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2월25일, 호산나교회, 사순절 둘째 주일 설교, 히11:1-3, 실상과 증거.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실상’이라는 말은 본래 ‘아래에 서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아래에 있다는 것은 볼 수 있는 것의 제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지만 다른 그 이상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시려면 현재 보고 싶어도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을 가지고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견고히 서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실제로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계시 되고 선포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과 확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신앙성숙도 깊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방으로 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비난을 받으며 거절당할 때조차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시62:1-2),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찬양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더욱 성숙하고자 한다면, 그 첫 디딤돌로서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 건실한 믿음으로 오랜 기다림 속에도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는 여러분이 되어 지시길 축복합니다.
1, 믿음의 실상은 성도의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실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장차 있을 그것들의 성취를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은 곧 미래에 이루어질 사실을 현재의 시점에서 확보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곧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도 큰 확신이 있으므로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성취될 일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며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몽상가처럼 막연한 나를 현실과 미래를 구별치 못하는 철없는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약속 속에서 미래의 축복을 현재에도 누릴 수 있겠끔 은혜의 특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약속된 미래를 현재에서 누릴 수 있게 해줍니다. 즉 현재를 이성의 눈보다 더 객관적으로 살피며, 더 본질적으로 평가하는 힘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은 미래의 모습을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의 삶은 확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도의 현재적 삶에 대해 교훈하시며 (마7: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속에는 믿음을 가진 자는 당연히 이 세상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열매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 갖고 있는 특성입니다. 곧 믿음이 있는 자는 미래에 대한 확실함이 있기에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당연히 내일에 대한 염려와 현실에 대한 불평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현재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즉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비록 현재 가진 것이 없어도, 풍요롭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성과 도덕과 세상적 가르침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유익을 줄 수 없는 대신, 믿음은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맛보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주는 성도만의 특권임을 바라고 믿으시길 축원을 드립니다.
2, 믿음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선택과 신뢰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에 대해서 묻는 물음에 주일학교 학생들도 큰 소리로 암송하여 답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면 그것을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면밀히 검토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본 절에서 믿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믿음이란 현재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곧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선택과 보지 못했지만 이루어진다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영적인 것 육신적인 것 분별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현재의 신뢰와 이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까지도 믿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곧 교회는 다니지만, 동정녀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다시 오심, 그리고 영생 같은 일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성적,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 믿음을 끼워 맞추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그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가기에 믿음에는 모험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부디 성도 여러분 모두 믿음의 정의를 마음 깊이 새기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 믿음의 용사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믿음과 자기 확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님)
다시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구절로 믿음에 대한 가장 합당한 설명입니다. 더욱이 이 설명은 마치 간결하고 간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암송할 정도로 성도들에게 익숙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이러한 정황과 걸맞지 않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이 설명을 암송할 정도로 많이 들었던 성도들이 이 말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그저 앵무새처럼 이 말씀을 암송할 뿐 거기에 대한 해석이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한 성도가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마다 나와 ‘하나님 반드시 성공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또 어떤 남자 청년은 ‘저 자매와 반드시 결혼할 줄 믿습니다.라고 매일 한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또 어떤 여 성도는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할 줄 믿습니다. 라고 백일 특별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기도에 대한 모든 대답이 나왔습니다. 사업하던 성도는 경제 침체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자매는 다른 형제와 결혼했고, 그 아들은 적성을 살려 컴퓨터 프로게임머가 되기 위해 수능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의 성공과 한 자매와의 결혼과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기도했던 이들에게 과연 믿음이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아시다시피 기복적인 신앙에 익숙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섬겼으니, 하나님은 무조건 내가 바라는 것을 해주실 것이다’라는 전제 속에서 믿음을 생각합니다. 내가 매일 철야 시도와 새벽 기도와 특별 기도를 했으니, 내게 만큼은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곧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입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증수표를 받아내는 것이 진정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까? 만약 이대로 이루어졌다면? 진짜 증거의 삶일까요?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전제가 완전히 거꾸로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욕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움직여보려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념이나 자기 확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이나 자기 확신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나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앙의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나를 빼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믿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곧 믿음이란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가나안은 찾아 떠나고, 아들을 낳고, 낳은 아들을 스스로 번제물로 드렸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약속을 갖은 고생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성공 예감은 자기 확신이나 신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기 만족적 강한 기대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미래에 대한 세상적, 육신적 성공을 보장하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강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삶의 모든 선택의 상황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사람을 세상이 아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부디 이를 기억하심으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지시길 축원을 드립니다.
4, 믿음의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것이고, 증거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1절)
다시 1절을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증거를 제시하며 실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시력이 나빠 사물을 볼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눈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그분의 언약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모호하며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은 타락하여 영적인 일들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대답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우리의 멀어진 눈을 다시 밝히며 영에 눈을 열어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그 결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보이는 가시적인 사실에는 눈을 감고 그 뒤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신자들에게는 비가시적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시된 미래의 일들이 모호하며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감각의 세계만을 인정하며 과학적인 증거가 확실한 것만을 받아들입니다.(진실을 회피)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하시는 일을 인지할 만한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하는 자인 것입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는 말씀이 이를 증거 해 줍니다.
실제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안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경이 없으면 조금 불편하거나, 시력을 높이는 보조 기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믿음은 그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믿음은 타락한 인간에게 진리를 보게 하는 영적인 눈으로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맑은 영혼의 눈을 소유하지 못한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심판과 고통과 좌절과 사망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영적인 일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 곧 믿음의 눈을 소유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구원의 진리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 보시길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