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달콤한 달랏 1
여기가 베트남인가 싶다. 작은 에펠탑 같은 느낌. 달랏 시내
오늘 어디로 향할 것인가. 석박사님이 알아서 챙겨 줄 테지만 꽤 궁금하다. 나트랑은 우리가 알아서 가야하기에 갈 곳을 미리 점찍어 두었지만 달랏은 전적으로 석박사님 몫으로 남겨 두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읽은 ‘페스트와 콜레라’ 의 여파도 무시는 못한다. 나는 예르생이 올랐다는 랑비앙 산에 대해 미리 살펴보았었다. 호치민에서 만난 전 선생님도 가봤다는 랑비앙 산, 그들은 랑비앙 정상(2169미터)에서 하얀 눈을 보았다는 것을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우리에게는 흔한 눈이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참 요즘은 편리한 세상이다. 누군가 랑비앙 산 전망대(해발 1950미터)를 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남겨 놓았다.
그러니까 그는 달랏 시내에서 오토바이 기사를 만나 랑비앙까지 100,000동(많은 돈 같지만 5천원)으로 가기로 했고 북쪽으로 약 12킬로를 달려 입구에 도착했으며 입장료( 20,000동)을 내고 들어가 거기서부터는 지프(300,000동)를 타고 전망대로 향한 것인데 지프를 타고 전망대에 가는 동안을 영상으로 담아 인터넷에 남겨둔 것이다. 차 엔진소리까지 그대로 나다보니 마치 내가 오르는 기분이 든다. 양 옆에 나무들은 개발 중에 심은 듯 큰 아름드리 나무도 아니고 가는 내내 볼 것은 없었다. 전망대는 일종의 평원지대였다. 그리고 다 올라 보이는 달랏 시내 전경과 그 위쪽으로 보이는 랑비앙의 두 봉우리. 솔직히 그들에게는 눈의 전설이라지만 조금은 실망했다.
이국땅의 묘미라는 특혜만 빼면 우리의 산과 견줄 정도는 아니다 싶었다. 우리의 산은 산 위에 억새밭을 이룬 곳은 대개가 넓은 평원이 있다. 영남알프스를 가을에 찾으면 억새가 광활한 초원지대에 황금물결을 이룬다. 신불산과 영취산의 중간인 신불평원,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인 간월고개, 천황산, 재약산의 사자평의 억새는 한국의 어떤 산에서 보는 억새보다 더욱 아름답고 운치 있다. 그곳이 아니더라도 화왕산도 그렇고 명성산도 또 절묘한 환상을 이룬다. 왜 억새밭 곁에는 습지대가 존재하는 걸까. 나는 오늘 일정에서 랑비앙은 배제되기를 은근히 바랬다.
8시 30분 모이는 시각, 오늘은 석 박사님 사모님까지 동참을 해 한국인은 9명 그리고 달랏이 고향이라는 젊은 안내자 1명, 기사 1명하여 모두 11명이 떠나는 달랏 여행이다. 벤즈는 그런데 남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랑비앙은 아니다. 남으로 향하는 차, 남쪽인데도 예의 생각과 달리 차는 산을 오른다. 그렇다면 달랏은 예전 사방이 둘러쌓인 분지였다는 말이다. 덕분에 달랏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은 에펠탑, 뾰족 솟은 성당, 높이 선 호텔, 전형 적 유럽풍 붉은 지붕이 한데 어우러져 아주 이색적인 프랑스 닮은 베트남의 한 정경을 선사한다. 나는 이쯤이면 예르생이 만족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는 호수 주변에 해변풍의 빌라, 언덕 편에 사부아식 통나무집, 톱니바퀴로 달랏으로 오르는 기차를 말했었다.
달랏은 정말 예쁜 도시다. 나는 구글 지도를 펼치고 달랏의 풍수지리를 훑어보았다. 묘를 조성할 때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것을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그런 자리는 후손이 복록(福祿)을 누리고 행복해진다고 본다. 반대로 물을 등지고 산을 바라보면 '배수진(背水陣)'의 모습을 띄게 되는데 이 경우 땅의 기운을 제대로 타기 어려워 원인을 모르게 삶이 고되고 불행해진다고 풍수지리에서는 말한다. 건물 뒤쪽이 산비탈이거나 산 구릉이면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형으로서 이런 터에 지어진 건물은 배산임수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본다. 따라서 배수진을 쳤다면 재물을 등진 건물이기 때문에 재물 운이 나쁘거나 흉한 것으로 말들을 한다.
