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추석이 화요일인 덕분에 온 나라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쉬고, 회사는 뒤로 하루 더 쉬고, 그리고는 금요일이 샌드위치라 팀 단체로 휴가 내고 쉬기로 하여, 주 5일 덕에 토요일부터 다음주 일요일까지 쉬게 되었다.
추석 귀향은 이미 오래 전에 신갈에 사시는 큰 형님 댁에서 차례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중단되었고, 큰 형님 댁에 며칠씩 가 있어본들 할 일도 없기에 매년 명절날 전날 출발하여 명절날 아침 차례 지내고 아침 먹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어느새 우리집 풍습이 되어 버렸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바퀴 달리며, 주말엔 무얼 하며 연휴를 시작하나 고민 했는데, 돌아와 아침 먹고 화장실 가는데 시골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신다. 화장실이 급한데, 명절 연휴에 어찌할 도리가 있겠나 싶어, 어머니께 조의금이나 내 주세요 하니 알았다 하시면서 길 복잡하니 오지마라고 하신다.
화장실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니 파란만장 했던 옆집 할머니 생각이 스쳐가며, 같은 동네, 같은 종씨(아들들이)이며, 담장너머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냥 조의금만 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때마침 추석 앞쪽으로 휴일이 길어 귀향길이 덜 복잡하다고 하니, 토요일에 내려가 일요일 장사 지내고 곧바로 올라오면 역 귀향 길이니 막힐 일도 없을 터이다. 또한, 매년 추석날 신갈에서 차례 지내고 서울 집에 식구들 내려놓고 혼자서 가던 늦은 귀향도 올해는 큰 딸애 시험 때문에 못 가게 되었으니 겸사겸사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토요일 오전의 추석 귀향 길은 텅 비어 있어 높고 짙푸른 하늘 만큼이나 시원하고 가슴이 설레 였다. 명절 귀향 길인데, 평소 주말보다도 더 빨리 달려가 고향 집에 도착하여 옆집으로 문상을 가니 고인 옆에서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신다.
명절을 앞두고 돌아가셔서 그런지, 상가 집이 썰렁하다. 간밤에도 문상객들이 다녀 갔고, 또, 둘째 날 오전이니 더 그럴지 모르겠다. 문간방에 동네 노인들 몇 분이 앉아있고, 바깥 마당에 좀 젊은 동네 아저씨들, 형님들 몇이 있을 뿐, 늘 그렇듯이 고향의 적막함이 묻어 나온다.
고향의 들녘은 잘 익은 벼 이삭이 황금 빛으로 출렁이며 풍요로움을 말해주고 있다. 동네 집집마다 한그루씩은 있는 감나무는 어느새 주황빛 감들이 가득 매달려 있고, 분홍빛과 연한 살색 그리고 붉은빛의 감나무 잎이 뒤란을 그득 채우고 있다. 들녘을 가로질러 동네 한바퀴 돌며, 세상 뜬지 벌써 삼년이 넘은 사촌동생녀석도 들러 보고, 오랜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사촌 형님께도 인사 드리고, 집 뒤에 모신 아버님께도 미리 추석 성묘를 하니 옆집 할머니 덕분에 추석명절을 미리 보낸 셈이다.
저녁엔 고향 후배들과 마당에 만들어놓은 비닐하우스에서 술잔을 나누며 어릴적 추억에 젖어보았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온갖 추억들을 공유한 서너 살에서 많게는 6~7년 어린 동생들은 이제는 모두 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서 같이 늙어가는 장년이다.
둘째 날 – 상여를 메다
일요일아침은 구름이 잔뜩 끼어 마치 금방 비라도 내릴 듯 흐린데, 날씨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알맞은 가을 날씨이다. 동네 초상집이라도 이렇게 이틀씩 머물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명절 연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객지생활에 복잡해진 세상살이 덕분에 그간 동네 초상이라도 당일 겨우 다녀가는게 고작이었다.
