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석담비(釋曇斐)
담비의 본래 성은 왕(王)씨이며, 회계의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혜기(慧基)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찍부터 잘 깨우친다는 일컬음으로 알려졌다. 대승의 깊은 경전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고, 노자와 장자ㆍ유교ㆍ묵자도 자못 많이 펴 보았다. 그 후 이쪽저쪽 찾아다니며 경론의 종지를 두루 궁구하였다. 고향 고을의 법화사(法華寺)에 자리 잡고 강설을 이어가니, 배우는 무리들이 줄을 이루었다.
담비는 마음이 상쾌하게 트였으며, 뜻으로 품은 것도 맑고 그윽하였다. 그런 까닭에 『소품경』과 『유마경』에서 더욱 독보적인 존재를 이루었다. 게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와 쌓아온 조예로 문장과 말재주가 높고 빛나서, 강석에서의 풍모로 당대의 존중을 받았다.
양(梁)나라 형양(衡陽)의 효왕(孝王)인 소원간(蕭元簡)과 은사(隱士)인 여강(廬江)의 하윤(何胤)도 모두 멀리서 그의 아름다운 계책에 고개 숙이고, 초청해서 강설하였다.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여남(汝南)의 주옹(周顒), 주옹의 아들 주사(周捨) 등도 모두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교를 맺었다.
천감(天監) 17년(518)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그가 지은 글과 문장은 자못 세상에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담비가 강남 지방에서 명성이 있다 하여, 칙명을 받아 10성(城)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임명장과 교지를 갖고 간 것을 엎드려 받기도 전에,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땅의 비구와 비구니들은 가슴 속에서 그의 덕을 그리워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법장(法藏)
담비와 같은 고을의 남암사(南巖寺)에 법장이 있었다. 그도 계율을 잘 지키고, 소박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왕성하게 생명을 놓아 살려주고 구조하였다. 또한 불화와 불상을 일으켜 세웠다.
∙명경(明慶)
당시 여요현(餘姚縣)에는 명경이 있었다. 담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명성이 있었다.
명경의 본래 성은 정(鄭)씨이다.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정결하며, 학업이 맑고 아름다웠다. 본래 승염(僧炎)에게 사사하다가, 다시 홍실(弘實)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스승과 제자 세 명 모두 동남 지방에서 존중을 받았다.
【論】이상을 통틀어 논하면 무릇 지극한 이치란 말이 없고, 그윽한 귀결점이란 아득하고 고요하다. 아득하고 고요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지고, 말이 없는 까닭에 말하는 길이 끊어진다. 말하는 길이 끊어질 때 말을 하면 그 참뜻을 다치고,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질 때 생각을 일으키면 그 참됨을 잃는다. 그런 까닭에 유마거사는 방장실(方丈室)에서 입을 다물고, 석가모니는 쌍수에서 침묵하셨다. 바야흐로 이치의 깊고 고요함을 아는 까닭에 성인들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만 멀고 먼 꿈의 경계는 진리와의 거리가 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꿈틀거리는 무리들[蠢蠢之徒]에게 가르침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길을 열어주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신령하고 미묘함을 빌려서 중생들에게 응하시고, 어둡고 고요함을 체득하여 신과 통하신다. 미묘한 말을 빌려 도로 가는 나루터로 삼고, 형상에 의지하여 진실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신다.
“병법이란 상서롭지 않은 도구이지만 어쩔 수 없어 이를 쓴다.5) 말이란 참된 물건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어 이를 베푼다.”
그러므로 처음 녹야원(鹿野苑)에서 4제(諦)로써 말의 시초로 삼기 시작하여, 마지막 곡림(鵠林)에서 3점(點:伊字三點)으로 원(圓)의 극치로 삼기에 이르신 것이다.
그 사이에 말과 문장을 펴신 수효는 8억을 넘어, 코끼리와 낙타가 업고 가도 다 하지 못하며, 용궁의 물이 넘치더라도 다하지 못한다. 장차 올가미를 빌려서 토끼를 잡고자 하고, 손가락에 기대서 달을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달을 알면 손가락은 치워야 하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야 한다.
경에서 ‘진리에 근거하고 말에 근거하지 말라[依義莫依語]’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교에 막혀 있는 사람들은 지극한 도란 경전의 편장(篇章)에서 극에 달한다 생각한다. 형상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법신을 장륙(丈六)의 불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모름지기 그윽하고 은미한 종지를 끝까지 통달하려면, 묘한 이치를 말의 테두리 밖에서 터득해야 한다[妙得言外]. 4무애변(無礙辯)으로 장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여, 이익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보이는 것은 법사에게 달려 있는 것이리라[示敎利熹其在法師乎].