그런 축면에서 달랏을 말하자면 부귀영화를 누릴 땅이다. 뒤로 랑비앙이라는 큰 산이 있으며 남으로는 또 다른 큰 호수, 투엔람 호수(Tuyen Lam Lake: 주소 : Phường 4 Dalat)가 있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 바로 그 호수다. 강과 시냇물, 삼림에 둘러싸였으며 호수의 아름다움으로 숲속의 비취 호수로 불린다는 곳이다. 지도상에는 투엔람 주변에 리조트들이 제법 많은 곳으로 나와 있다. 6킬로 달렸을까. 호수가 나온다. 호수를 끼고 도는 길, 우리의 방문 시작은 호수 주변에 위치한 Clay Village(or Clay Tunnel) 이다. 말 그대로 진흙덩어리로 볼 구경을 만들었다는 곳이다.
오늘은 일요일, 달랏 아이들이 총 동원 된 듯, 아이들 천지다. 안 봐도 우리들의 꿈돌이 동산이다 싶었다. 예닐곱 아이들, 그들을 보자 베이비부머인 나로서 다시 떠오른 이야기, 앞선 글에서 <베트남의 경우 모든 전쟁이 종식된 1979년 이후 출생한 세대가 전후세대가 된다. 당연히 1980년대 생과 1990년대 생이 인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현재 베트남은 전체 인구 9444만 명으로 세계 14위다. 평균연령은 30.8세, 15~34세가 전체의 35%로 전후세대인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바로 그들 베이비부머가 지금 열심히 활동 중인 것이다. 나도 그 시절 그런 것처럼. 달랏에는 북베트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했다고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전쟁이 낳은 결과다.
역시 Clay Village는 내 생각과 똑같은 이미지를 전하고 있었다. 내가 느낀 대로 쓰자면 단단한 돌 닮은 진흙으로 빚은 형상들로 꾸며진 동네, 태고 코끼리와 원숭이와 지내던 아무 탈 없이 지내던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여 기차도 만들고 차도 만들더니 탱크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어 전쟁을 하고는 어렵게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반성의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맨 끝에 위치한 예수의 상이 평화와 구원을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진흙 형상은 끝이 나는데 실제 어린이 동산 맨 끝에는 화장실이 있다. 나는 오줌을 싸며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맨 끝이 아니라 결국 인간은 똥과 오줌과 같이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된다는 의미로 화장실이 맨 끝에 달라붙어 있는 거라고 말을 바꾸었다.
돌아서는 길, 이곳의 테마에 대해 아는지, 그리고 내 생각은 이렇다 말을 하였는데 탑승 전원은 무반응이다. 흥이 안 난다. 아무래도 다음 여행부터는 젊은 층하고 어울려야 할까보다. 내 자랑을 조금 하자면 패키지여행 때 내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 떼 몰리듯 몰렸었다. 나는 여행을 가기 전 역사나 그들에 대해 열심히 탐색을 한다. 그리고 떠드는 통에 어떤 때는 아예 가이드가 ‘역사 박사님 여기에 대해 제 대신 설명 좀 해 주시죠.’ 하고 떠민 적도 있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이나 군것질을 굳이 내가 살 필요가 없었다. 이는 반 농담이고 여행의 반은 즐기는 거고 또 반에 반은 먹는 거고 또 반에 반이 보는 거다. 즐기기 위해서는 배려가 최우선임에 틀림이 없다.
그 다음 택한 곳은 반대 펀 호수 가에 위치한 Truc Lam Chua(竹林寺)라 하는 절이다. 호수에 자리한 고즈넉한 풍경 , 우리나라 절이 모두 명당이듯 이곳도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언제 생긴 절인지는 모르겠지만 입구의 나무 둘레가 예사롭지 않다. 역시 이곳은 봄의 향기가 그득하다. 양귀비와 사르비아를 보았고 특히 예르생이 말한 수국은 넘쳐난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자 대웅전이 나왔다. 이곳 절들은 처마 끝이 제비 하늘로 치솟듯 날렵하게 치어 오른다. 곳에서 바라보는 호수 정경, 사원에서 호수까지 길이 연결되어 있다는데 일행과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짧지 싶다. 어제 호치민에 <지악람 사원>(Chua Giac Lam,)을 들를 때 관광가이드는 분명 오늘은 절에 행사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라고 했었다.
