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장
추몽을 비롯한 네 사람이 붉은 도를 들고 칼춤을 추고 있는 그 사이로, 붉은 혈운이 사방에 꼬리를 남기며 움직이고 있다.
혈운 속에서 바람소리가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죽음이 따른다. 오른발이 치솟아 오르자 왼발이 따르고, 무릎을 구부리며 거꾸로 잡은 도가 빛을 뿌린다.
내가 누구이고 네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죽음이 부르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일 뿐이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운공 한 번 하지 못했기에 본신의 힘을 다 사용할 수가 없다. 일 장이 넘게 나오던 도강이 반 장 길이도 채 되지 않는다.
심도는 고사하고 이기어도도 쓸 형편이 안 된다. 한 번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
"이야합!"
일휘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춤을 추듯이 일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아껴두었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거였다.
흐르는 달빛이 너무 서러워 하늘을 못 보네.
흐르는 핏물이 너무 붉어서 고개를 못 드네.
떠나간 부모가 너무 그리워 서럽게 울었다.
떠나간 형제가 너무 보고파 그 길을 따른다.
저 높은 하늘에 배고픔만 없다면
저 높은 하늘에 추위만 없다면
우리 함께 그곳으로 가자, 기꺼운 마음으로 가자.
저 깊은 하늘 구석에 우리의 터전이 있다.
그곳에 가면 뱁새가 있을 터이고.
그곳에 가면 찍새가 있을 터이다.
소령이가 있고 형수들이 있다.
터지는 분노가 너무 거세어 죽지를 못하네.
흐르는 눈물이 너무 붉어서 길을 잃었네.
아직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일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추몽이 죽었고, 한열은 말이 없다. 화인이 사라졌고, 광영은 쓰러졌다.
온몸이 칼에 잘리고 창에 찔려도 먼저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달렸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차디찬 시신이 되어 죽어갔다.
삼십 년도 되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래도 십 년은 행복하게 살았으니 그것으로 되지 않았냐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라 이런 기회가 또 온다면 다시 이 길을 선택하리라며 호기 있게 말하던 모든 형제들이 갔다.
자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정신이 아득해오고 있었다. 아직도 적은 십여 명이나 남았는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른쪽 무릎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며 땅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다.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이다."
"엄청나군, 저런 자들을……."
다섯 명이 벌이는 살육의 현장을 쳐다보던 권윤이 넋을 잃고 말았다.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단지 다섯 명의 지친 광인들뿐인데 그들에 의해 이백의 추격대가 몰살당하고 있는 것이다. 검에 찔려도 창이 박혀도 멈추지 않는다.
도를 휘두를 힘이 남아 있으면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찔러 넣고 있다. 거의 무의식중에 휘둘러진 도임에도 추격자들의 숨을 끊어놓는다.
도와 하나 된 자들의 움직임이었다. 평상시의 모든 힘을 발휘하고 있었더라면 자신도 미치지 못하는 강자들이었던 거였다.
그러나 이젠 전부 끝이 났다. 마지막 남은 가장 강한 자로 보이던 놈이 다리가 잘린 채 바닥으로 쓰러졌기에.
추격자들의 대부분이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기에 놈의 목을 취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놈만 처리하면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 저들에 의해 죽었던 아들의 복수를 마무리 짓고 돌아가면 영광스러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바야흐로 무천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십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세가들의 황금시대가.
"네놈은 나의 몫이야! 비상을 위한 제물!"
일휘를 노려보던 권윤이 검과 하나가 되어 몸을 날렸다. 영광된 세월을 가지기 위한 마지막 손짓이었다.
그러나.
막 일휘의 목을 취하려던 권윤의 검보다 더 빠른 물체가 있었다.
일 장 길이에 달하는 철창(鐵槍). 검은 철창 하나가 가공스러운 속도로 날아와, 일휘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권윤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묵창 패웅이었다.
살검 권윤을 관통해버린 패웅의 철창은 쉬지 않고 계속 날아다니며, 나머지 추격자들을 전부 도륙한 후에야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참으로 묘한 인연일세. 이런 곳에서도 만나다니 말일세."
패웅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일휘를 쳐다보았다.
서문천의 배웅을 받던 그가 거의 삼십 년 만에 고향으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무도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가정마저 팽개친 채 중원에만 머물렀는데,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특히 광풍대원들의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익히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연공도 무공도, 전부 마음먹기에 달렸던 거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을 찾기로 했었다.
해남도(海南島).
오직 검밖에 없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창술을 익혔고, 그 창술을 완성하고자 중원으로 나섰는데 그 세월이 삼십 년이 되어버렸다.