고향 마을은 모두가 유씨 일가들만 모여 사는 조그마한 동네인데, 모두가 객지로 떠나가서 동네의 초상이 나면 이제는 상여를 멜 젊은 사람이 없어서 급기야 상여계라는게 만들어지고, 상사마다 한 집안에 최소 한명씩은 참여를 의무화 하였는데, 나는 막내이면서도, 천안에 사는 셋째 형에게 늘 그 짐을 부탁하였었다. 이번에 작심하고 왔으니 첫날 저녁에 문상하고 올라간 셋째 형에게는 다시 오지 말라고 전화를 하였는데, 어린 조카가 제대로 전달을 안 하여 셋째 형은 또 상여를 매겠다고 아침 일찍 도착하였다.
아홉시가 되어 관이 나오고 상여가 꾸려지고, 머뭇머뭇 상여를 멜 사람이 정해지는데, 까짓거, 나도 한번 메보지 뭐 하며 달려 들었다. 생전 처음 메는 것이니 맨 앞이 좋을지, 중간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데, 키순으로 서서 중간에 섰다. 좌우에 네 명씩 여덜명이 어깨위로 멜빵을 메고 일어나니 가뿐히 선다.
어릴 적, 동네 초상이 나면 발인전날 상여 집에서 묵직한 상여 부품들을 가져올 때면 괜시리 겁이 나고 무서웠었다. 상여 집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귀신이 나온다는 둥, 도깨비불을 봤다는 둥 여러 가지 음침한 소문들이 많이 있었다. 상여를 조립하는 과정도 복잡하여 여러 장정이 씨름하듯 완성이 되면, 빈 관을 싣고 걷기 연습부터 시작하여 상여소리 장단 맞춰 연습하고는 어둠이 내리면 평소 고인이 자주 다니던 길을 따라 구슬피 울며 정든 마을과 이별을 하였었다.
요즘은 상여도 1회용 조립식을 사용하여 장지에 가서는 태워 버리는데, 구조도 단순하여 관을 올려놓는 전체 틀과 관을 덮는 장식 틀 두개로 되어 있어 관을 올려놓고 끈으로 묶은 후 덮개 틀을 얹고 역시 끈으로 묶으면 그만이다.
상여 소리꾼은 할아버지뻘로 제법 여러 번 상여잡이를 해봤지만, 나를 비롯한 상여꾼들은 모두가 초보라서 일어는 났는데 요령이 없다. 선창에 후창도 제대로 못하고, 앞으로 뒤로 이별식도 제대로 못하고는 주춤주춤 마당을 나와 동네를 가로질러 들판으로 나간다. 이제가면 못 오는 길, 영영 떠나가는 그 길가를 뒤 돌아 보지않고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떠나는데, 옆구리 바로 옆에 누워있는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돌아간 할머니는 후처였다. 육이오 동란 때 북에서 피난 내려와서 눌러 앉았다는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모른다 했다.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옆집 할아버지는 전처에게서 2남 2녀를 두었고, 이 할머니에게서는 나보다 두 살 많은 아들과 나보다 두 살 어린 딸을 두었다.
어릴 적,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나이차이가 많지 않은 전처 소생 큰 아들 댁 내외와 함께 살면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눈뜨면 오로지 일만하는 할머니가 늘 불쌍해 보였었다. 나이가 들면서 왜소한 체구는 점점 더 작아만 지더니 머리가 희기도 전에 허리가 굽어서 걷는 모습이 흡사 고릴라처럼 보였다.
팔자가 사나우면 자식복도 없다더니, 아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객지로 나가 일찍부터 잡다한 기술을 배우며 돈벌이에 나서더니 방위를 마치고는 대퇴부에 무슨 염증인가가 생기더니 다리하나가 짧아지면서 2급 장애인이 되고, 급기야는 정신 이상자가 되어 정신병원에서 십여 년을 보낸 후, 어머니 임종을 며칠 앞두고 귀향을 하였다.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기 전에 눈맞아 동거를 하더니, 아들을 얻었으나 생활고를 못 견디고 부인은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떠났으니, 그 아들녀석은 또 다시 이복 큰아버지 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고,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는 올 여름에 장가도 갔다. 박복한 딸 역시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가 어려운 여공생활을 전전하다가 시집을 갔으나 신랑의 돈벌이가 시원찮아서 홀어머니에게 제대로 효도도 못하며 살아왔다.
