기나긴 유배의 서러움과 고초 속에서 한없는 못 다한 말과 억하심정을 풀어내려고 일까? 일생을 박람강기와 실사구시로 외길을 걸었던 자신을 알리고 싶어서 일까? 아니다. 후세에 경책(警策)으로 남겨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였을 게다. 우리는 이 뜻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세상을 함께 굽어보고 살펴본 위대한 실천가이자 경세가 다산의 묘지명은 참 많은 생각을 곱씹게 만든다. 유배에서 풀려나 회갑년이 되던 해 다산은 자신의 인생 60년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죄인이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뉘우침으로 점철되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자기가 신뢰받았던 정조(正祖)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유배의 세월이었건만… 이 기나긴 유배가 끝났는데 다산은 왜 뉘우침을 먼저 꼽았을까? 다산이 뉘우친 죄라면 어떤 죄였을까? 자신의 신념과 학문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은 죄일까? 학문과 실용에 남다른 예지력을 가진 임금을 최측근에서 보좌해 사랑을 독차지하고 출세가도를 달린 죄일까? 아니면 시대가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때를 잘못 만난 죄일까?
무슨 죄일지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안다. 다산의 속 깊은 마음과 뭇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백성들의 곤궁함과 아픔을 누구보다 가슴아파 했고 그 해결을 위한 통찰과 성찰에 누구보다 마음 씀이 깊었던 다산! 그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부지런히 땀흘려도 죄 없이 착하기만 해서 날로 궁핍해져 가는 많은 국민들은 물론 세상 경영에 한 몫한다는 사람들조차도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경영하고(經世) 국민을 구제하기(濟民)가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하여 몸소 실천하고 고초를 감내한 위대한 선현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인심이 강퍅해지고 세상살이가 피폐해져 간다. 이즈음 정다산 선생의 속뜻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은 왜인가? 그만큼 시절이 어렵고 곤궁할 때에는 현인과 달사에 대한 간절함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눈빛이 맑고 선했으며 가슴 따뜻한 어른이자 스승이었던 다산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 편 글로 묶였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허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
허나, 누구도 이끌어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몸으로 증명하여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랴만,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들어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자찬묘지명’ 마지막 부분이다. 스스로 경계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위대한 성취 뒤에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집념
다산은 18세기의 대표적인 실천지식인이다. 경학자이자 예학자, 목민관이면서 교육자이자 사학자, 그리고 기계토목공학자, 지리학자, 의학자였다. 그 위대한 다산의 성과 뒤에는 '천재성'이 아니라 '과골삼천(踝骨三穿)'이 있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정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40세 때부터 기나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57세에 본가로 돌아오기까지 20년 가까이를 힘든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좌절은 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귀양지에서 책상다리로 18년을 앉아 책을 읽고 쓰다가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뚫렸다. 그렇게 노력을 했고, 귀양이 풀려 고향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자신이 정리한 232권의 경집(經集)과 260여 권의 문집을 들고 왔다.
다산은 1818년 9월14일 해배되기 직전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유배지 다산을 떠났다. 기나긴 18년의 유배살이를 마치고 쉰일곱의 나이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인 1819년 다산은 '흠흠신서' 30권을 끝내며 자신이 호칭했던 대로 '일표이서'라는 경세학의 대저서들을 이룩했다.
나는 일생동안 육경과 사서로 나의 몸을 닦아왔다. 그리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렇게 일표와 이서를 지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육경사서와 일표이서로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내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다. 나의 이런 견해를 하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저 훨훨 타고 있는 하나의 횃불로 육경과 사서의 주석들, 그리고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도 좋다.