그 말이 맞는 말인지 엄청 사람들이 많다. 꼭 이런 날에는 절에서 밥도 공짜로 주지 않는가. 나는 절 뒤편으로 향했다. 스님이 뭔가를 퍼주는데 줄이 장사진을 이룬다. 나도 그들과 같이 섰다. 내 앞에선 호주부부,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양손을 제치며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합장을 하고 나도 받아들었다. 죽이 달착지근하고 맛 나는데 씹히는 게 연밥 같기도 하다. 생수 통을 달아 놓은 곳에서 물까지 마셨다. 우리 절에는 늘 물이 졸졸 나오는데 이곳은 대신 생수통이 역할을 한다. 보시를 못한 게 나중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내 금강심 보살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竹林 이라더니 대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담양에 죽림재 죽림사와는 전혀 다르다. 찜찜한 竹林, 책자에는 1993년에 건설된 사원이지만 달랏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써 있을 뿐 대나무에 대한 이이야기는 언급 자체가 없다. 그 사이 대나무가 추워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중 집에 와 이것저것 뒤져 봤다. 내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사실에 연유하는 것 같다. 베트남 불교의 본산 옌뜨(YEN TU) 국립공원을 아시는지. 하롱베이와 하노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나도 말만 들었지 가보지는 않았다.
‘백년 불공을 드려도 옌뜨에 가보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유명한 산이다. 외세의 침략에 맞선 3명의 왕이 부처가 되어 산을 지킨다는 전설도 함께한다. 10여 개의 사찰과 수백 개의 사리탑이 남아 있다는 곳이다.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수많은 인파가 소원을 빌러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고 봄마다 불교축제가 열리고 이때 수 백 만 명이 찾는다. 곳에는 천년고찰 화옌(HOA YEN)이 있다. 그런데 이 사찰은 베트남 선왕조 시대 인종이 침략해온 몽고를 두 차례(1285,1287) 물리치고 다음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Truc Lam (竹林)을 세워 불교에 정진하여 베트남 불교의 본산으로 자리한다고 글에 나와 있다.
그렇다면 Truc Lam (竹林)은 달랏의 대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주 유명한 선사의 뜻을 기리거나 같은 불교의 본산의 교리를 행하는 말사로 써 받아들이는 게 맞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얻은 자료는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구름 속의 외딴집 틱낫한 지음 | 강경화 옮김) 이 책은 후예 쩐공주(경보공주)와 그의 아버지인 쩐 낭 퉁(죽림선사)이라는 두 역사 상 실재했던 두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탁닛한 스님이 불교적인 색채를 더해서 만든 것(소설)이다. 일설에 의하면 탁닛한 스님이 이 죽림선사가 세운 선종의 후계자라고 한다고 한다.
이 책의 주요한 등장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죽림선사(1258~1308, 재위: 1278-1293) – 이름은 Tran Kham(陳昑), 쩐 낭 퉁(Tran Nhan Tong, 陳仁宗), 진(Tran)왕조의 3대왕
- 경보공주(1288~), 향화(香花)스님 - Huyen Tran(玄珍)공주
- 안통 왕(재위: 1293-1314) – 陳 英宗. 경보공주의 오빠. 쩐(陳)왕조의 4대 왕.
- 하리지트 왕(재위: 1285?~1307) – 이름은 Che Man, 한자론 제민(制旻), 즉 자야 신하바르만3세 Jaya Sinhavarman III, 참파 後第十二王朝의 왕
베트남의 13~14세기의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그 때 베트남은 위쪽지방의 다이 비에트와 아래 쪽의 참파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또 중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공주와 왕 또는 왕자간의 정략결혼이 주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역사상 살펴볼 때, 고려 말기 원나라 복속기를 포함해서, 이런 정략적 결혼은 비극적으로 끝난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볼 때, 경보공주의 이야기가 꼭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구성상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의 근간이 되는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제법 흥미가 있다. 글을 읽어보자.