나이가 들어 허리는 90도로 굽어서 거의 네발로 다니기를 몇 년여 하시더니, 올해는 그나마 거의 누워서 지냈다고 한다. 살기가 힘겨운 딸은 한 달에 한번씩 내려와 어머니 목욕시키고 따뜻한 밥 지어드리는 것으로 겨우 도리를 다하더니, 어머니 가시는 길에 그렇게 서럽게 운다.
나처럼 처음으로 동네 초상의 장사 길에 따라 나선 동갑내기 관식이가 중간에서 지가 멘다고 하여 나는 반만 메었지만, 수 십년 담장너머 살던 이웃할머니 가는 길에 그래도 조금은 성의를 보였다는 위안을 삼았다. 셋째 형은 기왕 온김에 일이나 한다고 하더니, 합장묘 파 헤쳐서 전부인과 나란히 누워있는 할아버지 내외를 꺼내고, 석관으로 세 칸짜리 방 새로 만들고, 수십 년 지난 할아버지 내외와 이제 막 그 옆으로 돌아간 고인을 옮기고 흙 덮고 다지는 일을 도맡아 한다. 평생 흙 한번 손에 안 대고 사는 이학박사인 형이 땀을 줄줄 흘리며 세상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고 있는데, 까맣게 그을리며 농사일에 이력이 난 동네 형들과 아저씨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누구 일 잘한다는 빈 소리만 하는 모습에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였다. 근래 들어 천주교 성당 일에 열성이더니 궂은일에 나서는 형이 고맙고 감사하였다.
관이 해체되고 고인이 흙으로 돌아갈 적에 그 딸은 목놓아 울고, 어느새 시집갈 나이가 되어 보이는 딸의 두 딸은 엄마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 하는데, 생전 못 본 얼굴들이니 외할머니 가시는 길이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평생 고생만하며 구박만 받아온 어머니께 해드린게 없다며 울부 짓는 딸 옆에서 이복언니가 또 구슬프게 운다. 나 어려서 매일 나를 업고 다녔다는 그 고모는 시집가기 전 계모를 얼마나 구박하였는지, 이제 가시는 모습을 보니 후회가 막급 하다며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셋째 날 – 추석 차례길
추석 귀향과 귀경은 대단한 행사인데, 옆집 할머니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야말로 단숨에 귀향과 귀경을 마쳤다. 귀경 길엔, 오이농사 하는 가전리 사는 태환이가 꼭 보고 가라는 전화에 친구의 오이 하우스에 들러 오이농사 얘기도 듣고, 미리 따 놓은 오이를 한 보따리 얻어왔다.
올해는 애들 중간고사와 추석 연휴가 겹쳐서 고민 끝에 사생결단식으로 공부하는 고1 딸애는 집에 두고 추석 명절을 지내러 가기로 하였다. 명절 때면 더 외로워지는 장모님은 덕분에 덜 외로웠겠지만, 오랜만에 시골에 계신 할머니도 뵙고 또래 사촌들도 보는 낙이 없어졌으니 딸애의 투정이 컸다. 중간고사 끝나면, 꼭 시골에 데려달라는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하고는 중간고사가 일찍 끝난 아들녀석과 셋이서 신갈에 있는 큰 형님 댁을 향하는데, 집에서 나온 지 40여분 만에 도착을 하였으니 두 번째 추석 길도 싱겁게 끝난 셈이다.