(자찬묘지명)
다산이 수많은 책을 쓴 이유는 위의 말 속에 담겨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어 학문의 뜻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어 하늘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랐다. 다양한 학문체계를 통합 발전시키고 싶었던 학자로서의 꿈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신하로서의 꿈, 유배 전에 못다 이룬 꿈을 그는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가꾸고 돌봤다.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한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1836년) 올해로 세 갑자(18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다산은 회갑을 맞아 파란곡절의 삶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리해 남겼다.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살펴보면 좀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통상 문집에서는 그 문집 주인공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 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산의 경우에는 그 묘지명을 자기 자신이 써 '자찬묘지명'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라. 이 글은 남이 내 생애를 정리하고 평가하지 않고, 내 스스로 정리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다산이 그렇게 자신이 썼다는 점을 밝힌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묘지명이란 본시 죽은 자를 위해 다른 사람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자신이 썼다고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과거는 마치 어제와 같은데, 다산이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육십이다. 환갑을 맞았지만 정녕 자신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 기념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좌상 앞에 앉았다. 환갑을 맞아 자신의 지나온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무덤 속에 가지고 갈, 스스로 쓰는 삶의 기록을 써나갔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다산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그는 그 기록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삶을 칭송하여 적은 글이다. 그래서 통상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써주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다산은 회갑 때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이다.
왜 스스로 지었을까? 60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여생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또 자신의 삶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왈가왈부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을 터이다. 재앙을 당한 자신의 삶이 잘못 알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다산이 묘지명을 스스로 쓰겠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남들이 쓰는 묘지명의 한계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 예찬이 앞서다 보니 거짓된 내용으로 꾸며지는 극단적 폐단까지 낳았기 때문이다.
이름과 가계 등 내용 일부만 바꾸면 어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비슷비슷한 묘지명은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듯 생명력 없는 뜻이 담긴 죽은 글을 무엇하러 남긴다는 말인가. 이런 무의미하고 상투적인 허례를 다산이 용인할 리 없다. 때문에 아예 자기 자신이 묘지명을 쓰고자 했다. 남들의 허황된 찬사나 공연한 추임새를 다산의 자의식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반듯하고 또렷하게 기록하려는 냉철함이 자찬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내가 역사에 무슨 큰일을 남겼다고 남에게 묘지명을 받겠는가 하는 겸손한 생각이기도 했고 자신이 영위한 삶과 행적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찬묘지명을 썼던 다산이 다른 선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그의 처지 때문이다. 환갑에 이르러서야 유배지에서 돌아왔건만 다산을 다독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묘지명을 기대하는 것마저도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 사방이 두려운 듯 신중해야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은 찾아온다. 대개는 그 무게와 엄중함에 짓눌려서 적당히 외면하거나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만 다산은 그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 반생 가까이 흘려보낸 삶이 억울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그런데도 방대한 저술활동을 집요하게 소개하며 그 이후에도 꾸역꾸역 살아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그렇게 신산스런 길을 지나왔음에도,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원망도 냉소도 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자찬묘지명'은 글의 성격이 묘하다. 자서전도, 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한 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자 할 때 곧잘 죽음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럼에도 '자찬묘지명' 하면 마치 정약용의 글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다.
이런 연유는 다산의 개인사가 곧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관통하기 때문이고, 다산만의 자찬묘지명 자체가 가진 독특함이 두드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듯 써내려간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또 묘비명, 곧 무덤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비면에서조차 끝내 삼켜야 했던 말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들 사이에서 맴도는 번민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다산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스스로 털어놓는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를 못 한다."
이어 자신을 책하기도 한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일찍이 방외(方外)에 몰두하며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고, 이미 장년이 되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서른이 넘어서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가 깊이 벌려졌지만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종내에는 "내 약점을 경계하고자 이 집을 ‘여유당’이라 이름 짓는다"고 기록을 남겼다(與猶堂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지은 당호(堂號)가 여유당이다. 이 호에서 다산의 마음가짐과 처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지은 이 호는 '도덕경' 구절에서 따왔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與兮, 若冬涉川), 유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猶兮, 若畏四隣)'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테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은 이렇듯 세상과 일을 대하는데 신중했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라
'학연에게 부침(寄淵兒)'이라는 편지에서 다산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詩)가 아니다.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찬미하고 풍자하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며 "뜻이 서지 않고 배움이 순수하지 않으면 큰 도를 듣지 못하여, 임금에게 미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마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능히 시를 지을 수가 없다. 너는 힘쓰도록 해라"라고 아들 학연에게 권하고 있다. 이 글에서 보듯 다산의 삶과 학문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는 핵심가치의 첫 번째는 바로 '위국애민(爲國愛民)'이다.
