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차 문학기행, 시인 박인환(강원도 인제, 11/20)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목마와 숙녀” 일부 중에서.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잘 알려져 있는 시인 박인환 문학관은 인제군에서 그 고장 출신인 시인 박인환의 얼을 기리고, 시인이 집필하던 시절의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바로 옆인 인제읍 인제로 156번길 50에 박인환문학관을 건립하였다.
지난 주말에 계절은 벌써 점점 늦가을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가는 즈음에 진정한 가을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 그리고 가을 속으로 떠난 인환이 형을 만나보기 위해서 다시금 인제에 찾아 왔다.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이 문학관을 찾은 때도 2014년 11월 하순, 이맘때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문학기행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 였지만 마치 문학기행을 염두 해두고 찾아보았던 것 같은 일종의 데자뷰^인지도 모른다.
인천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새말 IC로 빠져나와 치악산입구 그린캠프식당에서 능이버섯전골로 점심을 하고 홍천을 거쳐 인제읍으로 들어와 문학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학관 입구 마당에는 박인환 시인이 마치 코트를 입고 바람을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을 지나 출입문 입구 쪽으로 시인의 대표시가 적혀 있는 문학비가 시인의 전신 부조(浮彫)와 함께 세워져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문학관 왼편 마당 끝자락에 있었는데, 최근에 이 자리로 옮겨져 온 것 같다.
인환이 형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으로 인증 샷을 하고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문화해설사가 없어서 섭섭했지만, 문학관 내부는 박인환 시인이 활동했던 장소를 중심으로 시인의 연보와 함께 그에 대한 기록들이 잘 구성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1층 전시실은 박인환 시인이 주로 창작 활동했던 1945년~1948년 사이 서울 명동의 ‘마리서사’ 주변 거리를 고증을 거쳐 리얼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시인이 직접 운영했던 마리서사 서점이며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사랑방인 유명옥, 봉선화 다방, 대폿집 은성, 모나리자, 동방싸롱, 포엠 등등...
마리서사에는 앙드레 브르통, 장 콕토 등 여러 문인들의 작품과 문예지, 화집 등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으며 김광균, 김기림, 양병식, 오장환, 정지용, 김수영 등 여러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자주 찾는 문학의 명소이자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상지이기도 했다.
또한 그 옆으론 유명옥이라는 빈대떡집을 구성해 놓았는데, 이곳은 당시 김수영시인의 모친이 충무로 4가에서 운영했던 곳이며, 이곳은 위의 문인들이 모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과 후기 모더니즘의 발전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눴던 곳이기도 했다.
그 맞은편으론 은성이라는 대폿집이 구성되어 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이명숙여사, 86년 작고)가 명동에서 1950년대~60년대에 운영하던 술집으로 문화 예술인들(김수영,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천상병 등)이 자주 이용하며 막걸리 잔 너머로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던 곳이고, 소설가 이봉구가 단골이었으며 박인환은 1956년 3월 죽기 얼마 전에 이곳 은성에서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남겼다.
여기서 시인 박인환의 연보를 살펴보자.
그는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태어난다(생가는 없어졌으며 현재 그 위치에 생가 터임을 상징하는 조형물만이 세워져 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이 머리가 좋고 영특하기로 소문이 나자,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겨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한 뒤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에 경기공립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는 영화와 문학에 빠져들어 공부하는 대신에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 전집과 시집들을 탐독하느라 밤을 새우곤 한다.
그러나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한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권유로 3년제 관립 학교인 평양의학전문대학에 들어가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의대 학업을 접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로 돌아 온 박인환은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있는 시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스무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하여 마리서사라는 간판을 걸고 운영을 시작한다.
그 후, 박인환은 마리서사의 단골인 국제신보사의 주필 송지영의 도움으로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선보이고, 이듬해에는 신천지에 시 “남풍” 등을 발표하면서 신세대 시인으로 문단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나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하 생활을 전전하며 혼쭐이 났던 박인환은 9·28 서울수복 후 경향신문사에 입사를 해서 신문사 소속 종군 기자로 활동하던 중 1951년 1·4후퇴를 맞게 되자 누구보다도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피난지에서 경향신문사의 종군 기자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등을 모아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발표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등 피난지에서도 도전적인 글들을 발표하며 기성 문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1952년 박인환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처삼촌의 주선으로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대한해운공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을 쓴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1955년 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일보에 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와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詩抄)” 등을 발표한다. 하지만 얼마 뒤 대한해운공사에 사표를 내고 한동안 시에만 신경을 쓴다.
그해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출판한 뒤, 이듬해 3월 20일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으며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묘비번호 102308), 그해 9월에는 문학을 함께 한 친구들에 의해 시비가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학관 뒤편으로는 시인의 생가 터가 있으며 지금은 생가 터였음을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박인환은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 김수영(金洙暎), 김경린(金璟麟), 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헌칠한 키에 미남인 박인환은 당대의 문인 가운데 최고의 멋쟁이인 명동신사로 통하는 댄디보이였지만, 그는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를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몹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잔 같이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보이곤 한다.
또한 수주 변영로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이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 해 10월 그의 첫 단독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이 나온다. 첫머리에 ‘아내 정숙에게 바친다’ 는 헌사가 들어 있고, 총 4부 56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대표작이 거의 다 실린다.
한때 그가 ‘신시론’과 ‘후반기’ 동인의 결성에 앞장서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기는 하지만, 이 시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를 모더니스트로 평가하기엔 거북할 만큼 서정성이 짙게 묻어난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목마와 숙녀」만 하더라도 ‘버니지아 울프’라는 낯선 외국 작가로 말미암은 이국적 분위기와 ‘목마’라는 낭만적 요소를 묘하게 섞어 슬픔에 물든 생각을 잔잔하게 흘리고 있는 서정시다.
여기서 시인에게는 인생이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며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된 뒤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양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경상도집’에 문인 몇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한다.
나애심은 노래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자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 내린다. 이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李眞燮)은 그의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낸다. 나애심은 이렇게 나온 악보를 들고 마디마디 노래를 이어간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그 노래가 바로 이런 가사로 된 “세월이 가면” 이란 시의 원본이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은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학시절인 1970년대 초에는 포크송이 한창 유행했었는데, 가수 박인희에 의해서 목마와 숙녀의 시가 낭송이 되고, 이어서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가 만들어져 히트를 치면서 마침내 시인 박인환이 세인들에 부각이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기타를 들게 되면 코드를 짚어가며 이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한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엊그제 그를 만나고 왔건만 지금도 다시금 보고 싶다 인환이 형이.....
2021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