어머니와 4형제의 식솔이 모이는 명절 때는 제법 집안이 바글대었는데, 큰조카들이 하나 둘 시집을 가고, 우리 딸과 셋째 형 큰딸이 중간고사 핑계로 안 오니 명절분위기가 좀 썰렁했다. 어부인과 형수님들 4분이 모여 지지고 볶으니 두어 시간 만에 차례준비 끝나고, 올해는 송편을 안하고 방앗간에 맡겼다니 오후 두시에 모든 게 끝났다.
명절 증후군 걱정되어 뭘 도와주려 해도 할 일이 없다. 워낙 부지런한 큰 형수가 차례상 준비를 대부분 해놓고 부침이랑 전등의 음식만 나중에 하니 사실상 큰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규격화된 차례음식도 많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할 일이 없어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녀석 끌고 나가 동네 약수터로 해서 뒷동산에 올라 땀 흘리고 돌아왔다. 고향으로 추석 명절 세러 갔으면, 지금쯤 친구들과 지난시절 얘기하며 추억에 젖고, 세상 살아가는 얘기로 정신이 없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넷째 날 – 차례도 못 지내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차례상을 준비하는데, 명절 전에 초상집 문상 다녀온 이는 조상께 차례 지내면 안 된다면서 나보고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하여 옷 갈아입다 말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럼, 명절 전에 돌아가신 분은 장례도 못 치르냐고 따지니, 옛날엔 그래서 명절 전에 초상나면 쉬쉬하며 알리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죽는 것도 서러운데, 날짜를 잘못 잡아 죽으면 제대로 저승길도 못 가겠구나 생각하며 고민하는데, 행여 자손들에게 안 좋은 일 생길까 봐 그런다는 큰형수 말씀에, 어머니께서도 올해는 구경만 하라 하시니 그러기로 했다. 어차피, 형체도 실체도 없는 조상에게 절하고 영혼의 평안을 구원하는 것이나, 죽은 사람 영혼을 달래고 영면을 기원하며 장례행사에 참여한 것이나 다 실체가 아닌 영적인 것이니 그냥 순응하자 생각하고는 막내의 아들이면서도 집안의 유일한 남자인 아들녀석이 나 대신 차례를 지내는 동안 옥상에 올라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신선함으로 위로를 삼았다.
나는 문상하고, 상여 조금 멘 것이 고작이지만, 무덤 속으로 들어가 수 십년 된 시신을 만지고, 고인을 직접 들어 안치를 하고 뒷수습을 다한 셋째 형은 큰 형수의 말씀에 버럭 화를 내며 인간이 달 나라를 다녀 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미신을 따르냐며 정색을 한다. 그러고는 정장을 하고는 차례를 다 지냈다.
추석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이 전래의 풍습이지만, 고향 떠나 정착한 이들의 차례 후 성묘 길은 추석 전 귀향보다도 더 힘들기에 대부분 포기하고는 오히려 처가 집으로 향하는 것이 새로운 풍습이다. 명절날 차례를 지내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성묘하고 인근에 있는 처가 집에 다녀오던 큰형님은 두 딸 출가 시킨 후로는 명절날 오후 딸과 사위들 기다리는 낙으로 살아간다. 오래 전에 장인 장모 돌아가신 둘째 형네는 사는 곳이 울산이라 내려가기 바쁘고, 셋째 형네는 차례 끝나면 의례적으로 공주 처가 집으로 향한다. 장모를 모시고 사는 나만 여유가 있는 셈이다.
추석의 의미는 한해의 결실이 풍요로움에 조상께 감사를 드리는 행사이지만, 이제는 한해동안 흩어져 살던 일가가 어렵게 모이는 일년에 두 번 있는 행사중의 하나이다. 그 모이는 장소가 고향이면 친구들도 만나는 행운이 주어지는 추석은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오곡 백과가 결실을 맺는 풍요로운 들녘이 아름다운 명절이다. 그런 추석을 삭막한 도회지에서 우리 식구들만 만나서 하루 밤 회포를 풀고는 또 뿔뿔이 흩어지는 의례적인 명절이 되고 있음이 아쉽다.