다산은 더불어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또 무엇에 보탬이 되는가를 스스로 물었다. 이 물음에 들어맞는 대답이 없으면 다산은 어떤 작업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 동안에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음풍농월이나 하며 자기과시에 여념 없는 시를 그는 철저히 배격했다. 시문이 아름다운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뜻과 지혜가 중요했다. 알맹이 없는 내용이나 세상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문학은 단지 쓸모없는 재주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두 아들에게 보임(示兩兒)'이라는 글에도 다산의 이런 뜻이 나타난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와 군신 및 부부의 윤리에 달려있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힘없는 사람을 건지고 재물 없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방황하고 구슬퍼하며, 차마 이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못하는 뜻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시랄 수 있다. 만약 단지 자신의 이해에만 관계된다면 이것은 시랄 것도 없다."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라고 다산은 말했다. 이런 마음이 없이는 학문도 문학도 아무 의미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메말라 가는데 제 몸만 아끼고 제 식구만 챙기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책 쓰느라 세 번이나 구멍이 난 복사뼈(踝骨三穿)
다산은 공부의 방법으로 '초서(鈔書)'를 가르쳤다. 책의 중요 대목을 베껴 써가며 읽는 방식이다.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초서를 계속 했다. 사람들이 "그 나이에 초서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났습니다. 제게 삼근(三勤; 마음을 다잡아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의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것을 얻었다.' 몸으로 가르쳐 주시고 직접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른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고사다.
자찬묘지명은 후반부에 다산이 힘들여 지은 저서를 소개하는데 상당 분량을 할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그 저서들을 한 덩이 불로 태워 버려도 좋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자부심이 결코 작지 않았다.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극진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자신의 저서를 잘 읽어주는 것을 바란다고 했을 정도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는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했다. '사(俟)'는 '기다릴 사'다. 중용 29장에 '百世以俟聖人而不惑(백세이사성인이불혹)'이라는 구절이 있다. "먼 훗날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호를 '사암'이라고 한 뜻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중용'에서 쓰인 것처럼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다음으로 문자 그대로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대에는 더 이상 뜻을 펼 수 없는 처지에 있으니 훗날 자신의 뜻을 알아줄 성인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두 가지 뜻을 다 담고 있을 수도 있다.
다산연구소는 더불어 "정약용은 당대에 뜻을 펴기 어려웠지만, 그의 많은 글은 지금까지 전해져 후대가 그의 뜻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필요한 일부만 읽는 느낌이 없지 않다"며 "그는 여전히 후대가 제대로 읽어야 할 대학자요, 개혁사상가"라고 견해를 밝혔다.
우리 것을 중시하는 꼿꼿한 줏대와 정신
다산은 '나는야 누군가, 조선 사람(我是朝鮮人)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甘作朝鮮詩)'라며 '그대는 그대의 법을 씀이 옳으니(卿當卿用法) 어리석다 떠들어대는 자 누구인가(迂哉議者誰)'라고 시로 읊었다. 조선 사람으로서의 꼿꼿한 줏대를 세웠다. 바로 일흔세 살 때 지은 시 '노인의 한 가지 통쾌한 일(快事)'에서였다.