그러므로 주사행(朱士行)은 경전을 우전국(于闐國)에서 찾아 서원하였다. 경이 불타지 않게 하여, 끝내 『반야경』으로 하여금 동쪽 낙수에서 성행케 하여, 생각조차 잊음[忘想]을 말세에 전하였다. 이어 차례로 축잠(竺潛)ㆍ지둔(支遁)ㆍ우란(于蘭)ㆍ법개(法開) 등은 모두 고상한 기개가 높고 빛나며 도의 풍모가 맑고 넉넉하여, 교화를 전한 아름다운 공덕 또한 버금갔다.
중간에 석도안(釋道安)이 제자로서 성스러운 스승 축불도징(竺佛圖澄)에게서 배움을 받았다. 도안도 학업을 제자 혜원(慧遠)에게 전수하였다. 오직 이 3대의 세상에서만은 현인이 결핍되지 않았다. 아울러 계율과 절조도 엄숙하고 밝으며, 지혜의 보배도 불꽃같이 성대하였다. 저 햇빛 같은 지혜의 남은 광휘로 하여금, 거듭 천 년 뒤에 빛나게 하였다. 저 향기 높은 땅의 남은 향기로 하여금, 거푸 염부제주(閻浮提州)의 땅을 물씬 향기가 감돌게 하였다. 솟아오르는 진리의 샘물이 여전히 흘러들어 오는 것은, 참으로 이 세 분에게 힘입은 결과이다.
혜원은 거주지를 호계(虎溪)에 국한하였다. 거꾸로 스승인 도안은 마침내 제왕과 가마를 같이 탔으니, 저 고상한 도에 비해 마치 의혹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말하고 입 다물고 움직이고 머무는 것은 오직 시대에 따라 마땅함이 있는 것이다. 네 사람의 노인이 한(漢)나라 궁실을 찾아간 것은 그들을 등용하여 간 것이다. 삼려대부(三閭大夫:屈原)가 초(楚)나라를 떠난 것은 그를 버리므로 몸을 숨긴 것이다. 불경에서는 말한다.
“만약 정법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임금과 지팡이를 지닌 늙은이의 말을 친근하게 들어야 한다.”
도안은 비록 한때 제왕과 함께 가마를 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백성들을 위하여 간언(諫言)하였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에는 아라한과에 감응하여 구름이 열리며 보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 후 형주(荊州)ㆍ삼협(三峽) 일대에서 이름이 드러난 이로는 도익(道翼)ㆍ도우(道遇)를 첫 번째로 말하며, 여산(廬山)에서 맑고 검소하게 산 이로는 혜지(慧持)ㆍ혜영(慧永)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도융(道融)ㆍ도항(道恒)ㆍ승영(僧影)ㆍ승조(僧肇)는 덕이 관중에서 무겁고, 도생(道生)ㆍ승예(僧叡)ㆍ법창(法暢)ㆍ법원(法遠)은 종사로서 건업을 이끌었다. 담도(曇度)와 승연(僧淵)은 홀로 강서의 보물을 독차지하였다. 초진(超進)과 혜기(慧基)는 곧 절동(浙東)의 성대함을 드날렸다.
비록 세대와 사람이 바꾸어 가며 융성하였지만, 모두가 도술에 있어서는 멀리 시대를 초월하여 일치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 운세의 나머지를 일으킨 것이 햇수로 따지면 거의 5백 년이 된다. 공덕의 효능의 아름다움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이를 찬양하여 말하노라.
남은 기풍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법의 물결 머뭇거렸으니
저 밝은이들 아니시면
무너지는 불법 뉘 떨쳤으랴.
축잠(竺潛)과 도안(道安)이 구슬이라면
혜원(慧遠)과 승예(僧叡)는 구슬을 꿰었다네.
굽고 뒤틀린 것 도끼로 깎고
빗긴 먼지 털고 씻어내듯
흰 실 이미 물들었어도
앞으로는 길이 변하리라.
주석
1 하도란 중국 복희(伏羲)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점의 그림을 말한다. 낙서란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점의 글씨를 말한다. 하도와 낙서는 『주역(周易)』의 근간이 되었다.
2 금상폐하란 지은이가 책을 지은 때의 황제인 양무제(梁武帝, 502년부터 549년까지 재위)를 가리킨다. 이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무제는 연호(年號)로 천감(天監, 502~519), 보통(普通, 520~526), 대통(大通, 527~528), 중대통(529~534), 대동(大同, 535~545), 중대동(中大同, 546), 대청(大淸, 547~549)을 쓴다.
3 흰 불자(拂子). 번뇌망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정한 보리심을 나타나게 한다는 뜻.
4 경전을 종류별로 모은 것.
5 병법이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여서 군자가 쓸 만한 도구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야만 쓰는 것이며,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노자』31장)
『고승전』 8권(ABC, K1074 v32, p.839c01-p.851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