다시는 나오지 않을 양으로 마지막 중원이나 돌아보자 싶어 운남 쪽으로 왔는데 이곳에서 일휘를 만난 거였다.
"자넨 앞으로 도를 쓰지 못하겠구먼."
"이곳이 어디오."
"귀주와 운남의 경계일세."
"그렇소? ……결국 왔군."
일휘의 얼굴이 환해졌다. 운남에 왔다고 한다. 처음 목표로 잡았던 운남까지 왔고 약속을 지켰다.
지금 도를 쓰지 못하고 다리가 잘린 게 문제가 아니었다. 형제들과 약속했던 장소까지 왔다. 뒤쫓던 모든 추격자들을 물리치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사 년의 세월이 남았다. 그 세월 동안 이루어낼 것이다.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해서 반드시 하북팽가로 가고 말 테다.
미소를 짓던 일휘가 고개를 떨궜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이고, 이 곰 같은 놈을 어찌 데려가냐."
곤혹스런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던 패웅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섯 구의 강시들이 서 있었다.
"볼 텐가?"
순간 패웅의 손에 있던 창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말이 끝난 순간보다 창이 날아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마음먹는 순간에 창이 날아가는 경지.
창으로 펼치는 이기어창의 경지였다. 환영창과 유사한 경지이기는 하지만 그 공격범위가 훨씬 넓었다. 객잔의 주방에서 터득한 경지였다.
검은 기운을 머금고 날아가던 그의 창이 이쪽을 쳐다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강시들의 목을 한꺼번에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강시를 조종하고 있던 놈을 저승으로 먼저 보낸 것 때문이니까."
이미 기절하여 정신을 잃어버린 일휘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린 패웅이 그를 번쩍 들어 메더니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운남을 향했던 일행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일휘가 극적인 구조를 받고 있을 때 복건성으로 방향을 잡았던 석두와 광살조의 조장인 여풍기, 그리고 도대웅 삼 인은 마지막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마차를 버렸는지 모른다. 아마 낙양에서 도우러 왔던 그 친구들이 전부 떠났을 때부터인 듯싶다. 산을 타고 도망을 치면서 적들을 한 명씩 죽여갔다.
그 와중에 전부 일곱 명의 광풍대원들이 떠나갔다. 일행에게 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스스로 길을 나선 거였다.
죽고 죽이는 추격전 속에 결국 이곳에 도착했다. 짠 내가 물씬 풍겨오는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것을 보니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직 적들의 수효는 오십여 명이나 남아 있고 뒤쪽은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이다. 바다를 향해 뛰어들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마저도 이미 적이 막아서고 있다.
"이름이 뭔가."
여풍기의 입에서 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피곤함, 어딘가에 누워버리고 싶다는 피곤함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석두만 없다면, 먼저 간 형제들의 눈빛만 없다면, 그냥 이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무풍대의 부대주였던 하우돈이다."
석두 일행을 뒤쫓았던 자는 과거 대월산에서 광풍대원들과 인연을 맺었던 무풍검 하우돈이었다. 제갈수연의 세력인 제천맹 인물들 두 곳 중 한 곳의 인물이 그였던 것이다.
그 또한 목적이 있었다. 귀를 잘렸고, 대주인 백무천에게는 거짓말을 해야 했던 그 기억.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그 기억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섰다. 과거의 치욕을 잘라버리기 위해 놈들을 쫓고 또 쫓았다.
"큭! 그 귀의 주인이셨구먼."
그때의 기억이 났는지 여풍기가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힘을 가져보았던, 이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불과 일 년 전이었는데…….
"하우돈! 이곳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죽여야 할 거다. 만일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살아나는 경우에는 네놈을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테니까. 자, 시작해볼까."
'형님! 제가 길을 뚫겠소. 절벽으로 가시오.'
'대웅아!'
여풍기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도대웅을 쳐다보았다. 이미 혈인이었다. 온몸 가득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이래왔다. 같이 싸우다가도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적을 막으면 그를 두고 일행이 먼저 움직였다.
'너무 늦었소.'
먼저 떠난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염라국 입구에 있다는 사출산(死出山)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사출산은 이승에 있는 어떤 산보다 험한 산이라고, 혼자 넘기는 너무 힘겹다고 같이 가자 했었다.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니 각오하라고 했었다.
고통. 이미 어린 시절부터 너무 익숙해진 단어이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물리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건 고통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고생이라고, 힘든 고생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어떤 희망도, 살아야 할 목적도 없는 그런 삶이 가장 고통인 게다.
세상에서 버려진 삶이 가장 힘든 삶인 것이다.
그런 삶을 버렸다. 십 년 전에…….
이제는 편안하게 갈 수 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형님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시오. 창궁혈해천!"