차례 지내고, 아침 먹고, 그리고는 차와 과일도 나누고는 울산으로, 그리고 천안으로 부지런히 떠나고 나니, 할일 없는 우리식구도 미적미적 짐 챙겨 출발하여, 또 40여분 만에 서울 집에 도착하였다.
다섯째 날 – 북한산을 오르다
명절날 할 일 없기는 서울에서 명절을 지낸 이들 대부분 그런 모양이다. 올해 처음 서울에서 차례를 지냈다는 친구 덕회가 할 일 없다며 산에나 가자 하여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가 오랜만에 도봉산이나 가자고 약속을 하였다.
남들은 귀경전쟁을 치르느라 누구는 아직 일어나지도 못했고, 누구는 새벽부터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짜증스러운 체증에 시달릴 때, 가벼운 차림으로 등산화만 신고는 집을 나섰다. 모자랑 간단한 짐을 가져갈 배낭을 찾으니 마땅한 모자도 배낭도 없다. 지난 여름 수락산 등반 다녀올 때 모두 잃어버려서 그런 모양이다. 가면서 모자나 하나 사야겠다 생각하며 오랜만에 짙푸른 하늘 바라보며 출발을 하였다.
도봉산을 가자 했는데, 전철을 타고 가는 중간에 덕회가 전화로 진로를 바꾸자 해서 수유역에서 내렸다. 도봉산은 명절을 맞이하여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앞 사람 엉덩이만 바라보며 등산을 해야 한다며 호젓한 수유리 코스로 해서 북한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수유 역에서 마을버스타고 아카데미하우스 옆에서 내려 북한산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싸한 가을냄새가 가득하고 짙푸른 하늘과 눈부신 태양빛을 가려주는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나있는 등산로엔 친구와 나, 그리고 가끔씩 스쳐가는 등산객 뿐이었다. 20여분 올라가 처음 쉬며, 배낭 그득 먹을 것을 싸온 친구랑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오이 한 개씩 먹으며 잠시 땀을 식히고, 그리고는 또 다시 오르며 세상사를 나누었다. 경사가 급하지 않고, 시원한 그늘로 이어지는 코스로 30여분을 올라가니 곧 진달래 능선이 나오고, 제법 사람들이 북적 인다.
가벼운 등산을 하기로 하였기에 목표를 대동문으로 하여 하산 길은 우이동쪽으로 하기로 하여 올라가는데, 의외로 대동문이 너무 가까이 있다. 시간을 보니 11시 반이라서 점심 먹기도 이르고, 아직 하산하기에는 체력이 남아서 다음 코스로 북한산성을 따라서 문수봉 쪽으로 가서 정릉쪽으로 내려 가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북한 산성 옆으로 나있는 능선길을 따라 문수봉쪽으로 가는데, 능선이라서 그런지 그늘도 없고, 햇살이 얼마나 강렬한지 금새 얼굴이 벌겋게 타오른다. 중간에 모자 파는 가게가 없어 모자도 없이 올라 왔는데, 햇살이 뜨겁고, 능선길이라 기복도 심하여 힘이 들고 배도 고파온다. 제법 높은 능선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삼각산 백운대가 정면으로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북동쪽으로 도봉산이 멀리 보인다. 남쪽을 바라보니 형제봉이 저 아래 보이고, 문수봉이 서쪽으로 보인다. 그늘을 찾아 덕회가 싸온 김밥을 한 줄씩 나누어 먹고, 미리 깎아서 담아온 배도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시며 크라운 샌드도 곁들이며, 꼼꼼히 준비해준 친구 어부인의 마음을 느꼈다.