조선 사람이 조선 시를 쓴다는데 뭐가 잘못됐는가. 우리의 고사나 지명, 방언조차도 시 속에다 자유로이 활용해 가면서 조선 사람의 정서가 녹아든 조선 색깔의 한시를 능란하게 창작했다. '장기농가, 탐진촌요, 탐진농가' 같은 연작시에는 그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그들이 쓰는 언어가 그대로 녹아있다. 이것이 다산이 말한 조선 시정신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학연에게 부침(寄淵兒)'이라는 편지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고사와 인물 전거를 폭 넓게 활용해야 중국에서도 경쟁력을 가진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곤 한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기, 고려사, 국조보감, 여지승람, 징비록, 연려실기술' 및 그밖의 우리나라 글에서 사실을 채록하고,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넣어 쓴 뒤라야 바야흐로 세상에 이름나고 후세에 전할 수가 있다. 유득공의 '십육국 회고시'를 중국 사람들이 판각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징험할 수가 있다."
우리 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입으로만 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삶의 기호는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다산은 아무리 훌륭한 학식을 지녔어도 제 것을 모르면 쳐줄 것이 없다고 나무랐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마흔 살이던 1801년 11월 23일 추운 겨울이었다. 대역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하니, 인심도 겨울이었다. 이때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 주모였다. '매반가(賣飯家)'는 밥 파는 집이다. 주모는 골방 한칸을 내줘 다산은 그곳에서 기거했다. 동문매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때가 정약용에게 가장 어려운 때였다. 아직 몸도 마음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던 때였다. 이후 서서히 도움의 손길도 나타나고 다산은 기력을 회복했다.
다산은 1803년 동짓날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썼다. 자신의 거처 동문매반가의 누추한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의(四宜)란 '네 가지 마땅함'이란 말로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뜻은 아마도 다산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무하기 위한 다짐이었지 싶다.
'사의재기'는 끝부분을 이렇게 맺었다. "겨울 12월 신축일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乾卦)를 읽었다." '건괘를 읽었다' 함은 스스로 부지런함을 다짐하는 의미다. 이처럼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의지를 다졌기에, 다산은 긴 유배기간을 빛나는 저작 등으로 지탱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다산학'이라고 지칭되는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유학자다. 성호 이익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실학자다. 수원 화성 축조에 참여한 공학자였고, 정조에게 상방검을 받은 암행어사이기도 했다. 그토록 뛰어난 재주와 능력, 드넓은 학식과 깊은 사상을 지녔던 다산은 얼마나 억울한 삶을 보냈고 얼마나 기막힌 세월을 살았던가.
그는 18년을 억울하게 유배살이를 한 다음에야 세상으로 돌아왔다. 갇혀 지낸 생을 꼽아보니 삶의 3분의 1이나 차지했다. (해배 당시 57세) 그래도 다산은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먼먼 바닷가 낯선 땅에서 그곳의 백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줬다. 또 그들이 당하는 질곡의 삶을 해방시키키 위해 한없는 애정으로 지혜를 짜냈다. 그런 다산의 대승적인 실천정신을 배워야 한다. 요컨대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를 일컫는 말을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를 일컫는 말을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를 일컫는 말을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 없어져도 그 명성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음을 이르는 말을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을 일컫는 말을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으로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음 혹은 곤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회부연(死灰復燃), 죽은 뒤에 약방문을 쓴다는 뜻으로 이미 때가 지난 후에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를 일컫는 말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를 일컫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를 일컫는 말을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를 일컫는 말을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誰(누구 수)는 형성문자로 谁(수)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誰(수)는 ①누구 ②무엇 ③옛날 ④발어사(發語辭) ⑤묻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누구 숙(孰)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람이나 어느 누구 또는 누구냐고 불러서 물어 보는 일을 수하(誰何), 아무개를 수모(誰某), 어두워서 상대편의 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경계하는 자세로 상대편의 정체나 아군끼리 약속한 암호를 확인하는 사람을 수하자(誰何者), 아무아무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을 수모수모(誰某誰某),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랴 라는 뜻으로 남을 원망하거나 꾸짖을 것이 없다는 말을 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구도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수왈불가(誰曰不可), 얻고 잃음이 확실하지 못한 형편을 이르는 말을 수득수실(誰得誰失),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녹사수수(鹿死誰手), 어느 누구도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는 말을 막감수하(莫敢誰何), 누구들이라고 드러내지 않고 가리키는 말을 모야수야(某也誰也) 등에 쓰인다.