석두와 여풍기를 주시하던 도대웅이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추격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는 것이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진원지기를 전부 짜내어 내공화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강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떠날 수 있는 길은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쳐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대웅을 쳐다보며 하우돈도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과거에도 겪어보았지만 정말 대단한 놈들이었다.
거의 먹지도 못하고 지금껏 쫓긴 자들인데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만일 자신이 저런 처지에 있었다면 진즉 자결을 하고 말았을 텐데.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웃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듯한 묘한 웃음. 오히려 쫓고 있는 자신들이 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표정들이다.
붉은빛을 머금은 검이 춤을 추며 길을 만들고 있다.
휘둘러지는 두 사람의 분노에 명예를 머금은 목들이 솟아오른다. 여풍기의 검이 천지를 양단하고, 도대웅의 검이 인간을 자른다.
"가시오!"
어느 결에 절벽 근처까지 왔는지 도대웅이 여풍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다 하더라도 산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실낱같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기필코……! 으아아!"
왼손을 불끈 쥐어 보인 도대웅이 몰려드는 적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기필코 살아남으라는 말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살아나서 저들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다음에, 다음에 보자.'
여풍기가 마지막 눈물을 끝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딜!"
순간 어느새 다가왔는지 하우돈이 그를 향해 두 손을 뿌렸다. 먼저 그의 손을 떠난 물건은 검이었고, 왼손에 의해 장이 발출되었다.
이미 기절해 있는 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이놈만 잡으면 놈은 절로 죽어갈 것이다.
"커억!"
등에서 느껴지는 통렬한 고통에 여풍기가 비명을 토해내며 절벽 아래로 추락해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함께 떨어져 내리는 또 하나의 물체, 힘없이 늘어져 있던 석두의 오른팔이었다. 하우돈이 날린 비검술이 스치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풍기는 그런 상황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득해져오는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정신이 돌아온 여풍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막연히 바다라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아니었다. 수많은 바위들이 이곳저곳에 솟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힘내라! 여풍기."
마지막 남은 모든 내력을 뽑아 올렸다. 순간.
"허억!"
단전 부위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하우돈의 마지막 장이 그의 단전을 흔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해야 한다. 해내지 못하면 둘 다 죽는다.'
죽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간 형제들, 그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살아나야 한다.
"이야압!"
모든 힘을 짜낸 여풍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바위를 향해 일 장을 날렸다. 곧이어 요란스런 물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났나?"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는 하우돈의 손에는 아직도 눈을 치뜨고 있는 도대웅의 목이 들려 있었다.
거의 두 달에 걸친 대 추격전의 마지막이었다.
놈들의 생사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 거의 백여 장에 달하는 절벽이고 마지막 자신의 공격까지.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폐인이 될 것이다.
"가자!"
열 명. 오백의 인원이 출발했다가 제천맹으로 돌아가는 추격자들의 수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감정 따윈 없었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영광의 열매만 생각하는지 득의의 미소만이 머물고 있었다.
"풍ㆍ기ㆍ야."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음성이 석두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검게 변한 입술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대고 있는 것 같았다.
여풍기가 붙잡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을 것이다.
"깨어났소?"
"날 두고 그냥 가라. 아마 이곳으로 계속 가면 동사군도(東沙群島)가 나올 거다. 그곳에서 무공을 익혀라."
살아난다 해도 희망이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신보다는 여풍기에게 더 가능성이 있다.
오른팔이 없는 검사. 물론 몸을 치료하면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육칠 할 정도의 내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심검을 전개하지 못한다. 사 년이란 세월 속에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을 이곳 물속에다 버리고 나 혼자 가라고? 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속으로?"
"사 년의 시간밖에 없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다. 부탁한다. 그리고 형제들을 기억……."
"씨팔!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아가리 닥쳐!"
자신의 입 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눈에서 태양보다 뜨거운 분노가 흘러나왔다.
아홉 명의 광살조원들이 전부 죽었다. 누구 하나 망설이는 녀석들이 없었다. 자신들의 죽음에 누구 하나 원망하는 녀석들이 없었다.
더러운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노라고, 가장 행복한 세월이었노라고 말했다.
무공을 대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남겨두기 위해 저들이 먼저 간다고 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들도 기회가 생기면 살아날 것이니 죽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고 했다. 사 년 뒤…… 팽가에서 다시 만나자 했다.
"명문세가 출신이라며! 명문세가 출신이라서 이리 약한 거냐? 나는 노예 출신이었다. 너희 귀족 새끼들이 부리고 사는 노예였단 말이다.
노예보다 못한 놈이 귀족이라고 뻐기고 살았어! 살아보란 말이다. 귀족답게 살아보라고.