점심을 먹고 능선 따라 조금 내려가니 성문이 나오는데, 대성문이라 써있고, 성문 아래로 하산길이 보인다. 보니, 형제봉으로 하여 국민대쪽이나 정릉쪽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이다. 체력으로는 문수봉까지 충분히 가겠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워 무리하지 않고 하산하기로 하였다. 작년엔 저아래 형제봉 오르고도 힘이 들어 헐떡였는데, 이제는 문수봉 정도는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간의 아침운동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대성문에서 정릉 매표소로 내려 오는 길은 의외로 길고 경치가 뛰어나서 하산코스로는 참 좋다고 얘기하며 내려오는데, 중간에 잠시 두 번 쉬고 두시간이 넘게 걸렸다. 재작년 형제봉에는 못 올라가고, 그 밑에 있는 넓적한 바위에 앉아서 도시락 먹으면서 발 아래 끝없이 펼쳐지던 단풍 숲 바라보며 넋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 단풍 숲속으로 해서 하산한 셈이다. 하산하여 매표소 지나기전의 휴게소에서 계곡을 바라보며 먹은 파전과 막걸리 한잔은 6시간의 산행 피로를 금방 풀어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산이 좋아 선인들의 요산요수를 따라 간다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가을의 초입에서 알싸한 가을공기 가득 채우며 친구와 인생을 나누었던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여섯째 날 – 아들과 영화보기
남들은 중간고사가 며칠 안 남아서 추석 연휴기간에도 공부하느라 여념 없는데, 추석 전에 시험 끝난 아들녀석은 한 이틀 실컷 놀고는 잠시도 틈을 안주는 엄마의 등살에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다. 녀석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컴퓨터 게임 아니면 영화보기이기에 재량휴일이라는 목요일 조조로 영화를 예매하여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6시 50분에 학교 버스를 타고 가는 딸애는 가방 챙겨 나오다 말고 머리 감고 학교 간다고 우기는 바람에 버스는 놓치고, 하는 수 없이, 아들과 딸을 태워서 딸애 학교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와 코엑스몰에 있는 메가 박스 영화관엘 갔다. 여름방학 내내 아들과 어부인은 툭하면 영화 보러 갔지만, 나는 이 동네 이사온후론 처음이다. 지하에 차를 대고, 지하에서만 오가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 하다. 극장이 16개나 있는데, 인터넷으로 예매를 한 이들을 위해 기계식 매표소가 십여 개가 있어서 기다릴 필요도 없이 표를 받아서 바로 극장에 들어갔다.
극장수가 많은 만큼 좌석수도 적은데, 공간이 적은 만큼 음향 시설이 떨어진다. 집에서 편안히 비디오 보는 대신 극장을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지만, 새로운 영화를 빨리 보는 것 외에 넓고 깨끗한 화면 못지않게, 웅장하고 섬세한 음향을 즐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 일진대, 고음이 쨍쨍거리며 귀만 멍하니 아마도 요즘 젊은 애들의 취향에 맞춰서 그런지 모르겠다. 아들의 말로는 이곳도 2층에 있는 상영관은 좌석수가 적어서 그렇다고 한다.
녀석은 웬만한 신규프로는 모두 섭렵한지라 볼만한 영화가 없다며 터미날을 예약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톰 행크스 주연이라기에 내가 좋아 하는 액션쯤 될 거로 생각하고 따라 갔는데, 완전히 코믹 영화여서 더 실망이 컸다.
이름도 없는 조그만 나라에서 미국을 방문하는데 갑자기 나라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여권과 비자가 말소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국제 미아가 뉴욕공항에서 장기 체류하며 겪는 코미디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거만과 우월성이 무척이나 눈에 거슬렸다.
일곱째 날 – 어부인과 영화 보기
명절 연휴에도 자식들 교육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어부인이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다며 요즘 연인이라는 영화가 인기라고 하여 부랴부랴 밤 늦게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는 금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또 영화를 보러 갔다.