▶️ 其(그 기)는 ❶상형문자로 벼를 까부르는 키의 모양과 그것을 놓는 臺(대)의 모양을 합(合)한 자형(字形)이다. 나중에 其(기)는 가리켜 보이는 말의 '그'의 뜻으로 쓰여지고 음(音) 빌어 어조사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其자는 '그것'이나 '만약', '아마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其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키'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其자를 보면 얼기설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가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받침대를 그려 넣으면서 지금의 其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其자는 본래 '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나 '만약'과 같은 여러 의미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그래서 후에 竹(대나무 죽)자를 더한 箕(키 기)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其(기)는 ①그, 그것 ②만약(萬若), 만일(萬一) ③아마도, 혹은(그렇지 아니하면) ④어찌, 어째서 ⑤장차(將次), 바야흐로 ⑥이미 ⑦마땅히 ⑧이에, 그래서 ⑨기약하다 ⑩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정해진 시기에서 다른 정해진 시기에 이르는 동안을 기간(其間), 그 나머지나 그 이외를 기여(其餘),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그 역시를 기역(其亦), 그 세력이나 형세를 기세(其勢), 그 밖에를 기외(其外), 그 벼슬아치가 그 벼슬을 살고 있는 동안을 기등(其等), 그때를 기시(其時), 실제의 사정이나 실제에 있어서를 기실(其實), 그 전이나 그러기 전을 기전(其前), 그 가운데나 그 속을 기중(其中), 그 다음을 기차(其次), 그 곳을 기처(其處), 그 뒤를 기후(其後), 각각으로 저마다 또는 저마다의 사람이나 사물을 각기(各其), 마침내나 기어이나 드디어를 급기(及其), 어린 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을 아기(阿其), 한 달의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그믐을 이르는 말을 마기(麻其), 마침내나 마지막에는 급기야(及其也), 그때에 다다라를 급기시(及其時),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간쯤 되어 있음을 거기중(居其中), 알맞은 자리를 얻음을 득기소(得其所), 일을 일대로 정당하게 행함을 사기사(事其事), 그 가운데에 다 있음을 재기중(在其中), 마침 그때를 적기시(適其時), 그 근본을 잃음을 실기본(失其本), 절친한 친구 사이를 일컫는 말을 기이단금(其利斷金), 또는 기취여란(其臭如蘭),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각득기소(各得其所), 가지와 잎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사물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앤다는 말을 거기지엽(去其枝葉),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매우 많음을 이르는 말을 부지기수(不知其數), 어떠한 것의 근본을 잊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불망기본(不忘其本),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는 뜻으로 말만 꺼내 놓고 실행이 부족함을 일컫는 말을 언과기실(言過其實), 겉을 꾸미는 것이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게 지나침을 일컫는 말을 문과기실(文過其實), 훌륭한 소질을 가지고도 그에 알맞은 지위를 얻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부득기소(不得其所), 그 사람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 뜻으로 원한이 뼈에 사무침을 이르는 말을 욕식기육(欲食其肉), 착한 것으로 자손에 줄 것을 힘써야 좋은 가정을 이룰 것임을 일컫는 말을 면기지식(勉其祗植), 미리 말한 것과 사실이 과연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을 과약기언(果若其言),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성품 따위가 옥과 같이 티가 없이 맑고 얌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여옥기인(如玉其人), 용이 그의 못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영걸이 제 고향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을 용반기연(龍返其淵),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방법을 그릇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선실기도(先失其道) 등에 쓰인다.