왜, 팔이 없으니 자신이 없냐? 그 여잔 어쩔 거냐? 귀족 놈이라고 헐레벌떡 달려든 그 여자는 어쩔 거냔 말이다."
"그만해라, 개새끼야!"
여풍기의 욕설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는지 석두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진담이오. 내 꿈이 뭐였는지 아쇼. 귀족 새끼 만나면 방금 그 말 꼭 하고 싶었소."
여풍기의 어깨에 지금도 남아 있는 경의 자국. 노예였던 전력을 숨기기 위해 칼로 도려버렸다. 흔히 노예였다가 탈출한 그런 자들은 불로 지지곤 하는데 너무 위험했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선 도려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공이 없어졌소.'
아직 석두에게 말하지 못했다. 내공을 끌어올려도 아무런 징후가 없다.
마지막에 당했던 하우돈의 일 장과, 살아남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탓인지 더 이상 내공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검이 아닌 장에 당한 상처였기에 지금껏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석두를 살려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이나 살았는데 사 년 뒤 팽가에 가는 사람이 없다면 먼저 간 새끼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 몇 대 패지, 그러냐."
"이곳이 물속만 아니면……. 갑시다."
의무감. 살아나는 게 기연이나 운이 아닌 의무가 되었다. 먼저 간 형제들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선 반드시 살아나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이라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두 사람이 끊임없이 발을 놀렸다. 보이는 건 망망대해뿐 아무것도 없다.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게다.
* * *
"너더냐, 만승. 오십 년의 한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나왔더냐."
핏빛 강기가 사방으로 날리고 있다. 남궁세우의 몸에서 쏟아지는 분노는 추격자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작렬해들었다.
지금 마차에 남아 있는 두 사람. 오구와 남궁세우밖에 없었다. 누가 말리고 누가 부추길 필요가 없다. 뒤쪽에 적이 나타나면 한 명씩 몸을 날려 떠났다.
마차에 앉아 있던 순서대로 동료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주고 죽음을 향했다. 주름 진 손을 잡았던 여덟 명의 아이들.
그들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았고 큰절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비가 되어버렸다. 자식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무능한 아비가 되어버렸다.
어느 한 아이가 내리면서 그랬다. 부모님을 찾아가라고. 그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들이 먼저 가는 거라 하였다.
울지 말라고 했다. 몇십 년만 있으면 다시 만날 터인데 그 세월이 뭐가 아프냐고, 그 정도의 시간이 뭐가 슬프냐고 했다.
긴 만남을 기다린다고, 다시 만날 때 웃으며 만나자고……. 그렇게 떠났다.
녀석들이 만들어준 시간이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만나라고 주고 간 생명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저 친구, 오십 년 전 형제였던 황보세가의 큰아들이었다. 자신에게 동생이 되었던 황보만승.
"오너라! 만승. 아직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보내주마. 더러운 운명의 사슬을 끊어주마."
남궁세우의 몸 상태도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거의 한 달여 이상을 쉬지도 못한 채 움직여왔다. 그리고 계속되는 싸움.
마차만이 유일한 휴식처였기에 계속해서 끌고 왔다.
운공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잠깐 쉴 수가 있는 곳이 마차였기에. 이제는 그 마차마저도 떠나야 한다.
오구에게 계속 가라는 눈빛을 보낸 남궁세우가 몸을 날렸다.
"천뢰지(天雷指)!"
쿠르릉!
허공으로 솟아오른 남궁세우의 열 손가락에서 뇌성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푸른 뇌전의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남궁세가의 독문지법인 천뢰지였다. 백여 명의 군웅들 뒤를 따르고 있는 강시들을 앞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강시들을 향해 발출한 지공이 아니었다. 강시를 조종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자, 언제나 군웅들 뒤에 숨어서 따라오고 있는 자를 향한 공격이었던 거였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자신이 공격목표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놈이 지시를 내렸는지 붉은 혈운에 휩싸인 강시들이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오고 있었다.
"크아앙!"
커다란 괴성을 내지르며 앞에 있는 군웅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공격을 가하며 다가들고 있었던 거였다.
"으아악!"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며 마차를 쫓던 군웅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에게서가 아니라 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었다.
남궁세우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의미였다. 오구를 쫓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먹혔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세우의 그런 배려가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구였다.
말고삐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힘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었다.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다.
사부라는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껏 죽어간 광풍대원들이 전부 자신에게 조금씩이나마 박투술을 배웠다.
그럼에도 가장 약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가장 약한 사람이었기에 마차를 모는 것 이외에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들의 죽음에 동참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내공만 있으면 무엇 할 것인가.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이 먹은 자신이 나서지 못하고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을 먼저 보내는 심정은 너무 참혹했다.