아인 똥(Anh Tong, 英宗, 1293-1314) 때의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북부 후에(Hue, 한자로는 化 또는 順化)평야에 있는 오(烏)와 리(里)의 두 주(州)를 참파(占婆, 또는 邑, 占城)로 부터 획득한 일이다. 상황(上皇) 년 똥(Nhan Tong, 仁宗, 1278-1293)은 1301년 참파를 방문하여 국빈의 대접을 받고 귀국하면서 그 왕 제민(制旻, Che Man, 1285?~1307 즉 자야 신하바르만3세 Jaya Sinhavarman III, 즉 이전의 하라짙왕자)에게 아인 똥의 자매인 후옌 쩐(Huyen Tran, 玄珍)공주를 왕비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베트남(즉 다이 비에트)에 비하여 약체였던 참파의 왕으로서는 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이 커다란 영광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중국식 개념을 받아들여 이웃의 소국들을 야만으로 간주하고 있던 쩐왕조의 관리들은 이를 불가하다고 생각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제민은 쩐왕조 내부의 이러한 분위기를 이해하고 많은 예물을 보냄과 동시에 오와 리 두 주의 할양을 조건으로 혼인을 간청하여 아인 똥의 승낙을 얻었다. 1306년 공주가 참파로 출가하자 당시 문인들은 구어시(口語詩)로 공주의 하가(下稼)를 중국의 한나라 때 흉노(匈奴)에 보내진 왕소군(王昭君)의 예에 비유하여 풍자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이듬해 쩐왕조는 약속에 따라 두 주를 할양받아 자신의 행정구역에 편입하니 베트남의 영토는 처음으로 오늘의 후에 부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결혼 일 년 후 제민이 죽자 공주는 인도의 수티(Suttee)를 받아들인 참파의 풍습에 의해 분신하여 왕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아인 똥은 곧 조문을 구실로 사신을 보내 책략을 꾸며 가지고 공주를 구출해 왔다. 제민의 후계자인 제지(制至, Jaya Sinhavarman IV)는 이에 분개하여 베트남의 남변을 자주 침범하였다. 아인 똥은 1312년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참파의 서울 비자야를 점령하고 그 왕을 포로로 하였다. 이리하여 참파는 쩐왕조의 권위에 복속하였지만, 양국 사이의 적의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사망에 일 년 앞서 1293년에 년 똥은 아들인 아인 똥에게 양위를 하고 1298년엔 출가하여 불도에 전념하면서 다른 두 승려와 함께 죽림파(Truc Lam School of Zen, 竹林派)라는 새로운 선종의 종파를 개설하였다.
위의 내용은 실제 베트남사에 나오는 베트남(그땐 다이 비에트, 즉 한자로 大越)의 쩐 왕조( 陳王朝, 1225~1400)의 3대왕 때인 쩐 난통(陳仁宗)과 그의 딸인 후예공주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 책의 전반부의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이겠지만 후반부 경보공주가 참파왕국에서 탈출하여 어찌되었다는 내용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야사로 탈색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를 탁닛한 스님이 경보공주가 스님이 되어 아버지의 길을 밟는 것으로 각색한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베트남에선 이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후예 쩐 공주( 玄珍 陳 公主)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가 베트남의 역사, 문학, 시, 음악 등에 다양한 형태로 일반에게 구전되고 회자되면서 한편으로 다양하게 발전되게 되었다.
일설에 경보공주는 그를 구해준 쩐 칵 충(Tran Khac Chung)장군과 사랑에 빠져 함께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스님이 쓴 책인지라 공주가 출가해서 향화스님이 되었다고 쓴 것 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나라든 존재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등 얼마든지 찾을 수 잇다. 내가 보기엔 거의 유사한 닮은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일 것이다. 당나라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던 토번 왕국은 수시로 당의 변경을 침략하여 당나라 왕실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하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당 태종은 서기 641년 문성공주를 토번 왕 송첸캄포에게 출가시키는데 이때 문성공주와 함께 불교, 그리고 차가 토번 왕국으로 전파되었다.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불모의 초원에서 차는 유목민들이 비타민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나라 이후 중원의 제국들은 북방 유목민족과 싸우기 위해 티베트의 강인한 말이 반드시 필요했고 토번왕국은 생존을 위해 차를 필요로 했다. 차와 말의 교역(易茶易馬은) 급속히 번성했고 수 천 년을 이어 오면서 문명과 문명을 잇는 길이 만들어 졌다. 그러니까 생명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차마고도는 생긴 것이다. 실크로드보다 200년가량 앞서 형성되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험난하고, 가장 아름다운 길에는 바로 문성공주가 있다.
절을 나와 맞은편을 보니 산중턱에 보이는 케이블카 관광. 석 박사는 이를 무시하고 근처 어딘가로 또 향하고 있다. 다음은 또 어디일까. 날은 어제와 다르게 화창하고 하늘은 고원지대 특유의 쪽빛이다. 굳이 케이블카 타고 오르지 않아도 하늘 정원인 이곳이다. 싱그러운 바람은 바로 랑비앙에서 불어오는 산산함이 아니겠는가. 채색 곱게 물든 산어귀, 바로 이래서 이곳을 영원한 봄의 도시라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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