연휴 때 TV 영화로 와호장룡과 영웅이라는 중국영화를 보았는데, 장쯔이가 여자 주연과 조연으로 나온 영화이고, 영웅은 장예모가 감독한 영화인데, 연인은 장예모 감독에 장쯔이가 여자 주연이다. 어부인은 중국영화를 아주 싫어 한다. 특히, 황당무계한 무술과 작위적인 설정들이 비 현실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웅은 그 장대한 스케일과 황당한 설정보다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설과 상황전개가 억지 끼워 맞춤 같아서 싫다고 한다.
그래도, 볼만한 영화가 없고, 주제가 사랑이라고 하니 극장에서 보면 좀 다르겠다 싶어 갔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좀더 넓은 극장인데, 역시 화면크기와 음향이 어제보다는 한결 나았다. 그래도 역시 소극장이라서 그런지, 십 여년 전 용산의 2류 극장인 성남극장에서 보았던 브레이브하트의 그 장쾌한 사운드보다도 떨어진다.
기나긴 세월의 기다림과 희생적이지만 이기적인 사랑보다는, 겨우 3일이지만 열정이 있고 진심으로 배려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그래서, 정인보다는 연인을 따라가는 서글픈 사랑이야기가 웅장한 가락과 화면 가득한 숲, 대나무 숲, 드넓은 들꽃, 그리고, 샛노랗고 검붉은 가을의 색채가 차가운 눈보라로 바뀌는 허무로 끝을 맺는다. 황당한 무술은 여전하여도, 장예모 감독의 섬세함과 수준 높은 촬영기술이 돋보였다. 사랑을 갈구 하는 표정들, 중국 특유의 서정적인 음악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길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추석, 한가위 명절 연휴와 휴가를 정신없이 보내고 또 주말이다. 갑자기 차가워진 가을은 마치 늦가을, 초겨울처럼 을씨년스럽지만, 아직 황금 빛 들판은 풍요로운 추수를 기다리고 있고, 깊어 가는 가을이 주는 넉넉함과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가을의 풍성함으로 모든 이들에게 넉넉함과 행복한 가을 추억이 가득채워지기를 기원해본다.
첫댓글늘 그렇지만 초우의 글을 읽노라면 내가 초우인 양 그 날 그 날의 모습이 떠오르네..._음머나 그럼 나 남잔가 초우가 여잔가??? ㅋㅋㅋ-...일주일 동안 여유롭고 바쁘기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그랬군. 난 정신없는 아니 정신은 있었는데 손과 발이 넘 여유없이 보냈는데...부러워라.
그나마 나도 터미널은 이사하며 바꾼 DVD홈시어터 덕에 다운 받아 연결한 아들들과 극장 절반 느낌으로 봤는데-초우 말 대로 완죤 만화더만-, '연인'은 나도 보려던 영화라 조금 여유되는 대로 극장에 가서 볼 예정. 작년엔가 본 영화처럼 아름다운 풍경 가득 보고말 거 같은 예감이지만 그래도 함 봐야지...
첫댓글 늘 그렇지만 초우의 글을 읽노라면 내가 초우인 양 그 날 그 날의 모습이 떠오르네..._음머나 그럼 나 남잔가 초우가 여잔가??? ㅋㅋㅋ-...일주일 동안 여유롭고 바쁘기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그랬군. 난 정신없는 아니 정신은 있었는데 손과 발이 넘 여유없이 보냈는데...부러워라.
그나마 나도 터미널은 이사하며 바꾼 DVD홈시어터 덕에 다운 받아 연결한 아들들과 극장 절반 느낌으로 봤는데-초우 말 대로 완죤 만화더만-, '연인'은 나도 보려던 영화라 조금 여유되는 대로 극장에 가서 볼 예정. 작년엔가 본 영화처럼 아름다운 풍경 가득 보고말 거 같은 예감이지만 그래도 함 봐야지...
홈 시어터까지 설치를 하였다고....다시한번 축하!!!!~흐미 부러워라~ 연인은 꼭 봐봐...나처럼 조조로 보면 둘이서 8천원이더구만...
난 언제나 이렇게 여유롭게 지낼까 초우가 부러우이 이가을이 가기전 한번 만나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