더 이상 마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세우가 있던 곳을 우회해서 다가온 자들이 달리던 말들의 목을 쳐버렸던 것이다.
앞쪽으로 처박히는 마차에서 몸을 솟구친 오구가 내려섬과 동시에 다시 땅바닥을 찍었다. 자신을 기다라고 있었다는 듯이 추격자들이 덮쳐왔다.
"좋다, 한번 가보자."
오구의 손과 발에 불그스레한 기운이 서렸다. 일휘나 소살우에 비하면 미약한 경지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백산이 심어준 뇌의 기운은 나올 생각도 없다. 오직 몸속에 잠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으로 착지한 오구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산과 일휘, 그리고 소살우. 세 사람에게 또 한 명의 사부가 되었던 오구. 그의 박투술이 사방으로 몰아친다.
오른발에서 나아가는 등퇴에 왼발의 편퇴가 이어지고, 주저앉아 회전하는 왼다리에 상대가 무너진다.
쓰러지는 놈의 몸을 잡아 왼쪽에서 들어오는 검을 막으며 그대로 돌진해든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놈을 향해 왼손 정권을 박아 넣는다.
오구의 몸이 움직이고 있는 공간은 사방 일 장. 그 좁은 공간에서 무수한 발길이, 쉼 없는 손길이 터진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지가 움직이면 적을 죽일 수 있다.
철목승의 절예라는 천마장법은 알고 있음에도 익히지 못했다. 자질이 딸리고 시간이 없었다.
무공을 익혔다는 것에, 젊어서 이루지 못했던 한을 풀었다는 사실에, 만족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행운이란 놈은 언제나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냥 거저 주는 행운은 없었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할 수만 있다면 익힐 수 있을 터인데.
몸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터인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일었다. 이 길로 감숙성까지 살아서 갔더라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제대로 무공이나 익힐 수 있을 것인가.
동생 같았던 녀석들을 전부 가슴에 묻고 어찌 남은 인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이들과 싸우다 죽으면 그것 또한 괜찮다 생각했다.
"크윽!"
옆구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곳을 뚫고 피 묻은 검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고!"
화가 났다. 자신은 이각도 채 버티지 못한다. 먼저 간 아이들은 전부 반 시진 이상을 버텨냈는데…… 겨우 이각이다.
이까짓 것을 버티고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다. 무작정 뒤쪽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선명하게 타격감이 느껴진다. 검을 찔러 넣고 득의해하는 놈의 얼굴이 함몰되는 느낌이리라.
빌어먹을 인생이다. 오십 년 세월 동안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생 삼았고 아들 삼았다. 그들에게 묻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리했다.
유일한 위안거리였는데…… 그 애들을 전부 저승으로 보냈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래서 살아남은들, 다시 산다 한들 어떻게 하라고……. 뭘 어쩌란 말인가.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고 사방이 돌아간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테다. 비틀거리고 다리에 힘이 없다 할지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일 테다.
먼저 간 아이들이 그랬을 터였다. 한 명의 적이라도 줄이기 위해 쉬지도 멈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 싶다.
더 빨리 더 힘 있게 움직여야 한다. 더 힘 있게…….
마음뿐이었다. 머릿속에서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득함.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다.
'이런 거야, 모든 아이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거야. 다행이야…….'
별다른 고통이 없었다. 분명 검이 관통했는데 그곳으로부터 고통이 다가오지 않았다.
이곳뿐만 아니라 중원의 하늘 아래에서 죽어간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저들을 구해라!"
언젠가 들어보았던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도 어르신인가? 아니지, 그 양반이 이곳에 있을 리가…….'
* * *
오구가 환청의 주인공이라 착각했던 팽무도는 달탄 땅에 진입해서도 몸을 멈추지 못하고 하나밖에 없는 팔로 연신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무당삼선 등으로부터 당한 내상이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는데도 지금 제대로 서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등에 기댄 채 달려드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 천무맹의 파문제자였던 강구두였다.
그의 입장도 오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가장 약하다는 이유로 지금껏 살아남아 있었다.
수차례 나서기를 원했으나 얼마나 버틸 거냐며, 오히려 적의 사기만 올려줄 거냐며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는 우는 것도 지쳤다. 다만 숨을 쉬고 있을 때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쳐야 하기에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
혈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사혈마강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차디찬 대지 위로 몸을 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다른 곳에 비해 두 사람을 쫓는 무림인들의 수효가 적은 것 같았다. 이곳이 달탄이기에 그런 모양이었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저 먼 대초원의 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뿌연 먼지 구름이 보이고 있었다.
명나라 황군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피에 절어 변색되기는 했지만 여태껏 금의위 복장 그대로였다.