▶️ 非(아닐 비, 비방할 비)는 ❶상형문자로 새의 좌우로 벌린 날개 모양으로, 나중에 배반하다, ~은 아니다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非자는 '아니다'나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非자를 보면 새의 양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非자의 본래 의미는 '날다'였다. 하지만 후에 새의 날개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에서 '등지다'라는 뜻이 파생되면서 지금은 '배반하다'나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飛(날 비)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非(비)는 (1)잘못, 그름 (2)한자로 된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잘못, 아님, 그름 따위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그르다 ③나쁘다, 옳지 않다 ④등지다, 배반하다 ⑤어긋나다 ⑥벌(罰)하다 ⑦나무라다, 꾸짖다 ⑧비방(誹謗)하다 ⑨헐뜯다 ⑩아닌가, 아니한가 ⑪없다 ⑫원망(怨望)하다 ⑬숨다 ⑭거짓 ⑮허물, 잘못 ⑯사악(邪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옳은 이치에 어그러짐을 비리(非理),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부정의 뜻을 가진 문맥 속에서 다만 또는 오직의 뜻을 나타냄을 비단(非但),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을 비명(非命), 보통이 아니고 아주 뛰어남을 비범(非凡),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을 비법(非法), 번을 설 차례가 아님을 비번(非番), 사람답지 아니한 사람을 비인(非人),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를 비행(非行), 불편함 또는 거북함을 비편(非便), 결정하지 아니함을 비결(非決),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 없음을 비정(非情),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을 이비(理非), 간사하고 나쁨을 간비(姦非),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그릇된 것을 뉘우침을 회비(悔非),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선비(先非), 교묘한 말과 수단으로 잘못을 얼버무리는 일을 식비(飾非), 음란하고 바르지 아니함을 음비(淫非),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님이란 뜻으로 한둘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비일비재(非一非再),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중간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을 비승비속(非僧非俗),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를 일컫는 말을 비몽사몽(非夢似夢),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말을 비례물시(非禮勿視), 모든 법의 실상은 있지도 없지도 아니함으로 유와 무의 중도를 일컫는 말을 비유비공(非有非空) 또는 비유비무(非有非無), 일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글러서 성공 못함을 탄식하는 말을 비전지죄(非戰之罪), 뜻밖의 재앙이나 사고 따위로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을 일컫는 말을 비명횡사(非命橫死),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도리를 일컫는 말을 비궁지절(非躬之節), 고기가 아니면 배가 부르지 않다는 뜻으로 나이가 든 노인의 쇠약해진 몸의 상태를 이르는 말을 비육불포(非肉不飽), 책잡아 나쁘게 말하여 공격함을 일컫는 말을 비난공격(非難攻擊), 비단옷을 입어야 따뜻하다는 뜻으로 노인의 쇠약해진 때를 이르는 말을 비백불난(非帛不煖),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늘 그러함을 일컫는 말을 비금비석(非今非昔),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을 일컫는 말을 비난지사(非難之事), 예가 아니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청(非禮勿聽), 얼핏 보기에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예에 어긋나는 예의를 이르는 말을 비례지례(非禮之禮), 들어서 말할 거리가 못됨을 일컫는 말을 비소가론(非所可論), 아무런 까닭도 없이 하는 책망을 일컫는 말을 비정지책(非情之責),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이르는 말을 비조즉석(非朝卽夕), 꼭 그것이라야만 될 것이라는 말을 비차막가(非此莫可), 제 분수에 넘치는 직책을 일컫는 말을 비분지직(非分之職), 아직 일에 숙달하지 못한 직공을 일컫는 말을 비숙련공(非熟練工), 제때가 아닌 때에 먹는 것을 금한 계율을 일컫는 말을 비시식계(非時食戒), 용이 때를 만나면 못을 벗어나 하늘로 오르듯이 영웅도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와 큰 뜻을 편다는 뜻으로 비범한 인물이나 장차 대성할 사람을 이르는 말을 비지중물(非池中物), 사물을 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이를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을 비지지간(非知之艱)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