그러한 이유로 달탄 땅에 들어서면서 이름을 날리고자 이들을 쫓았던 무림인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실제 제천맹의 인물들만 남았던 거였다.
그러나 제천맹의 인물들이 다 죽었다 해서 싸움이 끝난 게 아니다.
개개인의 능력이 광풍대원들과 비슷한 사혈마강시가 세 구나 남아 있다. 과거의 백살마대라 불렸던 오천맹의 후예들이.
"구두야, 좀 쉬어라."
"괜찮겠습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구두가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지금 팽무도의 몸 상태로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을 버리려 하고 있다.
아마 살아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무공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친구들은 내 손으로 보내야만 한다. 안 그런가, 제갈 아우!"
앞에 서 있는 검은 인물을 쳐다보는 팽무도의 얼굴에 아픔이 서렸다.
자신의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서 있는 강시는 제갈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재(武才)라 하였던 제갈용이었다.
제갈장령이 힘들 때면 언제나 찾아 불렀던 인물인 제갈용. 백살대의 삼인자였던 그도 사혈마강시로 변해서 적의 주구가 되어 있었다.
"알고 있는가! 자네가 지시를 받고 있는 그놈들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 수가 없으리라.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제갈용은 아직 삼십 대의 젊은이다. 세월을 보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온통 먹통인 머릿속과 검게 변한 몸뚱이를 가지고 원수의 지시를 이행하는 꼭두각시들인 것을…….
아버지에게 검을 받은 것도 모자라, 안식마저도 얻지 못하는 저주받은 인생인 것이다.
"미안하네, 용제! 자네 아버지도 우리가 해쳤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갈용의 아버지인 제갈장령은 백산의 손에 죽었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그의 아들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과 마주 서 있다.
"잘 가게!"
팽무도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솟아나오며 무서운 속도로 세 구의 강시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아앙!"
팽무도가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제갈용을 비롯한 세 구의 강시도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혈극폭!"
팽무도의 입에서 처절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손에 있던 도가 허공을 날았다. 팽가의 최고 보물인 혼원벽력도가 팽무도의 염원을 실었다.
서럽고 더러운 인생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염원. 혼원벽력도가 사방을 유영하며 강시의 몸을 잘라가고 있다.
처음엔 앞으로 뻗어나온 팔을 자르고 그 다음엔 다리를,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냄으로 해서 세 구의 강시를 전부 날려버렸다.
그러나 팽무도도 무사하지 못했다.
입가로 연신 피를 쏟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번 한 번에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이제는 더 이상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진원지기까지 다 써야 함이나 마지막 일을 위해서 남겨두었다. 아니, 아이들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다. 한 가지 일을 더 하라며…….
"구두야, 저기 보이는 그늘에서 좀 쉬자."
"네, 어르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강구두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며 팽무도가 가리킨 곳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커억!"
어른 몸통만 한 아름드리 거목이 잘려나가며 그곳으로부터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강시를 조종하던 인물이었다.
그곳에 숨어서 두 사람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던 자가 강구두의 마지막 일격에 몸이 잘리며 한순간에 이승을 떠나버린 거였다.
"우웩!"
"쿡쿡! 이젠 우리 둘 다 공평해졌구나. 아쉽지 않느냐."
"다시 뇌룡현 시절로 돌아간 것뿐이지 않습니까."
일 년간의 긴 꿈일 뿐이었다. 그 꿈속에서 많은 걸 해결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한을 품고도 살았는데 지금은 모두 풀지 않았는가.
비록 새로운 한이 남아 있다지만 그건 다른 아이들에게 맡길 참이다. 자신들로서는 더 이상 한을 풀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내공전패와 그리고 목숨.
팽무도와 강구두가 이곳 달탄에서 얻은 것이었다.
"어르신, 가시죠. 먼저 가서 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죠."
"그래, 그곳에서 기다려야지. 사 년 뒤를……. 그때 산이 녀석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산이 녀석도……."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함이고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자 함이다.
* * *
팽무도와 강구두가 기다리고자 하는 백산 일행은 여전히 마차를 타고 있었고, 계속해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말대로 정말 관을 짰던 나무가 썩었던지 뚜껑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투자를 하던 다섯 자리도 비어 있었다. 덕대 거치웅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쌍칼 종천기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도치 양남천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칼날 도염천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송곳 추기영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새끼들 목욕 한 번도 안 했나보오, 형님! 냄새가 지독하오."
관 속에 수북하니 쌓여 있던 종이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모사가 백산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관 속을 쳐다보며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소운의 품에 안겨 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백산을 보며 하는 소리였다.
지금은 백산도 나와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 아닌, 소운이 백산을 꺼냈다. 의식이 없어도 눈을 뜨고 있으니 보라는 것이었다.
사랑했던 형제들이 떠나는 장면을 쳐다봐야 한다고. 마지막 인사는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붉은 광망을 토해내는 두 눈과 말아 쥔 두 주먹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떠나간 형제들이 남긴 유품인 이름자 써진 종이들, 그 종이들을 그러쥔 모사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남겼다.
"그러게 알아먹지도 못하는 것들은 왜 봐, 새끼야."
광견조원들은 지금까지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처음 백산에게 듣고 석두에게도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자기 이름 기억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다른 이들의 이름은 신경 쓰지 못했다.
여전히 검은 것은 글씨고 흰 것은 종이일 뿐.
"섯다 너 이름은 안다, 새끼야. 장대근이라며? 물건 큰놈에게 쓰는 이름."
그러나 이름만 알 뿐 써진 종이에서 골라내라 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개새끼."
"섯다야, 우리 글 배울까?"
"그것도 괜찮지. 여자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문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차 밖을 흘끗 쳐다보던 섯다가 관 뚜껑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며 모사의 말을 받았다.
"걸어!"
통 속에 주사위를 넣어서 힘차게 돌리며 두 사람을 쳐다본다. 이제 투자를 할 사람은 전부 세 사람밖에 없다. 소살우, 섯다, 모사. 칠(七)의 행운을 거머쥘 사람을 뽑는 놀이.
"이번엔 내가 물주를 하마."
"무슨 소리요, 형님이 무슨 돈이 있다고."
지금껏 한쪽 구석에 있던 장한수가 앞으로 나서자 세 사람이 펄쩍 뛰었다.
"이것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의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며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옥팔찌, 이십 년 전에 잃었다가 얼마 전 찾았던 사랑의 정표.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화옥에게 주었던 유일한 선물을 꺼내들었다. 그 옥팔찌로 노름 돈을 대신하려는 거였다.
"우리에겐 거슬러줄 만한 돈이 없소."
시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옥팔찌에 손때마저 덕지덕지 묻어서 원래의 색도 보이지 않는 팔찌에 대고, 남겨줄 돈이 없어서 못 끼워주겠단다.
"그 주머니 하나와 같은 값으로 치기로 하지."
전부 열세 개의 주머니. 광견조원들과 백산의 생명이 담긴 주머니들이었다.
비록 독령곡에서 무인들에게 강탈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삶이, 그들의 꿈이 들어 있는 주머니들이었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건인 것이다.
"어떻게 할래."
"하고 싶다는데 끼워주지, 뭐."
서로를 쳐다보며 의견을 나누던 세 사람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형님. 단 속임수 쓰기 없기요."
"고맙다. 나도 돈 좀 벌어볼까."
주사위가 들어 있는 통을 잡으며 장한수가 관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그리 아쉽지만은 않은 삶이다. 미치도록 사랑도 해보았고, 한때지만 이름도 얻었었다.
타락도 해보았고 좌절도 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이들을 만나면서 더욱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이 이들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 길었던 인생도 아니지만 이들이 살다간 삶보다는 길었고 행복한 삶이었다.
"들어봐라. 나도 얼마 살지 않았지만, 산다는 것은 말이다, 꿈을 이루는 게 아니고 꿈을 꾸는 거라 생각한다.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꿈을 이루어버린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성취해버린 사람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꿈꿀 것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 꿈 때문에 울고 꿈 때문에 웃고, 꿈 때문에 기뻐하고 꿈 때문에 슬퍼하는 그런 것이 인생인 것이다.
"오늘 운수 대통했구나."
칠, 두 개의 주사위가 나타낸 숫자의 합이다. 그것도 가장 좋다는 일과 육, 가장 낮은 숫자와 가장 높은 숫자가 나왔을 때의 칠이 최고의 패인 것이다.
"여기 주머니는 살우 네가 가지고, 저곳에 있는 이름 적힌 종이는 섯다와 모사가 가져라."
장한수가 자신이 딴 주머니를 전부 소살우에게, 그리고 먼저 간 광견조원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섯다와 모사에게 주었다.
"사 년 뒤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줘라. 중원 각처에."
"형님!"
소살우와 섯다가 장한수를 쳐다보았다. 절대 죽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살아서 형제들의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의무를 지우고 있다.
"잠시 후에 흩어져라. 살우와 소운이는 백산을 데리고 대월산으로 가라."
일행은 어느새 대월산 언저리에 도착해 있었다. 뇌룡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산. 떠날 땐 일 년이 걸렸는데 돌아올 땐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소운아."
"네, 아주버님."
소운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수 아주버님이다. 모든 대원들이 한 명씩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때마다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도 되었건만 어디서 이 많은 게 다 나오는지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말이다, 모든 걸 주는 것이다.
저 녀석을 원망하지 말아라. 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붉은 눈을 하고 세상을 떠도느니 그 편이 더 나았을 거란 말이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왜 모르겠는가. 죽으려 했기에 자신 옆에 있는 것이다.
그가 만일 복수를 생각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붉은 눈과 붉은 비도를 휘두르며 피를 찾아 세상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원치 않았기에, 언니들도 바라지 않았기에 깨어나지 않는 것이다.
깨어난다 해도 가족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자신을 해칠 것을 알기에 심연(深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 전부 사 년 뒤에나 보자구나."
"형님, 이거."
나가려는 장한수를 불러 세운 소살우가 품속에 있던 것을 내밀었다. 광천뢰. 지금껏 모든 조원들이 하나씩 들고 나갔던 광천뢰를 장한수에게도 내밀고 있었다.
"고맙다."
광천뢰를 받아든 장한수가 멀어지는 마차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부디 저들만이라도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막아낸다. 저 녀석들을 살리기 위해 전부 막는다."
아직도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는 이백여 명의 무림인들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원하는 사람들인지, 무얼 바라는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죽여야 한다. 가능하다면 전부…….
온몸에 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젠 진원지기마저도 남길 필요가 없다. 전부 뽑아서, 전부 끌어올려서 써야 할 뿐이다.
'화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한수가 갈 것이오.'
"섬전쾌!"
이백여 명의 앞길을 막아선 장한수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담섬쾌영검법의 일 초인 섬전쾌가 일 섬을 그리고, 이 초인 월광절이 달빛을 갈랐다. 삼 초인 일양파가 태양을 쪼개고, 사 초인 무변극애가 사방으로 퍼졌다.
숨 돌릴 틈도 없다. 네 개의 초식이 한 초식인 양,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앞에서 다가오던 적이 쓰러지고 그 뒤에 있는 자들이 잘린다. 다음에 있는 자들이 쪼개지고 그 다음에 있는 자들이 부서진다.
내 팔이 잘린 들 어떠하리. 내 몸이 잘린들 어떠하리. 내 다리가 잘린들 어떠하리.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는 장한수의 얼굴에 환희의 격정이 어렸다. 강호상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신가의 무공도, 고금오천무도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누구 하나 전진하지 못했다. 등에 칼을 맞으면서도 마차를 쫓아가려는 자를 죽이고 팔이 잘리면서도 먼저 가는 자를 베어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섬전쾌에서 시작되어 무변극애로 끝나던 장한수의 연속동작이 어느 순간 삼 초인 일양파로 끝나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원광절까지만 이어지고 있었다.
"섬전쾌! 섬전쾌!"
더 이상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반 시진이 조금 넘었다. 동생들보다 더 견딘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이미 녀석들도 갈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살우가 주었던 광천뢰를 가만히 잡았다. 적을 죽이라 준 게 아니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면, 버티기 힘들어지면 자폭하라고 준 것이었다.
"으! 하하하!"
미련도, 회한도 없는 통쾌한 웃음소리였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지도 못했고 위명도 남기지 못했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의 마지막 웃음소리였다.
과앙!
장한수의 몸에 있던 광천뢰가 터지며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의 몸이 터져 올랐다. 아울러 그들이 갖고자 했던 영광도…….
"쫓아라!"
같이 왔던 동료들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아 있는 무림들은 자신들만의 영광을 위해 또다시 몸을 날렸다.
이미 죽음이란 말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는지 자신의 몸에 묻어 있는 동료들의 살점을 그냥 가볍게 털어낸다.
마차를 따라 모든 무림인들이 떠나고, 대월산 한구석에서 두 사람이 몸을 드러냈다. 백산을 들쳐업고 있는 소살우와 소운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며 떠났던 뇌룡현. 한만 가지고 떠나자 했었는데 가져가지 못한 한이 남아 있었는지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열두 명의 광견조원과 백산, 그리고 세 사람의 형수들이 함께 길을 올랐는데 셋 만이 남았다.
마차를 끌고 운남의 밀림 속으로 향한 섯다와 모사, 그리고 이사의 생사는 사 년 뒤에나 알게 될 것이다.
사 년 뒤에나.
그전에는 누구도 찾지 않을 것이다. 사 년 뒤에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그냥 죽으면 그뿐…….
"갑시다, 형수님."
다시 뇌산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사 년을 보내고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소살우와 백산, 그리고 소운이 과거 혈가의 후예가 잠들었던 용미폭포로 길을 잡을 때
그들의 사부이자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팽무도와 남궁세우는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태어났던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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